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틀콕이 사라졌을 때 그가 말했다. 벌써 두번째야. 그는 금방이라도 공을 칠 것처럼 라켓을 머리 위로 들어올린 채 중얼거렸다. 워낙 엉뚱한 소리를 잘하던 그였기에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대신 공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공원의 잔디밭 위에는 그와 나밖에 없었다. 텅 빈 벤치와 높은 하늘, 잘 다듬어진 초록의 잔디, 그리고 그 셔틀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보낸 공을 통, 하며 쳐냈을 때의 떨림이 약하게나마 아직도 몸에 남아 있는데. 그쪽에 있니?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을 때 그는 말했다. 사실은, 세번째야. 데자뷰가? 아니, 공이 사라진 게.
   우리는 공을 찾기 시작했다. 제자리에서 주위를 휘, 돌아보았지만 하얀 셔틀콕은 눈에 띄지 않았다. 어디까지 날아간 거지? 그와 나는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라켓 끝으로 잔디를 뒤적거렸다. 5월의 햇살은 눈 부셨고 나는 한참 지쳐 있던 터라 공 찾는 일이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그와 나는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게 공을 주고받고 있었다. 애초부터 점수를 염두에 두고 시작한 배드민턴이 아니라 상대방이 가장 잘 칠 수 있도록, 서로의 라켓을 향해 공을 보냈던 것이다. 처음에는 스무 번, 스물다섯 번, 서른 번 하는 식으로 목표를 잡아놓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서로 너무 안정적으로 공을 쳐내 숫자를 세지도 않았다. 그러던 참에 공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뭐라도 마실까? 내가 있는 곳의 반대편에 삐딱하게 선 채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그를 향해 외쳤다.
   그와 나는 새로 칠을 해 여전히 페인트 냄새가 남아 있는 하얀 벤치에 앉았다. 아직 덜 마른 건 아니겠지, 중얼거리며 조심스레 엉덩이를 붙이는 그 역시 하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낡은 티셔츠는 치약처럼 새하얀 벤치에 비해서는 오래 닦지 않는 이 마냥 누리끼리해 보이기만 했다. 밴드 로고가 프린트된 그의 티셔츠는 재작년쯤, 쇼윈도에 걸려 있는 걸 함께 발견하고는 보자마자 맘에 들어 산 것이었다. 청바지에 입으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덧 반쯤 지워진 프린트에, 짱짱하던 목 부분도 헤벌쭉 늘어져 있었다. 그 옷도 꽤나 오래 입었다. 나는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말했다. 츄읍, 요구르트를 먹던 그가 병을 입에 문 채, 마지막까지 빨아먹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요구르트나 우유를 마실 때 빨대를 꽂아 먹는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앞니로 요구르트 비닐에 구멍을 내고는 병 입구를 입술로 감싼 채 내용물을 흘려넣고 있었다. 나는 오리처럼 입술을 내민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벤치 앞쪽으로 푸른 잔디가 너르게 펼쳐져 있었다. 가지런한 잔디 위에는, 방금까지 배드민턴을 치던 우리의 흔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을 걸어갔을까. 아직 사람의 발길을 별로 타지 않아서인지, 내 눈에만 푸르디푸른 건지, 잔디는 그저 싱싱해 보였다. 새로 생긴 근린공원은 ‘하늘 숲’이라는 이름으로 지난달 문을 열었다. 평범한 근린공원에 이름만 거창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직접 와보니 탁 트인 하늘이 보기 좋았다. 그래도 좋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원래 페인트 냄새 좋아하잖아. 무슨, 하려다가 말을 참았다. 땀이 나 등에 달라붙은 티셔츠를 떼어내며 말했다. 봄인데 회충약이라도 먹지 그래. 휘발유나 페인트 냄새 좋아하는 사람들, 몸에 회충 있는 거라잖아. 픽, 하고 웃음이 터지길 기다렸는데 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기운이 없어 보였다. 기분이 좋으면 한없이 쾌활했지만 기분이 가라앉았을 때는 동굴 속에 웅크린 사람처럼 마음을 닫아버리는 그였다. 처음에는 그의 이런 모습을 보면 어쩔 줄 몰라 했었다. 지금도 나를 긴장시키지만 이제 나는 그의 기분을 풀어주는 방법을 알고 있다. 재우거나 먹이거나. 집에 갈래? 말을 입 밖에 냄과 동시에 약간 짜증이 일었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뭐라도 먹을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먹고 자는 것까지 마다하는 그라면 마지막 방법이 있다. 나 또한 생각에 빠져 시간을 보내는 것. 그를 막 좋아하게 되었을 무렵에는 잠자리에 들기 전, 그가 내가 했던 말들을 곱씹곤 했다. 자주 만나게 된 다음부터는 그와 함께했던 거리를, 영화관을, 카페를 떠올리며 상상 속에서 다시 그와 함께 움직이곤 했고 스킨십을 하게 되었을 때는 그의 체취를, 키스를 하고 나서부터는 그의 부드러운 입술과 혀를 떠올렸다. 나는 키스를 좋아했다. 키스는 두 사람이 완전히 침묵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그와 나의 시간을 온전히 맞댈 수 있는. 키스할 때의 혀는 말할 때보다 솔직했다. 혀가 뒤엉킬 때면 사랑한다는 속삭임보다 훨씬 생생하게, 그가 나를 얼마나 원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때의 우리는 서로에게 전해지는 떨림을 어느 때보다 예민하게 느끼곤 했다.
