그 단편영화의 제목은 〈swarm〉이고, 한국어 제목은 없다. 스웜? 스웜이 뭐야? 누군가가 물었을 테고 세린이 뭐라고 대답했을 텐데 그 장면은 기억 속에 없다. 지금이라면 세린을 앉혀놓고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을 텐데.
   -이 아무 생각 없는 독립영화 감독아. 영화를 찍었으면 배급이랑 마케팅까지 생각을 해야지. 네가 소피아 코폴라냐? 그레타 거윅이냐고? 한국 관객들이 스웜이 뭔지 알 게 뭐야. 설명을 해줘야 될 거 아니야. 직관적으로 딱 와 닿게끔. 너무 불친절해. 네가 이래서 영화제에 못 간 거야. 감각이 없잖아 감각이.
   그렇지만 그때는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세린이 스웜, 이라고 했으면 그건 그냥 스웜, 이었다. 그 영화는 그 제목에 어울렸고, 그 제목은 그 영화에 어울렸다. 2004년이었다. 그리고 세린은 그냥 그런 애였다. 있어 보이려는 의도에서든, 혹은 귀찮아서든 ‘flip’ ‘juke’ ‘fike’ 같은 뜻 모를 영어 단어들을 블로그 포스트 제목으로 쓰는 애(그것도 꼭 소문자로만 썼다). 어쩌면 그건 겉멋이거나 자기방어였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유실도, 다른 누구도 그것이 겉멋이거나 자기방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 영화를 지금이라면 뭐라고 제목 붙일 수 있을까? ‘벌떼’? ‘벌집 인간’? ‘꿀벌 소녀’?
   영화 홍보팀도 카피라이터도 아닌 데다 노화로 인해 언어 감각의 퇴보까지 경험 중인 유실은, ‘꽃무늬 셔츠 소년과 벌집 소녀의 해피엔딩’, ‘댄싱 투게더’, ‘친구가 될 수 있어요’ 같은 몇 개의 좀 더 별로인 제목을 떠올리고는, 와, 정말 너무 별론데? 생각한다. 언어로 밥벌이 같은 걸 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가? 몇 초 뒤 유실은, 그것들이 완전히 불가능한 제목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소년. 해피엔딩. 댄싱, 투게더. 친구. 그런 말들은 그 영화의 제목이 될 수 없다. 진부하고 센스 없고 유치한 단어들이어서는 아니다. 다른 이유로 불가능하다. 이런 생각을 하면 어디선가 쇠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 오래된 칼이나 가위에서 나는 냄새.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뛰어놀다 벤치에 앉아 무릎에 코를 대면 거기서 맡아지던, 사실은 피 냄새인 그 냄새. 몸이 안쪽에서부터 쇠로 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유실은 생각한다.
   아무튼.
   004년에 그 영화에 어울리는 제목은 스웜, 밖에 없었다.

*

   유실과 친구들이 그토록 칭찬과 감탄을 보냈는데도 세린은 어째선지 그 영화를 어느 영화제에도 출품하지 않았고, 다른 어떤 매체에도 공개하지 않았다. 따라서 〈swarm〉은 어떤 입소문도 타지 않은 채 아는 사람들만 아는 무명의 천재 감독 세린의 데뷔작으로, 흙 속에 묻힌 보석으로 남아 있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정신없이 키우느라 세린도 다른 친구들도 만나지 못하게 되면서, 유실은 아주 가끔 아무런 계기도 없이 세린의 그 영화를 떠올렸다. 그것이 끝내 발견되지 않은 채 시간 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것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것을 유튜브에서 찾아볼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유실 자신의 삶이 도대체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심정, 아침부터 밤까지 끊임없이 숨이 차 허덕거리는 느낌, 언어로 바꿔낼 수 없는 상실감 들로 가득 차 있어서였다.
   딸 민송이 신생아였을 때 쓰던 원목 아기침대를 아이가 자라 열 살이 된 지금까지 유실은 그대로 두었다. 그것을 처분할 심적 여유도 에너지도 10년이 되도록 만들어낼 수가 없어서였다기보다는, 그냥 정신을 차려 보니 10년이 지나 있었다. 유실은 마흔네 살이었다.
