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주는 일요일 정오가 다 되어서야 설경이 금요일 밤에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실없는 안부 문자일 게 뻔해서 열어보지도 않고 있었는데 주말 중에 집에 들러도 되냐고 묻는 문자였다. 곤란했다. 주말이 거의 다 지나가버렸다는 것도, 설경이 말한 집에 백주가 살고 있지 않다는 것도.
  침대에 누운 채로 백주는 고개만 돌려 방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박스들이 어수선하게 늘어선 채였다. 블라인드 틈새로 짓눌린 빛이 층층이 들어왔다. 이번 주말에는 정말로 짐 정리를 끝내려고 했다. 한 달이 넘도록 집 안은 이사날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백주는 박스 사이를 미로처럼 돌아다녔다. 원룸에 가구와 가전이 웬만큼 갖춰져 있어서 가지고 있던 물건들은 대부분 처분하고 소지품만 챙겨왔는데도 짐이 너무 많았다. 인환과 둘이 살던 아파트에서 가져온 것들이니 정리라고 했지만 대부분 버리게 될 터였다. 이번 주말엔 정말로 이 박스들을 다 치우려고 했다. 그리고 설경에게도 알리려고 했다. 그 아파트는 팔아 치웠다고. 아무런 이유도 덧붙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기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고 백주는 생각했다. 침묵할 권리, 처분할 권리.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권리.
  백주가 무슨 일이냐고 답장을 보내자 곧바로 설경이 다시 물어왔다. 지금 잠깐 집으로 가도 될까? 다음에 밖에서 보자는 백주의 문자에, 너 힘든데 신경 안 써도 돼. 내가 갈게, 라고 설경이 답했다. 백주는 자기가 언제 힘들다고 했냐고 묻고 싶었다. 인한의 장례식장에서도 백주는 설경만큼 울지 않았다. 설경과 시부모가 서로를 껴안고 울 때도 백주는 비껴 서 있었다. 그들이 인한의 가족이었다. 백주는 인한과 십오 년을 만났다. 오 년은 함께 살았다. 둘은 종종 자기의 가족들이 얼마나 이상한지 이야기하곤 했다. 그럼에도 백주는 자기를 인한의 가족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설경이나 시부모처럼 대놓고 슬퍼할 수 없었다. 아무도 백주의 탓을 하지 않았지만 백주는 누군가와 계속 싸우고 있었다. 인한은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자살했다.
  설경은 장례식 이후로 전에 없이 살가운 문자를 자주 보내왔다. 오늘 날씨가 좋은데, 산책이라도 하고 오라느니. 사람이 힘든 때일수록 햇볕을 쐬야 하고, 걷는 게 치유에 도움이 된다느니, 자살자 가족을 생존자라고 하는데, 자기랑 같이 생존자 모임에 갈 생각 없냐는 등…… 마치 백주가 지금 슬퍼하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이. 설경은 기어코 백주가 어떻게 사는지 눈으로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백주는 괜히 방을 서성이다가 설경에게 집 주소를 보내주었다.
  ―이리로 오면 돼.
  설경이 너네 집으로 간다니까, 라고 재차 물어서 백주도 다시 말해야 했다.
  ―나 이제 여기 살아.
  ―이사했어?
  설경이 물었다. 응, 이사했어, 라고만 말하려고 했는데 백주는 변명하듯 덧붙였다. 혼자 살기 적당한 곳으로 왔다고. 나 지금 출발할게. 설경이 문자를 보내왔다. 이번에도 설경이 새집의 첫 손님이라니. 백주는 비어 있는 냉장고를 괜히 한번 열어보고 집을 나갔다.
  백주는 인한과 결혼하기 전까지 부모와 살았다.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중학교 때까지 지방을 돌며 전학을 많이 다녔는데 아버지가 불명예 전역을 하면서 고등학교부터는 서울에서 다녔다. 부모님이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부대 내에서 어떤 불의의 사고가 발생했는데 아버지가 운이 나쁘게 책임을 지게 되었다고 했다. 백주는 고등학교에서도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들어간 원예 동아리에서 한 학년 위의 인한을 만났다. 인한은 식물보다 음악을 좋아했다. 왜 원예 동아리에 왔냐고 물으니 식물들도 음악을 들으면 잘 자란다는 기사를 읽어서, 라고 했다. 네? 백주가 되물으니, 동질감을 느꼈다고 인한은 대답하며 웃었다. 인한은 동아리 방에 있는 작은 화분들에 스톤 로즈, 퀸, 더스미스, 오아시스를 들려주었다. 그 음악들을 백주도 좋아하게 되었다. 인한이 백주와 같은 학년의 여동생을 소개해주었다. 설경은 백주가 집에 처음으로 데리고 온 친구였다. 백주의 가족은 서울 구시가지의 연립 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설경은 백주의 집을 둘러보며 말했다.
