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순영은 배우다. 아직까지 주연을 맡은 적은 없지만 주연이었던 적이 없다고 해서 배우가 아닐 리 없다. 주연은커녕 배우로서 스크린에 노출된 시간을 초당 밥알 한 알로 환산할 때 맹순영의 출연 시간은 아무리 끌어모아도 밥 한술이 될까 말까 하지만 그래도 맹순영은 배우다. 이 사실은 영원히 또한 매 순간 맹순영의 자존과 자조의 양가적인 근거가 된다. 맹순영은 배우지만 맹순영이 배우인 것을 맹순영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는 사실. 또한 맹순영이 배우인 것을 아무도 모름에도 맹순영은 배우기 때문에 맹순영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다.
   곧 세상이 망할 거래.
   맹순영은 지금도 촬영 현장에 있다. 주연 배우가 상대역의 손을 잡고 읊는 Y2K에 대한 긴 대사를 들으며 육교를 건너는 연기를 하고 있다. 2000년 1월 1일 00시가 되면, 연도를 1999까지밖에 인식하지 못하는 세상의 모든 컴퓨터 기계가 현재를 1901년으로 인식하게 되고 그로 인해 파생된 다른 오류들로 인하여 결국은 세상이 망한다고 한다. 맹순영은 Y2K를 믿지 않는다. 크게 과학적인 반론이 가능해서는 아니고 이 현실이 망하는 데에는 더 그럴싸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뿐이다. 컷. 감독의 목소리에 맹순영은 움찔 놀라며 멈춰선다. 이런 순간마다 맹순영은 양손을 교차해 팔꿈치를 쥔다. 감독이 자기를 비난할 것 같은 불안감에 전신이 떨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물론 감독에게는 보조출연자 맹순영이 육교를 건너는 걸음걸이를 비난하려는 마음이 없다. 자, 지금보다 천천히 해 볼까? 주연배우는 대사가 너무 어려워서 외운 대로만 말하려다보니 저도 모르게 말이 빨라진다고 엄살을 피우고 한편 맹순영의 연기는 완벽하다. 육교의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는 것보다 난이도가 좀더 또는 훨씬 높은 역할도 맹순영은 완벽하게 해낼 수 있지만 그것은 아직 맹순영조차 모르는 사실이다. 맹순영은 입속으로 Y2K에 대한 미신으로 구성된 주연배우의 대사를 완벽한 속도로 되뇌며 육교를 건넌다. 이 과정이 여러 차례 반복된다.
   촬영이 끝나고 맹순영은 늘 하던 대로 유통과 비디오 대여점에 들러 집으로 간다. 한쪽 옆구리에는 라면 한쪽 옆구리에는 비디오. 유통에 들어가 라면을 고르고 계산한 다음 나오는 데에는 1분이면 충분하지만 대여점에서 비디오를 고르는 시간은 웬만한 영화의 러닝타임만큼 길어지기도 한다. 비디오를 고르는 과정에도 서사가 있기 때문이다. 맹순영은 홍콩 영화를 숭배한다. 그런데 맹순영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짐 캐리다. 짐 캐리의 대표작 마스크를 패러디한 홍콩 마스크의 배우 주성치도 만만찮게 좋아하지만 홍콩 배우 하면 아무래도 장국영이고 장국영이냐 짐 캐리냐 하면…… 이런 식이다. 한 손에 비디오갑을 하나씩 들고 벌이는 맹순영의 토너먼트는 대여점 닫는 시간까지 계속될 수 있고, 실로 그런 선례가 드물지 않다. 다만 오늘은 아니다. 맹순영은 <아비정전>을 보려 한다. 맹순영은 이 영화를 사흘 전부터 보고 싶어 했고 대여점 직원은 바로 오늘 이 비디오가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맹순영은 비디오 진열장까지 갈 것도 없이 카운터에서 비디오를 받아 대여료를 치르고 나온다. 한쪽 옆구리에는 라면 한쪽 옆구리에는 비디오. 맹순영은 자취방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에 한발을 디딘다.
   달이 밝구나.
