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하나를 받았다.
   월요일,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사무실에 도착하여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는데 장 변호사가 노크도 없이 들어와 무턱내고 상자를 들이민 것이다. 전날인 일요일에도 출근하여 야근까지 했는지 장의 와이셔츠는 구겨져 있었고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얼결에 떠안은 상자는 우체국에서 판매하는 3호짜리 소포 상자였는데, 그 크기에 비해 터무니없이 가벼웠고 입구뿐 아니라 네 모서리까지 테이프로 꼼꼼하게 밀봉되어 있었다.
   “부산에 다녀와야겠어요.”
   탕비실엔 우리 둘뿐인데도 장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부산요? 부산은 왜……”
   “아, 유스케 씨라고 재일교포 고객이 있거든요. 지금 부산에 있는데 오후 4시 전에 그에게 이걸 꼭 전해줘야 해서요. 그러니까…… 아, 도쿄, 도쿄행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가기 전까지요. 다음 재판에 중요한 자료인 데다 시간이 하도 촉박해서 인편으로 보내기로 결정했어요. 물론 제가 아니라 대표님이요. 방금 통화도 했고요.”
   장은 변호사답지 않게 두서없이 말했고, 나는 그 무게를 가늠했을 때 소량임이 분명한 몇 장의 서류를 어째서 봉투가 아닌 상자에 담아 밀봉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장이 와이셔츠 주머니에서 연노랑의 사무용 포스트잇을 꺼내더니 무언가를 휘갈기듯 적기 시작했다. 적으면서, 자료 전달이 완료되면 자신에게 바로 전화할 것과 모든 경비의 영수증을 챙길 것을 당부했다. 연노랑의 포스트잇은 곧 상자 윗면에 허술하게 붙여졌다. 포스트잇엔 호텔 이름과 고객의 휴대전화 번호가 적혀 있었는데 단박에 판독되지 않는 그 악필의 내용을 나는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일종의 오기였을까.
   “지금 바로 출발하는 게 좋겠는데……”
   말한 뒤, 장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결국 나는 내가 내린 커피를 마셔보지도 못하고 상자를 품에 안은 채 탕비실을 나서야 했다. 몇 걸음 걷다가 슬쩍 뒤를 돌아봤을 때 장은 무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는 듯 탕비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에 대한 미안함이나 걱정은 아닐 터였다. 장은 내 담당 변호사가 아니었고 나와 개인적인 친분도 없었다. 물론 세 명의 비서들이 열두 명의 변호사들을 보좌하다보면 일이 겹치거나 교차할 때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엔 대체로 양해의 절차가 있었다. 장은 방금 그 절차를 무시하고, 단지 지금 사무실에 있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이유로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이 전혀 필요 없는 심부름에 지나지 않은 일을 시킨 것이다. 아주 잠시 모멸감 비슷한 쓰라린 감정이 가슴속에 머문 것도 같았다. 누군가의 말 한 마디에 출근하자마자 그 먼 도시까지 가야 하다니, 이토록 가벼운 상자를 위해, 그러나……
   그러나, 대표가 결정한 일이다.
   회사 건물을 빠져나와 거리로 나오자 출근길 때보다 좀더 서늘해진 공기가 느껴졌다. 새벽에 확인한 일기예보의 예측대로라면 내가 부산으로 내려가는 동안 태풍은 서울로 올라올 것이다. 그건, 내가 한번은 태풍의 한가운데를 지나간다는 의미였다.

