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해주는 특별히 하는 일이 없었다. 안경이 운영하는 ‘안’―북정마을의 단층집을 개조해 만든 윈도우 갤러리―에서 세미나를 기획하고 전시를 준비하고 안경이 나가는 시위에도 따라다녔지만 지속적으로 몰두하진 않았다. 서른 하나. 이렇다 할 성과도 없이 삼십 대가 되었다며 속상해하는 게 해주의 일이었다. 내 눈에는 해주가 조급한 것처럼 보였다. 독일에서 아무 결과도 내지 못한 것에 대하여. 뮌헨까지 가서 그룹 전시 한번 못하고 돌아온 것과 대학원 졸업을 포기한 것에 대해서도. 습관처럼 후회와 반성의 말을 했고 독일에서 겪은 사소한 일들을 늘 입에 달고 다녔다. '안'에 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는 것처럼.
   매주 토요일, '안'에서는 ‘예술의 난해함을 이해하기 위하여’라는 이름의 세미나가 열렸다. 국가를 초월하여, 연대기에 상관없이, 관심 있는 미술작품이나 작가를 선정하고 그에 관한 의견을 나누는 모임이었다. 다들 하고 싶은 말을 했고 주제와 상관없는 얘기가 나와도 상관없어했다. 특히 해주가. 뮌헨의 레지던시에서 만난 사람들로 구성된 모임에는 값비싼 물감을 내키는 대로 쓰는 속 편한 작가들과 박사과정을 위해 졸업논문이 필요해진 게으른 석사 수료생(본인들의 표현이었다.)이 섞여 있었다. 그중에는 학위가 다섯 개나 되는, 작가이자 미디어 전문가이자 미술 평론가이자 큐레이터인 올리브도 있었다. 그는 겸손한 어조로 유럽에선 9개월이면 학위를 딴다고 했다.
   “준우 씨는 어때요?”
   내가 처음 모임에 나간 날, 올리브가 물었다. 나는 뭐가 어떠냐는 건지, 유학인지 학위인지 그것과는 상관없는 그냥 일상인지, 그가 묻는 게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른 채로 대답했다.
   “거지 같아요.”
   “다들 그렇죠. 가구 디자이너라고요?”
   올리브는 내가 하는 일에 관심을 보였다.
   “유럽 사람들 그런 거 되게 좋아하는데. 빈티지 퍼니쳐.”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해주가 끼어들었다.
   “얘 작가야. 조각해.”
   해주의 말에 대화는 다른 국면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조각과 조각가. 오브제와 레디메이드. 조각의 한계와 조각의 매력. 제이콥 엡스타인에서 시작해 헨리 무어를 지나 키키 스미스로 이어지는 방대한 이야기. 나는 맥 빠진 표정으로 해주를 쳐다보았다. 학비 때문에 학부도 졸업 못한 내가 조각가라니? 나는 조각가도 아니고 조각가인 적도 없지만 잠자코 앉아 파리에 있는 스핑크스―오스카 와일드의 무덤에 있는 석회암 조각―의 성기가 파손되었다는 얘길 들었다. 나로선 그게 최선이었고 해주도 그랬을 것이다. 어설프게 봉합된 우리 관계는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손쉽게 쪼개질 조악한 장식품과도 같았으니까. 나는, 어쩌면 해주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슬그머니 외면했고 마치 우리가 단단하게 붙은 것처럼 친밀하게 굴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해주는 불안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상대의 불안이 더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위안을 얻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상황을 나아지게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서로의 존재가 꼭 필요한 것처럼 붙어 다녔다.
