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가만히 있구려.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오.”1)



   감기는 목덜미로 온다더라 까치가 집을 짓고 있는 플라타너스 아래로 은행나무의 것으로 추정되는 마른 가지가 떨어지는 낮 한 시 반쯤 옷깃을 세워주며 네가 말해주었는데 기억한다 우리는 횡단보도 앞에서 파란 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보다 느리고 봄만큼 짧게 영상의 기온인데 감기라니 너는 걱정이 너무 많아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다음 네가 말했지 사랑해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닌데 엉뚱해 미래는 오가는 것들을 잠시 세우고 죽은 듯 조용할 거였고 그럼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을 거였고 때아닌 재채기같이 마른 가지 하나가 네 머리 위로 떨어졌다 너 대신 내가 올려다본 공중에는 가늘게 쪼개진 빛이 동그란 거처를 만들어 그늘을 품고 있었다 우리는 깔깔대며 웃었다 정말 그런 사이처럼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이야기
   ─그것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



   그래서 가만히 보고 있었는데 그것이 굴러떨어졌다 그는 놀라 깬 사람처럼 소스라치며 그것을 잡아보려했지만 너무 늦었다 그것은 깨졌고 온전히 박살나버려서 원래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는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소리를 내어 도움을 청하려다가 그만두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켜보는 사람도 없었다는 거로군’ 입장이란 얼마나 편한 것인가 돌아서기만 해도 반대편에 있을 수 있으니 ‘이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야’ 그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구둣발로 그것의 파편들을 구석으로 밀어넣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것은 없는 것이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철학의 명제처럼 근사하게 느껴져서 살짝 들뜨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것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생각은 어떤가 합리적이다 그는 구두에 묻은 것들을 발을 굴러 털어내면서 방금 일어난 일에 마침표를 찍어버렸다 그가 자리를 떠난 후에도 그의 생각은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지나가던 소년이 그의 생각을 발견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소년은 그의 생각을 조심히 들어올려 올려두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그의 생각의 주인처럼 보이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나가던 소년은 양손을 맞부딪혀 소리 내며 ‘보기 좋아’ 하고 생각했다 지나가던 소년의 생각이 소년을 따라 마저 지나간 후에도 그의 생각은 거기에 올려져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것처럼 굴러떨어져 박살나버릴 것처럼 거기에 그것이

유희경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과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공부했다. 2007년 희곡으로 2008년 시로 데뷔해 지금까지 네 권의 시집과 두 권의 산문집을 펴냈다.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고민은 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같은 곳에 닿습니다. 세상에. 언제나 고민은 나보다 앞서 그곳에 가고 나는 고민의 등 뒤를 쫓다가 어느새 고민도 가야 할 길도 잃고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찾기를 포기하고 딴짓을 하다가 하다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다시 고민을 시작하고.

2022/03/29
52호

1
에드윈 A. 애보트, 『플랫랜드』, 윤태일 옮김, 늘봄, 2009, 1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