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할 것 없이 지루한 상견례 자리였지만 주연은 바짝 긴장을 하고 있었다. 겉치레식의 덕담이 오가는 사이에 샐러드와 계절 냉채, 잡채와 구절판 등 입맛을 돋우는 간단한 요리 몇 가지가 차려졌다.
   일단 드시지요.
   강훈의 아버지가 말했다. 그가 인사말 다음에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젓가락이 부딪치는 소리와 음식을 씹는 소리가 어색한 정적을 채웠다. 곧이어 갈비와 보쌈을 시작으로 메인 요리가 나왔고, 강훈의 아버지는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먹기만 했다.
   강훈의 어머니가 먼저 예단을 생략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예물도 생략하고 혼수와 결혼식도 최대한 간소하게 하자는 의견에 모두가 동의했다. 주연이 결혼 준비에 쓸 수 있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강훈의 어머니는 강훈에게 전셋집과 결혼 준비 자금까지 따로 챙겨주겠다고 약속했다. 강훈도 직장을 다녔지만 버는 대로 써버린 탓에 모아놓은 돈이 거의 없었다. 강훈은 부모의 돈을 받는 일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내가 좀 신세대지요? 우리 새아가에게 난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어요. 요즘 세상에 나 같은 시어미는 없다고 다들 그럽디다.
   강훈의 어머니가 목에 두른 실크 스카프를 매만지며 말했다. 지난 오 년 동안 강훈의 어머니는 주연을 며느리처럼 여겨왔다. 친근하게 대하면서도 교묘한 방식으로 홀대해왔다는 의미다. 그런 은근한 홀대가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곧 익숙해졌다. 익숙해지려고 애를 쓰진 않았지만 무슨 일에든 금세 익숙해지는 사람답게 어느새 익숙해졌다. 강훈의 어머니는 돈이나 백화점 상품권, 몇 번 입지 않은 고급 모직 코트를 주연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 주연은 그것이 부담스러웠지만 때로는 자신이 받아 마땅한 어떤 대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요. 얘는 복 받은 거예요.
   주연의 어머니가 거들었다. 두 어머니는 주연과 함께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했다. 그들의 진짜 모습은 주연과 단둘이 있을 때에만 드러났다. 강훈의 어머니는 바라는 것이 많고, 주연의 어머니는 무언가 바라는 일조차 귀찮아할 정도로 주연에게 무심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지만 않는다면 상견례는 성공이었다.
   국(菊)이라는 문패가 붙어있던 룸 안에서 강훈의 어머니는 넉살 좋고 우아했으며, 주연의 어머니는 조용하지만 배려심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대로라면 괜찮겠다는 생각에 주연은 조금 편안해져서 처음으로 젓가락을 들었다. 그녀의 접시에는 강훈이 집어다 놓은 갈비 한 조각이 천천히 식어가고 있었다.
   강훈의 어머니는 종종 아들의 흉을 보며 주연을 칭찬하기도 했다. 강훈은 집에서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아들이었다. 어머니에게 강훈은 여전히 열 살 무렵의 아이였는데, 애석하게도 다 자란 아들에게는 더 이상 어머니가 필요하지 않았다. 입가의 솜털이 굵고 빳빳한 수염으로 변할 무렵부터 강훈은 어머니를 봐도 잘 웃지 않아서, 어머니는 하나뿐인 아들의 수염만 보면 괜히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밥과 재첩국, 조기를 비롯해 다양한 밑반찬이 새롭게 세팅되었고, 강훈은 가시를 바른 조기 살을 주연의 밥그릇에 놓아주며 실없이 웃었다. 강훈의 어머니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면서도 강훈이 깨끗하게 발라낸 생선 살을 보며 약간 감탄한 얼굴이 되었다가, 곧 숟가락을 내려놓고는 재첩국이 짜다는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재첩도 실하지 않고 비린내가 나서 더는 못 먹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주연은 혼자 초조한 마음이 들어 다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뭐가 짜, 맛있기만 한데?
   강훈이 태연하게 갈비를 집어 먹으며 대꾸했다. 주연은 종업원을 불러 국을 다시 조리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강훈의 어머니는 괜한 짓을 한다고 그녀를 나무라면서도 기분이 나아진 듯 웃었다. 강훈도 괜히 종업원을 수고롭게 한다며 어머니의 말을 거들었다. 주연은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강훈의 어머니는 감정적이고 변덕이 심한 사람이었지만 단순한 면도 있어서 비위를 맞추기가 어렵지 않았다. 곧 종업원이 김이 피어오르는 새 재첩국을 가져왔고, 거의 비워진 국그릇은 쟁반에 담아 나갔다.