   어쩌다 보니 ‘난해함’ 세미나는 우리에게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꼬박꼬박 참석하는 정기적인 만남. 실제로 특별한 일이 있었던 토요일은 딱 한 번, 같이 일하는 선배의 가구 드로잉 전시 오프닝이 있던 금요일뿐이었다. 나는 선배의 전시에 해주를 데려가 사람들로부터 너희 뭐니? 또 시작이니? 지겹지도 않아? 하는 말을 들었다. 해주와 나는 다음 날 세미나가 있음에도 평소보다 많은 술을 마셨고 술자리가 끝난 뒤에는 해주의 작업실로 자리를 옮겨 계속 마셨다. 예전처럼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마시진 않았지만 몽롱한 기분으로, 합칠까? 옮길까? 우린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는 말들을 나누었고 전과 달리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해주였다. 앞날을 누가 아느냐며 내 얘길 무시하곤 했던 해주가 전에 없이 진지하게 구는 게 우스웠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웃는 대신 해주를 끌어당겨 키스를 했다.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운 캐시미어 니트를 벗기고 해주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두 사람의 몸을 지탱할 만한 공간을 찾았다. 커다란 작업용 책상을 벽으로 밀어붙이자 몸을 기댈 수 있었다. 책상에 있던 상자들이 넘어지면서 튜브형 물감과 붓 따위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해주의 몸에 집중했다. 작업실 메이트가 들어오면 어쩌나 하는 소심한 마음도 없었다. 기능이 시원찮은 미니 히터와 선풍기형 난로가 난방시설의 전부였는데 춥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타오르는 열망. 뜨거운 뭔가. 간절하게 바라는 그 어떤 것이 좁은 공간을 강하게 에워쌌다. 그게 뭘까. 사랑은 아닌데. 섹스를 하는 동안 벽에 붙은 다이앤 아버스의 사진 속 인물과 여러 번 눈이 마주쳤다. 어둠 속에서 그들의 눈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기묘하게 반짝거렸다.
   해주는 그날 세미나에 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 옷만 갈아입고 나오기로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고 했다. 왜냐고 묻는 내 문자에 해주는 ‘날씨’라고 간단한 답장을 보냈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날이 춥긴 했다. 골목마다 눈을 치우는 사람들이 나와 있었고, '안'에서는 보일러가 얼어붙어 수리공을 불렀을 정도니까. 임주미씨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제시간에 오지도 않았다.
   임주미씨는 안경이 보일러 수리공과 지하실에 있을 때 들어왔다. 현관에서 자주색 목도리를 풀며 내게 인사를 하고 갤러리 안쪽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 눈을 털고 나왔다. 자리에 앉은 후엔 실내가 춥다고 느꼈는지 풀었던 자주색 목도리를 다시 둘렀다. 안경을 찾는다거나 다른 사람들은요? 묻는 것도 없었다. 임주미씨는 최근에 합류한 사람이었다. 독일 멤버는 아니고 올리브가 ‘어쩌다가’ 알게 된 사람이라고 했다. “어쩌다가?” 내가 궁금해하자 해주는 관심 없다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게 좀 신기해서 웬일로 새 멤버한테 관심이 없냐, 놀리듯 물었고 해주는 아무 말 않고 있다가 그게 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몰라. 그냥. 이질적이라서?”라고 덧붙였다.
   나는 책장을 보는 척하면서 임주미씨를 훔쳐보았다. 목을 둘둘 감싸고 있는 자주색 목도리와 브이넥 앙고라 니트. 깨끗한 피부 때문인지 처음 봤을 때보다 어려 보였다. 이질적이라는 건 무슨 뜻일까? 말을 해본 적은 없지만, 해주의 관심을 끌지 않는다는 점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안경은 지하 창고에서 수리공과 보일러를 고치는 중이라고 말을 붙이려는 찰나, 안경이 이를 덜덜 떨면서 올라왔다.
   “좀 따듯해졌어? 아래는 입김이 다 나와.”
   안경은 소파에 있던 커다란 숄을 가져다가 둘렀다.
   “그 정돈 아냐.”
   나는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임주미씨를 쳐다보았다.
   “주미 씨도 왔네?”
   안경이 인사를 건넸다. 임주미씨도 고개를 끄덕했다.
