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유언은 ‘천국에서 만나자’였다.
   우리는 세상에 둘도 없는 관계였다. 나는 장대비가 오던 날, 우산을 들고 학교 앞에 마중을 나온 그의 모습도, 졸업식 때 내가 좋아하는 수국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나에게 걸어오던 모습도 기억한다.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해서 할머니와 함께 갔던 피자집에서, 그는 가장 싼 기본 메뉴를 골랐고, 나는 보란 듯이 맨 앞장의 프리미엄 피자와 사이드 메뉴까지 시켜드렸다. 맛있다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지만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 그를 앞에 두고 ‘왜 그래? 맛이 없어? 어디 아파?’라고 했지만 이젠 그 심정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 할머니는 내 곁에 없다.
   살아생전 그는 나에게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좋은 곳도 열심히 가라고 했다. 부지런하게 일하고,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꼬박꼬박하고, 친절하게 굴라고 했었다. 남 눈에 눈물나게 하지 말라고도. 그것은 말뿐이 아니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친절했고, 몸이 허락하는 한 이웃들을 도왔다. 버스비가 모자란 사람의 동전까지 챙겨줄 정도였으니까. 가끔 오지랖이 너무 넓다고 볼멘소리를 했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텔레비전을 보는 할머니의 어깨를 주무르며 나중에는 내가 할머니의 엄마로 태어나겠다고 말하곤 했다. 엄마가 너무 거창하다면 친구나 하다못해 주변 사람으로라도. 그는 뭘 또 태어나느냐고, 천국에 먼저 가 있을 테니 거기서 만나자고 했다. 오래오래 살다 오라고 했다. 날 보려 어떻게든 노력하겠다고 했다.
   할머니가 없는 삶은 너무도 외로웠다. 친구도 없어 매일 저녁 혼자 폭음을 했고, 모아두었던 돈으로는 배달 음식을 사 먹고, 그동안 사고 싶었던 물건은 택배로 시키고 박스를 뜯어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가 이러는 걸 싫어할 거라고. 안 되겠다 싶어 폐인 생활을 청산하기로 하고 다시 배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죽음은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어느 겨울 저녁, 도로를 달리던 도중 내 오토바이가 빙판에 미끄러져 가드레일을 박고 도로 너머 절벽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나는 의식을 잃기 직전 생각했다. 이제부턴 부지런히 일도 하고,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좋은 곳도 열심히 가려고 했었는데. 뭐든지 잘해보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기차 좌석에 앉아 있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햇빛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오랜 시간 차창 쪽으로 목을 기울이고 있었는지 한쪽 목이 뻐근했다.
   낯선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마치 바로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 주머니 쪽으로 기척이 느껴졌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낯선 사람이 몸을 낮게 숙인 채 옆자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뭐 하세요?”
   내가 놀라자 그도 멀찍이 물러서서 손을 내저었다.
   “아뇨, 아뇨, 뭘 하려던 게 아니라 일어나셨나 해서요…… 아! 일어났으면 같이 기도하자고 하려고 했죠.”
   그는 무언가를 하다가 걸린 사람처럼 허둥지둥했다.
   “가세요. 안 해요, 기도.”
   그를 보내고 난 후 상황을 되짚어보았다. 오토바이가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배에 뾰족한 나뭇가지가 창처럼 박혔었다.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을 가능성은 없었을 텐데. 그 사고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병원에 갔어야 했을 테고, 끔찍한 아픔 속을 헤매고 있었을 텐데. 죽었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빨리 할머니를 따라갈 줄 몰랐다.
   얼룩조차 없는 깨끗한 상의를 걷고 배를 보았다. 상처하나 없이 말끔했다. 반지와 귀의 피어싱도 그대로 있었다. 손목시계는 멈춘 채였다. 어렸을 때 다쳤던 정강이 흉터도 사라져 있었다.
   이 열차는 언제 어디서부터 달리기 시작했을까?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나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하늘과 땅의 경계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끝없이 이어진 바다와 푸른 하늘만이 있었다. 벽에 안내 전광판이라도 있지 않을까 했지만 벽은 말끔했다. 감정 없는 목소리로 안내 방송이 시작되었다.
   
   “승차권을 반드시 소지하고 계십시오.”

