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분명히 반대했다. 왕손의 이름을 개똥이라고 짓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름이 거하면 인생이 이름에 잡아먹힌다. 아내는 순우리말 이름을 고집했다. 88년, 창간 주주로서 자주민보 대신 한겨레신문에 투표했던 실력으로. 첫딸의 이름은 김보미나래. 웬만한 인생 살아서는 이름값 하기 힘든 이름이었다.
   말이 느렸기에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심각하게 여긴 건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나는 주말마다 딸에게 역사를 가르칠 생각이었다. 서로의 발이 닿을 만큼 작은 소반에 앉아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전수하는 것, 그것이 내가 꿈꿔온 부녀상(像)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함께 책을 내려다보는 상상을 하곤 했다. 책에 얼굴 그늘이 드리워지고 가마가 닿을 듯 부녀는 가깝고 열중한다. '꿇다'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꿇다는 욕심이다. '기슭'도 양보한다. 그럼, '접시'는? 접시도 넘어가자. 그럼, '노랑'은? 노랑은 안 되는데…… 딸은 역사는커녕 한글 받침도 금방 익히지 못했다. 쉬운 받침 단어를 읽는 데 육 개월이 걸렸고 초등학교 3학년까지 받아쓰기에서 받침을 노상 틀렸다. 당신은 ‘ㅔ’와 ‘ㅐ’를 합친 모음을 아는가. 나는 그 모음을 아는 부모와 모르는 부모가 있다고 생각한다. 딸은 지금껏 ‘ㅔ’도 아니고 ‘ㅐ’도 아닌 모음을 쓴다. 눈치를 살펴 냄‘새’에 붙을지 냄‘세’에 붙을지 간보기 위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딸은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노래야?’ 물어도 딸은 웃기만 했다. 자작곡은 늘어만 갔고 나는 혹시 딸애가 작곡 영재가 아닐까? 그건 공부머리랑은 또다른 거니까, 기대를 품었다. 노래의 의미를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뜩하다. 나는 딸을 키우면서 무시로 아뜩함을 겪는다.
   직관상적 기억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암기를 위한 노래'를 만들어 본 적이 없다. 아내에게 물으니 아내도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다. 약간 얼굴을 붉히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든 우리는 그런 종자가 아니다. 그런 종자. 절기를 외우기 위해 절기에 멜로디를 붙이는 종자, 연표를 외우기 위해 연표의 앞 글자만을 따 괴상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종자, 스펠링이 긴 영단어를 외우기 위해 단어에 섹슈얼한 비유를 포개야만 하는 종자, 그래야만 겨우, 외울 것들을 외울 수 있는 종자, 한마디로 머리가 나쁜 종자.
   아내는 조용한 ADHD 가능성에 대해 말했다.
   “여자애들은 수업 시간에 돌아다니질 않아서 병인지도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대. 깜찍한 얼굴로 수업 시간에 딴생각만 하는 거지.”
   우리는 식탁에 앉아 마루에서 TV를 보고 있는 딸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딸은 너무 천진해 보였다. 더 어린 애들이나 보고 웃을 만화에 여전히 웃었다.
   아동 발달 센터의 결론은 이랬다.
   “어머님, 아버님. 나래는 멍 때려서 선생님의 설명을 놓치는 게 아녜요. 설명을 못 알아들어서 멍 때리는 거예요. 둘은 완전히 다른 거예요. 하나는 치료가 되고 하나는 치료가 안 되니까요. 지능검사 한번 받아보시겠어요?"
   센터를 나오면서 아내는 분통을 터뜨렸다.
   “왜 남의 애 이름을 함부로 축약해?”
   그러곤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말했다.
   “형, 우리 어떡해?”
   사실 징후는 곳곳에 있었다. 딸은 산수를 풀 때마다 노골적으로 하품했다. 벌써 사춘기가 왔나, 기대했으나 아니었다. 슬픈 제스처. 문제를 못 푸는 것이 둔탁한 이해 때문이 아니라 맹렬한 피로 탓이라고 자신을 속이기 위한 가짜 하품. 그러나 나는 경험상 안다. 풀 수 있는 문제는 풀 수 있고, 풀 수 없는 문제는 풀 수 없다. 그건 애정 결핍, 게으른 성정, 유년기의 상처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내가 의심스럽기는 했다. 아내와 나는 같은 대학원을 나왔다. 그러나 대학은 달랐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 거다.
   “석형네 딸은 조기 졸업하고 카이스트 갈 예정이라던데……”
   언젠가 내가 운을 떼자, 아내가 한숨을 쉬었다. 나는 조심스레 덧붙였다.
   “지능은 유전 아닌가?”
   아내와 나는 공장에서 처음 만났다. 소위 말하는 ‘학출’이었다. 같은 공장에서 일했던 석형은 여공과 결혼했다. 여공의 딸이 카이스트에 가다니…… 차마 이 말은 뱉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아내가 경멸하는 얼굴로 나가버렸다.

*

   샘에게.

   샘!
   어제 할아버지랑 놀이터에서 재미나게 놀았지요? 태어나 처음으로 모래알을 쥐어보곤 푸푸 침을 흘리며 웃던 우리 샘. 그 웃음을 보는데 할아버지 마음이 환해졌어요. 드디어 내게도 봄이 왔구나, 알았어요. 할아버지가 푸르른 청년이었을 때, 마음에 봄을 담는 건 죄였답니다. 언제나 겨울, 나를 용서 못한 날이 매일이었어요. 동갑내기 학생이 죽어가던 시간에 목마레코드에서 음반이나 고르고 있던 어느 볕 좋은 봄날이, 이 할아버지가 아는 유일한 봄이었어요. 샘, 나에게 진짜 봄을 가르쳐주어 고마워요.