   “보일러는 고쳤어. 심각한 건 아니고 날이 추워서 그렇대.”
   안경은 보일러 수리공이 올라오길 기다렸다가 나무 막대로 고정해두었던 지하실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보일러가 고장 나지 않았다면 거기에 있는지도 몰랐을 지하실은 다시 카펫으로 덮였다. 나는 일어나서 수리공을 배웅하고 바깥문이 잘 닫혔는지 확인하고 돌아왔다. 수동 그라인더로 원두를 갈고 있던 안경이 내게 잘했다는 손짓을 했다. 임주미씨는 여전히 창밖,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그림이 없어?”
   나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다가, 눈길을 걸어가는 수리공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알아차렸다. 창문에 걸려 있어야 할 설치작품이나 조각, 하다못해 어린아이가 낙서하다 말고 죽죽 찢어놓은 것 같은 천 쪼가리라도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던 것이다. 평소에는 윈도에 작품을 놓고 그 뒤에 임시 벽을 세워 두기 때문에 밖을 볼 수 없는 구조였다.
   “말도 마.”
   안경이 말했다.
   “우울하다.”
   그라인더 소리 때문에 정확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런 종류의 대답이었다. 그것 때문에 우울해 죽을 지경이야. 우울해. 우울해 죽어. 평소에도 자주 들을 수 있는 안경의 말버릇. 올리브의 전시는 다른 전시장에서 열릴 예정이라고 했다.
   “차라리 잘 됐어. 괜히 말 나오느니.”
   “무슨 말?”
   내가 되물었지만, 안경은 아무 대꾸 없이 커피를 따르고 테이블로 가지고 왔다.
   “고맙습니다. 잔이 예쁘네요.”
   임주미씨가 흰 도자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나는 문득 임주미씨가 처음 온 날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뭇결이 좋네요. 이런 나무 책상은 어디에서 사요?” 안경은 임주미가 한 말을 한참 생각하다가 “어디요? 나라? 브랜드?” 하면서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다른 때 같으면 가구 디자인이나 브랜드에 대해 누구라도 한마디씩 했을 터인데 그날은 이야기가 그런 식으로 흐르지 않았다. 대화가 뚝 끊어져 분위기가 어색했고 올리브도 해주도 말이 없었다. 그건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해주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반갑게 수다를 떠는 해주가 그날은 어쩐 일로 가장 먼저 책을 폈다.
   “이 잔은 어디에서 샀는지 기억난다. 여름에 파리 갔을 때 샀어. 네 개 들이 세트로 샀는데 한 개는 트렁크 안에서 깨졌더라고.” 안경이 말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커피를 마셨다. 오 분 정도. 조용히 창밖을 보는 시간. 끝도 없이 눈이 내렸다. 목적도 없는 데다 마음대로 멈출 수도 없는 얼음 결정체. 그건 생명도 뭣도 아니고 지면에 닿는 순간 없어지는 차가운 액체일 뿐이었지만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지는 묘한 힘이 있었다.
   “다들 안 오네. 이래서 무슨 공부를 하겠다고.”
   안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주의 말대로, 그리고 내가 보아온 대로, 안경은 가만히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걸 못 견뎌 했다. 부유한 집에서 잘 자란 사람답게 꼬인 구석이 없는데도 우울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해주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안경이 음악 하는 남자와 연애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내 물음에 해주는 어깨를 으쓱하며, “상관이 없어? 난 있는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
   안경은 뱅쇼를 만들었다. 임주미씨와 나는 레몬 향이 진하게 나는 뱅쇼를 홀짝이면서 안경의 이야기를 들었다. 2000년대 초반에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흔적 없이 사라진 대안 공간을 부활시키겠다는 포부와, 경력이 미미한 작가들이 성취를 거둘 수 있도록 돕겠다는 계획 비슷한 다짐의 말들이었다.
