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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턴가, 남자는 두 번씩 물을 내리곤 했다. 좌변기 앞에 서서 소변을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왼손이 나아가 레버를 내렸다. 아차. 그 사실은 언제나 조금 늦게, 남자의 의식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딘가 다녀온 기분이 되었다.
    그날 오후 식탁 위의 수도요금 고지서를 들여다본 뒤, 처음으로 물을 내리던 때도 그랬다. 레버를 내리는 순간 여전히 포물선을 그리는 소변 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이것 때문일까. 남자는 서랍장 외벽의 거울을 보며 남은 소변을 내보냈다. 변좌와 타일 바닥에 노란 방울들이 튀었다. 독일 남자들은 변기에 앉아서 소변을 본다던데. 남자는 바지춤을 추스르며 다시 레버를 내렸다. 변기 물은 배수구로 빨려들어가다 말고 흘러나왔다. 초고속 카메라로 찍었다던가. 선 채로 소변을 볼 때 얼마나 많은 방울이 튀는지 보여주는 어느 인터넷 뉴스의 첨부 영상이 떠올랐다. 요도구에서 뛰쳐나온 소변 줄기가 변기 물 위로 떨어져 부서지고, 파문을 겹겹이 일으키고, 수만 개의 방울이 변기 밖으로 몸을 던지는, 휴지걸이에 걸린 휴지에나, 내벽의 타일들에나, 세면대 안쪽과 칫솔꽂이의 칫솔에 헤아릴 수 없이 들러붙는 그 영상. 사실 남자는 영상을 본 적 없었다. 술집 화장실 좌변기 칸에 앉아서 기사를 보다가 아직이냐, 하고 들이닥친 목소리에 그만 핸드폰 화면을 껐던 것이다. 아 미쳤어? 얼른 나가, 변태 새끼야. 남자 칸이 사용 중이길래 여자 칸에 들어와 있었는데, 옆 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여성의 것이었다. 이내 물을 내리고 남자 칸을 나선 목소리는 외치듯 속삭였다. 아 쫌, 옆 칸에 사람 있다고! 그와 동시에 허겁지겁 멀어지던 바깥의 발소리들. 전화벨이 울린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남자는 소리 낮춤 버튼을 눌러 벨소리를 줄인 뒤 화면을 살폈다. 헛기침을 두어 번 뱉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하지만 너는 거짓말, 몇 마디 말로만 남았네, 술집의 소란에 낯선 밴드 음악이 뒤섞여 있었다. 저기, 아직 화장실이에요? 다들 먼저 일어났어요. 일요일이면 바람이 불고, 연두색 커튼이 흔들리고, 너는…… 아, 금방 나갈게요. 통화를 끊자 핸드폰 저편의 소란이 화장실 문 밖에서 웅웅거렸다. 너는 거짓말, 몇 마디 말로만 남았네, 일요일이면, 돌아온 후렴구에는 소주 두 병과 홍합탕 하나를 주문하는 목소리, 홍합탕 하나! 하고 주방을 향해 외치는 목소리, 박자를 맞춘 듯 홍합탕 하나! 하고 합창하는 주방의 요리사들, 그리고 테이블의 웃음들,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는 흥분에 찬 대화들이 뒤죽박죽 실려 있었다. 남자는 가게 모퉁이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을 여자를 떠올렸다.
    남자는 휴지 서너 칸을 뜯어 변좌를 닦고는 변기에 버렸다. 다시 물을 내렸다. 비누칠해 손을 씻고, 얼굴에 물을 묻힌 남자는 멍하니 거울을 보았다. 화장실을 나와서는 식탁 위의 고지서를 들여다보았다. 어디 물이 새는 걸까? 여자는 드럼 세탁기 앞에서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고 있었다. 남자는 물기를 머금은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덧붙였다. 누수가 있나 봐, 4만원씩이나 나올 리가 없는데. 여자는 발치에 브래지어를 떨어트리며 말했다. 그런가. 그리고는 남자를 지나쳐 화장실로 들어갔다. 굳게 닫힌 문 뒤편에서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가 번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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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타일 바닥에 부서지는 물줄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것 때문일까. 보일러실과 화장실이 대각선 거리로 떨어져 있는 탓에 온수가 나오기까지는 수 분을 기다려야 한다는 점. 이는 대학 시절부터 느낀 이 집의 단점이었다. 또한 부엌 개수대나 화장실 중 한쪽에서 물을 틀면 다른 한쪽의 물줄기가 약해진다는 점, 옆집에서 어떤 TV 프로를 보는지 알 수 있을 만큼 방음이 좋지 않아서 늘 목소리를 낮추고 살아야 한다는 점도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나마 남자가 들어와 살면서, 여자는 이 집에 없던 정을 붙였다. 아침저녁으로 같이 먹을 것을 차려 먹고, 집을 나서거나 돌아오고, 각자 여가를 보내다 잠자리에 드는. 사소한 일상에 지나지 않더라도 여자는 이 집에서의 시간이 좋았다. 두 사람 모두에게 삶이라는 점에서 좋았다. 물줄기는 하염없이 쏟아졌다. 따지고 보면 물은 줄곧 이렇게 써왔는데 수도요금은 느닷없이 왜 저렇게 나왔는지.
