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사전을 훔쳐서 나온 천사가 있었다. 신의 물건에 손댔으니 더이상 천사라고 부를 수 없으나 악마가 되었다고 보기는 애매한 미결정의 존재이므로 이를 그저 한 인간, 원(One)이라고 한다. 원은 천사에서 악마로 떨어지기 전에 거치게 마련인 어떤 상태를 가리킨다. 처음 신의 사전에는 빛과 어둠을 가른 뒤로부터 7일간의 말씀만이 수록되어 있었으나 이후 인간이 오랜 세대를 통과하며 만든 언어가 페이지마다 역시 인간이 규정한 철자와 문법에 따라 정렬 누적되었다. 말씀 이후로 대부분의 말을 배태 및 발아시킨 것이 인간임에도 그것을 신의 사전이라고 칭하는 까닭은, 그 거대한 책에 담긴 말 가운데 하나를 지우면 그 말이 지시하는 사물이나 사태, 사건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때 유의어나 반의어로, 반복이나 변주의 그물망으로 연결된 사태들 또한 연쇄적으로 사라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음운과 의미가 일대일대응을 하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인간 세상에서는 말들의 의미가 한자리에 정박하지 않고 흐르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서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한결같은 말이 있다는 것은, 곧 말의 장례를 치렀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신의 사전은 말들의 집결지이면서 말들의 무덤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신의 사전에서 ‘생성’을, 특히 ‘소멸’ 따위의 말을 지우면 매우 중대하고 우주적인 오류가 발생하여 신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므로, 신은 자신의 영속을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그 어떤 말도 함부로 지우지 않는다. 말을 변형하고 훼손하거나 삭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몫으로 맡겨두었고, 인간들 사이에서는 사전에 등재된 말의 지위를 변경하거나 때론 폐위한다 해도 그 말이 지시하는 사태는 여전히 남아 있거나 득세하는 경우마저 많다. 신은 게으르다. 그런데 게으름이란 간혹 끝없는 공허, 허무의 반영과 구분이 어렵다. 신은 사실상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으며 어쩌면 자신의 존재 여부에도 무관심할 것이다. 원은 생각한다. 매우 중대하고 우주적인 오류가 발생해선 안 되는 이유라도 있을까? 또한 원은 생각한다. 애당초 생성이나 소멸을 지우는 행위가 반드시 우주적인 오류이기는 한 걸까?
   수많은 천사들의 방어막을 베고 가시넝쿨을 허물어 지상으로 떨어지는 관문을 통과한 원은 이미 피투성이였고 거대한 사전을 둘러멘 등이 짓눌려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으나 자신의 선한 의도를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원은 처음 사전을 펼친 뒤 모든 것의 궁극적인 원인이자 동시에 결과이기도 한 ‘시간’을 지우려고 검은 펜을 댔었다. 필멸의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서 시간을 없앤다면 인간은 더이상 늙음과 퇴락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러나 그것을 지우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원은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사라지면 죽음이 사라지는 대신 생성도 사라진다. 그거야말로 원이 바라고, 어쩌면 인간도 바랄지 모르며, 만상에 대한 신의 무관심이 극대화된 상태에 해당할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인간은 너무나 많고, 죽음을 바라는 인간만큼이나 현재에서 미래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자들도 많았다. 살아-가기. 간다는 동사는 시간의 흐름과 장소의 이동을 전제로 한다. 시간을 지우면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간다는 이동 또한 지워지며 어떤 행위도 발생하지 않고 사람의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일조차 불가능한, 총체적 멈춤이라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기왕 배 속에 들어 있던 아기는 더이상 자라나지 않고, 만삭인 경우 아이는 태어나지 않고 임부의 고통만 그대로 진행 중인 상태에서 멈출 것이다. 고통은 속도와 비교적 관련이 적은, 다만 이미 발생한 일의 결과이자 현상에 해당하니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으리라는 예측이 가능해진다. 시간이 없으므로 시간에 따른 세포의 움직임도 없고 한번 보유한 고통은 영원히 끝나지 않으며 영원이라는 추상적 개념 또한 사라질 것이다. 죽음으로 고통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 불가능하다. 그 어떤 완결도 없게 된다는 것은 시작을 잃어버린다는 뜻과 같다. 그러기 이전에 인간의 생체를 구성하고 있던 모든 조직이 마찰력을 잃고 풀어져 흩어지며, 마찬가지로 모든 생명체가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 고통이나 기쁨을 모르는 원자로 돌아갈 것이다…… 무엇보다 시간은 빛이 있으라고 명한 말씀 때부터 존재했던 신의 고유한 단어이므로, 원은 그것을 지울 수 없다.

