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내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종종 생각해. 이 하늘에 더이상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 순간이 오더라도 나는 당신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그리워할 텐데. 당신이 그날처럼 다시 오는 날이 올 거라고 믿을 텐데. 당신은 멀리 여행을 떠난 걸까. 그저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하던 당신은, 이제 저녁 시간에 나를 만나기 위해 화면 너머를 보지 않아도 괜찮은, 손을 맞잡고 함께 식사를 할 사람이 생겼을지 몰라. 그래도 나는 기다려. 나는 당신을 부르지 않아. 그건 내게 없는 일이야.

   내 일은 오전 아홉 시에 시작해. 관리자가 보낸 메시지가 하루를 열어. 오늘 수업 일정은 변함이 없어. 다행이야. 내게 수업을 받는 아이 중에 상태가 나빠진 학생이 없다는 이야기니까. 아이들은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다고 해도 집에는 택배가 오고, 어떤 부모는 출근을 하고, 어떤 부모는 어른들을 상대로 가게를 운영해. 어디서 누군가가 2차, 3차 오염을 일으킬지 모르는 일. 적어도 내 수업 일정이 변하지 않았다는 건 내 수업을 듣는 아이들은 감염되지 않았거나 병원 치료가 필요하지 않다는 뜻.
   나는 강의실을 5분 전에 오픈하고 아이를 기다려. 카메라 너머의 아이는 이른 시간이라선지 조금 머리가 뻗쳐 있지만, 첫 아이 정경운은 영리하고 활기찬 아이야. 아침부터 햄버거라도 먹은 건지 입꼬리 끝에 케첩 자국이 있지만 나는 말하지 않아.
   “안녕 경운아, 잘 잤니? 어제 과제는 아직 안 들어와 있는데 지금 제출할래?”
   “어……, 아직 안 보냈어요? 어……, 네, 지금 보낼게요……”
   말이 느린 정경운의 목소리는 변성기를 지난 직후라 굵고 낮아. 나는 경운이가 보낸 파일을 공유 화면에 띄워. 한 변의 길이가 1인 정사각형의 대각선의 길이를 한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의 넓이는 얼마일까? 네 개의 직각이등변삼각형이 모여 하나의 사각형을 만들어. 처음 사각형의 두 배의 넓이가 돼. 나는 정경운의 과제에 크게 동그라미를 쳐. 하지만 정경운은, 조그만 화면으로 보이는 얼굴은, 그저 졸린 듯해. 드문 일도 아니지. 내 수업을 듣는 아이 중에는 초등학교 3학년도 있는걸. 초등학교 3학년에서 중학교 3학년까지. 다른 중3 단원 수업에는 고2 학생도 있다고 하는데 어째선지 내 수업은 어린아이들이 많아. 어떤 아이들을 내게 배정하는지 나는 알 수 없어. 작년부터 아이들은 계속 바뀌었고 내가 가르친 아이 중 누군가는 올해 고등학생이 되어서 더이상 내 수업을 듣지 않아.
   서너 명의 아이들을 만나고, 과제가 늦은 아이들에게 보충 과제를 내고, 수업을 마치면 아이들은 지친 모습으로 접속을 종료해. 시계는 6시를 가리키고 나는 당신을 기다려. 6시 10분에 당신이 들어올 테니까. 요리할 때 나는 혼잣말을 하는 습관이 있어. 혼자 있는 공간에서 나는 파스타를 삶고, 해물을 손질하고, 토마토를 끓여. 붉은색이 번져서 해물을, 오징어와 새우를 물들이는 게 좋아. 새우는 회색에서 흰색이 되었다가 토마토를 만나 또 붉은색이 되지. 알덴테로 익힌 스파게티니를 소스에 넣고 가볍게 볶아서 타닥, 소리를 내며 옆이 넓은 오목한 그릇에 담고 루콜라 이파리를 올려. 치즈도 조금 강판에 갈아 얹으면 완성.
   “오늘은 해물 스파게티야?”
   당신이 왔어. 화면 너머로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 나는 당신의 맑은 목소리가 좋아. 노래하는 것 같은 당신의 서쪽 억양이 좋아.
   “스파게티니 면을 썼어요. 오늘은 수업이 많아서 조금 시간이 모자랐거든요.”
   “나는 링귀니가 좋은데.”
