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

   -반인반마 죽이는 법
   1. 두 번 죽여야 함. 악마인 동시에 인간인 자들이니, 너는 악마로서의 그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먼저 이 세상에서 몰아내고, 인간으로서의 그를 마저 죽여야 해.
   2. 명심하도록. 악마를 먼저 죽여.
   3. 네가 악마를 죽이는 방법을 물을까봐 적어둔다.
   (+) 악마를 완전히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세상에서 잠시 몰아낼 수 있을 뿐이지.
   성수를 쓰거나 십자가를 써라.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악마의 이름을 부르는 거다.
   안 된다고? 셋 다 차례차례 해봐. 아니면 동시에 하든가.

방과 후 수학 교실 2+1개월 행사! 010-XXXX-X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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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가 죽었을 때 헥터 프라이데이는 열한 살이었다.
   헥터의 어머니, 사라 프라이데이에겐 일곱 명의 애인이 있었는데 잠자는 사이 모두 사라에게 목이 졸려 살해당했다. 희생자가 일곱 명에서 그친 건 마지막 살인을 헥터가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린 헥터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부르며 현장에서 뛰쳐나왔고, 살인 현장은 마을 사람들에게 발각되었다.
   사라는 제가 사람을 죽인 건 아들인 헥터가 악마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악마인 헥터가 어머니인 사라를 악한 힘으로 조종했다는 것이다.
   이후 사라 프라이데이는 살인죄로 감옥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수건으로 목을 매어 목숨을 끊었다. 헥터는 살인자의 자식이라고 비난받다가 고아원에 보내졌으나, 곧 대전쟁이 유럽을 휩쓸었고 고아원은 사라졌다. 거리로 내몰린 헥터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프라이데이 모자를 살인자라 부르던 이들 중 남자들은 모두 전쟁터에 끌려가 죽었으나,
   “여자들은 마을에 남아 있더군.”
   헥터가 제 어깨에 머리를 묻고 끙끙거리는 남자의 귀에다 읊조렸다. 남자는 자살 충동, 그러니까 자해 욕구에 시달리는 평범한 한국인이었고, 헥터에게 서울에 있는 자기 집에서 하룻밤 묵고 가지 않겠냐 제안한 이였다. 고맙진 않았다. 헥터는 그의 눈에서 욕망을 읽었고, 원하는 것을 준 참이었으니까.
   남자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헥터는 남자의 젖은 머리칼을 쓸어올리곤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곤 말을 이어갔다.
   “그 여자들, 어떻게 죽었는지 궁금하지 않나?”
   남자는 허리를 움직이며 헥터의 등을 끌어안았다. 헥터는 오른손 검지와 엄지로 남자의 턱을 잡고 들어올렸다. 이제 남자는 입맞춤, 그리고 절정을 기대했다. 눈앞에 있는, 금발에 몸 좋은 백인 남자가 좀 전엔 이마에 입맞춰주지 않았는가. 그러니 그다음엔……
   ‘……너무 흥분한 탓인지 머릿속이 하얗다. 죽고 싶단 생각 따윈 개나 주라고 하지. 그러나 숨이 막히고, 산소가 부족하다. 누군가 내 목을 조르고 있는 것 같다. 목을 조르고 있는 건 누구지? 지금 나와 침대에 있는 백인 남자의 양손은 내 뺨에 닿아 있는데…… 끈을 썼나? 아니, 아니다. 내 목을 조르는 팔에 익숙한 문신이 보인다. 저건 내……’
   마지막으로 들은 건, 마치 어린 나뭇가지처럼 간단히 꺾이며 제 목이 낸 우두둑 소리였다.
   헥터는 혀를 차며 남자를 밀어냈다. 아직 식지도 굳지도 않은 시체가 맥없이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샤워하고 나서, 헥터는 남자의 옷장을 뒤졌다. 남자의 어깨너비나 키가 헥터와 얼추 비슷했기에, 헥터는 꽤 만족스러운 쇼핑을 할 수 있었다. 검정 트렌치코트, 청바지, 그리고 고급 시계. 시침은 2를 가리켰고, 창밖의 하늘은 아직 검었다.
   마침 화장실에 양동이가 있었고, 남자의 거실은 넓었다. 헥터는 부엌에서 가져온 식칼로 익숙하게 남자를 그으며 피는 양동이에 받았다. 아직 따뜻한 심장을 꺼냈다. 이젠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는 복잡한 문양을 바닥에 그렸다.
   혹시 모르니……
   “아버지 루시퍼여, 오소서.”
   침묵이 흘렀다. 헥터는 연거푸 불러보았으나, 답은 없었다.
   다른 놈들은 잘만 오는데 왕은 오지 않는다. 이미 여러 번 그려본 루시퍼의 소환진이었기에, 헥터는 제가 그림을 잘못 그렸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소환진보단 다른 쪽 문제겠지 싶었다.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점을 헥터는 잊지 않고 있었다. 악마 소환은 일종의 심리전이다. 정성을 다하지 않는 인간이 악마를 감동하게 만들긴 어렵다. 그렇다고 헌신하면 헌신짝 되기도 쉬웠다. 또, 거물일수록 협상은 어려운 법이다. 이쪽도 상대방도 호구 되기 싫은 건 마찬가지니까.
   그는 바닥에 고인 핏물을 내려다보았다. 이거 갖곤 안 되는군. 그리 놀랍진 않았으므로, 그는 머리를 긁적이곤 다른 이름을 불렀다.
   “시트리.”
   피 웅덩이가 아닌 다른 곳에서, 백정장에 횟가루 하나 묻히지 않은 검은 머리의 남자가 솟아올랐다. 눈엔 짜증이 잔뜩 서려 있었음에도 남자는 놀라우리만치 아름다웠다.
   “너, 이번에도 내게 담뱃불 좀 꺼달라 수준의 시시껄렁한 일을 시킬 셈이지?”
   “시체 좀 치워 줘라. 아니, 집을 좀 치워 줘. 내가 왔던 흔적일랑 모조리 사라지도록.”
   시트리가 얇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니까, 빨리 각성을 하란 말이다. 이런 일쯤은 네가 직접 해! 충분히 할 수 있잖아!”
   헥터가 고개를 갸웃했다.
   “굳이?”
   “……”
   문자 그대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악마를 뒤에 남기곤 현관문 밖으로 나와서야, 헥터는 어째서 죽은 남자가 걱정 없이 저를 들여보내 줬는지 깨달았다. 복도에 하나, 층계마다 하나. CCTV가 있었다.
   헥터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선 가는 곳마다 이랬지. 이 나라에 오기 전엔 이렇게까지 CCTV가 많은 줄은 몰랐는데.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카메라라는 물건에 찍혀본 적이 없었다. CCTV라고 다르겠냐 싶었다.
   그는 CCTV에 슬쩍 손을 흔들어보았다. 카메라가 미동조차 하지 않자, 그는 조금 무안해져 오피스텔을 빠져나왔다. 새벽 두 시임에도 번화한 거리였다. 네온사인은 휘황찬란했고, 술에 취한 사람들이 시끄럽게 소리지르고 울며 걷고, 토하고, 택시를 잡으려 손을 흔들었다.
   핼러윈 무렵이었다.
   헥터는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꺼냈다. 택시는 금방 잡힐 것이었다. 그는 도시 외곽으로 빠져야 했다. 정확한 도시 이름은 모르지만, 북쪽으로, 그리고 동쪽으로. 그렇게 가다 보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헥터는 믿었다. 그는 수도권에 인구가 얼마나 많은지 잘 몰랐다. 그저 어느 친숙한 침대 매트리스 위에 뭉쳐진 바지에서 얻은 지갑 속 지폐와 카드만 믿었다. 길을 헤매더라도 운전사에게 건넬 돈이 있으면 문제 될 일은 없겠지.
   헥터는 성기고 짤막하게 돋은 턱수염을 엄지로 쓸었다. 그는 마음을 느긋하게 먹었다. 초를 다투는 일은 아니었다, 아버지를 만나는 일은. 게다가 이미 그는 백 년이 넘도록 기다리지 않았는가. 앞으로 고작 며칠이 남은 것이다.

