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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우리는 다시 만날 약속을 정하면서, 약속 장소가 어디든 각자의 집에서부터 약속 장소까지 걸어오는 것은 어떤지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걷는 동안 분명 어떤 일이든지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는데 그게 좋았다. 그것은 어쩌면 사는 일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라는 내 말에 우경은 근데 그걸 그렇게까지 생각한다고? 라고 말했다. 20km쯤 걸어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걸. 그가 덧붙였고 나는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냥 조금 힘들 뿐일걸. 우경이 말했고 나는 힘들긴 하겠지,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휴대전화 앱을 통해 9.2km를 걸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더 걷고 싶지 않아? 내가 말하자 이만큼 더 걷는다면 다음 날엔 아마 종일 쉬어야 할 거라고 그가 말했다.
   
   지나온 긴 길을 따라 마른 낙엽이 지고 있었고 대화는 금세 다른 쪽으로 흘러갔다. 고장난 자동차 부품과 저녁 메뉴에 대한 얘기를 짧게 했고 얼마 전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연예인이 구사하던 축지법에 대한 얘기가 길게 오갔다. 요리하는 거 봤지? 응. 그 만능 접시도 탐나더라. 우리는 그 연예인의 갖가지 매력을 각자 얼마나 크게 느꼈는지에 대해 얘기했고 일기 예보에 따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이 없었던 우경은 마을버스를 타고 사라졌다. 우리의 관계가 아닌 주제들로 그렇게까지 길게 말해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뉴스에서, 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봄이 오고 있다고 말했다. 엄마, 완전 봄이야. 별일 없지? 창밖으로 흰색 야구 모자를 쓴 사람이 통화하며 지나가는 걸 보면서 맹물을 마셨다. 그냥 물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맹물이라는 표현이 좋아. 진짜 순수한 물인 것 같은 느낌. 하면서 물을 마시던 우경을 생각했다. 맹물 한 그릇 떠 온나. 나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머니 이후로 맹물이라는 단어를 실제로 쓰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처음엔 조금 웃고 말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물을 마실 때마다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지? 그냥 해봤어. 신경쓰지 마.] 해옥 선배로부터 부재중 전화와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잘못 보낸 걸까? 십수 년 전,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는 것 말고는 친분이 없는 사이여서 좀 의아해 몇 번을 다시 확인했다. 물론 몇 번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함께 점심을 먹거나 술을 마신 적은 있었지만 나는 신입생인 데다 그런 자리에 대해 특별히 어떤 생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밥이나 술만 마시다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해옥 선배에 대해서라면 다른 사람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만 있을 뿐이었고 그건 아마 해옥 선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타인을 통해 들은 이야기란 게 거의 그렇듯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었고 나는 보통 그런 얘기의 대부분을 흘려보냈으며 진위와는 상관없이 믿고 싶을 때만 믿었다. 뭐 그마저도 한 학기만 다녔던 터라 이제는 내가 학교를 다녔었나 싶을 정도로 희미해진 시절이었다. ‘오랜만이지?’ 앞에 내 이름이라도 붙여줬다면 내게 보낸 것이 확실하므로 어색하지만 안부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잘못 보내신 게 아닌지 묻기도 그렇고 그냥 그렇죠 뭐, 하기도 좀 그래서 답신을 그만두기로 했다.
   
   일단 투표나 하고 와서 어제부터 하던 대청소를 마저 하기로 했다. 마저 한다기보다는 끝내고자 결심을 해보지만 불가능할 거란 건 알았다. 별생각 없이 기모가 든 후드티에 겉옷까지 입고 나왔더니 금세 몸이 더웠다. 따뜻한 봄. 그런, 봄 날씨였다. 봄은 아주 짧을 것이고 집 근처 초등학교에는 가지치기를 한 나뭇가지 사이에 고급스런 축구공이 걸려있었다. 달걀과 쌀을 파는 작은 상점 앞에는 자신의 머리보다 훨씬 큰 모자를 쓴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의 발 주변으로는 새똥이 가득했다.
   
   고은아,
   넌 좋은…… 만나서
   사랑도 하고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살아!