   어느 카페를 빌려 했던 그 영화의 시사회가 기억날 때면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 영화가, 그날의 기억이 마치 유실 자신이 지난 생에서 받은 오스카 트로피처럼 느껴졌다. 세린이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좋을 텐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러면 좋을 텐데, 유실은 생각하곤 했다.
   아니 어쩌면.
   세린은 알려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는지도 모른다. 알려져야 마땅한데 알려지지 않은 사람,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진짜 기회를 포기할지언정 필사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 아무것도 아닌 채 광야에 묻힌 숨은 고수로 살면서, 간혹 알아봐주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겸손한 미소를 짓는 상상. 그게 세린을 버틸 수 있게 한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미친 게 아니냐는 소리를 듣겠지만 그때는 그런 종류의 여유와 포즈가 통용되는 시대였던 것이다.
   아무튼 〈swarm〉 생각을 할 때 유실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했다. 2004년, 그 영화에 제목을 그렇게 붙인 세린도 아마 몰랐을 것이다. ‘swarm’에는 ‘군중’이라는 뜻도 있었다. 일들이 그렇게 흘러가고 난 뒤에 유실은 종종 그 뜻을 떠올렸고 그때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위의 공기가 몇 도쯤 낮아지는 듯한 서늘함을 느끼곤 했다. 그 영화는 그렇게 많은 공격을 받지는 않았다. 유실이 예상한 것보다는 말이다. 2017년, 영화가 올라가 있던 유튜브 계정에 비난하는 댓글이 달리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계정 자체가 삭제되었던 것이다.
   그 뒤로 〈swarm〉을 볼 수 있는 온라인 링크는 딱 한 군데 남아 있었다. 세린의 블로그였다.

*

   유실은 식탁 앞에 앉아 있다. 남편은 집에 없고, 민송은 언제나처럼 자기 방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거실에 틀어놓은 TV에서는 요리 ASMR 영상이 나오는 중이다. 아마도 요리를 업으로 했던 사람이 만든 것 같지만 레시피도 불필요한 멘트도 전혀 없이 혼자서 야채를 썰고 보글보글 끓이고 자글자글 튀기는 광경과 소리만 끊임없이 이어질 뿐인, 철저히 자기만족을 위한 것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전시하고 자랑하는 영상이다. 요리하는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처럼 불필요한 것은 나오지 않고 오직 손과 팔의 일부만 나오는 그 영상은 대체로 식재료를 배송 받아 박스를 여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송이버섯, 탈리아텔레 파스타, 생크림, 깔끔하게 포장된 한우 안심, 작은 병에 담긴 머스터드. 식재료가 화면에 등장할 때마다 그것을 독점으로 판매하는 쇼핑몰의 이름이 자막으로 뜬다. 잔잔한 꽃무늬 접시는 어디어디 제품이라는 정보도 나온다. 그것을 보는 동안 유실은 생각한다. 저것들, 저런 것들, 바로 저런 것들 때문에…… 저 밑도 끝도 없는 예쁘장한 것들, 깨끗한 도마와 고급 칼, 세련된 것들, 좋은 상품명들, 저것들이 우리를, 우리가 저것들을…… 그러나 숨이 막힌다는 생각은 잠깐이고, 유실은 곧 송이버섯과 생크림과 탈리아텔레를 주문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다른 사람도 해주지 않은 말, 세상에 너 혼자는 아니야, 라는 메시지를 그 영상은 유실에게 준다. 다정한 엄마처럼. 상냥한 아빠처럼. 투쟁의 동지처럼. 그렇다, 오랜 투쟁의 동지처럼, 든든하고 가슴이 벅차오르도록, 그 영상은 그런 말을 해준다. 젠장할, 망할…… 유실은 생각한다. 하지만 곧바로 그 불경한 감탄사들을 머리에서 지워버린다. 바로 저런 것들 때문에 그들 모두가 지금 있는 곳에 있게 되었다는, 사실인지 아닌지도 불명확한 데다 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생각 또한 지워버린다. 그러자 곧, 음향의 형태로 화면에서 스며나오는 고요하고 깨끗한 메시지가 머리와 마음을 가득 채운다. 지글지글, 쓱쓱, 탁탁 착착. 아무튼 있어…… 얼굴은 안 보이고 당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아무튼 이 우주에 인간이 있어서 이렇게 소리를 내고 있어. 그러니까 거기 당신, 취약한 영혼, 외로움과 불안으로 가슴이 터져서 죽지 말라고……
   김가루를 잔뜩 뿌린 김치볶음밥이니 양배추와 당근으로 만든 코울슬로니 하는 음식들이 끊임없이 접시에 담기는 것을 보다가 유실은 TV를 무음으로 바꾼다. 노트북을 열고 주소창에 세린의 블로그 주소를 입력한다.
