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과 태풍 같은 자연재해는 예측 불가했다. 창밖에 내놓은 풍향계나 습도계만이, 만약 그곳이 기상관측대라면 훨씬 예리하고 거대한 기계들이 바로 지금, 재해가 일어나고 있다고 알릴 뿐이었다. 언젠가 거대한 폭풍이 영안실을 덮쳐 시신들이 모두 날아갔을 때, 어떤 주민은 그를 촬영하는 카메라에 대고 소리쳤다. 회개하라. 곧 그는 폭풍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뉴스를 전달받은 앵커는 2초가량 할 말을 잃었고, 방송국 내의 카메라 앵글 안으로 직원의 팔 한쪽이 튀어나왔다. 절박한 손짓에 정신을 차린 앵커가 다음 뉴스를 이어 갔다. 오닐은 리모컨으로 뉴스의 소리를 낮췄다. 화면 하단의 볼륨 막대는 빠른 속도로 짧아졌고 곧 소리는 사라졌다. 리모컨의 무음 버튼은 그녀가 텔레비전을 산 순간부터 리모컨 본체 안쪽으로 깊게 파고들어 있었다. 중고로 사는 물건을 선호하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불량 문제였지만 그녀는 텔레비전을 반품하지도, 불량을 이유로 물건값을 깎지도 않았다. 한 번 망가진 것은 다시 망가지게 설계되어 있다. 오닐은 작은 부품 하나에도 설정값이 정해져 있다는 이론을 긍정했다. 톱니와 톱니가 지나치게 맞붙어 돌아가지 않을 톱니바퀴는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을 것이고,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진 노인에게는 방랑하는 유전자가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오닐은 찬 물로 입안을 헹구고 오늘의 할당량에 집중했다. 그녀의 상사이자 대학 선배인 사와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초록색은 사용하지 마. 그 색은 피부가 안 좋아 보이게 만들어. 간단한 메시지였고 오닐은 모니터 안의 그래픽을 조금 고쳤다. 메시지가 도착하면 메신저는 작은 종소리를 냈고 모니터 하단부에서 팝업 창을 띄웠다. 오닐은 네 번째 메일을 발송했다. 동시에 메일함의 알림이 울렸다. 사와로부터 온 메일이었다. 제목도 내용도 없었다. 그저 반송된 메일이었다.
   오닐은 색상표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완전한 원을 이룬 색상표, 그리고 곳곳을 세밀하게 가로지르는 마우스 커서가 그려졌다. 곧 그녀는 지금까지 만들어온 그래픽들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 건물에서 투신자살하는 사람의 상의로는 무슨 색이 잘 어울릴까. 검정색은 시청자들이 보기에 너무 암담해서, 흰색은 이유 없이 무난해서, 초록색은 피부가 영 좋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거절당했다. 모니터 안의 사람은 아무 색의 옷도 입혀지지 않은 채로 옥상에 서 있었다. 그는 쉴 새 없이 투신했고 프레임이 끝나면 다시 옥상에 안착해 있었다.
   소리가 꺼진 텔레비전에서는 오닐이 며칠 전 완성한 3D 자동차가 중앙선을 침범하고 있었다. 뉴스 자막은 고속도로의 12중 충돌 사고의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해 경찰들이 동원되었다고 전했다. 해당 사건의 담당 경찰이 어색한 표정으로 인터뷰를 마쳤고 뒤이어 유족들이 장례식장에 있는 장면이 나왔다. 뉴스는 다음 소식으로 화면을 바꿨다. 오닐은 호흡했다. 그리고 불현듯 자세를 고쳐 잡고는 투신자살하는 사람의 상의를 칠했다. 금색이었다.