   주연의 어머니는 밥을 몇 술 뜨지도 않은 채 아련한 눈빛으로 창 너머의 일본식 정원을 감상하고 있었다. 자신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잊어버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주연이 결혼을 하겠다고 말하던 날에도 주연의 어머니는 창밖을 보며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주연에게 제대로 집중을 할 때는 돈이 필요할 때뿐이었다. 지독하게 가난해서 지독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듯 주연의 어머니는 뻔뻔하게 돈을 요구했고 주연은 그런 어머니에게 돈을 줘왔다. 그렇게라도 그녀에게 필요한 사람이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돈을 써도 주연은 어머니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술에 취한 팀장의 농담에 주연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가방에서 프로젝트 자료집을 꺼냈다. 팀장은 자료를 펼쳐보지도 않고 소파 위에 대충 던진 다음 술잔을 들었다.
   온 김에 한잔하자. 결혼 축하해. 내 이혼도 축하해줄 거지?
   팀장의 양옆에는 주연 또래의 남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남자들은 밝게 웃으며 주연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주연은 남자들의 시선을 피했다. 이혼 소송이 끝날 무렵 우연히 새로운 취미에 눈을 뜨게 된 팀장은 주말마다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가방이나 보석에 돈을 쓰거나 연애를 하는 것보다 훨씬 즐겁고 만족스럽다고 했다.
   딱 한 잔 만이에요.
   주연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걸터앉았다. 며칠간 야근을 한 탓에 피곤했다. 팀장은 그런 주연에게 술을 따라주며 한 시간만 놀다 가라고 애원했다. 회사 바깥에서 둘만 있을 때면 팀장은 종종 주연에게 애처럼 굴었다. 팀장이 그럴 때마다 주연은 이상한 만족감을 느꼈고, 그녀의 애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의무감이 들기도 했다.
   팀장이 주연의 이름을 부르며 술잔을 들었다. 모두가 단숨에 술잔을 비웠지만 주연은 마시는 시늉만 하고 술잔은 그대로 내려놓았다. 룸 안의 공기는 답답했고 주연은 어떤 자세로 앉아 있어야 할지 고민을 해야 할 정도로 불편했다.
   팀장은 업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팀장을 좋아하거나 따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팀장의 능력과 관계없이 주연은 처음부터 그녀가 좋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던 건 아니었다. 주연은 팀장을 잘 따랐고 팀장 역시 그런 주연을 각별히 예뻐했다. 주연은 일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는 편이었다. 능력 이상으로 회사 내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팀장 덕분이었다. 성과나 승진은 주연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우러러볼법한 누군가에게 보살핌과 예쁨을 받는 것이 주연에게는 훨씬 중요했다. 어머니로부터 주연은 한 번도 그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주연은 팀장이 인간적으로 자신을 인정해주고 아껴주기를 원했다. 둘 중 누군가가 이직을 하게 되더라도 이 관계가 지속되기를 바랐다. 팀장이 주연에게 난처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해도 웬만하면 거절하지 않는 이유였다. 팀장은 주연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팀장과의 관계는 월급 다음으로 그녀가 매일 여덟 시간 이상을 쏟아붓는 직장 생활에 대한 근사한 보상이었다.
   주연과 가까운 쪽에 앉은 남자는 주연에게 이것저것을 물으며 말을 걸었다. 주연은 남자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주연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남자는 대답을 기다리겠다는 듯이 주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자신의 잔에 양주를 가득 따랐다. 양주병을 들어 잔을 채우는 폼이나 편안하게 기대앉은 자세는 당당하면서도 자연스러워서 마치 그녀가 접대부이고 남자가 손님인 것 같아 보였다. 남자는 이 상황을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주연은 괜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주연은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백을 옆에 내려놓고 소파에 등을 기대면서 목덜미를 주물렀다. 아까부터 목이 말랐던 주연은 물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남자가 재빠르게 물병을 집어 유리잔에 물을 따라주었다. 남자가 따라준 물을 마시자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참, 신혼집이 어디라고 했지?
   팀장이 주연에게 물었다. 주연은 S구라고 대답했다.