   그 소리에 호주머니를 확인해보았다. 언제 구겨 넣었는지 모를 동전 몇 개와 누룽지 사탕 두 알이 있었다. 작은 펜과 영수증 몇 개도. 그리고 반대쪽 주머니에서 아이보리빛 승차권이 툭 떨어졌다. 승차권 상단에 승차권이라고만 적혀있을뿐 시간도 도착지도 적혀 있지 않았다. 방금 낯선 사람이 가까이 왔던 이유가 기도 때문이라기보다 승차권을 확인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좌석이 한쌍씩 붙어 있는 구조. 언젠가 탔던 무궁화호 열차와 비슷하게 생겼다. 빈 좌석이 많았고, 한두 명씩 널찍이 떨어져 앉아 졸고 있거나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객실의 맨 앞에는 문이 하나 있고, ‘기관사실’이라고 나무 문패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긴 문구가 적혀 있었다. ‘당신의 운명은 지금까지 해온 것에 달려 있다’. 우리는 심판장으로 가고 있는 걸까 싶었다.
   저 반대편에 사람들 대여섯 명이 제각각 바닥이나 좌석에 무릎을 꿇고 눈을 감고 있었다. 원래 지인인 건지 아니면 여기서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만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무리의 한가운데에 안경을 낀 중년 남자가 있었는데, 그가 기도하자며 준엄하게 선언하자마자 각각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주여, 주여, 주여! 저희를 천국으로 이끄소서!”
   “저는 무지하여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해요.”
   “지옥은 너무 두렵습니다!”
   “제발 천국 가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할게요!”
   “심판의 때에 무사하게 해 주소서.”
   “사탄 마귀의 색인 검은 색을 희게, 정결케 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저는 우리에게 주시는 시련이라고 생각하고 달게 받겠습니다!”
   무슨 논리인지는 모르겠지만 흰색 승차권은 천국에, 검은색 승차권은 지옥에 간다고 여기며 두려워하는 듯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흰색의 승차권은 정말로 천국의 표일까. 그런데 꼭 흰색이라고 천국이고, 지옥이라고 검은 건 아니잖아.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제쳐 두고, 혹시 승차권 색이 다른 건 도착지가 다르다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중간에 환승한다는 의미일까.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스쳤다. 죽은 거라면 할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건가. 기차의 목적지에 다다르면 알 수 있을까. 종착지에서 할머니를 볼 수 있을까.
   아니, 꼭 그런 건 아닐지도 모른다. 이 기차가 오랫동안 달려서 망자들을 태우는 거라면 이 열차에 있을 수도 있잖아.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선 열차를 돌아다니며 목적지에 대한 정보를 얻고, 승무원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선 기관사실로 향했다. 나는 기도하는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는데, 그자들은 모여 앉은 가운데에 자신들의 승차권을 바닥에 늘어놓고 기도하고 있었다. 인쇄 질이 낮은 건지 명도가 조금씩 다른 검은색 승차권들이었다.
   문을 열었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차창에는 저 멀리 한 점으로 사라지는 끝없는 철길과 물만 보였다. 기관사실에는 아무도 없고, ‘이 기차는 무인시스템으로 작동됩니다’라는 허무한 글자만 있을 뿐이었다. 혹시나 행선지가 쓰여 있을까 해서 벽과 바닥을 살펴보았지만 단서는 전혀 없었다.
   나는 이 열차에 할머니가 타고 있었으면 하고 속으로 끝없이 되뇌며 뒤의 객실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와의 생활을 바탕으로 그가 이곳에 있다면, 어디에 있을지 상상했다. 그는 의욕 있게 사람들과 토론을 나눌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죽음이 두려워서 울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창밖을 바라보고만 있을 듯싶었다.
   살아생전에 할머니는 기차의 창가 자리를 좋아했다. 그래서 나와 함께 기차를 탈 때면 나는 항상 그에게 창가 자리를 양보하고는 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창가를 바라보고 있는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 봐도 할머니는 없었다. 상황을 물어볼 만한 승무원도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 객실엔 다양한 인종과 나이대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빼곡했으나 전반적으로 무척 조용했다. 햇살을 받으며 꾸벅꾸벅 조는 노인들과 신발을 벗고 창밖의 바다를 구경하는 아이들이 한 곳에 있었다. 침묵 속에 아이들의 웃음소리만 잔잔히 들렸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죽은 자들이라니 나로서는 믿기 힘들었다.
   옆 사람들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있고,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잠자는 척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 어안이 벙벙한 눈빛을 하고 좌석에 몸을 싣고 있었다.
   어른들은 자신의 승차권을 남에게 보여주길 꺼렸으나 아이들끼리는 승차권을 스스럼없이 보여주며 흰색이 더 좋은 거라느니, 검은색이 더 예쁘다느니 이야기했다. 그들은 이곳이 이승 저편의 곳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재잘거렸다.
   나는 계속해서 다음, 다다음 객실로 향했다. 나처럼 칸을 옮겨다니며 탐구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전혀 소득이 없는 듯했다. 가지고 있는 펜으로 ‘죽기 싫다’, ‘심판받고 싶지 않다’, ‘살려줘’라고 벽에 낙서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끝이 천국이길 간절히 바랐다. 천국이라는 공간의 실재함을 믿고 싶다기보다는, 할머니가 그곳에 있겠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 명칭이 무엇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는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는 성격이라 내세에서 재판을 받는다면, 나쁜 자리에 갈 위험은 없을 것이었다. 할머니가 천국에 가 있겠다고 말한 것은, 어쩐지 내게 그 문장을 말함으로써 뒤따라오는 나 또한 업보를 쌓지 말고 무사히 평안한 장소로 도착하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어떤 칸이든지 저마다 승객들은 마음 맞는 자들과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떤 자는 승차권의 색이 앞으로의 나갈 길을 말해준다고 했다. 어떤 자는 검은 빛 승차권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죄가 없다고 했다. 어떤 자는 승차권은 한낱 종이에 불과할 뿐, 성별이나 인종, 언어나 나이가 문제라고 하며 자의적으로 집단을 묶어 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승차권을 꽉 쥐었다. 이 기차가 어디로 갈지는 모르지만, 승차권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의 종착지가 어디인가 하는 것도 주요 논란거리 중 하나였다.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내세관으로 싸우고 있었다. 자신의 상상에서, 자신이 생활했던 문화권의 통념에 근거하여, 자신이 믿는 종교의 죽음관에 기대어 추측했다. 나는 사람들의 대화에서 이 종착지가 낙원이나 극락정토나 엘리시온이나 황천일 것이라는 말을 들었고, 바깥의 물이 삼도천이라느니, 스틱스강이라느니, 요단강이라는 말도 들었다.