   곱슬머리, 검은 피부, 두툼한 입술.
   나의 사랑하는 손자, 샘.


*

   이 년 전, 보미나래의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학원을 운영하는 친구 문을 오목교의 이자카야에서 만났다. 딸의 진학 상담을 위해서였다. ‘시가’라고 적힌 다금바리 회와 사케를 시켰다.
   “나래는 명분 쪽으로 가야겠네.”
   딸에 대해 얼마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금세 문이 진단을 내렸다.
   “명분?”
   “몰라? 대가리파, 노력파, 명분파?”
   대가리와 노력에 대해서는 아예 감이 없지 않았는데 명분은 감감했다.
   딸의 성적은 듣고 난 뒤 표정 수습이 필요할 만큼 부진했다. 노력을 안 하는 것도 아니어서 ‘안 해서 그렇지 하기만 하면 곧잘 할 텐데.’ 하는 정신 승리마저 못 하게 했다. 원천봉쇄의 부진함. 조용하고, 꾸준하고, 종종 뜨개질감을 들고 종점에서부터 종점까지 버스를 타는 것 외엔 별다른 일탈도 않는 착한 딸. 그렇게 반항의 맛마저도 없는.
   “초롱은 셋 중 뭔데?"
   문은 ‘알면서 뭘 물어, 상처받고 싶어 그래?’ 하는 투로 말했다.
   “셋 다 아니지. 우리 초롱인 레벨(rebel)파지. 말을 마라. 고거 때문에 내 속이 숯덩이다.” 보미나래와 초롱은 동갑이었다. 마누라들이 임신했을 때, 문과 나는 백민투, 조민중, 이애국 같은 이름은 짓지 말자고 했다. 최악도 감당하는 아비가 되자고 했다. 자식이 보수, 우익의 젊은 기수가 되건, 서울역에서 기타를 치며 포교활동을 하는 종교인이 되건, 내 구미에 맞게 조련해 키우지 않겠다는 급진적인 양육관. 그러나 우리의 딸들은 판이하게 컸다.
   초롱은 중학교를 중퇴하고, 삭발하고, 사르트르 따위를 읽다가 최연소로 등단해 국공립 예술대학에 들어갔다. 언제나 문은 서글프게 말했다.
   “우리 딸은 중학교 중퇴자야.”
   결코 자신의 딸이 신문에 날만큼 유명하다고 미리 말하지 않았다. 반전의 낙차를 벌리려는 개수작. 그것도 모르고 ‘문의 딸이 초졸?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더니, 우리 애가 낫네.’ 하는 사람은 훗날 창자가 잘린 양 격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내가 그랬듯이.
   “그나저나 나래는 왜 그렇게 공부를 못해?”
   문이 알이 꽉 찬 시사모 배를 공격적으로 헤집으며 물었다.
   “제수씨가 고지식해서 선행 안 시켰나? 체험학습 시킨답시고 주말에 애들 고구마만 캐게 했다가 후회한 애들, 나 여럿 봤다. 그게 또 다 중금속이에요.”
   아내와 나는 주말마다 딸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대외적으로는 사교육을 지양한다고 했으나, 내가 언론 고시에 떨어지고 아내가 번듯한 외국계 인권 단체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어차피 우리도 학원 선생을 했을 터였다. 안 봐도 비디오였다. 학원 칠판 왼쪽에는 세계사, 오른쪽에는 한국사 연표를 죽죽 내려 교차시켜가며 내 인생이 어떻게 역사적, 구조적으로 망했는지 애먼 애들한테 선포하며 살았을 것이다. 문이 그랬다. 문의 대표 강사 시절 닉네임은 ‘티처 빨간줄’. 줄 친 예상 문제가 수능에 빈번히 나와서기도 했고, 기록에 빨간줄이 가 입사 길이 막혀 사교육 시장에 유폐되었다는 문 자신의 자조 섞인 농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학원을 안 보내긴 했지. 내년이면 고3인데 아주 죽을 맛이다. 인 서울은커녕……”
   “제수씬 잘 지내지?”
   본격적으로 용건을 시작하려는데 문이 안부로 치고 들어왔다. ‘시가’라고 적힌 이름 모를 회 한 접시를 더 시키며.
   “보미나래 엄마? 자알 지내지.”
   자알. 아주 자알.
   문은 자연스럽게 아내를 제수씨라고 불렀다. 부탁을 위계로 치환해내는 문의 감각은 원체 탁월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부탁을 약자 원숭이의 굴복 행위 보듯 본다. 틀린 것도 아니다. 자식의 일 앞에서 부모란 다 그렇게 되는 것이다. 엉덩이도 까고, 털 속의 통통한 이도 잡고, 자존심도 뭣도 없이.
   “너 말이 아주 묘하다. 잘이 아니라 자알?”
   “말 마. 여자들은 다 왜 그러냐?”
   “뭐 문제 있어?”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제수, 요즘 뭐 하고 사는데?”
   “일 다니고 애 키우고 그러지. 별거 없어.”
   “아니 그거 말고. 명상? 뜨개질? 필라테스? 아님, 심리 상담?”
   “아마 다 하지 싶은데.”
   사실 나는 아내가 뭘 하고 사는지 전혀 몰랐다.
   문이 식어빠진 사케를 원샷 했다. 찡그린 얼굴로 조린 문어를 집으려다 말고 짜증을 벌컥 내며 말했다.
   “지들이 언제부터 외주 줬다고.”
   “응?”
   “넌 당하고도 모르냐? 등신 새끼.”
   말없이 계속 술을 들이키던 문은, 결국 완전히 뻗어 나무로 된 사케잔을 베고 누워버렸다.
   “지들이 언제부터 정신을 외주 줬다고…… 지들이…… 언제부터…… 날 뭐로 보고. 개 같은 년들.”
   취한 문의 겨드랑이에 손을 껴 일으켜세우려는데 갑자기 문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딸!
   “딸들이 우리의 희망이다!”