   이것이 오닐의 일이다. 그녀는 시계를 확인했다. 정확히 오후 다섯 시였다. 초대받은 저녁 식사는 일곱 시에 시작할 것이고 예정대로라면, 약속 시간 십 오분 전에 부부의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

   오닐은 부부 중 한 명만 알고 있었다. 야지는 그녀의 친척이었다. 사실, 깊게 파고들자면 야지는 그녀의 친척이라고 말하기 민망한 촌수였다. 그러나 야지는 쾌활하게 둘의 사이를 정리했다. 여섯 다리만 건너면 온 세계 사람들과 친구라고 하던데. 오닐이 야지의 집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지던 것은 가벼운 온기였다. 그녀는 품 안에서 화이트 와인을 한 병 꺼냈고 야지는 기꺼이 와인을 받아들었다. 야지의 아내는 처진 눈을 가지고 있었다. 드니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메조소프라노처럼 들렸다. 동시에 단조로운 억양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쩐지 소수민족의 관악기 같은 인상을 풍겼다.
   테이블은 컸다. 그럼에도 테이블이 좁아 보이는 이유는 부부가 대식가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원 플레이트 푸드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야지는 자신이 어떻게 가장 꼭대기의 그릇을 꺼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고 드니는 끊임없이 생선 요리를 씹어 삼켰다. 테이블 한가운데를 비추는 조명은 한낮처럼 따뜻했고 그릇과 그릇이 겹치는 그림자는 천천히 흔들렸다. 오닐은 와인으로 목을 축이며 가끔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을 굴렸다. 셋은 천천히 취했고 열심히 먹었다. 오닐은 천천히 웃었고 천천히 이야기를 곱씹었다. 부부와 오닐이 모두 아는 사람의 가십을 모두 끝내고 나니, 테이블에 올라올 이야기라고는 오래된 이웃에 관한 소식, 내릴 줄 모르는 시장 물가에 대한 불평, 편중된 대중교통 체계에 대한 분노, 정당과 정치인에 관련한 기분 나쁜 농담 정도였다. 오닐은 별것 아닌 말에도 웃기 시작했다. 부부 역시 소리 내어 웃었다. 특히 야지가 신나게 웃었는데, 오닐은 그가 확실히 취했다고 생각했다. 야지는 이제 드니의 의자를 거세게 내리치며 테이블에 얼굴을 박았다. 드니는 재빨리 야지의 그릇을 치웠고 야지는 운 좋게도, 얼굴에 음식물을 묻히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신다고요? 드니가 물었다.
   오닐은 앞니를 혓바닥으로 쓸었다.
   이야기한 적 없는데요.
   그녀의 대답에 드니가 눈썹을 위로 올렸다. 마치 휘파람을 부는 듯이 입술이 오므라들어 있었는데 오닐은 그 신호를 아차, 실수했네. 정도의 액션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시계는 열 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식사는 훌륭했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느껴지는 알코올에는 실수를 너그러이 넘기게 할 수 있는 호르몬 같은 것이 들어있지 않을까, 오닐은 생각했다.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모든 일은 멋진 일이라고 하더라고요. 드니는 야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야지가 그러더군요. 드니의 속눈썹은 낙타처럼 풍성했는데 어찌나 눈을 가늘게 뜨던지 오닐은 그녀가 눈을 감은 줄만 알았다. 오닐은 테이블 포크로 그릇의 소스를 툭툭 건드리며 대답했다.
   각주를 달지요.
   각주를요? 드니는 의외의 대답을 들었다는 듯 상체를 오닐 쪽으로 기울였다.
   남의 인생에요.
   재밌겠는데요. 드니가 사람 좋게 웃었다. 오닐은 더이상 이야기가 나아가지 않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드니는 언제 실수했냐는 듯 다시는 오닐의 직업에 대해 묻지 않았고 야지가 겨우 술에서 깼을 때는 음식이 대부분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드니와 오닐은 그릇들을 포갰다. 야지가 젖은 행주로 테이블을 닦으려던 차에 종소리가 울렸다. 셋은 동시에 현관을 바라봤다. 오직 부엌에만 불이 켜진 탓에 현관으로 나가는 복도는 지나치게 적적해 보였고 어두웠다. 오닐은 취기를 빌어 농담을 던졌다.