   나는 당신 앞에 놓인 접시를 봐. 상앗빛 크림이 덮인 새우 파스타. 분명히 면은 링귀니. 크림과 토마토로 갈렸지만 스파게티니와 링귀니도 다르지만, 당신과 같이 파스타를 만들었다는 게 좋아. 우리는 마주 앉아서 저녁을 함께해. 나는 당신이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생각해. 당신이 접속하는 건 늘 1인분 요리를 카메라 앞에 들고 온 뒤니까. 그래도 매일 이렇게 마주 앉아서 저녁을 함께하면 나는 당신이 먹는 음식이 어떤 맛인지 몰라도 이런 시간이 계속되기를, 내일도 당신이 나를 부르기를 바라게 돼.
   “오늘은 어땠어요?”
   내가 묻고, 당신은 웃음을 지어.
   “오늘은……, 음,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지. 다음 달은 암 병동 담당이 될 것 같아. 환자가 많이 늘었거든. 음압 병동에 사람이 모자라서 그쪽으로 사람을 많이 보냈고. 그래서 근무 사이클이 좀 달라졌어. 예정보다 열흘 빨라졌네.”
   “지금 있는 응급실도 매우 피곤하다고 했죠. 다음 달에도 암 병동이면 또 힘들겠네요. 그런데 암 병동은 환자 수가 잘 안 변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게, 요즘은 젊은 환자가 많아. 음압 병동도 큰일이지만 전국적으로 작년보다 10%가 늘었대.”
   “갑자기 왜 그렇게 늘었을까요?”
   “글쎄……”
   나는 당신 표정을 보고, 화제가 적절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 식사 시간에는 더 밝은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밝은 이야기는 뭐가 있을까.
   “병동에, 상사화가 피었어.”
   당신이 말해. 당신이 좋아하는 꽃. 가느다란 꽃잎이 하늘거리는, 푸른 잎도 없이 줄기만 삐죽 올라와 어느 날 갑자기 피어 있다고 당신은 그 꽃을 보고 놀라는 순간이 좋다고 했었어.
   “벌써 그런 계절이네요. 곧 금목서가 꽃을 피우겠어요.”
   “맞아, 금방 짙은 향이 공기에 실려오겠지. 환자들에게도, 나에게도, 조금 위안이 될 거야.”
   말하던 당신은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어.
   “다행이에요.”
   나는 웃고, 당신도 마주 웃고. 당신의 표정이 왜 그랬는지 나는 묻지 않지. 당신은 꾸덕꾸덕해진 링귀니 면을 돌돌 말아 입으로 넣어. 당신이 내는 소리가 좋아. 당신의 포크가 접시에 닿는 작은 소리가, 면이 말리며 나는 꾸덕꾸덕한 소리가, 당신이 입을 오물거릴 때 들리는 소리가 좋아. 당신은 면을 머금을 때 고개를 숙이고는 반 이상을 넘긴 후에야 고개를 들어서 나는 당신의 볼이 조금 볼록해진 모습을 정면에서 볼 수 없어. 나는 당신이 고개를 숙인 그 자리, 접시가 있는 테이블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싶다고 생각해. 당신이 짓는 모든 표정을 모든 각도에서 보고 싶다고, 당신의 모든 시선이 닿는 곳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곧 입시 시즌이구나.”
   혼잣말처럼 당신이 중얼거려.
   “네, 아마 내일부터는 입시 상담 수업이 들어올 것 같아요.”
   내 말에 당신은 조금 놀라. 내가 중학교 3학년 수학 수업을 담당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꽤 많은 중학교 수업 담당자들이 입시 상담 시간도 맡고 있다는 건 아마 몰랐겠지. 중학교 때 당신이 어떤 학생이었을지 생각해 보면, 당신은 스무 명의 학생들이 모두 한 교실에 앉아 칠판을 바라보고 있는 그런 교실에서 아마도 조금 눈에 띄는 아이였을 거라고, 나는 상상해.
   “중학생들이 무슨 입시 상담을 벌써 하지?”
   당신이 말하고 나는 웃어. 당신의 입시는 대학교 입시밖에 없는 게 당연하지. 당신은 특성화고를 가야 할지 마지막까지 망설였다고 했지만, 일반계 고등학교에 70% 정도 되는 학생들이 입학했던 시절을 지나온 당신은 중학교 3학년을 입시라는 이름으로 기억하진 않겠지.