   택시를 잡으려는데 문이 자꾸 엉켜왔다. 페니스가 허벅지에서 물렁대는데 슬펐다. 하지만 자식의 일 앞에서 아비는 이렇게 되는 것이다. 택시를 잡아주고, 기사에게 잘 부탁드린다며 3만원을 건네게 되는 것이다. 택시가 왔고, 나는 문이 문에 머리를 박지 않도록 조심하며 밀어넣었다. 문을 막 닫으려는데 문이 말했다.
   “암만해도.”
   “뭐?”
   나는 도로 위에 떨어진 문의 벗겨진 신발을 주워 발에 끼워넣느라 낑낑대고 있었다. 땀에 푹 젖은 양말이 축축하고 뜨끈뜨끈했다.
   “난 건 못 해.”
   겨우 신긴 신발이 또 떨어졌다.
   “자식새끼 멍청한 거, 건 못 해.”
   “그게 하고 못 하고의 문제냐……”
   나는 신발을 택시 안으로 던져넣었다.
   “다른 집도 아니고.”
   문의 몸이 뒤로 더 젖혀졌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자식이잖아.”

*

  나의 영원한 동지이자 연인, 규에게

  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니. 무슨 지력으로 사랑할 수 있니. 나를 보는 너의 눈을 경유해 나를 보고, 나를 사랑할 수 있을 뿐이잖니. 그러므로 네가 나를 제대로 봐주지 않는다면, 네 눈이 나를 초점 하지 않는다면, 네 눈이 동태 눈깔이면 나는 나를 무어로 상상하고, 무어로 존재할 수 있겠니. 네 시선, 기대, 실망 속에서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돼. 아니 그러려고 노력해. 네 바라봄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살 수조차 없어. 지금 나는 생존에 대해 말하고 있어. 네 눈이라는 내 생존의 조건에 대해.


*

   「하긴 하는 남자」는 토요일 격주로 연재된다. 서신 형식의 칼럼으로 나는 벌써 여럿에게 공개편지를 썼다. 아내에게도 썼다. 제일 낫다고 자평하는 원고다. 기사가 나온 날, 나는 기사 모양으로 신문을 접어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아내에게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신문 위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영 가방을 잔인하게 올려두었을 뿐이었다.
   나도 아내에게 찬탄을 받던 때가 있었다. 「하긴 하는 남자」도 그녀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오래전, 우리가 막 사귀기 시작했을 무렵, 아내에게 내가 왜 좋으냐고 묻자 그녀가 말했다.
   “개중 형이 하긴 하는 남자라서.”
   나는 그 말이 좋았다. 하긴 하는 남자는 당위를 내세우는 남자와 무책임한 남자 사이에 있는 남자다. 하기로 했으면 해야만 하는 고지식한 남자도 아니고, 한다고 해놓고선 안 하는 불성실한 남자도 아닌, 약간 힘을 뺀 채 나른하게 완수하는 하긴 하는 남자.
   아내는 늘 자신만의 특별한 시선으로 나를 봐주었다. 아내는 언제부터 변한 걸까. 왜 잊어버린 걸까. 남자들이 실은 약하다는 것, 목숨을 여자에게 완전히 의지하고 있다는 것, 여자가 던지는 시선, 대상화의 프레임 속에서만이 살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잠시 바람을 피웠던 것도 결국에는 생존의 조건이 채워지지 않아서였다. 고작 젖과 좆과 질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제 아내는 정말 둔하다. 어쩜 그렇게 둔할까. 한번은 내 책에 이런 짓을 한 적도 있다. 나는 책에 절대 밑줄도 안 긋고 ‘개의 귀(dog’s ear)’도 안 만드는 사람이다. 그걸 수십 년간 봐놓고도 언제부턴가 아내는 내 책에 낙서를 한다. ‘잔치’에 빨간 줄을 굵게 긋고 ‘옹립식’이라고 쓰는 식이다. 곰 같은 둔함은 동지 부인 얻었을 때 받게 되는 천형이라던데, 정말 맞는 말이다.
   더이상 마누라들은 우리를 봐주지 않는다. 정신, 자아, 때론 몸까지 모두 아웃소싱 했다. 우리는 주인 자격을 잃었다. 딸만이 우리의 희망이다. 문의 말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었다. 딸들은 추앙하든 배격하든 우리를 본다. 볼 수밖에 없다. 자식이자 주식―나는 딸의 100퍼센트 주주다―으로서의 운명이다. 하지만 나는 후일담이나 꾀죄죄하게 늘어놓으며 추앙받고 싶지 않다. 처절하게 부정되고 가열하게 척결되고 싶다.
   나는 매일 초롱의 SNS에 들어가본다. 며칠 전, 초롱은 이렇게 썼다. ‘이름 튀어봐야 뭐가 좋아? 몰카 영상 뜨면 구글서 찾기 쉽기나 하지. 자식 이름으로 운동하는 것들은 싹 다 죽어야 돼.’ 자기 언어를 가진 자식을 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아무리 뒤져봐도 보미나래의 SNS는 발견되지 않았다.
   한밤, 나는 초롱의 글을 읽으며 상상한다. 거의 육박하듯 빠르고 거칠게 공격해오는 내 딸 초롱이. 코너에 몰린 나는 기분 좋게 당혹한다. 내가 키운 거한테 내가 먹히다니. 나는 카이스트에 갈 석의 딸은 하나도 아쉽지 않다. 초롱이 나의 이상이다. 그런 애들이 있다. 새벽까지 술 먹다 동기 한 놈 집에 쳐들어가 만나게 되는 애들. 아빠 친구한테 인사해야지, 가 채 끝나기도 전에 방문을 쾅 닫으며 인사도 없이 들어가는 애들. 애비와 애비의 친구와 애비의 세대를 쌩까며 쾅 하고 후두부를 가격하는 문소리를 내곤 ‘쿨’하게 사라지는 애들. 쾅쾅. 뺨을 갈기듯 문은 내 앞에서 쾅쾅 닫히고 나는 가만히 부러워진다. 멋지지 않은가? 우리가 우리 부모에게 가하고 싶었으나 가하지 못했던 것을 우리에게 가하는 새끼를 길러낸다는 것이.
   그날, 택시에 쑤셔박히면서 문이 말했다.
   “너, 세상천지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아냐? 자식새끼 눈깔이다. 걔는 날 아주 죽일 듯이 노려본다.”
   나는 문이 미치게 부러웠다. 나도 정이 되고 싶었다. 부정당함으로써 아래 세대를 고양하는 발판으로서의 정, 그런 내 짝으로서의 딸, 내 딸의 자격, 나의 딸감.