   밤손님이라니. 그녀의 말에 드니가 대꾸했다. 달가울 리가 없지요.
   야지는 서둘러 현관을 향해 걸어갔고 오닐과 드니는 나란히 서서 음식이 말라붙은 그릇에 물을 틀었다. 오닐은 문득, 드니의 손가락이 아주 길다고 생각했다. 길고 마디가 굵어 악기를 다루면 유리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척추가 얼마나 곧게 서 있는가를 가늠해보면 그녀의 건강까지 미루어 볼 수 있었다. 오닐이 연주를 그만두게 된 이유는, 오로지 그녀의 몸이 악기를 위해 준비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피아노를 만드는 장인들은 모든 건반이 연결되어 있는 줄들과 건반 페달의 강도를 잘 여문 근육을 기준으로 삼았다. 오닐이 칠 수 있을 리 없었다. 오닐은 주방 세제 통을 들었다.
   아니요. 드니가 오닐의 손을 잡아챘다.
   드니는 좀 더 옆에 있는 세제 통을 들어 보였다. 오닐이 든 건 싱크대를 뚫는 용도랍니다. 드니가 주방세제를 물에 가득 풀었다. 인위적인 시트러스 향기가 짙게 풍기기 시작했다. 오닐의 침샘에 따뜻한 침이 차올랐다. 귓불까지 뜨끈해질 무렵, 현관문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야지는 여자를 부축하고 있었다. 드니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이다?
   아이다는 부부의 오래된 이웃이었다. 무슨 일이야? 야지는 아이다에게 물었지만 아이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다의 입술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실내임에도 아이다의 입에서 입김이 새는 것만 같았다.
   우리 애가 없어. 그 말이 나오기 전까지 아이다는 무언가를 망설이듯 뜸을 들였다. 아이다는 거의 속삭였다. 형편없이 쉰 목소리였다. 오닐은 반사적으로 아침 뉴스의 기상예보를 떠올렸다. 오늘은 그렇게 추운 날씨가 아니었다. 아이다의 눈동자에는 옅은 공포감이 서려 있었다. 드니가 아이다에게 다가갔다. 루소? 아니면 디터? 드니가 묻자 아이다가 겨우 대답했다.
   디터.
   아이다의 대답에 부부는 침묵했다. 그리고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럴 리가 없다는 눈치였다.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아서. 디터. 디터가 어디에 갔을까? 알아? 아이다는 이제, 거의 드니에게 매달리다시피 했다. 멀쑥하게 키가 큰 탓에 아이다는 허리를 많이 굽혀야 했다. 그럼에도 드니는 바른 자세로 아이다를 지탱했다. 그녀의 팔에 근육이 길게 올라와 있었다. 그에 반해, 얇게 짜인 카디건이 무거워 보일 정도로 아이다는 쇠약해 보였다. 드니가 아이다를 거실 안쪽으로 안내했다.
   일단 앉아, 일단 앉아.
   오닐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다는 그녀에게도 완전히 낯선 사람은 아니었다. 이번 저녁 식사를 할 때도 부부의 이웃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다. 아이다는 이 동네에서도 꽤 젊은 사람으로 남편과의 사이에 두 형제를 두고 있다고 했다. 아이다의 남편은 야간근무가 잦은 간호사였다. 야지가 두툼한 숄을 가져와 아이다의 어깨에 둘렀다. 드니가 오닐을 향해 눈짓했다. 오닐은 조용히 전기 포트에 물을 올렸다. 드니와 만난 것은 오늘이 전부였는데도, 야지보다 더 오래된 친구처럼 익숙한 행동이었다. 드니는 포트 옆에 티백이 있다고 입을 뻐끔거렸다.