  “너네 아버지가 별 달 뻔했다고 해서 엄청 잘사는 줄 알았는데.”
  그때부터 백주는 설경이 집에 오는 게 싫었다.
  백주가 빵과 커피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설경에게서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다. 백주가 계산해본 시간보다 이십 분은 빨랐다. 택시를 탄 것 같았다. 백주의 집은 역에서 두 블록 정도 걸어가야 하는 동네였는데 가는 길에 정비 공사를 마친 하천이 있었다. 지난여름에 강이 범람해서 양옆으로 둑을 높게 쌓았고 둑길에는 벚나무를 심어놓았다. 백주는 그 길이 마음에 들어 빵집도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나오는 동네로 갔다. 아직 어린 벚나무의 성긴 그늘을 지나며 하천을 따라 산책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면 그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백주는 설경의 문자를 확인했지만 평소와 비슷한 속도로 강둑길을 걸었다. 형광 주황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열을 맞춰 우르르 산책로를 지나갔다. 작은 개들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며 짖었다. 초여름의 햇볕이 충분히 따가워 저절로 눈이 찡그려졌다. 오피스텔 현관 앞 짧은 그늘 밑에 서 있는 설경이 보였다. 핸드폰을 보고 있던 설경도 백주를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설경은 전보다 마른 것 같았다. 여전히 볼륨을 잘 넣은 커트 머리였고 학생처럼 크로스 백을 메고 있었다.
  “갑자기 이사를 했어?”
  설경이 인사 대신 물었다. 백주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설경이 말했다.
  “그 집에서 견디기 힘들었겠지. 다 이해해. 우리 엄마는 얼마 전에 옷장 정리하다 오빠 교복 발견하고 또 한참 울었대. 우리 엄마랑 아빠한테는 내가 잘 얘기할게. 걱정하지 마.”
  설경이 백주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백주는 어깨를 움츠렸다. 나시와 짧은 바지를 입은 남자가 백주와 설경 사이를 굳이 가로질러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백주와 설경은 그 남자가 엘리베이터를 먼저 타고 올라가길 기다렸다.
  백주가 식탁처럼 쓰고 있던 책이 든 박스 위에 빵 봉지와 커피를 두자 설경이 자연스럽게 봉지를 열어보았다. 아직 정리를 못 했어. 백주가 말하자 설경은 커피부터 집어 한 모금 마시고는 네 마음이 어지러워서 그렇지, 라고 말했다. 설경은 미용사로 일하며 사람들의 기분을 맞추는데 도사가 되었다고 말하고는 했다. 백주는 설경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우스웠지만 반박하기 어려웠다.
  둘은 잠시 말없이 커피와 크루아상을 먹었다. 맛있다, 설경의 말에 집에 갈 때 사갈래? 백주가 묻자 그 정도는 아니야, 설경이 답했다. 미용실은 어떡하고 왔냐고 백주가 물었다. 민영이랑 번갈아 가면서 주말에 쉬고 있어. 생각해보니 나 이 일 시작하고 주말에 쉰 적이 없더라고. 설경이 말했다. 빵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동안 설경은 여전히 가방을 메고 있었고 가방끈을 꾹 쥐었다 놓길 반복했다.
  “가방 안 내려놔?”
  백주가 물었다.
  “아, 그게……”
  설경이 가방끈을 다시 쥐었다가 놓았다.
  “그 돌 있잖아. 거기서 소리가 나…… 오빠 목소리 같아.”
  설경이 가방에서 울퉁불퉁한 검은 돌을 꺼냈다. 백주는 처음에 그 돌을 알아보지 못했다. 오빠가 집들이에서 나 준 거, 기억 안 나? 설경이 돌을 백주에게 건넸다. 보기보다 무겁지 않았다.
  “이거 운석이잖아. 다 타고 남은 거라 안 무거운 거야. 잘 보면 구멍이 있어.”
  설경이 말했고 백주는 그 돌을 받아들고 얼굴에 가까이 가져왔다. 표면에 깊이를 알 수 없는 타공들이 무수히 얽혀 있었다. 백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구멍 안은 어둠뿐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고요했다.

