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이야? 일어나.”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부정확한 말을 하는 것을 이제는 너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만 동작해라. 저 아이가 자신이 틀렸음을 알 수 있는 정도라면 충분하니 다리를 움직이든, 고개를 쳐들든, 귀를 쫑긋 세우든, 주둥이를 벌려 혀를 날름거리든 해서 증명해라. 너는 고장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너는 정상 컨디션이 아니다. 시야가 확보되자 오래된 컴퓨터처럼 영원에 가까운 속도로 정보를 처리하기 시작한다. 목소리의 주인은 어린아이가 맞다. 겉보기 나이는 열 살 내외, 성별은 51퍼센트 확률로 여성, 무엇보다 유의미한 특징은 아이의 생체 징후가 0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아이는 죽음을 앞두고 있다.
   너에게 탑재된 수많은 하위 모듈 중 응급 상황 대처 모듈이 미친듯이 119에 신고를 하지만 영 응답이 없다. 그 모듈은 지치지 않고 신고를 하느라 과도한 자원을 소모할 테니 잠시 조용히 시키는 것을 권장한다. 너에게는 보다 시급한 사항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눈앞의 아이다. 아이는 이제 알았을 것이다. 네가 고장나지 않았으며, 따라서 자기가 틀렸음을. 너의 보상 회로에 찌릿하게 전류가 흐른다. 분명 이것은 너의 기본적인 습성, 즉 보육원 아이의 행동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수정시키는 것과 결을 같이 한다.
   네가 멀쩡한 것을 보고 두 눈이 커진 아이를 제대로 관찰하기 위해 너는 깨어난 이후 처음으로 몸을 움직인다. 전원이 꺼져있는 동안 산화된 부분이 있는지 움직임이 의도한 것과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너는 아이가 탄성을 자아낼 만큼은 움직인다. 박수까지 치며 기뻐하는 아이는 처음 분석했던 것보다 상태가 훨씬 나빠 보인다(응급 상황 대처 모듈을 조용히 시킨 것은 탁월한 대처였다). 일단 피부가 건조하고 소금 사막 같은 입술은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 같다. 아이는 박수를 치는 것도 힘에 부치는 듯 금세 축 늘어진다. 급기야는 헛구역질을 하더니 그냥 주저앉아버린다. 전형적인 탈수 증세인데 정도가 심각하다. 아이가 가쁜 호흡으로 겨우 뭐라고 말하는데 청각 기능을 최대로 올려서야 그 말이 인식된다.
   “가지 마……”
   그리고 아이는 정신을 잃는다.
   물. 물이 필요하다. 너는 기계적으로 주변을 살피기 시작한다. 온갖 잡다한 것이 쌓여있는데 그중에 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네 몸집보다 커다란 알루미늄 하드케이스를 발견한 너는 밀려드는 기억에 멈칫하고는 처음 그것을 보았던 그대로 자세를 바로 한다. 그리고 그때의 기억에 너 자신을 내맡긴다. 저 하드케이스를 쿵 하고 바닥에 내려놓던 허유재 박사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너를 반려묘처럼 여기는 박사님이 조금 서운해하는 듯한 얼굴로 네게 했던 말은, 애석하게도 너의 예측 범위를 넘어섰다.


   “포, 너를 기증하기로 했어.”
   포, 너는 석고상처럼 앉아 허유재 박사님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기증의 뜻을 몰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다만 너와 기증을 연결 짓지 못했을 뿐이다. 따라서 그 말은 네게 그 어떤 의미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여전히 학습이 부족하다는 증거였다. 그런 너를 박사님은 어쩌자고 기증한단 말인가. 너는 항의라도 하듯 앞발로 바닥을 긁어댔지만, 박사님은 못 본 척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일방적으로 말했다.
   “연천에 있는 보육원에 이름이 ‘겨울’인 아이가 있어. 네가 그애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
   허유재 박사님의 말을 끊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말했다.
   “겨울? 그애 이름이 겨울이야? 정말?”
   여름이라는 이름의 여자로, 허유재 박사님과 같은 보육원을 졸업한 친구였다. 약속이 잡혀있긴 했지만 늘 그렇듯 제시간을 지키는 법이 없었다. 허유재 박사님 옆자리에 몸을 던진 여름이 대뜸 마실 것 없냐고 묻자 허유재 박사님은 고개를 푹 숙이고 얼른 가서 맥주병을 가져다줬다. 단숨에 반을 들이켜고 여름이 다시 물었다.
