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을까. 신종 바이러스 감염증이 발발한 지도 어느덧 4개월이 지났다. 그새 전 세계 100만여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사람들은 서로에게 거리를 두는 일상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전염이 끝없이 이어지자 세계보건기구는 판데믹을 선언했다. 인류가 빼도 박도 못할 위험에 처해 있다는 공표인 셈이었다.
   그 인류 중 한 사람, 신민주의 사정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마스크는 언제 받을 수 있는 건데?”
   마스크. 그놈의 마스크가 문제였다. 침을 통해 바이러스가 전염되는 탓에, 전 국민이 마스크를 구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열 배, 스무 배 비싸게 파는 마스크도 없어서 못 구하는 형편이었다. 그 틈을 타 제약 회사 간부의 딸 신민주는 아이들에게 마스크를 팔아먹었다. 장당 1,000원의 수수료를 받았으니, 아이들은 꽤나 큰돈을 쓴 셈이었다. 그런데 그 귀한 마스크를, 신민주의 아버지가 운반 중에 홀라당 잃어버리고 말았다.
   “걱정 마. 내가 곧 찾아줄 테니까!”
   핸드폰 화면 속 신민주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들은 복장이 터져 아우성쳤다. 텅 빈 학교의 교문 앞이 간만에 소란스러워졌다.
   “격리 중인 주제에 무슨 수로 찾아?”
   핸드폰을 든 반장이 짜증스레 외쳤다. 그도 그럴 것이 신민주는 오늘부로 자가격리를 시작했다. 신민주의 아버지가 지난밤 확진 판정을 받은 것이다. 치사율이 높지는 않아도 전염성이 워낙 강한 바이러스라, 확진자와 접촉한 사람들은 14일간 집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규율이 있었다.
   “나 학원 못 가면 네가 책임질 거야?”
   한 아이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마스크 없이는 입장할 수 없는 학원에 다니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의 한숨 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사회적으로 거리를 두라는 국가의 지침 앞에서도 학원은 야금야금 잘만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책임질게.”
   순간 교문 앞이 정적에 휩싸였다. 잠자코 아이들 뒤에 서 있던 나, 오세정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아이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쟨 누구야?”
   “몰라. 왜 깝쳐?”
   개학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나와 통성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친구를 사귀는 데 제법 신중한 타입이었다.
   내가 아이들을 뚫고 카메라 화면의 중앙에 나타나자 신민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우리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이다.
   어젯밤 열한 시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상대방은 다짜고짜 소리쳤다.
   “오세정, 나 좀 살려줘!”
   신민주였다.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으나, 눈인사 정도만 나누는 서먹한 우리였다. 그런데 신민주는 너한테 내 목숨이 달렸다느니, 너밖에 없다느니 온갖 절절한 말들로 내게 구조 요청을 보냈다. 마스크 때문이었다.
   “왜 하필 나한테 부탁하는 거야?”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신민주는 잠시 말이 없더니 대답했다.
   “너는 생리대 빌리면 꼬박꼬박 갚는 유일한 애였거든.”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그러려니 했다. 덜렁거리는 성격 탓에 생리대를 종종 빌려 썼는데, 신민주도 개중 하나였나 보다.
   “일당은 섭섭지 않게 쳐 줄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안 그래도 돈이 고픈 차였다. 나는 눈을 빛내며 액수를 물었다. 신민주는 일당 3만 원을 불렀다. 나는 콧김을 뿜었다.
   “완전 섭섭한데? 목숨 걸고 일하는데 위험수당까지 쳐 줘야지.”
   신민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일당 4만 5천 원에 우리의 공조가 시작된 것이다.
   “염병들 하고 있네.”
   반장이 셀카봉을 접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지금 이게 장난으로 보이냐?”
   반장은 마스크 못 찾으면 고소당할 준비나 하라고 신민주에게 윽박지르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내게 힘주어 말했다.
   “오세정, 마스크 반드시 찾아. 너한테 우리 반 절반의 운명이 달려 있으니까.”
