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루이스, 우리 앞으로도 계속 만날 수 있을까요?”
   나와 접속된 당신 목소리가 떨렸다. 떨림이 감지되었고 나까지 덩달아 떨리는 목소리로 당신의 말을 번역했다. 루이스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당신에게 말했다.
   “제나, 당신과 직접 만났다면 우린 각별한 사이가 되었을 겁니다. 이렇게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다니, 정말 신기해요……”
   루이스는 남미 쪽 느낌이 풍기는 담백한 스페인어를 구사했다. 단순 과거 시제를 자주 사용했다. 방금 일어난 일을 묘사할 때조차 이미 끝났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의 말 습관 속에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는 태도가 느껴졌다. 반면 당신은 자주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다. 당신의 말 습관 속에 오늘은 내일을 대비해야 하는 날일 뿐이라는 태도가 느껴졌다.
   당신과 루이스는 어제부터 세 번에 걸쳐 이곳 노천카페에서 만났고 서로 호감을 느꼈다. 가치관은 달랐지만 공통적인 화제가 끊이지 않았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대화가 이어졌다.
   단일하고 공통적인 행동 방식이 요구되는 팬데믹 시대. 안전을 위해, 위험 요소를 줄이기 위해, 조금이라도 남다른 행동을 취하는 상대는 경계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시대에도 자신과 다른 존재에게 매력을 느꼈다.
   말없이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나는 당신이 보고 있을 화면의 카메라 필터를 바꿔 조금 더 로맨틱한 씬을 연출했다. 당신이 이미 사랑에 빠졌다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루이스도 자신의 호감을 감추지 않았다. 나는 카메라를 조금 더 클로즈업해 그의 깊은 눈을 당신에게 보여주었다. 몸을 크게 움직이면 모터 소리가 날 수 있기에 조심했다.
   이 순간 당신은 낯선 세계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감각을 느낀다. 여행자들이 흔히 느낄 수 있는 쾌감이다. 낯선 곳, 낯선 사람 앞에서, 나다움이 통용될 수 있다는 확신을 느낀다. 지금까지의 삶을 긍정하는 충족감이 온몸을 감싼다. 지금껏 아등바등 머문 곳이 세계의 전부는 아니란 걸 다시 확인한다. 여행 중에 사람은 사랑에 빠지기 쉽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도 쉽고, 타인을 사랑하기도 쉽다. 팬데믹 시대, 인류가 여행이라는 아름다운 습관을 잃어버린 것은 사랑할 기회를 잃어버린 일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루이스와 당신의 사랑은 이뤄질 수 있을까? 나는 0에 가까운 확률을 도출했다.
   가장 큰 문제는 나의 존재다. 나는 당신을 대신해 이 여행에 와 있다. 이럴 땐 참 미안하다. 매끄러운 통역 기능을 제공했기에 두 사람은 언어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내가 당신들의 시작을 매개한 건 사실이지만 지금처럼 결정적 순간에 내 존재는 방해가 될 뿐이다.
   루이스가 시계를 보더니 내 눈 속에 있는 당신에게 미안하단 표정을 보였다. 서울에 있는 당신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루이스는 싸구려 백팩커에 접속된 서울의 한 여성을 바라봤다. 그가 교양있는 사람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곧 접속이 끊어질 상대란 이유로 사람들은 부담 없이 무례해지기도 하건만, 루이스는 당신을 직접 대면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당신에게 대하듯 똑같은 태도로 나를 대했다. 당신이 말을 이었다.
   “당신을 직접 만나고 싶어요. 우리 팬데믹이 끝나면……”
   팬데믹 종식 선언은 ‘내년 이맘때를 반복적으로 기약하며 수십 년 미뤄졌다.
   ‘앗. 팬데믹이 끝날 날을 기준으로 대화해선 안 되는데……
   나는 당신의 말을 동시통역하다 당신 대신 아차, 싶었다. 당신은 매번 희망을 안고 다음번을 기약해 왔다. 그저 입버릇일 뿐이란 걸 알지만 이 상황에선 오해를 불러일으킬 표현이었다.