   화면 정중앙에 그 영화의 클립이 뜬다. 세린이 〈swarm〉을 올려둔 포스트 날짜는 4년 전이고, 블로그에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원래는 뭐가 더 있었는지, 있었다가 삭제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세린에게 블로그가 있었다는 사실을 유실이 문득 기억해낸 건 세린의 장례식에 다녀온 며칠 뒤였다. 희한하게도, 잊고 있던 블로그 주소가 또렷이 생각났다.
   이 블로그에 유실이 마지막으로 들어온 건 2011년쯤이었던 것 같다. 돌이 된 민송을 친정에 맡겨놓고 오랜만에 시내에 나가 바깥바람을 쐬었다. 친구들을 마지막으로 한자리에서 본 것도 그때였다. 카페 마리라는, 명동 제3구역에 있는 철거 현장이었다. 여름이었다. 낮에는 믿을 수 없을 만치 평온하고 아기자기한 공기 속으로 아마츄어증폭기의 노래가 흘렀고 새벽에는 경찰과 철거 용역들이 들이닥쳤다. 그들 모두가 그 자리에 있었다. 은비는 카페 입구에 좌판을 벌여놓고 큐빅과 납작한 돌로 직접 만든 목걸이와 귀고리를 팔았다. 세린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카메라로 찍고 있었다. 나중에 다큐로 만들 거라고 했다. 애령은 은비와 함께 좌판을 지키다가 카페로 들어가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할 일을 찾아다니다가 했다. [      ]는 좌판 옆에서 하얀 티셔츠를 입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갑자기 아이 엄마라는 세계로 떨어져내려버린 유실은, 그해에 며칠밖에 없었던 외출 가운데 하루였던 그날 오후 어색하게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친구들에게 낯선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열등감과 박탈감을.
   그때 세린의 블로그에는 무엇이 적혀 있었나? 분명히 무언가가 적혀 있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할 수가 없다. 기억나지 않는 것이 차라리 잘된 일인가? 아니, 기억해도 괜찮은 것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유실은 재생 버튼을 누르기 전에 〈swarm〉 포스트에 달려 있는 댓글을 눌러 열어본다. 벌써 수십 번이나 읽은, 규희가 한 달 전에 달아놓은 댓글이다.
   ‘나는 어떻게 해도 당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겁니다. 당신이 내게 한 짓을요.’
   규희는 세린이 하던 시나리오 강좌 수강생이었다가 세린의 제자가 된 사람이라고 했다. 수강생과 제자는 다른가? 다른 것 같았다. 아무튼 장례식에서 규희가 너무 많이 울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은비도, 애령도, 유실도 모두 규희를 바라보느라 자신의 감정은 뒷전이었던 기억이 난다. 긴 생머리에 까만 뿔테안경을 쓴 규희는 허리를 꺾으며 격렬하게 울었고, 선생님이 그동안 너무 많이 힘들어하셨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선생님 덕분에 자신이 글을 쓸 꿈을 갖게 됐다고, 그렇게 맑고 깨끗하던 분이 왜 그렇게 힘들고 가난한 환경에 놓여 계셔야 했는지, 도와주는 사람이 왜 그렇게 없었는지 모르겠다고 규희는 오열했고, 유실과 은비와 애령은 차마 자책조차 할 수 없었다. 규희가 그날 그 자리에서 말이라는 것을 할 자격을 가진 유일한 사람 같아서였다. 그들이 모두 자기 삶에 치여 연락이 끊겨 있던 동안 규희는 부모님과도 의절 상태였던 세린과 교류를 하고 세린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세린의 집 초인종을 눌러보았던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세린의 팬이기도 했다. 알고 보니 〈swarm〉이 있던 유튜브 계정을 운영했고, 뜻밖의 사건 때문에 트위터에 찍힌 좌표를 보고 찾아온 네티즌들의 공격이 들어오자 곧바로 계정을 삭제해서 세린을 보호한 사람도 규희였다. 그날 그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와 규희에게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했다. 