   꽤 숙연해진 가운데 아이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이렇게 중차대한 일에 돈 벌겠다고 괜히 응했나. 운동장 구령대 위로 나부끼는 태극기가 괜스레 처량해 보였다.
   결국, 나는 돈을 택했다. 위험수당까지 악착같이 계산한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내게는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었고, 거기에만큼은 돈을 써야 했다.
   그건 바로…… 자위였다. 낮이고 밤이고 주야장천 손가락만 쓰다 보니 힘이 달려 연필 드는 것조차 버거울 때가 많았다. 자위를 쉬자니 스트레스가 쌓이고, 스트레스를 풀자니 힘이 달려 공부가 안되고.
   그러던 어느 날, 운명처럼 동네 섹스토이샵에서 ‘플라워르가슴’의 파격 세일 포스터를 보았다. 플라워르가슴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명성이 자자한 궁극의 바이브레이터였다. 세일은 글피까지였고, 난 그걸 사야만 했다. 바이브레이터를 써 본 적은 없지만, 그게 없으면 앞으로 펼쳐질 3년간의 기나긴 수험 생활을 제대로 버텨 낼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부모님 앞에서 열일곱 딸의 미래를 위해 바이브레이터에 투자해 달라는 말은 차마 꺼낼 수 없었다. 그러니 내 힘으로 벌어야지. 15만 원짜리 바이브레이터가 할인해서 7만 7천 원. 지금까지 내가 모은 돈은 3만 4천 원. 용돈 가불은 절대 불가. 그러니 신민주에게서 돈 냄새를 맡은 건 당연한 귀결 아니겠는가.
   아이들이 떠나고 신민주에게 메시지가 왔다. 확진자의 동선 중 소독을 마친 가게와 그렇지 않은 가게, 영업시간과 동선까지 상세히 정리한 표였다. 종일 집에만 처박혀 있으니 여간 심심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곧 신민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린 이제 파트너야. 너는 007이고, 나는 Q인 거지!”
   스파이 영화도 어지간히 본 모양이었다. 이어폰을 통해 신민주의 들뜬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전염병이 창궐해도,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거리에는 눈에 띄게 사람이 줄었지만, 파리가 날려도 가게는 영업 중이고, 차는 쌩쌩 돌아다니며, 사람들은 마스크를 낀 채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끝없이 조잘대는 신민주의 목소리를 무음에 가까운 음량으로 줄이고, 마스크를 코밑으로 내려 청량한 공기를 맛보았다.
   그렇게 향한 첫 번째 수색 장소는 다름 아닌 만화책방이었다. 가게 입구에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은 입장 금지라는 경고문이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었다. 나는 마스크의 코 지지대를 꾹 누르고 입장했다. 카운터에 앉아 졸고 있던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사장님은 카운터에 비치한 손 소독제를 가리켰다. 나는 소독제를 손에 뿌려 비볐다.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마스크를 뚫고 코에 훅 끼쳤다. 책방에는 단 한 명의 손님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엊그제 확진자가 다녀간 가게에 누가 섣불리 오고 싶겠는가. 실은 이제 막 소독을 마쳐 다른 어디보다 가장 깨끗할 텐데도.
   “아저씨, 혹시 하얀색 쇼핑백 못 봤어요? 박스테이프로 막 봉해 놓은 건데. 며칠 전에 누가 두고 갔거든요.”
   아저씨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없어요, 없어.”
   나는 혹시 몰라 가게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우리 아빠는 순정 만화 마니아야. 그쪽으로 가 봐.”
   “앗, 깜짝이야!”
   이어폰에서 흘러나온 신민주의 목소리였다. 무선 이어폰이라 그런지, 신민주의 말처럼 꼭 무전 통신을 나누는 현장 요원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옷깃을 힘주어 매만지고 순정 만화 서재로 이동했다.

   오빠는 나만 미워해
   러블리 그대
   세컨드는 왜 안돼
   사랑의 방해꾼
   ……
   ……

   자극적인 책 제목의 향연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어쩐지 아저씨가 원망스러웠다. 신민주는 대뜸 『두근두근 내 사랑』 8권을 펼치라고 했다. 뭐지? 아저씨가 이 책에 무슨 단서라도 남긴 건가?
