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배영
우현과 연애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진은 임신을 했다. 둘은 대학생이었다. 시험 기간에 만난 여진과 우현은 학교 도서관 1층의 카페테리아에서 딸기셰이크 하나를 나눠 마시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여진이 화장실로 달려갔다. 토하고 왔다는 여진의 말을 들은 우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여진은 그날 임신테스트기를 샀고, 우현에게 덜덜 떨면서 전화를 걸었다.
다음날 오전, 둘은 함께 산부인과를 찾았고, 꼭 사 주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친절하게 한 번은 괜찮지만 두 번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두 번을 하면 다시 임신을 하기 어려울 수 있거든요. 경험이 있어요? 여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요, 한 번은 괜찮아요.
그날 당장 수술을 할 수도 있다고 의사가 말했지만 오후에 시험이 있었다. 전공 필수 과목이라서요.
진료실을 나오면서 둘은 날짜를 세어보았다. 사 주 전은 여진의 생리 기간이었다. 생리 중에도 임신이 되는 거야? 여진이 물었고, 우현은 가만히 여진을 바라보기만 했다. 우현의 얼굴은 여전히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다음날 오후에 혼자 병원을 찾은 여진은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14번 김여진 엄마”라는 부름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간호사는 여진을 향해 상냥하게 손짓을 했다. 여진은 다리를 양쪽으로 벌린 채로 들어올리게 되어 있는 수술대에 누워 수치심을 느꼈다.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는 우현이 옆에 있었다. 시험 잘 봤어? 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피가 많이 나는 것 같아. 여진의 말에 우현은 간호사를 불렀다. 병실에 들어온 간호사는 상냥하게 웃으면서 그게 정상이라고 말했다.
여진은 그후로 며칠간 우현의 원룸에서 지냈다. 여진이 키우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일은 우현이 맡았다. 우현은 시험을 마치고 여진의 집에 들러서 고양이에게 사료를 주고 물을 갈아주고 모래화장실에서 똥을 골라 내 버렸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서 3분 미역국을 샀다. 여진은 벽을 보고 누운 채로 고양이의 안부를 물었다. 밥은 먹었어? 똥은 많이 쌌고? 물은 컵에 찰랑찰랑하게 채워놨지? 우현은 여진의 옆얼굴을 보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여진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우현은 반투명한 미역국을 그릇에 담아 상에 올려놓고 여진을 흔들었다. 밥 먹어. 밥 먹고 다시 자.
사흘이 지나고 여진은 주저하는 우현의 팬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의 페니스를 어루만졌다. 아직은 너무 이르지 않느냐고 더듬거리는 우현의 말과 반대로 페니스는 금방 단단해졌다. 여진은 한 손으로 여전히 페니스를 만지면서 다른 손으로 자신의 팬티를 끌어내렸다. 절정에 올랐을 때 여진은 벽지를 잡아뜯었다. 우현은 서둘러 페니스를 꺼내 여진의 배에 사정했다. 우현이 그날 입었던 티셔츠로 여진의 배를 닦는 동안 여진은 찢겨진 벽지를 보았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거 알지? 여진의 말에 우현은 울음을 터뜨렸고 자신의 정액이 묻은 티셔츠로 눈물을 닦았다.
여진과 우현은 같은 날 졸업을 했다. 졸업을 하기 전에도 그랬듯이 둘은 학교 도서관에서 만나 취업을 준비했다. 여진과 우현은 대기업 면접 질문지를 들고 서로의 답변에 테이블을 치면서 웃었다. 한 분기를 넘긴 후에 여진은 중소기업 여러 곳에 원서를 넣었고, 그중 하나에 취직이 되었다. 복지가 좋은 회사였다. 졸업 전에 한 번 철강 기업의 면접까지 올라간 적이 있었던 우현은 세 분기가 지나서야 중소기업에 원서를 넣기 시작했고, 두 분기가 더 지나서 연봉 2천이 안 되는 작은 회사에 입사했다. 직원이 넷인 회사였고, 우현의 업무는 사장이 개발한 프로그램의 오류를 잡아내는 것이었다. 회사에 입사하고 얼마 안 지나 우현의 원룸 건물이 공사에 들어갔다. 우현은 개인 이삿짐 트럭을 불러서 여진의 집으로 짐을 옮겼다. 공사는 금방 끝날 거야. 끝나자마자 짐을 빼 갈게.
우현은 여진의 방 한 구석에 상자들을 쌓아놓은 채로 매일 밤 미안하다고 하면서 몸을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 공사가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우현은 상자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고, 두 달에 걸친 공사가 끝났을 때에는 이미 우현의 물건과 여진의 물건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부쩍 많아진 살림들 사이에 앉은뱅이상을 펼쳐놓고 참치에 비벼 밥을 먹다가 우현이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사실 원룸 계약이 끝났어. 공사가 길어지는 바람에…… 여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우편물을 받기 위해 주소는 이미 옮겨놓은 상태였으므로 따로 할 일은 없었다. 우현은 여진의 집 월세와 공과금의 절반을 냈다. 몇 년 동안 취업 준비생으로 지내면서 이런저런 빚이 많았던 우현으로서는 그 편이 훨씬 나았다. 여진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우현은 집안일의 대부분을 했고, 요리 솜씨도 여진보다 나았다. 이제 그는 3분 미역국이 아니라 진짜 미역국도 훌륭하게 끓일 수 있었다. 여진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씻기는 일도 모두 우현의 몫이었다. 언젠가부터 고양이는 여진보다 우현을 더 따랐다. 우현이 회사에서 야근을 하는 날이면 현관에서 몸을 꼿꼿이 세우고 그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후로 여진과 우현은 두 차례 집을 옮겨가며 삼 년째 동거를 하고 있었다. 둘에게는 연애를 한 기간만큼이나 오래된 친구들이 있었고, 서로의 가족들과도 어느 정도의 왕래를 하고 있었다. 명절이면 여진과 우현은 과일 상자를 들고 서로의 집을 오갔고, 주말이면 둘의 이름이 나란히 적힌 청첩장을 들고 지인의 결혼식을 찾았다. 돌아오는 길에 종종 다퉜지만 헤어질 만큼은 아니었다. 바로 다음주에 또다른 경조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화해를 하고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찾았다.