   책장에서 십오년 전에 받은 쪽지를 발견했다. 날짜는 쓰여 있었는데 누가 써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대체 좋은…… 무엇을 만나라는 것이었을까? 한자인 데다(난 한자를 잘 모른다) 흘려 쓰여 있어서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짧다면 짧은 글인데 좋은 ……를 만나는 것도 사랑을 하는 것도 마음먹은 대로 사는 것도 모두 못하고 있구나 싶은 것이 새삼스러우면서도 우경과 내가 같은 마음이 아닐 뿐이지 나 혼자서는 쪽지에 쓰인 문구 모두 잘하며 살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싶었다. 쪽지 하단에는 구름에 가린 해가 그려져 있었다.

   쪽지 한 장을 발견한 게 다인데 책장 정리를 멈추었다. 아름다운 섬과 인간의 욕심에 대해서, 반복되는 실수에 대해서, 수리부엉이와 범고래에 대해서, 술에 대해서, 어리석음에 대해서, 수많은 색과 마음에 대해서, 아주 작은 바이러스에 대해서, 물감과 기분에 대해서, 거짓말에 대해서, 월요일에 대해서, 중국과 프랑스에 대해서, 이방인에 대해서, 이방인의 노트에 대해서, 신선한 생선에 대해서, 밤과 낮에 대해서, 집에 대해서, 주름에 대해서, 테니스에 대해서, 연극에 대해서, 어린이와 채소, 수면과 아부에 대해서 사람들은 책을 썼다. 수리부엉이와 범고래…… 나는 상권은 없고 하권만 남은 책을 가장 최근에 산 시집 옆에 꽂아두었고 같은 제목의 단편 소설과 두 시간 정도로 요약해놓은 드라마를 연달아 보았다. 드라마를 보면서는 두 번 눈물을 흘렸다. 소설책은 삼십오 년 전에 출간되었고 드라마는 구 년 전에 방영되었으며 나는 삼십칠 년 전에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 좋아했던 찬송가를 부르며 설거지를 마쳤을 때 똑똑똑 누군가 단정하게 문을 두드렸다.

   나는 은혜를 식탁으로 안내했다. 은혜는 조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특별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라면서도 늘 지친 상태인 건 맞다고, 지치지 않은 날았던 날은, 생각해보니 까마득하다고 했다.
   뭐 마실래?
   홍차.
   투표했어?
   응. 하고 이리로 오는 길이야.
   은혜가 홍차가 담긴 잔을 두 손으로 감싸면서 따뜻하다고 하기에 추운지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나는 은혜에게 작은 담요를 가져다주었다. 지는 햇빛이 방 안으로 쏟아져들어왔고 은혜는 잠깐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은혜는 텔레비전을 켜면서 자길 신경쓰지 말고 하던 일을 마저 하라고 했다. 나는 식빵 한 쪽을 구웠고 설탕과 레몬즙을 섞어 식빵 위에 뿌린 다음 둥근 접시에 담아 은혜 앞에 놓았다.
   와. 잘 먹을게.
   차 더 줄까?
   응. 뭐하고 있었어?
   대청소를 조금 하고 있었어.
   대청소를 조금 하는 걸 대청소라고 할 수 있나?
   소청소를 하고 있었어.
   싱거운 얘길 하면서 웃었고 홈쇼핑 채널에서는 토마토를 팔고 있었다. 나는 홍차를 더 내주고 냉장고에서 버릴 것들을 꺼냈다. 몇 년간 묵은 여러 종류의 가루들이었다. 버리려고 보니 그걸 준 사람들이 떠올랐다. 무심코 어디가 좀 아프다고 했을 때 거기에 좋다면서 주변에서 가져다준 것들이었다.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하면서 뭉쳐 있는 가루들을 버렸다. 봉투를 묶고 있을 때 은혜가 부산 대저동에서 생산한 토마토를 샀다고 말했다. 여기서 부산까지 걸어서 가려면 얼마나 걸릴까 싶어 검색을 해보았더니 직선거리 50km 이내 거리만 정보를 제공한다는 문구가 떴다. 코딩 학원을 접은 지 이제 한 달. 앞으로 무엇을 해서 먹고살지 모르겠다. 해가 완전히 진 뒤엔 김치전과 부추전을 태극 문양처럼 부쳐 막걸리를 여섯 병이나 먹었고 은혜는 반쯤 누워 선거 방송을 보다가 당선자가 확실시될 무렵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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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로 나는 일상 속에서 자주 해옥 선배를 떠올렸다. 세수를 하거나 걸레를 빨다가 문득, 읽던 책을 덮은 후나 자려고 눈을 감았을 때, 그리고 그냥 멍하니 있던 많은 순간, 해옥 선배 생각이 났다. 정말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건지 궁금했다. 답장을 하려면 그날 바로 했어야 했을까. 지금은 이미 늦어버린 것 같다. 아무 이유 없이 십여 년 만에 연락을 했을 리는 없을 것 같았다. [그냥 했어, 신경쓰지 마.] 나는 어느 새벽 골목길에서 구토를 하다가 선배가 누군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봤을 뿐이었다. 말하고 싶으면 해. 나는 그 장면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대신 오래도록 기억했다.