***

   샛별은 어둠 속에서 헤드폰을 벗어던졌다. 책상 유리에 부딪힌 헤드폰이 딸그락 소리를 냈고, 여전히 게임 BGM을 쏟아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잡았던 게임을 다시 하려니 영 손에 붙지 않았다. 어느 분야에서든 감이라는 것을 쉽게 잃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그 애에게 게임에 접속하지 않은 5년의 세월이 문제는 아니었다. 최소 한 사람의 동료가 있어야만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는 게임이란 게 문제였다. 그리고 로그인 정보에 따르면, 샛별의 유일한 게임 동료는 게임에 접속하지 않은 지 천 일을 넘긴 상태였다.
   샛별이 피식 웃었다. 어머니가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지금, 몇 달에 겨우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쉬는 주말’에, 생각해낸 할 일이란 게 고작 이따위였다.
   휴대폰 연락처의 ㄱ부터 ㅎ까지 스크롤을 내려, 낯익은 이름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겨 보려 했으나 열한 살 때 학교 다니는 것을 그만뒀기에 연락처 속 이름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스크롤을 내리던 손가락은 이제는 연락이 끊어진 ‘아빠’에서 잠시 멎었다가, 이내 다시 움직였다. 그러나 ‘송지서’에서 멎고 말았다. 샛별의 게임 동료이자 처음으로 사귄 아이. 아마 휴대폰 갤러리의 몇 장 안 되는 사진 중 그 애가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도 있던 것 같았다. 어머니가 누구냐고 물어보며 재밌어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다른 사진들과 달리 인화해서 액자에 넣어두지도 않았다.
   전화번호, 안 바뀌었으려나.
   샛별은 의자를 뒤로 물리고 추리닝 상의를 집어 대강 걸쳤다. 편의점에 가서 콜라며 과자 같은 것을 사 오고 싶었다. 먹다 보면 시간이 잘 갈 것 같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뭐라 말하고 갔더라.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숙제 잘해라. 와, 내가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어린 녀석 하나 기르는 일이 나를 완전히 망쳐놨군.”
   샛별이 냉큼 대꾸했다.
   “그럼 가세요, 아줌마. 저는 다 컸고, 이제 보호자가 필요 없어서요.”
   그 말에 여자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이런 게 자식 키우는 맛이지. 그래, 정말로 숙제 잘해라. 뭐, 싫으면 다른 애들이 하는 구몬 같은 거라 생각하든지…… 언젠가 네 목숨을 좌지우지할지도 모르는, 그런 구몬 말이야. 그리고 나 없이 집밖으로 나갔다간 꽤 곤란해질지도.”
   샛별이 이맛살을 구겼다.
   “어머니, 구몬이 뭔지도 알아요?”
   하여튼.
   샛별은 수학학원에서 돌린 포스트잇에 어머니가 휘갈겨 적은 메모를 꼼꼼히 읽었다. 반인반마를 죽이는 방법이라니, 딱히 근시일 내로 겪을 일 같진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숙제 검사를 할 터였다.
   숙제는 다 했다. 토빗기, 즉 개신교와 유대교에서는 외경으로 분류되는 이야기가 숙제 범위였다. 그러니까 숙제는 성경 요약이었다.
   구몬이라고 하지만, 성경을 읽고 요약하는 것을 보호자가 시켜서 해야 하는 애가 세상에 또 어딨겠는가?
   ……아니, 많겠구나. 미친 세상아…… 여기까지 생각하자 샛별은 새삼 탄산이 당겼다.
   기껏해야 요 앞의 편의점이다. 무슨 일 있겠는가?
   현관문을 열자마자 담배 연기가 훅 끼쳤다. 아파트이고, 샛별의 집 앞이었다. 샛별은 눈살을 찌푸리며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여름 교복에 체육복 바짓바람으로 담배 한 모금을 빨며 저를 올려다보는 송지서의 빤한 시선과 맞닥뜨렸다.
   지서가 담배를 벽에 비벼 끄고 씩 웃었다. 5년 전만큼 앳된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송지서였다.
   “이사 안 갔냐.”
   “……뭐야.”
   훗날 샛별은 구 애인에게 좀더 멋있게 반응했어야 했다고 후회했지만, 당시로선 최선의 대응이었다. 잔뜩 당황한, 그러나 상대방에겐 무뚝뚝해 보일 것이 뻔한 낯으로 ‘뭐야’라고 내뱉는 것. ‘마침 네 생각을 하고 있었고, 네가 나타났다.’ 따위의 능숙한 대사 따위 머릿속에서 떠오르지도 않았다. 기겁하며 ‘네가 어떻게, 왜 여기에?’라고 말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지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나 좀 들어가도 되냐? 추운데.”
   샛별은 결국 묻고 말았다.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이렇게 오랜만에, 라는 말은 간신히 삼킬 수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샛별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었다. 떠난 것은 샛별이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문고리를 붙든 샛별의 커다란 손에 손가락 한 마디쯤 더 작은 손이 얹혔다. 밖에 오래 있었던 것인지, 지서의 손은 차가웠다. 샛별은 그 냉기에 새삼스레 지서의 눈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빛없는 까만 눈이 무덤을 파헤치고 돌아온 사람의 것처럼 느껴졌다.
   지서가 입을 떼자 허연 입김이 흘러나왔다.
   “나 가끔 여기 왔어. 네가 없던 거지.”
   그 말은 꼭 책망처럼 들려서, 샛별은 항변하고 싶어졌다. 나도 네 생각을 가끔 했다고, 오늘도 네게 전화를 걸까 생각했다고.
   지서는 샛별보다 머리 하나쯤 키가 작았다. 상의는 얇은 하복 셔츠였고, 어깨는 슬몃 떨리는 것 같았다. 샛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빼내 지서의 손목을 붙들었다.
   “난 편의점 갈 거니까,”
   들어와 있어. 샛별은 그렇게 말하곤 지서를 문 안으로 끌어당겼다. 현관 등 센서가 반응해 불이 깜빡, 켜졌다.
   한동안 둘은 그렇게 말없이 있었다.
   샛별은 제 숨소리가 너무 크단 생각이 들었다. 그게 상대방에게 불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들었다. 숨을 참으려고 애쓰면서도, 시선은 지서에게서 떼어내지 못했다. 그러다 샛별은 지서의 목에 박힌, 가로로 기다랗고 울긋불긋한 멍자국을 보았다.
   현관 등이 꺼지고, 지서가 제 손목을 샛별의 손아귀에서 빼냈다. 눈빛이 흔들린 것은 일순이었다. 지서의 입가에 다시 천연덕스러운 미소가 돌아왔다.
   “칫솔 하나만 사다 주라.”

