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주 긴 예고편으로서의 소설을 생각했다. 주인공에게 벌어지는 불가해한 일련의 사건들과 잠실이라는 공간, 2016년의 여름, 석촌호수에 떠 있는 슈퍼문, 새로 분양해 입주를 기다리는 근교의 아파트 단지, 단지 앞 상가에 오픈을 앞둔 프랜차이즈 치킨집. 구인광고를 보고 ‘바로지원’을 클릭하는 여름방학을 맞이한 십대, 그 십대의 여자친구, 여자친구의 아버지, 아버지의 상사, 다시 잠실. 도시의 순환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적어도 열 개의 가구와 다섯 개의 상점의 내밀한 사정을 알고 있어야 하며 그리하여 평일에는 보습학원에서 아이들을 실어나르고 주말이면 강남의 한 대형 교회의 셔틀버스를 운전하는 삼십대 후반의 남자가 일 년 내내 도로에서 보내는 시간에 대해, 불법 유턴과 주정차 금지구역에서의 낮잠에 대해 넌지시 얘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는 서울의 남쪽과 여의도를 오가는 파란색 간선버스의 새로운 종점 차고지에서 시작된다. 버스는 이제 신도시를 우회하여 새로운 차고지로 들어가고 나왔으며 과거의 차고지에는 보금자리주택 공사가 시작되었다. 종점에 사는 주인공은 더이상 예전처럼 버스에서 마음놓고 잠들 수 없게 되었다.
   주인공의 이름을 만들어놓고 보니 입에 잘 붙지 않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인미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았으나 아무도 그런 이름의 여자를 알지 못했다. 한 명이라도 자신이 아는 인미에 대해 “인미는……” 이라고 다정하게 이야기해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인미는 두드러져본 적 없는 인생을 살았다. 평소 배려와 예절이 과한 타입인 그녀가 대학 졸업 후 직장으로 처음 택한 곳은 잠실에 위치한 대형 서점이었다. 매일 책을 주문하고 쌓고 나르고 진열하고 다시 꺼내어 팔았다. 인미는 퇴근길에 362번 버스를 타고 송파구의 많은 곳들을 지나 차고지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것을 좋아했다. 다른 버스보다 한참을 돌아가는 노선이었지만 맨 뒷자리에서 맘 편히 잠드는 것과 에어컨의 적당한 냉기, 최루성 라디오 사연, 덜컹거림 등을 이유로 그 버스를 고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인미의 퇴근 버스가 차고지를 변경했다. 분명 버스와 버스정류장 곳곳에 그와 관련한 안내문이 붙었을 텐데 주의력이 좋지 않은 우리의 주인공은 낯선 곳에서 깨어나 간신히 택시를 잡아타는 실수를 여러 번 반복한 후에야 비로소 이 버스가 더이상 자신의 집에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인미의 생활은 달라졌다. 집에 오는 여정이 효과적으로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피로감은 심해졌으며 덩달아 불면증도 심해졌다.
   2009년에 기공을 시작한 잠실 월드타워는 현재 한반도에서 가장 높고 세계에서는 여섯번째로 높은 고층빌딩으로 알려져 있다. 2016년 12월 22일 완공 예정인 타워 주변으로는 세 개 동의 쇼핑몰이 둘러싸고 있는데 이는 각각 에비뉴엘동과 쇼핑동, 엔터테인먼트동으로 구성되어있다. 2014년 여름, 석촌동 일대에 발생한 싱크홀의 원인 여부를 두고 시끄러울 당시만 해도 쇼핑몰은 한산했다. 지하철 두 개 노선의 환승지이자 성남, 하남으로 뻗은 광역버스들이 한 데 모이는 잠실 사거리의 유동인구가 재앙의 시나리오와 겹쳐지면서 블로거들은 흥분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인미가 일하는 쇼핑몰은 오픈 이 년 만에 주변 상권을 전부 흡수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싱크홀, 고도 제한, 지난 정권의 책임 같은 것들보다 인근 호수에 띄워진 네덜란드 설치미술 작가의 대형 고무 인형이 화제가 되었다. ‘명동 중국인들의 발걸음이 잠실로 향한다’ ‘새로운 문화예술 관광 메카의 탄생’ 등 홍보문인지 뉴스인지 구분하기 힘든 기사가 자주 눈에 띄었다. 최초의 우려는 이제 농담이 되었고 아무도 인미에게 무너진다거나 흔들린다거나 구멍이 난다와 같은 동사를 쉽게 꺼내지 않았다.
   송파에 잠실밖에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잠실본동과 잠실1동부터 7동까지 차지하는 면적은 전체 면적 33.88킬로미터의 5분의 1정도이고 그밖에도 풍납동, 거여동, 마천동, 석촌동, 삼전동, 가락본동, 방이동이 있으며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이 치러졌던 잠실종합운동장과 올림픽공원 등 단지 형태의 종합 체육 시설이 밀집해 있다. 송파구는 파라과이의 아순시온시와 1993년부터 자매결연을 맺어왔다. 서로의 시장이 서로의 시를 방문하는 행사와 주한 파라과이 대사와의 교류, 2004년에 아순시온시 화재와 2014년 수해에 지원금을 전달하는 등 A4 반 페이지 정도에 달하는 교류 일지를 구청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구의 캐치프레이즈는 ‘먼지 없는 송파’였으나 중국발 미세먼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면서 ‘앞서가는 송파 당신을 담습니다’라는 추상적인 문구로 최근 교체되었다.