   그리하여 신과는 거리가 먼 정도가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협소하고 국지적인 단어를 지움으로써 인간을 위한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여긴 원은 첫 번째 도시에 다다른다. 사람들은 그전까지, 또한 지금도 그렇듯 서로가 서로의 멱살을 낚아 올리고 머리채를 잡아 돌림으로써 원하는 것을 얻어내거나…… 주로 빼앗고 있었다. 한 사람이 말을 하면 다른 사람이 제 편을 끌어모아 다 함께 손가락질하거나 주먹을 날려 입을 다물게 했고, 또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거나 주먹을 날린 자들에게 같은 행위를 반복하다가 그것만으로는 간에 기별이 가지 않으니 강도가 점점 높아지면서 주먹은 돌이 되고 나중 가선 화염이나 창으로 바뀌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 과정이 없이는 자신의 삶을 영위할 어떤 것도 얻어낼 수 없었다. 만일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지 않고서도 스스로의 힘과 정직한 마음, 상식적인 행위만으로 생계를 이어나갈 수만 있다면, 최소한의 평화가 보장된다면 인간은 고통의 요건 하나가 줄어드는 셈이다. 그리하여 원은 등에 진 신의 사전을 힘겹게 내려놓고 펼쳐서 ‘공격성’을 지운다.
   인간에게서 공격성이 사라지면 서로의 목을 베고 심장을 찍어 내리는 데 쓰였던 낫은 밀과 보리의 목을 베는 데만 쓰인다. 서로를 향해 눈을 부릅뜨지 않고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으며, 그 무엇도 파괴하지 않는 온순함을 유지한다…… 원의 예상은 그것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원의 전망과 조금 달리 흘러간다. 사람들은 낫날의 방향을 돌려 밀과 보리를 베는 게 아니라 낫을 들지조차 않는다. 무언가를 베거나 뜯어내는 행위는, 설령 인간이 물과 비료를 주고 약을 쳐서 가꾸었다 할지라도, 살아 있는 자연에 대한 공격이다. 사람들은 수확하지 않고, 사냥하지 않는다. 노루나 토끼가 눈앞을 뛰어 달아나더라도 그것에 손을 뻗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추수해야 할 때를 훨씬 넘긴 작물들이 썩어 물러서 떨어지고 논밭은 검게 물들며 악취를 풍긴다. 그전에는 벌레를 잡기 위해 약을 쳤지만 이제는 벌레를 공격하는 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죽은 작물마다 까맣게 벌레가 들러붙어 꿈틀거린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가 어미의 젖을 빨지 않고 죽어간다. 아기가 생존하는 도구―입에서는 힘차게 먹을 것을 취하고자 하는 욕망이 사라지고, 손아귀는 어미의 유방을 움켜쥐거나 탐색하지 않으며, 울음으로써만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음에도 음성에서 탄력이 빠져나가 중얼거림과 옹알이만 남는다. 어미는 무심히 젖을 물리지만 아이는 입에 물고만 있을 뿐 빨아들이는 행위를 모른다. 젖을 짜내지 못하고 가슴이 딴딴하게 부어서 달군 쇳덩이처럼 굳은 어미는 고열로 죽어간다. 공격성과 함께 타인에 대한 약탈과 편취가 사라지며 대신 그 안에 포함되었던, 타인에 대해 경쟁우위를 점하기 위한 인간의 지능이 제로에 수렴되고, 자신의 존속을 유지하고자 하는 본능도 제거된다. 원은 자신의 단어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닫지만, 하나의 도시에서 한번 신의 사전을 펼쳐 지운 말은 원래의 자리에 되살릴 수 없다. 그리하여 이미 태어난 아이들을 비롯한 인간들은 누구도 공격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놓아버린다. 놓아버린다는 것이 자살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살은 스스로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그저 삶이 천천히, 자신을 구성한 최소한의 요소와 성분을 잃을 때까지 거추장스러운 몸을 내버려두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일종의 정복 행위로서 공격성을 필요로 하는 섹스 또한 자취를 감춘다. 오로지 잠에 빠져든다. 잠자는 행동이 누군가에 대한 공격이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모든 본능 가운데 수면만이 충족되고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의 먹이사슬 체계가 끊어진다. 상한 작물에 관성적으로 들러붙은 벌레들은 그것을 섭취함으로써 변이나 탈피를 하지 않고 곧 기운을 잃고 후두두 떨어져 내린다. 도마뱀이나 개구리는 혀를 길게 뽑아 곤충을 삼키지 않는다. 먹히지 않는 작은 동물들은 보호색이나 독가스 같은 자기방어 체계를 잃는다. 그러나 식물은, 식물과 대체로 인연이 없는 말이라고 사람들이 흔히 믿는 공격성, 그것이 제거되더라도 살 수 있지 않을까? 식물 또한 흙에서 양분과 물을 빨아올리는 법을 잊는다. 벌이 날아와 꿀을 빨지 않으니 식물은 꿀을 생성하지 않는다. 꽃을 피움으로써 향기를 발산하는 과정이 사라진 것이다. 꽃이 피지 않으니 열매 또한 맺히지 않는다. 결국 다음의 씨앗을 떨어뜨리지 못하고 식물의 삶은 세대를 이어 나가지 못한다.