***

   택시 기사는 이따금 거울에 비친 손님을 힐끔거리며 차를 몰고 있었다. 검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외국인 남자였다. 신기하게도 한국말을 잘하는. 사실 남자의 목소리는 기사에게만 한국말로 들리는 것이었지만, 기사는 눈치채지 못했다. 남자의 입술 움직임이 그에게 들리는 소리와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택시 뒷좌석에 앉은 남자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이따금 좌회전, 우회전, 직진이라고 말하는 것 외엔.
   그때 검은 날벌레 떼가 택시를 훑고 지나갔고, 기사는 깜짝 놀랐다.
   “벌레들이 미쳤나, 며칠 뒤면 11월인데 말이에요. 그쵸?”
   남자가 말했다.
   “저 앞에서 세워줘요.”
   택시 기사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으나, 괴팍한 손님을 한둘 만난 것은 아니었기에 순순히 차를 세웠다. 그리고 그가 부른 택시비를 군말 없이 카드 결제로 치르고 나간 손님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차를 돌렸다.
   한편 헥터 프라이데이는 어이가 없었다. 지도로 미리 보아 알고 있긴 했지만 여긴 새삼 좁아터진 땅덩이였다. 수도에서 다른 도시로 오는 데에 몇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니.
   아버지의 마지막 흔적으로부터 1km도 떨어져 있지 않다니.
   그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시트리, 여기가 맞나?”
   악마가 검은 아스팔트에서 솟아나 대꾸했다. 그는 짜증이 나 있었다.
   “질문에 대답하자면, 이 근처가 맞다. 그리고 나를 사역마처럼 부리는 것을 그만둬라.”
   헥터가 물었다.
   “말했잖아? 굳이 그만둬야 하나?”
   이를 악물고 웃자, 악마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언젠가 우린 지옥에서 다시 만날 것이야. 그땐 너도 생전에 좀더 예의를 차렸어야 했다고 생각하게 될 테지.”
   헥터가 웃었다.
   “나는 너보다 악마로서 우월하지 않나? 네가 지금 내게 빌빌대는 것은 다 내가 아버지 루시퍼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닌가?”
   시트리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건 네가 루시퍼로부터 받은 힘을 조금도 잃지 않고 지옥으로 돌아가야만 가능한 일이다. 한 마디로, 네가 인간으로서 죽어버리면 너는 차기 지옥의 왕이 될 수 없어. 그저 나와 같은 72위 악마 중 하나일 뿐이지. 그날이 오면 너는 어떤 조건에서도 나보다 우월할 수 없다.”
   헥터가 물었다.
   “내가 지옥을 차지하려면 인간의 육신을 잃지 않으면 된다 이건가? 왜? 인간의 육신이……”
   헥터가 제 양 손바닥을 쳐들어 보였다.
   “……그렇게 중요한가?”
   시트리가 넌더리를 냈다.
   “그 육신이야말로 루시퍼가 인간 따위와 관계했다는 증거니까! 과거 루시퍼는 인간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겠답시고 높으신 분의 아들이 태어나 죽기 전까진 그랬어. 이젠 무슨 생각인지 백 년에 한 번씩 인간과의 사이에서 새끼를 치고 다니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하여튼……”
   갑자기 시트리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곤 말을 이었다. 낯에도 우중충할 낡은 빌라가 늘어선 좁은 골목이었다. 차 지나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는, 네 ‘족속’은 우리가 루시퍼에게 반기를 들 때 들이밀 결정적 증거다. 루시퍼는 두 차례 배신했다. 예전엔 신을, 이제는 악마를. 우리가 좀더 힘이 강했다면 진작 몰아냈을 거야.”
   “새겨듣도록 하지.”
   헥터는 걷기 시작했으나 시트리는 얼마 후 멈춰 섰다.
   “나는 이 이상 가지 않겠다. 너무 가까워.”
   헥터가 뒤를 돌아보았다.
   “뭐가 가깝다는 거야? 아버지 루시퍼?”
   온전한 악마가 성을 냈다.
   “쉿,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 마! 아까 벌레떼를 보지 못했나? 그 자이든, 그의 흔적이든…… ‘저기’ 있다.”
   시트리가 성처럼 솟아있는 아파트 단지를 가리켰다.