   새로 이사 온 사람에게 근린은 처음에 혼란스러운 이미지, 즉 저 밖에 있는 흐릿한 공간이다. 1)

   쇼핑몰은 주말이면 퍼레이드가 열렸다. 동물 탈을 쓴 사람들이 아바의 명곡이나 뽀로로 주제가를 연주하며 몰 전체를 순회한다. 이를테면 브레멘의 동물 음악대 같은 것이다. 밀리는 서점 계산대에 퍼레이드가 가까워질 때면 캐셔들은 미간을 찌푸렸다. 손님에게 악을 써가며 가격을 알리고 적립할 핸드폰 번호를 모니터에 입력해야 했다. 신용카드들의 모서리를 포스기에 내리찍으면서 인미는 가끔 댄싱퀸의 한 대목을 흥얼거렸다. 지겹지만 신나는 노래라고 생각했다. 구내식당의 메뉴를 누군가 직원들 단체 채팅방에 찍어 올리면 오늘의 메뉴를 엄지와 검지로 확대해보고 ‘저는 따로 먹을게요.’ 그렇게 메시지를 적어 보냈다. 인미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급식이 싫었다. 싫은 것과는 별개로 노력을 들여 도시락을 싸서 다니는 부류는 또 아니었다. 입고 먹는 것에 각별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건 여전하지만 어색한 동료들과 한여름의 열기로 숨이 턱턱 막히는 지하 주차장을 가로질러 식당까지 가는 여정이 지겨웠다. 간단한 대화 한마디 없이 꾸역꾸역 십여 분 안에 해치우는 과정은 더 싫었다. 그래서 자주 식사를 거르고 쇼핑몰 건너편에 있는 맥도날드에 갔다.
   동물 탈을 벗자 땀으로 범벅이 된 젊은 남자의 턱이 입술이 인중이 코가 콧잔등이 눈이 눈썹이 이마가 머리카락이 차례대로 드러났다. 땀 때문에 여러 번 눈을 꼭 감았다 떴다. ‘어쩌면 그건 나를 자세히 보기 위한 거야.’ 인미는 그때도 지금도 그렇게 오해를 했다. 복도는 길을 잃기 딱 좋았다.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었고 어떤 출구로 나가려 했는지, 저 문이 열고 나온 문인지 열고 나가야 하는 문인지 자주 헷갈렸다. 그건 어떤 표식도 없이 일관된 무채색 때문이다. 직원들만 지나다니는 그 통로는 바깥과는 공기와 소리의 밀도가 달라서 걷다보면 도무지란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고 코너를 돌아나갈 땐 이유 없이 쫓기는 기분마저 들었다. 퍼레이드가 끝난 음악대는 복도에서 옷을 갈아입거나 휴식을 취했다. 그날 역시 복도는 동물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다 느닷없이 연주가 시작됐다. 장난감 같던 악기들은 모두 실제 악기였고 흉내인 줄 알았던 연주도 전부 진짜 연주였다. 사자와 기린이 코끼리를 사이에 두고 익숙한 행진곡을 연주했다. 코끼리인 여자애가 웃었고 사자의 양 볼이 빨개졌다. “애들이 좋아할까, 이 노래를.” “아니야, 이제 다 집에 돌아갔을 거야.” 아이들을 위한 게 아니면 나를 위한 걸까. 인미는 착각한 채로 남은 저녁 시간 내내 그들의 행진곡을 들었다.