   그러나 나의 딸은……

    보미나래는 언제나 내 입술을 뚫어지게 본다. 문답 사이에는 긴 마가 뜬다. 막막함으로 귀결되는 그 묵묵함이 나를 미치게 한다. '나래! 모르면 모른다고 말을 해! 아빠 말려 죽일 셈이야?' 그러나 딸은 절대 입을 열지 않는다. 고집스레 한 점만을 본다. 돋보기로 개미를 태워죽이듯이. 결국 내 쪽에서 자문자답하는 버릇이 생긴다. 나는 묻는 동시에 답한다. '나래! 말해봐. 을사조약이 몇 년도야. 1905년이지?' 암묵적인 오픈 북. 딸은 독순술을 하듯 빠르게 내 입술을 읽는다. 가끔, 나는 아주 빨리 말한다. 딸이 입술을 읽지 못하도록. 아둔함은 때로 사람을 가학적으로 만든다. 말이 끝나자마자 딸은 혀로 입술을 한 번 핥고는 떠듬떠듬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다문 내 입술을 애타게 바라보며 말한다.
   “천구백, 어……”

*

   버지니아에 있는 에코 공동체는 1960년대에 히피들이 세운 곳이다. 입소하면 전 재산을 공동체에 내어놓아야 하고, 두부와 해먹을 주 수입원으로 삼아 함께 숙식하며 살아간다. 공동체원은 모두 공평하게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하루 여덟 시간 일해야 하며 매일 밤, 호수에서 수영하거나 숲속 원추형 천막에서 늑대 하울링을 흉내내며 인간의 야생성을 회복하는 따위의 액티비티를 한다. 그 외에도 프로그램은 많다. 한 사람당 하나씩 자기 방이 주어지며 가족도 마찬가지다. 아이들도 여덟 살이 되면 자기 방에서 자야 한다. 혈연가족의 배타성은 공동체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인터넷과 TV 시청은 금지다. 나와 보미나래는 끈팔찌를 찬 남자에게 숙소를 안내받았다.
   딸은 한국에서 가져온 템퍼 베개를 옆구리에 끼고 내 옆에서 묵묵히 걷고 있었다. 아름다운 곳이었다. 숲이 우거졌고, 멀리 붉은 벽돌로 된 숙소가 보였다. 금발의 여자가 방에 딸린 작은 발코니에 앉아 다리를 아래로 늘어뜨린 채 천천히 흔들며 책을 읽고 있었다. 이거였구나, 그제야 감이 왔다. 인간들이 자식을 미 명문대, 아니 명문대도 됐고, 미국 대학을 보내는 이유. 딸과 캠퍼스를 고즈넉이 산책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뒷짐 지고 걷고 있긴 하지만 왠지 위축된다. 우리 세대는 리딩은 되는데 스피킹이 안되니까. 딸은 그런 위축 따윈 느끼지 않을 것이다. ‘this is me! 아빠, 여기가 내 기숙사야.’ 그런 이양이라면 얼마나 근사할까. 나는 곁눈으로 딸을 봤다. 딸은 너무 덤덤했다. 그애는 결코 긴장하는 법이 없다. 언제나 태평하고 유순하다. 수학과 영어를 못하듯 불안도 못하는 것이다. 석형의 딸은 눈썹이 없고 머리도 반절이 민둥산이다. 카이스트 진학을 축하하며 한턱내는 자리에서 석형은 가슴을 뜯으며 울었다. 아침마다 애 책상 위에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놓여 있다고 했다. 누군가 위로했다. 요즘 공부 좀 한다는 애치고 자낙스랑 졸로푸트 안 먹는 애가 어디 있어?
   그때, 갑자기 뺨에 차가운 물방울이 튀었다. 뒤돌아보는 순간, 물에 쫄딱 젖은 나체의 백인이 긴 좆을 덜렁대며 성큼성큼 뛰어갔다. 나는 순간적으로 딸을 보호하듯 끌어당겼다. 긴 좆은 우리를 지나쳐갔다. 엉덩이 사이로 귀두 끝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나무에 달린 깡통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다시 덜렁덜렁, 성큼성큼 사라졌다. 미국인들은 엘리베이터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도 하이, 하이 한다던데…… 긴 좆은 우리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우리가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나체의 미국인에게.
   하인 앞에서 옷을 스스럼없이 벗었다던 여 귀족 같은 당신의 뿌리 깊은 차별의식은 안녕하신가요?


