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수가 있나. 진은 비릿한 냄새가 나는 손님의 입속에 오른팔을 집어넣었다. 침을 한 번 삼켰다. 그리고 깊이, 더 깊이 손님의 몸속으로 팔을 넣었다. 기름진 동굴.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접착 마스크가 흔들렸다. 구멍에 알맞게 제작된 팔은 뻑뻑한 식도의 핏줄을 통과했다. 그리고 손님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이것은 진이 일할 때마다 갖게 된 그만의 습관이다. 심장은 적당한 속도로 뛰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그것을 터트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가 말했던 것을 생각해냈다. 그럴 수가 있나. 복부에 도달해서야 처리해야 할 기름반1)이 손에 닿았다. 팔을 통해 신경이 전달됐다. 미끄러웠다. 기름반을 조심스럽게 감싸 동그란 공처럼 만들었다. 기름에 둘러싸인 사념들은 거세게 저항할 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룸러2)가 하고자 하는 대로 인도된다. 진은 이 모든 것을 손의 감촉으로만 실행에 옮겼다. 갑자기 손님의 몸이 움직였다. 즉시 얼굴을 확인했다. 다행히 눈은 감겨 있었다. 식겁했군. 진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기름반을 끌어올렸다. 그는 사실 집중하면서도 집중하지 않았다. 기름반을 놓친다면 어떻게 될까. 며칠 전 기름반을 놓쳐 파직당한 후배를 생각했다. 녀석은 실직자가 돼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긴장하게 된다. 진은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오늘 급식소에 어떤 메뉴가 나온다고 했더라. 보나마나 덜 익은 쌀밥이 나오겠지. 몇 알이나 덜 익었을까. 한 알. 두 알. 세 알. 네 알. 그러면서 그는 요즘 들어 생긴 희한한 강박을 떠올렸다. 그는 수를 세고 있었다. 무엇이든 보이는 대로 수를 셌다. 거리의 전등, 남은 담배, 방 안의 곰팡이. 심지어 잠자리에 누워서까지 허공에 의미를 부여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을 속으로 외쳤다. 숫자를 셀수록 그는 집중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런 강박이 왜 생겼는지는 진 자신도 알지 못했다. 어느 날 문득 그렇게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뿐이다. 갑자기 손님이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진은 전신에 힘을 주고 기름반을 놓치지 않았다. 식도 쪽으로 도달하자, 구멍이 좁아졌다. 핏줄들이 엉켜 있어 꺼내기 쉽지 않았다. 이마에 맺힌 땀이 눈으로 떨어졌다. 순간 목이 가려웠다. 가렵다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긁고 싶다는 충동은 확고해졌다. 손님의 혀 위로 기름반의 모습이 조금씩 보였다. 진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기름반을 재빠르게 꺼내 옆에 둔 철제박스로 옮겼다. 바닥에는 기름이 떨어져 있었다. 기름반으로 인해 룸3)안의 공기마저 탁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진은 매번 보는 기름반임에도 불구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철제박스를 닫았다. 손님의 몸은 기름반을 꺼내고 나니 전보다 작아진 것 같았다. 아니, 축소되었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손님의 육체를 향해 간단히 목례하고 뒤 돌았다. 룸 한쪽에 있는 싱크대로 가 물을 틀고 의수(義手)를 소독했다. 뜨거운 물로 의수를 씻기며, 왼손으로 목덜미를 긁었다. 소독이 끝나자 싱크대 옆에 있는 밀대걸레로 바닥의 기름을 닦았다. 배가 고팠지만 그보다 다른 이유로 서둘러야 했다. 손님이 일어날 시간이다. 걸레질을 하고 나니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다. 몸에 뚫린 모든 구멍에서 땀이 나는 것 같았다. 청소를 끝내고 가방을 맸다. 허공에 기름반을 꺼낸 오른팔을 한번 휘둘러봤다. 변함없는 자신의 팔이었다. 철제박스를 들고 입구 쪽으로 갔다. 그는 마지막으로 방향제를 뿌리고, 환풍기를 켰다. 그리고 불을 껐다.
   룸에서 나오자마자 감시자가 진 앞을 가로막았다. 잘 끝났나요?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시자는 깨끗한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가 짓고 있는 미소와 퍽 잘 어울렸다. 수고하셨어요. 감시자는 룸 안으로 들어갔다. 진은 말없이 복도 끝에 있는 소각장으로 향했다.