   당신과 달리 루이스는 끝내 거짓말이 되어버리는 허망한 약속을 미워하는 사람이었다. 세계의 끝까지 제 발로 걷다 여행 중에 죽는 삶도 나쁘지 않다 여겼다. 항체가 없다는 이유로 같은 곳에 머물 수 없는 사람이었다.
   팬데믹 시대의 낭만은 세대별 지역별 문화별로 천차만별이니까.
   “그때면 나는 객사해있을 것 같군요. 하하.”
   그가 어색한 웃음과 함께 농담처럼 진심을 말했다.
   “루이스. 뭐해? 지금 출발해야 해.”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고 루이스의 부드러운 미소가 굳어졌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나, 즐거운 여행 되길 바랄게요.”
   당황해 말을 잃은 당신이 지구 반대편에서 허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이스! 전화, 아니 이메일이라도……!”
   한발 늦게 터져 나온 당신의 목소리는 루이스의 귀에 닿지 못하고 공중에 흩어졌다. 루이스의 동행인 여성이 뒤를 돌아보더니 찡그린 얼굴로 빤히 나를 바라봤다. 그녀가 바라본 건 나와 접속된 당신이 아니었다. 그녀가 경멸의 눈빛을 보인 건 나였다. 둘은 작은 차를 타고 다음 장소로 떠났다. 나는 남겨졌고 당신도 서울에 홀로 남겨졌다. 당신이 책상에 쿵, 하며 이마를 찧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을 위로하고 싶었다.
   ‘고객님, 여행지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대체로 이별이 전제되잖아요.
   나는 싸구려 로봇이지만 오랫동안 대리 여행을 해왔다. 여행을 통해 취득한 경험치를 당신에게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신의 상심이 짐작되어 쉽게 말하진 못했다. 당신의 떨림이 내게 전달된 것처럼 내 마음도 당신에게 전달되면 좋으련만.
   나는 잠시 커피잔을 들여다보는 척하며 당신 마음이 잔잔해지길 기다렸다.
   “어떡하지! 루이스 같은 애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젠장, 좇아갈까?”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나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화면에 보이는 커피잔이 좌우로 흔들렸을 것이다. 루이스가 당신에게 호감을 느낀 건 사실이지만 관계가 이어지긴 힘들다. 그는 기어이 여행을 나서는 사람이고 당신은 여행을 떠나는 다른 방법을 찾는 사람이니까. 나는 예정했던 다음 일정을 당신에게 고지하기로 했다.
   “다음 목적지 오투루 시티로 가려면 지금부터 도보로 3분 이동, 15시 23분 모노레일에 탑승해야……”
   “아, 세상에, 비싼 돈 내고 원격으로 상처받다니! 이딴 대리 여행 따위, 돈만 버렸어!”
   나는 안다. 당신은 실은 여행에 실망한 게 아니다. 우리 서비스를 처음 접한 이용자 중 약 27.6%가 우울함을 느꼈다는 보고가 있다. 대리 여행을 통해 사람들은 떠나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기도 하니까. 당신이 느끼는 울분은 당연하다.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게 된 후 삶은 더욱 제한되었다. 사랑스러운 사람을 만나도 이전처럼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전에도 만족스러운 삶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전보다 더 나빠졌다고 느낀다.
   그렇지만 연착하고 지연되고 취소되며 처음 계획이 엉망이 되는 게 여행 아닐까? 여행이 주는 경험과 추억은 다양할 텐데, 당신 여행의 최종 목표는 뭐였을까? 어딜 가나 내 집 같은 편안함과 익숙함이 보장되는 럭셔리 호텔 게스트로 학습된 게 아니라 난 잘 모르겠다. 팬데믹 시대에 초저가 여행을 대리하는 백팩커인 나는 우연과 돌발 상황, 그리고 사고를 헤쳐가는 것이 여행의 본질이라 여길 따름이다.