*

   서울역에 도착하여 이십분 후에 출발하는 부산행 KTX 티켓을 끊고 나서야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나는 대합실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며 부산까지 나와 동행하게 될 상자를 간간이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짐작할 수 없는 미심쩍은 상자였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그저 포스트잇이 지시하는 곳으로 가서 장의 고객에게 상자를 전해주면 되는 것이다.
   포스트잇, 그래, 포스트잇, 되뇌는데 뒤통수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듯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상자 주변과 가방 안, 바닥까지 샅샅이 살펴봤지만 포스트잇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포스트잇은 이동하는 중에 떨어져버렸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것은 허술하게 부착되지 않았던가.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장의 번호를 찾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또다시 오기가 발동하고 있었다. 귀찮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와 통화하면서 새롭게 환기될 우리의 위계를 되새기고 싶지 않았다. 호텔 이름이나 고객의 전화번호야 부산에 도착해서 확인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커피를 다 마셔갈 때쯤 코끝의 감각이 돌연 날카로워졌다. 악취의 진원지는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세 시 방향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여자를 나는 물끄러미 건너다봤다. 전체적으로 작고 깡마른 여자였고, 대충 묶은 반백의 머리칼과 주워 입은 것이 분명한 잿빛의 남성용 외투는 한번만 툭 쳐도 먼지가 풀풀 날릴 것만 같았다. 자신의 몸 하나 정기적으로 관리하지 않아서 저렇게 악취가 나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그 악취에 질려 하나같이 배타적인 시선으로 쳐다보는데도 태평하게 졸고 있는 여자가 안쓰러우면서 동시에 혐오감도 일었다. 공포에 가까운 혐오감…… 무심결에 나는 내 손과 머리칼에 코를 갖다 댔다. 무슨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아 트렌치코트 안쪽까지 집요하게 냄새를 맡고 있는데 여자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니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는 너무도 명료한데 표정은 좋은 건지 화내는 건지 판별할 수 없었다.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여자가 입을 쫙 벌려 보인 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우우, 한껏 벌어진 입에서 야유 같기도 하고 흐느낌 같기도 한, 그 역시 선뜻 판별되지 않는 중저음의 소리가 울려나왔다. 여자의 입안은 까맸다. 한 인간의 성분인 장기와 피와 뼈가 그 까만 입안에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거란 사실이 비참한 농담 같기만 했다. 나는 반 이상 남은 커피를 내버려둔 채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고 가방과 상자를 챙겨 승강장 쪽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기차는 대기 중이었다.
   내 자리는 복도 쪽이었고 중년의 남자가 이미 창가 좌석에 앉아 있었다. 나는 코트를 벗어 돌돌 만 다음 가방과 함께 선반 위에 올렸다. 상자는 언제라도 확인할 수 있도록 의자 밑 발치에 두었다. 잠시 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기차의 규칙적인 리듬과 내 호흡이 포개지는 것 같은 나른함이 밀려왔다. 머릿속에서 어떤 풍경 하나가 점멸했다. 잠의 입구엔 늘 그랬듯 수명이 거의 다 된 전구 하나가 달려 있었고, 환해지면 보이고 어두워지면 사라지는 그곳으로 나는 서서히 스며들어갔다. 그곳은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이국적인 도시였는데, 고딕 양식의 건물 사이로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을 골목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었다. 나는 오직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하염없이 그 골목을 걸었다. 공간은 바뀌어도 내가 찾는 사람은 늘 같았다. 그러나 꿈속에서라도 엄마를 만난 적은 한번도 없었고,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