여진은 현재의 생활에 만족했다. 회사생활은 오 년차에 접어들어 익숙했고, 차근차근 오른 연봉 덕에 적금도 부족하지 않게 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는 복지 차원에서 매달 20만원의 금액이 들어 있는 카드를 줬고, 그 카드로 우현과 종종 외식을 했다. 돈이 남으면 고양이의 간식을 샀다. 함께 사는 모두가 회사 돈으로 외식을 하는 셈이라고 여진은 생각했고, 그런 식의 삶이 만족스러웠다.
반면 우현은 불평이 늘었다. 회사에서 늦게 오는 날이 많아졌고 그때마다 여진에게 짜증을 냈다. 사장과 상무와 부장과 평직원, 그러니까 우현으로 이루어진 회사였고 사장의 실수와 상무의 실수와 부장의 실수를 처리하는 것이 우현의 몫이었다. 우현의 회사 컴퓨터는 누군가의 실수와 오류, 잘못들로 가득차 있었고, 우현은 그 모든 것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사람이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밤을 새가며 노력하는 그 모든 순간들이 실수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만 같았다.
언제부턴가 우현은 회사를 그만 두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겠다느니 웹디자인 공부를 해보겠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반복하다가 돌연 취미를 가져보겠다고 했다. 성인 미술반이라든지 산악회라든지 동해 서핑 클럽이라든지 하는 이름들이 우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여진은 그때마다 고개를 대충 주억거리며 우현이 늘어놓는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캠핑도 그것들 중 하나였다. 캠핑족에 대한 기사 읽어봤지? 캠핑은 우리가 같이 할 수 있어.
여진은 우현의 흥미가 곧 다른 것으로 넘어갈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캠핑 도구들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텐트와 침낭, 에어 매트, 사이드 테이블, 접이식 의자, 코펠, 버너, 각종 랜턴, 화로대가 차례로 집으로 배달되었다. 우현은 에어 매트 위에서 침낭 안으로 몸을 집어넣고 잠을 잤고, 코펠과 버너로 국을 끓였다. 여진과 우현의 저녁 식사 내내 랜턴이 환하게 그들의 얼굴을 비춰주었다. 고양이는 우현이 침대 옆에 펼쳐놓은 접이식 의자 위에 자리를 틀었다. 어때, 정말 그럴듯하지? 랜턴 불빛 때문에 우현의 얼굴이 비현실적으로 하얗게 보였다. 여진은 우현의 눈가에 주름이 생기기 시작한 것을 알아챘다.
첫 캠핑의 장소와 날짜를 정하는 일은 우현이 맡았다. 우현은 여진에게 어디가 좋을지 혹은 언제가 좋을지 물었고, 그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답했다. 다섯 가지 경우의 수를 두고 고민하던 우현은 제비를 만들어 여진에게 하나를 뽑도록 했다. 8월의 마지막 주말, 서해. 우현은 랜턴 불빛 아래서 짝 하고 박수를 쳤다.
고양이가 자기 집처럼 여기고 있는 접이식 의자를 제외하고 다른 짐은 이미 일주일 전부터 차에 실린 상태였다. 여진은 캠핑용품들로 뒷좌석을 가득 채우고 출퇴근을 하면서 차가 느려졌다고 생각했지만 우현에게 별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캠핑 전날 여진은 회식이 있었다. 우현이 몇 번이고 전화를 해서 빨리 들어오라고 말했지만 여진은 2시가 넘어서야 들어왔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하는데 지금 들어오면 어떡하느냐고 우현은 화를 냈다. 여진은 우현이 별거 아닌 거로 사람을 숨 막히게 한다고 했고, 우현은 여진이 이기적인 데다 무책임하다고 했다. 한참을 다투다 여진은 정 그러면 너 혼자 가라고 말해버렸다. 너는 왜 모든 게 불만인 건데? 둘은 마주서서 한참을 노려봤다.
다음날 아침, 간단하게 아침을 먹기로 한 고속도로 휴게소에 도착하기까지 여진과 우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현이 에어컨을 켜는 것을 보고 여진은 차창을 열었다. 뜨거운 바람이 차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우현은 아무 말 없이 에어컨을 껐다. 여진은 이제 완전히 끝이 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언제 어떻게 헤어지면 좋을까. 다음주에는 대학 동기의 결혼식이 있었다. 그다음 주에는 여진의 아버지 생신이었다. 헤어졌다고 말을 하면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집 보증금이 함께 묶여 있는 것도 쉽지 않은 문제였다. 차가 없는 우현을 위해 그의 직장 근처에 집을 구하면서 우현과 여진은 6대 4로 보증금을 나눠서 냈다. 보증금을 받기 위해서는 집을 정리해야 할 텐데 집이 언제 나갈지 알 수 없었다. 집이 나갈 때까지 작은 원룸을 구해서 사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늘어난 살림이 원룸에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고양이를 위한 공간도 필요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여진은 고양이에게 이틀 치 사료를 주고 오는 것을 깜빡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진은 잠시 망설였다. 뜨거운 바람이 계속해서 차 안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여진은 목을 타고 흐르는 땀을 손으로 닦아냈다. 사료 그릇을 채워놓는 걸 깜빡했어.
내가 채워놨어, 물도 큰 컵으로 바꿔놨고. 여진은 차창을 올리고 에어컨을 틀었다. 차가운 바람에 뜨거웠던 몸이 빠르게 식었다. 여진은 우현을 돌아보았다. 우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아래로 처진 눈매, 낮은 코, 둥근 턱선. 여진이 잠결에도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익숙한 얼굴이었다. 여진은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우현은 좋은 사람이었다. 여진은 그걸 알고 있었다.