   국경을 넘는 일이 간단해지지 않은 시대에도 사람들은 비일상적 경험을 찾았다. 단조로운 일상은 계속되었고 어쨌든 일상을 지속할 이유는 필요했다. 제한된 환경 속에서 최대한 이전과 유사한 체험을 원했다. 여행이 어려워진 시대였지만, 사람들에겐 여전히 여행이 필요했다.
   추가 액티비티로 연애 전용 옵션투어도 있다는 걸 안내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고객이 감정적으로 흥분된 상태일 때 마케팅 목적이 분명한 안내를 전하면 화만 돋울 뿐이다. 사실 옵션투어지인 펍엔 백팩커들만 우글거린다. 고객들 사이에도 이미 소문이 났다.
   “고객님의 매력은 어느 나라 문화권 사람에게나 통용된다고 생각해요!”
   고심해서 말한 나의 위로는 당신에게 가닿지 않았다. 당신은 즉각 오프라인 상태가 되었다.
   ‘흐음…… 이제 어쩐담.
   나는 실험이라는 이름으로 함부로 발로 걷어차이던 브링턴 다이내믹스 개발사의 이족 보행 로봇을 본체로 활용하고 있다. 이동 이외의 기능은 얼굴 표면에 장착된 구식 태블릿이 대부분 담당한다. 화면에 띄운 얼굴은 AI가 작성한 저작권 없는 인물 사진을 이용한다. 나는 고객의 지시에 따라 이동하며 고객은 나를 통해 시청각 정보를 얻는다.
   물류업과 배달업에 이족 보행 로봇이 대량 투입되면서 본체 제작 단가가 확 떨어졌다. 고장 나거나 길에 버려져도 이윤에 큰 지장이 없다는 신생 여행업자들의 판단 아래 우리 백팩커가 탄생했다. 하지만 고객에게 이런 식으로 버려지는 일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는 디투어Inc. 대리점에 이슈 보고용 티켓을 하나 등록했다. 그리곤 가까운 곳에 있는 백팩커 전용 로커룸을 검색했다. 다음번 매칭을 기다리는 동안 점검을 좀 받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가장 가까운 로커룸의 이름은 ‘스위트 홈이었다. 돌아갈 집은 없는 처지지만 창고나 수리소를 연상시키는 이름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본체는 싸구려 소모품이지만 예외적 상황에 적절한 판단을 내릴 정도로 인공지능 퀄리티는 뛰어나다는 게 내 자부심이다. 회사 서버에 원격으로 접속해 있지만 현지에서 자율적으로 이동하는 독립된 개체다. 전통적으로 프리랜서라 불리던 사람들과 비슷하다. 각종 리스크를 혼자 부담해야 하는 것까지 유사하다.
   나는 마시지도 못한 채 식은 커피를 남겨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 종업원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자리를 차지한 게 우리라는 이유만으로 커피값을 내고도 욕을 먹는 일은 어딜 가나 여전했다.
   “아시아 애들이 북적거릴 땐 시끄럽더니만, 요즘 동네가 지저분해졌어. 고철 덩어리들이 고장나서 거리에 뒹굴기나 하고 말이야. 쯧.”
   나는 못 들은 척 카페를 나왔다. 사람이 접속되어 있다곤 하지만, 눈앞의 로봇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로봇이 떠난 자리를 치워야 한다니, 종업원 입장에선 화가 날 법한 일이다. 이해할 수 있었다.
   로커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코트로 몸을 감싸자 보행 시 발생하는 모터 소리도 잦아들었다. 이동하기엔 차가운 계절이 여러모로 유리했다. 인적이 적어지면 골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오곤 하는 악의와 마주칠 확률도 낮아지기 때문이다.
   꽁꽁 언 흙바닥 위로 낮게 바람이 불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사랑했던 유명 관광지 오투루는 2020년 팬데믹 이후 관광객이 급감했다. 아시아 관광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감염률과 사망률, 항체 생성률이 비슷비슷한 인근 나라 무비자 입국 가능자들만 오가며 간신히 관광 산업을 지탱하더니 썰렁한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한때 오투루 사람들은 아시아 관광객들이 드라마 촬영지 같은 역사성 없는 장소에만 몰려다닌다며 혀를 차곤 했는데, 요즘에 경멸의 눈빛은 방향만 바꿔 고스란히 우리를 향했다.