    샤워기에서 허연 김이 나오기 시작하자 여자는 한 걸음 다가섰다. 물줄기를 맞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부볐다. 너무 차가웠나.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고된 하루였다. 시민들은 끊임없이 민원실로 밀려 들어와서 주민등록을 하거나 혼인신고를 하거나 영업신고를 하거나 여권을 만들었다. 여자는 그들 각자에게 저마다 다른 금액의 수입증지를 판매했다. 누군가에게는 5,300원을, 누군가에게는 9,300원을, 누군가에게는 2만 8,000원을. 정확히는 돈을 받으면 정사각 우표 사이즈의 증지를 뜯어서 민원 서류의 공란에 붙이는 일까지가 여자의 몫이었다. 단순하다면 단순한 업무였지만 남의 돈을 주고받고 관리하는 일인 만큼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하필 돈 문제가 터졌다. 여자는 2만 8,000원을 받고 유흥주점 허가서에 그만큼의 수입증지를 붙였는데, 해당 창구에 다녀온 민원인이 씩씩거리며 왜 수입증지를 붙이지 않았는지 따져 물었던 것이다. 저는 분명 붙여드렸는데, 좀전에 확인하고 가시지 않으셨어요? 민원인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게 뭔 소리야. 그럼 내가 지금 여기 왜 와. 일순간 민원실이 고요해졌다. 저는 2만 8,000원 붙여드렸습니다, 선생님. 담당 민원창구에서 서류가 바뀐 건 아닐까요? 무슨 개떡 같은, 같은 말 두 번 하게 하지 말고, 당신이 애초에 돈만 받고 안 붙여줬다니까. 여자는 신열이 달아오르는 것을, 볼펜을 쥔 오른손이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저는 민원인들께서 분실하실까봐 꼭 붙여서 드려요, 선생님. 그럼 그쪽이 대충 붙여서 떨어졌나 보지. 찾으려면 알아서 찾든가 말든가 하고, 얼른 붙이라니까? 그때 건너편 사무실 안쪽에서 뒷짐을 진 과장이 나왔다. 회식이면 옆자리에 앉혀서 어깨에 손을 올리고 허벅지에 손을 올리고 등을 쓰다듬는 과장. 그가 이런 상황에서 도움의 손길을 뻗는 모습을 여자는 본 적 없었다. 여자는 떨리는 손으로 2만 8,000원의 수입증지를 떼어서 붙였다. 민원인은 혐오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뱉더니, 허가서를 낚아채며 떠났다.
    여자는 떨리는 손으로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거울에 수증기가 들러붙어서 또렷이 보이지 않았지만 여자는 자신의 두 눈이 벌게져 있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부비며 눈가를 훔치는데 노크 소리가 울렸다. 일 다녀올게, 좀 쉬고 있어, 수중에서 들리는 말처럼 소리가 울려서 명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남자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무 쌀쌀맞았나.

    2
    교보문고 빌딩 앞을 지나면서, 남자는 무심코 검푸른 유리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점 안은 안 보이고, 회전초밥집 쪽을 향해 걷는 자신이 보였다. 여자는 내가 아니다, 나는 여자가 아니다, 남자는 그러한 생각으로 현관문을 나섰을 것이다. 빌라 건물이 있는 골목에서 큰길가로 나와서도 귓가에는 화장실에서 번져오던 물소리와 그런가, 하던 여자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정체가 극심한 8차선 도로 곳곳에서 경적이 울리고, 엔진을 개조한 오토바이가 굉음을 내지르며 그 틈을 뚫고 가고, 길거리에 늘어선 핸드폰 판매 대리점, 각종 로드샵, 대형 신발 매장들은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저마다 다른 아이돌 음악을 퍼뜨리는데도, 화장실의 물소리와 그런가, 하던 목소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여전히 유리벽을 보면서 걸었다.