   맹순영은 생각한다. 둥글고 커다란 천체가 스포트라이트처럼 맹순영을 겨냥하고 있다. 이것은 맹순영의 생각도 이 기록에 미적 또는 환상적 분위기를 더하고자 하는 과장된 수사도 아니다. 맹순영이 달이라고 생각하는 구체는 실제로 맹순영을 비추고 있다. 맹순영이 좋아하는 짐 캐리의 주연작 <트루먼 쇼>에서 그랬던 것처럼.
   비디오 대여점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맹순영은 AR(Altanative Reality, 대체 현실)시뮬레이터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다. 대여점 직원의 안내와 또 맹순영의 바람과는 다르게 오늘 <아비정전>은 대여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맹순영이 알 필요 없는 <아비정전>의 직전 대여인은 이 영화에 일주일 치 연체료까지는 기꺼이 낼 수 있는 사람이다. 즉 맹순영이 왼 옆구리에 끼고 있는 라면은 실재하지만 오른 옆구리에 끼고 있는 장국영 비디오는 실재하지 않는다. 그건 맹순영이 기대하는 현실이 그래야만 하는 바에 따라 구성된 대체 현실의 부산물이다.
   여기에서 내가 등장한다. 나의 등장은 맹순영의 기대 현실-그래야만 하는 바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맹순영은 자취방 언덕길에서 내려오는 정장 입은 남자 모양 인간을 보고 조금 경계심을 품는다. 그것이 자신 앞을 막아서는 순간 맹순영의 경계심은 공포심으로 전환된다. 한편 맹순영은 뛰어난 연기자이기 때문에 곧바로 그 감정을 안면에서 숨길 수 있다.
   “신뢰도를 고려해서 남성형 피규어를 선택했는데 잘못 생각한 것 같군요.”
   나의 외피가 남성 세일즈맨 형에서 여성 세일즈맨 형으로 바뀌는 광경을 맹순영은 입을 벌리고 바라본다.
   “안심하세요. 이게 진짜 모습이니까요.”
   맹순영의 눈에는 여전히 도주 충동이 비치지만 한편으로 나의 외피가 남성형일 때에 비하여 안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다만 갑자기 모습이 변하는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은 극에 달한 상태다. 나는 맹순영이 도주하거나 소리를 지르려 하기 전에 말을 꺼낸다.
   “우리는 맹순영씨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순간 맹순영이 느끼는 혼란은 주로 ‘우리’라는 표현과 ‘맹순영’이라는 이름의 정확한 언급에서 기인한다.
   “안기부에서 나오셨나요?”
   “아닙니다.”
   맹순영은 대학 시절을 떠올린다. 과거 맹순영은 학생회에 적을 두었고 농활에도 몇 번 다녀왔으며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연극 동아리에서는 구소련에서 쓰인 연극 교본을 사용했으나 맹순영 본인이 확실히 안기부의 표적이 될 만한 활동을 한 적은 없다. 애초에, 몰래 대학을 그만두고 시골집에서 부쳐준 등록금을 야금야금 까먹으며 연기 활동을 하고 있는 맹순영을 이런 식으로 급습할 확률이 높은 것은 안기부가 아니라 맹순영의 부모 쪽이다. 또한 말할 나위도 없지만 아무리 안기부라고 해도 갑자기 모습이 변하는 요원 같은 것은……
   “잠깐 같이 걸으면서 이야기할까요?”
   경악과 혼란이 경계심을 압도했기 때문에 맹순영은 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나는 명함을 건네지 않는다. 내가 출발한 시대에는 명함을 더이상 만들지 않을뿐더러 시공간 이동의 증거가 될 만한 것은 남기지 않는 편이 좋다. 대신에 나는 곧장 용건을 밝힌다.
   “배우 맹순영씨를 장국영씨의 상대역으로 캐스팅하려고 합니다.”
   “장국영이요? 제가 아는 장국영이요?”
   나는 맹순영의 얼굴에 떠오른 여러 감정들을 분석한다. 이전에 느낀 경악과 공포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가운데 기쁨과 긍정적인 놀라움이 전면에 두드러졌다가 곧 의구심에 밀려 옅어진다.