    아마도, ……거야. 뭐라고? 생각에 빠져 있던 터라 그의 말을 정확히 들을 수 없었다. 그 얘기 기억나? 어렸을 때, 동네에서 길 잃어버린 적 있었다고 했잖아.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몇 번이고 해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어린 시절의 그를 느끼는 게 좋아 들을수록 머릿속이 환해지곤 했는데 요즘에는 그가 앞부분만 시작해도 졸음이 쏟아졌다. 잠이 잘 오지 않을 때에도 그날은 정말이지 더웠어, 하면 온몸이 나른해졌던 것이다. 그날은 정말이지 더웠어, 순간 피로가 눈 사이로 몰려왔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열기 때문에 모든 게 녹아버릴 듯이 흔들리고 있었지. 눈을 깜빡여 물리친 빡빡한 피로는 이번에는 뒷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몹시 더운 여름날 그는 동네에서 길을 잃었다. 어릴 때부터 살았기에 눈을 감고 걸어도 넘어지지 않을 만큼 익숙한 동네라고 했다. 그런데 그 더운 여름날에는, 모든 것이 녹을 듯이 흐물거리던 그날의 그는, 그 빤한 동네에서 길을 잃었다. 골목 어디쯤 고개를 내밀던 익숙한 꼬맹이들은 그날따라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자전거가 세워져 있는 골목의 마지막 집이 그가 사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골목 어디에도 자전거가 없었다. 스프레이로 낙서가 되어 있는 담벼락을 오른쪽으로 두고 걸어가다가 나오는 두번째 골목 안에 그의 집이 있었다. 그러나 그날은 모든 벽이 깨끗했다. 그는 찜통 같은 더위에 숨이 막혔고 보이는 모든 사물은 녹아버릴 듯이 몸을 늘였다. 몇 번이나 같을 길을 맴돌다 눈앞이 뒤섞였을 때 그는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속을 게워내다 울음을 터뜨렸다. 날이 저물었고 그는 소리쳤고 어느새 달려온 어머니가 팔을 붙잡았을 때에야 자기가 주저앉아 있던 골목이 친구들 몰래 구슬을 숨겨놓곤 하는, 동네에서 가장 좁은 골목임을 깨달았다. 다음날 다시 골목에 가보았을 때, 자전거와 낙서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게워낸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그가 해준, 여름날의 이야기였다.
   사실 너에게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어. 나는 밀려오는 졸음을 겨우겨우 물리치며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려 애썼다. 초록색을 보면 눈의 피로가 덜하다는 말이 생각났다. 잔디밭을 보았다. 눈이 조금은 시원해지는 것도 같았다. 그때 나는 길을 잃어버린 게 아니었어.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때 난 내 스스로 사라졌던 거야. 그리고 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잃어버렸어. 그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러나 시간을 잃어버렸다는 말은 그저 모호하게 들렸다. 숨바꼭질이라도 한 거야? 그는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날 아침에 난, 태어나 처음으로 삶이 시시하다 느꼈어.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도. 그냥,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하루. 여름 방학이 한참이었고 늘 그렇듯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는 하고 싶은 게 없었어. 그렇게, 그냥 하루가 가버릴 거라는 걸 알았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채 시간에 밀려,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지. 그리고 갑자기 두려워졌어. 그 다음은 알지? 밖으로 나갔고 처음엔 길을 잃어버린 줄 알았지만…… 점점 머리가 아파왔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 냉동실에 얼려놓은 복숭아티를 마시며 영화나 보고 싶었다.