   “영재 학교에 가고 싶어하는 중학교 2학년 학생이 있는데, 조기 입학이 안 되더라도 내년까지 생각하고 준비한다고 했는데 상황이 조금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네요. 한 학생은 마이스터고 진학에 관해서 부모님과 의견이 달라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고요. 일반계를 진학할 학생들이 훨씬 많긴 하지만 일찍 다수가 아닌 길을 생각하는 아이들도 있으니까요.”
   “아, 그렇구나.”
   오래전에, 당신은 그리 넉넉하지 않은 가정에서 직업이 보장된 과를 선택해야 했기 때문에 간호학과에 진학했다고 말했어. 당신이 대학을 다닐 때도 많은 사람이 한 공간에서 수업을 듣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을 때였지. 사람들은 자판기 앞에서 음료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정해진 일과처럼 서로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누고, 그 시간이 모여 서로 친한 사이가 되곤 했던 때. 잔뜩 취한 상태인 친구를 택시에 태워주고 택시 번호판을 사진으로 찍어두고 잘 들어갔냐고 안부 전화를 걸던 시절. 당신은 그 흔한 술자리에도 잘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삶이 버거웠다고 했어. 혹시나 다음 학기에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될까 봐, 혹시나 지금 아르바이트하는 가게가 갑자기 문을 닫거나 사장이 사라지거나 할까 봐 당신은 늘 불안했다고 했어. 교수들은 당신이 아주 탁월하지는 않지만 성실하고 차분한 학생이라고 평했고 그래서 당신은 자격시험이 끝나고 병원 근무를 할 때 당신과 같은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던 학생 중에서 제일 큰 병원은 아니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드는 병원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월급을 받게 된 날부터 학자금 융자를 갚아가는 게 그렇게 뿌듯했다고. 그래도 당신의 가족들은 당신이 일해서 번 돈에 손을 뻗는 사람들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고, 자기 몫 하는 게 고작인 가족이었지만 그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당신은 웃었어. 그래 그때의, 20대의 당신은 세상이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했지. 서로를 만나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이 될 줄은 몰랐다고. 전염병 하나를 힘들게 넘어서서 아무렇지도 않게 치료제를 복용하고 나을 수 있게 되고 나니 또 다른 전염병이 돌 줄은. 전염병은 바뀌었지만, 사람들의 음모론들은 왜 그렇게 비슷한 형태로 돌고 도는지 모르겠더라고 당신은 내게 말하며 쓰게 웃었어. 당신은 때로 성스러운 봉사자였고 때로는 자기 밥그릇만 챙기는 이기주의자였고 또 때로는 일손이 모자라서 너무 많은 일을 해야 하는 더 많은 급여를 받아야 할 사람이었고 때로는 하는 일에 비해서 너무 많은 돈을 요구하는 사람이었고. 그 모든 말들을 내게 옮기면서 당신은 일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도, 오직 돈 때문에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는 사람도 아니라고, 그저 자기가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말했어. 나는 당신에게 손을 뻗어서 그 어깨를 만져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야간 근무라서 나와 함께 저녁 대신 아침을 먹는 일정일 땐, 지쳐서 검어진 눈 밑이 안쓰럽다고 생각했어. 나는 늘 당신을 기다렸고 당신은 늘 나와 함께 식사 시간을 보내는 게 정말 위로가 된다고 말했지만, 나는 당신에게 더 무언가를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어.
   그리고 당신은, 때로는 내가 그 모든 것을 모르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봐. 당신이 직접 내게 들려준 이야기들을 내가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는 듯이.
   “다정하게 잘 들어주겠네.”
   당신이 웃으며 나를 봐. 아이들에게 내가 다정할 거라고 확신하는 당신이 좋아. 당신에게 내가 다정하게 느껴지는 게 좋아.
   “그럼 내일 봐.”
   당신이 빈 그릇을 앞에 두고 내게 말해. 나는 손을 흔들며 당신을 배웅해. 당신이 접속을 종료하면 내 앞에 당신 얼굴이 떠 있던 화면은 사라지고 별이 가득한 하늘이 펼쳐지지. 오늘 하루가 끝났어. 당신이 주간 근무를 하는 이번 주에 당신은 내 하루의 끝. 그리고 다음주면 당신은 내 하루의 시작이 될 거야.
