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동화를 읽어봤으면 알 것이다. 어두운 날씨가 장황하게 묘사되면 곧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는 걸. 물론 유년기의 배움은 허물처럼 잊히기 마련이지만, 털이 곤두서는 상황에선 누구나 아이 때로 되돌아가는 법이다. 태풍을 뚫고 여자친구의 집을 찾아갔는데 거기서 낯선 남자를 맞닥뜨렸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도 다분히 유아적이었다. 이게 정말 현실인가? 어깨에 둘러멘 더플백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나는 현관에 서서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눈을 똑바로 뜨기만 하면 그 남자가 사라질 거라는 듯이. 하지만 아이의 희망이 으레 그렇듯, 그때 나의 바람도 타인의 무신경한 행동 때문에 깨지고 말았다.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그는 심지어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고개 돌려 이쪽을 보고는 어어, 하고 알은체를 하는 거였다. 나는 그때부터 남자의 얼굴을 뜯어봤는데, 왼쪽 뺨의 흉터와 자주 눈 깜빡이는 습관 등의 리얼리티로 보건대 분명 허깨비는 아니었다.
   남자는 그렇게, 힐끗 쳐다보고 짤막한 음성을 낸 걸로 상황 설명은 충분하다는 듯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나의 시선도 그를 따라 창문으로 향했다. 우리는 잠깐 동안 같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창문이 열려 있기 때문이었다. 한순간이나마 저 남자가 아는 사람은 아닐까 고민했는데, 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태풍이 몰려오는데 담배 피우려고 창문 열 만한 친구는 둔 적 없었으니까. 나는 창가로 걸어가 짐을 내려놓았다. 팔을 뻗어 창문을 닫자, 등 뒤에서 남자가 담배를 비벼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맞은편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겉모습만 봐서는 도대체 뭘 하는 인간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알 수 있는 건 참을성이 많아 보인다는 것 정도. 습기 찬 여름이었는데도 남자는 트렌치코트를 걸쳤고, 중절모까지 쓴 걸 보니 시가는 왜 안 피우냐고 묻고 싶을 정도였다. 키가 작고 골격도 어린애 같아서 자기 옷차림에 어깨가 짓눌리는 듯했다.
   “원래는……”
   남자는 그렇게 운을 떼더니 모자를 벗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머리카락은 방금 탈영이라도 한 것처럼 짧게 깎여 있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에 거창한 모자였으니 그 속에 무슨 대단한 물건이라도 숨겨놨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얼굴의 흉터를 일그러뜨리며 미소 지었는데, 흉계 꾸미는 악당 같기도 했지만 어떻게 보면 그저 장난기 많은 소년 같기도 했다. 나는 현관에 서 있던 동안 머릿속에 맴돌던 고민들, 그러니까 화를 내야 할지 당장 신고해야 할지 따위의 고민이 점차 희미해지는 데 안도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남자는 잠시 뒤 미안합니다, 라고 한마디 덧붙였고, 나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결국 짧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예의가 몸에 배면 이런 상황에서도 평소처럼 작동하는 모양이었다.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도 당장은 묻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흑백 영화 주인공이 연상될 만큼 느긋한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본인 말에 따르면 남자는 내 여자친구의 대학 시절 친구였고, 예전에 이 집에 살던 세입자이기도 했다. 한 달 전, 영국 이민이 결정되어 이 월세방을 내 여자친구에게 소개해줬다고 했다. 문제는 그가 이것저것 수집하는 취미가 있던 터라 그 많은 짐을 단번에 챙길 수 없었고, 출국 준비가 얼추 마무리된 지금에서야 여유가 생겼다는 거였다. 갑자기 마주친 입장에서는 수상해 보일 수밖에 없겠지만, 자신은 내 여자친구와 잘 아는 사이이며, 오늘 여기 들어온 것도 물론 본인 허락을 받았다고 남자는 말을 맺었다. 그는 자기 옆의 커다란 종이 박스를 무슨 증거라도 되는 양 툭툭 두들겼다.
   “그럼 민지씨가 집 비밀번호를 알려줬다는 말입니까?”