   우리도 뭔가 새로운 걸 해보자. 며칠 전 그와 대청소를 하다가 셔틀콕을 발견했을 때, 그에게 말했다. 아무리 자도 피곤한 건, 운동을 안 하기 때문이야. 깃털이 촘촘한 셔틀콕을 들어 보이자 그는 놀란 표정으로 공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버릴 것과 버리지 않을 것 두 가지로 나누어 물건을 정리하던 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섬세한 분류를 필요로 했다.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것은 의외로, 버리지는 않되 자주 꺼내보지도 않을 물건들이었다. 미처 앨범에 정리하지 못한 사진들과 일기장, 이제는 듣지 않는 옛 가수의 시디와 입지 않을 거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옷가지들. 거기에 내가 보낸 편지들과 실용적이지 않은 선물들, 수많은 공연 티켓 따위가 추가되었다. 그와 나는 손으로는 바쁘게 물건을 분류하면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래가 묻어 있는 비치볼이 발견되자 우리는 동시에 대천해수욕장, 하고 말했다.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물건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그가 이태원에서 샀다고 말하는 야구모자는 내 기억 속에선 분명 동대문에서 산 것이었다. 그날 내가 무슨 샌들을 신었는지도 기억하고 있었기에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기억 역시 구체적이었다. 그는 모자를 산 뒤 맞은편 패스트푸드가게에서 함께 햄버거를 먹으며 모자를 써보았다고 우겼다. 전혀 다른 느낌으로 기억되는 물건들도 있었다. 투명한 통에 담긴 형광 핑크의 헤어젤이 나왔을 때 나는 깔깔대며 웃었다. 몇 년 전, 급히 증명사진 찍을 일이 있었던 그가 뻗친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발랐던 것이었다. 가뜩이나 젤을 바르지 않던 그인데다가 3분 즉석 증명사진은 그를 더 우스꽝스럽게 만들었고 사진을 본 그와 나는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젤을 발견하자마자 불결한 것을 본 것처럼 기겁하며 쓰레기 상자에 던져넣었다. 그때 웃겼는데. 말했지만 입을 꾹 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
   함께했던 시간은 기억이 깃든 유물 몇 점으로 남아 상자에 담기거나 쓰레기통에 던져졌다. 모자의 출신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촌스러워 더이상 쓰지 못한다는 합일점을 찾아 구겨져 상자 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셔틀콕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디 있었어?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침대 밑이나 책꽂이 뒤, 뭐 그런 데서 나왔겠지. 그리곤 쿡, 웃음을 터트렸다. 배드민턴부라도 했던 거야? 특별활동 시간에 아이들과 어울려 운동하는 그의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운동장 한구석에 앉아서 무언가를 끼적이거나 햇살 아래 반짝이는 아이들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그에게는 더 어울렸다. 나는 셔틀콕을 어느 상자에 넣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책꽂이 한구석에 세워두었다. 동그란 머리를 위로하고 깃털이 달린 발로 오똑, 서 있는 셔틀콕은 불필요한 장식품을 다 치워버린 그의 집의 유일한 장식품이었다.
   청소를 마친 뒤 우리는 텔레비전을 보았다. 연예인들이 나와서 시시덕거리는 쇼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채널을 바꿀까 하다가 뭘 봐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서, 또 멀리 있는 리모컨을 가지러 가기가 귀찮아서 그대로 소파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팔짱을 끼었다가, 다리를 꼬았다가, 턱을 괴었다가, 나중에는 거의 누울 듯이 소파에 기대어 쇼 프로그램을 보았다. 밖은 금방 어두워졌다. 나는 단추를 채우며 말했다. 자고 갈까? 그는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내일 일찍 아르바이트 간다고 하지 않았어?