바다는 아름다웠다. 회색 바닷물이 햇살을 받아서 불투명하게 반짝거렸다. 실크 스카프가 넓게 펼쳐져 있는 것만 같았다. 여진과 우현은 나란히 모래사장에 서서 감탄을 했다. 오길 잘 했다. 응, 정말. 여진은 우현의 손을 잡고 발밑의 모래를 보았다. 우현은 등산화를 신고 있었다. 왜 등산화를 신었어? 안 더워? 우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여진의 손을 놓고 차로 돌아갔다. 우현은 차에서 텐트를 꺼냈다. 여진은 우현이 낮은 소나무 아래에 텐트를 치는 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노란 텐트와 빨간 햇빛 가림막은 색이 너무 밝아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우현은 접이식 의자 두 개를 텐트 앞에 펼쳐놓고 여진에게 손짓을 했다.
여진과 우현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해가 뜨거운데다 습한 바닷바람까지 불어 여진은 벌써 땀으로 몸이 다 젖어 있었다. 여진은 우현이 신은 등산화를 몇 번이나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여진은 눈을 감고 바다 냄새를 맡으려고 노력했다. 비리고 짠 냄새를 맡기 위해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뜨거운 공기가 여진의 안으로 밀려들었다. 우리 수영하자. 여진이 일어나면서 말했다.
만원을 주고 빌린 튜브는 여진이 들기에는 무거웠다. 우현이 들어주겠다고 손을 내밀었지만 여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진은 한쪽 어깨에 노란색 튜브를 짊어지고는 몸을 기우뚱하고 걸었다. 둘은 함께 물에 들어갔다. 물이 차가웠다. 여진이 잠깐 몸을 떠는 사이, 우현은 좀더 깊이 들어가 첨벙하고 물에 뛰어들었다. 여진은 튜브를 허리에 꼈다. 우현은 벌써 저 멀리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여진은 우현이 수영을 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걸어가다 발이 닿지 않을 만큼 깊어지자 몸을 앞으로 숙이고 발을 차기 시작했다. 있는 힘을 다해 발을 찼지만 파도가 올 때마다 뒤로 밀려나면서 우현과는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여진은 우현을 불렀다. 우현은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 수영을 했다. 여진이 양 주먹을 꽉 쥐고 소리를 지르자 우현이 여진을 돌아봤다.
우현이 다가오자 여진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뭐하자는 거야? 둘은 바다 한가운데 있었다. 우현은 물에 떠 있기 위해 팔과 다리를 물 안에서 젓고 있었다. 한낮의 태양 아래서 우현의 얼굴이 해쓱해 보였다. 여진은 점점 더 화가 나서 양손으로 튜브를 팡팡 쳤다.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온 거 아냐? 이럴 거면 도대체 여기까지 왜 왔어?
너는 수영도 할 줄 모르면서 뭘 같이 하자는 거야? 우현은 젖은 손으로 하얀 얼굴을 쓰다듬었다.
말다툼을 계속하던 중에 여진은 둘이 해변에서 꽤 멀어진 것을 알게 됐다. 순간 겁이 덜컥 나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언제 이렇게 멀리까지 온 거지? 어떻게 이렇게 멀리까지 온 거지? 주변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에 단둘뿐이었다. 여진은 우현을 한 번 노려본 후에 해변을 향해 몸을 돌리고 발을 차기 시작했다. 우현이 옆에서 수영을 했고 금방 여진을 앞질러 갔다. 우현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던 여진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여진에게로 다시 돌아온 우현이 물었다. 날 좀 끌어내라고. 우현이 여진의 튜브를 한 손으로 잡고 수영을 하는 동안 여진은 뒤로 누워 튜브에 등을 기댔다. 뜨거운 햇살이 얼굴에 닿았다. 여진은 눈을 감았다. 내가 배영 할 줄 아는 거 몰라? 뭐? 나 배영 할 줄 알아. 그래, 내가 가르쳐줬잖아. 그걸 알면서 왜 나한테 수영 못한다고 했어? 여진은 튜브 위로 다리를 꺼내올렸다. 튜브에 완전히 몸을 누이고서 우현의 팔과 다리가 물을 가르는 소리를 들었다. 나한테 다시는 수영 못한다고 하지 마.
저녁 준비를 하면서 우현은 혼자 분주하게 움직였다. 화롯대를 설치하고 숯에 불을 붙이고 고기를 구웠다. 같이 하자며 여진이 일어날 때마다 우현은 여진의 어깨를 잡아 도로 앉혔다. 할 줄 아는 사람이 해야 돼. 우현은 익은 고기를 테이블 위의 접시로 옮겼다. 여진은 일부러 입을 벌리고 소리를 내며 고기를 질겅질겅 씹었다. 우현도 자리에 앉고, 고기가 수북하던 접시를 거의 다 비우고, 차례차례 술병을 비우는 동안 해가 졌다. 술에 취한 여진은 우현의 담배를 집어들었다. 우현이 안주가 필요하지 않냐고 말하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밤이 어두웠다. 우현은 헤드 랜턴을 차고서 고기를 구웠다. 우현은 광부처럼 보였다. 여진은 컴컴한 우현의 얼굴을 보면서 담배 몇 개비를 연달아 피웠다.
여진과 우현은 술에 취해서 바닷가에 나란히 앉았다. 여진이 폭죽을 터뜨리자고 했고, 우현이 일어나 매점에서 폭죽을 사왔다. 이러니까 우리 대학 다닐 때 생각난다. 여진과 우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기 시작했다. 둘이 학교 엠티에서 폭죽을 사겠다고 나가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길에서 개 하나가 튀어나와서 네가 막 소리를 지르고, 나는 무서워서 울고…… 여진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우현은 폭죽에 불을 붙여 그녀에게 건넸다. 그런데 그 개가…… 그때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우현이 소리를 질렀다. 우현의 다리에 불이 붙어 있었다. 우현은 모래를 뿌려 불을 껐다. 희미한 가로등 빛에 우현의 다리가 검게 그을린 것이 보였다.