   짐 가져가라고? 혼자 사는 여자가 자기 집 비밀번호를 알려준다고?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입술 끝에 맴도는 말들을 다 꺼낼 수는 없었다. 남자는 나를 다 이해한다는 듯 조용히 미소 지었다. 나는 소파에 기대앉아 남자를 노려보기로 했다. 그래야 이 상황에 걸맞은 경계심을 갖추게 될 것 같았다. 남자가 자꾸 실실 웃어대서 그런 걸까? 머릿속에선 이 남자를 경계해야 한다고 사이렌이 왱왱 울리는데, 분명 수상한 놈인데, 막상 마주 앉아 있으니 별 위기감이 들지 않았다. 사실 이상한 점은 한둘이 아니었다. 본인은 대학 시절 친구라지만 그 말도 믿을 수 없었다. 민지는 이 집을 누가 소개해줬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집에 널린 잡동사니에 대해서는, 전에 살던 세입자 물건 중 마음에 드는 걸 버리지 않았을 뿐이라고 했다. 사귄 지 2주밖에 안 돼서 아주 솔직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만, 어쨌든 수상한 상황임은 분명했다. 집 비밀번호는 나에게만 알려줬다고 자기 입으로 말한 적도 있지 않은가.
    남자는 내가 생각에 잠긴 꼴을 구경이라도 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불쑥 이렇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민지씨라고 부르나요? 당신 나이가 훨씬 많은 걸로 아는데.”
   “……”
   “비밀번호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어요. 아직 안 바꾸고 살았다더군요.”
   나는 남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뻔한 수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주위 여자에 대해 되도 않는 소유권을 주장하는 남자들이라면 어딜 가나 흔해 빠졌으니까. 하지만 남자의 표정에서는 어떤 뒤틀린 경쟁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민지의 SNS를 통해 나와의 연애 소식을 접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불쑥 웃음을 터뜨리더니, 사진을 여러 번 봤던 터라 처음 마주쳤을 때 위화감이 없었다고 했다. 나는 대답 없이 미소를 지었다. 트렌치코트가 자꾸 남자의 어깨에서 흘러내렸고, 남자는 그게 습관이 되었는지 어깨만 움찔거리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상황을 되짚어보았다. 자, 여자친구의 자취방에 왔다. 해외 출장을 갔으니 아무도 없어야 하는데, 웬 모르는 놈이 제집인 양 앉아 있다. 그리고 여자친구와 나의 관계에 대해 줄줄 읊어댄다. 그렇다면 이 인간이 여자친구의 지인이라기보단 스토커라고 의심하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은가?
   우리는 입을 다물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창밖에서는 빗발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고, 바람은 창문을 흔들며 내가 원래 하려던 일을 상기시켜주었다. 강풍에 유리창이 깨지지 않도록 대비해주려고 했었지. 닷새 전, 민지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만 해도 태풍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으니까. 그래서 저 커다란 창문을 무방비로 두고 떠났던 거고, 지나치게 낙천적인 여자친구를 챙겨줄 사람은 오직 나뿐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남자가 무슨 재밌는 생각이 났는지 또 혼자 쿡쿡 웃었다. 어쩌면 이 남자는 정말 민지의 대학 친구인지도 몰랐다. 2주밖에 안 된 남자친구보다 정서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일 수는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유치한 감정들이 몇 가지 파도를 일으켰다. 남자가 황당한 소리를 한 게 그 순간이었다. 그는 다리를 꼬더니 이야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 이 근처에서 버스를 탈 건데, 배차 간격이 좀 있으니 차가 올 때까지 말동무를 해달라고. 나는 실소를 터뜨렸지만, 창문이 흔들리는 통에 그 웃음소리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