   육 개월째 하고 있는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나면, 대부분의 남는 시간을 그와 함께했다. 사실, 무엇을 함께했다기보다는 그저 그의 집에서 시간을 보낸 것뿐이었지만. 그가 집에 없을 때에도 스페어 키로 문을 열고 들어가 침대에 쓰러져 잠을 자는, 그야말로 서로에 익숙한 나날들. 대학원에 다니는 그는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다고 했다. 그는 공부에 대한 지원은 원하는 데까지 해주겠다는 부모님에게 아직까지 용돈을 받아썼다.
   그와 나는 대학 동기였다. 미묘한 감정이 오가게 된 것은 술김에 스킨십을 하게 된 다음부터였다. 손을 잡고 걷다가 인적이 드문 어느 골목에서 우리는 서툴게 키스했다. 충동적인 키스 한 번에 관계를 심각하게 생각할 만큼 서로에게 진지하진 않았던 우리였지만, 원하던 원치 않던 그날 이후 관계는 달라졌다. 여러 사람과 함께 있을 때에도 그의 모습만이 도드라져 보였고 나의 말과 행동들은 모두 그를 겨냥한 채였다. 그 게임이 짜릿했던 것은 내가 그에게 곤두서 있었던 만큼 그 역시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 말에 웃는 나를 바라보는 눈빛,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귀 기울이는 모습. 우리는 점점 서로에게 몸이 달았다. 시험 삼아 그의 질투심을 자극했던 어느 날, 우리의 게임은 쉽게 다음 세트로 넘어갔다.
   그의 군대 시기에 맞추어 휴학을 했다가 그와 함께 졸업을 했다. 내게는 풍족한 부모님도 없었거니와 학과에 대한 흥미나, 재능도 없었기에 자연스레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우리 과를 졸업해 가장 하기 쉽다는 학원에 취직했다. 그에게 학원을 그만두고 싶다고 했을 때 그가 말했다.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반년 만에 학원을 그만두고 처음 일주일은 실컷 자고 실컷 놀고 여분의 시간을 마음껏 누렸다. 휴식 기간이라고 생각해. 자금 사정 때문에 계획했던 여행도 가지 못한 채 집에만 있던 나는 얼마지 않아 구인 광고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서둘러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시간은 마냥 흘러갔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그럼 넌 어디로 간 건데? 사차원의 세계에라도 간 거야? 그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여름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는 여전히 심각했다. 중요한 건…… 내가 이 세계에서 사라졌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는 거야. 주저앉았다거나 울었다는 건 모두 거짓말이야. 너 거짓말도 하니? 단지 배드민턴을 치러 나온 것뿐인데, 평화로운 주말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자, 우선 들어봐. 골목을 한 바퀴 돌았을 때 이미 그곳이 우리 동네가 아닌 걸 알았어. 두렵다거나 기묘하다는 느낌은 없었어. 사라진다는 건 쉽고도 현실적이었지. 거기가 사차원의 세계였는지는 모르겠어. 다만, 나는 박제된 것처럼 존재했지. 그럼 집에는 어떻게 돌아온 거야? 아무도 날 찾지 않는 시간이었어, 그땐. 나 역시 아무도 찾지 않았고. 하지만, 곧 모든 것이 그리워졌어. 두려움이 밀려들었고,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뛰기 시작했지. 나의 골목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의 시간을 다시 살기 위해.
   우리가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 솔직한 것인지조차 몰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배드민턴 라켓은 내가 가지고 갈게. 너는 공만 가지고 와.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공원으로 나가던 오늘 아침,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한 남자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와 만난 지 두 해쯤 지났을 때, 그가 군대에 입대했던 봄에, 난 다른 남자와 잤다.
   그 남자가 떠오른 이유는 아마도 배드민턴 라켓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자는 별로 친하지 않은 동기의 사촌이었다. 건장한 체격에 유난히 피부가 까무잡잡했던 남자는 한여름의 바다 같은, 유쾌하고 건강한 느낌의 사람이었다. 갈색 수제 구두처럼 흠 없이 반지르르한 피부가 보기 좋았다. 하얀 셔츠 때문이었을까, 테니스 선수 같은 인상이었다. 어떤 연유로 동기가 내게 사촌을 부탁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남자와, 동기가 부탁하고 간 한 시간 정도를 함께했다.