   그가 정읍역에 내렸다는 연락을 해왔다. 내일 쉬는 날이지? 하면서 시간이 되면 볼 수 있는지 묻기에 된다고 대답했다. 그는 나의 휴무일을 잘 알고 있었고 보통은 약속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간 연락을 주고받지 않아 내가 폐업한 것을 모른 채 휴무일에 맞춰 연락을 해온 것 같다. 그는 오늘 밤늦게 일을 마치면 그곳에서 잔 다음 아침에 이쪽으로 출발하겠다고 덧붙였다. 나는 수고하라고 답장을 보냈다. 최근 구입한 소설책에는 네 편의 소설이 담겨 있는데 나는 작가의 말을 먼저 읽은 다음에 미발표작부터 읽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전엔 은혜가 두고 간 토마토를 먹을 예정이었다. 과연 토마토는 단단하고 짭짤했다. 맛있는 것을 먹어 기분이 좋았으나 불현듯 이명이 나타나 얼마간 고생했다. 한참 후에 괜찮아졌다고 느껴서 밀린 일들을 빠르게 처리한 뒤에 예정대로 책을 읽었다. 이 나라에서는 개와 고양이를 신성시합니다. 그런 대사가 나왔다. 그런 대사가 나왔고 나는 우연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세탁하지 않은 봄 외투를 꺼내 입고 밖으로 나왔다.

   우체국에 가려면 한 시간 이십 분가량을 걸어야 한다. 나는 보내야 할 편지를 주머니에 찔러넣고 걷기 시작했다. 환자복을 입은 사람이 외투도 없이 혼자 걷고 있었다. 그 사람은 코인세탁소 안을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길을 지나던 몇 사람이 멈춰서 그 사람과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그중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사람들은 단순한 외출 같지가 않다며 뭔가 이상하다고 수군댔다. 병원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 있어요? 왠지 무섭네요. 나는 그들을 지나쳐 우체국에 당도했다. 한 시간 사십 분이 걸렸다. 우체국엔 은혜가 지친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편지 같은 건 쓰지 마. 은혜가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우체국 앞에서 검은색 카드 지갑을 주웠고 주인이 찾으러 올 것 같아 그냥 두고 가려다가 파출소로 가기로 했다. 도자기 박물관에 갈 예정이었는데 마침 가는 길에 파출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혹여 괜한 오해를 받기 싫어 주운 그대로, 주머니에 넣지 않고 그대로 들고 갔다.
   지난달에도 한 번 같은 일이 있었어.
   그랬어?
   응. 작년에도 한…… 세 번쯤?
   나로서는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일이었다. 떨어진 지갑이란 게 은혜 앞에만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아무튼 항시 지쳐있더라도 주운 지갑은 파출소까지 가져다주자.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 믿어줘! 빨간 가방을 메고 우리 옆을 지나던 한 아이가 같이 걷던 아이에게 반복해서 말했다. 파출소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은혜는 당황하지 않고 출입문 옆에 설치된 전화기를 들었다. 그러자 곧 경찰과 연결되었는지 네, 네. 하고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근방을 순찰 중인데 곧 오겠대. 나는 파출소 안을 들여다보았다. 벽이며 캐비닛이며 책상이며 모든 것이 80년대 풍경처럼 보였다. 90년대 같지? 은혜가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을 기다리며 나는 제자리걸음을 했고 경찰은 십 분 후에 왔다. 어디서 언제 주웠는지 간단하게 몇 마디를 주고받은 뒤에 지갑을 건네고는 도자기 박물관을 향해 걸었다. 가는 중간에 몇 그루의 나무가 누워 있는 것을 보았고 가죽이 다 벗겨진 의자들을 보았다. 의자들은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소 냄새다! 축사 옆을 지날 때도 우리는 쉬지 않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했다. 할머니 이론이라고 들어봤어? 할머니 이론? 응. 난 할머니 얼굴도 모르지만 들어볼래? 어떤 건데 그래? 대답을 하려던 은혜는 사레들리는 바람에 꽤 오래 기침했다. 우리는 노화의 증거로 사레들리는 일이 너무 잦아졌다는 것에 동의했다. 음식을 잘못 삼켰다기보다는 침을 잘못 삼키게 된 것이다. 할머니 얼굴은 모르지만 꿈에 나와서 로또 번호를 좀 알려주셨으면. 할머니가 좀 어려우면 할아버지라도. 얼굴을 모르는데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말자. 그래.