   속으로 편지를 쓰자 화가 가라앉았다. 편지는 일종의 복수 명상이다. 어느새 긴 좆이 뭔가를 꺼낸 깡통 달린 나무에 도착했다. 키가 닿지 않아 딸의 트렁크를 딛고 올라서야 했다. 깡통 속에 손을 집어넣자 톱니처럼 까끌까끌한 감촉이 느껴졌다. 뭉텅이로 꺼내보니 콘돔이었다. 삼 일 뒤, 공동체 입구에서 딸과 헤어지면서 나는 섹스에 대해 조언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우리가 버지니아에 가게 된 건 문 때문이었다. 오목교에서의 술자리가 소득 없이 끝나고 얼마 뒤 문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가 앉자마자 말했다.
   “쇼부는 대학원에서 보자. 인문사회 계열에서 교수하고 있는 선배들이 들여보내줄 거야. 어차피 거기 다 정원미달이야. 최종 학벌은 석사로 업그레이드하면 될 테고, 문제는 학부인데…… 것도 어느 정도는 돼야 말이지. 꺼리 좀 있냐?”
   “꺼리?”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해보자고. 입학사정관제로 가보자. 그러려면 포트폴리오가 필요한데 수상 경력 같은 건 없을 테고, 우리 나래, 봉사활동은 좀 했나?”
   “애가 워낙 내성적이라 한 게 없는데……”
   “정신 차려.”
   문이 내 뺨을 살짝 쳤다.
   “스토리텔링의 와꾸가 짜져야 경기권 사회학과라도 넣어보지. 솔직한 말로다가 성적은 좆같은데 들여보내달란 건데 명분이라도 이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 인생을 날로 먹으려고 그래.”
   문이 성공 수기를 내 쪽으로 밀며 사진 하나를 손톱으로 톡톡 쳤다. 부녀가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아버지는 경찰 제복, 딸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J대 심리학과에 입학한 내신 4.4등급 A양. A양은 늦둥이로 아버지는 고위 경찰 간부이다. A양은 집에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아버지의 분노조절장애 때문이다. A양은 자신과 같은 친구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연합 동아리를 만들었다. 분노조절장애 부모를 둔 자녀들의 자조 모임이었다. 그해 보건복지부 아이디어 상을 받은 A양은 이듬해 전공 적합성을 인정받아 당당히 J대 심리학과에 입학했다.
   “학원에 들어오자마자 딱 알아봤지.”
   나는 웃고 있었다.
   “웃어?”
   “미안. 딴 생각 좀 하느라.”
   “남영동에서 보고 처음 본 거였는데도 딱 알겠더라고. 늦둥이란다. 그 인간, 저 딸 대학 보내보겠다고…… 아이고. 애비가 뭔지.”
   나는 취했는지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문은 어떤 지하 술집엔 내려가자마자 여긴 안 돼, 하며 나가버렸다. 그 자신만 아는 그곳의 냄새가 있었다. 그는 국가보안법으로 칠 년을 살았고, 원하던 삶을 살지 못했다. 그는 안보라는 국가 명분의 희생자였다. 그리고 이제 그는 명분을 통해 부활했다. 내신 5등급을 서울 소재 대학에 보내 억을 벌었다. 잠재 역량, 전공 적합성, 발전 가능성, 이유는 많았다. 그는 술값을 쏘며 말했다. “‘억대 연봉’ 할 때 상상하는 액수가 니들 위치고, 니들 수준이야. 직장 다니는 것들은 상상의 지평이 좁아터져서 도통 10억을 못 넘겨.”
   나는 경찰 제복을 입은 남자의 얼굴과 문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실실 웃었다.
   이런 결론이라니.
   “없어?”
   문이 수기를 덮으며 물었다.
   “응.”
   “하나도?”
   “하나도. 어떡하지?”
   이런 화해라니.
   “어떡하긴. 없음 하나 만들어야지.”
   대의명분이 대입명분으로 수렴되다니.

   보미나래는 자퇴하고 P대안학교에 들어갔다. 미인가 학교라 입학이 수월했고, 다행히 목표로 삼은 대학에서 P대안학교를 대안학교 전형에 포함했다. 보미나래는 포트폴리오를 위해 일 년을 휴학하고 미국 에코 공동체에서 지내기로 했다. 공동체에서의 생활을 다큐멘터리로 찍어 청소년영화제에 출품해 수상하고 경기권역 사회학과에 지원해보기로 했다. 딸이 미국에 있는 동안 나는 시민미디어센터에서 영상 연출을 배울 예정이었다. 혹시 아나? 우리 부녀가 야마가타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초청될지. 그런 생각을 했지만, 아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였다. 연출에 내 이름은 빠져있을 테니.
   버지니아로 낙점되었다. 이왕이면 뉴욕으로 보내려 했는데 한국인들이 어학연수를 목적으로 공동체에 들어가는 일이 많아 한국인은 금지라고 했다. 한 해 동안 딸은 두부와 해먹을 만들게 되었다. 영어를 못해도 되는 단순 노동이라 다행이었다. 돌아올 때, 딸이 해먹을 가져오면 서재에 매달아놓을 생각이었다. 해먹에 누워 소설을 읽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때면 나도 나 자신을 속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딸이 공부를 못한 건 그저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능의 명분으로 나는 미국도, 히피도, 에코도, 공동체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헤어지면서 문이 물었다.
   “근데 정확히 몇인데?”
   “뭐가.”
   “아이큐 말이야. 도대체 몇 나왔기에 이래?”
   나는 고민했다. 잠재 지능을 말할까? 지능검사를 했던 평가자는 인심 쓰듯 넉넉히 적어주었다. 서비스로 자두 두 알 더 챙겨주듯이. ‘아동의 잠재된 지적 능력은 현재 발휘되는 수준을 상회할 것으로 추정되며……’ 잠재가 대세긴 했다. 하지만 잠재란 원래 그런 것 아닌가? 영원히 떠오르지 않음. 그러므로 실상 의미 없음. 나는 날것의 아이큐를 말해주었다. 딱한 눈으로 볼 줄 알았던 문이 나를 꺼림하게 쳐다보았다.