폭죽을 거꾸로 들고 있었나봐. 우현이 옆으로 집어던진 폭죽에선 계속해서 불꽃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여진이 들고 있던 폭죽도 뒤늦게 불꽃을 토해냈다. 여진은 손에 폭죽을 든 채로 우현의 다리가 빨갛게 부풀어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냐? 괜찮아. 안 괜찮아 보이는데? 정말 괜찮아, 이러다 나을 거야. 여진은 잠시 침묵하다 우현이 사온 다른 폭죽에 불을 붙였다.
폭죽을 다 써버린 후 여진과 우현은 밤바다를 걸었다. 가로등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모래사장의 어둠 속 여기저기에 연인들이 바위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우현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었다. 다리의 상처가 그새 거무죽죽하게 곪아 있었다. 여진은 고개를 돌렸다. 우현이 이런저런 얘기를 했지만 여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우현은 계속해서 말을 했다. 여진은 방향을 틀어 바다로 걸어갔다. 슬리퍼를 신은 발이 물에 잠기고, 무릎이 잠기고, 반바지가 다 잠길 때까지 걷다가 우뚝 멈춰 섰다.
우현아! 여진은 뒤를 돌아 우현에게 팔을 크게 흔들었다. 우현이 따라서 손을 흔들었다. 여진은 물 밖으로 걸어나와 슬리퍼부터 반바지와 티셔츠, 속옷까지 다 벗고서 다시 바다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빠른 속도로 걸었다. 검은 바닷물이 빠르게 여진을 타고 올랐다. 여진은 물 위에 몸을 누였다. 달이 저 높이에서 하얗게 빛을 내고 있었다. 여진은 바닷물 위로 얼굴과 가슴을 내놓고 배영을 했다. 다리를 젓고 또 저었다. 힘이 빠져 더이상 다리를 저을 수 없자 눈을 감았다. 달이 사라졌다. 물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차고 외로웠다. 이 기분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우현은 여진보다 먼저 텐트에 들어갔다. 여진은 접이식 의자에 앉았다. 우현이 코를 골기 시작했을 때 여진도 텐트로 들어갔다. 우현은 반짝이는 검은색 침낭 안에서 똑바로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우현은 아주 잘 보관된 미라처럼 보였다. 우현의 옆에 깔려 있는 침낭 위에 여진도 몸을 누였다. 여진은 텐트의 노란 천장을 노려보다 일어나 앉았다.
일어나봐. 여진이 우현을 깨웠다. 우현은 몸을 뒤척이기만 하고 일어나지 않았다. 우현아, 일어나봐. 여진이 한참 흔든 후에야 우현이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리 돌아가자. 뭐? 너무 추워서 도저히 잘 수가 없어, 집에 가자. 우현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실눈을 뜨고 여진을 올려다보다 도로 눈을 감았다. 네가 침낭에 안 들어가 있으니까 그렇지, 이거 되게 좋은 침낭이야, 들어가 봐, 엄청 따뜻해. 들어가 봤어, 정말 못 자겠어, 집에 가서 잘래. 조금 있으면 아침이야, 조금만 참다가 그때 가자. 아니, 지금 갈래, 나 너무 추워.
우리 그냥 못 가, 텐트도 걷어야 하고…… 우현은 눈을 감은 채로 손을 침낭 밖으로 꺼냈다. 우현의 손이 텐트 바닥의 이곳저곳을 더듬다가 여진의 허벅지 위로 올라왔다. 우현은 여진을 달래듯 다정하게 그녀의 다리를 두드렸다. 여진아, 다시 자려고 해봐.
빨리 일어나, 나 지금 갈 거야. 잠시 그대로 누워 있던 우현은 천천히 눈을 뜨고서 침낭의 지퍼를 아래로 끌어내리고는 상체를 일으켰다. 우현은 조용히 몸을 침낭에서 빼내고는 침낭을 접었다. 여진은 말없이 우현을 보기만 했다. 그만 해. 우현은 에어 매트에서 바람을 빼서 백에 넣고, 밖으로 나가 텐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밖은 어두웠다. 여진은 접이식 의자 위에 놓여있던 랜턴을 들어 우현에게 불을 비추어주었다. 우현이 쭈그려 앉아 땅에 박힌 못을 빼내다 말고 일어났다.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까 그만 해.
여진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우현은 다시 앉아서 못을 마저 뽑았다. 우현이 텐트를 빙 돌아가며 못을 뽑는 동안 여진은 그를 따라 자리를 옮기면서 랜턴으로 그의 손을 비추었다. 우현이 지지대를 뽑아서 추리고, 텐트를 차곡차곡 접는 동안에도 랜턴의 불빛은 그의 손 위에 머물렀다.
서울로 올라오는 차에서 우현은 여진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얼굴이 해쓱해. 머리 아파,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가봐, 두통약 가진 거 없어? 우현은 차를 갓길에 대고 뒷좌석에 있는 상자에서 감기약을 꺼내서 여진에게 건넸다. 두통약은 아닌데, 그게 그거일 거야. 여진은 물도 없이 알약을 아그작아그작 씹어서 삼켰다. 입안이 썼다. 더운 바람이 차 안으로 불어 들어왔다.
문을 여니 고양이가 현관에서 꼬리를 잔뜩 세우고 있었다. 여진은 문 옆에 서서 우현이 몸을 굽혀 고양이를 쓰다듬는 것을 보았다. 고양이가 등을 높이 세우고 우현의 다리에 자기 몸을 비볐다. 다리에 난 상처에서는 진물이 나고 있었다. 고양이의 하얀 털에 진물이 묻었다. 여진은 문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복도에 주저앉아 울었다. 아주 오랫동안 여진은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서 울었다.