   “그러니까 올리브가 그런 작가란 말이지?”
   내가 물었다. 안경은 내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임주미씨를 봤다.
   “주미씨, 그거 진짜예요? 올리브가 사진을 몰래 찍는다는 거? 왜, 예전에 올리브 몸 시리즈에 주미씨도 있다면서요?”
   잔을 쥐고 있는 임주미씨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니까…… 내 말은, 주미씨는 알죠? 올리브 작업이 약간 그런 식으로…… 아는 여자들한테 애매하게 시켜서…… 말 나오겠다 싶으면 평론 하나 써주고……”
   임주미씨는 대답이 없었다.
   “무슨 얘기야?”
   나는 또 끼어들었다.
   “됐다. 우리끼리 얘기해봤자 소용도 없지.”
   안경은 고개를 젓더니 주방으로 가서 호두와 아몬드를 꺼내왔다.
   무슨 얘기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번 달 '안'의 전시가 올리브의 사진전이었다는 것과 그 사진이 여자의 몸을 소재로 한다는 건 알았지만 거기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몰랐다. 거기에 대해선 해주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
   “재밌는 얘기나 하자. 웃긴 얘기 없어?”
   안경은 그렇게 말하더니 진지하게 덧붙였다.
   “내가 위로가 필요해서 그래.”
   나는 피식 웃었다. 나도 모르게 그랬다. 이런 상황에 위로라니. 설사 엄청나게 웃긴 얘기를 한다고 해도 안경을 위로할 수는 없을 터였다. 안경은 나와 다른 사람이었다. 공통점이라곤 고작 일 년, 그것도 십 년 전에 같은 학과에 속해있던 것이 전부였다. 이것은 내가 해주에게, 해주가 나에게 느끼는 거리감 혹은 불만 아니면 낯섦과도 같은 것이었고 그 중심에는 ‘형편’이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지만 나는 있었고, 그들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어쩌다 일이 마음대로 안 풀릴 때만 우울했지만 나는 아니었다. 이질감. 누군가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미씨 작업은 봤어? 주미씨도 사진 한다며?”
   안경이 무슨 뜻이냐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임주미씨한테 포트폴리오가 있느냐고 물었다. 임주미씨는 당황하면서도 자주색 목도리를 풀어 의자에 내려놓고 가방에서 검은색 파일을 꺼냈다. 그런 다음 메모지를 찾아 자신의 홈페이지 주소를 적었다. 마른 식물처럼 앉아 있던 주미씨가 갑자기 생기 있게 행동하는 것이 나는 좀 놀라웠는데 더 놀라웠던 것은, “사진은 어떻게 찍게 된 거예요?”라는 내 질문에 뜬금없는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었다. 갑작스럽고 엉뚱한 얘기. 대학 새내기 때 겪은 이야기였다.
   “처음엔 우울한 날이라고 생각했어요.”
   얼마나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던지 안경도 나도 처음엔 그 얘기가 그렇게 뜬금없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머리…… 때문이었던 것 같은데요.”
   임주미씨의 이야기는 머리로 시작했다.
   -너 머리가 왜 그러니.
   그날 임주미씨는 그런 말을 들었다. 머리가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동기들과 선배들, 임주미씨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모두 그렇게 물었다. 뭐야, 그 머리. 머리가 왜 그래. 허리까지 닿았던 머리를 싹둑 자르고 갔으니 무슨 일이 있나 했을 것이다. 임주미씨는 그런 말이 듣기 싫어서 오후 내내 아무도 없는 동아리방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엎드려서 숨을 쉬었다. 쉬익― 쉬익― 숨소리에 집중하다 보니 다른 생각은 나지 않았다. 머리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있지? 뭔데 그래? 신경을 꺼버렸다.
   그때, 안경이 끼어들었다.
   “머리를 얼마나 짧게 잘랐는데요?”