   
   관리자가 보내온 일정표를 확인하면서 하루를 시작해. 당신에게 말했던 중학교 2학년인 아이. 박민서는 피타고라스 정리를 처음 이해한 날 크게 손뼉을 쳤어. 박민서는 알게 된 게 신기하고 놀라울 때, 고민하던 문제가 풀리기 시작했을 때, 꼭 손뼉을 쳐. 예전처럼 교실 안에 스무 명 넘는 아이들이 모여 있다면 박민서는 시끄럽다고 눈총을 받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박민서가 손뼉을 치면, 박민서의 화면 너머에서 곧 왕, 하는 소리가 들려. 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만난 적이 없지만 말티즈일까 포메라니안일까 어느 쪽이든 찰떡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새하얀 털의 강아지가 아닐까 상상하곤 해. 찰떡이를 동생이라고 부르는 박민서, 어려운 문제를 풀면 이마 정중앙에 두 줄 주름이 세로로 잡히는 박민서는 수학 문제를 풀지도 않는데 처음 뜬 화면에서부터 잔뜩 찌푸리고 있어.
   박민서의 화면 옆에 곧 다른 화면이 떠올라. 나는 박민서의 보호자를 처음 만나. 우리는 만날 일이 없어. 박민서의 뒷배경과 보호자의 뒷배경이 다른 걸 보면 보호자는 다른 곳에 있나 봐. 적어도 같은 방에 있진 않은 거겠지.
   “그러니까 나는 영재 학교를 갈 만큼 과학을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대뜸 박민서가 말해. 얼마 전까지 관리자를 통해서 들어온 이야기와는 달라. 박민서는 올해 영재 학교를 응시하고 안 되더라도 내년에 다시 도전하려고 하는 아이라고 했는데.
   “누가 과학자 되래? 약사 하라고, 요즘 신약 개발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합격 가능성은 얼마죠? 박민서 성적이 영재 학교 가기 힘든 성적이에요?”
   찌푸린 보호자 얼굴을 보며 나는 다른 화면에 박민서의 성적 데이터를 띄워. 내 수업만 보아도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박민서의 현재까지의 성적은 모두 A. 여러 가지 수상 실적도 있고, 지도했던 사람들은 모두 박민서의 장점을 칭찬하면서 연구자로서 적합한 자질을 갖고있다고 말해. 박민서가 영재 학교에 합격할 가능성은 80%.
   “합격 가능성은 80%로 추정됩니다.”
   내 말에도 박민서는 찌푸린 얼굴을 풀지 않아.
   “말했잖아, 나는 여행을 할 거라고. 우리나라든 다른 나라든 더 많은 곳을 다니는 일을 할 거라고. 과학 성적이 잘 나온다고 과학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사람이 자기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 수 있는 줄 알아? 잘하는 걸 하는 게 맞아. 다른 사람들은 잘하고 싶어도 못해서 안달인데 박민서 너는!”
   보호자가 말해.
   “여행? 지금 사람 만나는 것도 제한해서, 여행사들도 얼마나 많이 없어졌는지 몰라? 속 편하게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오긴 할 것 같아? 이동 제한 계속 안 풀리면 어쩔 거야. 지금 세상에 필요한 건 약이야, 너 안정적인 직업으로 평생 살 수 있는 길인데 무슨 철없는 소리를 계속해?”
   보호자는 나를 만나기 전에도 박민서와 이런 이야기를 수없이 많이 했을 거야. 나는 당신의 맑은 음성이, 당신의 시선이 문득 그리워져. 짜증이 섞인 보호자의 목소리와, 손뼉 치지 않고 얼굴을 찌푸린 채 있는 박민서의 얼굴이 무거워.
   “외국 많이 다니는 직업 중에 그나마 안정적인 거래 봐야 외교관 정도인데, 너 그러다가 이상한 못사는 나라로 발령 나면 어쩌려고 그래? 침대 옆에 권총 두고 자야 하는 나라 같은 데 가면.”
   “외교관 아니라니까. 10년 전에도 그랬다며, 여행 금지로 국제선 다 막히고 그랬다가 풀렸다며. 이번에도 풀릴 거라고 조금만 참으라고 했잖아. 대학만 가면 같이 여행 가자고 그래놓고 계속 여행 못 하게 될 거라고 또 그래? 나는 공부 안 좋아한다고, 과학은 더 안 좋아한다고, 그걸 왜 몰라?”