다음날 오전, 둘은 함께 산부인과를 찾았고, 꼭 사 주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친절하게 한 번은 괜찮지만 두 번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두 번을 하면 다시 임신을 하기 어려울 수 있거든요. 경험이 있어요? 여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요, 한 번은 괜찮아요.
그날 당장 수술을 할 수도 있다고 의사가 말했지만 오후에 시험이 있었다. 전공 필수 과목이라서요.
진료실을 나오면서 둘은 날짜를 세어보았다. 사 주 전은 여진의 생리 기간이었다. 생리 중에도 임신이 되는 거야? 여진이 물었고, 우현은 가만히 여진을 바라보기만 했다. 우현의 얼굴은 여전히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다음날 오후에 혼자 병원을 찾은 여진은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14번 김여진 엄마”라는 부름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간호사는 여진을 향해 상냥하게 손짓을 했다. 여진은 다리를 양쪽으로 벌린 채로 들어올리게 되어 있는 수술대에 누워 수치심을 느꼈다.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는 우현이 옆에 있었다. 시험 잘 봤어? 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피가 많이 나는 것 같아. 여진의 말에 우현은 간호사를 불렀다. 병실에 들어온 간호사는 상냥하게 웃으면서 그게 정상이라고 말했다.
여진은 그후로 며칠간 우현의 원룸에서 지냈다. 여진이 키우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일은 우현이 맡았다. 우현은 시험을 마치고 여진의 집에 들러서 고양이에게 사료를 주고 물을 갈아주고 모래화장실에서 똥을 골라 내 버렸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서 3분 미역국을 샀다. 여진은 벽을 보고 누운 채로 고양이의 안부를 물었다. 밥은 먹었어? 똥은 많이 쌌고? 물은 컵에 찰랑찰랑하게 채워놨지? 우현은 여진의 옆얼굴을 보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여진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우현은 반투명한 미역국을 그릇에 담아 상에 올려놓고 여진을 흔들었다. 밥 먹어. 밥 먹고 다시 자.
사흘이 지나고 여진은 주저하는 우현의 팬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의 페니스를 어루만졌다. 아직은 너무 이르지 않느냐고 더듬거리는 우현의 말과 반대로 페니스는 금방 단단해졌다. 여진은 한 손으로 여전히 페니스를 만지면서 다른 손으로 자신의 팬티를 끌어내렸다. 절정에 올랐을 때 여진은 벽지를 잡아뜯었다. 우현은 서둘러 페니스를 꺼내 여진의 배에 사정했다. 우현이 그날 입었던 티셔츠로 여진의 배를 닦는 동안 여진은 찢겨진 벽지를 보았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거 알지? 여진의 말에 우현은 울음을 터뜨렸고 자신의 정액이 묻은 티셔츠로 눈물을 닦았다.
여진과 우현은 같은 날 졸업을 했다. 졸업을 하기 전에도 그랬듯이 둘은 학교 도서관에서 만나 취업을 준비했다. 여진과 우현은 대기업 면접 질문지를 들고 서로의 답변에 테이블을 치면서 웃었다. 한 분기를 넘긴 후에 여진은 중소기업 여러 곳에 원서를 넣었고, 그중 하나에 취직이 되었다. 복지가 좋은 회사였다. 졸업 전에 한 번 철강 기업의 면접까지 올라간 적이 있었던 우현은 세 분기가 지나서야 중소기업에 원서를 넣기 시작했고, 두 분기가 더 지나서 연봉 2천이 안 되는 작은 회사에 입사했다. 직원이 넷인 회사였고, 우현의 업무는 사장이 개발한 프로그램의 오류를 잡아내는 것이었다. 회사에 입사하고 얼마 안 지나 우현의 원룸 건물이 공사에 들어갔다. 우현은 개인 이삿짐 트럭을 불러서 여진의 집으로 짐을 옮겼다. 공사는 금방 끝날 거야. 끝나자마자 짐을 빼 갈게.
우현은 여진의 방 한 구석에 상자들을 쌓아놓은 채로 매일 밤 미안하다고 하면서 몸을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 공사가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우현은 상자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고, 두 달에 걸친 공사가 끝났을 때에는 이미 우현의 물건과 여진의 물건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부쩍 많아진 살림들 사이에 앉은뱅이상을 펼쳐놓고 참치에 비벼 밥을 먹다가 우현이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사실 원룸 계약이 끝났어. 공사가 길어지는 바람에…… 여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우편물을 받기 위해 주소는 이미 옮겨놓은 상태였으므로 따로 할 일은 없었다. 우현은 여진의 집 월세와 공과금의 절반을 냈다. 몇 년 동안 취업 준비생으로 지내면서 이런저런 빚이 많았던 우현으로서는 그 편이 훨씬 나았다. 여진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우현은 집안일의 대부분을 했고, 요리 솜씨도 여진보다 나았다. 이제 그는 3분 미역국이 아니라 진짜 미역국도 훌륭하게 끓일 수 있었다. 여진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씻기는 일도 모두 우현의 몫이었다. 언젠가부터 고양이는 여진보다 우현을 더 따랐다. 우현이 회사에서 야근을 하는 날이면 현관에서 몸을 꼿꼿이 세우고 그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후로 여진과 우현은 두 차례 집을 옮겨가며 삼 년째 동거를 하고 있었다. 둘에게는 연애를 한 기간만큼이나 오래된 친구들이 있었고, 서로의 가족들과도 어느 정도의 왕래를 하고 있었다. 명절이면 여진과 우현은 과일 상자를 들고 서로의 집을 오갔고, 주말이면 둘의 이름이 나란히 적힌 청첩장을 들고 지인의 결혼식을 찾았다. 돌아오는 길에 종종 다퉜지만 헤어질 만큼은 아니었다. 바로 다음주에 또다른 경조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화해를 하고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찾았다.