   미리 말해두는데, 나는 거짓말이 꼭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오히려 거짓말을 계속해야 하는 사람들을 동정하는 편이다. 사회생활을 해보면 그게 얼마나 품이 드는 일인지 알게 되니까. 거짓말이란 마치 잘 알지도 못하는 어린애 손을 잡고 사탕 가게에 들어가는 일과 비슷하다. 까다로운 고객님이 뭘 좋아할지 알아내고자 머리를 쥐어짜야 하는 것이다. 고심 끝에 정답을 알아맞혔다면, 이제는 이 사탕을 언제쯤 쥐여 주는 게 좋을지 타이밍을 잡아야 한다. 어린애들은 자기 손에 쉽게 들어온 물건을 귀히 여길 줄 모르기 때문이다. 요컨대 거짓말이란 너무 싱겁지도 않고 너무 애타지도 않을 때 타인이 듣고 싶은 말을 들려주는, 알고 보면 대단한 서비스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교활한 사기꾼보다는 윗사람 비위 맞추느라 거짓말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
   물론 연애할 때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어떨 땐 평소보다 골머리를 두 배는 더 썩이기도 했다. 처음의 감정을 연장하고자 온갖 거짓말을 동원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테니스 동호회에서 민지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 담백한 성격 때문에 그녀에게 빠져들었는지도 몰랐다. 민지는 무언가를 꾸며내는 데 재주가 없는 사람 같았다. 민지의 집에 처음 들어왔던 게 우리가 연애를 시작하기 직전이었는데, 그때 나는 민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켜자마자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정신없는 집은 처음 봤으니까. 그 순간엔 정말 이 여자가 내가 다혈질은 아닌지 테스트하려고 일부러 어질러놓은 건가 싶었다. 내가 한 권도 읽어본 적 없는 오래된 책들이 타일처럼 바닥에 널려 있었고, 고향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한국산은 아닌 식물들이 책꽂이를 대신 장식해주었다. 침실 바닥에도―옷장이 버젓이 있는데―옷가지가 널려 있어서, 침대에 누우려면 옷을 파헤쳐 매트리스를 찾아야 할 판이었다.
   청소 좀 안 하는 사람이라 해서 문제 될 건 없었다. 당장 같이 살 것도 아니고, 우리는 성격 차이에 짜증 내기보다는 아직 흥미로워하는 단계니까. 문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있었다. 바로 집 곳곳이 남의 물건으로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민지가 말하기를, 이 집은 워낙 언덕에 위치한 데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사계절보다는 이 계절의 시간이 흐르는 곳이어서 오래 살 만한 집에 못 되었다. 전에 살던 이들이 다 월세살이로 짧게 머물다 떠나서 집 곳곳의 집기가 대물림됐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내가 저녁에 파스타 만들어주며 썼던 프라이팬과 접시와 그릇도 언젠가 얼굴 모를 놈들이 썼다는 거고, 나란히 누워 노곤한 기분이 들 때 우리의 맨 허리를 받치던 매트리스조차 헌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마음 같아서는 다 내버리고 새로 사주고 싶었지만, 말했듯 우리는 아직 서로에게 간섭할 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민지는 찬장에서 낡은 크리스털 잔을 꺼내 콜라를 따르면서도 전혀 불쾌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며칠이 지나 민지가 출장을 떠났고, 한국에는 태풍이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민지는 이제 바빠질 거라고 메시지 남긴 뒤 그저께부터 연락이 없었다. 그리고 이 수상한 남자가 내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나더러 말동무가 돼달라 한 주제에 그는 한참이나 입을 꾹 다물고 또 창밖만 멀뚱멀뚱 보고 있었다. 거기서 뭐가 날아들기를 기다리는 듯 뚫어져라 응시하는 게 아무래도 멀쩡한 인간은 아닌 듯했다. 물론 여자친구에게 스토커가 붙었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민지가 이런 사람과 가까운 사이라는 것도 딱히 유쾌한 상상은 아니었다. 사진 한 장만 슬쩍 찍으면 어떨까? 핸드폰 화면을 이리저리 넘기던 중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걸 민지에게 보내면 언젠가 답장이 올 테고, 그럼 남자가 진짜 지인인지 아닌진 알 수 있겠지. 나는 바로 무음 카메라 어플을 다운받기 시작했다. 남자는 자기가 수상해 보일 거라는 생각을 전혀 안 하는 듯, 내가 뭘 하는진 안중에도 없이 코트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피우시는 겁니까?”