   어떤 광경을 전체적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렇게 보아왔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눈은 멈출 곳을 계속해서 찾고 있다.

   크기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미가 다닌 대학교의 가장 큰 신축 건물도 그 쇼핑몰에 비하면 턱없이 작았다. 그렇게 큰 건물에서 일해서 좋은 점은 자주 아무렇지 않게 사라질 수 있는 가능성뿐이었다. 유니폼을 벗으면 바로 손님이 된 것 같았고 그래서 1층, 석촌호수 방향으로 출입구가 나 있는 무인양품에서 자주 쇼핑을 가장한 산책을 했는지도 모른다. 인미는 매장에 전시된 깃털포켓와이드암쇼파시리즈1에 앉아 떡갈나무로우테이블2 위에 세팅된 티와 유리컵 두 개와 물통을 본다. 그러고 보니 발밑에는 카펫도 깔려 있다. 잠시 ‘여기는 누군가의 집, 나는 초대된 손님’이라고 여겨봤다. 유니폼을 입고 멍하니 앉아 있는 인미를 발견한 직원들이 카운터 너머에서 속삭인다. “저 여자 또 왔어.” 노래는 익숙하고 밖은 너무 한 낮의 오후. 그 시절 인미는 미래지향적이었지만 근시안적이었고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매번 대학원 준비생 혹은 캐나다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날 사람, 이도 아니면 영화를 찍겠다고 말하거나, 누군가에겐 등단을 준비하는 작가 지망생이라고 소개했고 실제로는 서점의 직원이었다. 그 모든 게 진실이면서 동시에 절망적이기도 해서 인미는 가끔 여러 가지 미래를 일기장에 한꺼번에 적어보고 그게 모두 나인가 따져봤다. 그러고는 손목과 허리가 아픈 서점 직원만 남기고 모든 것에 가위표를 친 다음 죽고 싶다고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캐나다에서 영주권을 따기 위해 벌써 두 해째 지독한 겨울을 보낸, 그래서 이미 어떤 식으로는 여러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친구가 여기는 안락사가 합법이다, 우리 주는 안락사가 합법이다, 라는 얘기를 위로처럼 해주면 그제야 잠이 왔다. 꿈을 꾸면 영감이라도 얻을 텐데 꿈도 꾸지 않고 자주 깨서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SNS에 잠이 안 온다고 적고 불면증을 검색했다. 아침에 일어나기 힘든 것은 저혈압 때문이었다. 가족력이 있었다. 다들 저혈압으로 고생하다 중년이 넘어가면 고혈압이 되어 혈압 약을 먹었다. 지금 당장의 저혈압이 문제가 아니라 오십 이후에 닥칠 고혈압을 걱정해야 한다고 지나치게 계획적인 어머니와 아버지는 때때로 인미를 늙은 고아처럼 대했다. 높은 서가에 있는 책을 꺼내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때면 어지럼증이 일었고 그때마다 인미는 캐나다의 설원을 생각하고 캠핑을 생각하고 안락사를 생각했다. 그래도 쓰는 것이 아니면 어떤 것도 위안이 되지 않았으므로 핸드폰 메모장은 A301 역사소설 재고 칸 먼지처럼 두꺼워졌다. 다시는 읽지도 보태지도 않았지만 아무튼 많아졌다. 캐나다에 가서 서빙을 해도 메모는 계속하겠구나, 그런 마음가짐으로 책을 나르고 대학원을 알아보고 비자를 알아보고 영화를 보고 종종 친구들도 만났다.

   삶은 중요하나 눈에 띄지 않게 진행된다. 보는 것은 항상 ‘저기에’ 있다.