   그 모든 무욕과 무기력은 도시 내에 살아 있는 존재가 단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계속된다.

   신의 사전은 너무 거대한 탓에 한 발짝 옮길 때마다 발꿈치 뒤에서 흙바닥에 모서리가 긁힐 것만 같다. 습기를 머금었는지, 아니면 줄곧 오르막길이 펼쳐져서인지 처음 출발했을 때보다 좀 더 무거워진 것만 같은 사전을 등에 지고, 원은 용기를 잃지 않으며 다음 도시로 나아간다. 처음의 실패를 거울삼아 원은 조금 더 의미망이 작고 구체적이며 명확한 단어를 골라 지울 것이다. 그러나 막상 한 개의 단어에 검은 펜을 가져가면 그것이 정말 작고 구체적인 데다 명확하기까지 한지 헤아리기가 어렵다. 걷다 지치면 앉아서 신의 사전을 펼치고 무엇을 없애도 좋은지 아니, ……해도 좋다는 것은 너무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표현이며 무엇을 없애야 인간에게 이로울지 심사숙고한 끝에, 두 번째 도시에 도착했을 때 원이 지우기로 결심한 것은 ‘고독’이다. 고독을 지우면 사람들이 더이상 외롭게 죽어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누군가의 옆에는 항상 다른 누군가가 있어서 서로를 지탱하며 서로에게 존재 이유를 부여할 것이다. 또는 인연이 닿지 않아 곁에 아무도 없다 해도, 예컨대 친구나 배우자, 부모뿐만 아니라 키우는 고양이나 새 한 마리 없더라도 고독을 벗 삼아…… 라는 말이 사라지는 한편 홀로 있어서 외롭다는 감정 자체를 알지 못하니 고독에 짓눌려 죽을 일이 없을 것이며, 그중에는 곁에 머무는 누군가의 존재를 대체할 무언가를―구체적이고 유용한 결과물을 생산해내는 이도 있을 테고, 어떤 자는 무질서와 정념으로 들끓던 내면을 깊이 탐색할 시간을 가질 테니, 그건 결국 문명과 정신의 융합으로 이어져 후세 인류의 실질적인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신의 사전에서 고독이라는 말을 지우자, 원의 의도대로 사람들은 더이상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은 홀로 있음으로써 자신에 대해 고찰하고 사유의 지평을 넓혀간다는 의미와 같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그저,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있고 무언가와 함께함으로써 고독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의미와는 조금 달리, 벗어난다. 홀로 벽을 응시하거나 눈을 감아서 세상과의 감각 교환을 차단하고 지나간 장면을 곱씹어 미래를 위한 양분으로 삼는 일이 없으며, 그저 단지 현재의 열락과 오욕을 소비하는 데 집중한다. 하루 중 극히 일부의 시간을 머물 뿐인 0.5평의 욕실을 제외하고선?이 욕실마저도 최소한 개나 고양이가 동행할 것이며 그런 것을 일체 키우지 않더라도 욕실에는 자신과 가장 닮은 존재가 있다. 거울을 한 번만 들여다보면 된다―그 누구도 홀로 있거나 홀로 잠드는 법이 없고 어쩌면 꿈속에서도 누군가와 또는 자신의 그림자와 함께할 것이다. 하루가 저물고 나면 동력이 다한 듯 지쳐 휴식에 떨어지지만, 눈 뜨고 나서 잠들기까지 자신을 둘러싼 것들에 대한 즉물적인 반응을 다하기에 하루해가 모자란다. 일하면서 생겨나는 문제들과 부딪치고, 일을 내려놓으면 음악과 고성과 함께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가는 약과 술이 끊이지 않는다. 사람과 동물과 사물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법이 없지만, 열광을 넘어 대체로 폭력과 비명을 수반하는 그것을 관계라고 규정하기가 어려워진다. 하나의 몸에 쏟아지는 감각의 정보는 부피와 중량이 늘고 그 강도 또한 극대화되어, 종내는 감각의 날 자체가 무디어진다. 감각의 비만. 반응의 소모. 한번 입력된 감각은 그것을 초과하는 자극이 들어오기 전까지 반응을 인출하지 못하고 다른 수많은 감각들 사이에 파묻혀 퇴화한다. 자극의 탐색, 초과를 향한 여정이 이어진다. 