   안경은 궁금하다는 듯 “세미 단발? 커트?” 하면서 귀 옆으로 손을 가져가 흔들었다. 그러자 임주미씨는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라고 대답하고 하던 얘기를 이어나갔다. 안경이 기분 나쁘다는 식의 사인을 보냈지만, 나로선 임주미씨의 얘기를 막을 생각이 없었으므로 조용히 안경의 잔을 채워 주었다.
   그날 동아리방에 끝까지 남은 사람은 세주라는 친구였다. (여기서 나는 ‘세주’를 ‘해주’로 잘못 알아들었는데 이야기를 끊고 싶지 않아서 잠자코 앉아 있었다.)
   -머리를 왜 잘랐니.
   세주가 말했다.
   -남자처럼 되고 싶어서.
   주미씨가 말했다.
   -그렇게 자른다고 남자가 되니.
   -남자가 되겠다는 게 아니라 남자처럼 되겠다는 거야.
   -그러지 말고 얘기를 해봐. 무슨 일인데?
   “그런데도 소문은 퍼지더라고요.”
   주미씨가 말했다.
   “무슨 소문이요?”
   안경이 재빨리 물었다.
   “둘이 잤다는 소문.”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잘 모르겠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고.”
   임주미씨가 말했다.
   무엇을? 머리를? 사진을? 내가 묻지 않아도 주미씨는 말을 이어갔을 테지만 늦는다고 연락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바람에 이야기가 끊겼다. 시계를 보니 오후 세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어서 와! 여기 따듯한 것 같아? 아까 보일러가 고장 났었어.”
   안경은 여느 때보다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사람들은 날씨가 왜 이러냐며 “이러다 눈사태 나겠다!” 호들갑을 피우며 들어왔다. 그러나 실제로 눈은 거의 잦아들어 싸락눈 정도로 변해있었다. 그들은 테이블에 놓인 와인병을 가리키며 웃고는 각자의 잔을 챙겨 앉았다. 잔을 채운 다음에는 저마다 늦은 이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누군가는 택시기사가 눈 쌓인 언덕을 오를 수 없다고 해서 싸우다가 늦었다고 했는데 그 말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웃었다. “얼마나 벌벌 떨던지 나는 내가 융프라우 가자고 한 줄 알았네.” 융프라우. 변덕스러운 날씨와 하얀 눈으로 덮인 산봉우리. 다들 한마디씩 스위스에서의 경험담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주미씨의 이야기는 사라졌다. 순식간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하게. 술이 금세 바닥나 안경은 와인을 두 병이나 더 꺼내왔다.
   “이거 볼래? 데미안 와인하우스다? 괴팅겐.”
   안경은 라벨이 잘 보이도록 병의 아랫부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괴팅겐이라고? 거짓말!”
   라벨에는 데미안 와인하우스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그게 왜 우스운 건지 간파하지 못하다가 사람들이 “괴팅겐? 그때 그 얼어죽을 뻔한 괴팅겐?”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을 때야 비로소 해주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해주가 그 이야기를 들려준 건 무더운 여름이었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책상 상판으로 쓸 나무를 대패로 밀고 있다가 느닷없이 해주를 맞았다. 그런 식으로 다시 만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빨강 니트 캐미솔에 짧은 바지를 입은 해주가 거짓말처럼 눈앞에서 말을 걸고 있었다.
   “너 괴팅겐이라고 알아? 네가 좋아할 만한 곳인데.”
