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다 쿵따리〉(MBC)1)



   왼손엔 갓 내린 커피, 오른손에 리모컨을 쥔 평화로운 아침. TV 속에선 흉계와 모욕이 오가고 나는 눈곱을 뗀다. 마침 한 여자가 다른 여자의 뺨을 매섭게 후려친 참이다. 때리는 쪽이 악역 같지만, 그 반대다. 뺨을 맞은 여자는 아픈 딸을 돌보는 남자를 찾아가 병을 치료할 신약을 주는 대가로, 주인공과 헤어지라 요구했었다. 뺨을 때린 주인공은 아이를 볼모로 남자를 차지하려는 여자의 파렴치함에 분노했을까? 미묘하다. 거래 조건에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그런 요구를 자신에게 먼저 말하지 않았다며 꾸짖는다.
   드라마에서 이런 거래는 대상이 모르게 진행되어왔다. 부당한 요구를 혼자 감당한 여자 주인공이 (잠시!) 남자를 떠나고 진상을 (뒤늦게!) 파악한 남자와 재회가 이루어져야 하건만, 아침드라마 <모두 다 쿵따리>의 악역은 상대를 잘못 찾아갔다. 이를테면, 드라마의 공식을 위반해서 맞은 셈이다. 나는 드라마 속에서 오래 반복해온 규칙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들을 무척 좋아한다. 새로운 시도는 대개 미니시리즈 포맷에서 이루어지고 주로 챙겨보는 것도 미니시리즈지만, 가끔은 관습이나 개연성을 어처구니없이 뛰어넘는 아침드라마를 만나 웃음이 터진다.
   미니시리즈에 익숙하다가 아침드라마를 틀면 ‘저 인간들이 왜 저렇게 악을 쓰나!’ 흠칫 놀란다. 출근 시간대의 생활 소음과 집중이 어려운 시청환경에 대응하는 아침드라마는 큰소리로 대화하고 전회 내용을 대사로 요약하며, 중요한 비밀을 혼잣말로 폭로한다. 선명한 악인이 자잘한 음모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이를 빠르게 응징하는 통쾌함은 아침드라마 시청층을 붙드는 짧은 주기의 보상이 된다. 하지만 시청환경과 시청층이 다른 밤 10시 미니시리즈, 특히 스릴러나 미스터리 장르물에서 클라이맥스 전에 배경음악이 먼저 나서서 설치고 플래시백을 남발하고, 주인공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입으로 떠들고 있으면, 나도 되받아치고 만다. “아침드라마냐!”


   〈WATCHER〉(OCN)2)



   아침드라마가 제공하는 유의 ‘친절’과 가장 먼 자리에 〈watcher〉(이하 〈왓쳐〉)가 있다. 경찰청 내부비리를 수사하는 감찰 4팀 도치광(한석규) 반장의 말은 짧고 나직하다. 팀에 합류한 순경 김영군(서강준)은 어머니를 살해한 경찰 아버지를 둔 인물이다. 많은 경찰 캐릭터들이 오명을 쓴 가족의 복권 혹은 복수를 위해 움직이지만, 영군은 그럴 수 없다. 복수와 회복을 갈망하는 역할은 대개 단순 조력자 역할에 머물던 자문변호사 한태주(김현주)가 가져간다. 〈왓쳐〉는 익숙한 경찰 수사물의 좌표를 흔들고, 각자의 목적과 수단이 협력하고 또 충돌하는 과정을 통해 선과 악을 가변적인 개념으로 다룬다. 웰메이드 수사극을 여럿 꼽을 수 있지만, 〈왓쳐〉의 대사는 각별하다. 극 안에서 맥락을 공유하는 이들끼리 주고받는 간결한 대사는 불특정 다수의 산만한 시청자들이 5분만 봐도 내용을 파악할 만큼 친절하지 않다. 〈왓쳐〉는 귀를 바짝 세우고 화면 속 대화의 당사자들에게 온 신경을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대신, 생략된 말과 말을 감춘 이의 속내를 추측하면서 인물 안으로 파고드는 쾌감이 있다.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tvN)3)