    여자의 말소리는 불투명했다. 좀처럼 실내의 풍경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예컨대 ‘모르겠어’ ‘난 네가 좋은 게 좋아’와 같은 말들을 할 때면 여자의 눈은 마치 그 말들 뒤편의 시공간에 놓인 다른 무언가를 비추는 것 같았다. 그 검푸른 눈동자. 마주보고 있으면 불리한 지형에 놓인 것처럼 여겨져서 남자는 곧잘 그 눈을 피하곤 했다. 무슨 생각해? 남자가 그렇게 물으면 여자는 물을 내려서 잠시 어딘가 다녀온 사람처럼, 투명해진 물처럼 일렁거렸다. 그게 그 여자다움이라는 것을 어렴풋 느낀 건, 여자의 가슴에 처음 입을 맞춘 새벽이었다. 그때 남자는 여자네 집 침대 한편에 모로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여자는 모로 누운 채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검푸르던 눈동자. 다만 그 순간만큼은 여자의 실내와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을 책들과 그 안에서 너울거리고 있을 미지의 언어들을 믿어도 될 것 같았다. 여자가 나를 보고 있다, 그러한 생각으로 남자는 여자의 입술에 입술을 가져다대며 눈을 감았다. 여자의 가슴께에 얼굴을 묻고 그녀의 티셔츠를 허리춤에서부터 끌어올렸다. 차츰 드러나며 푸르게 빛나던 가슴. 남자는 여자의 가슴에 입을 맞췄다. 자신의 머리를 그러안은 채 부드럽게 쓰다듬는 여자의 손길이 느껴졌다.
    남자는 여자를 소개받았던 저녁에도 이 길을 걸었음을 떠올렸다.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술집에서 나와 여자를 집에 바래다주기까지 귓가에 여러 소리들이 따라붙기도 했다. 화장실에서 모르는 이들이 주고받았던 짧은 대화부터 낯선 밴드 음악, 홍합탕 하나! 하고 주방을 향해 외치던 목소리와 홍합탕 하나! 하고 합창하던 주방의 목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흥분에 차 있던 테이블 손님들의 대화까지. 남자는 그 모든 소리가 여자에게서 번져오는 소리 같았다. 다만 여자는 뜻 모를 표정이었다. 남자는 괜스러운 말들을 꺼냈다. 오늘따라 바람이 서늘하다거나, 별이 많이 보인다거나. 그러면 저는 괜찮은데요, 그렇네요, 별이 많네요 정도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날 네가 가장 많은 말을 한 건 통화 중에서였다고, 남자는 언젠가 여자에게 말했다. 가장 많은 말을 한 건 두 사람을 소개해준 친구들이었다. 남자가 그때그때 추임새를 넣으며 홍합탕을 국자로 젓고 빈 잔에 소주를 따르는 동안, 여자는 소파에 기대서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듯하다가 소주를 마시다가 미소를 짓기도 하고 남자와 눈을 마주친 듯 마주치지 않은 듯 멍해지기도 하면서 좀처럼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드문드문 차가 달리던 8차선 찻길 옆, 주홍색 가로등이 빛나는 인도를 걸을 때 여자가 입을 열었다. 취미가 뭐예요? 그 말은 왠지 남자에게 안심이 됐다.
    회전초밥집 출입구에 들어서면서 남자는 술집에서 스치듯 들었던 밴드 음악이 궁금해졌다. 피아노 건반으로 반주가 진행되고, 어쿠스틱이었는지 일렉이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건반 멜로디 위에 기타줄을 튕기던, 느릿한 박자로 두드리는 드럼 연주가 곡 전체를 떠받치던. 여성 보컬은 밤의 호수처럼 잔잔하던, 일렁거리던. 하지만 너는 거짓말, 몇 마디 말로만 남았네, 일요일이면 바람이 불고, 연두색 커튼이 흔들리고, 하고 노래하던. 근무복으로 갈아입은 남자는 탈의실을 나오며 노랫말을 중얼거려보기도 했다. 카운터 앞은 저녁 식사를 하러 온 대기 손님들로 북적였다. 남자는 번호표 발권기 앞으로 가 섰다. 발권 번호 78번 손님. 남자의 말에 두 커플이 대기자 벤치에서 일어섰다. 헤이즐은 그들 중 맨 왼쪽에 있었다.