   소각장에 들어가기 전부터 강한 냄새가 진의 후각을 지배했다. 그는 룸과 연결된 소각장 앞에 섰다. 이미 많은 룸러들이 기름반을 태우기 위해 그곳에 들어서고 있었다. 역한 냄새가 났다. 서너 명의 초짜 룸러들은 철제박스를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성거렸다. 진은 조심히 철제박스를 열었다. 기름 속 사념이 그를 잡아 삼킬 듯 쏘아보고 있었다. 진은 이 순간이 가장 두려웠다. 까딱 잘못했다간 사념에게 먹힐 수도 있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각장 중앙에는 불이 나고 있었다. 이 공간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불이었다. 이곳에 기름반을 던지면 오늘 일이 끝난다. 불은 다양한 색깔을 띠며 일렁거렸다. 진은 그것을 쳐다봤다. 노랑, 주황,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그는 불이 내는 색을 세기 시작했다. 만일 동료 사도(使徒)가 그를 툭 치고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상자 안에 있던 사념이 진을 삼켜버렸을지도 모른다. 앞서간 사도는 철제박스를 안고 달려가 불길에 휙 던져버리고 도망치듯 소각장을 빠져나갔다. 불을 삼킨 사념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진은 자신의 턱 밑까지 다다른 기름반을 움켜잡았다. 그것은 입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진은 차분히 거머리 같은 기름반을 뜯어내 동그랗게 말아 다시 철제박스에 넣었다. 그제야 그는 배고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천히 불 앞으로 다가갔다. 불은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만큼 가까워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몇 걸음만 더 내딛으면, 정말 몇 걸음만 내딛으면 그는 영원한 불이 될 수 있었다. 그는 불이 꺼진 것을 여태 본 적이 없다. 불은 수많은 사념들로 이뤄졌고, 들어가기만 하면 생각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할 수 있다. 진은 충분히 불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오히려 너무 간단한 일이라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배가 고팠다. 철제박스에 담긴 기름반을 불 속에 던졌다. 그리고 뒤돌아 소각장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불은 룸러들이 던져주는 사념들을 삼키며, 수척한 진의 뒷모습을 좇았다.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진은 그렇게 생각한 뒤 젓가락을 들었다. 덜 익은 쌀을 한 알씩 집어 세어가며 먹었다. 사백이십오알, 사백이십육알. 그는 이 사이에 쌀알 하나를 놓고 이빨로 깼다. 그럴 때마다 톡톡거리는 소리가 났다. 입 안의 쌀알들은 한 알씩 잘게 부서져 식도로 떨어졌다. 사백삽십.
   진.
   진은 그 목소리 때문에 더이상 숫자를 세지 못하고, 쌀알을 삼켜버렸다. 빨간 볼에 튼실한 여인이 식탁 앞에서 그를 내려다봤다. 진은 여인을 한 번 쳐다보고는 숟가락을 들어 쌀밥을 마구 퍼먹기 시작했다. 여인은 진 앞에 앉아 턱을 괴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진은 화가 났다. 생각의 흐름에 방해받는 것만큼 불쾌한 일도 또 없을 것이다. 행여나 방해한 이가 자신의 아내일지라도 말이다. 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진, 이라고 다시 불렀는데 그는 대답하지 않고 주방으로 가버렸다.
   진은 급식소 마당에 앉았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옷만 갈아입고 바로 급식소로 왔더니 몸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담배에서까지 기름 맛이 나는 것 같았다. 밖은 여전히 더웠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고, 앉아만 있어도 온몸에 땀이 났다. 사람들은 이번 더위가 백년 만에 찾아온 무더위라고 말했다. 일사병으로 사망하는 사람들도 몇 있었고, 에어컨 없이는 도무지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진은 언제부터, 도대체 언제부터 여름이 시작됐는지 알지 못했다. 그냥 살다보니 무수히 많은 날 중 어느 날부터 더워졌고 그게 시작이었다. 정부에서는 태양의 세기가 얼마나 강한지 알아보기 위해 시체를 그대로 땡볕에 방치했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실험을 자주 해왔다. 그들이 하는 일들은 당연한 일들이었고, 당연하지 않다는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정부가 한 행동에 있어 그러나, 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진은 그게 왜 옳지 않은지 궁금했지만 더이상 궁금해 하지 않게 하기 위해 남은 담배의 수를 셌다. 한 대, 두 대, 세 대. 급식소 밑에 있는 A구역의 집들도 세기 시작했다. 처마가 있는 집. 검은 벽돌로 된 집. 굴뚝이 있는 집. 마른나무가 있는 집. 이마에서 땀이 떨어졌다. 살과 살이 겹쳐지는 부분들은 모두 축축했다.