세린은 이제 없지만 죽기 전 세린을 마지막까지 알았던 규희와 연결되고자 하는 죄책감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규희가 세린에 대해 무슨 말을 하면, 그들은 가슴을 치며 들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장례식이 끝나고 3개월이 지나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규희가 세린에게서 그동안 당해 왔다는 착취와 폭력을 페이스북에 고발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지만 세린이 자신에게서 상당한 금액을 갈취해갔고 물건을 훔쳤으며 자신이 영화계의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게 막고 업계에 나쁜 소문을 퍼뜨렸다고, 동거를 하는 5년 내내 멸시하는 언행과 함께 상습적인 구타를 일삼았다고 규희는 말했다. 당신의 잘못은 결코 죽음으로 상쇄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시겠어요? 내 영혼을 파괴한 죗값을 당신은 지옥에서 길이길이 치르게 될 거예요. 유실과 은비와 애령은, 계속 이어지는 규희의 고발을, 세린이 했다는 폭력적인 언행들의 재현을 두 달쯤 보다가 비슷한 시기에 페이스북 계정을 차례로 폭파하고 나와버렸다. 더 이상은, 더 이상은 못 견디겠어 유실아, 은비는 그렇게 말했다. 애령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 사람, 세린이가 자기 몸을 어떻게 했는지 계속 쓰잖아. 너는 믿어져? 아니 믿고 말고가 아니라…… 나는 아직 친구가 그렇게 됐다는 것도 잘 못 받아들이겠는데, 그 사람이 자꾸 무슨무슨 체위라느니, 세린이가 성기에 뭘 어쨌다느니 그런 말을 쓰니까 정말 미안한데 못 보겠고, 피하고만 싶고, 죽고 싶기까지 해. 아 정말 이게 뭐야? 이게 다 뭐냐고?

*

   유실은 마침내 버튼을 눌러 클립을 재생한다. 〈swarm〉의 러닝타임은 12분 40초다. 스토리는 지극히 간단하다. 꽃무늬를 좋아해서 매일 꽃무늬 셔츠만 입는 수줍은 곱슬머리 소년이 있다. 그는 꽃무늬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서 놀림을 당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셔츠에 들어간 꽃무늬 위로 한 마리, 두 마리, 벌들이 날아온다. 처음에는 깜짝 놀라 벌을 떼어내려고도 해보고 도망치려고도 해보지만 그는 어느 순간 벌들이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을 깨달은 그가 고개를 들자 저쪽에서 소녀가 걸어온다. 소녀는 원피스를 입고 있는데, 옷 밖으로 나와 있는 부분, 그러니까 얼굴과 팔과 손과 다리 전부가 벌떼로 뒤덮여 있다. 눈 코 입을 전혀 알아볼 수 없는, 미세하게 움직이는 작은 날개들과 바글거리는 줄무늬 몸통들로 뒤덮인 갈색 얼굴로 소녀가 소년을 응시한다. 그러고는 소년에게 손을 내민다. 꽃무늬 셔츠를 입은 소년이 그 손을 잡고, 두 사람은 조금 걸어가다가 나란히 멈춰 서서 음악 없이 탭댄스를 추기 시작한다. 소녀의 몸에서 날아오른 벌들 몇 마리가 그들을 감싸고 날아다닌다. 제법 긴 그 탭댄스 장면을 계속 보고 있으면 영화 전체가 한 편의 뮤직비디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두 사람의 춤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다고 느껴질 즈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유실은 한숨을 쉰다. 상상만 하다가 드디어 보았다. 저 두 사람을, 꺼내서 보아버렸다. 선을 넘었다는 느낌이 들지만 후련하기도 하다. 영화는 유실의 기억만큼 화려하지 않다. 생각보다 단순하고, 새로운 것이 없다. 이상한 소년과 이상한 소녀. 왕따였던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위로한다는 테마는 2019년인 지금도, 이 영화가 만들어진 2004년에도,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진부하기까지 하다. 어떤 사람들이 이런 테마를 한국 문화 콘텐츠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지긋지긋한 해악으로 여긴다는 것도 유실은 안다.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그러나 객관적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유실은 알 수가 없다. 머리를 아무리 쥐어뜯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해 유실이 객관적이 될 수 있을까? 객관적이 못 되는 것이 그토록 잘못일까? 모르겠다. 아무도 때리지 않는데 유실은 얼굴을 차가운 걸레 같은 것으로 얻어맞은 듯한 모멸감을 느낀다.