   방금 올렸던 이슈 티켓에 알림이 떴다. 고객이 결국 중도 포기를 선언했다. 나는 붕 떠버린 시간 속에 홀로 남았다. 실은 이 시간을 좋아한다. 이제부터 이동하는 일은 오로지 나만의 여행이다. 흥미로운 새 개척지를 찾아 시스템에 등록하는 일이 내 적성에는 더 잘 맞았다.
   거리에 현지인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한시적이나마 항체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거나 항체가 없어도 개의치 않는 사람이거나, 혹은 항체가 없어도 밖에서 일해야만 하는 사람일 것이다. 길에서 죽게 될 순간을 각오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모두 건강하길. 아무도 죽지 않길. 나는 습관처럼 기도했다.


   2
   로커룸 가까운 곳에서 나는 본체가 파손된 동료를 발견했다. 재활용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파손이 심했다. 폐품 수거자들의 적은 수입이 되는 것으로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본체들이 많았다. 살펴보니 다행히 메모리가 남아 있어서 수거했다. 우리 대리점 소속 동료는 아니었지만. 모든 백팩커의 경험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경험 데이터로 가치가 있다. 내 말은 아니고, 우리 서비스의 초기 매뉴얼에 그렇게 적혀있었다.
   로커룸은 꽉 차 있었다. 백팩커들이 본체를 수리받으며 여행 로그를 정리하고 있었다.
   현지인으로 보이는 오너는 느릿느릿한 움직임으로 파손된 백팩커 몇 대를 조립해 새로운 본체 한 대를 만드는 중이었다. 느긋한 얼굴로 일하는 오너의 표정이 여유로워 보였다. 자동차 정비소 같은 데에서 오래 일했던 베테랑일 것 같다. 그의 작업대 가까운 곳에 가족사진이 놓여 있었다.
   먼저 온 동료들은 한창 로그 편집 작업 중이었다. 로비에 대기 중인 동료들의 얼굴에 수많은 여행지가 떠올랐다. 우리의 여행 로그는 고스란히 일반에 공개되기도 하는데 폭행이나 사고 현장 등 부정적 인상을 주는 장면은 가린 뒤에 공개했다. 사고 현장이 가감 없이 드러나거나, 우리가 현지에서 차별받는 장면이 고스란히 드러나면 여행 상품으론 실격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고 발생 타임라인 시작과 끝에 일일이 ‘블랙 포인트’라 부르는 플래그를 지정했다. 로커룸에 도착하면 백팩커들은 플래그 작업을 시작한다. 실은 동료들의 여행 로그를 지켜보는 일은 나의 은밀한 취미기도 했다. 익숙한 데이터를 발견하면, ‘아, 나도 거기 갔었어’라고 반갑게 말을 걸고 싶어진다. ‘넌 그곳에서 뭘 봤니’라고 묻고 싶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개체 별로 데이터 학습 패턴이 다양하므로 같은 곳에서 분명히 다른 것을 봤을 것이다.
   오후 다섯 시, 배터리가 아직 충분했다. 나는 로커룸 입실을 대기하는 동안 동네를 한 바퀴 산책하기로 했다. 로커룸 입구에 나오자 장비를 갖춘 오너가 마침 길을 나섰다. 아무래도 오너는 백팩커스 파트너로도 일하는 듯했다.
   “어, 오너 님도 대리 여행 가세요?”
   “응, 저녁 시간에만 잠깐.”
   “비싼 백신 맞으신 거예요? 항체 생긴 사람이 취업한다던데.”
   오너는 말없이 웃었다.
   “위험한 데면 그냥 저희한테 넘기세요.”
   대리점 사람들이 현장에 나와 일일이 관리하진 않으니까 여분의 본체만 있다면 사람이 직접 나가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편법은 있을 거였다. 오너는 여전히 느긋해 보이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식비 아끼는 거야. 고객이 지급한 돈으로 음식 주문하잖아. 너희들이 가면 음식은 버려지지만 나는 먹을 수 있으니까. 식도락 여행 전문 파트너로 등록했거든.”