***

   50원짜리 비닐봉지를 거꾸로 털자, 떨어진 것은 칫솔뿐이 아니었다.
   “라면, 과자, 콜라도 있네. 그리고…… 맥주?”
   지서의 의아하단 눈빛에 샛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억울하단 투로 내뱉었다.
   “아까 너도 담배 피우더니.”
   “나는 아빠 거 훔친 거고.”
   “나도 쌔볐어.”
   “그래도 그렇지, 편의점에서 술을 가져왔어? 어떻게? CCTV에 다 찍혀, 인마. 아니면 너, 설마 얼굴로 속였어? 초딩 때보다 나이 먹긴 했어도, 잘 봐줘봤자 고등학생 얼굴인데? 그나저나 너……”
   갑자기 바싹 다가온 지서의 기세에 눌려, 샛별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섰다.
   “더 잘생겨졌다.”
   “……고맙다.”
   샛별이 고개와 함께 말을 돌렸다.
   “야, 그럼 너 가끔 우리집 앞까지 왔다가 그냥 간 거야? 5년 동안?”
   “너야말로 5년 동안 어디서 뭐 하고 지냈는지 얘기 좀 해 봐. 갑자기 학교 안 나오기 시작하더니…… 반 애들도 그렇고, 선생님까지 아예 널 기억도 못 하더라고.”
   지서가 거실 소파에 다소 거칠게 앉는 바람에 날아오른 먼지가 춤을 추듯 반짝였다.
   “‘주샛별? 걔가 누군데?’ 너 그렇게 가고 나 완전 미친년 됐잖아. 여기, 너희 집에서 같이 게임도 했었는데.”
   지서가 열 손가락으로 키보드 두드리는 시늉을 했다. 그게 미안하면서도, 샛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아함이 스쳐지나갔다. 어떻게 나를 기억하고 있지?
   지서가 라면 봉지 하나를 흔들어 보였다. 어릴 때 알던 얼굴이 녹아있지만, 등허리까지 기른 머리카락은 생경했다. 뺨에 닿을 듯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미처 가리지 못한 여드름 밴드도 그랬고.
   “어머니가 왔어. 그리고 나, 이제 학교 안 다니기로 했어.”
   “너 아빠랑 둘이 살지 않았어? 엄마 없다며. 갑자기 무슨 소리야?”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 무더위인데 묶지도 않은 단발머리에, 아직 담배도 피우지 않는 열한 살 지서의 표정이 심각해졌었다.
   ‘그리고 너 왜, 엄마라고 안 하고 어머니라고 해?’
   
   “주샛별, 이거 내가 끓인다?”
   샛별은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밀었다.
   “넌 손님이잖아. 내가 끓일게.”
   넘겨주고 넘겨받는 손이 닿지 않도록, 샛별은 검지와 엄지로 라면을 건네받았다. 보일러를 틀어둔 덕에 훈기가 돌아서일까, 지서의 얼굴이 빨갰다. 추운 밖에 있다가 들어와서 그런 것이리라, 샛별은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라면을 끓이려고 싱크대 앞으로 다가간 샛별의 팔을, 더운 손이 붙들었다.
   차마 그 손을 떼어내지 못하고, 샛별이 입술을 달싹였다. 눈앞엔 아까 본 목둘레의 멍자국이 잡힐 듯 선명했다. 뭐라고 말할까.
   뭘 기대한 건지 모르겠다. 아니, 알겠다.
   갑자기 샛별은 상황이 이상함을 깨달았다. 오래전에 헤어진 연인이 재회한 달디단 상황 따위가 아니다. 지서는 아마 저를 두들겨 패는 사람을 피하려 샛별을 찾은 것이다. 5년 전 인연까지 끄집어내 찾아올 정도로 절박했으리라.
   ‘간섭하지 마라.’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너는 저들과 달라. 우리가 인간에게 호의를 베풀면, 그 인간은 반드시 좋지 못한 말로를 맞이하게 된다고.’
   샛별은 속으로 그 말을 되뇌었다.
   네가 기억하는 열한 살짜리 여자애, 잘 웃고 잘 떠들던 애는 이제 없어. 어머니에게 교육받은 5년 동안 나는 완전히 바뀌었어.
   나는 네가 기대하는 그런 사람 아냐. 너를 도울 수 없어. 너를 도와서도 안 돼. 내가 다 망칠 거야.
   그렇게 말하는 대신,
   “……이거 먹고, 가.”
   차라리 목을 조르고 두들겨 팰, 아버지의 집으로 돌려보내려는 것이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샛별이, 지서를.
   팔을 붙든 손이 스르르 떨어졌고, 샛별은 냄비에 물을 받았다. 물은 차가웠다. 얼얼할 정도로.