   “결말에서 둘이 어떻게 돼? 결혼해? 말어?”
   단서는 개뿔. 나는 콧김을 뿜고 대답했다.
   “헤어지는데?”
   “대박!”
   신민주는 그 이별이 얼마나 짜릿한 전개인지를 구구절절 이야기했다. 듣자 하니 스토리가 꽤 흥미로워 나는 앉은 자리에서 그 시리즈를 1권부터 독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나자, 어느새 나는 8권의 결말 앞에서 눈물을 또륵 흘리고 있었다.
   “유스케, 이 나쁜 새끼!”
   “그니까! 유스케 그러면 못 써.”
   우리는 유스케가 얼마나 이기적인 놈인지 한목소리로 욕했다. 책방 아저씨는 목소리가 커지자, 내게 눈짓으로 주의를 주었다. 어차피 가게에 손님도 없는데 야박하시긴.
   “맞다, 마스크!”
   문득 임무가 떠올랐다. 자리에서 일어나 순정 만화 코너를 샅샅이 둘러보았다. 쇼핑백은커녕 마스크 쪼가리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용료 3천 원을 내고 만화책방을 나섰다. 혹시 몰라 가게 앞 화장실도 들어가 봤지만, 마스크는 없었다.
   “공쳤네.”
   내가 한숨 쉬자 신민주가 웃었다.
   “그래도 희대의 명작은 읽었잖아.”
   웃음이 터졌다. 신민주가 아니었다면 순정 만화는 펼쳐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신민주도 아버지가 빌려 온 만화책을 하나둘 보다 보니 그 재미에 푹 빠졌다고 했다.
   “난 사실 만화책보다 우리 아빠가 우는 게 더 재밌어!”
   신민주가 깔깔거렸다. 나도 어쩐지 상상이 가 웃음이 터졌다. 다음에는 다 같이 와서 라면도 시켜 먹기로 했다. 마스크는 찾지 못했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공주님 네일샵’이었다. 네일샵 역시 손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손님이 시술할 수 있는 자리는 세 개나 되는데, 직원은 한 명뿐이었다. 나는 숙연해진 마음으로 문고리를 당겼다. 핸드폰을 코에 박을 듯 가까이 보고 있던 여자 직원이 반색하며 나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반가워요!”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혹시 하얀색 쇼핑백 못 보셨나요? 며칠 전에 아저씨 손님이 두고 갔을 텐데.”
   직원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꾸벅 인사하고 나가려는데 그녀가 내 팔을 붙잡았다.
   “싸게 해 줄게요.”
   직원이 눈을 빛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돈도 시간도 없었다.
   “50%! 반값에 해 줄게요! 완전 대박이죠?”
   내 팔을 잡은 직원의 악력이 강해졌다.
   “저 진짜 돈 없어요, 언니.”
   직원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에라, 모르겠다. 그럼 서비스! 100% 공짜!”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나는 직원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대신 SNS에 홍보 좀 해 줘요. 우리 이러다 완전 망하게 생겼어.”
   직원의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직원의 손에 힘이 풀렸다.
   그렇게 난생처음으로 네일 케어 서비스를 받게 되었다. 손끝을 오일에 불려 니퍼니 뭐니 하는 온갖 도구들로 하나하나 꼼꼼히 다듬는 과정은, 생각보다 다정했다. 내 몸의 작은 부분 하나하나까지 소중히 보살핌받는 느낌이었다. 큐티클을 제거할 때는 시원했고, 요즘 유행이라는 노란색 반짝이 매니큐어를 칠했을 때는 마음이 환해졌다.
   “맘에 쏙 드네요.”
   직원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신민주의 채근에 손톱 사진을 찍어 보냈다. 신민주는 대박 예쁘다며, 저 언니 영업 성공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반짝이는 내 손톱을 보다 문득 아저씨의 손톱은 어떤 색깔일지 궁금했다. 모르긴 몰라도 아저씨 역시 가게 문을 나설 때 나처럼 웃고 있지 않았을까.
