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이자 메신저인 미디어 없는 삶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미디어는 현실에 대한 인식과 타인에 대한 이해, 아니 삶을 영위하는 거의 모든 것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문학이 위험하다면 미디어도 그렇다. 아니 어쩌면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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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범죄?


   실화에 바탕한 원작, 원작에 대한 유의미한 해석을 담은 압도적인 TV 시리즈가 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 『그레이스』를 원작으로 한 TV 시리즈〈그레이스 Alias Grace1)(2017)는 캐나다의 악명 높은 여성 범죄자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여성 범죄를 우리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룬다. 그레이스를 통해 확인하게 되는 것은 그레이스의 범죄 여부 자체가 아니라 이민자 출신으로 하녀생활을 하던 19세기 하층계급 여성의 삶이다. 사건의 진실을 찾고자 하는 이들의 행보는 매번 실패하며, 끝내 그레이스에게 매혹되고 마는 그들에게 과연 범죄란 무엇이며 여성에게 범죄란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의 관점에서 범죄인가와 같은 질문들이 남겨진다.
   한 여학생의 자살 이후 그녀가 남긴 카세트테이프가 배달되면서 시작하는〈루머의 루머의 루머 13 reasons why2)(2017~2019)는 미국 TV 시리즈답게 팽팽한 미스터리적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청소년, 특히 여성 청소년이 처한 어려움을 당대의 문제로서 꽤 진중하게 다룬다. 열세 명에게 그녀가 남긴 이야기를 통해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가해와 방관 사이의 경계와 그 경계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서서히 무너뜨린다. 관련해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TV 시리즈 시즌이 끝난 후 출연 배우와 전문가들이 모여 드라마의 의미를 논의한 특집 기획이다. 특집 기획을 통해 성폭력 가해자를 연기했던 배우가 성폭력의 연기나 그 표현 문제를 논의함으로써, 성폭력 장면의 미디어적 재현에 대한 성찰적 시선을 마련하려는 노력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 13 reasons why


   악녀: 영웅 혹은 악당?


   범죄를 통해 인간의 본성과 욕망 자체를 깊이 들여다보는 영국 TV 시리즈〈브로드처치Broadchurch3)(2013~2017)의 앞선 시즌들이 모두 우열을 겨루기 어려울 정도로 매력적이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성폭력 고발이 이루어진 이후 그것을 다루는 사회적 대처를 확인할 수 있는 시즌 3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교육용 매뉴얼로 활용해도 좋을 만큼 정석대로 처리되는 성폭력 사건은 악랄한 범죄이자 큰 불행이지만 사회가 한 단계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브로드처치〉와 더불어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관철하는 강한 여성을 만날 수 있는 영화〈미스 슬로운 Miss Sloane4)(2017)에 열광했다면, 엘리트 여성만을 대상으로 한 연쇄살인범을 잡는 여성 형사 이야기인 영국 TV 시리즈〈더 폴 The Fall5)(2013~2016)에도 쉽게 매혹될 것이다. 열광의 시간 틈으로 우리는 어떤 여성의 재현을 기다리고 있는가, 페미니즘 서사는 누구 혹은 무엇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들을 곱씹게 된다.


〈더 폴 The Fall


   여성 연대?


   생리컵에 대한 관심을 이끈 김보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피의 연대기〉6)(2017)를 보면서 서구의 어느 곳에서는 임신을 원하지 않는 여성이 전문가와 상담을 하면서 생리 자체를 조절하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떤 생리대인가가 아니라 생리 자체도 선택할 수 있다는 발상을 해보지도 못하다니, 여성의 몸에 대한 나의 상상력이란 얼마나 나태한가. 생리대에 대한 또 하나의 다큐멘터리 영화〈피리어드: 더 패드 프로젝트 Period: End of Sentence7)(2018)는 생리가 부끄러운 일이고 숨겨야 하는 일인 여성들의 생리를 다룬다. 뉴델리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인도의 농촌 마을 여성들의 생리대를 둘러싼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나면 말문이 막히고 한숨이 나온다. 전 세계의 모든 여성이 생리하는 생애주기를 사는데도, 생리하는 여성들 사이의 거리는 왜 이렇게 먼 것인가.
   미국 TV 시리즈〈믿을 수 없는 이야기 Unbelievable8)(2019)에서 성폭력 피해를 신고하고 번복하고 다시 진술을 번복한 후 끝내 피해 사실을 부인한 한 십대 소녀의 성폭력 사건이 그녀를 거짓말쟁이로, 주변의 사람들을 모두 떠나가게 하고 일상을 지속하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기반한 다큐멘터리 소설이 원작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그럴 듯하지만 만들어진 가상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각기 다른 곳에서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던 여성 형사들, 그 형사들과 한 번도 직접 만난 적 없지만 그들 덕분에 삶과 사회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게 된 여성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느슨하지만 단단한 연결들을 보면서, 여성 연대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게 된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 Unbelievable