***

   “어머니와 나를 살인자라 부르던 그 마을 여자들, 어떻게 죽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이젠 대꾸해주는 시트리가 없었기에 헥터의 목소리는 그대로 허공에 흩어졌다. 어느새 입김이 나올 만치 추운 공기가 어둠을 메우고 있었고, 회양목이며 주목나무가 가로등 빛을 받아 번들번들 빛났다. 아무도 없었기에, 사방이 고요했다.
   헥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해질녘까지 저녁 먹으러 들어오지 않는 아이들을 찾으러 여자들이 집밖으로 나왔다. 아이들 딴엔 저들만 알고 있다 여겼던 비밀 장소들…… 성스러운 교회의 지하실, 으슥한 전나무 숲의 널빤지 집, 농부들이 쌓아놓은 건초더미 뒤편, 속이 깊은 고목의 구멍 속…… 잘 찾아올 수 있도록 군데군데 찢어진 옷조각 같은 힌트를 뿌려두긴 했지만, 애초에 아이들의 비밀 따윈 죄다 알고 있었어. 아이들의 어머니인 여자들도, 그리고 나도.”
   그때 멀찌감치서 눈가를 닦으며 지나가는, 여름 반팔을 입은 여자아이가 헥터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낮게 읊조렸다. 그러나 지나가는 이들의 눈엔 통화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다른 가난한 집 자식 따윈 안중에도 없는 여자들도 자기 자식 일엔 울며불며 애원하더군. 그런 이들이 제 손으로 사랑하는 아이의 목을 비틀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재밌던지.”
   여자아이가 빠른 걸음으로 헥터를 스치고 지나갔을 때, 헥터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찾던 아버지, 혹은 형제자매가 방금 이 소녀와 접촉했다는 것을.
   행운이 아닌가? 그는 미끼를 발견했고, 일은 쉬워질 터였다.
   벌써 꽤 벌어진 소녀와의 간격을 어림하며, 헥터는 걷기 시작했다. 눈물에 시야가 부옇게 흐려져 저를 따라오는 누군가가 있는 줄도 모르는 지서가 걷고 또 걷다가, 제 아파트 계단실로 들어갈 때까지.
   지서는 식은 눈물을 흘리며 걸었다. 이 밤, 지서는 배고프고 두렵고 춥기에 제가 알고 있는 따뜻한 것을 떠올리려 애쓰는 중이었다. 이따금 제 멍자국을 눈치채준 초등학교 선생님들, 원망스러운 마음을 비집고 불쑥 생각나는, 어릴 적 저를 토닥여주었던 샛별의 손에 어려 있던 온기 같은…… 그러나 이 밤은 마지막까지 모질게 굴어 마땅하다는 듯, 울고 있는 지서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그저 사랑했던 아이와 좀 전까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악마의 아들에게……
   미처 뒤를 돌아보기도 전, 막막한 어둠이 지서를 덮쳤다.

***

   샛별은 보았다. 아파트 창문으로, 저 아래에서 성냥개비처럼 작아 보이는 지서를. 몹시 후회스러웠다. 멍자국을 보는 게 아니었는데.
   불어터진 라면 1인분이 냄비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샛별의 기억 속 지서는 한여름에도 좀처럼 살갗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늘의 샛별은 반팔 하복을 입고 늦가을 밤을 쏘다니고 있었지만……
   지서가 빨개진 얼굴로 외쳤었다.
   “이제 내가 노는 애라고 너도 날 무시해? 내가 살인자라도 되는 것처럼 대한다? 내가 너무 더러워서 어울리기도 싫다 이거지.”
   그런 이유로 내보낸 것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샛별은 그 말을 뇌리에서 떨칠 수 없었다.
   문득 오래전에 아빠가 읽어준 전래동화가 떠올랐다. 죽은 돼지 사체를 짊어진 남자가 ‘내가 사람을 죽였다’라고 말하니, 오직 그의 진실한 친구만이 남자를 집안에 들이고 숨겨주었단 이야기. 처음 들었을 땐 아빠에게 묻긴 했다. 친구가 범죄 저지르면 경찰에 신고하는 게 진실한 친구 아니냐고. 그때 아빠가 뭐라 답했는지, 샛별은 구체적으로 기억이 나진 않았다. 그러나 돼지 사체를 짊어진 남자의 막막함은, 믿었던 친구들에게 내쫓긴 마음만은 어찌어찌 샛별의 머리에 각인된 것을 보니, 아빠가 무진 애를 썼던 모양이었다.
   ……막막함이라.
   상관없다. 제 아버지한테 맞다가 이제는 소위 노는 애가 된 옛 여자친구 따위, 완전 알 바 아니고말고. 그렇게 생각하며 샛별은 다시 추리닝 상의를 집어들었다.
   예의 느긋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 없이 집밖으로 나갔다간 꽤 곤란해질지도.’
   그걸 경고라고 할 수 있나요, 어머니? 그렇다면 두 번씩이나 곤란 속으로 굳이 기어들어가는 저를 용서하시길.
   빈집의 현관문이 닫혔다. 그리고 전화벨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이제야 받는구만. 네 집 벽에 어떤 대단하신 분의 마법이라도 걸려 있나 봐? 영 뚫고 들어갈 수 없더라고.]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는 어딘가 익숙하고도 낯설어서, 샛별은 혹 제가 아는 이인가 싶어 기억을 짜냈다. 없었다. 지서의 아버지인가?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히 힘 빼지 마. 넌 날 몰라. 난 널 알지만.]
   샛별은 괜스레 힘주어 대꾸했다. 누가 뭘 시키면, 꼭 그 반대로 하고 싶었다.
   “네가 누군지 알아낼 수 있어.”
   [그래, 곧 알게 될 거야. 아, 맞아……]
   남자가 웃었다.
   [네 친구는 내가 데리고 있어. 친구의 집쯤은 기억하겠지?]
   샛별은 혼란스러웠다. 진짜 지서의 부친이신가. 그 망할 놈?
   그때 머릿속에 어머니의 경고가 떠올랐으나, 샛별은 무시했다.
   샛별이 짧게 대꾸했다.
   “기다려.”
   [좋아, 오는 동안 서로 통성명이나 하며 시간 때우자고. 나는,]