    3
    여자는 식탁에 앉아 머리를 말렸다. 드라이기의 온풍이 마르지 않은 머릿결 사이마다 스몄다. 덜 마른 머리카락들이 목덜미나 어깨에 내려앉으면 차가웠다. 바람은 머리카락들을 갈라서 흩트려놓았다. 마른 머리카락들은 이리저리 휘날렸다.
    수입증지 문제로 언성을 높였던 민원인은 새 허가서를 들고 와서 행패를 부렸던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여자가 입은 상처는 여자의 상처로만 남아야 했다. 민원실에서, 그건 여자의 본질인 것처럼 여겨졌다. 여자는 자신을 향해 눈을 부라리던 민원인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곧장 주먹이라도 날릴 것 같았던, 아니 이미 몇 번이고 날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던 그 얼굴. 여자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실제로 맞아 멍이 들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 한쪽의 감각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그런가, 보다는 다정한 말을 건넸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모르긴 몰라도 남자 또한 흔들릴 때가 있다는 것을 여자는 최근 들어 느끼곤 했다. 얼마 전 스탠드의 주홍 불빛으로 물든 침대 위에서 여자의 눈꺼풀이 스르륵 감기던 때, 남자는 어학원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여자는 눈꺼풀 위에 몰려온 잠을 부비며 자신이 어느 시공간에 있는지를 궁리했다. 이게 어디서 들려오는 목소리인지, 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인지, 그렇다면 언제부터 꿈을 꾸었으며, 어쩌다 잠에 들었는지. 흐르는 질문은 가장 가까운, 그러나 어느새 멀리 떨어져 온 듯한 시간으로 여자를 데려갔다. 남자와 관계했던,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 천장까지 그림자를 휘감아 올렸던 시간. 여자는 그제야 남자의 말이 가리키는 바를 알아들었다. 학원을 그만두겠다니. 한편으로는 이제 한 달 다닌 학원을, 그것도 요즘 잘 나가기로 소문난 학원을 무슨 까닭에 그만 두겠다는 건지 의아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걸 그렇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해야만 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의아했다. 왜 그만둬? 남자는 가늘고 긴 손가락들로 여자의 얼굴을 쓸었다. 그냥, 구청 근처에도 학원 있지, 거긴 어떨까? 여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남자가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거기도 괜찮다고는 하던데.
    여자가 수입증지 창구를 정리하던 무렵, 남자는 근처 교보문고에서 책을 읽고 있겠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여자는 마쳤다는 메시지 없이 서점으로 향했다. 서늘해진 바람과 은행나무 가로수들을 따라 걷는 이 길. 남자를 소개받았던 날 밤에도 걸었고, 어쩌면 앞으로도 한동안 남자와 걷게 될 이 길. 여자는 서점 유리벽 앞에 멈추어 섰다.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고 내쉰 뒤 서점에 들어서자 모퉁이 책상에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작고 두꺼운 군청색 책 한 권을 읽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등 뒤로 다가가서 왼쪽 어깨를 두드렸다. 남자는 책을 덮으면서 뒤돌아보았다. 아홉 마디의 말, 열세 마디의 그림자. 그건 두 달 전 커밍아웃한 어느 작가의 에세이집이었다.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작가가 홍대의 한 레즈비언 클럽에 드나든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으나, 대중에게는 가벼운 루머 내지는 관심 밖의 사안으로 취급되곤 했다. 작가는 떠오르는 진보 계열 인터넷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삶을 밝혔다. 기사 속 사진의 공간은 오후 4시쯤의 햇살이 스민 아담한 카페 테이블로 보였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고 있었다. 올 초에 출간된 책 제목에 눈길이 가는데, 오늘의 인터뷰 내용과 관련이 있나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몇 년 전부터 드는 생각이라면서, 정체성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언어로 구성되는 것 같다고 했다. 말은 만질 수 없잖아요, 그런데도 말 덕분에 만질 수 있게 된 것들이 있어요, 그렇게 보면 말도 만질 수 있는 게 아닌가, 만질 수 있는 거면 그림자 따위도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었어요. 기자는 질문을 이었다. 그럼 아홉 마디랑 열세 마디는 무슨 차이인지(이쯤에서 작가의 얼굴에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돋아났기에 기자는 질문을 망설였다고 적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여쭤봐도 될까요? 아, 실례될 건 없구요, 설명 드리자니 구차해서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 될 수 없는 것들, 그런 것들에도 그림자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결코 우스운 내용은 아니었는데도, 기자는 그 말끝에서 두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고 적었다. 비록 그의 커밍아웃은 대중의 지대한 관심을 불러 모으지는 못했지만 트위터 상에서는 이슈가 되고 있었다. 그런 작가의 책을 남자가 읽고 있다니. 다만 책 제목이 보이게끔 오른쪽으로 덮은 것을 보면 우연인 듯했다. 왜 연락 안 하고, 한 손에 책을 들고 일어난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여자는 근무 중 겪었던 일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무슨 책이야? 아, 그냥 표지가 예뻐서.