   세린의 이 영화를 다시 보기 위해 유실은 엄청난 용기를 내야 했다. 이것이 (아마도)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죽은 사람의 블로그에 올라와 있을 뿐인데도, 본다는 상상만으로도 죄라는 생각이 찾아왔다. 꽃무늬 소년 역을 맡았던 [      ]가 시간강사로 나가던 대학에서 가해자로 지목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유실이 처음으로 한 생각은 ‘뭐? 그 너드가?’였다. 그 녀석은 누구를 만나기보다는 그 돈으로 앨범 한 장을 더 사는 인간이었는데?
   유실아 너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안 돼, 나중에 만난 자리에서 애령은 걱정하며 그렇게 말했다. 성폭력이란 게 여자를 좋아해서 저지르는 게 아니잖아.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그냥 저지르는 거잖아, 권력 때문에. 그냥 그런 자리에 있어서, 힘이 있어서. 그래 권력…… 유실은 멍한 얼굴로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래 그렇지.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걔가? 미친 거 아니야 진짜? 왜? 왜 그랬지? 어째서 그런 짓을 해 그 돌은 새끼가? 유실은 울면서 그렇게 허공에 대고 물었다. 이상한 일도 아니라고 말한 건 은비였다. 내가 아는 우리 나이 또래의 남자들만 해도 전부 미투 고발로 끌려나와도 이상하지 않아. 앞으로 더 나올걸?
   그때 세린은 그 자리에 없었다. 오랜만에 연락을 한 것이었는데, 집안일 때문에 바쁘다고 했다. 모두가 세린을 걱정했다. 피해자들 걱정도 했다. 미친 듯 [       ]를 미워했다. 그것이 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감정이었다. 그 일이 있고 1년이 지나 세린이 자살을 하고, 그것이 생활고와 우울증 때문이었으며, 살려고 애를 썼으나 잘되지 않았고 재능이 있었으나 펼칠 기회가 없었던 가난한 여성 독립영화 감독의 죽음이라고 기사화되어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을 때, 그때도 그들은 [       ]를 미워했다. 마치 [       ]가 성폭력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몹쓸 길로 들어서버렸기 때문에 세린이 죽은 것 같았다. 그 망할 새끼가 가해자가 되었기 때문에 세린이 피해자가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나자 규희가 자신의 피해 고발을 시작한 것이었다.

*

   거리에는 크리스마스캐럴이 흐르고, 곧 첫눈이 내릴 거라고 한다. 1년 동안 잘 버티며 살아온 자신을 위해 다음 주에는 백화점에 가서 꼭 무언가를 사야지 생각하다가, 빨간색과 흰색 포장지로 감싸인 선물을 쇼핑백에 담아 돌아오는 상상을 하다가, 유실은 문득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초등학교 3학년인 딸아이는 한 달째 등교를 거부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결석을 하면 안 되니 어떻게든 학교에 나와 어떤 방향으로든 해결을 해보자고 학교 측에서는 연락을 해오지만 민송은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 같다. 교실에서 민송이 휘두른 의자 다리에 귀를 빗맞은 여자아이는 어려서부터 보청기를 끼고 다니던 아이였다. 빗맞지 않고 제대로 맞았으면 청력이 영구히 상실될 뻔했다는 게 의사의 소견이었다. 그 아이의 부모는 민송을 퇴학시켜 달라고 학교 측에 요구하다가 유실이 빌고 빌어 전학으로 요구를 바꿨다. 그 아이가 자신을 깔보며 킹콩이라고 불렀다고 민송은 말했다. 민송이 3학년이 되었을 때 유실은 아이가 외모 콤플렉스에서 이제 겨우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너는 뚱뚱한 게 아니고 건강한 거라고, 네 몸은 이상하지 않다고, 누구보다 유실이 그동안 그렇게 많이 말해주었다. 킹콩이라고? 그게 다니? 또 다른 말은 안 했어? 단지 민송이 말하지 못한 것이 혹시 더 있나 싶어 사실을 확인하려고 유실이 그렇게 물었을 뿐인데 민송은 왜? 그걸로는 충분치 않고 내가 더 욕을 먹어야 했어? 하고 괴성을 지르며 울기 시작했고 그날부터 누구와도 대화하려 들지 않았다. 민송이 잠든 사이 아이의 공책을 펴보았을 때 거기에는 ‘썅년 존나 외롭다 집을 나가고 싶다 하나밖에 없는 딸내미 놔두고 남의 집 애새끼 편을 들고 앉았어’라는 말이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유실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는 중이다. 그런데 현장을 목격한 다른 아이들은 모두 증언을 거부하고 있고 그들의 부모는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제 민송 자신이 유실을 신뢰하지 않아서 더이상의 어떤 협조도 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겨울방학이 되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 한다, 어떻게든. 하지만 어떻게? 상점마다 벽에 장식된 가짜 포인세티아의 뾰족뾰족한 잎사귀들을 바라볼 때마다 유실은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한다.