***

   전화가 끊어지자 헥터가 투덜거렸다.
   “……성질 한번 급하네. 그치?”
   그렇게 말하며 제 가슴께에 머리가 올락 말락 작은 키의 여자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자기 집 문 앞에서.
   헥터는 그게 조금 묘하다고 느꼈다. 아이의 집엔 가족들이 있을 터였고, 가족들은 아마 사태 파악을 마친 순간 헥터에게 덤벼들 것이다.
   그런데 이 여자아이는 왜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는가.
   문이 열리자 헥터는 답을 알게 되었다.
   “……미친년이, 어디서 걸레같이 몸을 굴렸길래 이런 놈을 달고 와? 야 이……”
   아, 이런 집구석이었군.
   헥터가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술에 곯은 데다 배 나온 중년 남자라니, 전혀 내 취향 아냐.”
   불콰한 낯의 남자가 멈칫하더니, 신발장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던 야구 방망이를 집어들었다. 잔뜩 겁을 먹은 남자가 잇새로 쉴 새 없이 시발, 시발 중얼거리며 도사렸지만, 헥터는 아무렇지 않게 서 있었다.
   지서는 충혈된 눈으로 그런 둘을 번갈아 보았다. 헥터의 키가 컸기 때문인가, 아버지가 이상할 만치 작아 보였다.
   헥터가 말했다.
   “그 야구 방망이 이리 줘.”
   그리고 지서는 보았다. 아버지의 얼굴 근육이 기묘하게 뒤틀리더니, 마치 무언가를 빼앗기지 않으려 애쓰는 표정으로…… 처음 본 남자에게 야구 방망이를 건네주는 것을.
   헥터는 야구 방망이를 지서에게 주었다. 그리고 엉겁결에 받아든 지서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속삭였다.
   “저놈 죽여.”
   야구 방망이를 쥔 지서의 손이 높이 올라가더니, 맞은 편의 아버지의 머리를 내려쳤다. 맞은 이가 비틀거리며 현관 벽을 붙들었다.
   핏방울이 바닥에 점점이 떨어졌다.
   헥터가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항하지 마, 시간만 낭비될 뿐이니까. 나는 저자가 싫어. 그리고 너도 그렇게 생각할 텐데?”
   지서가 한번 더 야구 방망이를 휘둘렀다. 야구 방망이가 더 빨라진 속도로 아버지의 어깨를 강타했다. 아버지가 무릎 한쪽을 꿇더니, 핏물과 눈물, 침이 흘러내린 얼굴을 들어 제 딸을 올려다보았다. 불결하고 불쾌했다. 지서는 입을 벙긋거렸다. 뭐라 말하고 싶었으나, 목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최초의 반격을 내가 아닌 타인의 의지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는 손은 나의 손……
   그것이 참을 수 없이 끔찍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기뻤다.

***

   머리가 으깨진 피투성이 시체 옆에 여자아이가 엎드러져 있었다.
   샛별은 곧장 지서에게 다가갔다. 코 아래에 손가락을 대보니, 따뜻한 숨이 느껴졌다. 그러는 동안 왼쪽, 어둠 속 소파에선 도저히 무시하기 힘든 익숙하고도 낯선 존재감이 풍겨왔다.
   “그 앤 괜찮아. 그러니 이쪽도 좀 봐주지 그래.”
   헥터가 말했다. 그는 소파에 앉아있었다.
   샛별이 일어났다. 지서를 살펴보느라 꿇었던 바지 무릎은 빨갛고 척척했다.
   발걸음을 떼자 바닥에 놓여있던 야구 방망이가 채였다. 역시 핏물이 배어 있었다.
   “네가 죽였어?”
   “저 남자? 아니. 야구 방망이를 휘두른 건 그 애야.”
   헥터가 덧붙였다.
   “아마 저 애는 야구 방망이 휘두르며 신나지 않았을까.”
   “집어치워. 너, 뭐냐?”
   “천천히 해. 그보다 너, 저 애 때문에 이렇게 달려올 정도면 꽤 친한 사이였나 본데…… 그런데도 쟤 아버지가 딸을 때리는 놈인 줄 몰랐나?”
   샛별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 모습을 헥터는 퍽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곤 소파를 툭툭 쳐 보였다.
   “좀 앉아.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얘기 좀 나누자고.”
   “난 할 얘기 없어.”
   “딱딱하게 그러지 마. 너 그럼, 설마……”
   헥터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우리가 남매라는 걸 알아도, 나와 얘기하기가 싫어? 백 살이나 어린 동생아.”
   샛별이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뜨렸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헥터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설마…… 아버지가 말을 안 하셨나? 이것 참 섭섭한데.”
   아버지? 아빠?
   동요한 기척을 내비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샛별은 생각했다.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라고? 샛별이 아는 한, 아버지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비록 자궁이 있어서, 달마다 생리를 하긴 하지만…… 그 외엔 평범한 시스 헤테로 남자. 그렇게 알고 있었다, 샛별은.
   “앉으라니까.”
   싫다고 했잖아.
   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다리 근육이 먼저 움직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힘이 외부가 아닌 샛별의 내부에서 이끄는 것처럼.
   샛별은 휘청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짝, 한 발짝. 피가 고인 바닥을 밟았다. 시체의 배를 밟았다. 이를 갈며 멈추려 저항했지만, 결국 소파에 도착했고 앉을 수밖에 없었다.
   헥터가 킬킬댔다.
   “앉으라고 한 거, 부탁이 아니었어. ‘나와 같은 존재’를 다루는 것은 처음인데, 꽤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말을 잘 듣는구나. 착해.”
   헥터가 샛별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개를 칭찬하듯. 샛별은 그 손을 쳐낼 수 없었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눈, 그리고 입뿐이었다.
   ‘뭐지? 나와 같다고? 정말로 반인반마인가?
   내게 정말로 형제가 있다고?’
   “너 진짜 생각이 표정에 다 드러나는구나. 재밌네…… 나는 네가 궁금했어. 악마 하나가 알려주었거든. 내게 배다른 동생이 있단 사실을 말이지.”
   샛별은 뜻대로 안 되는 몸 대신 사고에 집중했다. 방금 이 자는 ‘힘’을 썼다. 반인반마가 맞다, 아마도.
   내 형제인 것도 아마 맞겠지. 아빠나 어머니나, 내게 비밀이 많은 사람인 것은 새삼스럽지 않아.
   헥터의 표정이 바뀐 것은 순식간이었다.
   “보고 나니까 그냥 빽빽거리는 평범한 애새끼라서 딱히 깊은 이야길 나눌 정도로 마음이 동하지 않네. 잠깐 앉아있을래?”
   헥터가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같은 동족이기 때문일까, 샛별은 그의 다음 행동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자식은 반쪽짜리 악마일 뿐 아니라 반쪽짜리 인간이었다. 게다가 미친놈이었다. 미친놈이 뭘 할지는 너무도 뻔했다.
   헥터는 식칼을 들고 왔다.
   “자, 그러면 바닥에 누워줄래?”
   샛별은 그가 시키는 대로 바닥에 누웠다. 여전히,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입밖에 없었다.
   “뭘 하려고?”
   “네 심장을 꺼내어 아버지를 소환하려고 해. 보통의 제물로는 영 와주질 않더라고. 하지만……”
   남자의 목소리가 어찌나 태평한지, 유튜브 채널에서 ‘지금부터 요리를 하려고 합니다. 먼저 생선 비늘을 긁어내고 내장을 뺄게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딸이라면, 좀 다르게 반응하지 않겠어?”
   샛별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반인반마를 죽이는 방법, 알긴 해?”
   “뭐, 성수를 쓰거나 십자가를 쓰면 되지 않을까? 공교롭게도 지금의 내겐 둘 다 없네. 할 수 없지 뭐.”
   헥터가 식칼을 쳐들었다.
   “제아무리 반인반마라도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반인반마를 죽이는 방법. 먼저 악마로서의 이름을 불러 그를 몰아내고…… 이름……
   그러나 지금 샛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악마의 이름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식칼이 목을 겨냥하고 내리꽂히는 순간, 비명처럼 외쳤다.
   “루시퍼!”