   나는 뒤쪽의 객실로 향했다.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나와 반대로 앞으로 향하는 사람들과 점점 더 자주 마주쳤다. 할머니를 찾기 위해 뒤쪽 칸으로 가면서도, 앞으로 도착할 칸에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다.
   마지막 객실의 문이 저 멀리 보였다. 문에는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창이 달려있었고, 두어 명의 사람들이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들 또한 나와 같이 다른 칸에 있다가 관찰을 나온 사람들 같았다.
   기대를 하고 창을 확인했으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텅 비어있었다. 내가 처음 칸에서 뒤쪽으로 계속 이동한 것처럼, 이 객실 사람들도 가장 끝 칸임을 인지하고 앞으로 이동한 듯했다. 정보를 얻기 위해서거나, 다른 환경을 찾아 떠난 것일지도. 결국 할머니는 이 기차에 없었다.
   머리가 어질거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화장실과 캔 음료를 살 수 있는 자동판매기가 있었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판매기를 보니 갑자기 목이 말랐다. 콜라를 살까 하고 주머니를 뒤졌다. 덜컥 마음이 내려앉았다. 동전도, 승차권도 없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고 옷을 털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어딘가에 흘린 것인지, 누군가가 훔친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좁은 통로에서 같은 방향으로 가거나 반대로 가는 사람들을 셀 수 없이 많이 만났었다. 훔쳤다면 왜? 모두 승차권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 내 승차권이 유난히 마음에 들었던 걸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데. 아니면 누군가에게 자신의 승차권을 빼앗긴 사람인가. 어쨌든 나는 승차권 없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지직거리는 스피커 소리가 들리더니, 안내 방송이 다시 흘러나왔다.

   “우리 열차는 종착지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승차권을 소지하여 내리시기 바랍니다. 개찰구에서 검표가 있습니다.”