   S구요? 거기가 서울에서 집값이 제일 싼 동네죠?
   갑자기 주연의 얼굴이 붉어졌다. 남자의 얼굴은 다른 의미에서 발갛게 달아올랐다. 남자는 자신이 사는 집이 평당 얼마짜리 집인 줄 아느냐며 갑자기 자신의 재산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주연이 이런 곳에 올 만한 수준이 안된다는 걸 이미 파악하고 그런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주연이 자신의 속내를 알아차리며 불쾌해하는 상황까지 즐기고 있는 듯했다.
   주연은 팀장에게 이제 그만 가봐야겠다고 말했다. 더는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팀장은 가방을 뒤적여 주연에게 은색 USB를 건넸다. 주연은 팀장에게 인사를 하고 룸을 나섰다. 복도에는 수많은 문이 있었다.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 남자들이 노래를 부르는 소리,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인 소란스러움이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프로젝트 미팅이 있던 주말에 그곳에서 만취한 팀장은 주연에게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했다. 팀장은 어떤 대학생 남자와 함께 있었다. 주연은 대학생과 함께 만취한 팀장을 택시에 태워 보냈다. 주연이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팀장은 혼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대학생은 그저 평범한 대학생처럼 보였다. 주연은 그곳에서 만났던 거만한 남자에 대한 기억 때문에 대학생을 경계했다. 대학생은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주연이 택시를 잡을 때까지 말없이 옆에서 기다렸다. 택시가 오자 대학생은 주연이 편하게 탈 수 있도록 차 문을 열어주었고, 택시 기사에게 잘 부탁한다고 넉살 좋게 인사까지 했다.
   애인이 참 잘생겼네. 자상하기까지 해서 좋겠어.
   택시 기사가 말했다. 주연은 애인이 아니에요, 라는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그 후에도 팀장 때문에 주연은 그곳에서 대학생을 두 번 더 마주쳤다. 그때마다 대학생은 주연이 택시를 잡을 때까지 말없이 주연의 옆을 지켰다. 주연은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택시가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다.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바빠지자 팀장이 그곳으로 주연을 부르는 일은 없었는데, 주연은 아주 우연히 대학생을 다시 보게 되었다.
   프로젝트가 마무리된 주말에 가구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을 때였다. 주연은 버스 뒷좌석에 앉아있던 대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어 주연은 다시 대학생을 쳐다봤다. 대학생도 주연을 보고 있었지만 무척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제야 주연은 대학생을 기억해냈다. 일을 하러 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대학생도 많은 돈을 벌었을까. 팀장에게는 대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지만 진짜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 맞을까. 그런 생각을 잠시 하다가 주연은 낮에 본 테이블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날 주연과 강훈은 신혼집에 필요한 가구를 보러 갔었다. 나무 썩는 냄새가 지독하게 나는 가구점이었다. 결혼을 앞둔 부부가 신혼의 꿈에 부풀어 살림을 장만할 공간은 아니었는데 다른 곳에 비해 가격이 많이 쌌다. 강훈은 피곤해하며 주연이 장롱 문을 열어보고, 식탁 의자에 앉아보고, 침대 매트리스를 손으로 눌러보는 동안 주연의 뒤만 따라다니며 말없이 하품만 했다.
   그러던 중에 주연은 특이하게 생긴 원목 테이블을 하나 발견했다. 가로가 세로에 비해 긴 기역자 모양의 심플한 테이블이었는데, 크고 아름다웠다. 원목 특유의 불규칙한 무늬도 무척 특별해보였다. 주연은 그 테이블이 갖고 싶었다. 하지만 강훈은 좁은 집에 이런 걸 놓아야겠냐며 주연에게 면박을 주었다. 너무 튄다는 말도 덧붙였다. 강훈을 설득해볼 수도 있었지만 주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평범한 테이블을 골랐고 침대, 장롱, 서랍장, 화장대 모두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것들로 골랐다.