   메카를 향해 절을 올리는 두 여인을 만난 날을 인미는 잊지 못한다. 인미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건물 뒤 산책로에 조성된 작은 연못에서 소금쟁이의 수를 세고 있었다. 히잡을 두른 여자 두 명이 연못 건너편에서 나를 보고 웃었다. 건조한 웃음이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언어로 이루어진 목소리가 예뻤다. 이성당 쇼핑백을 내려놓고는 한 명씩 번갈아가며 놀이공원 방향으로 절을 했다. 갑자기 연못의 물 분사기가 작동하고 여섯 갈래의 물이 쏟아졌다. 흰색 잉어가 빠르게 발밑을 지났다. 멀리서는 자이로드롭이 떨어졌다. 희미하게 비명소리가 들렸다. 인미는 태어나서 한 번도 저 놀이기구를 타본 적이 없었다.
   민지는 인미를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 만나 놀란 눈빛이었다. 나이를 먹은 김민지는 얼굴이 지나치게 노랗고 안색이 어두웠으나 얇아서 선을 두 줄 그은 것 같았던 입술만은 그대로였다. 그 애와 인미는 이 년 동안이나 같은 반이었다. 인미는 민지와 민지의 친구를 싫어했는데 그 애들은 셋이 몰려다니다가 한 명을 의도적으로 따돌렸다. 따돌림 당한 애와 인미는 친해졌다. 수업 시간에 쪽지로 뒷담화를 주고받는 게 한심해서 한번은 그 쪽지를 조롱당하는 당사자에게 전달했다. 의연하고 태연하게 “나도 쟤네 싫어, 유치해.”라고 말하는 그애가 좋았다. 아무튼 민지는 그런 애였다. 남의 험담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담임 시발년’이라는 문자를 담임에게 잘못 보내 반을 뒤집어놓기도 했다. 민지와 인미의 접점은 이게 전부였다. 민지는 인미를 알아봤다. 인미를 오랫동안 쳐다보던 얇은 입술이 여러 번 비틀렸다. 중학교 수학 문제집을 여섯 권이나 샀지만 현금 결제가 아니라서 지출 증빙을 끊을 수 없었고 화를 냈다. 그냥 카드로 해주세요. 책에 띠지 왜 안 두르세요? 문제집에 누가 띠지를 두르니 민지야. 인미는 그렇게 얘기하고 싶었지만 민지의 노란 얼굴을 보면 되레 덤덤해졌다. 학원에서 일을 하는 걸까. 그애가 매장을 나가고 나서 카운터에 있던 직원들 모두 잠깐 동안 불쾌해했다. 카드 결제하고 현금영수증을 끊으려는 병신이라고 욕했다.

      여기는 저기를 암시하고, 지금은 그때를 암시한다. 하지만 ‘암시하다’는 의미가 약한 동사이다. 여기는 저기를 수반하지 않으며, 지금도 그때를 수반하지 않는다.

