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한 애 사진에 낙서한 사람이 너였지? 동창회가 파한 뒤, 다섯 명쯤 한꺼번에 우리집으로 몰려왔을 때 말이야. 분위기를 타서 헤어지기는 아쉬운데 택시 탈 돈은 없다는 친구들이었지. 내가 책장에서 졸업앨범을 꺼냈고, 우리는 모두 사인펜을 들고 다정하게 앨범 앞에 모여 앉았지. “난 얘랑 제일 친했는데.” 취한 네가 사인펜으로 그애 얼굴에 엑스 표를 쳤잖아. 기억해. 고등학생 때 나와 그애는 같은 아파트 옆 동에 살았고, 등교 시간을 잘 맞춰 자전거 보관소 옆에서 기다리면 그애를 오래 훔쳐볼 수 있었지. 나는 재활용 쓰레기통 뒤에서 신발 끈을 묶는 척하며 꾸물거렸는데. 다시 보니 기억만큼 잘생긴 얼굴은 아니더군. 두 줄 아래에는 네 사진도 있었어. 넌 피식 웃었지.
   “우리가 같은 페이지에 있는 줄도 몰랐네. 졸업한 뒤에는 이런 거 안 보게 되잖아.”
   우리집에 왔을 때 벌써 2시였으니 다른 애들은 추억을 오래 되새겨보지도 못하고 픽픽 쓰러졌지. 4시까지 버틴 애들이 네 명, 두 명, 아니, 내가 토한 걸 생각하면 너 하나뿐인가? 새로 산 탁자에 몇 번이나 토했다는 걸 나중에야 알고 얼마나 웃겼는지. 소목장에서 골라 내가 직접 흰 페인트로 칠한 탁자였거든. 이 원룸은 태어나 처음으로 가진 나만의 독립 공간이라,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아름답게 방을 꾸미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몰라.
   그런가 하면, 아침에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을 수습한 사람도 너였지. 아마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 앞에서 내가 부끄러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야, 깨보니 내가 실수를 했네. 진짜 미안하다.” 네가 먼저 사과하자, 다른 애들도 새삼 오랜만의 재회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어색하게 고개를 주억거렸어. 어젯밤이 참 기억이 안 나네, 중얼거리면서. 수능 이후 한동안 내가 학교에 안 나왔던 기간이 있었잖아. 동창회에도 올해 처음 얼굴을 내민 거였고. 잔무늬 없는 민트색 벽지를 바른 벽이나 전날 내가 공들여 박박 닦았던 바닥을 둘러보면서, 아이들은 그러고 보니 어쩌다 우리가 여기까지 왔지? 하고 새삼 궁금해하는 듯했어. 맥주병이 좀 굴러다니긴 했지만, 사실 방에서 더러운 건 그 탁자 하나뿐이었지. 혹시 친구들이 집을 방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리 집을 깨끗이 청소했으니까.
   집이 가깝지 않았더라면 내가 굳이 동창회를 갔을까! 지금 메일을 쓰면서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네. 늦은 밤까지 어깨를 맞대고 웃으며 술을 마시다 보니 학창 시절의 철없던 즐거움이 잠시 돌아오는 것도 같았어. 하지만 더러운 탁자를 둘러싸고 서 있자니 우리가 육 년 전뿐 아니라 아예 한 번도 마주쳤던 적 없는 낯선 사람들 같고, 애들이 죄다 나만 쳐다보는 것 같더라. 자기가 토했다며 네가 먼저 나서기 전까지는. “탁자 값은 계좌로 보낼게!” 너는 능청스런 연기까지 하면서 더러운 탁자를 들고 나갔지. 내가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네 개구리 열쇠고리는 그만 깜박하고 두고 갔지만 말이야.