   진.
   여인의 목소리였다. 진은 답하기로 했다. 왜. 그가 답하며 뒤돌아봤다. 여인은 진이 대답할 줄 몰랐는지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진은 이해 할 수 없었다. 주위에선 파리가 날아다녔다. 그는 일어나 여인 앞에 섰다. 여인의 키가 자신보다 컸기 때문에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여인의 눈물이 진의 정수리로 툭툭 떨어졌다. 그는 왼손을 펴서 그녀의 등을 두들겨줬다. 그러면서 여인의 원피스에 그려진 물방울의 수를 세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를 가져요.
   여인은 한참 울다가 훌쩍거리며 말했다. 알겠다고 말하고는 걷기 시작했다. 어디 가요. 여인이 물었다. 진은 답하지 않고 땅만 보며 걸었다. 어떤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여인과 함께 있는 건 룸 안에 들어가 있는 일과 같았다. 그녀는 계속 어디 가냐,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거냐, 오늘 일이 끝났는데 도대체 어디 가냐 같은 말들을 했는데, 결국 같은 말들을 반복해서 해댄 것이다. 진은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여인이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았다면, 곧장 집에 들어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난 뒤 여인 옆에 앉아 있었을 수도 있었다. 진은 A구역에 발을 내딛었다. 땀은 바닥으로 쉬지 않고 떨어졌다. A구역은 분주했지만 눈에 띄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분주하다는 말을 쓰는 것이 올바른가. 진은 생각했다. 그가 분주하다고 느낀 이유는 집들마다 문 앞에 놓인 짐들 때문이었다. 모두 이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얼마 전, 정부는 A구역을 재개발할 것이라고 공포했다. 그 말에 A구역 사람들은 일정량의 사례금을 받고 이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사를 해야만 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이곳에 새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여인은 재개발에 대해 마침 근처에 마트가 없어 불편했는데, 이제 그곳에 대형 마트가 생길 거라며, 잘 됐다고 박수치며 좋아했다. 진은 당황했고, 사실 무엇에 당황했는지 그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진은 어느 집 앞에 멈춰 짐의 개수를 셌다. 그는 짐을 세다가 하모니카를 발견했다. 하모니카를 썩 잘 불지는 못했지만 가지고 싶었다. 하모니카 옆에는 한 명의 소녀가 하나의 짐처럼 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깜박거렸다. 얼굴이 그을려 있었다. 진은 무슨 말이라도 건네야 할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녀만 없었더라면 하모니카를 들고 도망쳤을 것이다. 진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소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태양을 올려다봤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정신이 몽롱해졌다.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치고 뛰어갔다. 사도였다. 사도는 왼손에 하모니카를 쥐고 있었다. 진은 멀어지는 그에게 인사하려고 했는데, 인사도 하기 전에 그는 종이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가버렸다. 진은 그것을 주워 펼쳤다가 확인하고는 잽싸게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뒤돌아보니 그을린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 한 걸음 내딛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이 구역은 곧 텅 비고 말 것이다. 소녀도 떠나겠지. 진은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벽을 짚으며 천천히 걸었다.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딱딱한 벽은 뜨거웠고, 조금만 힘을 주면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그보다 태양은 기름보다 질겼다. 태양은 기름보다 질기다. 태양은 기름보다 질기고 말았다. 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급식소 옆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로 걸음을 옮겼다. 과연 태양은 기름보다 질긴가.

    단순을 늘 축복으로 여기자.