   오늘의 임무는 그걸로 끝이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나는 신민주에게 인사를 고하고 내 몸이 이끄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그 걸음의 끝은 섹스토이샵 ‘아담과 이브’ 앞이었다.
   항상 매장 밖에서 유리창 너머로만 구경했는데, 오늘은 어쩐지 용기가 났다. 하긴 요즘처럼 전 국민이 마스크를 쓰고 다닐 때가 아니면, 미성년자가 언제 또 섹스토이샵을 드나들겠는가.
   “어서 오세요! 아담과 이브입니다.”
   똑 단발의 점원 언니가 손바닥에 손 소독제를 짜주었다. 소독제가 마른 뒤에는 바구니에서 꺼낸 콘돔을 사은품으로 주었다. 방문만 하면 누구나 공짜라고 했다. 나는 쿨한 척 콘돔을 받아들었다. 유통기한이 2년쯤 남아 있었다. 아직 사귀는 사람은 없지만, 그때까지 누구 하나 만나지 않을까? 배시시 웃음이 새어나왔다.
   가게 안은 다양한 제품으로 가득했다. 갖가지 모양의 남성 성기 모양 딜도, 망치처럼 우락부락한 사이즈부터 립스틱처럼 아담한 사이즈까지 다양한 종류의 바이브레이터, 사탕처럼 알록달록 포장된 콘돔과 몸에 발라먹는 초콜릿까지…… 어른들은 참, 인생 재밌게 사는구나. 치사하게 우리한테는 이런 거 꼭꼭 숨겨 놓고.
   자주색 망사 원피스를 입고 있는 곰 인형도 눈에 띄었다. 곰 인형은 마스크를 끼고 있어, 이 시국과 참 잘 어울려 보였다. 망사 원피스는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없으면 안 될 취미생활일 거였다. 곰 인형을 쓰다듬으려다 멈칫하고 주머니에 손을 찔렀다.
   가게 정중앙에는 플라워르가슴이 진열되어 있었다. 튤립 모양의 다홍색 바이브레이터는 외형부터 압도적으로 아름다웠다. 조심스레 기계의 전원 버튼을 눌러 손바닥에 갖다 댔다. 손바닥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강렬한 진동이 전해졌다. 상기된 채로 기계를 다소곳이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세일 마감까지는 아직 이틀이 남아 있었다. 플라워르가슴을 가슴에 안고 잠들 밤을 떠올리며, 가게 문을 힘차게 밀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신민주의 메시지로 핸드폰이 도배되었다.

   자니? 07:45
   언제 일어날래? 07:56
   마스크 얼른 찾아야지, 오세정! 08:10
   우리는 지금 아주 긴급한 상황에 처해 있다굿! 08:13
   전화도 안 받네. 협조 안 하냐, 엉? 08:25
   염병 시스터즈, 출동해야지! 08:27
   ……
   ……
   ……

   아주 신났구먼, 신났어. 담임 없는 우리 반 단톡방에서 어느새 우리는 염병 시스터즈라고 불리고 있었다. 이렇게 학기 초부터 신민주랑 쌍으로 엮여 따돌림당하게 되는 건가. 나까지 고소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우리를 향해 채근하는 아이들의 단톡방 알림을 꺼버리고 신민주에게 답장했다.

   아침밥은 먹고 일하자, 이것아. 10:15

   밥을 든든히 챙겨 먹고 여유롭게 빈티지 샵으로 향했다. ‘멋쟁이 빈티지’는 가게 앞에 걸린 옷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물방울무늬가 가득한 청록빛 투피스에 과일 바구니가 여기저기 그려진 체크무늬 셔츠, 두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넓은 통바지……
   “아버님이 한 패션 하시는구나.”
   내가 넋을 놓자 이어폰 속 신민주가 킬킬 웃었다. 가게는 계단을 내려가야 있는 반지하였다. 사장님은 알록달록한 무지개색 니트에 통 큰 청바지를 입은 노인이었다.
   “어서 와요!”