그 돌은 인한의 부모가 집들이 선물로 들고 온 것이었다. 가족만 초대한 자리였다. 인한의 부모는 업종을 바꿔가며 자영업을 오래해왔다. 크게 고깃집 체인 사업까지 했던 적이 있었지만 전염병이 돌던 시기에 전부 접고 쉬는 중이었고 백주의 아버지는 전역 후에 동기가 운영하는 군납 물류회사에 들어가서 일하고 있었다.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 백주는 여전히 몰랐다. 아버지들은 밖에 나가서 담배를 피웠고 어머니들은 서로 조용히 속삭이며 대화하다 가끔 웃기도 했다.
  설경은 처음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자기 친구와 친오빠가 오랜 연애 끝에 결혼을 했다는 것만으로 놀라운 일인데 서울 한복판에 아파트를 장만한 게 믿어지지 않는다면서 집을 돌아다녔다. 바닥을 쓸어보거나 벽을 눌러보기도 하면서 백주와 인한이 집을 보러 왔을 때보다 더 유심히 살폈다. 식사를 마치고 백주와 인한이 분주히 과일과 커피를 준비하고 있을 때 인한의 어머니가 주위를 둘러보며 백주를 옷방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가방에서 돌을 꺼냈다. 이 집 마련하는 데 뭐 보태준 것도 없고 미안해서 이거라도 주고 싶다고 했다. 백주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돌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이게 보통 돌이 아니고, 우리 시아버지가 꿈에서 엄청 큰 이무기가 뒷마당에 똬리 튼 꿈을 꾸고 나갔더니 전에 없던 이 큰 돌이 떡하니 그 이무기가 똬리 틀었던 자리에 있더란다. 어디서 감정까지 받았는데 운석이라더라, 그중에서도 희귀한 거라고. 그때 누가 천만원 줄 테니 팔라고도 했었다는데, 옛날에 그 돈이 어디 적은 돈이냐. 시아버님이 이게 집안이 필 징조라고 절대 못 팔게 신신당부하시고 우리한테 물려준 건데, 네 시아버지가 장사하는 동안은 끔찍이 여기더니, 장사도 다 접은 마당이고, 이제 너희가 이렇게 번듯한 집도 구했으니 여기에 두면 좋을 듯 싶다고 하대. 설경이한테는 당분간 암말도 말고. 자기도 장사하니까 달라고 그랬었는데 그때 인한이 아버지가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안 줬거든.”
  백주는 일단 감사하다고 하고 돌을 옷방의 행거 밑에 두었다. 검고 투박한 돌이었다. 다시 꺼내볼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후식까지 먹은 뒤 부모들이 먼저 돌아갔다. 설경은 남아서 상 치우는 일을 돕고 가겠다고 했다. 인한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백주와 설경이 남은 음식들을 정리했다. 일을 먼저 마친 설경과 백주는 소파에 앉아서 티비를 틀어놓고 남은 과일을 먹었다. 설경은 바로 옆에 앉은 백주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이 집이 얼마인지 자기가 안다고. 어떻게 그 돈을 마련했냐고, 내가 너 연봉도 알고 우리 오빠 연봉도 아는데, 어떻게 샀냐고.
  백주는 은행이 산 거라고, 자기가 산 게 아니라고 말했고 설경은 무슨 능력으로 대출을 받았냐고 되물었다. 요새 대출 얼마나 나오는지도 내가 다 아는데. 백주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설경이 말했다.
  “우리 엄마 아빠가 돈 좀 보태줬지? 너네 집일 리는 없고. 우리 아빠가 가게 정리하면서 대출 갚고 권리금 빼주고 하느라 남는 거 하나도 없다고 그랬는데 그럴 리가 없거든. 거기서 몇 년을 장사했는데.”
  설경은 계속 말했다. 자기가 얼마나 차별받고 자랐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인한이 좋은 직장을 가지게 된 것도, 부모님이 인한에게 집 살 돈을 보태줄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자기의 희생 때문이라고. 그릇이 크게 부딪는 소리가 났다. 인한이 미안, 하고 말했다. 설경은 자기 어린 시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백주가 몇 번이나 들은 이야기였다. 인한은 국영수 학원을 가장 잘한다는 단과 학원으로 따로 보내주고 자기는 동네 보습 학원만 끊어주었으며, 브랜드 운동화며 가방은 항상 인한만 사주고 자기는 한 번도 원하는 옷과 가방을 가져본 적 없다는 이야기들.