밀담과 애무와 폭소와 환성은 부서지는 유리, 피 묻은 돌, 주먹과 발길질, 멱살잡이와 구토로 이어진다. 서로가 없으면 살지 못할 것처럼 포옹한 연인들은 빠르게 서로를 지겨워하고 환멸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연리지처럼 붙어 있을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사람들은 더이상 혼자가 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어떤 모습이라 할지라도. 그러므로 그들의 관계는, 그것도 관계라고 할 수 있다면 서로를 할퀴고 물어뜯고 깨부순 거울 조각으로 자신의 손목이나 상대의 얼굴을 긁기도 하며, 그 과정에서 돌출된 상처를 핥기도 하고 오히려 소금을 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진다. 결국 서로의 형체가 남지 않게 될 때까지.

   신의 사전을 등에 진 원은, 이번에는 평지에 가까운 완만한 오르막길인데도 발걸음이 그전보다 더욱 처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저 느낌 탓이 아니라 이 순간에도 세상 곳곳에서 생겨나는 외침들, 조롱들, 통곡들, 웃음들 따위가 말로 정착되고, 말이 불어난 사전은 저절로 무거워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실체가 있고 무거운 말을, 인간은 그 무게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난사한다. 허공에 값없이 흩어지는 말들도 있으며 어떤 말들은 사람의 심장에 가서 박히고 그를 죽인다. 드문 일이지만 특정한 말을 듣고 죽어가거나 반대로 죽어가다가 살아나는 꽃도 있으며, 때론 강바닥이 말라붙거나 강이 범람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오로지 말을 만들거나 사용하고 때로는 뿌릴 뿐이며, 그 말의 주인이 되지는 않는다. 말을 가진다는 것은 신이 된다는 뜻이다. 말을 남용하다 보면 자신이 언젠가는 그 말을 가졌다고 착각할 것이다. 사람이 누구나 자기만의 신이 될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올지도 모른다. 그러자면 어떤 말을 없애는 것은 인간의 불의와 불편을 덜어내기도 할뿐더러 그들을 궁극적으로 신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돕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원은 실패가 이어진 데 대해 조금도 낙담하지 않고 다음 도시로 나아간다. 세계는 넓고 도시는 많다. 어쩌면 신의 사전에 등재된 말들을 모두 지울 때까지 이 세계의 도시는 남아 있을 것이다.
   다음 도시에 다다라 원이 지운 말은 오염이다. 오염을 없애는 것은 각종 유해 세균이 번식할 근거지를 없앰으로써 사람이 감염으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을 가능성을 줄여준다. 사람들은 그전까지의 문명을 대부분 버리고 자연 친화적인 생활로 돌아가, 플라스틱 폐기물이나 폐수로 환경이 오염되는 일이 없다. 기름과 물만 깃든 건강한 땅, 제 얼굴이 선명히 비쳐 보일 만큼 맑은 물, 먼지 한 줌 없는 공기. 오염 없는 쾌적한 도시에서 누군가를 시기하거나 비하하는 더러운 마음도 사라지고 흰 눈 같은 마음으로 진실하게 사람과 환경을 대하게 될 것이다. 이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어쩌다 실수로 자상이나 열상, 화상을 입어도 그 자리에 구더기가 꼬이지 않는다. 누구나 작은 상처라도 하나 입는 순간 즉각 드레싱과 유기농 밀폐 밴드 등으로 조치하여 환부를 무균 상태로 보존한다. 외부에 있는 무엇이라도 몸속에 침투하지 않도록, 흐르는 맑은 물에 손을 씻는 습관이 모두 철저히 몸에 배어 있다.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깨끗한 말을 하고 깨끗한 마음을 먹으며 깨끗한 행동을 한다. 자연과 어울리는, 자연과 하나 된 모습을 보기만 해도 평화가 온몸에 스며든다.