   안내 방송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진동이 점차 줄어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발밑의 약해지는 진동을 느꼈다. 그에 반비례해서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기차가 멈추었다. 창밖을 보았으나 흰 안개밖에 보이지 않아 밖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의미로 추정되는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종은 총 10번을 치고 나서야 멈추었다. 문이 열리지 않은 채로 정적이 감돌았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남들 눈에 눈물 나게 하지 않고는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밖에 나가서 사정이라도 해 볼까. 하지만 그게 먹히긴 할까 싶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몇몇 사람들이 저 멀리서부터 비키라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화장실 쪽으로 뛰어갔다. 가장 먼저 온 사람이 화장실 문을 닫자 뒤이어 온 사람들이 배를 움켜쥐고 문이 고장 날 정도로 문을 두드려댔다. 그들은 서로 화장실을 차지하려고 하다가 힘이 없어 바닥에 널브러졌고, 곧 손끝과 발끝부터 조금씩 희미해지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승차권만이 바닥에 남겨졌다.
   사라진 자 중 승차권을 한 장만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승차권은 최소 두 장 이상이었다. 나는 그것이 훔친 승차권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나는 숨을 삼켰다. 저 중에 내 표도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바닥에 떨어진 승차권들이 공중에 뜨더니, 원래 소유자들에게 날아든다. 내 승차권도 내 왼손으로 얌전히 날아들었다.
   나는 기관사실 앞의 문구를 떠올렸다. “당신의 운명은 지금까지 해온 것에 달려 있다”. 이 말은 이승에서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열차에서의 행동까지 포함하는 것인 듯싶었다.

   기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방금 복통으로 소멸한 사람들을 보고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모양인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안내 방송에서 내리라고 할 때까지 서로 눈치만 보고 내리지 않았다. 나도 주춤거리면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안개를 헤치고 역무원 하나가 등불을 들고 오고 있었다. 그가 손짓하자 그제야 승객들이 천천히 출구로 나갔다. 나는 줄을 서면서도 앞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안개 속에서 나는 우리가 탄 기차의 인파를 볼 수 있었다.
   발걸음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뒤를 돌아보니, 다른 열차를 타고 온 사람들 무리가 보였다. 그들 뒤로 끝없이 늘어선 철로들이 보였다.
   철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수히 많았다. 다른 열차의 승객들도 두려워하긴 매한가지인 것 같았다. 다들 이곳이 종착역이냐, 여기가 재판장이냐고 물어보았지만 앞서서 가는 역무원은 대답 없이 등불을 들고 걷기만 했다.
   안개 사이로 거대한 건물이 보였다. 벽에 새겨진 ‘더 나은 세상을 위하여’라는 문구 아래, 제복을 입은 중년 남자와 여자가 사람들의 승차권을 받아서 펀칭기로 구멍을 내주고 있었다. 사방에 튀는 작은 종이 부스러기 사이에서 그들은 무표정하게 여러 번 외쳤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동의서 작성 후 키오스크를 이용하십시오.”
   나는 바닥에 흩뿌려진 형형색색의 종이 부스러기를 보았다. 심지어 검정이나 흰색도 미묘하게 색상 차이가 있었다. 연회색처럼 애매한 색들도 있고. 나는 비로소 사람들이 내미는 승차권을 뚫어져라 확인했다. 그것에는 검정과 흰색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채로운 색상이 있으며 연한 색과 진한 색이 공존했다.
   건물로 들어간 나는 화살표가 그려진 대로 걸어갔다. 역무원 한 명이 펜과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동의서라는 제목에, 깨알 같은 글자가 박혀 있었다. 역무원들은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에게 안쪽부터 차례대로 서라고 말하며 손짓했다. 그곳에는 천국도, 심판장도 없었다. 그저 키오스크만이 쭉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건물 내부에 나는 줄을 벗어나 구석에 섰다. 동의서 문서의 글씨가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키오스크의 상단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색채 언어 환생 주소 변환기〉

   나는 줄 밖에 서서 사람들이 키오스크를 작동시키는 것을 보았다. 가져온 승차권을 투입구에 넣으니, ‘조회 중’과 ‘매칭 중’이 뜨다가 ‘좌표 받는 곳’이라고 쓰인 곳에서 영수증에 쓰이는 감열지 한 장이 말려 나왔다. 거기에는 숫자로 이루어진 좌표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근처의 역무원에게 물었다.
   “천국이랑 지옥 같은 건 없나요?”
   역무원은 대답 대신 턱짓으로 한쪽 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뒷문으로 보이는 들판의 경계선 밖으로 나가면 자동 환생 됩니다.