   ‘어반, 시크, 컴포트를 기본 아이덴티티로 구성한 인테리어는 고객들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머물다 가게 만들며, 서가들을 계단식으로 배치한 휴게 공간은 테이블 및 개별 의자와 스탠드도 있어 여유롭게 상품을 선택하고자 하는 고객들에게 안성맞춤이다.’ 인미는 입사지원서를 쓸 때 찾아 읽은 적이 있는 기사문의 내용이 떠올랐다. 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비효율’이라는 단어만 맴도는 아이덴티티였다. 의자처럼 기능하는 계단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사지도 않는 책을 음료와 함께 던져두어 지저분해지기 일쑤였고 분위기를 위해 천장까지 채워놓은 서가는 책을 꺼내기 위해 대형 철제 사다리를 타고 하루에도 수십 번 올라야 하는 피로를 제공했다. 인미는 주말이면 입서가 사이사이 주저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며 독서에 관해 생각했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다, 삶의 지평을 넓혀준다,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돕는다, 같은 일전에 들어봄직한 딱딱한 권유문들이 먼저 떠올랐다. 인미는 초등학교 때 문고판 추리소설집을 탐독했다. 정확히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책을 읽었다. 집은 비어 있고 비어 있는 집 문을 따고 들어가는 게 싫었고 하굣길을 다정히 함께할 친구가 없어서 본관 1층에 있는 도서관에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재미없게 꾸역꾸역 읽었다. 가장 확연한 감정을 느낄 만한 게 당시엔 추리소설이었고 이상한 번역 투의 홈즈나 뤼팽을 읽으면 그건 아무런 현실감이 없는 얄팍한 공포라 좋았다. 창비에서 나오는 아동 문고엔 농촌 배경인 소설이 많았다. 마을의 소가 쥐약을 먹고 단체로 죽는 이야기나 이념 갈등을 우화식으로 푼 것, 그도 아니면 새엄마나 새아빠, 입양에 관한 것들. 그건 그거대로 최루성이라 좋았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독서라는 것이 그녀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나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확신을 갖기 어려웠다. 많이 읽고 많이 보는 것은 인격의 고양과는 사실 아무런 관계가 없었고 심지어 그런 것들은 일상의 유머감각 차원에서조차 도움이 되질 않았다. 오히려 실재를 사는 사람을 만나면 인미는 한없이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감동적이었다는 말을 헤프게 쓰는 스스로를 보면 읽는 것에 비해 그저 빈약해지기만 하는 언어생활이 한심했다. 단순히 지나치게 슬퍼하기 위해 책을 읽는 것 같았다. 그건 지혜롭다는 것과는 정반대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미는 회사에 가지 않는 날엔 소설가들의 낭독회 같은 델 갔다. 거기서 소설에 대해 듣기보다 소설가가 어떤 양말을 신는지 시계를 찼는지 혹은 귀걸이를 했는지 무슨 신발을 신고 펜은 잉크펜을 쓰는지 볼펜을 쓰는지 핸드폰은 아이폰인지 갤럭시인지 그런 것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어디에나 우리 곁에 소설가가 있어. 그런 망상을 하기 위해 소설가들의 외모를 꼼꼼히 기억해두었다. 젊은 예술가들은 이런 까페엔 오지 않겠지. 인미는 집 앞, 새로 생긴 체인점 커피숍의 기다란 철제 테이블에 앉아 다섯 대의 맥북 사이에서 젊은 예술가들은 어떤 까페에 갈까 상상했다.
   서점 내 북까페는 호수로 나 있는 창가 쪽에 위치해 인기가 좋았다. 꼭 책을 사지 않더라도 까페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음료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호수는 언제나 짙은 녹색이었고 대개가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인미의 눈에 띈 그 여자는 구글 지도로 뉴욕을 보고 있었다. 랩탑 옆에 펼쳐진 책은 태국 여행 가이드북이었고 익스플로러의 다른 창에는 블로거의 홍콩 여행기가 띄워져 있다. 어디로든 갈 수 있고 어디도 가지 않을 수 있는 무한한 여자는 결제하지 않은 도서들을 테이블에 쌓아둔다. ‘북까페는 구매한 도서만 반입 가능한데요, 손님.’ 인미는 얼굴 붉히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그날따라 다른 손님들의 컴플레인이 많았다. “저 여자는 사지도 않은 책을 읽는다구요. 나는 안내문 때문에 책을 샀는데. 저 여잔 뭐에요, 저 여자뿐만 아니라 아무도 안 지키잖아! 책을 산 내가 뭐가 돼!" 인미는 당황했고 다른 직원들을 찾았지만 마침 모두 카운터에 들어가 있었다. ‘책을 산 당신은 규정을 준수하는 올바른 가치관의 고객입니다.’라고 칭찬을 해드려야 하나 아니면 당장 사무실에 가서 안내 방송으로 커피숍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쫓아내야 할까. 시비나 딴지가 아니고 규정에 대한 이야기일 뿐인데도 뭐 하나 만족스러운 선택지가 없었다. ‘얼마나 다행인가’와 ‘얼마나 무관심한가’ 이 두 문장이 얼마간 동일한 의미로 쓰인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 때문이었다.

      친밀한 순간에 사람들은 눈이 흐려진다. 생각은 거리감을 만들어낸다.