*

   보미나래가 귀국한 건 일 년 전이었다. 공동체에서 가져온 낡고 펑퍼짐한 히피풍 원피스를 입고 새벽까지 밖을 쏘다녔다. 학교도 잘 가지 않았다. 정작 영화제에 출품할 다큐멘터리는 나 혼자 만들고 있었다. 편집은 난항이었다. 미국에 있는 동안 딸은 주말마다 차를 얻어 타고 나와 시내의 카페에서 그 주에 찍은 분량을 보내왔다. 쓸 만 한 건 없었다. 호수에 낀 살얼음, 밭을 망친 작은 발자국들, 유리병 바닥에 붙은 거머리 흡반…… 시종 자연만 찍어 보냈다. 사람을 찍은 장면이라 봐야 해먹에 누운 백인 남자의 새빨간 발바닥을 클로즈업한 것뿐이었다. ‘실험영화 말곤 답이 없겠는데요?’ 말총머리의 연출 강사가 말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문에게서 연락이 왔다. 조짐이 이상하다고 했다. 정권이 바뀌면서 생각보다 일찍 수시 전형이 바뀔 것 같다고 했다. ‘외부 활동은 기재가 금지된다는 말이 있어. 그럼 교외 활동은 못 써. 미국 스펙이 날아가는 거라고. 나래는 무조건 이번에 들어가야 돼.’
   나는 해먹에 미라처럼 누워 있었다. 서재 천장에 달아놓은 후크가 불안하게 내려앉았다.

   해먹에게

   네게 도배 벽지가 웬 말이냐. 너에게 감겨 레게 머리를 하고 손톱 속이 새까만 외국 청년이 한 대 권하면 못 이기는 척, 그러나 속인주의엔 유의하며, 마리화나를 피워 물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미안하구나. 여기까지 와 아파트 해먹으로 살게 해서.


   나는 보미나래가 미국에서 마리화나를 해봤을지 궁금했다. 그럴 주제도 못 되겠지…… 이래저래 갑갑하던 차에 술 마시러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데킬라!”
   우리는 짧고 단단한 잔을 테이블에 콱 찍곤 단숨에 마셨다. 식도가 타들어갔다. 손등의 소금을 핥고 입을 벌려 레몬을 짜넣었다. 중남미 좌파 정권 연구로 연수를 다녀온 동기가 배워온 것이었다. 넉 잔을 연달아 마시자 머리가 핑 돌았다. 누군가 초시계를 꺼내며 외쳤다.
   “시작!”
   아내는 이를 두고 개떼 놀이라고 했다. 어느 날, 가만히 지켜보다 말했다.
   “네들 꼭 살점 붙은 뼈다귀에 달려드는 개떼 같다.”
   우리는 킥킥 웃으면서도 뼈다귀를 바쁘게 비틀어댔다. 술을 먹다 보면 꼭 어디선가 루빅큐브가 나타났고, 우리는 마치 프로그램에 내장된 양 루빅큐브에 달려들었다.
   “당신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냐?”
   아내가 ‘학교차별 없는 세상’ 대표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그는 손목을 바삐 꺾어가며 말했다.
   “아 이 사람아. 이거랑 그거랑은 다르지.”
   그날도 어디선가 루빅큐브가 나타났다. 사 년 전, 판사 하는 놈이 세운 기록이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았다. 그날따라 나는 머리가 팽팽 돌아가고 손목이 휙휙 꺾였다. 나는 문에게 화가 나 있었다. 개새끼. 저 주제에 충고? 세상천지, 저만 못하고, 저만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수시 전형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말에 전전긍긍하는 나를 두고 문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너 정말 왜 그래? 네가 하도 난리라 난 또 나래가 ‘정말’ 지능이 낮은 줄 알았어. 멀쩡한 애를 두고, 작작해라. 벌 받는다.”
   조각이 빠르게 맞춰지고 있었다. 착착 맞춰지는 알들. 하양, 하양, 하양, 빨강. 민중이 뭔가. 민중은 개미다. 우리가 했던 건 뭔가. 개미 행렬의 패턴을 읽고 옳은 길로 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개떼가 흥분해 왈왈댔다. 더 빨리! 더 빨리! 더 빨리! 나는 이를 꽉 물며 손을 비틀어댔다. 네 딸년들은 파브르의 시점을 갖겠지. 내 딸이 식별 불가능한 개미의 얼굴을 하고 흙에 고개를 처박은 채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면서 복잡한 개미집을 짓고 있는 동안, 물웅덩이 앞에서 한없이 당황하는 동안, 네 자식들은 조감하며 거기가 아닌데, 그치 거기지, 하겠지.
   “와!”
   사람들이 포크로 잔을 때리며 카운트하기 시작했다.
   “오늘 신기록 나오는 거 아냐?”
   옆 테이블에서도 몰려들었다.
   “큐브 개 잘하네. 저 사람, 천재예요?”
   나는 신들린 듯 손을 놀렸다. 그렇게 치러지던 대리전.
   십, 구, 팔, 칠, 육, 오,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에 덮쳐오는 가난의 풍경 술렁이던 한낮의 뜨겁던 흔적도.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아내 이름이 떴다.
   “아아.”
   모두 안타까운 소리를 냈다. 집중력은 쏜살같이 흩어졌고, 기록 경신은 물 건너갔다.
   “아, 왜!”
   나는 짜증을 벌컥 내며 전화를 받았다.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네가 뭔 짓을 했는지 아냐? 됐다. 하여튼 너는 타이밍이 진짜 안 좋아.”
   “나래 지금 병원이야. 강북 삼성, 산부인과.”
   전화가 뚝 끊겼다.