   요의 때문에 눈이 떠졌다.
   마침 기차가 곧 대전역에 정차한다는 안내방송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마치 다른 중력의 영향을 받고 있는 듯 사선으로 기울어져 있는 세계가 보였다. 나뭇잎, 풀과 작물, 사람들의 옷자락과 우산, 흔들릴 수 있는 모든 물질이 바람의 방향대로 쏠리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연결통로 쪽에 있는 화장실을 찾아갔다. 오줌을 누는 동안 엉덩이가 불쾌하게 축축해졌지만 휴지걸이는 비어 있었다. 대충 옷을 추스르고 화장실에서 나오자 기차가 서서히 멈추면서 출입문이 열렸다. 쉬익, 소리와 함께 비대한 바람의 일부가 문 안쪽으로 밀려들어왔다. 조심스럽게 하차하는 사람들과 한 줄로 서서 탑승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내 자리로 다가간 순간, 돌연 불안감이 엄습했다. 상자, 그래 내겐 상자가 있었지, 우체국 소포 상자, 중얼거리며 등허리를 숙여 정신없이 의자 밑을 살피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상자가 보였다. 상자가 왜 저기 있지. 머릿속에 돌멩이처럼 던져진 의문은 동심원 모양의 물결로 점점 크게 번져갔지만, 상자가 대전역 승강장 벤치에 놓여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나는 정신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 막 닫히려는 기차 문 사이로 몸을 던졌고 동시에 바닥으로 넘어졌다.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넘어지자마자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벤치에 놓인 상자를 꼭 끌어안았다. 그사이에 기차는 출발했다. 달려가는 기차 안에 내 가방이 남아 있다는 걸 나는 느리게 깨달았다.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칼과 빗줄기의 차가움도 그제야 감각할 수 있었다. 검은색 스커트와 하늘색 블라우스는 금세 젖어버렸다. 나는 태풍의 한가운데를 지나가지 않고 그곳에 버려진 것이다.
   “이봐요, 이봐요! 내 말 안 들려요?”
   기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었다. 옆자리에 앉았던 남자가 펄럭이는 우산을 두 손으로 꼭 부여잡은 채 묻고 있었다. 대전역에서 내린 그는 기차에서 몸을 던진 나를 보고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잠시 걸음을 멈췄던 모양이다.
   “대체 무슨 일이죠?”
   그가 다시 물었다.
   “상자 때문에요.”
   “상자요?”
   “그러니까 이 상자를 부산에 있는 고객한테 전해줘야 하는데, 유스켄지 고스켄지, 내 고객은 아니고 상사의 고객이요, 아니, 상사도 아니지, 맞아, 상사가 아니야. 근데 대표가 시켰으니까, 시켰다고 하니까, 고객한테 이 상자를 전해주려고 기차를 탔다가 다 두고 내린 거예요. 가방이랑 코트, 휴대전화와 우산도요.”
   나도 내가 엉뚱한 사람에게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말을 도저히 제어할 수 없었다.
   일단, 말한 뒤 남자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내게 내밀었고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여주기도 했다.
   “일단 회사에 전화해보시겠어요?”
   남자가 내미는 휴대전화 화면엔 번호판이 떠 있었다. 상자를 옆구리에 끼우고는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받았다. 번호판 위에서 내 오른손 검지가 빙빙 돌았다. 믿기지 않게도 3년 가까이 사용해온 번호가, 그 여덟 자리 숫자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번호가…… 회사 번호가 생각나지 않아요.”
   “그럼 가족은요? 부모님이나 형제 말이에요.”
   남자의 입을 통해 듣는 가족이니 부모, 형제 같은 단어들은 내가 고아라는 걸 새삼스레 상기시켰다. 두 달 전 나는, 유일한 가족이었던 어머니의 상을 치렀다.
   “아주 방법이 없진 않아요.”
   남자가 독백을 하는 배우처럼 말했다. 그의 호의가, 그것이 없다면 나는 완전히 고립될 처지인데도, 어째서 연출된 듯 과장되어 보이는지 나로서도 알 수 없었다.
   “여기 대전역 후문 쪽 쇼핑몰 앞에서 정오에 출발하는 관광버스가 있는데, 부산에 있는 공단까지 가죠. 휴가를 마친 중국인 노동자들이 공단으로 돌아갈 때 이용합니다. 실은 제가 그 공단을 관리하는 회사에서 일하거든요.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그 버스를 타고 공단까지 간 뒤에 거기서 일하는 사람한테 부산역까지 데려다달라고 도움을 요청하세요. 부산역에는 제가 전화를 걸어 우리 좌석에서 발견된 가방과 코트를 맡아달라고 하겠습니다.”
   남자는 곧 내게 명함 하나를 건넸다. 쇼핑몰 앞에서 출발하는 부산행 버스를 탈 때 기사에게 신분증이나 사원증 대신 이 명함을 보여주라고, 자신이 버스 회사와 기사에게 내 사정을 이야기해놓겠다고 남자가 이어 말했다. 나는 얼결에 명함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함과 상자, 이제 내가 가진 건 그뿐이었다.