   남자는 재치 있는 사람이어서 시시한 화젯거리도 통통 튀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나는 자주 웃었다. 그럴수록 곁에 없는 그가 그리웠다. 한 시간 동안 캠퍼스 구경을 시켜주고 남자와 헤어졌다. 그리고 밤이 되었을 때 남자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내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뭔지는 아직 비밀이라고, 장난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뭐냐고 짐짓 궁금한 척하며 나갔지만 사실 난, 남자가 어떤 식으로든 내게 다시 연락할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만큼 그가 내게 표현하는 감정들은 거칠 것 없이 솔직했다.
   부끄럽지만.
   때묻고 보풀이 일어, 더이상 원래의 연두색이 아닌 테니스공에는 남자가 초등학교에 다녔을 무렵의 연도가 적혀 있었다.
   아끼는 물건이에요.
   남자는 자주색 수제 구두처럼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공을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가 불룩해진 채, 남자와 벚꽃이 만발한 길을 걸었다. 그와 가기로 벼르고 별렀지만 이상하게 때가 안 맞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벚꽃 축제였다. 바람이 불어와 꽃비가 내렸다. 깊은 밤 걷는 벚꽃 길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남자는 내 손을 잡았고, 나는 남자에게 입을 맞췄다. 그 무렵의 나는 미쳐버릴 것처럼 마음의 전부가 그에게 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곁에 없었다. 만약 그가 영원히 사라진다면, 나의 젊음도, 청춘도, 나의 시간과 존재 자체까지도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남자와 자고 돌아오는 아침, 주머니를 만져 보았을 때 테니스공은 사라지고 없었다.
   너도 이야기해봐. 뭘? 뭐든지. 무슨 얘길 할까…… 남자에 대한 기억은 한동안 사라져 있었다. 너 푸아그라라고 들어봤어? 거위 간 말하는 거야? 응. 우리 레스토랑에서 최고급에 속하는 요리, 푸아그라. 몇 달 전 남자가 레스토랑에 왔을 때, 남자가 먼저 나를 알아보았을 때야 남자에 대한 존재가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순대 먹을 때 돼지 간은 먹어봤잖아. 그거 생각하면 돼. 최고급이라며. 사실 나도 먹어보진 못했어. 아무렴 어때. 중요한 건, 단순한 거위 간이 아니라는 거야. 남자의 얼굴을 보자 먼저 떠오른 것은 공, 벚꽃, 잘 만든 수제 구두. 목소리를 듣고 나서는 그가 지었던 표정과 내 윗입술을 깨물던 그의 입술이, 반가운 듯 나를 보고 있는 현재의 얼굴 위로 어렴풋이 겹쳐졌다. 푸아그라를 얻으려면 거위는 오 개월 동안 운동을 하면 안 돼. 사료를 많이 먹이고 인위적으로 운동량을 줄여서 간을 비대하게 만드는 거야. 다음 떠오른 것은 가슬가슬한, 때 묻은 테니스공. 다 자란 거위의 간은 1.5킬로그램이나 된대. 맛있대? 글쎄. 말했지만, 나도 먹어보진 못했어. 공의 내력은 듣지 못했다. 거위에 대한 이야기는 나도 하나 알아. 셔틀콕, 거위 깃털로 만드는 거 알고 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래된 봄날을 기억하나요, 묻지 못했다. 셔틀콕 하나를 만드는데 거위 세 마리의 깃털이 필요하대. 한 마리의 거위에게 채취할 수 있는 털은 모두 열네 개. 그런데 셔틀콕이 회전하게 하려면 한 방향의 깃털로만 만들어야 하거든. 그래서 채취할 수 있는 깃털은 한 마리당 일곱 개. 결국, 세 마리의 거위가 필요한 거지. 당신도 그날의 샴푸 향기를, 주머니가 불룩한 재킷과 못생긴 엄지발톱을, 잊지 말고 살아주세요, 끝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거위는, 어쩐지 좀 슬프구나. 공원에는 여전히 우리 두 사람밖에 없었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사실은 나도 너에게 얘기하지 않은 부분이 있어. 테니스공이 사라져버렸을 때,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걸 알았다. 푸아그라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야. 그럼? 프랑스 북동부에 있는 알자스라는 마을에 앙드레라는 거위 한 마리가 살았대. 그날 이후 나는 시간 한 토막을 잃어 버렸다. 앙드레는 사람 이름 아니야? 우선 들어봐. 농장 주인은 푸아그라를 얻기 위해 오 개월 동안, 열심히 사료를 먹였지.