*

   그들은 1999년에 만났다.유실은 생각하면서 마음속에서 생각에 취소선을 긋는다. 회상을 했다가는 아름다워져 버려서 용서받지 못할 것 같은 부분을 회상하며 아름다워지기 전에 거기에 선을 긋는다. 그들은 블로그 친구였고, 같은 학교였다. 은비는 글을 쓰고 싶어했고 [      ]는 어쿠스틱 음악을 좋아했으며 유일한 이과생이었던 애령은 그림을 그리면서 게임을 만들고 싶어 하는 아이였다. 1999년 12월 31일에 그들은 신촌에서 만나 술을 마시고 조촐하게 파티를 했다. 밤 열한 시가 되었을 때 그들은 서로에게 덕담을 했다. 한 시간 뒤면 세상은 망할 거고 우리는 멋있게 끝날 거라고. 피해자들이 있다. [      ]의 사건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으며 규희 역시 피해자이다. 유실은 전자음악을 좋아해서 학교를 졸업하면 DJ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고 있었다. 유실은 규희에게서 도망쳤다. 세린은 이미 죽었고 이제 어떻게 해도 규희가 겪었다는 피해를 당사자가 아닌 친구들이 보상할 길은 없어졌지만 그래도 역시 유실은 자신이 도망쳤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들은 클럽에 자주 같이 다녔다. 다섯이서 춤추러 정말 많이 갔다. 그러니까 클럽이라는 곳이 여자와 남자가 케이팝에 맞춰 부비부비 댄스를 추면서 서로를 유혹하는 곳이자 약물 성범죄의 온상으로 변해버리기 전, 다른 음악이 흐르고 다른 의미를 지닌 공간이던 그때에. 그러나 이런 생각이 다 무슨 소용일까.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가슴을 치는 것이. 누구한테 탓을 돌릴 것인가. 그들이 가던 레이브 파티에 거대 자본이 들어오고 공연장마다 스폰서 기업들이 높이 쌓아놓은 담배와 보드카를 보았을 때 그들이 무언가 이물감을 느꼈지만 무시하고 그냥 춤을, 춤만 열심히, 추었던 탓인가? 분홍신을 신은 소녀들처럼? 그들이 가슴이 파인 예쁜 옷을 입고 파티마다 돌아다녔기 때문인가? 세상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지루해하며(그래, 실은 말 그대로 지루해서 죽을 것 같았다, 유실은. 애령과 은비와 이태원 해밀턴 호텔 뒤편의 프랑스 식당에서 만나 브런치를 먹으며 ‘지루해서’ 또 산 가방과 그동안 보던 것들이 너무 ‘지루해서’ 새롭게 파기 시작한 미드 얘기를 할 때마다 유실은 계속 무료하고 지겨워서 죽을 것 같았다) 꾸역꾸역 견디기만 하다가 사십 대가 되어버렸기 때문인가? 남의 탓이거나, 반성이거나, 혹은 다른 무엇이거나, 이런 건 실은 그 무엇의 탈을 쓴 자기 연민의 욕망 아닌가? 유실은 생각한다. 살아남은 주제에 자기 연민을 해? 그런 한심한 짓이 어디 있담?