   맹순영은 에로 배우들의 예명이 유명 배우의 이름을 패러디하는 식으로 지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혹시 장‘구경’의 상대역으로 에로영화에 나와 달라는 말을 내가 멋대로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주어진 전제가 한정적인 지금 맹순영이 느끼는 이 같은 혼란을 불합리하다 할 수는 없다.
   “네, 홍콩 배우 장국영씨를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제가요? 장국영하고요?”
   “그렇습니다.”
   “제가 나오는 영화를 한 편이라도 보셨어요?”
   “여러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결과 맹순영씨야말로 장국영씨의 상대역에 사상 가장 적합한 배우로 지명되었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작품에서는 말이죠.”
   “사상 가장 적합하다고요?”
   “그렇습니다.”
   맹순영은 깔깔 웃는다. 마침내 공포와 경악이 완전히 지워진 얼굴이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죽은 사람들하고도 비교를 할 수 있단 말이에요?”
   “바로 그렇습니다. 제가 출발한 시대 기준으로는 맹순영씨도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요.”
   맹순영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진다.
   “우리는 23세기에서 영화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맹순영의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의 사업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현실적으로 우주여행이 부호들의 값비싼 취미나 기업들만을 위한 것이 될 수밖에 없듯 시공간상 이동도 아직까지는 기업들의 전유물입니다. 돈이 매우 많이 드는 이동수단이거든요. 자동차와 비행기를 상상해 보세요. 19세기에는 자동차를 아무나 탈 수 없었지만 20세기에는 1가구 1자가용이라는 표어가 유행하고 있죠. 비행기 역시 20세기 기준으로는 너무 비싸서 아무나 탈 수 없는 이동수단이고요. 아직까지는 웬만한 대기업이 아니면 시공간 이동을 시도하기 어렵고, 엔터 산업에서 가장 활발하게 시공간상 이동을 활용하고 있죠.”
   우리는 맹순영의 자취방을 향한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올라간다.
   “우주여행과 시공간상 이동의 산업성의 가장 큰 차이는 아무래도, 현재 지구에 없는 자원을 개발하거나 채굴하는 것이 우주에서는 가능하지만 시공간상의 이동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니까요. 쉽게 말해 1990년대의 지구에 미래의 지구에서나 과거의 지구에서 화석연료를 빌려올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현실에 지나치게 큰 영향을 미치거든요.”
   맹순영은 내 설명의 75% 정도를 이해하고 있다. 이는 영화광치고도 상당한 수치다. 대부분의 영화광은 시간여행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굳이 시간여행물에 대한 애호 성향이 없는 경우에도 그렇다. 영화라는 것의 편집형식 자체가 시간상의 도약을 상당히 직접적으로 은유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미래의 지구에서 빌려오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것이고요. 시공간 이동은 현재로부터 과거로만 가능하거든요.”
   “그러면 저…… 그쪽의 현재가 다시 미래가 되지 않나요. 지금 시점에서는 23세기는…… 한참 먼 미래가 아닌가요?”
   “현재에서 과거로의 이동만이 가능하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좌표를 아는 점 A에서 점 B로 이동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고정된 좌표에서 다른 고정된 좌표로의 이동 말이지요. 이론상 미래의 어떤 시점으로 예상되는 좌푯값을 임의로 사용하여 미래로도 이동할 수는 있겠지만 말할 것도 없이 그건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맹순영은 고개를 끄덕인다.
   “저는 좌푯값이 고정된, 안정적인 현재에서 출발했고, 이런 식이라면 사람을 하나 빌려 저의 현재로 이동했다가 그 사람의 현재에 돌려놓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이 순간 맹순영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레퍼런스는 <백 투 더 퓨처> 시리즈다.
   “그렇지만…… 제가 여기서 사라지면 역사가 바뀌지는 않나요?”
   맹순영 정도의 개인이 사라지는 것이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방법도 있다. 바로 이 현재에 맹순영은 이렇다 할 대표작이 없기 때문에 맹순영의 부재나 실종은 실로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후에 맹순영이 맡게 될 가능성이 있는 중요한 배역은 다른 사람이 대신 맡게 된다. 말하자면 영화 제작의 방식과 상당히 직접적으로 겹치는 일이다. 주연 배우로 점찍어둔 사람이 죽거나 다치면 다른 배우를 캐스팅하듯 우주의 거시사와 미시사도 그런 식으로 대안을 찾는다.