   인미는 퇴근길에 자주 비슷한 디자인의 바지를 여러 벌 샀다. 그만큼 분별력이 없기도 했고 몰 안의 여러 옷가게를 돌아다니며 분별을 잃은 자신이 열심히 카드를 꺼내고 핸드폰 번호로 멤버십 적립하는 것을, 그런 것들을 좋아했다. 사실 이러한 쇼핑의 시작은 인미가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 짝꿍인 기철을 만나고부터 시작되었다. 우연히 그 애가 1층 유니클로에서 열심히 옷을 개고 깔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발견하고 인미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그애의 뒤통수를 쫓다보면 어느새 손에는 청바지가 한가득 들려 있었고 그애가 뒤를 돌아보기 전에 얼른 탈의실로 숨어들었다. 들어온 김에 입어본 바지는 전부 다 비슷하고 전부 다 세일중이고 인미는 계산대에서도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 번호를 적고 저애에게 언젠가 인사하게 된다면 그때는 이 바지, 저 바지, 어떤 바지를 입어야 하나 생각했다. 그러다 집으로 돌아오면 갑자기 생긴 여러 벌의 바지를 방에 널브러뜨려놓고 서점에서 사온 책들이 무너질 듯 탑처럼 쌓인 침대에 누워 미국 시트콤을 시청했다. 재회의 순간을 상상하며 옷장 깊숙이 넣어둔 졸업 앨범을 꺼내보기도 했다.
   “비상계단과 복도 사이에 있는 전실 제연 설비는 각 층에 일반실의 복도로부터 계단에 이르는 중간에 구성되어 복도 측 출입구의 개방과 함께 화재시 급기가압으로 불길과 유독가스가 퍼지는 걸 막습니다. 여러분은 문을 두 번 열고 계단으로 빠져나간 뒤……”
   직원용 엘레베이터가 위치한 방은 화재 시 비상계단으로 유독가스가 번지는 걸 막는 제연설비를 갖추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나 비상계단에 앉아 스마트폰을 할 때 인미는 소방훈련에서 배운 것들을 떠올리며 재난의 상황을 상상했다. 상상 속에서는 인미가 기철을 구하기도 하고 기철이 인미를 구하기도 했다. 건물을 빠져나와 일단은 호수까지 달리는 거야. 호수에 당도하면 그다음은? 오리보트를 타고 다시 반대편 가장 먼 곳까지. 뒤로는 불기둥이 솟고 오리보트 역시 타본 적은 없지만 그렇게 빠르진 않겠지, 그럼 역시 호수로 뛰어들어야 할까. 나는 수영을 할 수 있고 아마 기철도 수영을 잘할 것이다. 인미의 상상 속, 나란히 호수를 가로지르는 남녀의 이미지에서 한국적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악보 좀 찾아주세요.”
   빈약한 상상력의 끝을 보기 전에 다행히도 손님 한 명이 찬송가 악보집을 찾았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안주’할 수 도 있다. 젊은 연인들은 사물과 장소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들은 꼭 그래야만 한다면 집을 버리고 함께 달아날 것이다.

   음반 매장에서 디브이디를 서른 장도 넘게 골라와 카운터에 펼쳐놓은 노부부는 서로 존칭을 썼다. 고전 영화 코너 한 칸을 통째로 꺼내온 듯했다. ‘외출도 하지 않고 둘이서 영화만 볼 건가봐. 아 그것 참 좋겠다.’ 인미는 조금 외로운 심경이 되어 <태양은 가득히> <역마차> <벤허>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옛날 옛적 서부에서>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멋진 인생> <자니 기타> 등의 바코드를 찍었다. 점심엔 구내식당에서 백반을 먹었는데 메추리알 꽈리고추 장조림이 나왔다. 메추리알을 젓가락으로 한 번에 집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번번이 실패하면서도 인미는 숟가락을 쓰는 대신 굳이 미끄러지는 메추리알의 표면을 노린다. ‘밥 먹는 속도를 서로 맞추는 사이는 친밀한 사이겠지.’ 인미는 그래서 무조건 허겁지겁 먹었다. 이렇게 쓸데없이 메추리알에 집착하는 날만 아니면 인미는 보통 남자 직원들이 해치우는 속도로 급식판을 비웠다. 밥을 먹고는 대학원에 다니는 친구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다. “중국인들이 한강에서 닭백숙을 수천 마리 먹어치웠대.” 친구는 자꾸 그 얘기를 했고 요우커니 <태양의 후예>니 한류니 그런 얘기들이 돌아나갈 타이밍을 놓친 로터리의 자동차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결국에 인미가 “이만……”이라고 운을 떼자 친구는 “야, 나 이만 끊어야겠다.”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뚝 끊었다. 퇴근 시간, 인미는 너무 피곤해서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되어 있었다. 갑자기 내린 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할 생각도 못 한 채 그 비를 다 맞고 서 있었다. 그래도 누군가는 필사적으로 뛰었고 누구는 길가의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기도 했다. 기철은 그 와중에 가방에서 삼단 우산을 꺼내 펼치는 정확하고 준비성 있는 사람이었고 인미는 그 와중에 고개를 숙인 채 자전거 페달을 밟는 무모한 사람이었다.
   보행자 대피섬에 촘촘히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인미를 중심으로 흩어졌다. 인미는 연석에 앞바퀴를 부딪치고 공중제비를 돌아 그들 한가운데 떨어졌다. 다행히도 겉옷으로 가득차 있던 배낭이 목을 받쳐준 덕분에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부끄럽고 당혹스러워 얼마 동안 넘어진 그대로 누워 있었다. 정신을 차리려는 순간 까만 얼굴이 눈앞에 가득찼다. “괜찮으세요?” 기철이 물었다.