   백발의 단발머리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나도 모르게 헤벌쭉 웃음이 나왔다. 너무 귀엽잖아! 나는 곰 인형이고 뭐고 가게에 걸린 옷들을 하나하나 꺼내 보며 빈티지 옷의 매력에 퐁당 빠졌다. 노인은 익숙하다는 듯, 그런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신민주에게도 영상 통화로 몇 개 추린 옷을 보여 주었다. 신민주는 그중 포도송이 무늬 패턴의 원피스를 골랐다.
   “3만 원짜리인데 자기한테는 특별히 반값에 해 줄게.”
   노인이 쿡쿡 웃었다. 이럴 수가. 만오천 원은 곤란했다. 내게는 플라워르가슴을 사는 게 우선이었다. 어두워진 얼굴로 옷을 내려놓자 노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다음에 또 올 거지?”
   나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럼 만 원만 줘.”
   노인을 끌어안으려다 거절당했다. 맘껏 포옹도 할 수 없다니! 전염병이 잠잠해지면 그때 진하게 안아 드리기로 하고 계산을 마쳤다. 그렇게 계단을 반쯤 올라가서야 생각났다. 마스크!
   노인은 하얀 쇼핑백 소리에 고개를 갸웃하더니 아, 하고 창고에 들어갔다. 드디어 임무를 완수하는 건가! 하지만 노인이 가져온 쇼핑백 속에는 뜨개질용 털 뭉치만 잔뜩 들어 있었다. 나는 허탈한 마음에 불쑥 내뱉었다.
   “그 쇼핑백, 이번에 확진된 아저씨가 두고 간 거거든요.”
   순간 노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확진자 동선에 겹친 영업장들은 대개 손님이 끊겨 장사에 차질을 빚는다는 뉴스 보도가 떠올랐다.
   “죄송해요.”
   나는 노인의 눈치를 살폈다. 노인은 이내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할 게 뭐 있어. 자기도 그 양반도 잘못한 거 하나 없어.”
   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노인이 빙긋 웃더니 눈을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그 양반, 기억난다. 이번에 이쁜 옷 잔뜩 사 갔는데 그렇게 되어서 참 유감이지.”
   쇼핑백은 기억 안 나지만, 아저씨가 장미꽃 무늬 벨벳 원피스와 딸기 패턴의 멜빵 치마를 산 건 기억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가게도 통과. 그런데 아저씨가 원피스를 그렇게 많이 사다니. 신민주는 사복으로 힙합 패션을 추구하던데. 신민주 어머니의 몫인가?
   가게를 나와 신민주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신민주는 담담히 말했다.
   “이혼했어. 한 3년 됐나.”
   순간 머릿속에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그럼 그 옷은 누가 입는 거야? 아저씨 연애하시니? 아니면 웃돈 주고 장사하는 거? 그러다 아저씨의 반짝이는 손톱이 떠올랐고, 어쩐지 꽃무늬 원피스도 그의 몫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상해?”
   내가 말이 없자 신민주가 물었다.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다들 이혼 많이 하잖아.”
   너무 심드렁하게 말했나? 살짝 후회하는 순간, 신민주가 중얼거렸다.
   “그거 말고.”
   다음 장소인 카페로 이동하려는데 신민주가 오늘은 그만하자고 했다. 목소리가 꽤 건조했다. 그렇게 나는 떨떠름한 마음으로 오늘의 임무를 종료했다.
   다음 날 아침, 감기 기운이 있는지 기침을 뱉으며 눈을 떴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신민주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늦잠이라도 자는 건가? 그러고 보니 오늘은 플라워르가슴 세일 마감일인데.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돈은 미리 받을걸!
   그런데 놀랍게도, 신민주에게서 돈이 입금되었다는 알림 문자가 왔다. 나는 신민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입금 고마워! 우리 오늘은 마카롱 집이랑 또 어디 가지?”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소리쳤다. 그러나 신민주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스크는 그냥 포기하자.”
   깜짝 놀라 되물었지만, 신민주는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혹시 무슨 일 있었어?”
   “미안해.”
   신민주가 전화를 뚝 끊었다. 나는 알 것 같았다. 신민주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문 열어! 너 당 떨어진 거 다 알아!”