   그러나 나는 그런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을 떠올려 봅시다. 반대로요. 신선경에서 두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니 인간 세상에서는 백 년이 흘러있었다는 이야기를 아시겠죠. 우리는 맹순영씨를 데리고 영화 한 편을 찍은 다음 맹순영씨가 떠나온 바로 그 순간 다음으로 맹순영씨를 복귀시킬 수 있습니다. 당신의 현재에서는 1초간의 부재, 우리의 현재에는 1년간의 촬영이 가능한 거죠. 이해하셨습니까?”
   “만약에 제가 촬영 중에 죽거나 해서 돌아올 수 없게 된다면요?”
   “예리한 질문이군요. 사실 우주는 그 정도의 변화에는 적응력을 갖고 있습니다. 가령 맹순영씨가 매일 콩나물이나 두부를 사는 부식집이 있다고 칩시다.”
   “매일 라면을 사는 유통이 있어요.”
   “그런 식으로 지속적인 영향력을 주고받는 요소들이 있다고 치자는 얘기죠. 그곳에서 맹순영씨가 달마다 10전씩을 썼고 앞으로도 쓸 예정이었다고 칩시다.”
   “10전이라니 지금이 해방 전후도 아니고……?”
   “실례했습니다, 화폐제도만큼은 적응이 잘 안 되어서. 아무튼 10전이라고 치고요, 달마다 10전씩을 쓰던 당신이 이 현재에서 사라지면 그 유통이란 것은 매달 10전씩을 손해 보게 되겠지요. 그것이 어떤 파급효과를 낳을지는 모르고요.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조금씩 돈을 더 써서 유통의 손해는 최소화됩니다. 물론 이 현재와 큰 차이가 나지 않도록 당신 대신 소비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수입이 조금씩 더 주어지지요. 이런 겁니다…… 물이 표면장력을 갖고 있듯이 우주도 정해진 상태를 유지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렇게 말씀하시니 마치 우주가 하나의 생명체인 것처럼 들리네요.”
   맹순영은 조금쯤 감동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한다.
   “제가 뭘 알겠습니까? 저도 영화쟁이고, 방금 설명드린 건 시공간 이동을 통해 배우를 캐스팅할 때 브리핑하는 기본적인 개념들에 불과합니다.”
   맹순영은 여전히 나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지만 적어도 흥미는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과학이 발달한 미래라면…… 왜 굳이 과거에서 배우를 데려다 써야 하나요? 인간보다 완벽한 연기를 할 수 있는 로봇…… 그런 것은 없나요?”
   맹순영은 나를 가리키면서 묻는다. 남자처럼 보였다가 여자처럼 보이게 되는 기술도 있는데 굳이? 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보다 미적으로 우수한 안면부를 이용해 인간에게 호소력이 있는 표정을 구사할 수 있는 안드로이드도 개발되어 있습니다. 배우들의 안전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인공 배우를 선호하는 관객들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고요……”
   그것이 나는 아니라는 의미에서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해하시겠습니까? 어떤 시대에나 최고급품은 결국 수제품입니다. 특정 산업이 폭발적인 수준으로 발전할 때 일시적으로 공산품이 유행하는 사례도 있지만 결국은 자연스러운 것을 가장 아름답게 여기는 것이 인간의 경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이 자신에 대한 칭찬으로 들렸는지 맹순영은 얼굴을 붉힌다. 사실 내가 속한 시대에서 인간이 직접 출연하는 영화산업은 화려한 사양산업에 해당한다. 가장 막대한 자원이 투입되지만 선호 관객층은 기대보다 많지 않고, 개별 작품의 질보다는 캐스팅이나 로케이션에 시공간 이동이 사용된다는 점을 적극 홍보해 이윤을 챙기는 형편이다. 극장은 여전히 매력적인 공간이고 우주여행도 시공간 이동도 시도할 수 없는 대부분의 관객들에게는 영화를 통한 대리체험과 다른 시대의 인물을 만나는 경험이 아직 효력을 발하고 있지만, 대리체험을 더 실감 나게 할 수 있는 매체가 많이 개발되어 있기에 간접경험으로서 영화의 힘은 점점 퇴색되고 있음 또한 부정할 수 없는 경향이다.