   너는 그 개구리 열쇠고리를 아낀다고 했어. 여자친구가 입대를 앞두고 선물해준 행운의 부적이라고 했지. 덕분에 군 생활도 잘 마쳤고, 얼마 전에는 토익 시험도 잘 봤다면서. 그러잖아도 개구리는 네가 좋아하는 동물이었잖아. 그렇지? 수험생 때 넌 개구리 장식이 달린 펜도 세 종류나 갖고 있었잖아. 마실 만큼 마신 뒤에도 기억은 또렷했어. 나는 탁자에 머리를 박은 채로 네가 아무 낙서나 끼적이며 중얼거리는 이야기를 들었어. 우리가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에 앉아 매점에서 산 빵을 먹으며 대화하던 그때처럼. 그래, 우리 둘 다 맛없는 급식보다는 빵을 사먹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지. 나는 초콜릿이 박힌 롤빵을 좋아했고, 너는 딸기크림이 든 슈를 좋아했지. 나는 좋아하는 남자애의 친구와 친해지고 싶었고, 넌 그애가 친구들과 시시덕거리며 여자아이들의 몸매를 품평한다는 사실을 알려줬지. 학교 앞 슈퍼에 늘 제 몫의 담배를 맡겨두고, 자동차 공장 사람들이 담벼락에 기대둔 오토바이도 훔친 적 있다면서. “사귈 만한 애는 아니야.” 그 이야기를 해준 사람도 분명 너였어. 나와 놀던 아이 중 그 친구와 친한 건 너밖에 없었으니까.
   앨범에서 찢겨나간 페이지를 들여다보며 너는 한동안 침묵했어. 엎드려 있자니, 주변 아이들이 코를 고는 와중에도 네 숨소리는 이상하게 점점 크게 들리며 또렷해졌지. 너만 전혀 취하지 않은 듯 부드러운 호흡이었고, 그래서 네가 나와의 재회를 나름대로 신경 썼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어. “왜 네 사진이 있는 페이지를 찢어버린 거야?” 너는 조용히 물었어. 나를 배려한다는 듯 조심스럽게.
   그때 나는 그만 토해버렸지. 몇 번이고 구역질이 났어. 내가 연신 잔고를 헤아려가며 골랐던 아끼는 탁자는 난장판이 됐지. 네가 놀라면서 들고 있던 앨범을 얼른 치운 덕분에 다행히 탁자만 더러워지고 끝났지만. 네가 말도 없이 재빨리 성큼 들고 나가버린 그 탁자 말이지.
   메일이 길어져서 미안해. 열쇠고리를 돌려주기 어렵겠다는 말을 하려다 엉뚱한 이야기만 하고 말았네. 사실 여기부터가 정말 중요한데! 분명 며칠 전까지도 네가 지갑에 달고 다녔을 개구리가, 우리집에 있는 동안 크기가 쑥쑥 자라고 있단 말이지. 쓰고 나니 허무맹랑하게 들리는군. 하지만 네게 왜 거짓말을 하겠어?
   첫날 소파 밑에서 주웠을 때는 그저 보통 열쇠고리 크기였어. 그런데 하루 자고 일어나보니 주먹만해져 있더군. 아직 술이 덜 깼다고 생각하면서 현관 곁에 뒀는데, 다음날 아침이 되니 베개만큼 커진 것 있지. 사흘이 지난 지금은 옛날 교실에서나 볼 법한 원통형 난로만큼 자랐네. 제법 무거워져서 옮기기도 힘들더라고. 밖으로 나가려면 나는 이제 녀석을 피해서 돌아가야 해.
   그러니 녀석이 더 자라기 전에 네가 들고 가준다면 정말이지 고맙겠어. 크기만 커졌지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니까 어렵지 않을 것 같기도 하네. 녀석은 처음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녹색 플라스틱 조각에 불과하고, 점점 자라면서도 여전히 살아 있지 않은 물건인 채로 있거든. 살아서 개굴개굴 울고 펄떡펄떡 뛰어다니는 편이 더 섬뜩할까? 아무튼 늦지 않게 와 준다면 너도 네 행운의 상징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여자친구가 선물해준 개구리를 잃어버리고 싶지는 않지? 별다른 이유 없이 자라고 있는 것은, 다시 별 이유 없이도 줄어들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

   정은 사흘 뒤에야 빈의 메일을 확인했다. 고등학생 때 만든 메일 주소를 정은 이제 거의 쓰지 않았다. 핸드폰 화면을 넘겨보며 시간을 죽이다가 우연히 스팸 메일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지 않았더라면 정은 빈의 메일을 훨씬 늦게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치과 홍보물과 유엔 난민기구 소식지 사이에서 빈의 이름을 발견했다.