   평범한 가구라는 게 과연 따로 있나 싶겠지만, 그들이 고른 가구를 보면 그것참 평범하네,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평범한 것들이었다. 가구점 주인은 자신도 심플한 스타일을 좋아한다며 입에 발린 소리를 했지만 심플함과 평범함은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가구가 주연에게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주연은 자꾸만 그날 보았던 기역자 모양의 테이블이 떠올랐고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물건에 특별한 욕심이 없는 편이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그 테이블을 갖고 싶은 마음에 시달렸다. 주연은 얕은 한숨을 쉬며 뒷좌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내렸는지, 대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강훈은 주연이 뭘 원하는지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론 강훈은 주연에게 좋은 것을 사주고, 일상 속에서 주연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챙겨주고 보살펴주려고 노력했다. 그게 강훈이 주연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건 강훈에게만 기쁨을 줄 수 있었다. 주연에게도 그건 고맙고 기쁜 일이었지만 때로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한 기분이 들곤 했다.

   신혼집에 가구가 들어왔던 날 강훈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주연은 혼자서 자잘한 때가 묻은 장판과 창틀을 걸레로 깨끗이 닦아냈다. 오래된 빌라였지만 벽지와 장판을 새로 하고 청소까지 마치니 쾌적하게 느껴졌다. 싱크대와 주방 찬장, 욕실 타일과 변기, 세면대까지 새로 공사를 했기 때문에 얼핏 새집처럼 보이기도 했다. 강훈의 어머니가 집주인이었으므로 아들 내외는 언제까지고 그 집에서 살 수 있었다. 전세금으로 다른 집을 얻는 것도 가능했지만, 강훈의 어머니는 남의 집에서 셋방살이를 시킬 바에 리모델링을 해주겠다고 먼저 제안했다.
   평범한 가구들이었지만 들여놓고 보니 이만한 집에 적당한 가구처럼 느껴졌다. 주연은 만족스러웠다. 가구의 먼지를 닦아내는 동안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견딜 만했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먼지가 허옇게 묻은 걸레들을 한데 모아 빨고 있을 때 강훈에게 전화가 왔다. 전날 친구들과 과음을 한 탓에 일어나지 못했고, 몸이 괜찮아진 것 같으니 집을 보러 오겠다고 했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 많이 싸운다는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강훈과 주연은 한 번도 다툰 적이 없었다. 주연은 갑자기 그 사실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새삼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고, 구색을 갖춘 신혼집 안에 있어 보니 강훈과 함께 가정을 꾸려나간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주연은 결혼에 대해 특별한 환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주연에게는 빚 없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이 프러포즈나 달콤한 허니문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이 낭만적인 것이었다.
   주연은 십 년가량 빚에 시달려왔고, 지난달이 되어서야 겨우 빚에서 벗어났다. 학자금 대출과 주연의 어머니가 진 빚의 일부를 갚아나가던 시간은 이제 과거의 일이었다. 강훈과의 결혼은 빚뿐만 아니라 주연이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벗어나는 일이기도 했다. 중학교만 겨우 졸업해 어린 나이부터 갖은 고생을 해온 주연의 어머니에게 학자금 대출을 받아 대학을 다닐 수 있는 요즘의 세상은 좋은 세상이었다. 남편 없이 홀로 딸을 키워냈다는 사실만이, 주연의 어머니가 오십 평생 이뤄낸 유일한 성취였다. 하지만 주연으로서는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길러졌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새로운 출발선에 선 사람들이 느끼는 상쾌한 기대감이 난생처음으로 주연을 부드럽게 감쌌다. 새 가구와 새 보금자리는 이제까지의 고생을 보상해주겠다는 듯 윤기를 내며 반짝였다.
   강훈은 신혼집에 들어오자마자 주연을 껴안고 사과했다. 강훈은 자신이 무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킬 필요가 있을 때에만 주연에게 알랑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럼에도 강훈의 이런 면은 주연의 기분을 누그러뜨리는 데 효과가 있었다. 주연은 가구를 가리키며 어때? 우리 집이랑 잘 어울리지? 라고 물었다. 강훈은 잘 어울린다고 말하면서도 가구는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다.
   침대는 어디에 있지?