   드라마 속 인물들도 드라마를 본다.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이하 〈검블유〉)의 차현(이다희)은 아침드라마 ‘장모님이 왜 이럴까’에 푹 빠졌다. 전신성형을 한 장모님이 사위를 유혹하는 ‘막장’ 드라마를 매일 챙겨보던 차현은 천하의 나쁜 놈, 사위역의 신인배우 설지환(이재욱)을 우연히 만나고 그의 평소 모습을 새삼스럽고 신기한 시선으로 뜯어본다. 왜 신기할까? 악역을 연기하는 모습에만 익숙했기 때문이다. 차현의 세계도 그렇다. 점유율 1, 2위를 다투는 두 포털사이트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주인공인 〈검블유〉는 전문직 여성이 일과 사랑을 성취하는 트렌디 드라마의 외피를 입었다. 어느 날 회사에 ‘본부장’이 부임하고, 그와 함께 일하고 연애하는 드라마들 말이다. 다만, 대기업 회장도 여자고, 대표도 여자고, 이사도 본부장도 팀장도 여자다. 남자가 없는 세계는 아니다. 또다른 주인공 배타미(임수정)도 연인이 있고, 송가경(전혜진)은 남편이 있다. 하지만 가치관과 자아실현에 영향을 주고, 매료되고 경쟁하며 욕망하는 대상이 여자다.
   처음엔 트렌디 드라마의 반전이라 여겼다. 신기한 시선으로 뜯어봤다. 왜 신기할까? 저 역할들이 모두 남자인 게 익숙했다. 특히 주요 배역 ‘본부장/팀장’은 대부분이 남자다. 현실이 그렇지 않느냐 묻는다면, 여초 직업군에 남자 상사가 낙하산으로 내려오는 드라마 속 비현실 인사발령은? 여성이 주로 소비하는 장르, 여성의 욕망에 봉사해온 장르를 틀로 삼아 〈검블유〉는 여성이 남성을 경유해 일과 사랑으로 성장하는 서사를 점검한다. 차력하듯 애쓰지 않는다. 그저 주로 남자가 맡던 자리와 역할의 독점을 해제한 것뿐이다.


   〈동백꽃 필 무렵〉(KBS)4)



   〈동백꽃 필 무렵〉의 옹산 게장 골목도 여성 사장님들이 즐비하다. 그들은 가벼운 안부 인사에도 묵직한 빈정거림을 담는 고맥락 화법의 달인이다. 소문도 뒷말도 많은 동네. 혼자 아이를 키우는 외지인 동백(공효진)은 두루치기를 파는 술집을 연다. 동백의 가게 ‘까멜리아’의 첫 간판은 ‘장미’나 ‘여왕벌’처럼 뭘 하는 곳인지 애매한 성매매업소 간판을 닮아 있었다. 설마하니 동백이 간판을 그렇게 주문했을까? 내부를 볼 수 없는 가게, 여성이 운영하는 술집은 의례 그쪽이라 여겼을 간판 가게의 편견을 읽는다. 시간이 흐르고 간판을 바꿔 달아도 게장 골목 이웃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그렇게 옹산 6년 차. 파출소 순경으로 고향에 돌아온 황용식(강하늘)이 동백에게 반한다. 연쇄살인범과 예고된 희생자가 있는 드라마에서 동백을 ‘사시사철 불철주야’ 지키겠다고 순박한 얼굴로 졸졸 따라다니는 용식이 공권력과 로맨스의 경계를 흐릴 때마다 내심 불편했다. 용식의 관심이 닿지 않는 사람은 누가 지키는지 묻고 싶었다. 용식이 슈퍼맨처럼 활약할수록 거북해지던 마음은 동백을 배척하던 게장 골목 여성들이 까멜리아에 모이면서 따끈하게 풀어졌다. 사람을 구하고 지키는 일은 용식 혼자로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돌아왔구나 싶었다. 내 새끼를 위해서 뭐든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막강한 모성이 극 후반부를 휘어잡더니, 결국 “나중에 말고 당장 야금야금 부지런히 행복”해야 한다는 말로 숨통을 틔웠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는 얘기가 이 드라마에도 통한다. 그리고 끝까지 가서 남은 앙금도 있다. 그 대단한 엄마가 없었던 최향미(손담비)의 죽음이다.


   〈눈이 부시게〉(JTBC)5)



   하반기에 〈동백꽃 필 무렵〉이 있다면 상반기는 〈눈이 부시게〉가 있었다. 스물다섯 김혜자(한지민)가 시간을 돌려 아버지를 구하고, 그 대가로 칠십대 혜자(김혜자)로 늙어버리는 이야기. 〈눈이 부시게〉는 “젊은 내가 늙은 꿈을 꾸는 건지, 늙은 내가 젊은 꿈을 꾸는 건지”도 모르는 순간에 도달한다. 젊음과 늙음은 얼핏 반대의 개념 같고, 얼마나 먼지도 막연하다. 제작진은 둘 사이에 구체적인 접점을 만들고 실감을 부여하기 위해 냄새, 빛, 촉감 등의 감각을 예민하게 일깨운다. 갑자기 늙어버린 혜자가 며칠 전 벗어둔 자기 옷가지에 얼굴을 파묻고 이십대 시절의 냄새를 맡을 때, 나도 같이 숨을 들이켰다. 젊은 혜자는 어묵탕에 뜬 기름기가 무지개색으로 번들거리는 모습을 들여다보다가 엉뚱하게도 언젠가 오로라를 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는다. 나이 든 혜자는 동네에 밥 짓는 냄새가 풍길 무렵 사랑하는 남편이 노을빛을 담뿍 받고 집에 돌아오던 어느 저녁을 생생하게 떠올린다. 이루지 못한 소망과 지속하지 못한 일상이 나란히 놓이고, 한 사람의 인생으로 수렴한다. 올해의 드라마고, 인생의 드라마다.


유선주

텔레비전 드라마에 관한 글을 쓴다. 드라마의 가치나 효용, 몰입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화해, 위안, 성장에는 별 관심이 없다.

2019/12/31
2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