   여성 롤모델


   미디어가 여성을 다루는 방식이 갖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성혐오처럼 다 알고 있으나 입증하기 어렵다. 다큐멘터리 영화〈미스 리프리젠테이션 Miss representation9)(2011)은 다양한 통계와 수치, 자료, 각계각층 전문가의 인터뷰 등을 통해 막연하게만 알고 있는 사실을 좀더 명료하게 정리해준다. 여성 리더에 대한 미디어의 태도 역시 우리가 이미 알고 있으나 자료를 통해 직접적으로 확인하자면 기묘한 오싹함에 사로잡히게 된다. 여성 리더들을 외모와 스타일로만 축소해버리는, 말하자면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사태 자체에 분노하게 되지만, 그것이 결국 여성들에게 롤모델이 없다는 판단으로, 여성의 자기대상화로 여성 스스로에 대한 자책으로 되돌아오게 된다는 사실까지 떠올리자면 분노보다 공포가 앞선다.
   2000년, 그녀 나이 60세에 미연방 대법원에 대법관으로 지명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 RBG10)(2018)는 미국 임신중절법 폐지를 둘러싼 좀더 긴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제인 로 케이스 뒤집기 Reversing Roe11)(2018)와 함께 보면 이해가 깊어진다. 미국에서는 1973년 ‘로 대 웨이드 Roe v. Wade’ 판결로 임신중절을 여성과 의료진 사이에서 결정될 여성의 자기결정권으로 보장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판결을 뒤집으려는 시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왔고, 현재 미국에서 임신중절법은 진보와 보수의 경계를 가르는 가장 첨예한 문제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낙태죄 헌법불일치’ 판결로, 여성의 권리 확보를 위한 진전된 논의가 시작되었으나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한 사안이다.
   〈제인 로 케이스 뒤집기〉에서는 특히 미국 대학 내 설치된 성직자 상담 서비스를 통해 성과 임신 문제로 상담을 청한 여성들이 임신중절의 이유를 묻지 않았음에도 이유를 말하려고 했으며 그 이유들을 들으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고 밝힌 교목이나 임신중절법 관련 법안 통과를 열세 시간의 필리버스터로 막았던 민주당(텍사스주)의 웬디 데이비스(Wendy Davis) 상원의원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소수자와 약자를 위해 행동하는 이들과 그들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그렇듯 진한 감동을 안겨준다. 감동을 안긴다는 차원에서 미국에서의 퀴어 운동과 미투 운동의 신뢰할 만한 지지자인 변호사 글로리아 올레드(Groria Allred)의 행보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글로리아 올레드: 약자 편에 선다 Seeing Allred12)(2018)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여성들이 누리는 법적 권리와 일상적 자유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님을, 앞선 여성들의 인생을 건 도전과 투쟁을 통해 이룩된 것임을 알려준다. 무엇보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당신이 찾는 여성 롤모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소리 높여 외친다.


〈글로리아 올레드: 약자 편에 선다 Seeing Allred


   임파워링!


   페미니스트로 사는 일에 좀 지친다면, 페미니스트로 사는 일이 너무 막막하게 느껴진다면, 다큐멘터리 영화〈페미니스트: 닫힌 문을 열고 Feminists: What Were They Thinking13)(2018)를 봐도 좋다. 뭔지 모를 용기와 기운을 얻게 된다. 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한창이던 때에 페미니스트들의 사진을 찍었던 포토그래퍼가 40년 후 그녀들의 지금 현재의 모습을 찍어, 두 사진을, 두 사진들 사이에 놓인 40년의 시간을 함께 전시한다. 이상하게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지 싶다. 70년대의 그녀들이, 지금 이곳의 그녀들이, 반세기 가까운 그 시간을 채운 그녀들이 너무 멋있고 뿌듯하고 이상하도록 고맙다는 생각에 뜨거운 눈물이 난다. 한국 영페미니스트의 그때와 지금의 기록인 강유가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우리는 매일매일〉13)(2019)과 함께 보면 한국의 페미니스트의 역사에 대한 아카이빙에 곧바로 나서고 싶다는 생각을 뿌리치기 힘들어진다.


〈페미니스트: 닫힌 문을 열고 Feminists: What Were They Thinking


   덧붙이며: 미디어는 위험하다


   그간 없었던 여성 인물이 등장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경향 변화는 월트 디즈니사 전CEO 마이클 아이스너(Michael Eisner)의 “역사를 만들 의무는 없다. 예술을 만들 의무도 없다. 성명을 발표할 의무도 없다. 이윤 창출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다.”라는 메모와 조금도 충돌하지 않는다. 오리지널 콘텐츠를 통해 생산과 유통과 분배 전체에 대한 장악력을 확대해가는 넷플릭스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넷플릭스가 취하는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명백한 관심에도 일정한 거리두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자본주의의 기묘한 역설처럼 성차별주의나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관심이 이윤 창출이라는 목표에서 생겨나기도 한다. 우리가 무방비 상태로 미디어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해도 미디어의 일방적인 공략에 수동적으로 노출된다고 단정 지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사실 계급, 젠더, 인종, 성적 지향에 대한 편향을 기준으로 미디어 콘텐츠를 섬세하고 날카롭게 읽는 일만큼 아니 그보다 더 콘텐츠 뒤로 몸을 숨긴 미디어의 하드웨어적 면모에 대한 비판적 관심이 긴급하다. 겉으로는 쉽게 확인되지 않으며 사실 거의 드러나지도 않는다는 사실은, (비록 여기에는 다 담지 못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미디어 콘텐츠의 생산 주체와 유통 시스템, 즉 누가 누구를 대상으로 누구의 관점을 대변하면서 콘텐츠를 만드는가 혹은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보게 하는가의 차원에 대한 관심이 좀더 강화되어야 하는 시대임을 역설한다. 미디어가 우리의 삶 자체를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자면, 미디어의 하드웨어적 측면에서의 민주주의 실현이야말로 우리 삶의 민주주의 실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