    4
    헤이즐의 목소리가 남자의 귀에 유난히 크게 들린 건 LC반 2주차 강의가 한창이던 화요일 오후였다. 엄밀히 말해, 크게 들렸다기보다는 구체적으로 들렸다고 할까. 강사의 주문에 따라 40여 명의 수강생이 소리 내어 영어 문장을 읽던 때, 여러 목소리들이 뒤섞인 와중에도 헤이즐의 목소리만은 뚜렷하게 구분되어 귓속으로 빨려들어왔다. They are facing each other. 강사는 사진을 가리키며 재차 말했다. They are facing each other. 사진은 가정집의 부엌으로 보였다. 사십대 중반의 백인 남성은 프라이팬을 올려둔 가스레인지 앞에서 뒤집개를 손에 들고 있었고, 사십대 중반의 백인 여성은 보울을 올려둔 싱크대 앞에서 거품기를 휘젓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입가에 옅은 웃음을 머금은 채 각자 프라이팬과 보울을 보고 있을 뿐, 마주보고 있지는 않았다. They are facing each other. 수강생 모두가 그렇게 말할 때, 헤이즐 특유의 바람처럼 뜬 목소리는 홀로 떨어져나와서 남자의 귓바퀴에 안착했다. 남자 자신의 목소리보다도 빠르고 정확하게. 헤이즐은 남자에게서 4시 방향으로 두세 칸 떨어져 앉아 있었지만, 남자는 그가 facing의 fa를 발음하는 순간 내미는 입술 모양부터, cing을 발음하는 순간 잇몸에서 부대끼며 연구개로 끌려가는 소리의 움직임까지 눈에 선했다. fa-cing, fa-cing, fa-cing each other. 심장은 쿵쾅거렸고, 얼굴에는 열이 달아올랐다. 남자는 머리 모양을 만지며 뒤돌아보았다. 대부분 학생들이 책을 보고 있었지만 헤이즐은 허리를 곧게 편 자세로 강사를 향해 발음하고 있었다. They are facing each other.
    헤이즐은 강의가 끝나면 열 사람 정도 모여서 강의 내용을 복습하는 스터디 그룹의 일원이었다. 학원 건물 1층 카페 테라스에 처음으로 모임이 잡혔을 때, 그들은 돌아가며 자신의 영어 이름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누드톤의 박스 티와 잿빛 슬랙스를 입고 머리에는 검정색 야구 모자를 눌러쓴 헤이즐은 끝에서 두번째 차례였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헤이즐입니다. 남자는 목소리와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이름만 들으면 여성스럽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남성에게도 곧잘 쓰이는 이름이에요. 헤이즐, 헤이즐. 남자가 헤이즐넛을 떠올렸을 때 헤이즐은 말했다. 저는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어머니께서 헤이즐넛 커피를 좋아하세요. 그래서 붙여본 이름이구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헤이즐이 자리에 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남자는 눈길을 거두어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이후 헤이즐은 예고 없이 남자의 신경계에 침입해 들어오곤 했다. 학원 가는 길, 번화가 지하철역 4번 출구를 나오면 헤이즐은 불쑥 나타나서는 앞서 걸었고, 강의 시작 오 분 전 좁다란 복도에 수강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때면 헤이즐은 다정한 목소리로 통화를 하거나 다른 수강생과 책을 펴든 채 이야기를 나눴으며, 화장실 소변기 앞에 서 있으면 갑작스레 들어와서 남자의 손이나 바지에 오줌방울이 묻게 했다. 그렇게 LC반 2주차 강의가 한창이던 화요일 오후 헤이즐의 목소리가 목소리 이상의 어떤 것으로 구체화되었을 때, 헤이즐은 특별한 존재가 됐다. 다른 학원생들이 가상의 인물에 가까웠다면, 헤이즐은 남자의 일상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루 스물네 시간 중 헤이즐과 같은 공간에 있는 시간은 두 시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남자는 그 바깥의 시간에서도 헤이즐을 떠올리곤 했다. 처음에는 산뜻한 미풍이 스치는 줄 알았는데, 바람은 어느새 규모를 키워서 남자의 일상을 흔들고 있었다.