   “이게 끝이에요? 재판 같은 것도 없나요?” 내가 또 묻는다.
   “그걸 일일이 할 시간은 없습니다.”
   내가 혼란스러워하자 그가 다시 말한다.
   “애초에 이 열차엔 올 만한 사람들만 타게 되고, 사실 사람이라는 거 다 조금만 겪어보면 판단할 수 있습니다. 열차가 도착한 다음 복통을 일으키며 소멸한 사람을 보셨지요. 그런 사람들만 솎아내면 그만입니다. 지상에서 했던 행동은 어디 안 가고 이곳에서도 하게 되는 법이니까요. 뭐 그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라는 말요. 승차권의 색은 그저 다음 환생할 장소를 표현하는 일종의 언어일 뿐이에요.”
   “제가 탄 기차에는 하필이면 검정과 흰색 승차권이 있어서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했는데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흑과 백만 그랬던 게 아닙니다. 다른 열차들 상황도 쉽지만은 않았죠. 금색과 은색, 빨강과 파랑, 초록도요. 검정과 흰색이 가장 갈등이 심하긴 한데, 사실 다른 색도 완전히 갈등이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색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는데도요…… 다 같이 모여서 승차권을 모아보면 그러데이션을 이룬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텐데.”
   재판도, 사후 세계도 없는 거였나. 그저 사람이 만들어낸 건가. 그러나 나에게는 할일이 남아 있었다. 이대로 환생해버릴 수는 없었다.
   “잠깐만요. 여길 나가기 전에 어떤 분의 행방을 알고 싶은데 찾아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그에게 간청했다. 그는 한참을 내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어디 가서 내가 해줬다는 이야기하면 안 돼요. 문 바로 옆에서 기다리시겠습니까? 그동안 동의서를 읽으면서 체크도 하시고요.”
   나는 할머니의 인적 사항을 말하고, 문 옆에 섰다. 나는 동의서와 펜을 손에 든 채로, 문밖의 푸른 들판을 바라보았다. 사람들 몇 명이 팔베개를 하고 누워 마지막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잠시 후, 역무원이 이쪽을 보며 손짓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돌아가 그의 말을 들었다.
   “그분은 다양한 육신에 있어요. 바로 전 열차에 타셨고, 금방 떠나셨죠. 당신이 이렇게 빨리 왔을 줄 몰랐나 봐요. 총 천 명에게 그분이 깃들어 있네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가 혀를 찼다.
   “동의서를 아직 안 읽으셨군요. 기차 타고 오시면서 보셨겠죠, 소멸한 사람들이요. 결원이 생겼지 않습니까. 게다가 점점 이승의 인구가 늘어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어쨌든 영혼은 턱없이 모자란단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소멸한 사람들과 새로운 육체에는 살아남은 열차 승객들의 영혼을 복사하고 분할하여 조합한 영혼을 주입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동의서를 작성하도록 하는 겁니다. 당신의 할머님께서는 풀밭에서 한숨 돌리지도 않고 새로 태어나는 육신들과 기차에서 소멸하여 모자란 영혼을 채우셨어요. 특이하게도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깃들길 원한다고 하셨고요. 쉬지도 않고 환생한 이유에 대해서도 나와 있는데…… 손녀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라고 되어 있네요. 당신인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동의서의 동의 칸에 망설임 없이 체크했다.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깃들어, 할머니를 찾을 거예요.”
   역무원이 동의서를 받아듦과 동시에 종이가 번쩍 빛난 후 사라졌다. 빛의 잔상은 내 승차권으로 이어졌다.
   “승차권에 정보가 갱신되었어요. 키오스크에 가서 좌표를 받으시면 됩니다.”
   나는 키오스크 앞에 서서 승차권을 넣었다. 감열지에 좌표가 끊임없이 찍혀 나오는 게 보였다.
   할머니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에게는 그가 있는 곳이 천국일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박해울

우리는 우리의 곁을 떠난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럴 수 있다고 믿습니다.

2021/11/30
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