*

   어머니의 삼일장을 치른 뒤 나흘 동안 내리 잠만 잤다. 어제와 오늘이, 아침과 저녁과 밤이 구분되지 않았다. 시간은 그저 하나의 긴 연체동물처럼 내 잠의 둘레를 에두르며 지나갔다. 정신이 명료해지는 순간은 악몽에서 깰 때뿐이었다. 악몽이라고는 해도 특별히 가혹한 풍경이 펼쳐졌던 건 아니다. 낯선 도시에서 엄마를 찾아다니다가 어느 순간 엄마가 죽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그 후로도 지금껏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레퍼토리였다. 악몽에서 깰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 그때마다 허기 때문에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 오히려 실제적인 가혹함이었다. 배를 채우고 나면 고아의 삶에서나 가능한 상황들이 하나하나 그려지곤 했다. 연고 없는 도시에 혼자 내던져진대도 돈을 들고 달려오거나 내 무사를 걱정해주는 사람은 없으리란 것도 그때 내가 그려본 상황들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대전역을 빠져나와 쇼핑몰을 찾아갔다. 쓰레기통에서 주운 일회용 비닐우산은 자꾸만 뒤집어져서 비를 막아주는 데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외투도 걸치지 않은 채 여기저기 찢긴 우산을 들고 걸어가는 나를 사람들이 배타적인 시선으로 쳐다봤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쇼핑몰 앞에는 남자의 말대로 관광버스가 서 있었고, 저마다 큰 가방 하나씩을 멘 남루한 행색의 사람들이 주변 눈치를 보며 길게 줄 서 있었다. 남자의 말을 믿고 그곳까지 갔으면서도 막상 그런 풍경을 보니 당혹스러웠다. 여기저기서 속닥대는 중국어가 들려왔다. 부산이 아니라 국경 밖의 먼 나라로 가기 위해 잠시 환승역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정오가 되자 버스 앞문이 열렸다. 줄 끝에 서 있다가 마지막으로 버스에 탑승한 나는 운전기사에게 남자가 준 명함을 보여준 뒤 이 버스가 정말로 부산으로 가는지 물었다. 버스의 정확한 종착 지점과 부산역과의 거리도 나는 알고 싶었다. 그러나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표정을 알 수 없는 기사는 어서 자리에 앉으라는 듯 손만 휘휘 내저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버스에 곧 시동이 걸렸으므로 나는 허둥대며 일단 빈자리에 앉아야 했다. 겁도 없이 아무나 막 태우라니, 지가 책임질 건가, 하는 목소리가 운전석에서 들려왔지만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차창 밖만 바라봤다. 겁이 났다. 버스에서마저 쫓겨난다면 또다시 태풍 속을 헤매고 다녀야 할 테니까. 다행히 기사는 더이상 불평하지 않았다. 버스가 출발하자 중국인들은 길에서의 조심스러웠던 모습과 상반되게도 고음의 중국어로 끊임없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워졌다가 잠잠해지고, 그러다가 고함이 오가는 상황이 반복됐다.
   쉬지 않고 달리던 버스가 멈춘 건 오후 3시 10분이었다.
   다른 중국인들과 함께 버스에서 내리자 낮은 야산 아래에 자리한 시멘트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공단이라고 해서 여기저기서 기계음이 들리고 수많은 노동자들과 운반 차량이 오가는 활기찬 곳을 상상했던 나는, 나목으로 우거진 야산과 건물들의 황폐한 외관에 주눅이 들었다. 대기는 서늘했다. 바람은 잦아들었고 비도 그쳐 있었지만 태풍이 막 지나간 탓인지 시야가 뿌옇고 탁했다. 그사이 함께 버스에서 내린 중국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놀라울 만큼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졌다. 찰캉, 찰캉, 하는 날카로운 쇳소리를 들으면서도 감히 그쪽을 쳐다보지 못한 채 나는 같은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내가 내 존재를 증명할 소지품 하나 없이 낯선 곳에 혼자 남겨졌다는 걸 인지한 건 버스마저 공단을 빠져나간 뒤였다. 그제야 나는 부산역까지 나를 데려다줄 만한 사람을 찾기 위해 가장 가까이에 있는 건물 쪽으로 다가갔지만, 조금 전의 쇳소리가 환청이 아니란 걸 증명하듯 건물 출입문엔 쇠창살이 내려와 있었고 창문은 그 안을 확인할 수 없을 만큼 까맸다. 다른 건물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혼란스러웠다. 여기는 어디일까. 어쩌면 이곳은 공단이 아니라 서류나 신분증을 위조하는 곳이거나 불법으로 수입한 약물 같은 것을 포장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몇시간 전의 대전역 승강장이 화질 나쁜 텔레비전 화면처럼 기계적 잡음과 함께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곳에서 나는 역무원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되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옆자리 남자의 휴대전화를 빌렸을 때는 회사 인터넷 홈페이지에 접속해보거나 전화번호 안내 서비스를 이용할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부산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그 모든 기회를 놓치고 대신 나는 생면부지의 남자가 일러준 정체불명의 버스를 탄 것이다. 결국 무사유의 선택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셈이다. 태풍 때문이야, 나는 중얼거렸다.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뿐이야,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지만 지금쯤 어느 아늑한 곳에서 따뜻한 음식을 먹고 있을 남자를 상상하자 서서히 분노가 생성됐다. 약간 맛이 간 여자 같았어요, 내가 아니었으면 지금껏 승강장에서 울고 있을 테죠, 라고 지인들에게 으스대듯 말한 뒤 벙긋벙긋 웃는 상상 속의 남자는 뜻밖에도 장 변호사를 떠올리게 했다. 따로 보면 전혀 닮지 않았는데도 내 머릿속에서 두 사람의 얼굴은 큰 오차 없이 겹쳐져갔다. 순간 욕지기가 일었다. 개새끼들, 나는 뇌까렸다. 스커트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다시 들여다보았다. 평범한 회사명과 남자의 이름만 적힌 하얀색의 단순한 명함이었다. 나는 이내 그것을 땅바닥에 버린 뒤 구두로 짓이겼다. 아직 덜 마른 옷 때문에 온몸은 서늘하게 얼어가고 있는데도 눈두덩은 자꾸만 뜨거워졌다.