여진은 현재의 생활에 만족했다. 회사생활은 오 년차에 접어들어 익숙했고, 차근차근 오른 연봉 덕에 적금도 부족하지 않게 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는 복지 차원에서 매달 20만원의 금액이 들어 있는 카드를 줬고, 그 카드로 우현과 종종 외식을 했다. 돈이 남으면 고양이의 간식을 샀다. 함께 사는 모두가 회사 돈으로 외식을 하는 셈이라고 여진은 생각했고, 그런 식의 삶이 만족스러웠다.
반면 우현은 불평이 늘었다. 회사에서 늦게 오는 날이 많아졌고 그때마다 여진에게 짜증을 냈다. 사장과 상무와 부장과 평직원, 그러니까 우현으로 이루어진 회사였고 사장의 실수와 상무의 실수와 부장의 실수를 처리하는 것이 우현의 몫이었다. 우현의 회사 컴퓨터는 누군가의 실수와 오류, 잘못들로 가득차 있었고, 우현은 그 모든 것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사람이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밤을 새가며 노력하는 그 모든 순간들이 실수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만 같았다.
언제부턴가 우현은 회사를 그만 두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겠다느니 웹디자인 공부를 해보겠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반복하다가 돌연 취미를 가져보겠다고 했다. 성인 미술반이라든지 산악회라든지 동해 서핑 클럽이라든지 하는 이름들이 우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여진은 그때마다 고개를 대충 주억거리며 우현이 늘어놓는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캠핑도 그것들 중 하나였다. 캠핑족에 대한 기사 읽어봤지? 캠핑은 우리가 같이 할 수 있어.
여진은 우현의 흥미가 곧 다른 것으로 넘어갈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캠핑 도구들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텐트와 침낭, 에어 매트, 사이드 테이블, 접이식 의자, 코펠, 버너, 각종 랜턴, 화로대가 차례로 집으로 배달되었다. 우현은 에어 매트 위에서 침낭 안으로 몸을 집어넣고 잠을 잤고, 코펠과 버너로 국을 끓였다. 여진과 우현의 저녁 식사 내내 랜턴이 환하게 그들의 얼굴을 비춰주었다. 고양이는 우현이 침대 옆에 펼쳐놓은 접이식 의자 위에 자리를 틀었다. 어때, 정말 그럴듯하지? 랜턴 불빛 때문에 우현의 얼굴이 비현실적으로 하얗게 보였다. 여진은 우현의 눈가에 주름이 생기기 시작한 것을 알아챘다.
첫 캠핑의 장소와 날짜를 정하는 일은 우현이 맡았다. 우현은 여진에게 어디가 좋을지 혹은 언제가 좋을지 물었고, 그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답했다. 다섯 가지 경우의 수를 두고 고민하던 우현은 제비를 만들어 여진에게 하나를 뽑도록 했다. 8월의 마지막 주말, 서해. 우현은 랜턴 불빛 아래서 짝 하고 박수를 쳤다.
고양이가 자기 집처럼 여기고 있는 접이식 의자를 제외하고 다른 짐은 이미 일주일 전부터 차에 실린 상태였다. 여진은 캠핑용품들로 뒷좌석을 가득 채우고 출퇴근을 하면서 차가 느려졌다고 생각했지만 우현에게 별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캠핑 전날 여진은 회식이 있었다. 우현이 몇 번이고 전화를 해서 빨리 들어오라고 말했지만 여진은 2시가 넘어서야 들어왔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하는데 지금 들어오면 어떡하느냐고 우현은 화를 냈다. 여진은 우현이 별거 아닌 거로 사람을 숨 막히게 한다고 했고, 우현은 여진이 이기적인 데다 무책임하다고 했다. 한참을 다투다 여진은 정 그러면 너 혼자 가라고 말해버렸다. 너는 왜 모든 게 불만인 건데? 둘은 마주서서 한참을 노려봤다.
다음날 아침, 간단하게 아침을 먹기로 한 고속도로 휴게소에 도착하기까지 여진과 우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현이 에어컨을 켜는 것을 보고 여진은 차창을 열었다. 뜨거운 바람이 차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우현은 아무 말 없이 에어컨을 껐다. 여진은 이제 완전히 끝이 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언제 어떻게 헤어지면 좋을까. 다음주에는 대학 동기의 결혼식이 있었다. 그다음 주에는 여진의 아버지 생신이었다. 헤어졌다고 말을 하면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집 보증금이 함께 묶여 있는 것도 쉽지 않은 문제였다. 차가 없는 우현을 위해 그의 직장 근처에 집을 구하면서 우현과 여진은 6대 4로 보증금을 나눠서 냈다. 보증금을 받기 위해서는 집을 정리해야 할 텐데 집이 언제 나갈지 알 수 없었다. 집이 나갈 때까지 작은 원룸을 구해서 사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늘어난 살림이 원룸에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고양이를 위한 공간도 필요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여진은 고양이에게 이틀 치 사료를 주고 오는 것을 깜빡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진은 잠시 망설였다. 뜨거운 바람이 계속해서 차 안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여진은 목을 타고 흐르는 땀을 손으로 닦아냈다. 사료 그릇을 채워놓는 걸 깜빡했어.
내가 채워놨어, 물도 큰 컵으로 바꿔놨고. 여진은 차창을 올리고 에어컨을 틀었다. 차가운 바람에 뜨거웠던 몸이 빠르게 식었다. 여진은 우현을 돌아보았다. 우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아래로 처진 눈매, 낮은 코, 둥근 턱선. 여진이 잠결에도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익숙한 얼굴이었다. 여진은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우현은 좋은 사람이었다. 여진은 그걸 알고 있었다.