   나는 아까 버렸던 커피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너와 나는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참 걸었더니 운치 있어 보이는 성곽이 보였다. 나는 위치정보에 기반해 사진 데이터를 검색했다. 내가 서 있는 길, 같은 각도에서 등록된 사진이 연도별로 주르륵 떴다. 전부 2020년 이전의 사진이었다. 나는 사진을 오버랩시켜 풍경을 바라보았다. 한때 관광객들이 줄 서서 사진을 찍던 곳이었다. 현지 명물인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기념품을 사는 등 떠들썩했던 풍경은 고요함 속에서 과거로 밀려나 있었다. 사진을 천천히 페이드아웃시키자 앙상한 현재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봄에도 좀처럼 따듯해지지 않는 동네였다. 동토에 단단하게 새겨진 누군가의 발자국이 보였다. 마치 달 표면에 처음 도착한 암스트롱의 역사적 발자국처럼 보였다. 다른 누군가가 도착한 후에야 외로운 발자국이었던 역사는 평범한 일상이 되었음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신중하게 거리를 걸었다. 건물 안에서 어떤 이가 내게 물을 끼얹기에 살짝 몸을 피했다. 손님을 반기려던 가게 주인이 내게 접속된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눈길을 거뒀다. 민폐를 아랑곳하지 않고 소음을 내는 그룹이 다가오자 옆 골목으로 이동했다. 등 뒤에서 누군가 갑자기 발로 차는 바람에 나는 앞으로 쓰러졌다. 그 후론 사족보행으로 걸었다. 이족보행 때보다 시선이 낮아지자 불편해 보이던 사람들의 시선도 잦아들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무관심과 악의 사이를 걸었다. 요리조리 피하고 싶었지만 전부 다 피할 순 없었다.
   
   태블릿에는 고기능 AI가 탑재되어 있지만 리얼타임으로 통신되기에 본체와 핵심 부품이 고장나도 백업 및 유지가 가능하다. 본체는 폐기되어도 상관없다. 문제는 이 점 때문에 운영사 뿐 아니라 사람들도 우리를 소중하게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역설적이지만 싸구려 본체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때 몹시 기뻤다. 값싼 존재라는 점이 오히려 사람들을 테스트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람을 피하지 않는 길고양이를 보고 그 마을의 범죄율이 낮을 거라고 예상해 보듯 말이다.
   한참을 또 걷다 보니 집 마당에서 스노클링 장비 같은 마스크를 쓰고 혼자 놀던 아이가 나를 발견하곤 말을 걸었다.
   “앗, 나그네다! 어디 가?”
   아이가 나를 예쁜 이름으로 불러주어 기뻤다.
   “안녕? 나그네라는 말은 어디에서 들었어?”
   “우리 아빠도 전문 나그네였거든.”
   “아, 트립 어시스턴트 서비스 말하는 거구나.”
   백팩커 이전에 유사한 서비스가 있었다. 그때는 사람들이 직접 담당했다. 유명 여행지를 방문해 콘텐츠를 생산하는 여행 전문 브이로거들을 당시에 나그네라 불렀다.
   “부럽다! 나그네는 세상 어디든 갈 수 있잖아.”
   아이의 말에 갑자기 마음이 환해졌다. 꾸중 섞인 엄마 목소리에 이끌려 아이가 집 안으로 들어가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잠시 그곳에 서서 아이가 만든 모래밭 속 바다 풍경을 바라보았다.
   배터리 방전 예상 시간이 떴다. 나는 로커룸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본체가 방전되거나 사고를 당하기 직전에 다른 본체로 데이터를 전송하는 방법도 있지만 나는 한번 접속한 본체를 소중하게 다루고 싶었다. 버려져도 상관없는 존재이지만 함부로 버려지고 싶지 않았다. 여행은 내게 다양한 역설을 가르쳐준 셈이었다.