   괴팅겐은 해주가 독일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간 도시였다. 안경의 남자친구가 초대한 공연을 보기 위해 친구들 세 명과 함께 세 시간 넘게 기차를 타고 갔다. 날씨가 엄청 추웠는데 기차역에 도착해서야 공연이 취소된 걸 알았고 다들 당황했다. 안경의 애인은 전화도 받지 않았다. 해주와 일행은 안경의 애인에게 욕을 퍼부으며 거리를 헤매다가 ‘데미안 와인하우스’라는 작은 술집을 발견하고 그리로 들어갔다. 그들은 거기에서 아침까지 술을 마셨다. 당연히 취했고 술집에 있던 모든 사람과 말을 섞었고 술집 주인의 이름이 ‘데미안 와인버그’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긴 토론이 시작되었다. 데미안 와인버그가 에이미 와인하우스와 관련이 있다 없다, 에이미와 데미안이 관계가 있다 없다, 데미안이랑 에이미가 관계를 가졌다 아니다, 영업이 끝난 술집에 앉아 실컷 떠들어댔다. 그들에게는 각자 알고 있는 에이미와 데미안이 있었고 이야기는 무궁무진했다.
   “그날 우리가 버틸 수 있었던 건 말 때문이었을 거야. 밤새도록 말이 이어져서. 공연은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지만 그런 얘기는…… 재밌잖아.”
   나는 대패를 내려놓았다. 아무런 상의도 없이, 헤어졌다는 확실한 선을 긋지도 않고 떠났다가 2년 만에 돌아와서 하는 말이 겨우 이런 거라니. 화가 났고 머리로 뜨끈한 불덩이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지만 가만히 해주의 눈을 마주보았다. 해주는 선글라스를 벗고 내게 다가와 톱밥으로 범벅이 된 내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그게 너무도 자연스러워 얼음처럼 굳어버린 내가 이상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괴팅겐산’ 와인을 마시며 각자의 추억에 젖어들었다. 일요일마다 1유로를 들고 돌아다닌 미술관…… 알테 피나코텍과 노이에 피나코텍, 브란트호스트와 랜바흐 하우스…… 거기에서 본 유명작가의 작품 제목을 끝없이 나열했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말의 밤.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나와 임주미씨뿐이었다. 조금 뒤에 임주미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술을 홀짝이면서 임주미씨가 조용히 가방을 챙기고 외투를 걸치고 “저는 그만 가 볼게요.” 인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벌써 가시게요?”라고 묻지만 전혀 아쉬워하지 않는 사람들의 표정도. 창 너머로 임주미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자주색 목도리를 주워들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

   해주와 나는 올리브의 전시에 초대받아 이화동에 있는 ‘멀티미디어문화콘텐츠센터’에 가는 중이다. 안경도 같이 가기로 했는데 아침에 마음이 바뀌었다며 문자를 보냈다.
   〈올리브를 보고 싶지 않아. 오후에 시위도 나가야 하고.〉
   안경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설득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적당히 둘러대도 그만이었는데 그렇게 직접적으로 얘기 한 건 우리도 거기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이었을까. 나는 해주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고 해주 역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이해가 안 가.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대? 왜 그런 행패를 부린 거래?”
   대신 해주는 다른 걸 궁금해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행패는 무슨.”
   내가 말했다.
   “그게 행패지. 누가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니?”
   “다친 사람 없어.”
   “어쨌든 아늑한 분위기를 망쳐놨잖아. 그것도 무례한 거야.”
   해주는 그렇게 말하고서 휴대폰 맵으로 전시장까지의 거리를 확인했다. 그러더니 걷기엔 너무 멀다며 택시를 타자고 했다. 그러나 택시가 한 대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천천히 걸음을 뗐다. 이화동 방향으로 느릿느릿, 녹은 눈이 신발을 더럽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걸었다.
   “날도 추운데.”
   해주가 중얼거렸다. 마로니에 공원 한쪽에 카메라 모양의 피켓을 머리띠처럼 착용하고 외투 색을 맞춰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불법 촬영 편파수사를 규탄하는 소규모 시위대였다. 해주는 그들에게 무관심했다. 한때 시위에 참여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해주도 여름에는 분명 그들과 함께 있었다.
   “꽃 사 가야겠다.”
   해주가 골목길에 있는 하얀색 꽃집 간판을 가리켰다.