   은비는 그 뒤로 남자친구와 함께 뉴욕에 가서 살다가 몇 년 전 그와 헤어지면서 한국으로 돌아와 지방의 어느 문학관에서 일을 시작했다. 나는 내가 그래도 무언가가 될 줄 알았어, 뉴욕에서라면, 거긴 정말 꿈의 도시였거든, 은비는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꿈의 도시에서 그냥 얼굴 노란 동양인 여자 1이더라.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렇더라니까? 걔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까? 아니, 반대로 무리를 해서라도 아이를 낳는 게 나았을까? 모르겠어. 난 요즘 한국 책들 열심히 읽는다? 그렇게 글을 쓰고 싶어하면서 내가 원래 한국 작가들 책은 전혀 안 읽었잖아. 그게 내 허영이었던 것 같아. 이제 내 주제를 확실히 알았고…… 지금은 열심히 읽으려고 해.
   은비는 지방 생활이 답답해 죽겠다고 했다. 근대문학을 하던 옛날 남자 문인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문학관에서, 은비는 그럼에도 열심히 문학 행사를 기획하고 홈페이지를 관리하고 회원들을 모아 독서 모임을 열고 있다. 남성 근대 문학 대신 지금 한국에서 활동하는 여성 작가들의 책 이야기만 한다고 했다. 근데 한국 사람들은 왜 아직도 김명순을 글로 그렇게 망가뜨려 놓은 김동인 같은 자의 이름을 문학상에다 쓰는 거야? 왜 그런 건 하나도 안 바뀌지? 그렇게 말하는 은비의 얼굴은 막 사회에 나온 사람처럼 활기차고 앳돼 보였다.
   애령은 외국계 게임회사로 자리를 옮겨 지사장이 되었고 이제는 정말로 바빠져서 좀처럼 모임에 나올 수가 없다. 애령이 잘되어서 다행이라고 유실은 진심으로 생각한다. 네가 우리 다섯 중에서 제일 잘됐어, 말했을 때 애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와 버린 ‘우리 다섯’이라는 말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유실은…… 아무튼 딸 민송을 열심히 키우고 있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닌가.
   그런데 그걸로 되지가 않는다. 유실은 견딜 수가 없다. 남편이 하는 사랑한다는 진심 어린 말로도, 애령이 쓴 책 속에 들어 있는 진솔한 자기반성을 읽어도 해결되지 않는 견딜 수 없음이 있다. 클럽에는 미러볼이 있었다. 그들은 미러볼을 좋아했다. 미러볼은 그들을 비춰서 화려하게 만들어주지는 않았지만 화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함께 있기만 하다면 화려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춤추는 동안 그들에게 말해주었다. 그들 다섯 명에게 일어난 어떤 일들을 유실은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이해할 수 없음은 그들이 무엇을 하든 어떤 다른 삶을 살든 해결되지도 해소되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유실은 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유실 혼자뿐인지도 모른다. 은비와 애령은 좀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 새 사람이 되어야 하니. 나는 모르겠어. 너희들은 어떻게 했니, 벌어진 이 상처를. 나는 차라리 여기서 계속 피가 흘렀으면 좋겠어, 찢어진 이쪽과 저쪽 사이가 너무 먼데 어떻게 꿰맨 거니, 나도 좀 가르쳐줘, 유실은 생각한다. 이 이해할 수 없음을 애도할 수 있는 사람이 그들밖에는 없었는데 이제 그들 자신마저 그 애도의 가능성을 천천히 접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유실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다.
   1999년의 마지막날 그들은 어떤 꿈같은 것을 꾸고 있었지만 애령과 은비와 유실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모든 인간이 사실 그러지 않나? 그런데 왜 이럴까? 아무튼 그들 모두가 죽어버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었을 텐데 유실은 왜 자신의 살아 있음을 이렇게 참을 수가 없는 것일까?