   나는 신민주네 집 현관 앞에서 초인종을 연신 눌렀다. 신민주는 인터폰으로 시끄럽다고 소리 질렀다.
   “나 자가격리 중인 거 몰라? 너 만나면 처벌받을 수도 있어.”
   신민주의 목소리가 울음과 섞여 있었다.
   “나도 알아. 그치만 걱정되잖아.”
   나는 문고리에 마카롱이 담긴 쇼핑백을 걸었다.
   “두고 갈 테니까 먹어. 마카롱 집에도 마스크는 없다더라.”
   신민주는 아무 말이 없었다. 도대체 얘는 무슨 생각인 걸까. 속이 답답했지만 함부로 캐물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애들이 고소는 안 할 거야. 나 간다.”
   내가 뒤돌아서자, 띠리릭 하고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눈이 퉁퉁 부은 신민주가 마스크를 쓰고 일회용 비닐장갑을 낀 채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들어올래?”
   나는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그 집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신민주의 집은 아주 깔끔했다. 비싼 아파트라 그런지 호텔에 온 것처럼 근사했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집을 둘러보았다. 역시 굴지의 제약회사 부장님 집은 다르구나. 신민주는 아까 막 완성했다는 달고나 커피를 내어주었다. 달고나 커피는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메뉴였다. 인스턴트 커피와 설탕을 볼에 담고 400번, 아니 4,000번은 넘게 저어야 겨우 완성된다는 악명 높은 메뉴였다.
   “집에 갇히고서 매일 만들어 마셔.”
   신민주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잘 구워진 빵처럼 노릇노릇한 색감의 달고나 크림을 내려다보았다. 4,000번 넘게 커피를 휘젓는 동안 신민주는 어떤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검은 커피가 서서히 밝아지며 걸쭉해지는 긴 시간 동안, 신민주의 어둠도 조금은 옅어졌을까. 나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달고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음, 맛이 있다고는 할 수 없는 맛이네.”
   신민주가 픽 웃었다.
   “목숨 걸고 여기까지 와주다니, 고마워.”
   “목숨까지는 안 걸었어.”
   신민주는 퉁퉁 부은 눈으로 나를 한참 보더니 조심스레 입을 뗐다.
   “너한테 말 못 한 게 하나 있어.”
   나는 마카롱을 입에 가져가며 신민주를 보았다.
   “우리 아빠가 확진자 동선에서 밝히지 않은 데가 딱 한군데 있거든.”
   신민주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말을 멈추었다. 나는 말했다.
   “혹시 아담과 이브니?”
   신민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가 거길 어떻게 알아?”
   “나도 사실 너한테 말 못 한 게 하나 있어.”
   나는 한입 베어 물은 마카롱을 내려놓았다.
   “나 사실, 맨날 자위해. 그래서 거기 아주 잘 알아.”
   잠시 적막이 흘렀다. 신민주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진심?”
   “어, 진심.”
   내가 아담과 이브를 의심한 건, 곰 인형이 쓴 마스크 때문이었다. 곰 인형이 귀여워 가까이서 마스크를 보았는데 아저씨 회사의 상품과 비슷한 브이 마크가 찍혀 있었다. 하지만 섣불리 말할 순 없었다. 신민주에게 전달받은 동선에 이곳이 없었거니와, 내가 여기 간 걸 알면 신민주가 날 어떻게 볼지 두려워서였다.
   어쨌든 우리의 관심사는 이미 마스크에서 멀어졌다. 신민주는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그러고는 옷장의 세 번째 서랍 구석에 있는 옷을 죄다 꺼내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자 다종다양한 바이브레이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는 심지어 플라워르가슴도 있었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신이 난 우리는 한참 동안 자위를 주제로 수다를 떨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익명의 사람들과 나누던 대화를, 눈앞의 친구와 시시덕거리며 이야기할 수 있다니. 거기다 신민주는 나보다 한 수 위였다. 자위를 시작한 나이도 빨랐고, 토이를 사용한 경험도 많았다.
   “나만 하는 거 아니었네.”