   나는 이런 점들을 이야기해 막 동하기 시작한 맹순영의 의지를 꺾지 않을 것이다. 내가 영화쟁이라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다. 나는 맹순영이 참여할 새 프로젝트가 다시 살아있는 인간이 출연하는 영상의 시대를, 그야말로 영화의 시대를 열어줄 것을 기대한다.
   “사실 이미 시공간 이동으로 캐스팅해온 배우가 제가 출발한 시대에 정착한 케이스가 몇몇 있습니다. 누구라고 말씀드리진 않겠습니다, 오시면 자연스레 아시게 될 테니까. 이 현실에서의 마지막을 자연스럽게 연출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실종이든 사망이든.”
   이 말에 맹순영은 이상하게도 부끄러움을 타면서 묻는다.
   “그런데 왜 하필 저인가요? 그렇게까지 해 가면서 저를 캐스팅하는 게…… 손해가 아닐까요? 장국영이라면…… 그래요, 자질은 둘째 치고, 저는 일단 홍콩 말을 못하는데요. 역시 제가 홍콩 말을 배워야 하겠죠? 그분이 저 때문에 한국어를 배우는 건 말이 안 되겠죠?”
   무엇으로 예를 들어야 할까? 나는 맹순영의 시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통신기기를 뇌내망으로 검색해 인용한다.
   “맹순영씨도 삐삐를 사용하시죠?”
   “네.”
   “삐삐가 있어서 성립도 되고 삐삐에 의해 방해되기도 하는 서사가 있다는 것을 아시겠죠. 제가 출발한 시대에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통역기의 기능적 한계로 인한 오해가 발생시키는 로맨스 같은 것이요. 장국영씨와 맹순영씨는 둘다 원어로 연기하면 됩니다. 20세기의 광둥어와 한국어로요. 우리 시대의 관객들은 자막 없이, 그것이 오래된 외국어인 것을 인지하면서 동시에 의미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보통 출생과 동시에 언어중추에 직접 관여하는 바이오봇 통역기를 삽관하거든요.”
   “그건 참 근사한 일이네요.”
   맹순영은 내 말의 80% 정도를 이해한 상태에서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무엇이 망설여지십니까?”
   “글쎄요……”
   맹순영은 아직까지 이 계약에 응할 의사를 보이지 않고 있다. 나는 맹순영의 표정과 제스처와 심박과 침 삼킴의 빈도와 눈 깜빡임을 분석하여 맹순영의 망설임을 읽는다.
   망설임 한편에 이 멋진 변화에 완전히 의탁해버리고 싶은 충동이 맹순영에게는 있다. 맹순영은 대표작이 없는 무명 배우다. 배우 맹순영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기는커녕 지금까지 맹순영이 스크린에 노출된 시간을 다 합쳐서 밥알로 환산해도 밥 한술을 채우기 어려울 정도로 맹순영의 존재감은 적다. 그런 현재를 등지고 나를 따라 23세기로 떠나 아예 시공간 망명자 겸 배우로 살아가는 것은 맹순영이 선택 가능한 미래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이다. 다소 위험하지만 해볼 만한 거래라고 할 수 있다. 맹순영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보잘것없는 것 같은 판돈을 높이 쳐주겠다는 상대하고라면.
   “그렇다면 왜 장국영이죠.”
   “인기 있는 배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말이에요.”
   맹순영은 마른침을 삼킨다.
   “저는 여기에서 아무것도 아니지만…… 장국영은 이미 전설적인 배우잖아요.”
   맹순영은 처음으로 나의 당황한 표정을 본다. 나 역시 여기에서 약간의 도박을 거는 수밖에는 없다. 맹순영을 얼마나 캐스팅하고 싶은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다소의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 즉 발설해서는 안 되는 진실을 암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건…… 그의 시간이…… 이 시대에서는 다하기 때문입니다.”