바다는 아름다웠다. 회색 바닷물이 햇살을 받아서 불투명하게 반짝거렸다. 실크 스카프가 넓게 펼쳐져 있는 것만 같았다. 여진과 우현은 나란히 모래사장에 서서 감탄을 했다. 오길 잘 했다. 응, 정말. 여진은 우현의 손을 잡고 발밑의 모래를 보았다. 우현은 등산화를 신고 있었다. 왜 등산화를 신었어? 안 더워? 우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여진의 손을 놓고 차로 돌아갔다. 우현은 차에서 텐트를 꺼냈다. 여진은 우현이 낮은 소나무 아래에 텐트를 치는 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노란 텐트와 빨간 햇빛 가림막은 색이 너무 밝아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우현은 접이식 의자 두 개를 텐트 앞에 펼쳐놓고 여진에게 손짓을 했다.
여진과 우현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해가 뜨거운데다 습한 바닷바람까지 불어 여진은 벌써 땀으로 몸이 다 젖어 있었다. 여진은 우현이 신은 등산화를 몇 번이나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여진은 눈을 감고 바다 냄새를 맡으려고 노력했다. 비리고 짠 냄새를 맡기 위해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뜨거운 공기가 여진의 안으로 밀려들었다. 우리 수영하자. 여진이 일어나면서 말했다.
만원을 주고 빌린 튜브는 여진이 들기에는 무거웠다. 우현이 들어주겠다고 손을 내밀었지만 여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진은 한쪽 어깨에 노란색 튜브를 짊어지고는 몸을 기우뚱하고 걸었다. 둘은 함께 물에 들어갔다. 물이 차가웠다. 여진이 잠깐 몸을 떠는 사이, 우현은 좀더 깊이 들어가 첨벙하고 물에 뛰어들었다. 여진은 튜브를 허리에 꼈다. 우현은 벌써 저 멀리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여진은 우현이 수영을 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걸어가다 발이 닿지 않을 만큼 깊어지자 몸을 앞으로 숙이고 발을 차기 시작했다. 있는 힘을 다해 발을 찼지만 파도가 올 때마다 뒤로 밀려나면서 우현과는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여진은 우현을 불렀다. 우현은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 수영을 했다. 여진이 양 주먹을 꽉 쥐고 소리를 지르자 우현이 여진을 돌아봤다.
우현이 다가오자 여진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뭐하자는 거야? 둘은 바다 한가운데 있었다. 우현은 물에 떠 있기 위해 팔과 다리를 물 안에서 젓고 있었다. 한낮의 태양 아래서 우현의 얼굴이 해쓱해 보였다. 여진은 점점 더 화가 나서 양손으로 튜브를 팡팡 쳤다.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온 거 아냐? 이럴 거면 도대체 여기까지 왜 왔어?
너는 수영도 할 줄 모르면서 뭘 같이 하자는 거야? 우현은 젖은 손으로 하얀 얼굴을 쓰다듬었다.
말다툼을 계속하던 중에 여진은 둘이 해변에서 꽤 멀어진 것을 알게 됐다. 순간 겁이 덜컥 나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언제 이렇게 멀리까지 온 거지? 어떻게 이렇게 멀리까지 온 거지? 주변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에 단둘뿐이었다. 여진은 우현을 한 번 노려본 후에 해변을 향해 몸을 돌리고 발을 차기 시작했다. 우현이 옆에서 수영을 했고 금방 여진을 앞질러 갔다. 우현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던 여진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여진에게로 다시 돌아온 우현이 물었다. 날 좀 끌어내라고. 우현이 여진의 튜브를 한 손으로 잡고 수영을 하는 동안 여진은 뒤로 누워 튜브에 등을 기댔다. 뜨거운 햇살이 얼굴에 닿았다. 여진은 눈을 감았다. 내가 배영 할 줄 아는 거 몰라? 뭐? 나 배영 할 줄 알아. 그래, 내가 가르쳐줬잖아. 그걸 알면서 왜 나한테 수영 못한다고 했어? 여진은 튜브 위로 다리를 꺼내올렸다. 튜브에 완전히 몸을 누이고서 우현의 팔과 다리가 물을 가르는 소리를 들었다. 나한테 다시는 수영 못한다고 하지 마.
저녁 준비를 하면서 우현은 혼자 분주하게 움직였다. 화롯대를 설치하고 숯에 불을 붙이고 고기를 구웠다. 같이 하자며 여진이 일어날 때마다 우현은 여진의 어깨를 잡아 도로 앉혔다. 할 줄 아는 사람이 해야 돼. 우현은 익은 고기를 테이블 위의 접시로 옮겼다. 여진은 일부러 입을 벌리고 소리를 내며 고기를 질겅질겅 씹었다. 우현도 자리에 앉고, 고기가 수북하던 접시를 거의 다 비우고, 차례차례 술병을 비우는 동안 해가 졌다. 술에 취한 여진은 우현의 담배를 집어들었다. 우현이 안주가 필요하지 않냐고 말하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밤이 어두웠다. 우현은 헤드 랜턴을 차고서 고기를 구웠다. 우현은 광부처럼 보였다. 여진은 컴컴한 우현의 얼굴을 보면서 담배 몇 개비를 연달아 피웠다.
여진과 우현은 술에 취해서 바닷가에 나란히 앉았다. 여진이 폭죽을 터뜨리자고 했고, 우현이 일어나 매점에서 폭죽을 사왔다. 이러니까 우리 대학 다닐 때 생각난다. 여진과 우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기 시작했다. 둘이 학교 엠티에서 폭죽을 사겠다고 나가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길에서 개 하나가 튀어나와서 네가 막 소리를 지르고, 나는 무서워서 울고…… 여진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우현은 폭죽에 불을 붙여 그녀에게 건넸다. 그런데 그 개가…… 그때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우현이 소리를 질렀다. 우현의 다리에 불이 붙어 있었다. 우현은 모래를 뿌려 불을 껐다. 희미한 가로등 빛에 우현의 다리가 검게 그을린 것이 보였다.