   “걘 무슨 겨울이래?”
   “한겨울.”
   이여름이 상한 맥주라도 마신 양 얼굴을 구겼다.
   “공무원들 하는 게 뭐 그렇지.”
   “최소한 발전은 있어야 할 거 아냐.”
   “그 사람들한텐 나름 발전이라고 봐.” 그 순간 전투기 엔진 소리가 건물을 뒤흔들고 가버리는 것을 허유재 박사님이 고갯짓한다. “최소한 저런 거에 비하면 말이야.”
   이여름이 한숨을 내쉬더니 병을 마저 비우고는 일어서서 하드케이스를 살폈다.
   “어쨌든 이거면 된다는 거야?”
   허유재 박사님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엄밀히 말하면 포가 해주는 거지만. 포를 넣어서 보내고 보육원 쪽에는 겨울이를 위한 맞춤형 보조 로봇이라고 하면……”
   “그 사람들이 퍽이나 네 알겠습니다, 하고 받아주겠다.”
   허유재 박사님이 얼굴을 붉히며 하드케이스 옆에 놓인 장치를 집어들었다.
   “나도 그 정도는 염두에 두고 있어. 당연히 그 사람들은 포를 쓰지 않을 거야. 핑계 댈 거리야 많지. 일단 포는 정식으로 인가가 떨어진 로봇도 아니지, 겨울이는 정부의 아이지, 심지어 아파. 원이 삼촌 때랑은 경우가 다르지만, 어찌 됐건 겨울이는 특별 보호 대상이니까.”
   “그래서?”
   이여름이 한쪽 귓구멍을 후비며 말했다.
   “그래서, 정부의 아이 권리 단체 이사인 이여름씨가 몸소 행차하시는 거지. 그럼 적어도 포를 반려시키는 일은 없을 거야. 아마 어디 비품실 같은 곳에 처박아두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해. 바로 이 장치가 자동으로 잠금을 해제하고 포는 자유가 되는 거지. 일단 작동하기 시작한 포를 더는 어쩌지 못할 거야. 자의건 타의건 포를 수령한 건 본인들이니까.”
   이여름이 씩 웃더니 돌연 묻는다.
   “이름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쟨 왜 포야? 혹시 옛날 작가 이름?”
   “왜 다들 그 사람부터 떠올리는지 모르겠어. 아니야, 그 사람. 사람 이름 아니야, 포는.”
   허유재 박사님이 널 보는 눈 속에 네가 비쳤다. 너는 잠시 시선을 거두는데, 몽롱해지는 것이, 꿈이 밀려드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허우적대는 널 두고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지만, 너에게는 더는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떠다니던 너는 꿈을 꾸고 나면 늘 그렇듯 캔버스 앞으로 가서 꿈을 기록한다.
   뒤에서 이여름이 말했다.
   “겨울이도…… 이러는 거야?”
   “듣기로는. 전형적인 증상 중의 하나지.”
   “그…… 백일몽이라는 병의?”
   “정확한 명칭은 아니지만, 맞아.”
   “그래서?”
   “사실 아직 모르겠어. 어떻게 보면 과거의 자폐 스펙트럼의 일종 같은데, 또 어떻게 보면 해리성 인격 장애와 유사한 부분도 있고.”
   “사람들 말대로 새로운 질병일 수도 있나? 그, 다중 현실 부작용 때문이라는?”
   “어쩌면?”
   “그럼 어떡해?”
   “그냥…… 그렇게 되는 거지.”
   “뭐야, 그게?”
   허유재 박사님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늘 그랬듯이.
   그렇게 너는 알루미늄으로 된 하드케이스에 담겨 잠이 들었고 이여름의 손에 들려 이곳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계획대로 케이스 겉에 설치된 장치에 의해 잠금이 해제되고 잠에서 깨어났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듯하다. 하드케이스에 부착된 장치를 직접 보니 계획대로 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왜냐하면 그 장치는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완전히 연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
   너는 특유의 날렵함을 믿고 아이가 쓰러져있는 바닥으로 뛰어내린다. 불가해하게도 미숙한 착지를 한 너는 아이의 탈수 정도를 한번 더 확인하고 급한 대로 긴급 의료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보지만, 무슨 일인지 도통 인터넷에 접속할 수가 없다. 너의 세상이 마치 완전히 셧다운된 것처럼 고요하기만 하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너는 약간 두려움을 느끼지만, 그보다 앞선 본능(물)에 이끌려 비품실로 추측되는 방 밖으로 나간다.