   사도가 떨어트린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진은 목을 긁으며 혹시 자신이 인지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소리내어 읽었다. 단순을 늘 축복으로 여기자. 얼마나 더 단순해지라는 말인가. 사도의 쪽지에 대해 더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이 생각하고 있는 이유는 샤워를 마치고 난 뒤 딱히 할일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할일이 없어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사도는 진과 어릴 적부터 같이 지내온 둘도 없는 친구다. 그들은 모두 팔이 없는 기형아로 태어나, 이미 어릴 적부터 정부 통제 아래 룸러로 키워졌다. 사도는 진보다 늦게 룸러 시험에 합격했다. 진과 같이 시험을 봤지만, 녀석은 세 번이나 낙방했다. 그는 늘 실기 시험에서 떨어졌다. 떨어질 때마다 진을 찾아와선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고 물었다. 이번엔 왜 떨어졌나. 그게 말이야, 기름반을 꺼낼 수는 있겠는데 그걸 내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무서워져. 사념이 나를 삼켜버릴 것 같아. 모조품인데도 그래? 가짜잖아. 응. 그럼 기름반을 쳐다보지 마. 뭐라고? 기름반을 꺼내면 즉시 눈을 감고, 철제박스에 넣고 닫아버리는 거야. 그리고 눈을 떠. 아, 그렇게 좋은 방법이 있었군. 고맙네, 자네. 진은 방긋 웃고 있는 사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사도는 다음 시험에서 합격했고, 다시 진을 찾았다. 자네, 첫 손님을 맞이할 때 어땠는가. 무섭지는 않던가. 정말 모조품과 비슷한 느낌이던가. 혹시 실수를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대로 끝나는 건가. 인턴생활은 얼마나 해야 하는 건가. 미안하네. 내가 걱정이 많은 건 자네도 알지 않나. 진은 사도의 질문에 모두 답해줬고, 시험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했다.
   진은 창밖을 내다보며 담배를 태우기 위해 주머니를 뒤졌다. 몸에 묻은 기름을 비누로 깨끗이 닦아냈지만, 아직도 어디엔가 미끈한 감촉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창문 밖에는 아까 그가 걸었던 A구역이 있었다.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저녁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열기가 가득해 보였다. 진은 괜히 리모컨으로 에어컨 온도를 더 내리고, 밖의 별다를 바 없는 풍경을 별 생각 없이 쳐다보려고 노력했다.
   여인은 물컵을 가지고 들어왔다. 진은 그녀가 들어오기 전부터 쿵쿵거리는 발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진의 책상에 컵을 올려놨다. 여인은 입을 쭉 내밀고는, 불만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은 머리가 조여왔다. 여인이 신고 있는 분홍색 슬리퍼와 컵을 내려놓을 때 팔에 보인 작은 상흔, 군살을 가리기 위해 입은 물방울 원피스, 그것들이 그를 조여왔다. 여인은 큰 입으로 말했다.
   진.
   응.
   물 마셔요. 아이를 갖는 일은 다음에 생각해봐요.
   그래.
   여인은 진이 물을 마시지 않으면 마실 때까지 있을 것 같은 기세로 가만히 서 있었다. 진은 고맙다고 말하며, 컵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물은 식도를 타고 내려와 자신의 기름반에 부어졌다. 여인은 싱긋 웃더니 빈 컵을 가지고 진의 방을 나갔다. 쉬어요. 만일 진은 여인에게 선택되지 않았더라면, 한 여름에 이런 아파트에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지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진은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여인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 또한 알면서도 이상하게 여인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진은 침대에 눕기로 했다. 생각을 많이 한 탓이다. 방에서만큼은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가 지금 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조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이상하게 주위의 모든 것이 신경 쓰였다. 거실에서 여인이 과자 봉지를 트는 소리. 에어컨이 만드는 진공 바람. 밖에서 누군가 지르는 괴성. 기름반이 물을 소화하는 소리. 딸각거리는 의수. 진, 그가 내는 신음소리. 가려운 등. 긁으면 다른 부분까지 가려운 팔과 허리와, 얼굴. 팔꿈치에 묻어 있는 기름. 진은 최대한 피의 흐름을 의식하려고 했다. 생각할수록 생각의 중심에 있는 것은 소각장에서 봤던 사념으로 뭉친 불이었다. 진은 자신이 언젠간 그 불에 뛰어들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육체가 더이상 쓸모없어질 때 반드시 불로 뛰어들 것이다. 일단, 여기서 중단해야 할 것임을 깨달았다. 이러다가 기름반은 붉은 혀를 날름거리는 뱀처럼 그의 머리로 올라와 사고를 붕괴시킬 것이다.