  백주가 설경에게 들은 이야기를 인한에게 말해주면, 인한은 걔가 그렇게까지 말해? 하고 놀라는 척을 했다. 인한은 자기가 쉬운 아이였다고 했다.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고 짜증도 안 부리고 커서는 공부도 잘했다. 설경은 까다로웠다. 잠투정도 밥투정도 심하고 학교에 들어간 후로는 늘 이상한 친구들과 어울렸다. 부모가 사랑을 덜 준 게 아니라 다르게 키워야 했을 뿐이라고 인한은 말했다. 브랜드 옷과 가방을 똑같이 사줘도 설경이 늘 친구들에게 줘버려서 부모님이 사주지 않게 된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백주는 설경에게도 인한에게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기는 외동이라 잘 모르는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날따라 설경이 하는 말에 짜증이 일었다. 설경은 언제까지 자신의 어린 시절의 불행을 곱씹으며 징징댈까? 백주의 어린 시절도 쉽지 않았는데, 설경은 단 한 번도, 외동인 백주가 자신처럼 차별받을 일이 없었다는 이유로, 백주에게 묻지 않았다. 너는 어떻게 자랐는데? 설경이 물었다면 아마 백주는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아빠에게 좀 맞긴 했지만 괜찮았다고. 형제가 없이 오로지 혼자서 부모의 기대와 분노를 받아내야 하는 외로움을 설경은 모를 것이므로. 백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방에서 돌을 가지고 왔다.
  “이거, 너네 어머니가 나 주신 거야. 이 아파트에 돈 한 푼 못 보태줘서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인한이 설거지를 마치고 오면서 언제? 하고 물었다.
  “오빠만 괜찮으면 이거 설경이 줘도 돼? 설경이가 가지고 싶어 했대.”
  백주의 말에 인한이 그래, 설경이 주자, 라고 말했고 백주가 설경에게 돌을 내밀자 설경은 돌을 받아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말한 게 이런 거야.”
  설경은 그대로 집을 나갔다. 나중에 시어머니가 알게 될까봐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후로 돌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나오지 않아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여기서 무슨 소리가 난다는 거야?”
  백주가 돌을 빵 봉지 옆에 내려놓으면서 물었다.
  “잘 들어봐. 주위가 정말로 조용해야지만 들려.”
  설경이 돌을 귀에 가까이 대보라고 손짓했다. 백주는 설경이 뭔가 착각하고 있거나 어딘가 아픈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돌을 귀에 대보았다. 원룸에는 시계도 없었고 가장 꼭대기 층이라 층간 소음도 없었다. 가끔 화장실 벽을 타고 옆집의 변기 물 내리는 소리나 샤워기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주말엔 그마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돌의 거친 표면이 귓바퀴에 닿을 정도로 귀를 가까이 대자 아주 작은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휘이익, 하고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 같기도 했고 장작이 타는 소리 같기도 했다. 백주가 설경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설경은 손을 입에 가져다대며 조금 더 들어보라고 손짓했다. 백주는 다시 귀를 댔다. 불분명하게 맴돌던 소리들이 조금씩 서로 뭉쳐지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순간 백주는 숨 쉬는 것도 잠시 멈췄다. 그리고 분명히 들었다.
  꺼내줘.
  그런 단어였다.
  “꺼내줘.”
  백주가 중얼거리자 설경이 맞지! 하고 소리쳤다. 너도 그렇게 들리지? 설경이 몇 번이나 물었다. 더 자세히 들어봐. 오빠 목소리 같아.
  “그럴 리가 있어? 그냥 우연히 그렇게 들리는 거겠지.”
  백주가 말했다. 백주는 돌을 다시 설경에게 돌려주었다. 스산하게 속삭이는 듯한 이상한 소리에 더는 귀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다시 들어봐. 장례식이 끝나고부터 들리기 시작했어. 그날 내가 마감이라 미용실 문 닫고 청소하고 집에 가려는데 우박이 내렸어. 한겨울이었는데 날이 푹하더니 갑자기 우박이 쏟아진 날, 기억하지? 지난겨울에 하룻밤 사이에 십 도나 온도가 올랐다 떨어지고 난리였잖아. 그냥 불도 안 켜고 청소 비품함에 기대서 다리 좀 주물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지는 거야. 우박이 쏟아지는 동안 엄청 시끄러웠거든. 드디어 그쳤나, 하고 창밖으로 가봤는데, 오빠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내 이름까지 부른 것 같았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
  백주는 돌을 가만히 보면서 말했다. 그냥 우연하게 들리는 소리를 확대해석한 것뿐이라고.