    5
    외출 준비를 마칠 쯤 여자는 싱크대 위의 수도요금 고지서를 펼쳐보았다. 일 다녀올게, 좀 쉬고 있어, 하던 남자의 말. 수중의 말처럼 들려서 명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던 남자의 말. 어쩌다 4만원이 나왔을까. 그전까지 보통 1, 2만원 가량 나왔던 점을 감안하면 최근 수도 사용량이 돌연 몇 곱절씩 늘었다는 점을 납득하기란 어려웠다. 물론 여자는 샤워를 하기 전에 온수를 기다리느라 적잖은 물을 흘려보내왔고, 남자가 소변을 보러 화장실에 들어가면 언제부턴가 두 번씩 물을 내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불어난 요금을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있을 누수. 여자는 정말 물이 새나봐, 하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중얼거리면서, 여자는 마음 한구석에서 수도요금과는 무관해 보이는 누수를 되뇌고 있었다. 아홉 마디의 말, 열세 마디의 그림자…… 남자는 어쩌다 그 책을 읽고 있었는지. 그건 간혹 가다 남자를 보고 있으면 불현듯 스치는 의문―어쩌다 내가 남자를 사랑하게 됐을까, 하는 의문과 차라리 관련이 있는 듯했다. 남자는 여자가 처음으로 이끌린 남성이었다.

    6
    정답이 아닌 것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강사는 종종 그렇게 말했다. 남자는 강사가 뱉은 말들 중에서 그 말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정답이 아닌 것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남자에게 그 말은 어디에도 정답이 없다는 말처럼 들렸다.
    헤이즐을 겪게 된 뒤로 모든 순간은 변했다. 아침저녁으로 여자와 먹을 것을 차려 먹을 때 헤이즐은 식탁 한편에 올라앉아 속삭였다. They are facing each other. 특유의 바람처럼 뜬 목소리가 들리면 그 목소리를 빚어내는 입술, 잇몸, 입천장, 목구멍의 성대까지 눈앞에 그려졌다. 집을 나서거나 돌아올 때 헤이즐은 어느 골목에선가 불쑥 나타나 두 사람보다 앞서 걸었다. 넓지 않은 집 안에서 각자 여가를 보낼 때 그리고 잠자리에 들 때 헤이즐은 끊임없이 존재했다. 화장실에 따라 들어왔고, 다정하게 통화를 나눴고, 책을 보며 강사의 말을 되뇌였고, 앉은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영어 이름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헤이즐입니다. 어머니께서 헤이즐넛 커피를 좋아하셔서요. 휴일을 맞아 번화가를 걸을 때면 왼팔에 팔짱을 낀 여자뿐만 아니라 오른쪽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떨어져 걷는 헤이즐의 어깨가 느껴졌다. 앞서 걷는 사람이든 마주치는 사람이든 헤이즐이었다가, 헤이즐이었다가, 헤이즐이 아니었다. 남자는 차츰 여자와 함께 있는 모든 순간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알 수 없게 됐다. 여자와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할 때면 남자는 페이스북이나 구글 검색창에 헤이즐이라는 이름을 타이핑해보기도 했다. 남녀 불문하고 여러 외국인의 얼굴이 검색됐고, 드문드문 동양인 유학생으로 보이는 얼굴도 검색됐으며, 개암나무에 관한 백과사전 자료 또한 검색됐다. 이 헤이즐, 저 헤이즐이 살아온 시간을 구경하고, 앞으로 남은 삶을 사는 동안 그리 유용할 것 같지는 않은 개암나무에 관한 지식을 읽어내려가다보면 여자의 응시가 느껴졌다. 근무 중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남자는 번호표 발권기 앞에 서서든 홀서빙을 돌든 혹 헤이즐이 저녁 식사를 하러 오지 않을까, 어쩌면 이미 주방 쪽 테이블에 앉아 있는, 박스 티에 슬랙스를 입고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쓴 저 사람이 헤이즐은 아닐까,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누굴까, 친구일까, 애인일까, 동생일까 하고 멈출 수 없는 몽상에 잠겼다. 그러다보면 여자가 보였다.
