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위험한 녹았다 언 아이스크림



   사람 구하는 집이란 죄다 쑤시고 다니는 바람에 개중에 그나마 덜 미련한 집으로 알뜰히 살뜰히 살 수 있는 집을 간신히 찾았으나 쥐구멍만한 땅덩어리에 요만한 세가 가당키나 한가 싶어 도리질을 하다가 애초에 수지맞는 장사는 아니겠거니, 서울에서 이만하면 낫다, 속는 장사는 아니다, 요로 보나 저로 보나 적당히 살아온 나로서는 가랑비에 날벼락 맞은 쥐새끼처럼 덫을 피해 이모저모 하다가 반드시 덫에 걸리고야 마는 허점이 많았으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난은 허점을 그냥 보낼 리 만무했다 그러니 중년은 고향을 떠나 서쪽으로 달리는 백마와 같다나, 가는 곳곳마다 어두컴컴하니 고독을 면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참에 나는 아주 생각을 고쳐먹어 집을 떠날 속셈이었는데 마침 예술가이니 뭐니 하는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 사는 집에 내가 어떻게 발을 들일 수 있었던 것인지 희한할 따름이었다 그 속내를 들춰보고 싶던 갈망은 어느새 집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집에 가끔 들리는 건반 소리며 낡은 소리가 귀에 익어가기 시작할 때쯤 나는 불현듯 이 구석진 생활이 달게 느껴져 수치스럽고 아이스크림만큼 작고 견고한 생활의 권태로움이 한순간 소거될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이 과분한 것이 아닌가 한겨울에도 구들목에 배를 깔고 누우면 읍소랄 게 없었는데 이 집에 들어온 뒤로 어중이떠중이 흉내를 내려고 다분히 본인과의 간격을 유지하느라 집도 더이상 나를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쉬이 거짓으로 둘러댈 수 있는 변명거리를 모색한다는 게 하필이면 왜 글이 된 것인지 이상하리만치 그 거짓말이 나쁘지 않았다 의외로 글과 죽이 잘 맞았고 어중이떠중이들은 엉뚱한 소리를 좋아라 했으니 단순한 것이 어려워지고 어려운 것이 단순해져 가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혼자 보기 아까워 고이 적어두었던 거창한 나의 말년 운을 보시라

   -생일에 천예성이 들었으니 기술, 예술로 이름을 날린다.
   -성정이 교묘하니 재주가 출중하다.
   -한차례 강풍이 지나고 이제야 재물이 창고에 가득하다.
   -예술이나 기예의 극치를 이루어 후예들의 사표가 된다.
   -중년을 딛고 반드시 대성하니 큰 인물이며 문무에 정진하여 부귀를 누린다.
   -옛날을 회고할수록 인품을 더욱 깊게 하니 덕망이 충분하다.
   -말년 운은 한번 관심을 쏟았다 하면 타인의 상상을 불허하는 오묘한 이치를 취하니 사물에 생명력을 주고 우주와의 조화를 형성해내는 빼어난 예지가 있다.
   -어떤 일에든 집중력이 강하고 올바로 취하니 예술이 극에 이르지 않을 수 없고 문무가 정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물과의 깊은 조화를 생의 동행으로 삼으니 항상 넉넉하고 조화롭기 그지없는 말년 운이다.1)

   앞날을 꾸며대는 것이 이렇게도 쉬운 일인가
   허풍 따위에 생활이 녹아내린단 말인가
   나는 그저 다디단 거짓말이 좋았는지 몰라!
   아무렴 다 녹은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가장 위험한 죽음



나는 뜻하지 않게 전혀 다른 것을 만났다.

자크 랑시에르, 『해방된 관객』



   이제는 정말 가야겠어
   소파에 기대어 있는 그는 자칫 과거에 묻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보는 사람을 빠져들게 했다
   그에게 과거란 종교 같은 것이었고
   과거에 관해서라면 그는 어쩔 수 없었다

   권태로운 그에겐 기다리는 것만이 가장 구체적인 상태였기에
   그는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 곳에서 다음 신호를 기다릴 수 있었다

   한때 서두르다가 항상 무릎이 깨졌으나
   죽음 앞에서 넘어지는 것은 공상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죽는 것은 누구의 사랑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무릎을 지킬 줄 몰랐다
   자주 꿇었고 잘못을 과시했다

   이게 맞나? 아닌가?
   그의 잘못은 갈등에 가까워지고 있다

   ‘죄가 사라지려면 거의 모든 충동은 거짓이 되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성당에 찾아간 날에 나는 심하게 아팠습니다. 그곳을 빠져나오자 거짓말처럼 병세가 더 악화되었죠. …… 그렇게 보이기 위해 지금도 나는 노력합니다. 간격이 좁고 경사가 심한 계단은 신성한 장소가 그러하듯 안내문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습니다. 걸음이 느린 사람 뒤에서 나는 천천히 고립되어 갔죠.”

   믿을 수 없었으나
   그는 정말 혼자였다
                  사랑
   그것을 진술이라고 적었다


   사람들이 다 떠나고
   불이 켜졌을 때

   과거를 그대로 옮겨다놓은
   계단 위에서
   걸음이 느린 사람이 그를 보고 있다

이서하

서른아홉을 만들기 위해 서른다섯 살 반을 사는 사람. 허풍 따위에 웃음소리가 커서 죄송합니다. 시집 『진짜 같은 마음』이 있다.

2021/02/23
39호

1
미옥이의 오랜 정신적 지주의 권유로 보게 된 말년 운 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