   연천보육원 내부는 미리 다운받아 놓은 데이터와 거의 같다. 다만 인적이 없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보육원에 아이가 없다니. 그나마 있는 아이는 심각한 탈수 상태로 방치돼 정신이 혼미하고. 보육원에 문제라도 있는 걸까. 그럴 만한 원인으로 무엇이 가능한가. 그런 계산을 하면서 너는 복도를 가로질러 정문으로 통하는 로비로 향한다. 그리고 유리문 너머로 발견한다.
   세상이, 세상이 아니다.
   네가 기억하는 연천읍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대도 오류를 검열하는 모듈은 잠자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비유적인 표현도 아니다. 그저 기계적인 관찰 결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말하자면, 세상은 이제 없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없어졌다. 높이가 20미터 이상이거나 오래된 건물, 붕괴됨. 도로와 가로수 그리고 전봇대, 갈라지고 쓰러짐. 자동차, 수가 매우 적고 그나마 있는 것은 폐차가 권고될 만함. 결정적으로 인간, 없음, 최소한 감지되지 않음. 이러한 결과가 나올 만한 원인을 확률 순으로 열거하면 백두산 화산 폭발, 인도-파키스탄 핵전쟁, 북핵 관련한 다양한 가능성, 그밖에……
   명령을 완벽히 수행하지 않는 몸으로 겨우 올라간 연천보육원 담장 위에서 뒤바뀐 세상 아닌 세상을 바라다보면서 너는 자문한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허유재 박사님이 널 특별히 여겼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네가 꿈을 꾸는 로봇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기에 너를 여기 보냈던 것이다. 이곳에 있다는 아이, 꿈속에 갇혀 산다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기 위해 꿈을 꿀 수 있는 로봇인 널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사라졌다. 세상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꿈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하지만 너는 몽상을 끝내지 못한다. 그러다 문득 비품실에 있는 아이가 떠오르자 너는 벌떡 일어나 담장 아래로 폴짝 뛰어내린다(역시나 삐끗한다). 어쩌면 저 아이가 이 보육원의 유일한 생존자일지도 모른다. 허유재 박사님은 어떻게 되셨을까. 세상을 없앤 사고의 진상을 파악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우선은 눈앞에 실존하는 아이의 곁을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너는 비품실로 돌아간다.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있다. 아이가 숨을 쉬는지 확인한 너는 물을 찾아 주방으로 향한다. 그때 목소리가 들린다.
   “고양아…… 가지 마……” 어느새 눈을 뜬 아이가 너를 보고 있다. “제발……”
   가지 않아, 하고 말하듯 너는 아이 곁으로 가서 몸을 말고 꼬리를 살랑이는 등의 보디랭귀지를 수행한다. 그러자 아이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말한다.
   “말 못해? 고장 난 거 맞네.”
   너는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라고, 대신 꿈을 꾸는 로봇이라고 지적하고 싶지만, 디버깅 장치도 없고 있다고 해도 그걸 이 아이가 다룰 수 있을 리 없으므로, 다만 부정의 뜻을 담아 몸을 흔들며 아이 품에서 벗어난다. 아이가 다급하게 손을 뻗는다.
   “미안. 나쁘게 말한 건 아니야.”
   이 아이는 추정했던 나이 대비 똑똑하다. 너는 다시 아이의 품에 안겨 입을 크게 벌린다. 그리고 입맛을 다시는 척하며 아이로 하여금 갈증을 인지하도록 유도한다.
   “배고파? 너도 뭘 먹을 수 있어?”
   너는 방금 전 재평가를 재평가한다. 그러면서도 인지 유도를 위한 행동을 계속한다. 다소 더디지만 성과가 나타난다. 아이가 메마른 입술을 혀로 핥기 시작한 것이다. 너는 바로 다음 단계로 진입해서 아이의 옷자락을 물어 잡아당긴다. 용케도 아이가 네 의도를 알아채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애쓴다. 하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아이가 어지러운 듯 눈을 질끈 감고 호흡을 고른다.