  “나도 믿고 싶지 않았어. 하루에 어떤 때는 미친 사람처럼 손님 없을 때마다 돌에 귀를 대보고 그랬어.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닐까? 민영이한테도 물어보고 친한 손님들한테도 물어봤어. 근데 다들 이상한 바람 소리말고는 안 들린다는 거야. 소라 껍질에 귀 대면 파도 소리 들린다고 하잖아. 나도 그런 거라고 생각하려고 했어. 근데 어느 날은 돌이 갑자기 소리를 질러. 꺼내달라고. 평소에는 이렇게 귀를 대봐야 겨우 들리는 소린데 그럴 땐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소리가 나. 내 머릿속에서만 나는 소린가, 내가 미친 걸까 싶어서 소리가 날 때마다 녹음도 해봤거든. 녹음한 소리를 틀면 또 그렇게 안 들리는 거야. 정신과 가보기 전에 혹시나 싶어 너한테 온 거야. 왠지 너라면 들을 것 같아서.”
  말이 안 되잖아. 백주는 생각했다. 인한은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스스로 가두면 가뒀지, 누가 자기를 가뒀다고 소리를 지른다는 거야. 그럴 사람이 아닌데.
  인한은 스스로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말하곤 했다. 자연 현상을 관찰하듯이 어떤 의도 없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최상위권은 아니었지만 괜찮은 대학교를 나왔고, 전공과 큰 연관은 없지만 어학 실력이 좋아서 대기업 정유사에 취직했다. 매일 변동하는 온갖 그래프와 지수들을 아침부터 보면서 출근했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상식적인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키도 몸무게도 평균 정도 된다고 할 수 있었고 비슷하게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친구들도 꽤 있었다. 백주가 이력서를 백 군데 이상 넣고도 연락을 한두 번 받고 그마저도 면접에서 떨어지면 인한은 사회가 불합리하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백주가 원하는 조건에서 연봉, 장래성, 출퇴근 거리, 복지 수준을 하나씩 짚어가며 어느 것을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는지 물었다. 백주는 인한이 그런 사람이어서 좋았다. 화가 없는 사람, 어떤 불합리한 일들에도 선천적으로 면역이 있는 것 같은 사람.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언젠가부터 인한이 시시해지기도 했다.
  “오빠를 꺼내줘야 할 것 같아.”
  설경이 말했다. 백주가 뭘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더니 설경은 말했다. 돌을 자르면 되지 않을까? 백주는 웃음이 나왔다.
  뭐가 웃겨? 설경이 물었다. 백주는 웃음이 쉽게 멎지 않아서 숨을 크게 쉬어야 했다. 너무 이상해. 백주가 말했다.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너는 항상 그런 식이네. 얘기를 해도 듣지를 않아.”
  설경은 백주에게 돌을 두고 갈 테니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 계속 그 돌이랑 같이 잘 지내보라고 말했다.
  백주도 그 돌을 창가에 두었다.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백주는 집에 있는 동안 종종 틀어두었던 음악도 라디오도 듣지 않았고 자주 돌에 귀를 가져다댔다. 어쩔 때는 꺼내줘, 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의미 없는 소리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불분명하고 작았다. 인한의 목소리와는 조금도 비슷하지 않았다. 인한의 목소리는 안정적이고 둥근 저음이었다. 이런 쉭쉭거리는 소리가 전혀 아니었다. 7월부터 13층의 원룸은 견딜 수 없이 뜨거워졌다. 백주는 여전히 물가를 걷고 있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보면서 둑길을 지나갔다. 비가 내렸다 그치길 반복하던 토요일에 낮잠을 자고 있던 백주는 쿵,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돌이었다. 돌이 바닥에 있었다. 그리고 꺼내줘, 라고 말했다. 분명하고 큰 소리로. 낮고 둥근 저음으로.
  설경이 그날 저녁에 집으로 왔다.
  “떨어지기까지 했다고? 나랑 있을 때는 그런 적은 없었는데.”
  백주의 집에는 여전히 박스 몇 개가 뜯지도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대부분 인한의 짐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박스에 커피를 내려놓고 바닥에 앉아서 돌을 어떻게 할지 이야기했다.
  “역시 꺼내줘야겠지.”
  설경의 말에 백주가 무심코 답했다.
  “산이나 공원 같은 데 가서 돌에 부딪쳐볼까.”
  “이거 금속 성분이라서 돌로는 안 부서질걸.”
  “몽키 스패너는? 그건 스테인리스인데.”
  백주의 말에 설경이 사람 힘으로 될까? 물었지만 일단 시도는 해보기로 했다. 층간 소음이 걱정되어 돌을 단단해 보이는 박스 위에 올렸다. 설경이 스패너를 내리쳤다. 낑, 하고 금속끼리 부딪는 소리가 났다. 물론 돌은 깨지지 않았고 박스 밑에 있던 무언가가 퍽하고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이 안에 뭐가 들었는데? 설경이 물었고 백주는 자기도 모른다고 답했다.
