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을 구한 지 한 달이 되어 간다. 내가 세 든 곳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이곳은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큰 규모의 유통 상가라는 소개가 나와 있다. 처음 오는 사람들은 이곳에 들어와 헤매기 십상이다. 헤매다보면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큰 규모라는 허풍 같은 말이 갑자기 실감이 난다. 그럴 만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빠는 이곳이 처음 생겼을 즈음 영등포에서 이쪽으로 옮겨왔고, 나도 몇 년 전부터 아빠의 가게에서 일해왔기 때문에 나는 이곳이 익숙하다. 이곳에 작업실을 구하게 될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여러 개의 구역으로 나뉜 이곳은 사무실이 꽤 많지만(아마 천 개쯤은 될 것이다), 기본적으로 공간 자체는 모두 똑같이 생겼다. 넓은 상가 안에 있는 사무실은 모두 똑같이 생겼지만 그 안은 모두 조금씩 다르게 꾸며져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와 일하고 있다. 일의 종류도 천차만별이다. 일층에 가게를 하면서 사무실은 창고 용도로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시아 국가 여기저기로 출장을 다니는 프로그래머가 종일 컴퓨터를 만지는 사무실도 있고, 무역 회사도 있으며, 교회 사무실도 있다. 나처럼 책상을 하나 놓고 글을 쓰는 작업실의 용도로 상가 사무실을 빌린 사람이 또 있을지는 모르겠다.

   작업실의 소파에 앉아 창문 밖을 힐끔거리다보면 이 상가 안에 있는 다른 사무실들이 궁금해지고 그러다보면 이 도시의 사람들과 다른 도시의 사람들이 궁금해진다. 이번에 주문한 책 세 권은 가까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꽤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앉은 자리에서 도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재밌는 일이어서 나는 세 권의 책을 옆에 놓고 빙글빙글 돌려본다.


   박솔뫼의 『우리의 사람들』(창비, 2021)



   도시 이야기를 박솔뫼만큼 잘 쓰는 작가가 있을까? 나는 박솔뫼가 쓴 광주 이야기를 읽으며 광주에 가보기 전부터 그 도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우리의 사람들』은 광주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부산 이야기다. 이 소설집의 주인공들은 부산을 산책하듯 걸어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성당에도 들어가보고 양손에 포도 한 박스와 치킨을 들고 집으로 걸어가면서 이러다 누군가를 만나 그의 집에 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그러다 임시로 빌린 휑한 아파트의 밥을 먹는 테이블에 앉아 글을 쓰고 읽고 싶은 것을 읽고 일을 하고 부산의 일자리와 대학원과 집값을 알아본다. 바닷가에서 달리기를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러지는 않고 그냥 근처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뛴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 「매일 산책 연습」에서 광주와 부산과 이 도시에 사는 ‘최선생’이라는 예순 넘은 여자의 이십대 시절이 겹쳐지는 순간은 마법이라는 말을 쓰기가 멋쩍으면서도 마법 같다고밖에 말하지 못하겠다.


   김정연의 『이세린 가이드』(코난북스, 2021)



   만화 『이세린 가이드』의 배경은 어디일까? 서울의 어떤 동네일 것 같기도 하고, 인천이나 부천 같은 도시일 것 같기도 하다. 김정연의 전작 『혼자를 기르는 법』(창비, 2017)도 그랬지만, 『이세린 가이드』는 현대 도시에 사는 여성의 삶을 매우 잘 그려낸다. 정말이지 ‘잘’이라고 밖에는 함축할 수 없다. 현실적이고 디테일하고 철학과 재미와 감동과 재치와 근사함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신선한 책에 그런 식상한 표현을 가져다 붙이는 것은 모독처럼 느껴진다. 이 책의 주인공 ‘세린’은 어느 도시 한구석에 있는 작업실에서 열심히 음식 모형을 만든다. 원래 자연사 박물관에서 멸종된 공룡 같은 큰 모형을 만드는 게 꿈이었던 세린은 우연과 부서 배치의 장난으로 음식 모형 만드는 일을 시작하게 되어 당황하지만, 지금은 회사에서 나와 프리랜서 음식 모형 제작자로 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김치 모형을 만드는 건 김장을 하는 일과 생각보다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비빔밥 모형을 만들 때는 나중에 비슷한 주문이 들어올 때를 대비해 고사리와 콩나물 등 여러 나물의 모형을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새로운 직업에 대해 이러한 디테일을 알아가는 것도 참 흥미롭지만, 김치 모형 만드는 에피소드에 집안 여자들이 모여 김장하는 이야기가 겹쳐지거나 비빔밥 에피소드에 매년 제사를 지내고 나서 엄마와 둘이서 남은 나물로 비빔밥을 먹어야만 했던 기억 때문에 비빔밥을 별로 안 좋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같은 것이 겹쳐지면 어쩔 수 없이 이 책에 과몰입하게 된다.
   절대 보내지 말라고 당부했는데도 결국 엄마가 김치를 택배로 보내온 것을 본 주인공 세린이 자신의 복층 원룸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는 쓸쓸한 뒷모습을 비추는 장면에는 이런 나레이션이 덧붙어 있다. “실은 밤새 눈물이 났는데, 정확히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간만에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 것일 테다. 그건 미움도, 짜증도, 고마움도 아닌 아직 이름 붙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수차오 외 6인의 『도톰한 계란말이』(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21)



   이 책 『도톰한 계란말이』를 읽고 상하이에 가보고 싶어졌다. 『도톰한 계란말이』는 1980년대생 젊은 중화권 작가 일곱 명의 단편을 묶은 소설집이다. 다른 소설들도 괜찮지만 1980년에 상하이에서 태어난 여성 작가 ‘수차오’가 쓴 표제작 「도톰한 계란말이」는 단편소설의 왕이 쓴 것 같은 소설이다. 한국의 조남주 같다는 느낌도 든다. 여기와 다르지만 닮은 도시에서 나와 다르지만 닮은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살면서 종종 내가 느낀 것과 비슷한 기분을 경험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라는 말을 붙여보고 싶어지고, 그러다 박솔뫼의 소설집 『우리의 사람들』로 다시 돌아간다. 단편집은 정말 여러 트랙이 담긴 음반과 비슷한 데가 있다.

이종산

소설가, 에세이스트. 틴에이지 로맨스를 좋아하고, SF와 판타지도 종종 씁니다.

2021/03/30
4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