   확인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몰랐다. 메일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묘하게 어긋났다. 정이 마지막까지 술자리에서 버텼다는 이야기부터가 틀렸다. 정은 술이 약했고, 사실 탁자에 토한 사람이 빈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했다. 4시쯤 됐을 무렵 그는 이미 다른 애들과 마찬가지로 침을 흘리며 졸고 있었다. 졸업앨범을 두고 탁자 주변에 둘러앉았던 것 같기도 하지만, 글쎄, 펜을 들어 낙서한 사람은 빈이 아니었던가? 정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식의 사진에 낙서를 한단 말인가? 해장도 못하고 얼굴이 퉁퉁 부은 정이 더러운 탁자를 들고 나온 건, 일동이 자연스레 그에게 귀찮은 뒤처리를 떠넘긴 탓이었다. 학창 시절 정은 상대와 눈을 마주치기도 어려워하는 숫기 없고 통통한 소년이었다. 다들 빈과 육 년 만에 만난 사이였으니, 집까지 쳐들어올 만큼 친한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책임지는 편이 깔끔하다는 분위기가 암묵적으로 형성됐을 때 자신에게 쏟아지는 눈길을 모른 척할 만큼 정은 뻔뻔하지 못했다.
   분명히 빈과 점심시간을 같이 보냈던 건 맞아, 정은 턱을 긁으며 생각했다. 그 시절 정은 친구가 적었다. 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학창시절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한 열기를 간직하고 있다는 양 써놓은 빈의 묘사는 의아했다. 벌써 오래전 일 아닌가? 그리고 자기 말마따나, 빈은 한 번도 동창회에 얼굴을 내민 적 없지 않은가? 정은 군대에서 구르며 살을 15킬로그램 뺐다. 제대 후에는 물류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돈 500만원으로 턱과 목덜미를 뒤덮은 피부염을 치료했고 코 수술을 받았다. 스쳐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느낄 때마다 정은 새삼 놀라웠다. 이렇게 쉽게 다른 사람처럼 태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지금까지는 몰랐을까?
   그에 비하면 빈은 그야말로 변한 점이 하나도 없는 듯했다.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고교 시절 추억이 멀어졌다고는 해도 그들은 아직 이십대 중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만난 빈에게서는 세월에 벌써 뒤처지는 듯한 기미가 엿보였다. 낯빛에 윤기가 없고 암막 커튼을 친 창처럼 조도가 낮았으며 예능 프로그램이나 SNS를 주제로 한 농담에 도무지 따라오지 못했다. 스스로도 썼듯 공들여 관리한 흔적이 엿보인 방은 최소한의 가구뿐, 별다른 취미생활의 흔적이 드러나지 않아 오히려 살풍경하기만 했다. 정은 한숨을 쉬었다. 그야 모든 사람의 첫사랑이 다 아름답게 남을 수는 없는 법이지만……

   정이 결국 빈의 집을 방문하기로 결심한 건 열쇠고리 탓이 컸다. 정이 원래 개구리를 좋아한다는 빈의 설명만은 정확했다. 뚜렷한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으나 정은 학창 시절부터 동물원의 파충류나 양서류 관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고, 핸드폰에 개구리 열쇠고리를 달고 다녔다. 개구리는 발견하거나 손에 움켜쥐기 쉬웠고 어떤 동물보다도 유연하게 꿈틀거렸다. 그보다 어린 시절에는 서늘하고 축축한 녀석들을 잡기 위해, 여름마다 좁은 개울이며 논두렁, 하수구를 헤맸다. 청개구리의 밝은 녹색은 한여름 뿌려진 소나기처럼 선명히 눈에 와 박혔다. 몇 마리쯤은 절절 끓는 한여름의 도로로 내던져 죽이기도 했지만, 또 몇 마리는 변덕스럽게 수조 속에 던져넣었다. 어떤 녀석들은 수조 안에서 거의 일주일 동안이나 살아 있었다. 강아지나 카나리아 같은 애완동물과 달리, 개구리에게 책임감을 가지라며 정을 나무라는 어른은 없었다. 개구리들은 수가 무진장 많고 시끄러운 동물이었으며 누구도 그 안위를 걱정하지 않았다.
