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가슴이 조금 당기네요 요새 운동을 해서 그런가봐요 그래요 뒤늦게 올 때가 있죠 뭐가 오냐면 몇 달 전에 여행 가서 녹음한 음악이 어제 갑자기 들리는 거예요 길을 건너다 말이죠 북과 피리 소리가 정말 웅장했거든요 우리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그들은 오래전부터 그곳에서 연주를 해온 부부였어요 나는 그때 무척 슬펐어요 그때는 몰랐는데 나는 성벽 곳곳에 난 작은 창문으로 몸을 던지고 싶었죠 근데 나는 창을 보면 항상 더듬어봐요 이렇게 앉아 있는 나와 저 너머가 정말 이어져 있는지 그래요 며칠 전에는 그에게 오랜만에 소식을 들었어요 양치질을 하던 도중 전화를 받았죠 그이 말을 잘 듣지 않고 너무 힘주어 이를 닦느라 잇몸에서 피가 배어나고 있었죠 나는 몇 년 만에 그를 떠올렸어요 그림을 잘 그렸는데 참 밥을 먹다가 그니까 언젠가 이렇게 국을 한 숟갈 뜨다가 뭔가 잊어버렸다는 걸 깨달았지 뭐예요 꼭 이렇게 뒤늦게 가벼워질 때가 있어요 세면대에 끼인 머리카락 같은 것도 매일 같은 데에 끼어 있다가 또 며칠 뒤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래요 어느 날에는 금붕어 아가미에서 눈알만한 거품이 뿜어져 나오더라고요 어항에 이마를 찧고 돌아가는 금붕어를 몇 번이나 보다가 떠올랐어요 날갯죽지에 낚싯줄을 매달고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 그를 안아주면 날갯죽지가 아렸는지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어요 어째서인지 그 모습이 참 밉더라고요 나만큼 그림을 잘 그렸는지도 달랠수록 더 열심히 울었는지도 우는 사람이 사실 나였는지도 몰라서 날갯죽지를 문질러주는 장면이 하릴없이 떠오르더라고요 뭐가 미웠는지 얼마나 미웠는지도 모르고 그래요 놀이동산에서 커다란 헬륨 풍선을 들고 선 아이가 있었어요 아마도 뒤늦은 누군가에게 주려고 한 손에 두 개나 들고서 자꾸만 풍선을 당겨보더라고요 저 하늘이랑 아직 잘 이어져 있나 보려고





   24시간



*

   거대한 성벽 앞에 한 여자가 쭈그려 앉아 오줌을 눈다. 수풀이 그녀의 삼면을 가리고 있다. 그곳이 아늑해서 여자는 오래 오줌을 눈다. 벽돌 가운데 유달리 매끈하고 반짝이는 것이 있다. 귓불 같은 담쟁이를 움켜쥐고 속삭이는 소리가 있다.

   (여기는 소나기가 와요)

   (거기서도 빗소리가 들려요?)

   (목소리만으로 당신을 그리고 있어요
   눈매 팔뚝 무릎 그리고 발가락까지)

   (내가 보고 싶어요?)

   (그게 진심이라면 보고 싶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왜긴요 부끄럽잖아요
   대신 이렇게 그려줄게요)

   (담쟁이로 뒤덮인 벽
   호수 위 반짝이는 나비를 뒤따라
   소녀가 맴돌고 있죠)

   (이마 위에 검댕 위에
   흙먼지와 나뭇잎을 달고 나비를 불러봐요

   )(이름을 부른다.)(

   호수는 노을에 젖어 
   깊숙한 곳에서부터 타들어가네요)

   (검은 물안개를 걷어내는 
   날갯짓조차 더는 보이지 않고)

   (길 잃은 소녀가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있죠)

   (이제 비가 그쳤는데
   멀리서 천둥이 치네요) 

   문을 두드리듯 세 번.
   내리찍듯 한 번.

   (그려져요?
   독백 질문 반복 그리고 오줌)

   (고목이 그것들을 홑몸으로 맞고 쓰러지네요)

   (비 냄새는 어때요?
   더는 보고 싶다 말하지 않네요 당신)

   두드리는 소리 세 번.

   (괜찮아요
   거절이 우리를 순수하게 하니까)

   짐승이 멀리 우는 것 같다.

   (정말 오지 않을 거죠?
   진심이라면 부디 오지 마세요
   이곳에서 난 이미 오래 떨었답니다)

   돌풍 속에
   담쟁이들이 쇠사슬처럼 부대낀다.

   (당신을 그릴수록
   당신만을 닮아가는군요

   )(이름을 부른다.)(

*

   화장실 안에서는 노크 소리가 성문을 두드리는 듯하다. 왕관을 쓴 여자가 오줌 누는 여자를 지켜본다. 머지않아 무너져 내릴 성에 기거하는 왕비가 있다. 변기 위에 앉아 천둥처럼 울리는 자기 이름을 듣는 막내가 있다. 화폭 위에 한 쌍의 부끄러운 날개를 누인 나비가 있다.

이원석

되돌릴 수 없는 일,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차고 넘쳐나지만 그런 것들을 애써 떠올려 보는 것이 저의 오랜 습관입니다. 당신을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당신에게 더 좋은 시를 드렸더라면, 그것이 더 오래 기억되었더라면, 당신에게 나의 즐거움을, 나의 우울을, 나의 나약을, 나의 희망을 더 많이 보여드렸더라면, 그렇게 오랜 습관을 반복하던, 그 끝에 간신히 서로를 잊고 살던 우리가 기어이 계절처럼 다시 만난 거라면.

2018/09/25
1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