***

   헥터는 보았다.
   짤막한 검은 머리를 빗어넘긴, 검은 정장 차림의 여자가 맨바닥에서 느릿하게 솟아오르는 것을.
   “……여자라고?”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몇 발짝 물러났다. 여자는 거의 헥터만큼 키가 컸다. 게다가 동양인 얼굴이었다.
   말도 안 돼.
   여자가 딸을 내려다보며 간결하게 말했다.
   “불러서 왔다.”
   제물도 쓰지 않고, 소환진도 그리지 않았는데 왔다고? 저 계집애의 말 한마디에?
   미소가 그려진 헥터의 가면이 부서졌다. 그는 경련하는 입 근육을 간신히 제 뜻대로 움직이며 물었다.
   “당신이 루시퍼인가? 내 아버지……”
   그는 숨을 삼키곤 물었다.
   “……어머니?”
   “그렇다.”
   짧은 대답. 그리고 루시퍼가 헥터를 보았다.
   “사라가 너를 낳았지. 그녀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나?”
   헥터가 간신히 일그러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여자는 내게 자질구레한 걸 말해줄 만큼 오래 살지 못했지. 그나저나, 왜 온 거지? 이건 불공평한데. 내가 불렀을 땐 오지 않았잖아.”
   루시퍼가 눈썹 한쪽을 치켜올리더니, 팔짱을 끼곤 대꾸했다.
   “이름을 잘못 불렀잖나. 난 ‘아버지 루시퍼’가 아니라서? 하, 농담이다. 너도 알 텐데, 왜 내가 너를 버렸을까?”
   “그게 무슨……”
   “사라 프라이데이에게 무슨 짓을 했지?”
   그 말에 헥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머니가 제 손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게 만드는 것이 재밌었다. 밤마다 우는 것이 즐거웠다.
   헥터가 대꾸했다.
   “그 여잔 그런 꼴 당해도 쌌다. 부정한 여자였어. 당신이 떠나간 뒤로 연인을 총 일곱 명이나 만들었다고. 나는 그 여자가 제 연인들을 모두 목 졸라 죽이게끔 만들었다. 당신에게서 받은 힘으로 말이야! 그날도 아버지, 아니 어머니인 당신을 찾았어. 당신은 오지 않았지!”
   그는 숫제 악을 썼다. 목에 핏줄이 불거졌다. 그런 헥터를, 샛별은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낯으로.
   샛별이 말했다.
   “네가 부정하다고 말한 행위, 루시퍼한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거야. 넌 그저 네 어머니를 혐오했기에 그 모든 살인을 벌인 거지.”
   그리곤 덧붙였다.
   “넌 루시퍼를 위해 살인한 게 아니야. 너 자신을 위해 살인한 거라고. 넌 그냥 쓰레기 같은 인간일 뿐이야, 헥터.”
   헥터가 딱딱하게 내뱉었다.
   “그래? 그렇다면 널 죽일 땐 내 손에 피를 더하지 않기로 하지. 일어나.”
   여자아이가 일어섰다. 샛별이 아닌, 지서가.
   샛별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달아났다.

***

   지서는 눈을 뜬 채로 꿈을 꾸는 듯했다. 역한 피 냄새, 발치엔 아버지의 시체.
   누군가 지서의 손에 칼을 쥐여주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찔러. 너도 그러고 싶잖아?”
   ‘저기에 샛별이 누워 있었다. 아, 누군가의 말대로다. 나는 저 애가 밉다. 나를 쫓아낸 아이.
   당신은 내 멍자국을 보았다. 보고도 못 본 척했다. 나를 무시했어. 죽어 마땅해.
   타인의 의지 때문이 아니야. 내 마음으로, 죽이고 싶다.
   너를.’
   지서는 다시금 칼을 고쳐 쥔 후, 내리꽂았다.
   찰나의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지는 듯했다. 지서는 식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목이 아니라 가슴이었다.
   눕혀 찌른 식칼이 갈비뼈 사이로 꽂혔다. 누워 있던 여자아이가 피를 왈칵 토해냈다.
   심장까지 깊숙이 박힌 칼날이 휘청이며, 지서의 손아귀까지 박동을 전달했다. 그만 지서는 칼을 놓친 채, 손을 떨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이 감각은. 누군가를 아프게 만드는 일은. 두 번째로도 부족한 것 같았다. 지서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대체 얼마나, 얼마나 많이 죽여야 나는 능숙해지는가. 어서 어른이 되고 싶다. 맞고 사는 건 지겨워.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속삭였다. 괜찮아.
   목소리의 주인이 지서를 힘껏 안았다. 지서는 속절없이 안겼다. 칼이 더욱 깊숙이 박혔고, 샛별은 눈을 감았다.
   지서는 만족스러운 포만감과 함께 다시 정신을 잃었다.
   샛별은 피를 삼켰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이걸로 빚은 갚았어. 너도 뭐라고 못하겠지.

