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조금 지나치게 많이 가져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룸메이트였다. 다 세어보면 양손 각각 다섯 번쯤 주먹을 쥐었다 펴게 된다. 한평생 단 한 명의 룸메이트도 두어보지 못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헤아리면 상당한 숫자였다. 룸메이트 경험이 많다는 것이 대단한 자랑거리는 아니더라도 기록이라는 측면, 그것도 사람에 관한 숫자라면 이야기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 것이다. 한 달짜리, 3개월짜리, 반년짜리, 동거 기간은 다양했지만 대개는 1년을 넘지 못했다. 짧게는 한 해에 네 번이나 동거하는 사람의 얼굴이 바뀐 적도 있었다. 방값을 다 지불해놓고도 몇 번 나타나지 않은 사람이 있는 반면, 줄기차게 친구들을 데려와 단체 합숙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열일곱 살 때는 인슐린을 달고 살던 쉰셋의 당뇨 투병자 아주머니가, 스물일곱 살 때는 남묘호렌게쿄를 믿는 스무 살짜리가 내 룸메이트였다. 주거비를 아낄 수만 있다면 누구와도 한 공간을 도모할 수 있었다. 미스 유니버스 출신이라고 해서 방을 제 몸뚱이처럼 깔끔하게 쓰는 것은 아니다. 반려동물보호단체에 가입한 사람이라도 애완용 햄스터를 무심하게 굶겨 죽일 수 있다. 생긴 것만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쉽게 상상해서는 안 된다는 걸 지난 룸메이트들을 보면서 고약할 정도로 느꼈다. 한 사람을 대표하는 말들이 사실은 그 사람을 조금도 대변해줄 수 없는 것이다.
   변화무쌍한 룸메이트들의 존재는 내가 일찌감치 부모를 여의었다는 것과 연관이 짙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가족끼리 다 같이 서울 근교로 나들이를 나갔다가 변을 당했다. 반대편 차와 정면으로 들이박았는데 상대방의 졸음운전이 사고의 원인이었다. 우리 차 앞자리에 타고 있던 택시기사와 아버지는 즉사했고 어머니는 병원으로 옮기던 도중에 사망했다. 마주 오던 차와 부딪칠 때 어머니가 나를 꽉 끌어안은 탓에 어머니의 몸을 완충재 삼아 나만 그 사고에서 무사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어머니는 80kg이 넘는 거구였는데, 마치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일 년 전부터 급격히 살이 찌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나를 살리기 위해 운명처럼 뱃속에 음식을 밀어 넣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뚱뚱해서 나 홀로 살아남아 버린 일은 기구한 장난처럼 느껴졌다.
   장례식장에 모인 친척들 중 누구도 나에게 교복을 사주겠다고 선뜻 말해주지 않아서 나는 부모의 죽음보다 중학교 입학을 더 두려워해야만 했다. 친척들은 나를 기숙사가 딸려있는 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아무도 나를 도맡아 양육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책임이라는 측면에서 공평하면서도 편리한 처사였다. 내가 다니게 된 학교는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사립 여자중학교였는데 역사가 깊어 그 근방에서도 좋게 소문이 나 있었다. 숲이 무성히 우거진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서 출입을 하려면 한참이나 오르막길을 걸어야 했다. 입학식 날 내 몸만 한 캐리어를 끌고 언덕을 오르며 여기가 내가 난생처음 몰린 벼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월의 학교 정경이 아름답다는 걸 깨닫기도 전에 나는 그런 생각을 먼저 했다.
   열네 살 때 처음 가져본 내 룸메이트는 나보다 두 학년 위의 H 언니였다. 성적이 좋은 모범생이었는데 늦게까지 공부를 한답시고 한밤중에도 불을 끄지 않으려고 했다. 변비 때문에 화장실에 들어가면 오래 있다 나왔는데 미안한 기색 한 번이 없었다. 화장실에서 씻고 나와서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며 안경을 어디다 두었는지 나에게 대신 좀 찾아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잦았다.