   여자친구가 일본 여행 중 산 열쇠고리는 엄지만한 크기에 만두처럼 통통하고 매끄러웠다. 사팔뜨기처럼 뜬 불룩한 눈은 익살스러웠다. 면접에 대비해 거울을 쳐다보며 시선을 마주치는 연습을 할 때, 정은 저도 모르게 녀석을 손 안에 넣고 떡처럼 주물러대고는 했다. 조그맣고 친밀한 얼굴을 한 개구리에게는 그야 물론 정이 들었다. 그러나 열쇠고리 하나 때문에 꺼림칙한 상대를 다시 만나야만 할까? 개구리가 팝콘처럼 부풀고 있다고 주장하는 괴상한 고등학교 동창과?
   주말에 방문하겠다는 간단한 답장을 보내기 전, 정은 망설이며 한 번 더 메일을 읽었다. 다시 보니 빈은 아끼던 탁자를 정이 들고 나갔다는 데 마음이 상한 것 같기도 했다. 잘 닦아 다시 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이 갖고 나간 게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탁자의 값을 치르며 잘 이야기하면 분명 풀릴 만한 성질의 문제이리라. 빈의 강조와는 달리 조그만 흰색 탁자는 전혀 값나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 탁자 값을 물어주면 되겠지. 편지의 온갖 거짓말은 마음이 상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고백하는 수단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일단 식과 정이 친한 사이라고는 빈말로라도 할 수 없지 않은가. 담배를 피우고 오토바이를 탄, 같은 반의 잘생긴 아이라면 분명 식이었을 텐데. 하지만 식과 정은 친구가 아니었는데. 빈은 학창 시절을 대체 어떻게 추억하고 있는 걸까? 수능 이후 한동안 학교를 나오지 않았던 사실과 관련이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약간 불편해졌다. 정과 빈은 핸드폰 번호조차 교환하지 않았다. 학창시절에 빈이 어떤 얼굴이었더라, 앨범이라도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그런 건 졸업하자마자 어디 구석으로 처박아버린 뒤였다. 정말로 식의 사진 두 줄 아래 자기 사진이 있는지 확인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빈의 오피스텔이 있는 동네까지 가려면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했다. 그들이 다닌 고등학교는 지방 소도시에서도 재개발이 덜 된 동네에 세워졌다. 낮은 주택 사이사이 텃밭이 들어서 있었고 바늘처럼 좁게 이어지던 골목은 큰길과 이어지는 대신 어느 순간 뚝 끊기곤 했다. 외투 하나만 걸치고 서성거리는 변태 남자, 여고생의 낙태 같은 흉흉한 소문이 돌기에 적합한 동네였다. 아직도 그 동네에서 사는 친구는 빈밖에 없었다.
   매년 굳이 학교 앞 삼겹살집에서 모이자는 의견을 낸 사람이 대체 누구였지? 아마도 식이었으리라. 식은 적극적으로 동창회 모임을 이끄는 멤버였다. 돌아보니 고등학교 3학년 때 좋은 추억이 많다고 했다. 체육대회 때 단거리 주자로 활약했다거나 뭐 그런 종류의 얘기였으리라. 녀석은 3학년 때도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다. 공장 뒤편에 늘어선 오토바이를 훔치거나 옥상 앞 계단에서 담배를 피우다 얻어맞은 기억은 싹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실제로 정학당했지만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았다. “나쁜 기억은 잊고, 주먹 불끈 쥐고 앞으로 나가자고.” 늘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친구였다. 어쨌든 앞장서 총대를 멜 사람이 필요하니 누구도 식을 말리지 않았다.