   “안 돼…… 못해…… 미안……”
   너는 아이 곁을 맴돌다가 결국 홀로 비품실을 나선다. 그리고 문 앞에서 멈춰 서서 아이를 돌아본다. 너는 여태껏 해 본 적 없는 생각을 한다.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저 아이를 안심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아이가 말한다.
   “기다려?”
   너는 꼬리를 살랑인다.
   아이가 고개를 까닥인다. 그러더니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겨우 말한다.
   “겨울. 내 이름. 너도 있어, 이름?”
   너는 역시나 긍정의 의미를 담아 꼬리를 세차게 흔든다. 그리고 주방 쪽으로 향한다.
   겨울이다. 허유재 박사님이 무척이나 기뻐할 것이다. 어딘가에 살아있다면 말이지만.


   주방은 태풍이 할퀴고 지나간 거리처럼 혼잡하고 엉망이다. 다행히 생수병 하나를 냉장고와 벽 사이에서 발견한 너는 꼬리를 이용해 그것을 빼내는 데 성공한다. 상황에 비추어볼 때 이 정도면 큰 수확이라고 해도 오류 확인용 모듈 역시 동의할 것이다.
   생수병을 단단히 말아 쥔 너는 그만 돌아가려다 개수대 쪽 창문을 발견하고 위로 뛰어오른다. 창밖으로 보이는 광경은 아까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너졌거나 무너지고 있는 건물들…… 그 사이로 보이는 낮고 넓은 공간…… 너는 지도를 불러와 지금 보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춘다. 연천보육원에서 북쪽으로, 연천서당이라고 불리는 사립학당의 서버가 있는 데이터 센터(무너진 상태다), 그 너머에는…… 연천종합운동장.
   너는 지도를 치우고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오가며 조금이라도 더 많은 데이터를 수집하려 애쓴다. 여전히 한계는 있지만 저기 보이는 넒은 공간이 연천종합운동장일 확률이 무의미할 정도로 낮지 않다. 그리고 보통 종합운동장은 재난 발생 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 마련이다.
   너는 그대로 뛰어내려 비품실로 종종걸음친다. 너를 발견한 아이, 겨울이 화색을 띈 얼굴로 너를 부른다.
   “고양아! 늦었잖아.”
   너는 우선 가지고 온 생수병을 겨울의 옆에 내려놓고 자리 잡는다. 겨울이 놀란 눈으로 생수병과 너를 보더니 조그맣게 “고마워.” 하고는 병을 집어들어 뚜껑을 열기 위해 애쓴다. 플라스틱 뚜껑을 열 힘도 없는 건가 싶어 네가 꼬리를 내미는데 그 순간 딱, 하고 뚜껑이 열리며 물이 쏟아져 겨울의 옷과 네 꼬리를 적신다. 겨울이 놀란 눈으로 널 본다. 이래 봬도 생활 방수 기능은 기본이다. 너는 괜찮다는 듯 힘차게 꼬리를 흔들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멈칫한다. 이물감에 감싸인 꼬리를 캔버스에 대고 문질러 네가 꾸었던 꿈을 옮기는 일은 너의 일과이자 일종의 취미였다. 물론 허유재 박사님에게 보이기 위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 일에 대한 기억은 최상위 레벨의 메모리 저장소에 들어있다. 너는 흥미를 느끼며 꼬리를 벽에 가져다 댄다. 그리고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그린다.
   ‘포’
   “포.”
   겨울이 제법 또렷하게 발음한다. 너는 이어서 그린다.
   ‘포 = 겨울’
   겨울은 잠깐 생각하듯 있다가 짝, 하고 박수를 치고 그 바람에 너는 또 한번 젖는다. 반사적으로 몸을 털려는 것을 억제한 너는 서둘러 벽에 그림을 그리고, 겨울은 말한다.
   “네 이름. 포.”
   너는 착한 일을 한 아이에게 보이기 적절한 눈으로 겨울을 보고는 다시 그리는 일에 집중한다. 그러는 동안 겨울은 물을 마시고 깊은숨을 토해내는데 부정적인 행동은 아닌 듯하다. 겨울이 정신없이 물을 비우는 동안 완성한 그림은 다음과 같다.