   기말고사 시작을 하루 앞두고 사라진 안경을 찾지 못한 일요일 밤, H 언니는 안경 때문에 시험을 망치게 된다면 자살할지도 모른다면서 나를 붙잡고 턱 끝을 달달 떨었다. 겁에 질린 표정 속에 혹시 내가 안경을 몰래 감춘 것은 아닌지 희번득 의심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나는 안경과 정말 무관했는데 그 사건 이후로 줄곧 용의자처럼 방에서 숨을 죽이고 지내야 했다. 그런 식의 의심은 처음 받아보는 일이었지만 기분이 몹시 엉망이 되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조차도 연필 한 자루가 없어지면 당장 H 언니부터 의심을 하곤 했으니까. 그 언니는 자기 목숨 같은 것을 대체 어디다 벗어두었던 걸까. H 언니는 나를 영원히 안경 도둑이었을지도 모르는 애로 기억할지도 몰랐다.
   방학이 되면 친척 집에서 돌아가며 기거했다. 숙모들이나 이모네 집은 가시 소굴이 따로 없었다. 두더지같은 눈을 한 친척들은 내가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귀중품이라도 도둑맞는 것처럼 나를 관찰하곤 했다. 그 집에서 사용하는 모든 것들이 본래 용도를 잃은 채 내 손에 쥐어진 것 같다는 망상에 자주 사로잡혔다. 이를테면 양치를 하는 내가 들고 있는 것은 일회용 칫솔이 아니라 황금 칫솔이고, 내가 덮고 자는 것도 얇은 홑이불이 아니라 황금 양탄자다. 모든 물건이 내 손에만 들어갔다 하면 황금의 탈을 써버리고 마니까 나는 저주받은 미다스 왕이라도 되어버린 심정이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방학 때마다 일자리를 구하러 돌아다녔다. 꼭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곳으로 지원서를 넣었다. 열아홉 살 때 수능을 마치자마자 들어간 공장은 3교대를 하는 곳이었는데 나와 같은 방을 쓰게 된 것은 스물여섯 살의 중졸 출신 R 언니였다. R 언니는 공장에서 번 돈으로 명품을 많이 샀다. 밤만 되면 낯선 이목구비의 남자가 언니를 보러 왔다. 언니는 매니큐어 색깔을 바꾸듯 남자들을 갈아치웠는데 R 언니가 수용할 수 있는 수컷의 스펙트럼이란 범위가 광대해 보였다. 그 스펙트럼 안에는 정말이지 아무런 차별도 존재하지 않아서 그토록 평등한 왕국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공부 안 하면 나처럼 돼. 그러니까 공부하지 마.
   왕국의 여왕인 언니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R 언니가 주로 남자들과 맺음을 갖게 되는 장소는 교회였다. 관계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교회를 옮겼고 거기서 또 새로운 인연을 하사받았다. 내가 맨 처음 사귄 남자친구도 R 언니 덕분에 알게 된 사람이었다. 언니를 따라서 몇 번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검은 야구 모자를 즐겨 쓰는 남자애 하나가 유독 나를 빤히 바라보며 친근하게 굴었다. 만날 때마다 나보다 R 언니에 대해 더 많은 걸 물어보길래 내가 아니라 혹시 R 언니에게 관심이 있던 건 아닌가 서운해지곤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언니가 만나던 목사의 맏아들로 아버지의 내연녀에 대한 정보를 캐기 위해 나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나는 의도치 않게 스파이가 되어 언니를 보기 좋게 팔아먹은 꼴이 되었다. 질투가 치솟았으니 좋은 말만 해주었을 리가 없었다.