      장소에 대한 즉자적인 평가와 판단은 대개가 진부하다. 예를 들어, 호수가 어떠하다라고 지적하는 순간 호수의 특성은 은폐된다.

   그날 기철이 바로 인미를 인미로 알아본 것은 아니다. 그 거리에서 인미를 주목한 사람은 많았지만 우산을 씌워준 사람은 기철뿐이었다. 괜찮으세요 다음이 무엇이었더라. 인미는 침대에 누워 열 시간 전의 일을 복기하는데 온 힘을 들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아니요.” “잡아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심하게 넘어지셨는데 병원에 가야 하지 않을까요?” “시간이 늦어서……” 정적이 흐르고 기철은 돌아섰다.
   “기철아.”
   인미는 갑작스럽게 기철을 기철로 불러세웠다. 그제야 두 사람 사이에 이상한 연극은 끝이 났고 기철도 인미를 인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일단은 십여 년만의 재회를 신기해했으며 반가움은 나중이었고 결국 인미의 팔꿈치에 난 피를 걱정하며 끝났다. 362번 버스의 노선이 변경된 이후로 인미는 오랜만에 버스를 타고 출근길에 올랐다. 팔꿈치가 아스팔트에 쓸린 것을 제외하고는 멀쩡한 인미에 비해 자전거는 앞으로 굴러가는 데 중요한 문제가 생긴 듯했다. 그럼에도 평소 같았으면 들지 않았을 긍정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예컨대 자전거만 망가져서 다행이라는 식의. 아침 조회가 끝나고 매장으로 들어서는데 동료로부터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특별한 일은 없는데……”라고 말끝을 흐렸지만, 이례적으로 팀원들에게 커피까지 돌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간을 들고 서서 여자친구에게 맨스플레인을 하는 어린 남자애를 봐도 웃음이 나왔다. 기철은 무슨 책을 읽을까 궁금해하면서.
   기철이 서점으로 인미를 찾아온 것은 며칠이 더 지난 다음이었다. 그동안 두 사람은 많은 양의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았는데 서로의 근무 환경에 대해 묻고 자신의 직장을 비난하는 일로 꽤나 가까워져 있었다. “우리 매장에서는 창밖으로 호수가 보여.”란 말에 기철은 구경을 오겠다고 했다. 기철은 패션잡지 하나를 들고 와서 인미에게 내밀었다. “6,000원입니다.” “오늘은 몇 시 퇴근이야?” “10시.” “나랑 비슷하네. 끝나고 잠깐 볼까? 내일 쉬는데.” 내일은 추석이었고 인미는 휴무를 내지 않아 오전조로 근무를 할 예정이었다. 기철 뒤로는 손님이 두어 명 더 있었다. “그래 좋아” “그럼 10시 반에 몽촌토성……” 마침 퍼레이드가 가까워졌고 인미는 잡지를 봉투에 담느라 기철의 말꼬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알겠다는 제스쳐를 취하고 쇼핑백을 건네자 기철은 “호수가 참 이쁘다.” 그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그 말은 인미에게 꽤나 낭만적으로 들렸다. 몽촌토성에서 만난다는 사실 또한. 내일이 추석이니 아마 달이 꽉 찼을 것이다. 몽촌토성에서 보름달을 보는 것은 멋진 일이겠구나. 미리 그의 계획을 알아차린 것이 쑥스러웠다. 인미는 자신의 짐작을 기정사실화했고 달을 볼 땐 무슨 음악을 들으면 멋질까 생각했다.