*

   공단을 빠져나와 차도가 나올 것 같은 비포장도로를 따라 터덜터덜 걸었다. 장시간 걷기엔 적합하지 않은 구두 탓에 종아리가 아렸고 발가락엔 감각이 없었다. 여기저기 파인 물웅덩이에 발이 빠질 땐 구두가 벗겨지면서 올이 나간 스타킹에 흙물이 튀기도 했다. 허기와 갈증, 그리고 추위가 번갈아가며 내 감각을 지배했지만 인가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고 아주 간간이 지나가는 승용차는 내가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멈춰 서지 않았다. 언뜻 손목시계를 보니 시간은 그새 4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날짜변경선이나 시차기준선을 지나온 듯 4시 이전의 세계가 까마득했다.
   한참을 걷다가 구두 안에 찬 물을 빼내는데 해초 냄새가 훅 끼쳐왔다. 구두를 다시 꿰어 신고 발뒤꿈치를 올려 멀리 보니 수평선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차도가 아니라 해변 쪽으로 걸어온 것이다. 해변에는 휴대전화를 소지한 관광객이나 무전기를 찬 해안경계병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가능성이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넓은 모래사장이 눈앞에 나타났다. 여름엔 해수욕장으로 이용될 터였지만 늦가을의 모래사장은 잿빛이었고 텅 비어 있었다. 관광객이나 해안경계병뿐 아니라 파라솔과 튜브,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연인들의 발장난도 없었다. 대신 붉은 글씨로 ‘입수불가’라고 쓰인 팻말이 몇 개씩 세워져 있었고 컨테이너 박스로 된 간이화장실이 보였다. 화장실은 잔잔하게 찰랑이던 요의를 일깨웠다. 상자를 화장실 입구에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세면대와 거울이 있었고 그 맞은편엔 변기가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변기엔 똥과 오줌이 한데 엉켜 굳어 있었다. 구토감을 참으며 최대한 빨리 오줌을 눈 뒤 레버를 내렸지만 물은 내려가지 않았다. 세면대 수도꼭지도 고장나 있긴 마찬가지였다. 수도꼭지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고개를 든 순간, 머리칼은 잔뜩 헝클어지고 화장은 다 번진 내가 보였다. 심지어 블라우스의 단추 하나가 떨어져나간 자리로 얼핏 속옷이 보이는데도 나는 그마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에 젖어 있다가 서서히 마르면서 구겨진 옷에선 비린내가 났다. 아니, 배설물 냄새였던가. 다시 거울 속 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서울역에서 보았던 입안이 까만 여자와 큰 오차 없이 겹쳐지는 얼굴이었다.
   나는 공포에 질린 채 황급히 화장실을 뛰쳐나왔다. 발치에 상자가 걸렸다. 아침에 장에게서 받았던 그대로 테이프로 꼼꼼하게 밀봉된 3호짜리 우체국 상자였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테이핑이나 우체국 마크가 상자의 고유한 정체성은 될 수 없었다. 어쩌면 장에게서 받은 그 상자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모래사장에 주저앉은 채 상자를 가져와 테이프를 뜯어냈다.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거칠어지는 손길로 우악스럽게 뜯고 또 뜯었다. 마침내 상자가 열리면서 그 안이 드러났다.
   웃음이 났다.
   기침까지 해대며 정신없이 웃다가, 나는 다시 상자 안을 들여다봤다.
   하염없이 들여다봤다.

조해진

타인의 생애 안쪽 감각을 상상하는 게 즐거우면서도 두려운 사람. 최선의 문장을 쓰려고 애쓰고 있지만 늘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 그 두려움과 확신 없음을 안고, 그래도 씁니다, 적어도 아직은.
「상자」는 4년 전 썼던 짧은 소설인데, 〈비유〉 덕분에 마치 저만 아는 친구 한 명을 세상에 다시 한번 소개하는 것만 같아서 흐뭇하게 쑥스럽습니다. 이 소설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모두 사라져버린 사람의 이야기에 끌려서 쓰게 되었고, 결과를 장담할 수 없지만 지금은 SF 장르로 확장하려고 궁리 중이에요. 완성된 듯 미완 같은 「상자」가 읽는 분들께, 특히 2020년에 소설가로서 티켓 한 장을 끊은 전미경 작가님에게 즐거운 독서의 시간을 마련해주기를, 멀리서 마음을 보냅니다.

2020/04/28
2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