   R 언니를 연료로 삼은 게 톡톡한 효과를 발휘해서인지 그 애와 나는 꽤나 열렬한 사이로 발전했다. R 언니와 목사의 관계는 늘 그렇듯 흐지부지되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남자친구가 군대에 가기 전까지 1년 반 동안이나 교제했다. 공장을 나오고 R 언니와는 오랫동안 연락을 않고 지냈는데 작년 가을에 언니로부터 청첩장을 받았다. 거리가 멀어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축의금은 기꺼이 보내주었다. 비로소 마음이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대학교에 들어와서는 매 학기마다 한 명씩 총 여덟 명의 룸메이트를 만났다. 사범대, 예술대, 인문과학대, 사회과학대, 자연과학대…… 소속도 전공도 다양했으나 대체로 같이 살기에 무난한 여자들이었다. 성인이 되었으니 돈을 모아서 나만의 방을 얻어 살 수도 있었지만 이미 기숙사 생활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탓인지 다른 자취의 경로를 모색할 엄두는 잘 나지 않았다. 타인과 절반쯤 찢어 가진 영역 속에서 조심스럽게 내 흔적들을 퍼뜨려 놓는 삶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고 느꼈다. 잘 모르는 사람과 함께라서 불쾌한 일도 많았지만, 즐거운 일도 많았다. 무엇보다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다는 지독한 진실을 회피하며 지낼 수 있었다.

   P는 인터넷을 통해 얻게 된 룸메이트였다. 계약하려는 동네와 보증금 및 월세를 글 초두에 밝히고 들어가려는 집의 사진을 몇 장 찍어 인터넷 카페에 올리자 그녀가 곧바로 쪽지를 주었다.
   나이 28세. 잠버릇 없음. 술버릇 없음. 병 없음. 가족 없음. 애인 없음. 반려동물 없음.
   온통 없음의 향연이었다. 유령 같은 자세로 지내줄 각오가 대단히 돋보이는 자기소개 글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연락을 했고 우리는 이대 입구 역에서 처음 만났다. P는 챙이 커다란 갈색 밀짚모자를 쓴 채 나타났는데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기묘한 모습이었다. 푹 파인 눈두덩이 위에 떠 있는 동공이 좀 퀭한 기운을 내뿜었고 길고 가는 코는 입술 중심을 공격하는 모양으로 날카롭게 뻗어 있었다. 한여름 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며 그녀와 나는 계약하려는 집까지 함께 걸었다. 그녀는 방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곧바로 계약을 하겠다고 나왔다. 나는 으레 룸메이트를 만나면 해왔던 대로 그녀에게 물었다.
   -따로 요구사항은 없으세요?
   -요구사항이요?
   -네. 꼭 지켜줬으면 하는 부분 같은 거요.
   그러자 막 대문 문턱 위에 발을 내려놓던 그녀가 조건 하나를 말했다.
   -필요 이상으로 가깝게 지내지는 말죠, 우리.
   -네?
   -친구처럼 지내지는 말자고요.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좀 어리둥절해졌다. 보통은 잘 지내보자고 말하지 않나. 같이 살게 되더라도 딱히 살갑게 굴고 싶지는 않다는 건가. 솔직해서 좋은 건가. 아니면, 경계하는 걸까? 초반부터 확실하게 선을 긋고 들어가는 태도를 보니 보통내기는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룸메이트 사이에 친구처럼 이해받길 바라지 말 것. P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런 게 아닐까. 그동안 룸메이트들과 친구처럼 터놓고 지냈다가 크게 화를 입은 적이 있었겠지. 그녀의 조건은 모든 자질구레한 문제들을 하나로 압축해버리는 실로 영리한 말이었던 것이다.
   계약이 성사된 다음날 P는 커다란 28인치 보라색 캐리어 두 개를 끌고 총총히 집으로 들어왔다. 흑마술사라도 되는 것처럼 보물을 다루듯 자기 소유의 세간들을 후후 불기도 하고 쓰다듬어 보기도 하면서 조심스럽게 바닥에 꺼내놓았다. 2인 가구가 살기에 아주 좁지도 그렇다고 넓지도 않은 투 룸은 그녀가 내놓은 물건들 때문에 오묘한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P는 조용했다. 대체로 소극적인 몸짓으로 집안을 돌아다녔지만 원래 성격이 그런 사람인 것 같지는 않았다. 내용물을 꽉꽉 채워 넣고 억지로 뚜껑을 닫아버린 잼 단지처럼 스스로를 억누르는 듯한 태도가 몸 곳곳에 배어있었다. 언제 터져버려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우리는 말을 거의 하지 않고 지냈는데 뭘 빌리는 법도 없고 도움을 청할 일도 없어서 장롱을 지나치듯 서로를 대했다. 절실히 필요로 하던 뭔가를 찾아낼 수도 있었지만 굳이 내가 먼저 내부를 공개하고 싶지는 않았다.