***

   헥터는 시트리의 말을 떠올렸다. 인간의 몸을 잃으면 루시퍼와의 인연도 끊어진다고? 그래, 그렇게 만들어줄 것이다. 동생과 루시퍼의 연결을 끊고, 육체적으로도 최대한 고통을 느끼게 만들며 심장을 뽑아낼 것이다. 그래서 루시퍼에게 들이밀 것이다. 그는 어째서인지 알 수 있었다. 루시퍼가 그를 막지 않으리란 것을……
   재밌을 터였다. 지옥의 왕을 도발하는 일은.
   “……모데우스.”
   ……?
   다음 순간, 헥터는 주먹을 맞고 나동그라졌다.
   “무슨…… 루시퍼, 당신 끝까지 불공평하군!”
   “방금 그건 내가 아니다.”
   루시퍼가 대꾸했다. 그녀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시합을 관전하는 심판처럼. 그렇다면 대체 누가……?
   설마.
   주먹을 날린 샛별이 서 있었다. 여전히 기침하면서, 두 손으로 식칼을 뽑아냈다. 피가 울컥, 솟더니 잠시 후…… 멎었다. 여자아이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지만,
   살아있었다. 게다가 움직이고 있었다.
   샛별은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네 진짜 이름은 아스모데우스야.”
   그러더니 입가에 피를 묻힌 채 웃었다.
   “너, ‘순서’가 틀렸어.”
   샛별의 손엔 칼이 들려있었다. 헥터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대체 왜? ‘저게’ 어떻게 살아있지? 어째서 난 지금 힘을 쓸 수 없는 거지? 시트리, 시트리는 지금 어디 있지?
   정말로, 내 이름이 아스모데우스라고?
   그걸 이제야 알게 된 거고?
   “아무것도 모르나 본데,”
   갑작스레 머리털이 잡아당겨지는 아픔에, 헥터는 눈을 크게 떴다. 무표정한 낯의 여자아이가 두 발로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시퍼는 알 수 없는 낯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곤란하다는 듯, 아주 살짝, 웃었다.
   “왜……?”
   짠물이 헥터의 턱, 그리고 목으로 흘러내렸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조금은 애석하게 됐네.”
   손에 쥔 칼로 남자의 목을 깔끔하게 그으며, 샛별은 중얼거렸다.

***

   “아무것도 안 도와줬죠.”
   “그랬나?”
   루시퍼가 덧붙였다.
   “그를 돕지도 않았지.”
   “흠, 아니다. 생각해보니 날 많이 도와준 것 같네요. 사라 얘길 했잖아요? 오늘 숙제 범위가 토빗기였다고요. 그리고 반인반마를 죽이는 법에 대한 메모, 그거 뭐였어요? 헥터가 찾아올 걸 다 알고 있었죠?”
   루시퍼가 능청을 떨었다.
   “그야 숙제는 당연히 시험에 대비하라고 내주는 거다. 숙제 범위가 시험 범위와 겹쳤단 이유로 나를 부정한 출제자라 몰아갈 셈인가? 운명을 빚는 건 내가 아닌데.”
   샛별은 아랑곳하지 않고 외었다.
   “토빗기에도 사라가 나오죠. 그녀는 결혼 첫날밤마다 남편을 목 졸라 죽이게 만드는 악마가 씌었는데, 그 악마의 이름이 아스모데우스.”
   그리고 루시퍼를 빤히 노려보았다.
   “왜 내게 형제가 있단 얘길 안 했어요?”
   루시퍼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태연한 얼굴이 몹시 잘생겨서, 샛별은 조금 약이 올랐다.
   “헥터 프라이데이가 태어난 것은 백 년도 더 전의 일이니까. 그 정도 나이 차라면 형제라기보단 조상님에 가깝지 않나?”
   여자아이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세 명의 인간이 누워 있었고, 그중 둘은 시체였다.
   “내게 다른 형제나 자매가 있나요?”
   루시퍼가 긍정했다.
   “네 아버지만 사랑한 건 아니야.”
   샛별은 심란한 낯으로 제 어머니의 표정을 살폈다. 루시퍼의 얼굴엔 딱히 감상이 어려 있지 않았으나, 샛별은 반쪽짜리 인간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저 살가죽 안엔 저와 닮은 무언가가 들어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사라 일은 안 됐어요.”
   “글쎄, 딱히 그렇진 않아. 지옥에 내려갈 때마다 언제든 그녀를 볼 수 있거든.”
   “아, 진짜.”
   루시퍼가 히죽거렸다.
   “네 여자친구나 잘 챙기지 그러니. 참, 그리고…… 시트리.”
   시트리가 죄지은 낯으로 나타나자, 샛별은 내심 감탄했다. 와, 악마도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맨날 오만한 얼굴만 보고 살았는데.
   루시퍼가 시트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리 할 이야기가 있지? 나, 그리고 너, 또……”
   루시퍼가 헥터의 시신을 가리켜 보였다.
   “저 녀석, 셋이서.”
   시트리의 표정이 불쌍할 정도로 찌그러지자, 샛별이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시트리를 데려갈 건가요?”
   루시퍼가 대꾸했다.
   “이건 어른들 일이니 나서지 않으셨으면 하는데.”
   샛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서려는 것 아니고요. 어머니 말씀을 충실히 이행하는 거거든요? 여자친구 챙기려고요. 알아듣겠어? 시트리……”
   샛별은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있는 지서의 손을 잡고선 턱짓을 했다.
   “핏자국이랑 시체 좀 치워주고 가.”
   시트리의 얼굴이 한층 더 찌그러졌다. 루시퍼가 재밌단 표정으로 물었다.
   “깨끗해진 친구 집에서 뭘 할 거지?”
   샛별이 씩 웃었다.
   “같이 게임 해야죠.”

서계수

관심 있는 장르의 글을 이것저것 쓴다. 구픽 출판사의 앤솔러지 『사랑에 갇히다』에 「너의 명복을 여섯 번 빌었어」를 수록하며 데뷔했다. 이 소설의 분위기를 잡는 데에 지대한 도움을 준 샤이니(Lucifer)와 세븐틴(Flower)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그리고 읽어주신 모든 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2021/11/30
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