   박물관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매표소에도 사람이 없어 안으로 들어가 누구 없나요? 외쳐 불러야 했다. 표를 끊고 이층으로 올라갔더니 거기 앉아 신발 끈을 고쳐 묶고 있던 박물관장은 우리를 환대하며 우리가 무슨 관계인지를 물었다. 우리는 오래된 친구 사이라고 대답했고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은혜와 나는 옛날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했으므로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서서 한 시간 넘게 박물관장의 이야길 들었다. 일을 하고 한 시간을 걸어와서 또 한 시간을 서 있었으나 한국 전쟁을 직접 겪은 박물관장의 생애를 듣고 있자니 뜻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할머니도 전쟁을 겪었으나 전쟁이 난 줄도 몰랐다는 얘길 들었을 뿐이었다.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은혜와 나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화장실에서 나왔을 땐 비상구 불빛을 제외한 모든 조명이 꺼져있었다. 은혜와 나는 비상구 불빛을 따라 1층으로 내려왔다. 주차된 캠핑카 앞에서 은혜는 담배를 피웠다. 이 길의 반대편은 철새 도래지이며 이 길 근방엔 〈개인 사유지입니다〉라는 푯말이 곳곳에 있다. 못해도 수십 개는 될 것이다.

   3
   우경은 통유리로 된 카페에 앉아 작년에 있었던 일곱 가지 사건과 그로 인해 받은 영향에 대해 쓰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쓰고 있는 두꺼운 가죽 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진동벨이 울렸고 나는 주문한 음료를 받아왔다. 우경은 내게 백 선생님의 기사를 보여주었다. 요즘에는 환경에 집중하시나 봐. 웃기지 않아? 우경이 비웃음을 내비치며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좀 웃기긴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야. 내가 말했고 우경은 듣는 둥 마는 둥 남은 커피를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잔에 담긴 얼음들이 시차를 두고 내려앉으며 달그락 소리를 냈다. 이천 원을 내면 1회 리필이 가능한 카페였고 우경은 잔을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만약 내가 여덟 살이었다면 이런 순간에 어떤 말을 했을까. 선생님, 구관조와 앵무새가 어떻게 다른지 아세요? 거의 모든 것이 반복될 뿐이었다.

   우경이 작년에 겪었던 일은 내가 더 잘 알았다. 큰 사기를 당한 것을 제외하곤 잘 생각이 안 난다고 하기에 바로 떠오른 일 몇 가지를 말했더니 오오, 대단해! 하면서 좋아했다. 둘이 힘을 합쳐 여섯 개까지 생각해낸 뒤로는 더 생각해내지 못했다. 지난달에 있었던 일을 작년에 있었던 일로 쓸지, 영향받지 않은 일을 영향받았다고 쓸지 생각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썼다. 우리는 걸으면서 좀더 생각하기로 했고 밖으로 나왔다. 근처에 높지 않은 산이 있었고 나는 길을 따라 걸으며 작년에 내게 일어난 일들을 곱씹어보았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일 말고는 다른 일은 없었다. 크레인과 시내버스, 승합차와 택시가 세워진 주차장 근처를 지나면서 우경은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피우면서는 들고나온 일회용 테이크 아웃 잔을 버릴까 말까 고민했고 버리지 않기로 했다.