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허전함은 그가 곁에 있을 때도 찾아왔다. 앙드레를 비롯한 거위들은 점점 살이 올랐어. 마침내 거위를 잡는 날이 돌아왔던 거야. 그가 내게 어떤 약속을 해주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앙드레의 차례가 돌아오고 있었어. 앙드레는 탈출을 시도했지. 앙드레는 뛰기 시작했어. 그가 떠나기 전, 너의 시간을 내가 살아줄게, 걱정하지 마, 라고 말해주었다면. 하지만, 재빠른 주인의 손을 벗어나지는 못했지. 앙드레도 결국, 다른 거위들처럼 죽고 말았어. 그리고 배를 갈랐을 때…… 주인은 너무나 놀라고 말았어. 앙드레의 뱃속은 텅 비어 있었던 거야. 테니스공만큼의 결핍은 견딜 수 있다고 믿었다. 통통한 간 대신 텅 빈 뱃속을 드러내고 앙드레는 죽었지. 다음은 어떻게 됐는지 알아? 나 알 것 같은데. 그가 말을 이었다. 주인은 조금 슬퍼졌던 거지? 맞아. 그리고 앙드레를 묻어주었던 거야. 멋진 묘비와 함께. 거짓된 시간을 살찌우기보다는, 공기처럼 사라져버린 앙드레, 묻히다. 이렇게 말이야. 나는 점점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앙드레의 깃털을 모아서. 나는 킥킥거리며 대답했다. 응. 셔틀콕을 만든 거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와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당겨오는 배를 잡고는 눈물이 날만큼, 소리 내어 웃었다.
   마지막까지 짜내어 웃어버리고 나자 다시 고요한,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다. 앙드레의 간은 왜 사라진 걸까. 그가 말했다. 앙드레가 원했기 때문 아닐까. 니가 그렇게 사라졌던 것처럼. 언제부터 우리는 서로의 마음 가운데로 들어가는 걸 두려워하게 되었을까. 우리에게도 서로의 시간을 살던 때가 있었다. 서로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귓가에 웃음을 터트리는 것에 익숙해 졌을 무렵부터 그와 나는 서로의 살냄새를 맡으며, 서로를 너무도 원해 몸을 떨었다. 어느 주말에 그와 나는 가까운 바다에 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날 어떠한 연유인지 우리는 싸웠다.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이유 없는 싸움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방법도, 배려하느라 마음을 숨기는 방법도 몰랐다. 결국, 우리는 바다에 가지 못했다. 자존심을 세우느라 늦은 밤에야 만났을 때 우리는 상대보다 자신에게 화가 나 또다시 싸움을 시작했다. 아주 지겨운, 어느 한쪽이라도 눈에 보이는 상처를 입어야만 끝나는 싸움이었다. 그가 뺨을 때렸을 때, 나는 아픔보다는 싸움이 끝날 것이라는 걸 알아 속이 시원했다. 그리고 그가 내 앞에서 엉엉, 어린애처럼 소리 내어 울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그를 안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우리는 미리 예약해둔 하얀 외벽의 바닷가 펜션 대신 ‘보석장’으로 들어갔다. ‘보석장’도 하얀 외벽이긴 했지만 흘러내린 녹물이 벽에 줄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이대로는 너무 아쉽잖아. 그는 내 비위를 맞추느라 쩔쩔매다가 먹을 것을 사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그가 없는 여관방에서, 싸구려 방향제 냄새가 나는 꽃무늬 이불 위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자니 조금씩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코끝이 빨개져 돌아온 그의 손에는 불룩한 비닐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는 선물을 꺼내는 산타클로스처럼 컵라면, 맥주, 과자, 초콜릿, 오징어 따위를 하나하나 내 눈앞에 흔들어 보이며 꺼냈다. 마지막은 오렌지주스.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우리는 술을 마시고 라면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았다. 아나운서와 골프선수와 뮤직비디오와 영화가 파노라마처럼 텔레비전 위를 지나갔다. 선뜻 채널을 고르지 못하고 리모컨만 누르던 우리는, 다른 채널에 비해 한층 볼륨업 된 성인 방송 속 나체와 교성에 뜨악해져 더욱 재빨리 채널 버튼을 눌러댔다. 결국, 우리가 멈춘 곳은 귀를 쫑긋 세운, 흰토끼 방송이었다.