   “장국영이 죽나요?”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맹순영은 안면 전면에 강한 슬픔을 드러냈다가 천천히 그 슬픔을 걷어낸다.
   “지금은 가지 않겠어요.”
   “지금은?”
   “네, 다시 오실 수 있잖아요?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요.”
   나는 맹순영이 확인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또한 맹순영을 캐스팅하기 위해 한 번 시공간 이동을 감행할 때마다 우리가 투자해야 하는 막대한 자본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맹순영을 캐스팅하기 위해 감수하는 소비가 맹순영이 얼마나 중요한, 뛰어난 배우인지를 말해준다는 것 또한 언급되지 않는다.
   언덕 꼭대기에 다다라 작은 지붕과 담 들로 이루어진 미로에, 맹순영의 자취방이 있는 골목에 진입하기 직전 맹순영이 다시 입을 연다.
   “가시기 전에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무엇입니까?”
   “저의 전성기는 언제죠?”
   나는 맹순영이 실망할 만큼 단호해진다.
   “그것만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오지…… 않는군요. 나의 전성기는.”
   “아까 말씀드렸듯 우리는 우리 시대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를 다시 원래의 시대로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맹순영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냐는 듯. 당신은 이미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다 알고 있지 않냐는 듯.
   “또한 우리는 당신을 캐스팅하기 위해 어떤 작품들을 참고했는지도 따로 공개하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히 답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그제서야 맹순영은 아주 희미하게 웃는다.
   “네, 그걸로 충분하겠어요.”
   이윽고 맹순영은 눈이 내리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AR 시뮬레이터가 해제되면서 안전한 가상-대체 현실 대신 실제 날씨가 맹순영 위에 드리운 것이다. 눈은 이미 발등 높이까지 쌓여있다. 맹순영의 오른 옆구리에서 <아비정전> 비디오테이프가 사라진다. 이 때문에 맹순영은 나와 만난 일을 꿈이라 여기고 잊지 않게 된다.
   정해진 미래에 23세기가 있다면 역시…… Y2K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겠지.
   이후 맹순영은 몇 개월에 걸쳐 나와 나눈 대화의 대부분을 잊어버리지만 자기가 장국영의 상대역이 될 수도 있다는 것과 Y2K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은 기억한다. 한편 이런 일들을 큰 소리로 떠들고 다녔다간 안기부에 잡혀들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해 함구한다.
   맹순영이 장국영의 최후가 나오는 뉴스를 본 것은 그로부터 대략 40개월 후의 일이다. 홍콩 페닌슐라 호텔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뉴스를 본 맹순영은, 놀랍게도 그간 나를 잊고 지낼 만큼 바빴던 맹순영은, 뉴스를 보고 비로소 다시 한번 나를 떠올린다. 장국영이 먼 미래에 있으리라는 것을 떠올린다. 그 사실을 맹순영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믿는다.
   때문에 맹순영은 지금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의 모습으로 등장할 다음 기회를. 그러나 다음 기회는 맹순영이 기억하는 나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오랜-너무도-기나긴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것이 맹순영의 앞에 당도하는 것만은 정해져 있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맹순영은 조급해하지 않는다. 맹순영은 배우고, 이 사실은 그 존재의 자조와 자존의 영원한 근거가 된다.
   이때의 영원이란 정지되지 않는 시간의 화상 위에 한 컷씩, 멀고 무관하게 느껴지는 장면마다 잊을 수 없는 흔적을 남기며 도약하여 반복되는 방식을 말한다.

박서련

장국영을 다시 캐스팅할 수 있다면 주술이든 기술이든 동원하고 싶은 사람이 나만은 아닐 거라는 믿음으로 썼고, 쓰고 보니 어떤 상태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되었다.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좋아한다고 공공연히 말해 왔지만 이 소재를 본격-소설로 가공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아. 많이 쓰고 적게 자고 많이 먹고 적게 살아있다. 많다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문학 플랫폼 던전(www.d5nz5n.com)에 많은 성원 바랍니다. 좋아, 자연스러웠다.

2020/12/29
3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