   겨울이라 꽃 종류가 별로 없는데도 해주는 클레마티스니, 히아신스니, 퐁퐁 소국이니 하는 꽃집에 없는 꽃들만 찾았다. 결국 주인의 권유대로 붉은 계열의 다알리아와 장미로 결정하고 꽃이 포장되길 기다렸다.
   “근데 넌 왜 나간 거야?”
   주인이 꽃 포장하는 걸 지켜보던 해주가 불쑥 물었다.
   “어딜?”
   “주미씨. 따라갔다며.”
   “목도리 갖다주려고.”
   “아. 목도리.”
   “더 있다 가라고 말하고 싶기도 했고.”
   “아.”
   안 그런 척했지만 해주는 그날 있던 일에 온 관심이 쏠려있었다. 나는 그걸 알았다. 어쩌다가 와인병이 산산조각이 난 건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 올리브가 모임을 그만둔 이유가 임주미씨 때문이라고 믿는 표정. 주인이 포장된 꽃을 내밀었다. 꽃값은 육만오천 원이었다.
   우리는 다시 걸었다. 조금씩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그날 내린 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생각해보면 그날도 처음부터 그렇게 큰 눈이 내린 것은 아니었다. 올리브가 기타를 치고, 사람들이 노래를 따라 부르고. 눈발이 점점 굵어졌지만 보일러가 잘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안'은 하나도 춥지 않았다. 촛불, 음악, 웃음, 소곤거림. 분위기는 좋았다. 임주미씨가 아몬드를 집어던지기 전까지는. 와인이 쏟아지고 병이 깨지고 올리브가 주미씨를 억지로 끌고 나가기 전까지는 해주의 말처럼 아.늑.한 분위기였다.
   “엄밀하게 말해서 주미씨 잘못은 아냐.”
   내가 말했다.
   “뭐가?”
   해주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병. 다 같이 깼지.”
   “어떻게?”
   “말로.”
   “뭐래.”
   해주는 금세 시들해지더니 다른 걸 물었다.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것도 들었어?”
   “……”
   “임주미씨.”
   “……”
   “올리브한테 당한 척하고 다닌다며.”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해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추운지 코가 빨갰다.
   전시장에 먼저 도착해 있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나는 불현듯 내가 그들을 오래전부터 알아 왔고 비슷한 대화를 지겨울 정도로 자주 나누었다는 착각이 들었다. 해주가 먼저 전시장으로 들어가 내게도 얼른 오라고 손짓했다.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는데 해주는 자연스럽게 무리로 스며들었다.
   밖에서 관람하게 되어있는 화면 속에는 여자들이 있었다. 거실 창틀에 걸터앉은 여자. 흐트러진 침대에 누워있는 여자. 고개를 숙인 채 욕조에 쪼그려 앉은 여자. 신디 셔먼의 사진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차례로 흘러나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영상 속 여자들은 속옷만 입거나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영상을 계속 보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어둑한 화면에서 임주미씨의 얼굴을 찾고 있었다.
   눈발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놀랄 것도 없었다. 아직 겨울이었으니까. 겨울에 눈은 시도 때도 없이 오니까. 잔뜩 내리고 쌓이고 얼어붙었다가 마침내 녹아서 더러워지다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게 눈이었다. 그것도 봄이 와야 말이지만. 나는 갑자기 걷고 싶어졌다. 큰 도로까지 걸었을 때 손에 꽃다발이 들려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냥 계속 갔다. 마로니에 공원 쪽으로 방향을 잡고 뛰기 시작하자 붉은 꽃잎 몇 장이 걸음보다 앞서 날렸다.

정빛그림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미적 작업이라는 통로를 통하여 사건으로 변하는 순간, 그때의 운동성을 좋아한다. 흔들림과 변화, 너무 미묘해서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감정과 그 감정으로 인한 깨달음. 아픔을 담보로 성장한 인물이 잠깐 마주치는 짧은 순간에 대하여 생각하며 쓴다.

2019/10/29
2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