   그러나 이곳 도시에서는 그전까지 지나쳐왔던 그 어디보다도 빠르게 문제가 발생한다.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나면 반드시 그 뒤에 소용없는 잔여물이 생긴다. 나무 장작 하나를 태워도 재가 쌓인다. 그 성분이 얼마나 자연적이든 간에 얼굴이나 손발, 의류에 묻은 검은 재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것에 오염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그것이 오염이라는 인식이 없더라도 무언가 좋지 않은 것, 불길한 것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연적인 잔여물을 토양에 묻어두더라도, 세균과 벌레가 사라진 세상에서 그것을 분해할 존재들이 없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만들거나 쓰지 않는 일만이 깨끗함을 유지하는 방법이라는 걸 알게 된다. 흐르는 맑은 물에 손을 씻고, 온몸을 씻고, 마침내는 온몸을 담근 채 물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기에 이른다. 몸속을 유영하는 피를 비롯한 여러 체액들, 생명을 유지하는 그것들이 몸 밖으로 나오면 순식간에 깨끗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니 더이상 아무도 배설하지 않는다. 누구도 섹스를 하지 않으며, 이미 깃들어 있던 배 속의 아이가 태어나자 산모도 산파도 그 끔찍한 광경에 놀라 까무러치고 다시 눈을 뜨지 못한다. 배설하지 않기 위해서는, 몸속의 것을 몸 밖에 나오지 않도록 하려면 몸속에 더이상의 잔여물이 남지 않도록…… 먹지 않는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존재를 비워간다. 바싹 말라붙어 쪼그라들고 껍질만 남는다. 손대면 가루로 부스러지기는 하나 그 껍질들은 자연에 흡수되지 않는다.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만들고, 깨끗한 것이 더러워지는 순환 과정이 모두 멈춘다. 다만 청결을 유지하려 했을 뿐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의 형태가 유지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원은 진정한 깨끗함이란 생명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말씀 이전의 상태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원은 등에 진 신의 사전이 어느새 바닥에 끌려 모서리가 닳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발목을 휘감아오는 피로와 탈력은 그가 고통을 모르는 천상의 몸에서 지상의 몸으로 떨어진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이다. 하나의 말은 다른 하나의 말, 또 다른 수많은 말들과 이어져 그물을 맺는다. 찾아보면 분명 하나의 사태에 하나만이 대응하는 말이 어딘가에는 있을 텐데, 어째서 그 말을 찾아내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가. 어째서 언어는 서로서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언어가 지시하는 사물이나 사태 또한 마찬가지로 연결되어 있는 것인가. 어째서 하나를 없애면 다른 것이, 또 그와 비슷하거나 연관된 다른 것이, 다른 것과 이어진 다른 것이, 연쇄 다발로 소멸하는가, 결국은 모든 것이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게 될 때까지.
   그럼에도 원은 이 우주 어딘가에 단 하나의 도시도 남지 않게 될 때까지, 태초에 말씀이 있었으나 그 말씀이 이루어질 만한 곳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것이 설령 신의 사전에 담긴 말을 모두 털어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하더라도. 인간의 말을 모두 없애버리면 어떨까. 사전의 무게가 공기보다도 가벼워질 것이다. 거기에 새로이 말씀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말이 없어지면 인간은 모두 없어질 것이다.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될 것이다. 탯줄을 잃어버린 말들도 더이상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 무엇인지, 원은 이제 알 것만 같다. 다음번 도시에서 원이 지우기로 한 말은 혐오이다. 혐오가 사라진 도시에 인간이 남아 있을 것인지, 아니 무엇이 남아 있을 것인지 원은 그것이 궁금하다. (*)

구병모

소포클레스의 얘기였던가요. 태어나지 않는 게 좋다고, 이왕 태어났으면 어서 원래 있던 곳(저세상,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게 좋다고. 그것은 이미 태어난 말들, 말들이 태어나게 한 괴물에게도 적용되는 걸까요. 어쩌면 괴물이 먼저 있어서 그것을 부르는 수만 가지 다른 이름이 생겨났을 뿐일 텐데.

2018/11/27
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