   남자는 내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고, 우리의 시선이 잠시 맞부딪쳤다. 남자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남자가 서 있는 모습은 처음 봤는데, 내 예상보다 훨씬 마른 사람이었다. 창문을 열자 코트가 돛처럼 펄럭일 정도였다. 가느다란 팔로 담배를 쥔 걸 보니 눈살이 다 찌푸려졌다. 실내에서 또 담배를 피우는 건가 싶은 아니꼬운 마음과, 저렇게 비실한 남자라면 여자친구 주위에 수백 명쯤 있어도 걱정되지 않을 거라는 흉한 마음이 동시에 드는 것이었다.
   “나가서 피우시죠.”
   “예전에는요……”
   남자는 창틀에 팔을 올리고 기대섰다. 거센 바람이 창으로 밀려 들어왔는데, 남자는 담뱃불을 기이하게도 쉽게 붙였다. 그는 내가 먼저 말문을 열어준 게 고맙다는 듯 씩 웃었다. 하지만 그 눈에 이해할 수 없는 적의가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이 집에서 친구들과 담배 피우고 술을 마셨습니다. 우리에게 여기는 집이 아니었어요.”
   집이 아니면 뭡니까, 그렇게 물어봐주길 기다리는 것인지 남자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바람이 불어대는 통에 온 사방에 재가 날리는 듯했다.
   “집이라기보다는 작업실이었죠. 여기서 모든 걸 만들었으니까.”
   “뭘 말입니까?”
   “글쓰기. 우리는 연극을 했어요.”
   남자의 말에 나는 체면도 잊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뭔가 했더니 연극인가. 요즘 친구들도 그런 것을 젊음의 표지판처럼 여기고 사는 건가. 다음 순간 남자가 민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진부한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을 터였다. 남자가 말하기를 그 극단은 작가와 배우와 연출을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고 했다. 모두가 함께 글을 쓰고 즉석에서 대사를 읊고 제스쳐를 취하며, 이걸 무대에 올리면 어떻게 동선을 짤지 난상토론을 벌였다는 거였다. 웃긴 건 실제로 공연을 올린 경험이 딱 한 번뿐이란 사실이었다. 한마디로 학생 동아리 아닌가. 아마추어 수준의. 나는 발끝을 까딱거리며 남자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남자는 창문을 닫고 돌아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몽롱한 표정만 보면 담배가 아니라 대마라도 피우고 온 듯했다. 나는 하품을 참을 수 없었다. 남자가 함께 있은 지도 삼십 분은 돼가고 있었다. 핸드폰 화면을 켜니 무음 카메라 어플이 다운로드되어 있었다.
   그가 민지의 극본에 대해 이야기한 게 그때부터였다. 공연 올릴 기회가 생겨 밤새 토론하는데, 민지가 너무 기괴한 인물을 좋아해서 동료들과 충돌이 잦았다고 했다. 안주머니에 송곳을 넣고 일하는 서비스직 여성, 밤마다 검은 옷을 입고 골목의 어둠 속에 숨어 있는 할머니, 수은 체온계에 설탕을 발라 갓난애의 입에 물리는 엄마…… 그런 인물이 등장하는, 그러면서도 아무 도덕적 판단도 하지 않는 이야기를 지어내 몇몇 동료가 화를 낸 적도 있다는 거였다. 민지가 써온 짤막한 극본에서는 그 기괴함이 물씬 느껴졌다. 어느 젊은 여자가 남편과 사별해 아이를 혼자 기르게 되는데, 그녀가 수상한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찬장에 놓으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연극은 주방을 배경으로 아이와 여자가 몇 년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시간 동안 여자는 간장이며 기름이며 식초 따위를 사서 찬장에 둔다. 결국 여자가 처음에 둔 유리병이 그중 무엇인지 관객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여자는 계속 요리를 한다. 민지는 허공에 대고 요리하는 연기를 선보였는데, 그 순간 민지의 표정이 아주 솔직해서 마음에 들었다고 남자는 실실 웃었다.
   “웃기는 소리.”