   P는 평상시엔 방문을 꼭 닫고 없는 듯 지냈는데 새벽만 되면 거실로 나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과일을 깎아 먹었다. 하얀 모시 커튼 앞에서 밤 골목을 내려다보며 과도로 찍어 든 사과 조각을 횃불처럼 높이 쳐들고 있는 P를 발견할 때면 여기가 대체 어딘지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녀는 자기 입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의 입에 넣어주듯 사과를 삼켰다. 사람에 많이 단련되었다고 자부했는데도 그녀를 보면 여전히 사람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즈음에 나는 은행에 취직해 다니고 있었는데 퇴근을 하고 집 대문 앞에 서면 손목시계가 늘 아홉 시 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P는 언제나 나보다 먼저 집에 돌아와 있었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저녁을 먹고 샤워까지 끝내놓고는 인기척을 제거한 채 자기 방에 틀어박혀 버렸다. 그런데 그날은 집 앞에서 P를 마주쳤다.
   키가 큰 남자 하나가 어둠 속에서 P의 손목을 붙들고 사정없이 흔들어대고 있었다. 남자는 크게 고성을 지르고 있었는데 언뜻 들었을 때는 애정 싸움인 것 같았으나 워낙 그의 행동이 거칠었으므로 나는 긴장한 채 둘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가로등 아래에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에 당황하는 표정을 짓던 P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는 척해달라는 눈빛이었다.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서 나는 우두커니 그 자리에 정지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신고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P의 눈빛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남자가 P의 목덜미를 움켜잡았을 때, 나는 마침내 소리를 질렀다. 도와주세요!
   남자가 조금 주춤하는가 싶더니 그녀를 확 떼밀고 달아났다. P는 담벼락에 어깨를 부딪쳤다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워낙 마른 체구라서 어디 한 군데 뼈가 부러졌을지도 몰랐다. P를 부축해 집으로 데려온 나는 그녀를 상 앞에 앉히고 진정할 수 있도록 물을 떠다 주었다. P는 조금 훌쩍거리다가 눈물을 닦고는 컵을 바라보았다.
   -물 말고 술.
   나는 그녀를 위해 찬장을 뒤졌고 내 손에는 목이 기다란 와인병 하나가 잡혔다.
   P는 그 남자를 전 애인이라고 밝혔다. 헤어진 지 1년 정도 되었는데 아직도 그녀를 따라다닌다고 했다. 왜 확실하게 끝을 내지 않느냐는 질문에 P가 한참 우물쭈물 거렸다. P와 남자 사이에는 좀 복잡한 사연이 있었다.
   P는 오래전 남자친구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간을 조금 떼어준 일이 있다고 했다. P의 아버지는 중증 알코올 중독자였는데 매일같이 마신 술이 간을 완전히 좀먹고 들어가는 바람에 간 이식 수술을 받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가족 중에는 기증자를 찾을 수 없었는데 마침 아버지와 같은 혈액형을 가진 그녀의 남자친구가 적격자로 드러났다. 남자친구는 스스럼없이 자기 간을 이식해주겠노라 나섰으나 P는 남자친구의 자원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P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학대해왔었는데 그 학대란 것이 정신적, 육체적, 성적인 것까지 온갖 유형을 다 망라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숏팬츠를 입은 P를 창녀라고 부르며 물건을 집어던졌고 가끔은 정말 창녀를 보는 것처럼 입을 벌리고 그녀를 응시했다. 알코올 기운 때문에 그녀를 딸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P는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제발 술이 아버지를 통째로 집어삼켰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빌었다. 그런데 P의 남자가 아버지에게 생명을 나눠주겠다며 자랑스럽게 자기 옆구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말 그녀를 사랑하는 게 틀림없었지만, P는 그런 식으로 남자가 사랑을 과시하지 않기를 바랐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아버지는 건강을 회복했다. 병원에 입원해있는 동안은 참아내는 듯 보였으나 퇴원하기 무섭게 아버지는 다시 술을 찾기 시작했다. 남자친구의 희생은 아버지의 수명이 아니라 P의 수모를 연장시키는 결과만 가져왔을 뿐이었다. P는 짐을 싸서 집을 뛰쳐나갔고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했다. 남자친구는 P의 이별 통보를 곱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옷을 들어 올려 미처 풀러 가지 못한 실밥 자국을 내보이면서 그녀에게 항의했다.