폭죽을 거꾸로 들고 있었나봐. 우현이 옆으로 집어던진 폭죽에선 계속해서 불꽃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여진이 들고 있던 폭죽도 뒤늦게 불꽃을 토해냈다. 여진은 손에 폭죽을 든 채로 우현의 다리가 빨갛게 부풀어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냐? 괜찮아. 안 괜찮아 보이는데? 정말 괜찮아, 이러다 나을 거야. 여진은 잠시 침묵하다 우현이 사온 다른 폭죽에 불을 붙였다.
폭죽을 다 써버린 후 여진과 우현은 밤바다를 걸었다. 가로등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모래사장의 어둠 속 여기저기에 연인들이 바위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우현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었다. 다리의 상처가 그새 거무죽죽하게 곪아 있었다. 여진은 고개를 돌렸다. 우현이 이런저런 얘기를 했지만 여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우현은 계속해서 말을 했다. 여진은 방향을 틀어 바다로 걸어갔다. 슬리퍼를 신은 발이 물에 잠기고, 무릎이 잠기고, 반바지가 다 잠길 때까지 걷다가 우뚝 멈춰 섰다.
우현아! 여진은 뒤를 돌아 우현에게 팔을 크게 흔들었다. 우현이 따라서 손을 흔들었다. 여진은 물 밖으로 걸어나와 슬리퍼부터 반바지와 티셔츠, 속옷까지 다 벗고서 다시 바다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빠른 속도로 걸었다. 검은 바닷물이 빠르게 여진을 타고 올랐다. 여진은 물 위에 몸을 누였다. 달이 저 높이에서 하얗게 빛을 내고 있었다. 여진은 바닷물 위로 얼굴과 가슴을 내놓고 배영을 했다. 다리를 젓고 또 저었다. 힘이 빠져 더이상 다리를 저을 수 없자 눈을 감았다. 달이 사라졌다. 물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차고 외로웠다. 이 기분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우현은 여진보다 먼저 텐트에 들어갔다. 여진은 접이식 의자에 앉았다. 우현이 코를 골기 시작했을 때 여진도 텐트로 들어갔다. 우현은 반짝이는 검은색 침낭 안에서 똑바로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우현은 아주 잘 보관된 미라처럼 보였다. 우현의 옆에 깔려 있는 침낭 위에 여진도 몸을 누였다. 여진은 텐트의 노란 천장을 노려보다 일어나 앉았다.
일어나봐. 여진이 우현을 깨웠다. 우현은 몸을 뒤척이기만 하고 일어나지 않았다. 우현아, 일어나봐. 여진이 한참 흔든 후에야 우현이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리 돌아가자. 뭐? 너무 추워서 도저히 잘 수가 없어, 집에 가자. 우현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실눈을 뜨고 여진을 올려다보다 도로 눈을 감았다. 네가 침낭에 안 들어가 있으니까 그렇지, 이거 되게 좋은 침낭이야, 들어가 봐, 엄청 따뜻해. 들어가 봤어, 정말 못 자겠어, 집에 가서 잘래. 조금 있으면 아침이야, 조금만 참다가 그때 가자. 아니, 지금 갈래, 나 너무 추워.
우리 그냥 못 가, 텐트도 걷어야 하고…… 우현은 눈을 감은 채로 손을 침낭 밖으로 꺼냈다. 우현의 손이 텐트 바닥의 이곳저곳을 더듬다가 여진의 허벅지 위로 올라왔다. 우현은 여진을 달래듯 다정하게 그녀의 다리를 두드렸다. 여진아, 다시 자려고 해봐.
빨리 일어나, 나 지금 갈 거야. 잠시 그대로 누워 있던 우현은 천천히 눈을 뜨고서 침낭의 지퍼를 아래로 끌어내리고는 상체를 일으켰다. 우현은 조용히 몸을 침낭에서 빼내고는 침낭을 접었다. 여진은 말없이 우현을 보기만 했다. 그만 해. 우현은 에어 매트에서 바람을 빼서 백에 넣고, 밖으로 나가 텐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밖은 어두웠다. 여진은 접이식 의자 위에 놓여있던 랜턴을 들어 우현에게 불을 비추어주었다. 우현이 쭈그려 앉아 땅에 박힌 못을 빼내다 말고 일어났다.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까 그만 해.
여진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우현은 다시 앉아서 못을 마저 뽑았다. 우현이 텐트를 빙 돌아가며 못을 뽑는 동안 여진은 그를 따라 자리를 옮기면서 랜턴으로 그의 손을 비추었다. 우현이 지지대를 뽑아서 추리고, 텐트를 차곡차곡 접는 동안에도 랜턴의 불빛은 그의 손 위에 머물렀다.
서울로 올라오는 차에서 우현은 여진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얼굴이 해쓱해. 머리 아파,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가봐, 두통약 가진 거 없어? 우현은 차를 갓길에 대고 뒷좌석에 있는 상자에서 감기약을 꺼내서 여진에게 건넸다. 두통약은 아닌데, 그게 그거일 거야. 여진은 물도 없이 알약을 아그작아그작 씹어서 삼켰다. 입안이 썼다. 더운 바람이 차 안으로 불어 들어왔다.
문을 여니 고양이가 현관에서 꼬리를 잔뜩 세우고 있었다. 여진은 문 옆에 서서 우현이 몸을 굽혀 고양이를 쓰다듬는 것을 보았다. 고양이가 등을 높이 세우고 우현의 다리에 자기 몸을 비볐다. 다리에 난 상처에서는 진물이 나고 있었다. 고양이의 하얀 털에 진물이 묻었다. 여진은 문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복도에 주저앉아 울었다. 아주 오랫동안 여진은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서 울었다.
서수진
사랑을 더이상 손에 움켜쥘 수 없을 때에도 그것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사라져버린 것에 대해,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에 대해 쓰고 싶었다. 내 글이 사랑을 위한 것이기를 바란다.
2017/12/26
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