   아이도 건강하고 산모도 건강하다고 했다. 제 몸의 세 배쯤 되는 히피풍 원피스를 입고 다녔던 보미나래는 건강한 남아를 출산했다. 저녁을 먹다가 양수가 터졌다고 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였다. 같이 가자고 한 건 아니었는데 이상한 열기에 휩싸여 정신을 차려보니 택시에 여섯 명이 타고 있었다. 술냄새를 풍기며 떼로 들어오는 우리를 보고 아내는 경악했다. 침대에는 구겨진 시트뿐 나래는 없었다.
   “애가 없어졌어.”
   눈물로 얼굴이 퉁퉁 부은 아내가 무서운 차분함으로 말했다. 어, 어, 가보자, 찾아보자, 크게 당황한 이들이 허둥지둥하다 사라졌다. 병실에는 나와 아내만 남았다.
   “어떤 새끼야.”
   아내는 눈을 감은 채 양손을 주무르며 말했다.
   “몰라.”
   핀이 나가버리는 감각이 왔다. 머리가 저리면서 기분 나쁜 전류가 흘렀다. 아내를 때리지 않으려면 온몸을 딱딱하게 굳혀야 했다. 한발 물러섰다. 동시에 기다렸다. 참지 못한 아내가 달려들어주기를. 퉁퉁 부은 눈가를 밤새 뭉개지도록 치고 싶었다. 나는 자신의 분노에 놀라 병실을 나왔다.
   보미나래는 검은 아기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유리 너머로 딸과 아기를 보았다. 하나둘, 개들이 다가왔다.
   “이게 다 뭔 일이라니.”
   문이 내 팔꿈치를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
   “너, 알았어?”
   “뭘.”
   내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나래…… 임신한 거……”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창틀에 몸을 기대고 말했다.
   “아, 내가 말 안 했나? 나래, 미국에서 약혼했어.”
   나 자신도 믿지 못할 만큼 침착했다.
   “흑인이랑?”
   툭 튀어나온 말에 서로 놀라 개떼는 잠잠했다.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응. 조지타운 로스쿨 다녀. D.C에 사는데 버지니아로 잠시 놀러왔대. 우리 애가 주말마다 시내 커피숍에 갔는데 거기서 만났대. 애가 있던 에코 공동체에선 인터넷이 금지거든. 사위될 놈이 졸업하고 연방 정부에서 일할 예정이야. 우리 애도 고등학교만 마치고 미국으로 들어가기로 했어.”
   나는 들어가기로 했어, 란 말의 울림을 잠시 느꼈다. ‘들어가다’는 ‘돌아가다’로 바뀌었다. 원류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내가 꿈꾸던 딸에 결부된 문장은 이런 것들이었다. 이번에 미국으로 들어가, 같은.
   “그럼 그렇지! 축하한다!”
   개떼가 신경질적으로 부인했다. 혼란스러운 축하가 짧게 이루어졌다. 그들은 바삐 사라졌다. 나는 현실감이 돌아오자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 토기를 누르며 빙글빙글 도는 바닥을 한참 동안 노려봤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몸을 돌리자 딸이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내 입술을 뚫어지게 보며 서 있었다.

*

   보미나래는 상담 센터를 전전했다. 외상 경험의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는 믿지 않았다. 무의식에 박혀 있을 상처를 발굴할 치료자를 찾아다녔지만 정작 발굴된 건 아내에 박힌 인종차별이었다. 아내는 자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깨곤 했다. 꿈에서 벌어지던 일에 대해 나는 묻지 않았다.
   “누구면.”
   누구의 애인지 집착하는 나에게 아내가 울부짖으며 말했다.
   “누구면, 누구면! 달라져? 우리 보미나래 어떡해. 불쌍해서 어떡해. 나 미칠 것 같아. 딸을 망쳤는데 내가 어떻게 제정신으로 살아. 너는 어떻게 그렇게 멀쩡하니. 쓰레기니?”
   “그런 거 아니라잖아.”
   우리는 절대 ‘그런 거’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들 말을 어떻게 믿어. 그런 게 아님, 사랑이라도 했다고? 연애라도 했다고? 내가 품고 내가 키운 애야. 내가 걔를 몰라? 우리 딸이, 그럴 주제나 돼?”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왔다. 아무개의 딸이 학교 폭력 가해자라거나 아무개의 아들이 멀쩡한 외양으로 뒤에선 패륜의 말을 하고 다닌다거나 하는 소문을 들으면, 우리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딸이 그럴 주제도 못 되어서. 못될 주제도 못 되어서.
   최면 치료가 마지막이었다. 그 시점으로 돌아가고 돌아가도 그곳에는 어둠뿐이었다. 아내는 그동안 딸에게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었다. 그러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충동적으로 물었다.
   “어떤 일이 있었대도…… 엄마는 네 편이야. 그건 결코 네 잘못이 아니야. 괜찮아. 솔직히 말해봐. 무슨 일이 있던 거니?”
   딸이 선선히 말했다.
   “좋았어.”
   “뭐가.”
   “다.”
   아내는 운전대에서 손을 놓고 몸을 완전히 돌려 마구잡이로 딸을 때렸다.