    사도는 노크도 하지 않고 방문을 열었다. 매번 방문을 열 때는 노크를 하라고 당부했는데도 불구하고 지키지 않는 사도를 생각하며,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사도는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웃으며 진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사도는 앉아서 한동안 말없이 진을 바라봤는데, 진은 부담스러워져서 먼저 입을 뗐다. 자네가 하모니카를 훔쳐 달아나는 걸 봤어. 진은 말했다. 그런가. 사도는 머쓱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는 다시 말하지 않았다. 진은 그가 찾아온 이유를 말하고 빨리 나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도는 여전히 말없이 진을 애틋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진과 사도는 칠 분 삼십이 초를 쳐다보고 있었다. 진은 정확히 셌다. 사도의 안경은 미세한 흠집이 나 있었다. 더불어 땀냄새와 향수가 섞여 악취를 풍겼다. 진은 견뎠다. 밖에서 괴성이 들리자, 그는 사도의 눈을 피했다. 그제야 사도는 진 옆에 달라붙어 조용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게 말이야, 라고 사도 특유의 추임새를 덧붙이면서. 철로 된 의수가 삐걱거렸다.
   정부에서 자네에게 기름반 청소를 하라는 권고문이 떨어졌네. 자네 청소를 안 한지 꽤 됐더군. 그런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놀라지 말게나. 누가 자네의 기름반을 청소하는 줄 아나? 귀를 이리 와서 좀 대게. 바로 나라네. 내가 자네 기름반을 청소하게 됐어. 여길 봐. 내가 어제 정부에서 받은 청소해야 할 손님들 목록인데, 자네 이름이 있어. 정말 놀라운 일 아닌가. 내가 자네의 몸을 청소하게 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정부에서 자네와 내가 절친한 사이인 걸 알고 맡긴 건가. 아무튼 자네는 어떤가. 나에게 청소 받게 되는 소감이.
   어떠냐고?
   진은 그렇게 말하기 전에, 몇 시간 전 A구역에서 떨어트린 종이에 대해 물었다. 그게 뭐지? 진은 책상으로 가서 구겨진 종이를 보여줬다. 사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종이는 난생처음 본다는 표정으로 이게 도대체 뭐냐고 물었다. 자네 주머니에서 떨어졌어. 나는 주머니에 이런 걸 넣은 적이 없어. 알았네. 진은 종이를 휴지통에 던졌다. 사도는 어쨌든 일주일 뒤에 시간 맞춰서 오라며, 이번에도 청소를 미루면 큰일 난다고까지 말했다. 진은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곧이어 여인이 쟁반에 컵 두 개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사도는 그녀가 가져온 물을 마시고는 여인과 대화를 나눴다. 자신이 진의 기름반 청소를 맡게 됐다고, 그와는 별개로 요즘 들어 얼굴이 핼쑥해진 것 같다고 능청스럽게 말을 해댔다. 그의 말에 여인은 호호 거리면서 답했다. 사도는 진의 어깨를 괜히 툭 한 번 치고는 윙크했다. 그러더니 시계를 보고 이제 가야겠다고 말했다. 진은 잘 가게, 라고 짧게 말했지만, 여인은 같이 급식소에서 식사를 하자는 둥, 청소를 잘 해주시라는 둥, 종종 와서 남편의 말상대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요즘 남편이 우울해하는 것 같다며,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다며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내뱉었다. 사도는 밝게 웃고는 알겠으니 다음에, 다음에 라고 말하고는 방을 떠났다.

    진은 생각했다. 나는 불만이 있는가. 불만이 있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얼마나 많은 불만이 있는지 세어볼까. 막상 세어보려고 하니 불만이 생각나지 않았다. 불만은 일상에 잠재되어 있을 수도 있다. 일상을 살펴야 한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의수를 확인하고, 찰칵거리는 소리에 만족감을 느낀다. 여인과 함께 급식소에 가서 밥을 먹은 뒤 담배를 태운다. 아침 아홉시가 되면 조회에 참석한다. 조회의 내용을 들으며 참석한 사람들의 수를 센다. 누가 빠졌는지 생각한다. 그리고 일을 한다. 손님들의 기름반을 청소한다. 일은 끊이지 않는다. 소각장에서 기름반을 던진다. 옷을 갈아입고 급식소를 찾는다. 밥을 먹는다. 담배를 태운다. 진은 애초부터 불만이 없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려야 했다. 불만이 없다. 나는 불만이 없다. 불만이 있을 수가 없다. 그는 손님의 핏줄이 단단하고 튼튼했기 때문에 생각의 흐름을 잠시 멈추고 다시 일에 집중해야 했다. 종종 볼 수 있는 까다로운 케이스였다. 식도의 크기에 맞게 제작된 의수는 심장에 닿았다. 진은 심장을 한 번 쥐었다가 놨다. 그리고 더 밑으로 내려갔다. 신경은 기름반을 읽어냈다. 진은 처음 시험에 합격했을 때를 떠올렸다. 룸러가 되면 조심해서 행동해야 해요. 알겠죠? 신경의수를 장착해주며 의사는 말했었다. 네. 진은 밝게 웃었다. 직업을 가졌다는 묘한 긴장감과 함께. 이후로 그렇게까지 밝게 웃은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의수로 기름반을 동그랗게 모아 감쌌다. 심장과 폐를 통과해 집중해서 기름반을 꺼냈다. 진은 철제박스에 그것을 넣고 일을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건 죄를 짓는 일과 같다, 라고 생각하면서 밀대로 바닥을 닦았지만 생각은 끝맺어지지 않았다.