      생활은 너무 냉정해서 ‘저기’와 관계를 가진다고 해서 ‘여기’가 달아오르는 것은 아니다.

   기철은 오늘 그 초등학교 동창을 몽촌토성역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단체 채팅방에 적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가 남발되는 사이, 몇 개의 모텔 이름과 음담패설이 지나갔다. 몽촌토성역은 공원의 후문 광장과 이어져 있는 대로변 삼거리인데 맞은편 먹자골목으로 이어지는 길은 밤이면 분위기가 전혀 달라지는 모텔촌이었다. 그 동네를 아는 남자애들은 여자와 모텔에 간다는 표현을 에둘러 몽촌토성에 간다고 표현했다. 13세기도 아니고 3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시대 토성은 88올림픽 이래로 많은 부침을 겪어왔지만 이런 식의 은어로 사용되는 것은 또다른 일이었다.
   인미는 마감 정산을 하면서 마음이 바빠 숫자를 자꾸 틀렸다. 결국, 보다 못한 선임이 약속이 있으면 먼저 가보라며 인미를 카운터에서 빼냈다. 옷을 갈아입고 뛰듯이 걸어 쇼핑몰을 빠져나왔다. 생각해보니 건물 앞에서 만나 함께 걸어가도 될 일인데 굳이 몽촌토성에서 만나자고 한 게 이상했다. 하지만 이미 인미는 택시를 잡아탄 상태였다. 버스를 타도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이런 날 이런 약속엔 택시가 어울렸다. 토성까지는 광장에서 내려 조금 걸어야 했다. 꽤 긴 코스니 아무래도 시작점에서 만나는 게 좋겠지. 인미는 시계를 보려고 핸드폰을 찾았지만 가방에도 주머니에도 핸드폰은 없었다. 서두르다 빠뜨린 게 분명했다. 택시 탈의실 공원은 한산했고 어딘가에 있을 공중전화를 찾는 일보다 기철을 찾는 일이 급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장소를 묻지 않은 자신이 한심했다. 그 시각 기철은 몽촌토성역에 도착했다. 연휴 직전이라 모텔의 간판들이 많이 꺼져 있었다. 피크 타임이라 대실이 안 될까봐 걱정이 됐다. ‘어디야? 난 도착했어.’라고 메시지를 보내놓고 초조하게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인미는 총 2.7킬로미터에 달하는 토성을 잰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머리가 짧은 사람이 보이면 기철인지 확인하기 위해 속도를 줄였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대감은 빠른 속도로 사그라들었다. 이곳에서 기철을 만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자포자기된 심정으로 벤치에 앉아 하늘을 봤다. 요 며칠 비가 왔고 하늘은 탁한 먹색을 띠었다. 보름달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흐릿한 광채를 내뿜는 거대하고 긴 타워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있었다. 몽촌토성 위에서 본 월드타워는 어쩐지 실물보다 좀 커 보였다.

임효진

‘종말은 가능하고 혁명은 불가능한 세계’에서 작은 성취들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 비겁하지 않은 주인공들에 의해 다르게 읽힐 수 있는 현실에 대해 말하고 싶다. 기필코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 걸음걸음을 조심하며 사는 사람들이 다음 걸음을 당당하게 내딛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최근 단편소설 한 편과 그림 스물네 장이 함께 묶인 책 <인사와 신호>를 전소영 작가와 함께 만들었다. 우리는 조금 더 용기를 낼 필요가 있어요. 내기를 걸어도 좋습니다.

2018/01/30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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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푸 투안의 『공간과 장소』(구동회·심승희 옮김, 대윤, 2007)에서 몇몇 문장을 빌려왔다.(이하 파란색 글자로 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