   근처 밭에서 두 사람이 밭 가운데 놓인 물탱크에 기대어 쉬고 있었고 우리는 두 사람을 지나쳐 등산로 입구로 진입했다. 새순이 돋기 시작한 나무들과 나무들. 아주 짧을 봄. 나는 한복처럼 품이 넓은 긴 치마를 입고 있었고 땀이 조금 나기 시작하기에 목에 두른 머플러를 풀었다. 정상에선 강한 바람이 불어와 나는 머플러를 다시 둘렀다. 진짜 더는 모르겠네. 아무 생각 없이 걷기만 했어. 정상에 올라섰을 때 우경이 말했다. 나는 산신령님…… 제 소원은…… 하면서 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울지 마. 그 아이는 어딘가에서 사랑을 받으며 살아갈 거야.
   
   평생을 낚시만 하고 살았다던 한 남자가 기대어 있던 물탱크 벽을 짚으며 일어나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난 여기 안 삽니다. 형을 좀 도우러 온 거죠.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건너편을 가리켰다. 철새들이 물 위에 떠 있었거나 물 위를 날고 있었다. 남자가 우리에게 막걸리가 든 종이컵을 건넸다. 돗자리는커녕 신문지도 깔려있지 않은 채였고 무엇이 심겨 있는지 아무튼 밭 위에, 말하자면 흙 위에는 익을 대로 익어버린 순무 김치와 속이 노란 호박고구마가 담긴 플라스틱 반찬통이 두 개. 하루에 한마디를 할까 말까라는 남자의 형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며 물탱크에 계속 기댄 채로 담배를 피웠고 우경은 자리를 잡고 앉아 나무젓가락 포장을 벗겨냈다. 저 강에서 주로 잡히는 것은, 하고 남자가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차량이 줄지어 들어서기 시작했다. 요 옆에 야구장이 있잖아요. 연예인 야구팀이 일 년 내 맡아두고 쓰죠. 남자가 말했고 나는 문득 초등학교 앞 나무에 걸려있던 축구공을 떠올렸다. 누군가 공을 내려줬겠지, 그게 여태 걸려 있겠어요? 남자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서 이렇게 덧붙였다. 나 역시 좋아하는 것은 낚시와 펭귄뿐입니다. 펭수를 뜻하는 거냐고 우경이 물었고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경은 목젖이 보이도록 웃었다. 기분이 몹시 좋아 보였다.

   다음엔 어디서 만날까? 글쎄. 너희 집은 어때? 우경은 대답이 없었다. 여기서 우경의 집까지 걸어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축지법으로 가더라도 불가능에 가깝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남자의 형처럼 서로에게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남자의 형처럼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때도 지금도 내가 우경을 잘 믿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경이 여태 들고 다닌 일회용 잔에 담긴 얼음은 이미 진즉에 녹아 물이 되어 있었다. 작년의 우경에겐 정말 여섯 가지 일만 있었나?

   똑똑똑.
   은혜의 집 앞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긴 막대 같은 거 있니?
   물론.
   지친 얼굴의 은혜와 나는 부러진 빗자루를 들고 초등학교로 갔다. 일가족으로 보이는 네 사람이 철봉에 매달려 있었고 축구공은 아직 새순이 돋지 않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높이는 충분했다. 툭. 떨어진 축구공이 철봉 쪽으로 굴러갔다. 한 아이가 철봉에서 내려와 축구공과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우리 것이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철봉에서 내려온 아이는 축구공을 몰며 운동장 한가운데를 향해 뛰기 시작했고 은혜와 나는 나머지 세 사람이 아이를 따라 뛰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주란

하는 생각이나 말, 행동, 기타 등등. 그것들을 계속 반복하고 있고 그것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2022/03/29
5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