   양쪽 귀를 잡힌 흰토끼가 모자 속으로 사라졌다. 토끼는 비둘기로 변했다가 다시 흰토끼가 되어 코를 벌름거리며 돌아왔다. 박수 소리. 이번에는 금발 아가씨 차례였다. 상자에 들어간 아가씨가 윙크를 하고 문을 닫자 팀파니 소리가 울려퍼졌다. 문을 열었을 때 상자는 텅 비어 있었다. 휘파람 소리와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한참 마술쇼가 방송되고 있었다. 어디로 간 거야. 괜히 조바심이 난 내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팀파니 소리와 함께 마술사의 과장된 몸짓이 이어졌다. 문을 열었을 때 나타난 건, 윙크하듯 귀를 쫑긋거리던 흰토끼 한 마리. 다시 한번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끝은 다 똑같아. 마술사는 더욱 큰 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나타나겠지. 그가 말했지만, 문을 열었을 때는 아가씨도 토끼도 아닌, 커다란 개구리 한 마리가 나타났다. 개구리로 변한 토끼가, 아니 토끼로 변한 아가씨가, 아니 그냥 개구리가 폴짝폴짝 관객 쪽으로 뛰어가는 모습을 카메라가 따라가는 것으로 마술쇼가 끝났다. 생각해보면, 그는 그때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사라지는 건 왠지 무서워. 중얼거리는 내게 그가 말했다. 저건 사라진 게 아니야. 변한 것뿐이지.
   이 개구리야. 그는 내 볼을 꼬집었다. 나도 그의 볼을 꼬집었다. 이왕이면 토끼로 해줘. 우리는 서로의 볼을 잡아당기며 킥킥거리다가 앉아 있던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키스를 하고 나서 그가 내게 말했다. 갈매기는 못 봤지만. 그는 일어나 옷걸이에 걸린 코트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등 뒤로 숨겼다. 손 내밀어봐. 나는 시키는 대로 착하게, 손바닥이 보이도록 양손을 내밀었다. 새, 하며 그가 내민 것은, 하얀 셔틀콕.
   걸을까. 벤치에서 일어나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손을 잡고, 반대 손에는 라켓 하나씩을 들고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오른쪽으로 둥글게 구부러진 산책로는 아무리 걸어도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길었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새로운 내가 나를 계속 지워가고 있었다. 논문 준비는 잘 돼가? 그럭저럭. 난, 아르바이트 그만두려고. 뭐, 생각해놓은 일이라도 있어? 아니, 아직은. 모아놓은 돈으로 여행이나 갈까 해. 여행이라…… 얼마나? 글쎄…… 어디로?…… 이렇게 계속 걸어나가다보면 우리는, 아마도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갈 것이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아까 두번째라고 한 말, 그 여름날처럼, 사라지고 싶다는 뜻이었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코트나 네트, 점수판이 있었으면 달라졌을까. 그와 맞잡은 손에 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있잖아 난, 어차피 사라질 거라면 완벽하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을 거야.
   우리에게 오 년이란 시간은 버리기엔 아깝고 이후의 오십 년을 약속하기에는 짧기만 했다. 사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시간이 아닐 것이다. 딱 스페어 키만큼의 희망으로, 여기까지 왔다. 이제 우리는 손을 놓고 걷고 있었다. 나는 산책로에서 벗어나 잔디밭 가운데로 걸어갔다. 손차양을 해 얼굴로 드리워지는 햇살을 가렸다.
   셔틀콕은 어디로 간 걸까. 다시 찾아볼까? 발밑의 잔디는 너무 푸르러, 눈이 시릴 정도였다. 배드민턴을 칠 수 없게 되면, 핸드볼이라도 하면 되지. 그의 말에 쿡, 웃었다. 앙드레를 만나러 갈 거야. 그도 픽, 웃었다. 아마, 셔틀콕은 또 사라질 테지. 하지만, 걱정 마. 내가 기억해줄게. 앞서 걸어가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나는 하나의 셔틀콕처럼 잔디 위에 오똑,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손차양을 거두고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황윤하

기묘할 정도로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 싱어송라이터 여름에. 여름이랑 상관없는 한국미래전략연구소 미래연구자. 소설가의 가능성을 발견한 2017년 여름.

2018/02/27
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