   감시자는 수고했다고 말하며 진이 나왔던 룸 안으로 들어갔다. 진은 고개를 숙이고 소각장으로 향했다. 룸 너머로 손님들의 잠꼬대가 들렸다. 내일이면 사도에게 자신의 기름반을 청소 받아야 한다. 진은 청소 받고 난 뒤에 상쾌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늘 미루고 또 미뤄, 권고문이 날아온 후에서야 청소를 받았다. 청소를 받으면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 같기도 했다. 하고 있던 생각들이 깨끗이 사라졌다. 사도를 믿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번에 청소를 받으면 요즘 그가 즐겨 하고 있는 수를 세는 일도 잊어버릴 것 같았다. 그는 소각장에 들어가 멍하니 서 있었다. 불은 어제와 똑같은 세기와 색깔로 일렁거렸다. 진은 그래도 청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하는 거니까. 그래도, 그래도. 그는 철제박스를 열어 손님의 기름반을 의수로 움켜잡았다. 축축한 촉감은 변함없었다. 언제든 삼켜질 것 같은 느낌도. 그는 갑자기 생각난 듯, 불 속으로 주저 없이 걸어 들어갔다. 몸의 일부가 타는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뜨겁기보다 춥고 차가웠다. 어디서도 맡을 수 없는 지독한 냄새가 났다. 불덩이에 머리카락이 약간 탔다. 진은 놀라 주춤했다. 불을 바라봤다. 그는 자신이 망설이고 있다고 생각을 해버렸다. 그렇게 생각을 해버리자 뒤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사도가 서 있었다. 자네 뭐하는가! 그가 소리쳤다. 진은 놀라 본능적으로 기름반을 던지고 불 속을 빠져나왔다. 뭐야, 자네. 사도가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네. 진은 그렇게 말하고 미련 없이 소각장을 떠났다.

    청소를 받기 전, 진은 여인과 식사를 했다. 여인은 웃으면서 내일 청소가 끝나면 어디 좋은 곳으로 가서 휴가를 즐기고 오자고 말했다. 맛있는 것도 먹고 싶어요.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인의 얼굴에 묻은 밥풀을 쳐다봤다. 네 개의 밥풀이 그녀의 볼과 입가에 묻어 있었다. 진은 자꾸 신경 쓰였다. 어떻게 하면 저곳에 밥풀이 묻을 수 있을까. 일부러 묻힌 건 아닐까. 뭘 그렇게 봐요. 쑥스럽게. 여인이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진은 더 생각하고 싶었다. 여인은 일부러 밥풀을 얼굴에 묻히고 내가 떼어주길 바라는 거야. 내가 밥풀을 떼면 어머, 하고 말하겠지. 고맙다고 말하면서 내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마음대로 단정 짓겠지.
   진.
   응?
   혹시, 지금 생각해요?
   아니.
   진은 당황했다. 동시에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의수를 들어 여인의 얼굴에 묻은 밥풀을 하나씩 떼어줬다.
   밥풀이 묻었어.
   그렇게 말하며 그는 억지로 웃었는데, 여인은 정말 뭐에요, 라고 말하면서 급식소 밖으로 나가버렸다. 진은 급식소에 홀로 남겨졌다. 그는 갑자기 편안함을 느꼈다. 젓가락을 들어 익지 않은 쌀밥만 골라 세어가며 천천히 먹었다. 사백 알까지 셌을 때까지도 여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더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여인과 자신의 식판을 정리했다.
   식판을 닦고 밖으로 나오자 여인이 서 있었다. 진은 여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려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여인은 진 옆으로 와서 팔짱을 꼈다.
   같이 가요.
   어디를?
   청소 받으러 가는 거 아니에요?
   맞아.
   같이 가요. 제가 배웅할게요.
   그러지 뭐.