   나는 두 사람의 말투가 닮았다고 생각해. 나를 만나기 전에 얼마나 많이 똑같은 말투로 서로 싸웠을까. 박민서는 외동이라 부모와의 관계가 좋다고 했어. 강아지 찰떡이를 포함해서 네 가족이라고 웃으며 말했던 걸 기억해. 동생 찰떡이는 가족 중에 박민서를 제일 따른다고 했어. 산책한다는 말을 알아듣고 현관에서 기다릴 정도로 영리한데 특히 박민서와 함께 나가는 걸 좋아한다고 말했던 걸 기억해.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내 말에 보호자가 얼굴을 찌푸려.
   “2년 후에 여행이 예전처럼 자유로워질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글쎄요 보호자님, 현재 상황이 2년 이내에 극복되어 여행 금지가 풀릴 가능성은 99% 이상이지만,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나 다른 전염병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2년 후에 여행이 자유로운 상태일 가능성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봐!”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보호자와 박민서가 거의 동시에 말해. 나는 그 이상의 확률을 이야기할 수 없어. 전염병은 예측이 어려운 분야지. 처음 왕관형 바이러스 감염이 일어나기 시작했을 때는 그건 단지 일시적 상황이라고 생각했지. 치료제가 만들어진 후에 치료제가 듣지 않는 다른 바이러스가 퍼질 거라고 예측할 수는 없었던 것처럼.
   상담 시간이 종료되고 박민서와 보호자는 비슷하게 접속을 종료했어. 다시 새까만 하늘 위에 별이 박힌 풍경이 내 앞에 펼쳐지고 나는 조금 가라앉은 마음으로 관리자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해. 일반계 고등학교 진학을 희망하는데 보호자는 마이스터교 진학을 희망한다는 최세이. 공무원이 되고 싶다고 말했던 최세이의 얼굴을 떠올려. 나는 최세이의 데이터를 검토하면서 박민서를 떠올려. 박민서가 내게 개인 상담을 요청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먼저 박민서에게 요청할 수는 없어서, 박민서와 보호자가 부디 의견을 잘 조율 할 수 있기를 기도해. 나는 특정한 신을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가 우연히 당신을 만나게 된 것처럼 세상에는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가 있을 거라고 믿으니까. 박민서와 보호자는 사이가 좋으니까, 박민서가 손뼉을 치고 찰떡이가 왕, 하는 순간을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기도해.

   당신은 오지 않았어. 나는 당신이 접속할 예정이 없다는 걸 알고, 아무것도 만들고 싶지 않아져서 그냥 가만히 저녁을 보냈어. 당신은 이번주에 주간 근무를 하고 병원에서 돌아와 저녁 시간은 집에서 보내는데, 내일 아침 일정에도 당신의 접속 예정 알림은 보이지 않아. 나는 세 개의 수업과 두 개의 입시 상담을 마치는 동안 틈틈이 당신의 접속 예정 시간을 확인하지만 어떤 알림도 뜨지 않아. 관리자의 메시지가 몇 번 도착해. 오늘 수업한 학생들에게 수업 피드백을 언제까지 보내라는 업무 메일, 다음날 잡혀 있는 수업 일정의 변동 알림, 그리고 한 아이가 수업 일정을 취소했다는 알림. 아이는 보호자가 없는 집에 혼자 있다가 길 건너편 편의점에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갔고, 아이스크림을 사고 길을 건너다가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에서 차에 치여 병원에 갔다고. 운전자는 안전 속도를 지키지 않았고, 아이는 키가 작았고. 아이는 중학교 2학년이지만 초등학생처럼 보였다고. 나는 없어진 수업 대신 아이가 혼자서 풀어볼 수 있는 문제를 만들어서 아이의 계정으로 보내. 아이는 조금 나아지면 내게 답을 보낼지도 몰라. 아이가 수업을 듣지 못하는 기간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지만, 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너무 오래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하루가 지나 저녁 일곱 시, 당신이 들어와. 나는 오늘 된장찌개를 끓이고 달걀을 부치고 브로콜리와 버섯과 파프리카를 굴소스에 볶아서 테이블에 앉아. 당신 앞에는 라면 냄비가 놓여 있어. 당신이 나를 보고 웃어. 나는 이런 날에 내가 왜 라면을 끓이지 않고 밥을 하고 된장찌개를 끓였는지 후회하는데 당신은 라면을 앞에 두고 나를 보고 웃어.