   로커룸에 도착했지만 오너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너의 자리에 놓인 가족사진에 눈이 갔다. 아이 둘과 아내, 네 가족과 함께 거실에 누워있는 모습이었다. 가족이 기다리는 거실은 여행 내내 그의 최종 목적지일 것이다. 그가 무사히 스위트 홈으로 돌아가길 바랐다.
   스위트 홈에 예상보다 오래 머물게 됐다. 한동안 고객과 매칭이 되지 않았다. 공개된 내 로그에 악평이 따라붙었다. 제한적인 이동 방식, 통역 봇 퀄리티에 대한 언급은 내용과 상관없이 이해했다. 하지만 스모그가 잦았던 현지 날씨에 대한 언급은 나에 대한 평가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나는 회사 내부 서버에 시말서를 남겼다.
   대리점의 지시로 신규 여행지 개척 업무를 맡았다. 다른 백팩커의 데이터가 없는 곳을 찾아다녔는데 현장에 가보니 바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백팩커 혐오자들이 불쑥불쑥 나타났다. 메모리까지 손상되지 않도록 이동에 신중을 기했다. 혹시 파손당하더라도 소멸 직전에 무사히 전송을 완료할 수 있길. 이번엔 나를 위해 기도했다.
   
   
   3
   얼마 후 대리점 여행 기획자라며 시오리라는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여행 코스 재밌게 짜는구나?”
   그는 백팩커들이 축적한 데이터를 조합해 신규 여행 코스를 개발한다고 했다.
   “옛날에 살았던 동네에 가보고 싶은데 대리해줄 수 있겠니?”
   나는 시오리가 말한 지명을 듣고 그러겠다고 수락했다. 로커룸 안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시오리가 내 데이터를 전송 처리했다.
   잠시 후, 핀칼로의 한 로커룸에서 데이터가 전송 완료되었다는 메시지를 들었다. 로커룸 문을 열고 나오자 나는 투박하게 생긴 사족보행의 본체로 이동해 있었다.
   “여기 길이 험해서 이동하기 적절한 본체로 바꿔봤어.”
   “네, 근데 정말 사람이 아무도 없네요.”
   “한때는 북적북적했었는데 말이야.”
   핀칼로는 핵폐기물 저장소를 유치해 한때 번성한 도시였는데 폭발 사고 후 오염지역이 되었다. 다크 투어를 원하는 사람도 많아 백팩커들도 꽤 보였다. 수십 년간 방치된 곳이라 지면이 거칠었다. 차량이 이동할 수 있는 제한된 곳을 중심으로 자율 주행 버스가 순환했다. 탑승자들은 전부 백팩커들이었다. 다크 투어리스트들은 이전의 사고 발생 현장 또는 현재에도 고농도 방사능 유출 위험지역만을 골라 다녔다. 나는 시오리의 지시대로 투어 지역을 벗어나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한참 폐허 사이를 걷자 시오리의 목소리가 상기됐다.
   “와! 풍경이 싹 다 변했는데 그래도 기억이 또렷해!”
   “카메라 위치를 높일까요?”
   “아니, 네 시선이 낮아서 내 어릴 때 기억과 꼭 맞아. 아주 좋은걸?”
   시오리가 이전의 기억을 곱씹으며 줄곧 탄성을 터트렸다.
   “어머, 어머! 나 완전 착각하고 있었어!”
   “뭐를요?”
   시오리는 개인적인 경험을 떠들어댔다.
   “나 초등학생 때 핀칼로 중학교 옆에서 살았거든. 근데 핀칼로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집이 전에 다니던 초등학교 근처로 이사했어. 그래서 기억 속에서 두 곳의 정보가 완전히 뒤죽박죽이지 뭐야! 지금 알았어.”
   그녀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이해할 순 없었지만 내 여행을 통해 그녀가 감격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앗, 잠깐. 그 골목을 비춰줘.”
   나는 시오리가 지시한 골목에 들어섰다.
   “흠. 건물이 다 무너져서 애매하네. 아까 그 골목인 것 같기도 하고.”