   진은 여인과 함께 룸이 있는 건물로 걸어갔다. 여인은 진의 팔짱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꽉 쥐고 있었다. 그녀는 밖이 더워서 못 다니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더워? 네. 여인은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진이 보니, 여인의 등에 동그란 땀자국이 나 있었다. 룸으로 가는 길에 남루한 옷을 걸쳐 입고, 이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였다. 얼마 전에 만난 그을린 소녀가 그를 지나친 것 같았다. 옆에 있는 여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앞만 보고 걸었다. 그는 생각했다. 무엇을 더 느끼고 생각해야 할까. 원초적인 문제부터 생각하자. 나는 지금까지 열심히 일을 해왔다. 잘못이 없다. 한 번도 실수 한 적도 없고, 규칙대로 충실히 내 일을 이행해왔다. 그런데, 왜 죄를 짓는 기분이 드는 걸까. 생각은 저쪽에서 이쪽으로 또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정신없이 이동했다. 여인은 지하의 룸이 있는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건물 안의 계단을 가리켰다. 가요. 여인이 말했다. 응.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여인의 구두 소리가 울렸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계단의 양 옆에는 검은 돌들이 쌓여 있었다. 매일 출근하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처음 온 곳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내려갈수록 추웠다. 입에서 입김이 나올 정도였다.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갔다. 여인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속도로 계단을 밟았다. 진은 춥다고 작게 말했다. 그 말에 여인은 좋은걸요 뭐, 라고 말했다. 힘내요.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확실히 뭔가가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계단의 끝에 룸이 있었다. 여인은 룸 앞에서 등을 두들기며, 자신은 이 앞에서 기다리겠으니 잘 받고 오라고 말했다. 진은 여인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여인의 원피스에 있는 물방울들을 셌다. 땀 때문에 흐릿하게 보이는 방울들도 있었다. 그가 셀 수 있는 물방울의 수는 스물다섯 개였다. 어서 가요. 여인이 말했다. 그래. 진은 뒤돌아 룸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감시자가 보였다. 그는 앉아서 뭔가를 적고 있었다. 감시자는 작은 눈에 무테안경을 썼고,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는 진에게로 다가왔다.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진은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의수로 잡았다.
   청소 받으러 오셨죠?
   네.
   자꾸 이렇게 미루시면 안돼요. 알겠죠?
   그럼요.
   그럼 안에 들어가셔서 탈의하시고, 침대에 누워주세요.
   감시자는 방 안에 있는 룸을 가리켰다. 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룸 안으로 들어갔다. 전형적인 룸이다. 내가 매일같이 일하던 룸이다. 진은 상의를 벗어 한쪽에 있는 옷걸이에 걸어둔 후, 침대 위에 누웠다. 무영등이 너무 밝아 앞을 쳐다볼 수 없었다. 그는 모로 누워 생각했다. 곧 사도가 들어올 것이다. 사도여서가 아니라, 자신의 몸에 누군가 손을 집어넣는다는 것이 이상했다. 감시자가 들어왔다. 수면 마취를 할 겁니다. 네. 제대로 누워주세요. 그럼요. 몇 분 뒷면 잠이 드실 거예요. 네. 감시자는 진의 왼팔에 주사를 놨다. 따끔했다. 그는 주사를 맞는 순간까지도 뭔가를 생각하려고 했지만 따끔하다는 감각이 앞서 정말 ‘따끔’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감시자는 수고하시라는 말을 남기고 룸을 나갔다. 진은 이제 잠에 빠져들 것이고, 일어나면 많은 생각들은 어느 정도 정리되어 있거나, 지워져 있을 것이다. 사도는 잘하겠지. 그의 덤벙대는 성격만 주의하면, 잘할 테야. 흥분만 하지 않으면 좋겠다. 흥분만.
   진은 그럴 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더이상 사고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지독한 권태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생각을 중단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욕망, 환희, 아픔, 절망, 애증 이 모든 것들은 생각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누워 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시, 다시 차분해지기로 했다.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사도였다. 사도는 헤벌쭉 웃으며 진을 내려다봤다. 아직 마취가 덜 됐군. 사도는 그렇게 말한 뒤, 주사기를 들어 진의 팔에 놓았다. 그는 따끔했지만 따끔하지 않은 척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이제 됐나. 됐겠지. 사도의 의수가 딸깍거리는 소리를 냈다. 사도는 진의 입을 벌려, 입 안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나의 동굴 안으로, 그의 팔이 들어온다. 사도의 팔은 진의 몸 안에서 활개쳤다. 그의 심장도 잡힌 것 같았다. 진은 너무 치욕스러워서 눈을 뜨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마취가 안 된 것인지 원망스러웠다. 그때 갑자기 흐릿해지면서 뭔가 깜박거렸다. 반딧불 같았는데, 그는 빛이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그을린 소녀가 하모니카를 연주하고 있었다. 진은 소녀 옆에 앉았다. 소녀는 솜씨 좋게 연주했다. 진은 생각의 마지막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소녀의 연주를 들으며,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생각의 수를 허겁지겁 셌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생각의 생각이라고 생각하며.