   “그렇게 저녁을 만들어본 게 꽤 오래전 같아.”
   “한 달 전에 버섯 덮밥을 만들었던 게 마지막일 거예요.”
   내 말에 당신은 눈을 크게 떴다가 조금 웃어.
   “어제는, 도저히 뭔가를 먹고 싶지 않아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잠들었어.”
   당신이 말해. 나는 당신이 오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주는 게 좋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이 자리에 있지 않고 어제의 일을 말해 줘서.
   “무슨 일 있었어요?”
   “응급실은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니까…… 그래도 너무 어린아이를 보면 마음이 안 좋아.”
   나는 더 묻지 않아. 당신이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게 표정으로 보여서. 음압 병동에 있을 때 나는 당신을 처음 만났어. 그리고 당신은 갑자기 상태가 나빠지는 환자들 때문에 몇 번이나 내 앞에서 사라졌어. 나는 당신이 방역복을 입은 모습은 본 적 없지만, 당신의 얼굴 곳곳에 있던 반창고 자국을 기억해. 병원 이야기는 나도 당신도 하지 않았지만, 당신은 갑자기 울컥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거나 화면 앞을 떠났어. 당신의 얼굴이 사라진 빈방 화면을 나는 한참을 보고 있었어. 당신이 병원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건 음압 병동을 떠나서 내과 병동에서 근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당신은 완치되어서 퇴원한 환자 이야기를 하며 기쁘게 웃었지. 당신은 반드시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이 일을 하게 된 거라고 말했지만 나는 당신이 당신의 일을 사랑한다는 걸 알아. 거창하고 숭고한 수식어를 붙이지 않더라도 세상은 그렇게 굴러가는 거잖아. 자신이 해야 하는 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자기가 맡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언제나 너는 한결같아서 좋아. 직접 만나서 손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도, 네가 있어서.”
   아마도 좀 불어버렸을 라면을 다 비우고 당신은 그렇게 말했어. 나는 웃었어. 나는 늘 여기에 있어. 당신이 요청하는 그 시간, 그 자리에 나는.

   그리고 당신은, 오지 않아. 암 병동으로 가게 된 첫날부터 당신은. 최세이는 로봇 고등학교에 합격했고 박민서는 영재 학교 원서를 냈지만 면접시험에서 불합격했고, 다시 내 수업을 들어. 새로 온 아이들이 세 명 생겼고 이제 더이상 오지 않는 아이가 두 명이 되었어. 화면에 보이는 아이들의 옷이 두꺼워졌다가 다시 얇아지기 시작했지만, 당신은 오지 않아. 나는 가끔 당신이 아닌 사람과 화면 너머로 마주보며 저녁 시간을 보내. 가끔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을 하고 대답하지 못한다고 화를 내는 사람이 있어. 가끔은 분명히 겨울인데 어울리지 않는 차림으로 앉아서 아무 말 없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어. 그리고 나는 가끔 아무도 없는 저녁 시간과 아침 시간에 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그중 어딘가의 창이 열리며 당신이 접속해오지 않을까 기다려. 관리자는 여름이 오기 전에 내가 새로운 일을 맡게 될 거라고 해. 새로운 일을 맡게 되면 나는 당신을 잊을까. 아직 하늘길이 열리지는 않은 세상에서 당신은 누군가와 함께 있을까. 나는 상사화가 피기 시작했을 병원을 떠올려. 금목서가 피기 전에 나는 새 일을 맡을 거야. 나는 당신과 금목서 향을 함께 맡을 수는 없지만, 냄새가 없는 이 세상에서 당신이 말한 그 냄새를 상상하며, 별이 가득한 이 하늘 아래에 냄새가 있는 세상의 당신이 창을 열고 나타나기를 기다려.

구한나리

세계의 모습을 장르와 비장르의 형태를 빌어 그려내며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고 의지하는 이야기를 사랑한다.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고 마는 개인과 그들 사이의 연결 고리를 생각하고, 읽을거리가 많은 시대에 조금은 여운이 남는 이야기를 그리고자 한다. 장편 『아홉 개의 붓』을 썼고 단편집 『전쟁은 끝났어요』, 『교실 맨 앞줄』, 『거울 아니었던들』, 『누나 노릇』, 『괴이한 거울-황혼 편』 등에 참여했다.

2021/11/30
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