   한때 그들은…… 이제 그만하자, 유실은 자신에게 말한다. 시대착오는 퇴출되어야 한다. 이에 달라붙은 치석처럼 악취를 풍기는 시대착오야말로 죽어야 하고 제거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죽고, 퇴출되고, 제거되어야 하는 것들은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유실은 죽거나 퇴출되거나 제거되기 전에 하나만 더 물어보고 싶다. 세린이는 저 벌들을 어떻게 찍었지?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세린이 그 영화를 찍기 시작할 때, [      ]와 자신이 주연이라고 알리고, 촬영에 들어간다고 돼지머리 대신 조그만 케이크와 과자와 맥주로 고사를 지낼 때, 스태프들을 소개할 때(이제 유실은 그들이 누구였는지도, 지금 어디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촬영 전과정에 함께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그 영화를 내내 세린과 함께 찍는 것 같았다. 이것은 우리의 영화, 라고 생각했다. 시사회를 하던 날, 누군가가 벌들에 관해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아마도 감탄과 칭찬을, 놀라움을 표했으리라. 그런데 이제 아무도 그 벌들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은비는 한참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거 CG 아니었니? 하고 물었다. 기억 속에서만 돌려보던 영화를 마침내 실제로 보고 난 지금, 아니라고 유실은 생각한다. 다시 돌려보아도 그건 CG로 만들어진 장면들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기엔 세린의 얼굴을, 팔을, 다리를 덮고 있는 벌들 한 마리 한 마리가 한 화면 안에서 너무 개별적으로, 구체적으로, 생기 있게 움직인다. 그게 CG였다면 그 당시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막 시도되었던 어떤 기법-모핑이었는지 뭐였는지 아무튼 복잡한 이름을 지닌-에 가까운 것 같은데, 그때 세린에게는 국내에도 아직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전이었던 그런 기법을 쓰는 업체를 찾아가 그 장면을 CG로 제작 의뢰할 시간적 여유도 또한 그럴 만한 제작비도 유실이 아는 한 당연히 없었다. 벌들을 따로 찍어 합성한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저건 진짜 벌들이었나?
   애령은 전화기 저편에서 피로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겠네…… 그랬다면 그때 세린이가 벌에 관해 분명히 어떤 얘기를 했을 텐데, 그러지는 않았던 걸로 나는 기억하거든. 그러고 보니까 너무 이상하네. 벌들을 찍으려면 최소한 양봉 업체에 연락해서 빌려왔다거나 그런 얘기를 했을 텐데 아무런 기억이 없다는 게. 세린이 그때 영화 찍는 얘기 우리한테 정말 많이 했는데…… 오늘은 무슨 장면 찍었고 어디를 섭외했다고 말이야…… 그런데 그 벌들에 대해서는 아무 기억도 안 나.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그런가? 뭘까, 정말? 세린이가, 온몸에 꿀을 바르고 벌들을 붙이고 찍기라도 했던 걸까?
   피로 때문인지 애령은 하품을 하고 있었다. 애령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유실아, 알게 되면 나한테도 알려줘.
   어쩌면 규희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유실은 생각한다. 그러나 규희에게 그것을 묻는 자신을 상상하고, 규희의 대답을―그 여자는 몸속에 벌들을 기르고 있었어요, 아시겠어요? 진짜로 흉포한 벌들이 그 여자 몸속에 있었다고요, 그 벌들이, 저를 쏘고 물어뜯었다고요―듣는 상상까지 하고 나면 자신이 정말로 미쳐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유실은 자신에게만 묻는다. 그 벌들은 어디서 왔을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으므로 유실은 추측한다. 세린에게는 정말로 벌들을 불러내는 능력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고. 정말로 그 많은 벌들을 세상 어딘가로부터 불러내,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그것들과 함께 춤을 추는 능력이 그때 그 애한테는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중에는 사라져 버렸더라도. 우리는 그때 서로가 누군지 알고 있었는데, 어디로 가버렸을까 그 마법은. 유실은 알아내고 싶다. 죽기 전에 그것을 알아낼 방법이 어딘가에는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설령 알아낼 수 있더라도 그것에 대해 어떤 슬픔을 느낄 권리가 자신에게 허락될지, 유실은 결코 짐작할 수가 없다. 거실 창을 열고 베란다로 나가 차가운 저녁 공기 속에서 건너편 건물의 빨간색 벽돌을, 저쪽 건물 누군가의 창가에서 이쪽을 기웃거리는 고양이의 경계심 어린 몸짓을 잠시 보다가 유실은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러고는 건물과 거리와 하늘에 걸린 노을과 고단한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사람들의 실루엣으로 이루어진 그 소박하고 정겨운 풍경이 언제나, 언제까지나 거기 있을 것임을, 그렇게 아무도 손상시킬 수 없는 작은 아름다움을 품고 영원할 것임을 문득 깨닫는다.

윤이형

이런 이야기는 쓰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면 그냥 써버리라고 주위에 말하고 다닙니다. 요즘엔 그런 이야기들만 쓰고 있는데, 이것도 그런 이야기입니다. 유실과 친구들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조금 더 길게 써보고 싶습니다.

2019/12/31
2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