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랭프세스트1)



   꿈에서 너는 돌아온 사람이다. 꿈에서의 너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꿈에서 나는 순록을 키우는 사람이다. 사무치는 그리움을 느낀다. 꿈에서 나는 이별을 모른다. 다시 만날 것처럼 집을 나선다. 꿈에서 너는 나를 기차역에 데려다 놓는다. 바다가 파도를 항상 해변으로 데려다 놓는 것처럼. 나는 순록과 트렁크를 끌고 간다. 꿈에서 너는 돌아왔다고 말했다. 꿈에서 나는 돌아오지 않는다. 사무치는 그리움을 느낀다.


  •  꿈




   꿈에서는 네가 나를 매혹하기를 그친다. 꿈에서 너는 문장을 썼다가 삭제하고 문장을 썼다가 삭제한다. 나는 네가 삭제한 문장들을 적어두고 매일 기도문처럼 읽는다. 꿈에서 너는 울음을 터트리고 불쑥불쑥 나타난다. 꿈에서 나는 순록을 두고 기차를 탄다. 꿈에서 나는 돌아왔냐고 묻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꿈에서의 나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꿈에서 너는 기차를 타고 돌아온 사람이다. 꿈에서 너는 너보다 작은 내 트렁크에 자신을 구겨넣는다. 꿈에서 나는 트렁크를 놓친다. 꿈에서 순록은 기차를 탄다. 순록은 돌아올 줄 모른다. 꿈에서 나는 돌아오려 애쓴다. 꿈에서 기차는 멈추지 않는다. 꿈에서 나는 파멸을 토한다. 꿈에서 순록은 나를 찾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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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냥이 있었잖아



   나는 연회장으로 바삐 가고 있다 내 정장 바지 주머니에는 성냥갑이 가득 들어 있다 불룩한 주머니는 패션을 망친다 나는 패션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인가 보다 연회장에 가는 사람이 패션에 신경을 쓰지 않다니 내가 만약 연회를 망쳐버리기 위해 준비된 인물이라면

   잠시 멈춰 쇼윈도에 비친 나를 본다 가게 안이 어두울수록 내가 잘 보인다 오래 보고 있으면 멍해진다 유리창에 비친 얼굴과 사랑에 빠져버린다면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겠지 기억을 위해 나는 몸에 성냥을 지니고 있는 걸까 맞은편에서 내가 말을 건다

   우린 불이 붙어서는 안 되오 성냥을 긋는 사이가 되어서는 안 된단 말이오

   나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높다란 빌딩 사이를 지난다 소년들이 폭죽을 들고 있다 거기요, 불 있어요?

   전 주머니 가득 성냥을 넣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나를 벽에 밀치고 주머니에서 성냥 한 갑을 꺼낸다 타닥타닥, 불꽃이 튄다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나를 향해 폭죽을 던지는 소년들에게서 도망친다 나는 본능적으로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불이 붙으면 겉잡을 수 없이 타오르도록 만들어졌군

   테이블마다 촛불이 놓여진 이 연회장에 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내 자리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는다 세 명의 여자가 바구니를 들고 걸어온다 내가 앉은 테이블 접시 위에 다양한 빵을 진열하며

   우리는 제빵사에요 이 일은 참으로 말랑말랑한 일이죠 보드라운 것을 주무르다 부풀리는 일 이스트를 넣은 반죽이 부푸는 것만 봐도 우리는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답니다 그런데 아까부터 당신의 주머니는 부풀어 있네요

   저는 터지기를 기다리는 폭탄인 것 같습니다

   그녀들이 웃음을 터트리자 촛불이 꺼진다 나는 성냥 하나를 꺼내 긋는다 이스트를 넣은 빵처럼 부푼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이런 식으로 성냥을 써도 되는 걸까 이런 식으로… 이런 식으로?

   거기요, 불 좀 붙여줘요 폭죽을 든 소년들이 달려들어온다 나는 성냥을 긋고 주머니에 불을 붙인다 불불은 성냥에서 성냥으로 나는 커다란 성냥이 된다 하얗고 노란 폭죽이 사방으로 터진다 테이블보에 불이 옮겨붙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친다

   그녀들이 구운 빵이 새까만 돌덩이처럼 떨어져 있다 나는 그 옆에 무너진 구조물 덩어리처럼 누워있다 반짝이는 재가 흩날린다 내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된다

강진영

그녀가 그녀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듯 쓴다. 시를 쓸 때면 시를 믿는다.

2020/12/29
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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씌어 있던 글자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글자를 쓴 양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