   강훈이 물었다. 주연이 안방에, 라고 대답하자 강훈은 주연을 앞세워 안방으로 갔다. 아직 비닐 시트도 벗겨내지 않은 매트리스가 방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창문은 닫혀있었지만 한참 열어놓았던 탓에 한기가 느껴졌다. 강훈은 차가운 매트리스 위에 주연을 억지로 눕히고 황급히 바지를 벗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해? 청소할 게 아직 많아, 라고 주연이 말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강훈은 막무가내로 주연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주연은 싫다고 말하며 강훈을 밀쳤다. 먼지가 잔뜩 묻었을 비닐 시트가 싫었다. 그러나 강훈은 주연을 놓아주지 않았다. 강훈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고, 주연이 반항할수록 그는 더욱 거세게 주연을 붙잡았다. 강훈은 주연보다 힘이 셌다. 어떤 힘으로도 주연은 강훈을 거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잠이 든 강훈의 곁에서 주연은 한기를 느끼며 옷을 주워 입었다. 옷가지는 장판 위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었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바닥을 내려다보던 주연은 갑자기 장판 색이 칙칙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는 너무 싸구려 같았고 새로 도배를 한 천장에는 누런 얼룩이 군데군데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벽지를 벗겨내면 시꺼먼 곰팡이가 가득할 것만 같았다. 장판과 벽지, 가구가 모두 새것이었지만 그래도 볼품없이 평범한 집이었고 어디선가 시큼한 군내까지 났다. 주연은 세수를 하고 집을 나섰다. 택시를 탔지만 갈 곳이 없었다.

   팀장은 갈 곳이 없는 주연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그런데 팀장의 집에는 대학생이 함께 있었다. 주연은 괜히 온 것 같다고 말하며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팀장은 주연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우리 그냥 커피 마시면서 이야기하던 중이야. 내가 설마 얘랑 연애라도 한다고 오해한 거야?
   팀장이 웃으며 말했다. 대학생은 주연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었다. 주연과 팀장, 대학생은 식탁에 둘러앉아 한동안 말없이 커피만 마셨다.
   그래서? 하던 얘기 계속해봐.
   팀장이 대학생에게 말했다.
   학자금 대출을 갚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그 일을 시작했다는 대학생은 이번에 마지막 학기를 등록할 거라고 했다. 조금만 더 하면 대출금을 거의 갚을 수 있다고, 그러고 나면 취직을 할 생각이라고 했다. 대학생은 경제학을 전공했고 학점 관리는 기본이고 영어 성적도 좋았으며, 취직에 유리한 자격증들도 따 놓은 상태라고 했다. 취직을 하면 열심히 돈을 모아서 좋은 여자와 결혼하는 게 꿈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결혼이 꿈이라고?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팀장이 물었다.
   취직해도 거기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돈을 벌겠죠. 이런 일을 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여자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말 그대로 꿈인 거예요. 이룰 수 없는 아주 평범한 꿈이죠.
   주연은 신혼집의 주방을 차지하고 있는 더없이 평범한 테이블을 떠올렸다. 갑자기 대학생에게 그 테이블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주연에게도 대학 시절은 아르바이트로 시작해 아르바이트로 끝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대학을 가지 않고 바로 일을 했다면 주연은 꽤 많은 돈을 모았을 것이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남들이 다 가는 대학을 포기하고 변변치 않은 일자리를 얻는 것이 싫었던 주연은 학자금 대출을 받아가며 힘겹게 졸업을 했다.
   카페에서 음료를 만들건, 프랜차이즈 음식점에서 서빙을 하건, 교내에서 행정 보조 아르바이트를 하건 두꺼운 전공 서적을 한 권 사기 위해서는 여섯 시간의 노동이 필요했다. 쉴 새 없이 일을 하고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다 보면 금방 한 학기가 흘러갔고,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학점을 받았다. 주연은 학기가 끝나면 전공 서적을 팔아 교통비를 마련하는 자신이 대견했고, 어머니 또한 언젠가 그런 자신을 대견해 할 것이라고 믿었다. 언젠가는, 단 한 번이라도.
   주연은 어머니의 빚을 갚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어머니로부터 도망치는 일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주연은 필사적으로 어머니의 가장된 애정을 두 손에 움켜쥐고 버텼다. 가끔은 그렇게까지 어머니를 포기하지 않는 자신이 미련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동시에 주연은 자신이 어머니에게 필요했다고, 어머니가 혼자였다면 어떤 불행이 닥쳤을지 모른다고 믿었다. 그렇게 믿으면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
   주연은 너무 배가 고파서 상한 음식인 걸 알면서도 입에 욱여넣고 마는 사람처럼 살아왔다. 다른 음식을 기다릴 끈기나, 굶어 죽더라도 그런 건 먹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 같은 건 애초에 주연의 삶에 허용된 덕목이 아니었다.
   보통 테이블의 다리는 네 개잖아요.