    덕분에 남자는 자신의 감정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됐다. 3주차 강의가 시작되던 월요일 헤이즐을 마주치면서 남자는 그 감정을 부인할 수 없었다. 헤이즐이 제 가슴 아래께에서 숨을 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는 멀리 떨어져 앉아 있는 헤이즐의 숨결까지 느낄 수 있었다. 다소 엉뚱해 보이지만, 남자는 꾹꾹 참아온 오줌을 마침내 바지에 터뜨리는 기분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수학여행 때, 수백 명의 친구들과 충북 단양군 고수동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던 때, 아무리 걸어내려가도 햇빛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던 때, 왜소한 소년이었던 남자는 결국 하늘색 칠부바지에 오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앞뒤로 수백 명이 걷고 있었고, 오줌은 멈출 줄 모르고 터져나왔고, 삼각팬티는 뜨겁게 젖어들었고, 바지는 가느다란 다리에 축축하게 들러붙었고, 종아리로는 소변 줄기가 흘러내렸다. 양말도 젖고, 신발 밑창도 젖었지만 걷고 또 걸었다. 그 질척거리던 발바닥의 느낌. 차라리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지경이었으나 그것만큼은 참아야 했다. 문득 뒤를 돌아본 친구는 물었다. 야, 너 물 흘러내리는데? 바지도 젖은 것 같은데? 남자는 아무 말이나 끌어모아서 대답했다. 어, 왜 이러지? 여기가 동굴이라 물이 많아서 그런가봐. 말하자면 속수무책인 것들.
    스탠드 주홍 불빛에 물든 침대에서 여자와 관계하던 밤, 두 사람은 한동안 마주보았다. 여전히 검푸르던 눈동자, 어쩌면 이미 눈치챈 건 아닐까. 남자는 불리한 지형에 놓인 것처럼 여겨져서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제 몸 위에 올라온 여자의 몸, 제 가슴 위에 놓인 여자의 두 손바닥, 제 손바닥이 맞닿아 있는 여자의 허리가 어쩌면 헤이즐의 몸이거나, 손바닥이거나, 허리는 아닐까, 헤이즐이 아닐까, 하는 생각. 남자는 눈을 떠 여자를 보았다. 여전히 검푸르던 눈동자. 여자의 푸른 가슴에 입을 맞추었던 새벽이 떠올랐다. 울컥 치미는 게 있었지만 참아야 했다. 허리를 세워 여자의 가슴에 입을 맞추었다. 남자는 여자의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우습지만. 여자로 살고 싶을 때가 있어.

*

   발권 번호 78번 손님. 남자의 말에 두 커플로 보이는 이들이 대기자 벤치에서 일어섰을 때, 그들 중 맨 왼쪽에 헤이즐이 있었을 때, 헤이즐과 눈을 마주친 남자는 발권기로 눈을 돌렸다. 뷔페와 일반 중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남자는 모르는 여자 둘과 모르는 남자 하나를 보았다. 뷔페로 할까, 일반이 나을까? 배 안 고파? 당연히 뷔페가 낫지. 그들이 대화를 주고받는 틈을 타서 헤이즐의 눈치를 살폈을 때 헤이즐은 멋쩍은 표정으로 일행을 보고 서 있었다.

    7
    여자로 살고 싶을 때가 있어, 하고 남자가 말했을 때 여자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 말들이 천장까지 휘감아 올리던 커다란 그림자들. 네가 정말 여자라면 어떨까. 그리고 바라본 남자의 얼굴, 눈동자. 여자는 두 손을 남자의 얼굴로 가져가 그새 감긴 눈꺼풀을 쓰다듬었다. 여자는 몸 안에 받아들인 남자의 성기가, 어쩌면 자신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비약적인 생각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빌라 건물을 나와서 여자는 남자에게 문자를 남겼다. 오늘 일이 좀 있었어. 마중 나갈게. 여자는 은행나무 가로수와 주홍빛 가로등이 줄지어 선 길을 걸었다. 남자를 소개받았던 날 밤에도 걸었고, 어쩌면 앞으로도 한동안 남자와 걷게 될 이 길. 여자는 핸드폰 판매 대리점들을 지나, 각종 로드샵들을 지나, 온갖 브랜드의 대형 신발 매장들을 지나, 구청과 교보문고 빌딩을 지나쳤다. 그렇게 회전초밥집 앞에 도착해서는 맞은편 도로변에 있는 아담한 카페로 향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한 여자는 빈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귀에 익은 음악이 들려왔다. 하지만 너는 거짓말, 몇 마디 말로만 남았네. 이 곡을 어디서 들었더라. 일요일이면 바람이 불고, 연두색 커튼이 흔들리고, 너는 거기 없는 듯이, 그렇게 있어. 어째서 익숙할까, 여자는 생각했다. 남자가 일을 마치고 나오면 물어볼까. 그전에 맥주나 한 잔 마시고 들어가자고 할까. 저녁 삼아 그러자고 할까.