  돌을 자르는 일을 하는 데가 있지 않을까. 설경이 말했다. 백주는 문득 인한의 납골당으로 가던 길에 보았던 수많은 비석이 생각났다. 비석, 조경이라는 간판 하나만 땅에 툭 던져둔 채 고속도로 변에 빼곡히 들어서 있던 비석들. 비석을 만들어 파는 곳에 가보면 되지 않을까. 그들은 지도앱을 열고 가장 가까운 비석 판매점을 찾았다. 전화를 걸어서 영업을 하는지 묻고 바로 택시를 불러탔다. 백주가 쇼핑백에 돌을 넣어 들었다. 택시에 타고 나서야 그들은 거기 가서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단 비석을 하나 사자.”
  백주가 말했다. 서비스로 이것 좀 자르거나 부숴달라고 하면 되잖아.
  “비석을 사서 어따 두게?”
  설경이 물었다. 백주는 값만 지불하고 안 가져오면 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설경은 그럼 장사하는 사람이 얼마나 기분이 안 좋겠냐고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게. 백주가 묻자 설경은 나도 모르지, 라고 대답했다.
  “만약에, 우리가 돌을 깼어. 그런데 우리 오빠 대신 이상한 외계 생물체 같은 게 나와서 세상이 멸망하면 어떡할래?”
  설경이 물었다.
  백주는 여기서 더 이상한 이야기를 하게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다고 답했다.
  “넌 뭐 아쉬운 거 있어?”
  설경이 물었다.
  “딱히 아쉬운 건 없는데.”
  백주가 말했다. 너는? 백주가 묻자 설경은 나도 별로, 라고 말하다 아, 나 적금 이번에 8퍼센트 특판 선착순 어렵게 든 거 있어, 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주에 택배 올 게 있다고 했다. 뭔데? 백주가 물으니 설경이 양가죽 부츠라고 말했다. 가죽 부츠를 언젠가부터 사고 싶었는데 일할 때 신기에는 불편하고 다리가 자주 부어서 안 사려다 소재랑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했다고 했다. 적금은 언제 끝나는데? 백주가 묻자 설경이 이 년 후라고 말했다. 이 년이라. 설령 세상이 망한다고 해도 이 년만에 망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백주가 말했다. 아마 어렵겠지. 막 사람들을 먹어치우는 외계인이라고 해도, 인구가 얼마나 많아. 설경이 말했다. 곧 팔십억 된다던데. 백주가 말했고 설경이 고개를 저었다. 팔십억이라니.
  “넌 아파트 판 돈 그대로 통장에 있는 거 아냐? 그거 안 아쉽겠어?”
  설경이 물었다. 설경의 말대로 아파트를 팔고 원룸으로 이사 오면서 남은 돈이 고스란히 통장에 들어 있었다.
  “내 돈도 아닌데 뭐. 아, 그거 우리 아빠가 군대에서 쫒겨나기 전에 횡령한 돈이야. 물론 그때는 훨씬 적었지만. 엄마가 부동산으로 그 사이에 좀 불렸대.”
  백주의 말에 설경이 백주를 쳐다보았다.
  “너네 부모님이 너 몰래 준 거 정말 아니니까 나중에 괴롭히지 마.”
  백주는 인한에게도 그 돈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갑자기 왜 설경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자신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백주의 어머니는 백주에게 농담처럼 말했다. 그거, 너네 아버지라는 사람이 꽁쳐온 돈이라고. 백주는 아버지가 군에서 퇴역한 연도의 신문을 검색했다. 아버지가 소속되어 있던 부대의 모든 사건, 사고, 인사 소식을 찾아봤다. 일병 한 명이 상당히 의심스러운 총기 오발 사고로 다리를 절단하는 사고가 있었다는 기사를 백주는 유심히 읽었다. 일병의 아버지는 국방부에서 형편없는 보상금을 내놓았다고 분개했고 어머니는 충격으로 몸져 누워 있다고 기자는 전했다. 어쩌면 가족에게 가야 할 보상금을 아버지가 중간에서 가로챈 것일 지도 몰랐다. 백주는 가끔 그 일병에 대해 생각했다. 어쩌다가 총기가 오발되었을까. 기사의 지적대로 한국전쟁 때 쓰던 총기를 그대로 쓰면서 발생한 노후화 문제였을까, 집단 내 괴롭힘이나 갈등에서 발생한 고의적이면서 동시에 우발적인 사고였을까. 그 일병은 다리를 잃고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아직도 그때의 고통을 기억할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백주는 막연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었다.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가로등 빛도 들지 않는 도로변이었다. 컨테이너 박스에 불이 켜져 있었다. 설경이 앞서 가 문을 두드렸다. 야구 모자를 쓴 남자가 문을 열었다. 한 번도 우승을 못 하고 몇 년 전에 해체한 팀의 모자였다. 인한과 함께 경기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지고 있으면 그대로 지고 이기고 있어도 온갖 실책으로 역전당하는 팀이었다. 도대체 이런 팀을 왜 좋아하냐고 인한에게 물으면 인한은 야구가 망해도 우리는 안 망하니까 괜찮아, 라고 말했다. 인한은 언제나 괜찮은 사람이었다. 정말로, 언제나 괜찮을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인한은……
  “전화하신 분들이에요?”