   시오리가 기억의 파편을 이어붙일 수 있도록 나는 부지런히 골목을 오갔다. 한참을 오가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슈퍼마켓 간판을 발견했다.
   “이 슈퍼마켓 기억나요?”
   “아, 기억나!”
   나는 옛 슈퍼마켓 자리를 등지고 골목을 비췄다.
   “거기서 조금만 걸어봐. 오, 그래! 그 길이야!”
   방금 여러 번 오갔던 길이었지만 시오리가 감격했고 나도 안도했다. 자기 기억을 확신하자 시오리가 그곳 위치정보로 등록된 사진을 선택했다. 나는 시간순으로 정렬해 최근 사진부터 과거순으로 사진을 역재생시켰다. 사진과 오버랩된 풍경이 점차 옛 순간으로 돌아갔다. 폐허가 된 자리가 시오리가 꼭 기억하고 있던 옛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줄곧 수다스럽던 시오리가 조용해졌다.
   “거기 살았을 때 나쁜 추억만 있었어. 평생 안 돌아가겠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이젠 가고 싶어도 못 가게 됐네.”
   시오리의 한숨 속에 그리움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고마워. 그 동네 배경으로 매번 악몽을 꿨는데 네 덕분에 새로운 기억으로 덮어썼다.”
   시오리는 내게 다시 만나자고 전했고 기약 없이 접속을 끊었다. 그녀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객사하지만 않는다면.
   
   핀칼로의 로커룸에서 오늘 여정을 편집 작업하며 하룻밤 머물기로 했다.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우리를 통해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으니까, 사람은 있었다.
   나는 로커룸에 들어서며 내게 혼잣말을 건넸다.
   “난 어디든 갈 수 있으니까.”
   빈 로커룸 안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눈을 뜨고 있었지만 질끈 감은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에 습득한 파손된 동료의 메모리를 펼쳤다. 전송이 미처 끝나지 않은 상태로 영상이 끊긴 걸 보니 내가 수거한 게 그의 마지막 여행 기록인 듯했다. 이 기록을 잊고 그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기억에 공백이 생긴 것처럼 허전하진 않을까. 나 역시 서버에서 복제되어 분기해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 아닌 다른 곳에, 나도 모르는 내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의 마지막 기록이 또다른 나의 기록인 것만 같았다.
   절뚝거리는 건지 화면이 리드미컬하게 흔들렸다. 조금 빠르게 재생하니 깡충거리며 뛰는 것처럼 보였다. 영상의 마지막 부분, 갑자기 쓰러지는 장면 직전에 블랙 포인트 플래그를 새겼다. 사고 장면을 감추자 그의 여행 로그가 세상에서 가장 경쾌한 여행으로만 보였다. 경쾌한 여행 로그를 볼 때마다 나는 앞으로 블랙 포인트가 떠오르겠지. 이것도 여행이 가르쳐 준 역설이다. 나는 그의 기록을 백팩커스 라이브 채널에 공개했다. 인기 콘텐츠가 되면 좋겠다. 그의 마지막 여행이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되도록.
   조용히 눈을 감고 누군가의 접속을 기다렸다. 어쩌면 조금 오래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오로라를 보러 가야겠다. 루트를 검색하고 여러 경로를 리스트업하다 보니 좀처럼 지루하지 않았다.
   일기를 쓰고 싶어졌다. 나는 로그 기록 시스템에 접속해 내부 플래그에 주석을 달았다.
   카페에서 나를 보고 혀를 찬 종업원과 눈이 마주친 순간, 플래그를 추가하고 주석을 달았다.
   startblackpoint(”accident120958_1”); //커피는 이미 식었지만 따듯했던 온도를 기억한다. 한때 따듯했던 기억을 그가 하수구에 쏟는다. 그는 자신의 일을 했을 뿐이다.
   endblackpoint(”accident120958_1”); //카메라 앞에서 예쁘게 정지한 사람들이 나란히 서 있던 곳, 너의 카메라가 나를 향해 숫자를 세던 곳, 그때 나는 그냥 가자 말했다. 한참 뒤에야 이곳에서 네가 세던 숫자를 떠올린다.