   주말이었지만 길모퉁이 정류장에서 버스를 탄 승객은 정 하나뿐이었다. 승객은 대부분 어린애들이나 등산복을 입은 노인이었다. 맨 뒷좌석에 앉은 아이들은 가슴에 커다란 개구리 얼굴 이름표를 꽂고 있었다. 각자 이름이 적힌 걸 보니 유치원이나 학원에서 쓰는 이름표인 모양이었다. 정은 중간쯤의 빈 좌석에 앉았다. 그날 빈과 식이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머리를 짜내 봤지만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삼십 분쯤 지각한 정은 삼겹살집에서 끄트머리에 끼어 앉아야 했다. 식은 여자애들이 앉은 맨 안쪽 테이블에 끼어들어 시끄럽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빈은 정의 맞은편 끝자리였다. 더러운 탁자를 내려다보며 콩기름 쩐내가 나는 파전 가장자리를 젓가락으로 쿡쿡 찌르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머리칼이 구부정하고 가는 목 위로 쏟아진 꼴이 고등학생 때와 달라진 바가 없어, 정은 문득 말을 더듬었다. “빈이니?” 귀신이라도 본 듯한 기분이었다.
   개구리 이름표를 단 어린애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재잘거리며 버스에서 내렸다. 정은 무심코 그 애들이 내리는 모습을 보다가 맞은편에 앉은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맑은 날인데도 그녀는 커다란 우산을 지팡이마냥 꽉 움켜쥐고 있었다. 개구리가 그려진 녹색 우산이었다. 평소라면 재미있는 아이템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문득 당혹스러웠다. 정은 버릇처럼 바지 주머니 부근을 어루만졌으나 거기 매달려 있어야 할 열쇠고리는 없었다. 정이 터미널에서 내릴 때까지도 맞은편에 앉은 할머니는 우산을 바닥에 부딪쳐 딱딱 소리를 내며 그를 쳐다봤다.
   시외버스는 예상보다 늦어졌다. 식은 정과 영 다른 세계의 인간이었고 정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었으나, 그의 개구리 필통이나 녹색 뚜껑이 달린 펜을 불쑥 집어들고 살펴보는 일이 왕왕 있었다. “넌 이런 걸 어디서 사냐? 여자애들이랑 같이?” 자기는 남의 물건을 언제든 덥석 들고 살펴봐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게 분명했다. 식과 같은 인간은 어디서든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정은 생각했다. 복학하는 대신 부모님 돈을 빌려 친구의 가게에 투자해볼까 한다고 떠드는 소리가 정이 앉은 테이블까지 들렸다. “안 되면 시험이나 보지 뭐.” 고등학생 때 벌써 남의 오토바이를 훔쳐 타곤 하던 녀석이. 멍청한 놈, 정은 팔짱을 낀 채 생각했다. 멍청한 녀석은 씨발놈이 될 수도 있겠지. 식은 정의 펜을 두 개나 빌리겠다며 들고 가서 돌려주지 않았다. 자기가 그랬다는 사실을 아마 기억도 못하겠지.
   두번째 버스에 올라탄 정은 다시 한번 개구리와 맞닥뜨렸다. 개구리가 커다랗게 그려진 스웨터를 입은 사십대 남자가 앞좌석에 다리를 쩍 벌린 채 앉아 있었다. 스웨터의 노란색이 표지판처럼 선명했다. 정은 맨 뒷좌석으로 도망치듯 가 앉았다. 창밖으로 개구리 모양 풍선을 쥔 여고생들이 지나갔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그들은 버스가 코너를 휙 돌자 놀랐다는 듯 고개를 움직여 창가에 앉은 정을 빤히 쳐다봤다. 동그란 녹색 풍선들이 바람에 따라 춤췄다.
   버스는 시 외곽으로 빠져나가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문득 정은 자신이 빈의 집 주소를 정확히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혹시나 외우고 있지 않을까 싶어 식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핸드폰을 쥔 손에 땀이 차 끈적거릴 무렵 정은 머리를 차창에 부딪치며 짧은 꿈까지 꿨다.
