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독백



   내가 시선을 돌리고 있을 때
   감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뼈처럼. 감자. 빛처럼. 감자.
   한 무더기 감자가 일제히 나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 김이 와서 감자 한 알을 가져갔다.
   아버지 이, 박, 최가
   내 뒤에서 자꾸만 감자를 가져가고 있었다.
   아버지 김, 이, 박, 최의 품속을
   감자는 자꾸만 파고들고 있었다.
   품속의 옅은 빛에 의존해
   감자는 자꾸만 내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을
   뒤돌아보지 않고도 알려 했다.

   나는 그래서
   아버지 김, 이, 박, 최의 품속에
   감자가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모르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는 것

   뒤돌아봤을 때 감자가 없었다,
   그런 결말은 아니길 바랐다
   그러나 더이상 나를 지켜보는 감자가 없을 때조차
   나를 지켜보는
   한 무더기의 감자가 있었다.

   아버지 김, 이, 박, 최가 내 앞에 서서,
   감자를 눈앞에 들이밀 때도
   아버지 김, 이, 박, 최는 내 뒤통수를 바라보며
   한 알씩의 감자를 품에 넣고 있었다.

   아버지 김, 이, 박, 최가
   한꺼번에 내 머리통을 부여잡고 물었다.
   “내 감자 어쨌어?”
   “내 감자는 어디로 갔지?”
   “Where’s my potato?”
   침묵.

   나도 그것이 정말로 궁금했다.
   뒤돌아보지 않고도
   뒤돌아보기 전에도
   실은 그 자리에 감자가 없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고
   변명하고 싶었다.

   뒤를 돌아봤을 때
   아버지 김, 이, 박, 최는 온데간데없었고
   감자 한 무더기만 덩그러니.
   저 많은 감자를 어떡하면 좋을까.
   그것도 나 혼자,
   나 혼자서.





   오렌지의 꿈



   조이와 하조와 나는 오렌지의 꿈속에 들어와 있었다 오렌지의 꿈속에서는 오렌지가 주인공이었다 반쯤 찌그러진 오렌지와 껍질이 다 벗겨진 오렌지와 조각 하나로만 덩그러니 남은 오렌지가 서로를 감각하고 있었고 조이와 하조와 나는 그사이에 사물로 배치되어 있었다 마치 조이와 하조와 나의 꿈속에서 오렌지들이 사물로 배치되듯이

   오렌지의 꿈 밖으로 나가는 일은 요원했다 조이와 하조와 나는 오렌지가 꿈을 꿀 리 없으나 어쩌다 보니 우리가 오렌지의 꿈속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혹은 처음 이 세상에 발을 디딜 때부터 그 세상이란 오렌지의 꿈속이었고, 꿈을 꿀 리 없는 오렌지의 꿈속이기 때문에 늘 꿈을 꾸는 조이나 하조나 나의 꿈속으로부터 도망치는 일보다 오렌지의 꿈속으로부터 도망치는 일이 더 어렵다는 식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조각만 덩그러니 남은 오렌지는 추위에 떨고 있었는데 우리는 우리의 의지대로 그 오렌지 곁에 갈 수가 없었다 우리의 의지란 사실상 오렌지의 무의식이었으므로, 앞서 나눈 이야기 또한 오렌지의 무의식 속에서 벌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오렌지는 자신의 무의식을 통해, 이 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꿈 밖으로 빠져나가기 어렵다는 식의 대화를 하고 옹기종기 모여 서서, 추위에 떨고 있는 한 조각 오렌지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도록 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한 조각의 오렌지는 떨고 있었고 그 또한 오렌지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이미지였으며 한 조각의 오렌지가 느끼는 추위를, 껍질이 다 벗겨진 오렌지나 반쯤 찌그러진 오렌지나 조이, 하조, 혹은 내가 느끼지 못하는 것 또한 오렌지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기상(氣象) 이었다

   우리는 영영 오렌지의 무의식이 흘러가는 대로만 움직이고 말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영영 이 꿈속을 탈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했는데 그런 두려움 또한 오렌지의 무의식 속에서 생성되는 감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 이 꿈속에서 오렌지의 무의식이 아닌, 조이와 하조와 나의 독자적인 자아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조이는 던졌는데 그 또한 오렌지의 무의식이 가지는 의문, 무의식을 빠져나가는 무의식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지나지 않았다

   조이와 하조와 나는 오렌지의 꿈속에서, 얼결에 손에 쥐게 된 오렌지를 까먹고 있었다 조이와 하조와 내가 오렌지의 꿈속을 빠져나가는 일보다, 우리의 손에 들린 이 오렌지가, 우리가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어대는 이 오렌지 조각들이, 사방에 널브러진 이 오렌지 껍질 조각들이 오렌지의 꿈속을 빠져나가는 일이 더 쉬워 보이기까지 했다

   마지막 한 조각의 오렌지까지 다 먹고 나자 잠이 몰려왔다 조이도, 하조도, 나도 오렌지가 나뒹구는 초록 들판 위에 누워 몰려오는 잠을 몰려오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받아들임 또한 오렌지의 무의식이 피워낸 것이겠지만 잠을 받아들이는 이 나태함, 나른함만이 오렌지의 무의식에서 단 몇 밀리라도 떨어진 채 피어나는, 조이와 하조와 나에게서 독자적으로 피어나는, 간신히 틈을 벌리는, 의식은 아닐까 하고
   오렌지의 무의식이 시키는 것과 같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서서히 잠에 들고 있었다

박승열

인간들이 싫어요, 퇴근하고 싶어요, 나는 사물을 사랑합니다, 죽을 때까지 사물만 사랑하다가 나도 사물이 되고 싶습니다.

2021/08/31
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