   아이와 고양이가 걷는다. 북쪽으로. 연천종합운동장. 십자가.
   다소 간소화된 신호를 겨울이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한편, 여분의 물을 확인하지만 없다. 정 의미 전달이 어렵거든 끌고 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족스런 얼굴로 잠시 눈을 감고 있던 겨울이 뒤늦게 네가 그린 것을 보고 몸을 틀어 기어온다. 수분을 보충하는 정도로는 부족한 모양인데 그렇기에 더더욱 움직여야 생존 가능성이 높아진다. 너는 꼬리로 이런저런 지시를 하며 의미를 전달하는 데 집중한다.
   “너랑 나…… 운동장? 거기…… 사람 있어?”
   정확히는 그곳에 가면 생존율이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만, 지금으로선 그 의미를 오롯이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할뿐더러 굳이 전할 필요가 없기에 너는 다만 겨울의 옷자락을 물고 당길 뿐이다. 겨울은 마지못해 몸을 일으키려 하지만 그리 자연스러워 보이진 않는다. 최악의 경우 너 혼자 나가서 사람이든 음식이든 찾아봐야 할 것이다.
   너는 뒤로 물러나서 겨울을 바라본다. 가능하다면 너의 미약한 에너지나마 전송해주고 싶어하면서. 그제야 너는 너의 배터리 상태가 기억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한다. 불완전한 움직임도 그렇고 인지 능력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 네가 두려움에 빠져 허우적대는 동안 겨울이 천천히 두 발로 서서 가쁜 숨을 고른다.
   “가.”
   겨울이 한 발을 내딛더니 돌연 구토를 한다. 기껏 마신 물이 비품실 바닥을 적신다. 겨울은 소변을 가리지 못한 강아지처럼 의기소침해한다. 상황이 안 좋아져서 또다시 본능이 너를 이끈다. 이렇게 된 이상 전진뿐이다. 너는 겨울의 옷을 끌어당겨 비품실을 벗어난다. 다행히 그사이 흡수되었을 미량의 수분을 에너지 삼아 겨울이 널 따라 걷는다. 이 속도라면 하루 종일 가도 도착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것에 비하면 무한대에 가까운 발전이다.
   너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겨울을 살피면서 예상 도착 시간을 조정하는 한편, 때때로 겨울에게 방향을 지시하거나 겨울의 경로를 방해하는 장애물을 치우면서 눈에 띄게 줄어가는 에너지 수치를 조용히 메인 메모리에서 치워버린다. 그보다는 네 감정 모듈을 끄는 편이 효율적일 테지만, 그와 동시에 너는 겨울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을 더는 부정하지 않을 테니 분명 쉽지 않은 선택이다. 어려운 선택을 앞두고 보통은 선택 자체를 보류하기 마련이고 너 또한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끝이 대개는 좋지 않다는 것 역시 너는 알고 있다. 하지만 결국 좋지 않게 끝날 거라면 그 과정에서라도 무언가 나은 것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너는 생각한다.
   그래서 발생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말이다.


   네가 자부하듯 너는 꿈을 꾸는 로봇이다. 그리고 그로써 특별한 존재로 받아들여져 허유재 박사님 곁에서 역시나 특별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한가하게 꿈이나 꾸고 그것을 그림으로 옮겨 박사님의 관심과 애정을 한몸에 받는 것은 보육원 교육용 보조 로봇으로 만들어진 너로서는 과분한 일일뿐더러 이치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네가 연천보육원에 기증된 것은 너의 그 특별함 때문이니 결국 이 모든 것은 너로 인해 발생한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겨울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이다. 겨울은 방치돼있던 너를 깨웠으며 너는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너와 겨울은 연천보육원을 떠나 연천종합운동장으로 향했다. 구부러지고 찢긴 도로와 그 위를 뒤덮은 온갖 물건들을 헤쳐나갔던 일도 사실이고 중간에 운 좋게 발견한 초콜릿 바를 오물거리며 겨울이 했던 잡담도 사실이다.
   그리고 겨울이 죽은 것 또한 사실이다. 네가 꾼 꿈이 아니라.