    진은 잠에서 깨자마자 몸이 가려웠다. 복부 윗부분이 유난히 가려웠다. 손으로 긁어도 해소되지 않았다. 온몸을 손톱으로 벅벅 긁었지만 정확히 어느 위치가 가려운지 알 수 없었다. 한시도 가만히 앉아 있거나 서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일어나 방 안을 돌아다녔다. 침대 위로 올라가 방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아픈 것과는 별개로 가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인이 문을 열고 아침부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몸이 가려워. 긁어요. 여인이 말했다. 어디가 가려운지 모르겠어. 이런, 기름반 청소는 분명 잘 됐다고 했잖아요. 진이 괴로워하자, 여인이 다가와 그를 안았다. 걱정 말아요. 괜찮아요, 괜찮아. 응. 진은 여인의 품에 안기자 편안해졌다. 가려움도 사라졌다. 진은 여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여인은 빨리 준비하라고 말했다. 어디가? 휴가를 떠나기로 했잖아요. 그렇지. 진은 옷장을 열고, 옷을 벗었다. 여인은 앙상한 진의 알몸을 보고는 살 좀 쪄야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옷을 골라 입히기까지 했다. 이게 어울리네요. 좋아요. 갈까요. 응. 진이 말했다. 잠시만요. 화장 좀 하고 올 테니까 기다려요. 응. 진은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에어컨이 적정 온도에 맞춰 돌아가고 있었다. 밖은 아직도 더운지 햇빛이 그의 방 안으로 들어와 밝게 비춰댔다. 진은 입맛을 다셨다. 눈을 비볐다. 눈물이 났다. 그러던 중 다시 몸 안이 가렵기 시작했다. 진은 서둘러 의수를 오른팔에 꽂고, 지체 없이 자신의 입에 넣었다. 의수는 심장에 닿았고 검지를 이용해 긁었다. 역시. 진은 헛웃음이 났다. 시원했다. 기분이 좋아져서 가렵지 않은데도 계속 긁어댔다. 그때 여인이 방 안으로 들어와 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진은 입에 팔을 넣고, 심장이 가려워져서 조금 긁고 있다고 말했다. 여인은 소리를 지르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진은 마저 긁으면서, 그럴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동현

세계적인 록밴드 ‘머저리들’의 유일한 히트곡 <울라울라쇼>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믿을 수 있을 만큼 믿어라. 그래요. 저는 믿을 수 있을 만큼만 믿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2018/02/27
3호

1
생각의 배설물. 사념은 기름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것을 합쳐 기름반이라 부른다. 손님들은 여섯 달에 한 번은 룸을 찾아 의무적으로 기름반을 청소 받아야 한다. 기름반은 지름 6센티미터 정도의 크기로, 복부 전면부에 자리잡고 있다. 손길이 닿으면 언제든 변할 수 있다.
2
룸 안에서 기름반을 청소하는 사람으로 불린다. 당신들은 잘 모르겠지만, 모든 인간들은 주기적으로 룸러들에게 기름반을 청소 받아야 한다. 룸러들은 손이나 발에 이상이 있는 장애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룸러 시험에 통과하면, 신경의수(몸 안을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의수로, 촉수라고 불리기도 한다. 룸러의 신경조직과 연결되어 있음)를 착용한다. 룸러들은 정부 지시 아래에 활동한다. 보수는 꽤나 짭짤한 편. 당신들은 잘 모르겠지만.
3
룸러들이 손님의 기름반을 청소하는 공간이다. 대부분의 룸들은 지하에 위치한다. 룸 한쪽에는 소독할 수 있는 싱크대가 있으며, 중앙에는 손님이 눕는 침대가 있다. 침대 옆에는 철제박스가 배치되어 있고, 그 위에 룸러들이 작업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무영등이 켜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