   나는 등을 소파에 기댄 채 그렇게 말했다. 남자는 내가 거기 있다는 걸 잊고 있던 듯 놀랐는데, 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나 혼자 희미한 지진을 느끼는 것처럼 몸이 조금씩 떨리는 게 느껴졌으니까. 머릿속으로는 이십 대의 과장된 말에 발끈할 필요가 없음을 알았지만, 팔다리는 전기가 오른 듯 불끈거리면서 내 통제를 벗어나려는 듯했다.
   “당신 민지랑 어떻게 아는 사이지?”
   “……”
   나는 호흡을 가라앉히려 애쓰고 있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꼭 보이지 않는 유령들이 우리를 구경하는 듯 뒷목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남자는 무표정한 채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간의 대화는 다 무의미해진 것 같았다. 아까 대학 친구라고 말했던 걸 우리 중 누구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남자는 마치 방금 내 말은 듣지도 못한 것처럼 하던 이야기를 이어갔고, 나는 소파 팔걸이에 기댄 채 느긋한 태도를 가장했다. 사지를 밧줄처럼 동여맨 긴장감에는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카메라 어플을 실행하는 동안에는 내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화면 속에서 남자는 촬영되고 있음을 아는 듯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진을 민지에게 발송한 무렵에는 남자도 말을 마친 참이었다. 우리는 다시 침묵 속으로 침잠했다. 민지가 답장을 보내온 것은 그로부터 몇 분 지난 뒤였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답이 돌아올 거라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상하게 조용하다는 생각.

   창문이 강풍을 맞아 깨져버린 게 그 순간이었다.

*

   타인을 휘어잡는 사람들에게는 다 자기만의 방법이 있다. 어떤 이는 강자의 표정을 지을 줄 알고, 어떤 이는 부드러운 화술로 타인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린다. 또 어떤 이는 상대의 장점을 알아봐줌으로써 그를 칭찬에 중독시키기도 한다. 물론 이렇게 오묘한 방법만 있진 않다. 대개는 단순한 방법을 쓰는데, 바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것이다. 아주 시끄러운 순간 세상은 잠시 멈추기 때문이다. 수다쟁이들은 입을 다물고, 가전제품의 백색소음과 창문 틈으로 들리던 희미한 음악 소리도 묻혀버린다. 그리고 모두가 소리 난 쪽을 바라보게 된다. 잠긴 문 앞에서 열쇠 가진 사람을 바라보듯, 시끄러워 균형이 깨진 순간에는 그 소음을 일으킨 장본인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별로 대단한 재주도 없는데 주인공이 되고 싶은 이들이 자기 목청을 혹사시키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 소음을 일으킨 게 사람이 아니면 어떨까? 소음 뒤의 어색함이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면? 창문이 깨진 순간, 남자와 내가 한참이나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던 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그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비바람을 막아주던 유리창은 수십 개 칼날이 되어 흩뿌려졌고, 몇몇은 우리가 앉은 소파에까지 날아들어서 이제 편히 앉아 있을 수도 없게 되었다. 우리는 멀뚱히 서서 방바닥을 둘러보고 있었다. 나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게 힘들었고, 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우리는 밤중에 몰래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다 어른에게 훈계를 듣는 어린 형제 같았다. 남자가 빗자루를 찾아보겠다고 웅얼대며 침실로 걸어갈 때, 나는 차라리 안도감을 느꼈다. 누구에게라도 나의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민지가 지금 나를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태풍을 대비해주겠다고 와놓고는 창문이 깨질 때까지 넋을 놓고 있는 꼴이라니.