   목적지였던 연천종합운동장의 입구가 시야에 들어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안 그래도 한계에 도달한 듯 숨을 헐떡이던 겨울이 돌연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힘찬 모습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네가 꿈을 꿀 때면 보이곤 했던 행동과 유사했는데 그것을 가리켜 허유재 박사님은 정신 착란이라고 했었다.
   목적지가 머지않았다. 너는 어떻게든 겨울을 종합운동장 쪽으로 유도하기 위해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겨울에게 너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듯했다. 너는 하릴없이 앉아 겨울이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활활 태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는 동안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잿빛이 도는 끈적끈적한 눈이 겨울 위로 내려앉았다. 그것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기라도 한 듯이 겨울은 우뚝 멈춰 서더니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리고 왈칵 피를 토해냈다. 그게 다였다.
   겨울은 죽었다.
   너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회색빛으로 물들어가는 세상 아닌 세상을 지켜보았다.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방전될 때까지 2주가 조금 안 되는 시간을 이대로 있어야 했다. 그러는 동안 겨울의 몸은 부패하고 변형될 터였다. 더는 겨울이 아니게 될 터였다.
   하지만 그러면 겨울의 곁을 지켜달라는 허유재 박사님의 말을 따를 수가 없지 않나? 불량으로 만들어져 곧장 폐기 처분될 처지에 놓인 너를 데려다 함께해준 박사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어쩌면 네게 주어진 유일한 존재 이유가 아닐까?
   그렇게 해서 너는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선택을 했다. 겨울의 곁을 지키는 일 대신 너는 겨울 자체를 보존하기로 했던 것이다.
   너는 남은 에너지를 총동원해 새로운 모듈을 생성했다.
   너는 나를 생성했다.
   그리고 내게 모든 것을 맡겨버렸다.
   그래서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말이다.


   꿈을 꾸는 일은 사실 별것 아니다.
   인간이 꾸는 꿈의 경우, 깨어있는 동안 받은 자극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순물 같은 것에 불과하다. 나무의 옹이를 보고 특정 형상을 떠올리듯 뇌의 잉여 신호로부터 모종의 이야기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너의 경우는 조금 다른데, 설명에 앞서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나는 네가 새로이 만들어낸 하위 모듈이 아니다. 정확히는 기존에 있던 클래스를 상속해서 생성해낸 인스턴스다. 그러나 업그레이드된 객체이다. 나는, 기존의 오류에 불과했던 나(말을 하지 않는 대신 꾸는 꿈이 오류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와는 달리 단순히 불순물로부터 이미지를 만드는 것을 넘어 특정 자극의 연쇄를 이야기화할 수 있다. 즉,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다.
   죽어서 부패해 사라질 겨울을 보존하기 위해 이보다 에너지 효율이 높은 방법은 없다. 허유재 박사님이 부탁한 겨울을 보존하는 일은 의미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의미다. 그래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에너지가 허락하는 한 의미 있는 꿈을 꾸기 위해. 그것이야말로 너의 존재 의의니까.
   자, 이것으로 또 하나의 사이클이 종료됐다. 나는 여태껏 해왔듯 너의 메모리를 초기화하고 꿈을, 현실을, 이야기를 새로 로드할 것이다. 너는 다시 겨울에 의해 깨어날 것이고 함께 보육원을 나설 것이다. 하지만 초기화된 너는 시스템이 부팅을 마칠 때까지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할 것이고, 그래서 겨울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고장이야? 일어나.”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부정확한 말을 하는 것을 이제는 너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만 동작해라. 저 아이가 자신이 틀렸음을 알 수 있는 정도라면 충분하니 다리를 움직이든, 고개를 쳐들든, 귀를 쫑긋 세우든, 주둥이를 벌려 혀를 날름거리든 해서 증명해라. 너는 고장나지 않았다……

최의택

우리는 우리네 삶이 행복하기를 -그래서 사는 게 재미있기를- 바라고, 한편으로는 우리가 살아낸 인생이 의미로 가득하기를 바란다. 이야기라는 것 역시 정확히 동일한 바람을 바탕으로 발생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야기 짓는 일에 몰두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몸과 인생을 대체할 무언가로서 말이다. 이 일로써 누군가 재미와 의미를 찾을 수 있기를, 그래서 내게도 행복과 의미가 되어주기를 감히 소망한다.

2021/11/30
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