   시간이 흐르면 보름달처럼 다시 차오르는 게 간이었다. 망설임 없이 간을 덜어주겠다고 자청하고 나선 용기는 높이 사 줄 만했지만, P는 단지 그것만으로 남자친구에게 평생을 저당 잡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상정하는 미래에 남자친구의 자리는 없었다. 지금은 자신의 곁을 내주고 있었지만 언제까지고 그가 거기 머무르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곤란했다. 남자친구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크게 마음이 가지 않았다. 마음이 가지 않는 걸 이유를 들어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피곤해졌다. 그런데 남자친구는 헤어질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녀와 헤어질 수 없다는 소리만 늘어놓았다.
   결과만 놓고 보았을 때 P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썩 괜찮은 남자를 차버린 무정한 여자가 되어있었다. 차라리 완벽하게 무정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보고 싶다고 사정하는 남자친구에게 가끔 얼굴을 보여주는 식으로 자기 나름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어갔다. P는 돈이 좀 모이는 대로 해외로 떠날 생각이었다. 술주정뱅이 아버지로부터, 일편단심 전 남자친구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친구가 늘어나면 여기를 벗어나기 망설여질 것 같았어.
   P가 내 앞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더 이상 나를 붙잡아둘 수 있는 게 없을 때 떠나는 게 가장 좋지 않겠니?
   -어디로?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
   나는 어쩐지 P가 부러워졌다. 모든 걸 등지고 새 삶을 찾아 떠날 결심을 할 수 있는 그녀가 멋있어 보였다. P는 인생에서 밀쳐내고 싶은 것이 확실했다. 그에 반해 나는 움켜잡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언제나 손톱을 세운 채 손아귀에 힘을 주고 살아왔는데 뭔가를 꽉 쥐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딘가에 단단히 매달려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죽음 앞에서 어머니가 나를 꼭 껴안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내가 엄마를 끌어안았던 것 같다. 구명조끼를 본 조난자처럼 어머니를 입어버린 것이다. 그때부터였나. 악력에 의지하며 살았던 게. 그렇게 살아남아서, 나는 무엇을 얻게 되었나. 무엇을 위해 살게 되었나.
   지난 15년간 나에겐 항상 룸메이트가 있었고 나는 누군가의 룸메이트였다. 나라는 과일을 씨앗부터 형성하고 있는 건 여자들이었다. 그녀들은 크게든 작게든 내게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은 햇빛처럼 내 정수리를 비추며 현재의 나를 빚어냈다. 그녀들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숨을 쉬면서도 가장 완벽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행성들이었다.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때 그녀들을 가장 매끄럽게 이해할 수 있었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았을 때 오히려 좋은 룸메이트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 같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들이 만나 동거하면서 화장실을 먼저 양보하고 다음 사람을 위해 수챗구멍의 머리카락을 비워 놓는 것은 어떻게 보면 기적이었다. 살기 위해, 단지 살아가기 위해서 그 모든 기적들이 일어났다. P가 친구도 아닌 나에게 속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는 것도 기적일지 몰랐다. 나는 그녀와 친구가 될 생각이 없었다. 될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밤이 깊어지자 P와 나는 거실 불을 끄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안녕, 잘 자, 우리는 잠들기 전에 인사했다. 하루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나는 여전히 내 룸메이트를 알 수 없었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해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룸메이트였다. 내가 누구인지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은 현재로선 그것뿐인 것 같았다.

사익찬

룸메이트의 처지에 대해서 나는 전에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식구도 아니면서 친구도 아닌데 나와 가장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그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요. 세상에서 룸메이트를 가장 많이 가져본 사람의 인생이 궁금해졌습니다.

2019/08/27
2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