   꿈속에서 정은 그날 밤 빈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미 취한 다른 사람들은 들어오자마자 양말도 벗지 못하고 뻗었다. 빈은 과음하면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지 창백한 낯으로 소파에 기댔다. 정 또한 머리가 아팠지만 집주인이 힘들어하는 꼴을 보니 마음이 쓰여, 부엌으로 가서 찬물이라도 가져올까 물었다. “아니. 난 괜찮아.” 빈은 의외로 또렷하게 말했다. 그리 인상적이지는 않으나 맑은 저음이었다. “조금 있으면 나아질 거야. 그보다 재밌는 게 있는데, 같이 볼래? 너도 좋아할걸.”
   빈이 졸업앨범과 펜을 들고 나타났을 때 정은 소파에 반쯤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직 뻗지 않은 또다른 한 명, 식은 여자친구와 통화라도 하는 모양인지 복도에서 서성거렸다. 섹스, 섹스 어쩌고를 다섯 번도 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집 안까지 들렸다. “이봐, 같이 놀기로 했잖아.” 빈이 어깨를 툭툭 쳐 정은 겨우 눈을 떴다. 술이 느리게 도는지 목덜미까지 불그레해지면서 몸이 둥둥 뜨는 듯했다. 눈앞을 오가는 빈의 가늘고 흰 손을 턱 잡자 빈은 손을 빼내지 않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오. 졸업앨범은 오랜만에 본다.” 정은 앨범을 대충 넘겼다. 찢겨진 페이지를 턱짓해 묻자, 빈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동창회에도 오지 않은 낯선 얼굴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증명사진을 찍을 때면 흔히 나오는 굳은 미소 탓에 다들 한층 멍청해 보였고, 그래서 더 어려 보였다. 정말이지 그때는 그들 모두 어렸다. 어리다는 이유로 대개 수습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어리석은 실수를 많이 저지르기도 했다. 정신 차려보니 정은 사인펜을 손에 쥐고 있었다. 식은 여전히 바깥에서 뭐라 말하고 있었다. 지치지도 않는 녀석이었다. 술을 진창 마신 탓인지 너덜너덜한 밴드 아래 고인 딱지와 생채기 같은 반감이 한순간 뾰족한 모습을 드러냈다. 정이 사람들 앞에서 그토록 오래 떠들어댔다면, 잠들 무렵 반드시 자기혐오로 침대에서 뒤척이며 어두운 천장을 노려보았을 터였다.
   차가 정류장에 급정거하는 통에 정은 차창에 머리를 부딪쳤다. 사인펜을 내밀고 개구쟁이처럼 씩 웃던 빈의 표정을 떠올리자 다음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다음 정류장에서 내린 사람은 정 하나뿐이었다. 앞문으로 비틀비틀 내리며, 정은 분명 버스 기사의 셔츠 소매 틈으로 작은 청개구리 한 마리가 뛰어내리는 모습을 봤다고 생각했다. 녀석은 기사의 바짓단을 타고 흘러내리더니 정의 발 아래로 요요처럼 날렵하게 튀어올랐다.

   “얘는 기억나. 2학년 축구 시합 때 골을 넣었지. 얘는 모르겠네. 이과 반이었나.” 낙서를 하면서 정은 혼자 피식피식 웃었다. 반쯤 잠든 상태나 마찬가지였고 희미한 요의가 느껴졌다. 노래를 부르거나 물구나무를 서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빈은 선생님처럼 빨간 펜을 들었지만 낙서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정을 말리지도 않았다. 고양이처럼 등을 세우고 작은 몸을 웅크려 앉은 채 재미있다는 듯이 정을 보고 있었다.