  남자가 물었다. 백주나 설경의 아버지와 비슷한 또래 같았는데 목소리가 매끄러웠다. 일단 들어오시라며 남자가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를 따라 들어가자 공기가 뿌옇고 담배 냄새가 났다. 벽걸이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나오고 있었고 가죽 소파와 간이 테이블, 작은 냉장고와 놓여 있었다. 남자는 백주와 설경을 소파에 앉으라고 손짓한 뒤 냉장고에서 비타민 음료를 두 개 꺼내왔다.
  “묘비를 하시나요? 아버지? 어머니?”
  백주가 대답하기 전에 설경이 말했다.
  “며칠 전에 죽은 우리 강아지 무덤에 세워줄 건데, 작은 사이즈도 있나요?”
  “어차피 다 제작하는 건데 고르시기 나름이고 요새는 많이들 해가시더라고요.”
  남자는 탁자에 있던 파일을 가져와서 한참 넘기다가 작은 묘비들을 보여주었다. 주로 아이들 묘라고 했다.
  “그래도 강아지 묘비는 낫지. 아이들 묘비는 마음이 쓰여요. 이 나이가 되어도.”
  “강아지 보낸 마음도 똑같이 아파요.”
  설경이 말했다. 백주가 알기로 설경은 강아지를 키워본 적 없었다.
  “아 그럼요. 그러시겠죠.”
  남자는 설경을 한번 쳐다보았다.
  “혹시 여기서 돌을 파쇄해주실 수도 있나요?
  “파쇄요? 어떤 돌인데요?”
  “그냥 돌이에요. 저희 강아지가 누가 던진 돌 때문에 죽은 거거든요. 그 돌을 가지고 왔어요. 혹시 여기서 부숴주실 수 있으실까요?”
  백주는 설경을 보았다. 설경은 백주가 바닥에 둔 쇼핑백을 고집스레 보고 있었다.
  “돌 던진 사람은 잡았어요?”
  “아니요.”
  “그럼 그게 유일한 증거 아니에요? 그걸 부숴달라고?”
  “이상한 부탁인 건 아는데 저희 마음이 그래야 편할 것 같아서요.”
  설경이 예상한 질문이라는 듯 빠르게 답했고 남자는 말없이 모자를 벅벅 긁었다.
  “안 되면 다음에 올게요.”
  백주의 말에 남자가 백주와 설경을 번갈아 보면서 일단 돌을 보여달라고 했다. 백주가 쇼핑백을 건넸다.
  “이거 보통 돌이 아닌데?”
  남자가 돌을 꺼내며 말했다. 설경과 백주의 눈이 마주쳤다.
  “저희야 모르죠.”
  설경이 말했다.
  “진짜 이걸 부숴요? 어려운 건 아닌데, 이런 돌은 소유자를 추적하는 게 어렵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내가 아는 감정사 소개시켜드려?”
  “아니요, 괜찮아요.”
  백주가 얼른 남자의 말을 잘랐다.
  “뉴스를 보다보면, 이런 놈들이 꼭 있어요. 자기가 죽여놓고 여기 사람이 죽어 있다고 직접 신고를 하는 거야. 경찰이 바보도 아니고 다 잡히는데도 그런 멍청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계속 있더만.”