   그즈음부터 딸의 방에서 끔찍한 지린내가 났다. 문을 닫아도 틈으로 한여름의 부랑자에게서나 날 법한 냄새가 났다. 나는 검색 엔진에 십대, 출산, 요실금, 이라고 쳤다가 결과도 보기 전에 창을 닫았다.
   아기는 무럭무럭 자랐다. 친구들은 손자의 안부를 물었지만 언제 미국으로 들어가느냐는 묻지 않았다. 어차피 아무도 믿지 않았다. 아내는 직장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았다. 입에 작은 발을 넣고 쪽쪽 빨았다. 쫓기는 듯한 애정. 딸은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몇 번이고 딸에게 편지를 쓰려 했지만 보미나래에게, 하면 머리통이 총탄에 날아간 듯 캄캄해졌다.
   어느 날, 우리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재난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외국 다큐멘터리였다. 나는 발톱을 깎으며, 아내는 아기를 안아 어르며 건성으로 보고 있었다. 허리케인에 날아온 30센티미터의 목재에 목을 관통당한 남자가 나왔다. 기적적으로 신경을 피해 일곱 시간의 수술 끝에 살아남았고 했다. 모자이크 처리를 해도 자료 화면이 끔찍했다. 목에 큰 흉터가 남은 유쾌한 인상의 퉁퉁한 남자가 말했다.
   “사람들은 저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숲이 나오면 갑자기 창문으로 달려들어 온몸으로 창문을 가립니다. 나무를 안 보게 해주려는 것이지요. 몇 시간이나 목에 나무가 박혀 있었으니 나무에 트라우마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겁니다. 고맙지만, 나무가 아녜요. 제가 못 참는 건 휘발입니다. 알코올 솜을 문지를 때의 그 차고 날아가는 느낌이요. 그걸 느끼는 순간 저는 말 그대로 미쳐버리고 말지요.”
   내레이션이 이어졌다.
   “심리학자는 수술 과정에서 알코올로 몸을 닦을 때의 감각이 존슨 씨에게 트라우마가 된 것 같다고 합니다. 그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때로 트라우마는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있습니다.”
   아내는 방송을 끝까지 본 뒤 홀린 듯 딸의 방으로 갔다. 문을 열자 지독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아기가 코를 벌렁거리더니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아내는 아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잠긴 책상 서랍을 잡아당겼다. 몇 번이나 세게 잡아당긴 끝에 서랍이 열렸다. 냄새의 근원지. 지린내가 폭발했다. 임신테스트기가 가득했다. 다 사용한 것들이었다. 아내가 울음을 터뜨렸다.

*

   나는 해먹에 누워 내가 쓴 기사를 읽고 있다. 샘에게. 나는 손자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 애를 지극히 사랑한다. 몇 년 뒤면 샘은 내가 보낸 편지를 직접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문에 잉크 뭉친 자국이 작게 나 있다. 하필이면 내 칼럼이다. ‘하긴’과 ‘하는’ 사이에. 다른 데도 그런가, 빈 눈으로 살피는데 시야 밖으로 토막 기사 하나가 스친다. 나는 잠시 시선을 옮겼다가 황급히 시선을 되돌린다. 그러나 늦었다. 들어온 지도 모르고 들어온 낱자들이 서서히 스며들며 연결된다.

   한강, 화장실, 혼자, 둘이, 추웠던, 휘파람.

   한 여자애가 보낸 독자 편지다. 임테기 천사. 다들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임테기 천사는 늘 한강 공중화장실에 있다. ‘벙어리인지도 모르겠네요.’ 임테기 천사는 임신테스트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임신테스트기를 건네고 문밖에서 휘파람을 분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편지를 쓴 이는 다행히 한 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울었을까. 왜 칸 속에서 나오지도 않고 한참을 울었을까. 우는 내내 임테기 천사는 휘파람을 불었다. 못 부는 솜씨로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휘파람 소리. 노크도 않고, 괜찮으냐고 묻지도 않았다. 울음을 그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가고 없었다.
   옆에 옅게, 있어 주어 고맙습니다.
   편지는 담담하게 끝났다.

   젊은 시절, 아내의 묘한 습관 하나가 떠오른다. 아내는 말을 하다 말고 짧고, 긴 숨을 쉬었다. 때론 쉼표, 때론 줄임표. 하긴, 하지. 하긴, 하는 남자지. 형은 적어도 남 말을 듣다가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하며 나갔다올 줄은 알지. 천천히 홀로 걸으며 하긴…… 할 줄 아는 인간. 딱 그만큼 달라질 수 있는 거야. 하긴, 하는 만큼.

이미상

아무도 읽지 않는(을) 글을 계속 쓰다보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을 때가 온다. 그럴 땐 이 말이 즉효다. ‘아무도 너더러 하라고 한 사람 없다.’ 이 말에는 의외의 긍지와 자유가 깃들어 있다.

2018/03/27
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