   대학생이 식탁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두 개나 세 개, 심지어 다리가 한 개인 테이블도 테이블이긴 하지만, 그래도 다리가 네 개인 테이블이 평범한 거니까. 나도 그런 평범한 테이블이 되고 싶은데, 이상하게 그게 보통 일이 아닌 거예요. 특별한 디자인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재질이나 재료가 고급스러울 필요도 없는데. 그냥 싸구려 나무판에 다리가 네 개 달린 테이블, 그거면 되는데.
   주연은 대학생에게 평범하기 짝이 없는 가구와 다리가 네 개 달린 투박한 테이블을 보여주고 싶었다. 강훈은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신혼집은 비어있을 거였다. 한기가 도는 신혼집에 앉아 대학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고작 이런 테이블을 마련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냐고, 대학생에게 묻고 싶었다. 무엇보다 대학생에게 그 테이블을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

   결혼식이 있던 날은 주연에게 흐릿한 꿈처럼 기억되고 있다. 그날의 끝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새벽부터 메이크업을 하고, 드레스를 입고, 엄청나게 많은 손님을 맞이하고, 사진을 찍었다. 누가 왔다 갔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신부 대기실에서 팀장은 주연과 나란히 앉아 사진을 찍고, 주연에게 두툼한 봉투를 건넸다.
   행복한 거, 맞지?
   팀장이 물었다. 주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들과 강훈의 친척들 몇을 더 맞이하고 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주연은 예식장의 입구에 서 있었다. 애초에 주연은 신부 입장 때 혼자 입장을 할 생각이었다. 보통은 신부의 아버지와 함께 입장하지만, 주연에게는 아버지가 없으니 혼자 입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주연은 지금까지 혼자의 힘으로 삶을 꾸려왔다. 그런 자신이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되는 첫걸음인 만큼, 주연은 혼자 당당하게 식장을 걷고 싶었다.
   예식을 5분 남겨둔 시점에 강훈의 어머니는 주연이 혼자 신부 입장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길길이 날뛰었다. 강훈의 어머니에게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자신의 며느리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그 사실을 남에게 알리기도 싫었던 것이다. 강훈의 어머니는 친척 어른 중 아무라도 좋으니, 아버지로 보일 법한 남자와 주연이 함께 입장을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주연은 몇 번이나 싫다고 했지만 강훈의 어머니는 막무가내였다. 가만히 있던 강훈도 한 번뿐인 결혼인데 이런 것쯤은 어머니를 위해 양보하자고 주연을 설득했다. 강훈이 주연을 붙들고 사정하는 사이에, 강훈의 어머니는 신부 측에 앉아 있던 주연의 이모부를 데리고 와 그녀의 옆에 세웠다.
   주연이 거절을 할 새도 없이 조명이 켜지고 예식이 시작되었다. 별 수 없이 주연은 이모부와 함께 입장했다. 길의 끝에는 다소 상기된 표정의 신랑이 환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긴장한 이모부는 손을 조금 떨면서도 주연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이모부는 신랑의 손에 주연의 손을 건넸다. 신랑의 손은 뜨겁고 축축했다. 주연의 손을 잡은 신랑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주연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주연은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피부가 조금씩 딱딱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화려한 조명과 장식, 많은 사람의 시선과 환호가 무감각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깊은 물속에 잠긴 것 같았다. 신랑의 손 위에 얹어진 자신의 손이 남의 손처럼 여겨졌다. 그 손이 자신의 손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주연은 양손을 들어 움직여보아야 했다. 부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당황한 신랑이 주연의 손을 붙잡았다. 주연은 다시 신랑의 손으로부터 자신의 손을 빼냈다. 하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예식장 도우미가 부케를 대신 줍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주연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끊임없이 양손을 움직이고만 있었다.
   왜 그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신랑이 주연을 보며 물었다. 목덜미가 뻐근했고 온몸에서 한기가 도는 것 같았다. 주연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예식장 도우미가 주연에게 부케를 건넸다.
   신부님, 괜찮으세요?
   하객들의 웅성거림이 커지고 있었다. 주연은 부케를 받지 않았다. 부케를 받아 얌전히 예식을 치르고 신랑과 함께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식장을 빠져나가는 일이, 주연에게는 어떤 혹독한 대가처럼 느껴졌다.

한다진

외로웠고 외롭고 외로울 테지만.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기억해야 할 일들이 늘어나는 것. 흐릿한 기억들을 붙잡느라, 외로워하는 일에는 더 많이 게을러지기를.

2018/04/24
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