*

   여자로 살고 싶을 때가 있다고, 얼떨결에 중얼거렸던 밤 이후로 남자는 가슴 어딘가 잔잔한 파문이 일렁이는 수면을 느끼곤 했다. 그건 뭐랄까. 여자를 통해 헤이즐이 뚜렷해졌던 것처럼 헤이즐을 통해 여자 또한 뚜렷해지는 기분이었다. 남자는 그 과정이나 결과를 누구에게든지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물을 내리듯 가볍고도 막막했다. 헤이즐이라는 이름이 대명사처럼 여겨지던 학원을 그만두고 구청 근처 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강의가 끝나는 대로 교보문고에 가서 어느 작가의 책들을 한 권씩 읽어가면서, 남자에게 여자는 예전과는 다른 형상으로 구체화되는 것 같았다. 어딘지 모르게, 잔잔한 파문의 형태로.
    하지만 다시 마주친 헤이즐은 남자를 또 한번 충북 단양군의 고수동굴 속으로 거침없이 끌고 들어갔다. 남자는 자꾸만 요의를 느꼈다.
    남자가 바지 주머니에서 미세한 진동을 느꼈을 때, 헤이즐 일행은 테이블 한편에 족히 스무 개가 넘는 빈 접시를 쌓아올리고 있었다. 남자는 그들이 앉아 있는 48번 테이블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 애썼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빈 접시의 탑들 사이로,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는 흥분에 찬 대화들을 주고받으며 낄낄대는 세 사람의 얼굴, 가끔 그 웃음에 동참하는 헤이즐의 얼굴이 보였다. 헤이즐은 말쑥한 정장 차림에 윤이 나는 검정 구두를 신고 있었고 검정 재킷의 앞 단추는 풀고 있었다. 그런 헤이즐이 두리번거리려는 낌새라도 보이면 남자는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려, 헤이즐과는 처음부터 다른 시공간에 있었던 것처럼 눈동자의 외벽에 검푸른 유리벽을 세우려 했다. 반환된 쟁반과 접시들을 닦거나 셀프 코너 바닥에 너저분한 미역 줄기와 락교를 치우며 남자는 어서 여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잠시 홀이 한산해졌을 때 남자는 동료 아르바이트생에게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헤이즐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했고 바지 주머니에서 울렸던 미세한 진동 때문이기도 했다. 어쩌면 여자의 문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런가, 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던 여자의 말소리는 서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래서 더더욱 여자가 남긴 말을 읽고 싶었다. 좌변기 칸에 들어와서 남자는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오늘 일이 좀 있었어. 마중 나갈게.

    8
    남자는 변기 앞에 서서 무슨 말들로 답장을 채우면 좋을지 망설였다. 천장에선가 바닥에선가, 흐르는 물이라고 해야 할지 새는 물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물소리가 들려왔다. 멍하니 변기 안쪽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피사체들의 경계가 흐려져서, 눈에 맺히는 무엇이든 보인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차츰 어딘가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냥 이대로 흘러들어가고, 또 들어간다면? 그러다 어느 순간 유리벽 같은 질감을 한 무엇인가 손에 닿는다면? 그것을 짚고서 더 깊숙이, 깊숙이 들어간다면…… 그때 문득 변기 칸 문밖에서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그대로 핸드폰을 든 채 변기 안쪽을 내려다보았다. 수면은 고요했다.

한이연

소설이 서사를 수반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일상과 비일상이 구분되는 순간에 집착합니다. 그것은 요컨대 균열……, 제게 언어는 일상과 비일상의 균열을 비집고 들어가는 수단이며, 그 자체로 목적입니다. 어쩌면 그 쓰기의 과정이 소설적인 그것이라기보다 시적인 그것에 가깝다고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 제게 있어 보다 중요한 문제로 받아들여지는 건 ―그 말이 지금까지 쓰여온 맥락과는 무관한 듯한, 달리 보면 썩 무관하지도 않은 듯한― 리얼리즘입니다.

2017/12/26
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