  남자가 백주와 설경을 흘끗 보며 말했다. 백주의 머리가 뜨거워졌다. 백주는 인한이 병원을 다니고 약을 먹고 있는 것을 알았다. 인한이 집에 오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는 것도, 밤에 잠을 못 이루고 거실을 서성이거나 책상 앞에 컴퓨터를 켜고 가만히 앉아 있곤 한다는 것도 알았다. 백주는 인한에게 힘드냐고 물었고 힘들어하지 말라고, 회사를 원하면 그만둬도 된다고, 대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활비 정도는 혼자 벌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인한은 고마워, 라고 말했다. 나아지고 있는 것 같아, 라고도 말했다. 거짓말이었다. 인한은 오랫동안 나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매일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고 백주와 저녁을 먹었다. 백주는 사람이 아무런 이유 없이 아플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픈 데 이유가 꼭 반드시 있으리란 법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인한은 정말 아플 이유가 없었다. 인한은 원래 감정 기복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감정이 아예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마음이란 게 통째로 사라진 것 같다고. 백주를 보면 여전히 친밀하고 좋은데 그건 기억이지 마음이 아니라고 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백주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인지 인한이 자기 탓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지겹다는 말이야? ”
  백주가 물으면 인한은 그런 말이 정말 아니라고, 표정 변화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인한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항상 똑같은 말을 묻게 되었다. 내가 어떻게 해줘야 해?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네가 결혼하고부터 이렇게 시들어가는 거야? 인한은 그런 게 정말 아니라고 말했다. 화도 없이, 슬픔도 없이 고요한 얼굴을 한 채 인한이 그날 밤에는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했다. 인생처럼 굴곡 없는 얼굴이야, 백주는 생각하며 인한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백주는 인한에게 나가지 마, 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지금 저희를 범죄자 취급하시는 거예요?”
  설경이 말했다. 백주는 설경을 잡았다. 그만 가자. 남자는 뉴스로 고개를 돌리고 설경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그들은 컨테이너 밖으로 나왔다. 안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갑자기 크게 흘러나왔다. 택시 호출이 연속으로 실패했다. 그들은 우선 근처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가로등이 멀찍이 떨어져 빛은 짧고 어둠은 긴 길이었다. 설경이 핸드폰으로 발밑을 비추면서 앞서 걸었다. 차는 드물었지만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너 혹시 오빠 핸드폰 가지고 있어?”
  설경이 물었다.
  “가지고는 있어.”
  “켜본 적 있어?”
  “아니.”
  “그날, 오빠가 나한테 문자 했어. 미안하다고.”
  “……”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모르지.”
  “이제 와서.”
  “그랬어?”
  “나쁜 년이지?”
  백주는 대답 없이 쇼핑백을 끌어안았다. 내가 더 나빠, 그런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날 인한은 백주에게 아무런 메시지도 남기지 않았다. 설경에게는 미안하고, 백주에게는 미안하지 않았던 걸까? 백주는 입술을 잠깐 깨물었다. 그런 건 아니었겠지. 그런 무정한 마음이 아니라…… 인한도 알았던 거겠지. 그날 인한이 어떤 말을 보냈더라도, 백주가 답장하지 않았으리란 것을.
  “지진이 났대,”
  설경이 핸드폰을 보면서 말했다. 백주도 핸드폰을 보았다. 재난 문자가 와 있었다. 전염병을 거치는 동안 재난 문자가 너무 자주 와서 알람을 꺼두고 있었다. 지도에서는 분명 가까워 보였는데 정류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땅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지진은 가깝지는 않지만 아주 멀지도 않은 해안 도시에서 일어났다.
  꺼내줘.
  갑자기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렸다. 들었어? 백주가 물었다. 뭘? 설경은 휴대폰을 계속 보면서 걷고 있었다. 쇼핑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딛고 있는 땅이 꿈틀거려서 백주는 발을 헛디딜 뻔했다. 쇼핑백 안에서 돌이 튀어올랐다. 백주는 쇼핑백을 놓쳤다. 가드레일 밖 버려진 비닐하우스가 있는 땅으로 돌이 굴러갔다.
  “야, 너 지금 우리 오빠 버린 거야?”
  설경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아니, 내가 버린 게 아니라…… 백주는 말하려다 말고 주저앉았다. 발밑의 땅이 조금씩 갈라졌다. 이제서야, 땅이 꺼지는구나, 백주는 설경이 있는 몇 발자국 앞까지 영영 갈 수 없었다.

성혜령

2021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윤 소 정」을 시작으로 소설을 발표해왔습니다. 젊은작가상,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고 소설집으로 『버섯 농장』이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운석이 나오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우주에서 온 돌을 찾으러 다니는 커플의 이야기에서 시작했는데, 여러 번의 실패를 거쳐 말하는 돌이 나오는 더 이상한 이야기가 나와버렸습니다. 저 먼 우주에서 온 돌이 우리 삶에 무심코 던져졌을 때, 어떤 파동이 발생할까요?

2024/08/07
6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