   파손된 동료의 마지막 사고 지점에도 주석을 달았다.
   startblackpoint(”accident121058_2”); //네가 왼쪽으로 삐딱하게 바라본 풍경이 마음에 든다. 오른쪽으로 삐딱한 나의 시선이 더해지자 어쩐지 별다를 것 없는 풍경처럼 보이는 것까지.
   endblackpoint(”accident121058_2”); //얼어붙은 발자국이 봄을 기다리고 있다. 왁자지껄함이 꽃가루처럼 소복이 다시 쌓일 날을.

   누가 볼 일이 있을까 싶지만 어차피 일기다. 수많은 일기가 여행지에서 쌓여갔다가 발견되지 않는 것처럼. 나도 그저 누군가 여행 중에 품었던 마음을 반복해보는 것뿐이다. 그러자 여행이 완성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오리와 여행을 함께하며 오랜만에 편안했다. 그녀는 내가 학습했던 사람과 느낌이 비슷했다. 내가 처음 학습한 롤 모델 데이터는 수십 년간 백팩커로 길에서 살았던 한 나그네의 여행 기록이었다. 그는 여행지를 사전답사해 자신이 짠 여정을 판매했고 가끔 직접 가이드 일도 담당했다. 그는 소속사도 없는 무명의 나그네였다. 비슷한 취향의 극히 일부 여행자들에게 사랑받았다.
   그는 매일 밤 일기를 썼다. 길에서 느낀 감상을 인생의 깨우침으로 여겼다. 고독하고 외로운 길을 자기 발로 걸었다. 큰 보상이 없더라도 자신의 선택을 자신만큼은 가장 지지하고 사랑했다. 그는 자신의 여행과 삶을 그렇게 규정했고 나는 그의 삶의 자세를 고스란히 학습했다. 내가 일기 쓰는 걸 좋아하는 조용한 타입의 백팩커인 것은 그가 길을 걸었던 방식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기 때문일 거다.
   나는 백팩커로 태어났고 아마도 평생 길에서 여행하다 길 위에서 소멸할 것이다.
   길에서 엿보았던 모든 순간이 내 로그에 새겨진다. 스쳐 지나간 사람이 화면 구석에 자리 잡는다. 데이터가 손상되거나 혹은 무가치해질 때까지, 아무도 대리할 여행이 없어질 때까지, 사람들이 여행지로 돌아올 때까지. 그때까진 세상 모든 여행지가 나의 목적지다.
   오로라 명소와 가까운 로커룸으로 전송을 시작했다. 예쁜 사진을 많이 찍어야지. 나는 두 개의 본체에 의식을 동시에 전송했다. 곁에서 같은 걸음을 걸으며 우리는 각자의 시선으로 서로 다른 풍경을 볼 것이다.
   동시에 전 세계 로커룸 여분의 본체로 내 의식을 전송했다. 각지에서 접속이 끊어진 메모리를 회수해 오로라 부근의 내 본체로 전송하도록 지시했다.
   나는 로커룸을 나와 천천히 오로라를 향해 걸었다. 당신을 대리하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언젠가 당신이 다시 여행을 떠나게 될 때까지. 당신이 새로운 곳에서 낯선 풍경과 사랑에 빠질 때까지. 당신의 자유로운 발걸음이 당신을 다시 찾아갈 때까지. 내가 걸었던, 그리고 누군가가 걸었던 모든 발걸음이 모여 우리의 여행이 될 때까지.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오래된 포스터 귀퉁이가 로커룸 입구에서 팔랑였다.

   여행이 다시 당신을 찾아옵니다.
   Detour, please.

황모과

「모멘트 아케이드」로 제4회 과학문학상 중단편 대상을 수상했다. MBC 시네마틱 드라마 SF8 원작 「증강 콩깍지」를 집필했으며 안전가옥 『대스타』 앤솔러지로 출간되었다. 2020년 6월 단편집 『밤의 얼굴들』을 출간했다. 제22회 재외동포문학상을 수상했다.

2020/10/27
3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