   그때의 부끄러움이 남자를 향한 적의로 이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시 찾아온 침묵 속에서―바람은 불었지만 비는 별로 내리지 않았고, 그래서 창문이 깨진 뒤에는 의외로 집 안이 조용해졌다―구체적인 의문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으니까. 그런데 왜 청소도구를 찾으러 침실로 들어가는 거지? 아니, 워낙 온갖 것들로 가득하니까 청소도구가 있을 수도 있겠다만, 그게 저 안에 있다는 걸 저 남자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지…… 내 상상력은 곧장 어지러운 이미지들을 눈앞에 띄우기 시작했다. 잠시 뒤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진동했을 때, 나는 그 메시지가 나를 이 상황에서 끄집어내 줄 구세주인 양 황급히 꺼내 보았다. 그리고 한참이나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남자와 처음 마주쳤던 순간처럼,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그 활자들이 형태를 바꾸기라도 할 거라는 듯이. 그러나 민지의 메시지는 잘못 읽을 수도 없을 만큼 간결했다. 저 남자 누구예요? 아는 사람이에요?
   나는 결국 아무 답장도 못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당장 급한 일은 눈앞에 있는 듯했다. 핸드폰은 무슨 위험을 알리듯 계속 진동하고 있었고, 나는 잠깐 심호흡을 한 뒤 침실로 직행했다. 가만히 앉아 경찰을 부르는 게 나았을 거라는 생각, 하다못해 무기가 될 만한 물건이라도 찾았어야 한다는 생각은 문고리를 비트는 순간에야 떠올랐다. 손아귀에 힘이 너무 들어가 있었던지 문짝은 헐거운 그네처럼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나는 주저할 것 없이 침실로 뛰쳐들어갔다. 기분이 이상했다. 평생 누구와도 이 악물고 싸워본 적 없어서 그런 걸까? 나는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이 오면 정신도 없고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줄 알았는데, 내 평생 이렇게 미래가 훤히 보인 적이 없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남자의 멱살을 잡고 소리 지르는 내 모습이 선명히 재생되고 있었다. 그가 거짓말을 해왔음을, 그리고 그걸 내가 알게 되었음을 분명히 하는, 잠시 뒤의 내 모습이.
   그러니 침실에 아무도 없는 걸 보고는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심장은 평소의 두 배쯤 되는 피를 삼키느라 갈비뼈를 다 흔드는 듯했지만, 팔다리는 줄에 연결된 인형처럼 허공에 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홱홱 돌리며 남자를 찾았다. 그러면서도 그 꼴이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누굴 찾아야 할 만큼 넓은 방도 아니었으니까. 도저히 사람이 지나갈 수 없는 작은 창문, 바닥에 널린 책과 옷, 선반의 화장품들과 받침대 없이 놓인 파란색 매트리스, 그게 이 방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었다. 공연히 옷가지를 헤집어봤으나 당연히 헛수고였다. 남자는 옷이나 모자 따위로 둔갑이라도 한 듯했다. 나는 하릴없이 거실로 돌아왔지만, 거기도 아무도 없긴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심장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아까부터 꽉 쥐고 있던 핸드폰의 화면을 켜보았다. 민지는 자신은 저 남자를 모른다고, 자기 집에서 뭘 하는 거냐고, 대체 저 남자는 누구냐고 메시지를 보낸 참이었다.
   나는 남자의 사진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제 보니 사진 속 남자는 너무 평범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쭉 찢어진 눈과 나지막한 코, 연필로 그린 것처럼 얇은 입술. 민지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인지 무언가 타이핑한다는 알림은 떴으나, 결국 더는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 우리의 대화는 거기에서 멎었다. 민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나는 정말이지 이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었으므로. 그리고 민지가 어떤 사람인지도 더는 확신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남자가 남겨둔 종이 박스가 눈에 들어온 것이 그 순간이었다. 나는 팔을 뻗어 상자를 끌어당긴 뒤, 소파에 걸터앉아 그 안에 든 것들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유리 조각 따위는 이제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다시 비가 내렸고, 집 안으로 빗물이 들이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상자 속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보느라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도대체 뭐가 들었길래 이 모든 일이 벌어졌을까 생각하느라고.

   그건 모두 없어도 되는 물건들이었다.

박규민

제가 글을 쓰는 오늘은 비가 오는데, 당신이 이 글을 읽는 날에는 날씨가 어떨지 모르겠어요. 글쓰기란 항상 늦게 엉뚱한 곳으로 가는 편지 같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이 불쾌한 이야기를 읽고 조금만 아팠으면 좋겠습니다.

2020/08/25
3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