   내 말에 신민주가 미소 지었다. 신민주는 마카롱을 베어 물고는 뭔가 결심했는지 나를 아저씨의 방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커다란 옷장 앞에 섰다. 나는 신민주의 눈을 마주 보았다.
   “이걸 나한테 왜 보여주려는 거야?”
   신민주는 망설이다 대답했다.
   “이해받고 싶어서. 너라면 우리 아빠……”
   “그럴 필요 없어. 아저씨도 원치 않을 거고.”
   신민주가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는 신민주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냥 우리, 생긴 대로 살자.”
   신민주가 가만히 나를 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그래도 될까?”
   익숙한 질문이었다. 그건 내가 오랜 시간 나 자신에게 품은 질문과 같았으니까. 그 질문이 나 아닌 누군가에게서 터져 나오자,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내가 나로 살아가는데, 더이상 누구의 허락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당연하지.”
   그 단단한 목소리가 내 것이었던가, 신민주의 것이었던가. 분명한 것 하나는 이후의 목소리는 내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당 떨어진다. 마카롱 먹자!”
   집에 가는 길에 아담과 이브에 들렀다. 주인 언니는 내가 꼬치꼬치 캐물을 때는 모르쇠 하더니, 신민주와 통화한 이후에는 대번에 사과했다. 남은 마스크도 캐비닛에서 꺼내 바로 돌려주었다. 신민주가 대체 어떻게 구워삶아먹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신민주는 아저씨를 설득해 아담과 이브에 들렀다는 사실을 질병관리본부에 알렸다. 아저씨의 추가 행적이 드러나자 인터넷의 실시간 검색어는 아담과 이브, 아저씨의 제약회사 이름으로 도배가 되었다. 아저씨는 쪽팔려서 죽을 것 같다고 신민주에게 밤마다 눈물의 전화를 걸었다. 신민주는 그때마다 아저씨와 오래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되찾은 마스크를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며, 염병 시스터즈의 임무는 막을 내린 듯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콜록, 콜록! 켁켁!”
   나에게서 감염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빌어먹을! 나는 지난 며칠 간의 내 이동 경로를 정리해 보았다.

   0일 집 - 편의점 - 아담과 이브 앞 - 집
   0일 집 - 학교 앞 - 블랙홀 만화책 - 공주님 네일 - 아담과 이브 - 집
   0일 집 - 멋쟁이 빈티지 - 편의점 - 집
   0일 집 - 달콤 마카롱 - 확진자(신민주)의 집 - 아담과 이브 - 집
   0일 집 - 학교 앞 - 블랙홀 만화책 - 편의점 - 집

   뭐야, 아담과 이브 VIP가 따로 없잖아! 내가 확진자라면, 아담과 이브에서 감염되었을 확률을 배제할 수 없었다. 이후 나를 만난 우리 반 친구들과 부모님은, 그리고 아담과 이브를 찾은 선량한 손님들은 무슨 죄인가.
   나는 두려웠다.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으면 어떡하지? 내 신상을 털고 손가락질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어떡하긴 뭘 어떡해. 나한테 전화하면 되지.”
   내 이야기를 들은 신민주가 씩씩하게 말했다.
   “너도 알잖아. 우리 다 멀쩡한 사람인 거.”
   그래, 신민주 말이 맞았다. 세상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변했다. 이제 나는 눈치보지 않고 자위를 말하고, 플라워르가슴을 쓴다. 사람들이 욕한다 해도 나는 내가, 그리고 내 욕망이 부끄럽지 않다. 아저씨가, 신민주가 나를 구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나도 다른 사람들을 지켜주어야 하지 않을까? 핸드폰에서 요란한 경보음이 울렸다. 오늘로 우리나라 확진자가 1만 명을 넘어섰다는 재난 문자였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 멀리 선별 진료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김경은

이 소설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소설이 완성된 지금, 코로나19 확진자는 1만 3천여 명을 넘어섰고, 나는 여전히 불안하다. 그 불안이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의연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주위를 살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글을 쓰고 싶다.

2020/07/28
3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