   어둠이 흐르는 물처럼 바닥으로 가라앉고 잠든 사람들의 숨소리 탓에 오히려 사방이 더 조용해지던 그 때 둘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눴다. “기억력이 좋네.” “몇 년 지나지도 않았잖아. 얘기는 많이 안 나눴어도 삼 년 같이 있었으면 누가 뭘 했는지는 알지. 나는 애들을, 그러니까, 뒤에서 좀 지켜보는 타입이거든.” 늦은 시간이 아니었더라면 취했어도 그런 말까지는 하지 않았을 텐데.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럼 나 3학년 때 학교 안 나온 것도 기억하겠고.” “응? 어, 그래. 몸이 안 좋았다고 했지. 지금은 좀 나아?” 정은 사실 빈이 아프다는 사실을 거의 잊고 있었으나 허둥지둥 되물었다. 빈은 가볍게 웃더니 페이지를 넘겼다. “그래. 건강해. 나빠진 건강이 곧장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뒤에서 사람을 쳐다보기만 하는 타입이고, 빈은 눈빛이 어둠 속에서 물고기 비늘처럼 살짝 반들거리는 타입이구나. 정은 정말이지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계속 졸았다. “아프면 아무것도 제대로 못 했을 텐데. 너 참 안됐다. 그때 우리 모두 속으로 너를 걱정했는데.” 정은 탁자에 반쯤 기대 뻗은 채 머리를 좌우로 굴렸다. 화장실에 가고 싶었지만 일어나기 힘들었다. 그때까지도 식이 여전히 바깥에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 통화는 섹스, 섹스 하면서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았다.
   도무지 얼굴을 볼 수 없던 식이 대체 언제쯤 다시 방으로 들어왔는지, 사인펜으로 누가 식의 졸업 사진에 엑스 표를 쳤는지 정은 끝내 기억하지 못했다. 빈이 학교를 쉰 이유에 관해 자신이 무어라 더 떠들었는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오피스텔의 어두운 계단을 오르며, 정은 아무래도 술에 취해 탁자에 토한 사람이 자기 같다는 불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계단을 오를수록 확신이 굳어지면서 등줄기를 적신 땀이 차가워졌다.
   빈의 집은 4층이었다. 문은 잠겨 있었다. 자신이 오늘 도착한다는 연락을 빈은 분명 받았을 터였다. 정은 숨을 헐떡거리면서 초인종을 짧게 두 번 눌렀다. 집 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빈이 묘사한 거대한 개구리의 외양이 정의 머릿속을 스쳤다. 혹시 정말로 커다란 개구리가 안에서 문을 틀어막고 있다면, 있는 힘을 다해 밀어붙이면 약간의 틈이 생기지 않을까? 작은 희망을 품고 체중을 실어 밀었으나 문은 꿈쩍하지 않았다. 빈은 문을 잠그고 외출한 게 틀림없었다. 침묵 속에서 정은, 빈이 부디 집 안에서 조용히 바깥 동정을 살피고 있기를 바라며 초조하게 머리를 숙였으나 인기척은 없었다. 만약 개구리가 정말 자라는 중이라면, 놈은 한여름 강가의 식물처럼 소리 없이 왕성하게 불어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정은 입술을 깨물고 그 침묵에 귀 기울였다. 정말이지 그는 탁자의 값을 지불하고 싶었다. 용서를 빈 다음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정은 빈의 전화번호조차 몰랐다.
   정은 떨리는 손으로 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은 계속해서 길어지다 소리샘으로 튈 뿐 이어지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걸면서 정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정이 아는 한 그날 빈은 식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러나 정이 대체 뭘 알았단 말인가? 알고도 모른 척한 일들, 기억해야 하는데도 잊어버린 일들이 있지 않았던가? 오늘은 사정이 다를 것 같았다. 만약 이번에 식이 전화를 받더라도, 수화기 저편에서는 오직 목이라도 졸린 듯 낮고 단조로운 개굴개굴 소리만 반복되리라고 정은 내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최수진

작품과는 조금 다른 얘기지만 요즘 사람의 죽음에 관해 자주 생각한다.
죽음 뒤에 무언가 남는다는 생각이 기만이라고 생각될 때도 있고, 아무것도 없다는 부정이 기만이다 싶을 때도 있다.
무엇이 있는지 없는지, 일이 벌어졌는지 아닌지, 교묘하게 말하는 소설의 힘을 믿으며 나아가야지. 그런 생각을 되풀이하는 요즘이다.

2018/02/27
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