   남편에게도 말하긴 했는데. 그런데 지금 응급 환자가 생겼다고, 최대한 빨리 온다고는 했는데. 그런데 날이 너무 추우니까. 아이다는 울고 있었다. 오닐은 티백을 우리다 말고 아이다를 쳐다봤다. 핏줄이 올라온 두 눈에는 끊임없이 눈물이 고였기 때문에 오닐은 아이다가 부부 중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이다의 뺨에는 마른 눈물 자국이 허옇게 올라와 있었고 오닐은 어쩐지 그게 불편했다. 오닐은 우러날대로 우러난 티백을 계속 건드렸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부엌에 자리 잡고 있기를 바랐다.
   겨우 여덟 살인데. 아이다의 입술이 비틀렸다. 아직 집 주소를 헷갈려 한다고. 그래서 잘 적어줬는데 하필 그 노트를 두고 갔다고. 아이다는 모든 문제가 노트에 있는 것처럼 힘주어 말했다. 아이다의 손등뼈가 모두 드러날 정도로 강하게 쥐어졌다가 힘없이 풀렸다. 아이다도 노트 따위는 문제가 아니란 것을 아는 게 확실했다. 오닐은 밤손님이 온 순간부터 느껴 마땅했던 감정을 되짚기 시작했다. 오닐은 이런 모임에 참석해서는 안 됐다. 진짜 사촌도 아닌 먼 친척을 만나러 여기까지 오다니. 속이 살짝 메슥거렸다.
   야지는 아이다를 달랬다. 다른 집에도 가봤어? 학교 근처는? 드니가 물었다. 아래쪽 수로에도, 뒤편 공원에도. 모두. 드니는 조용히 오닐을 돌아봤고 오닐은 구명줄처럼 쥐고 있던 카운터 모서리를 놓아야만 했다. 오닐이 아이다에게 여전히 뜨거운 차 한 잔을 건넸다. 아이다의 손과 오닐의 손이 맞닿았을 때, 오닐은 그 손이 차갑고 축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온도였지만 당황스러웠다.
   방과 후 교사가 하는 말이, 디터는 오늘 방과 후 수업을 듣지 않았대. 경찰도 조금 더 기다려보라고. 아이다가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울음은 점차 커지고 낮아졌는데 뱃고동 같은 소리가 났다. 오닐은 그곳에서 몇 걸음 떨어져 그들을 바라보는 것 외에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오닐은 그들과 완전히 다른 레이어였다. 겹치면 겹쳐지겠지만 오닐이라면 절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과 오닐이 같은 레이어에 있기 위해서는 사이에 공통점이 필요했다. 제대로 된 혈연 혹은 친분 따위가 아닌, 정말로 필연적인 것이.
   오닐은 그것을 찾을 수 없었다.
   남편이 집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아이다는 부부의 집을 떠났다. 이윽고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동네에 울려 퍼졌다. 창밖으로 빨간 불빛이 끊임없이 돌아갔다. 복도가 번쩍하고 붉어졌다가 금방 사라졌다가를 반복했다. 탁하고 따뜻한 전구 아래서 서로의 보조개마저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모였던 셋은 이제 모두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가끔 벽 안의 파이프에서 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니가 입을 뗐다.
   오닐은 뭐라고 달겠어요? 갑작스러운 호명에 오닐은 섬뜩함마저 느꼈다.
   디터에게 무슨 각주를 달겠냐는 말이에요.
   지금 농담합니까? 오닐은 인상을 찌푸렸다.
   테이블에는 그동안 그들이 흘렸던 음식 부스러기들과 약간의 소스들만 남았다. 야지는 마른행주로 테이블을 마저 닦아냈다.

*

   부부와의 저녁 식사 후를 기점으로, 오닐은 어떠한 초대에도 응하지 않았다. 야지는 두 번 정도 오닐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오닐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가며 초대를 거절했다. 아무리 쾌활한 야지라도 연속된 거절을 좋아하진 않았다. 그에게서 점차 연락이 뜸해지더니 요즘에는 아예 연락이 오지 않았다. 풍문으로 야지가 새 모임에 자신의 사촌이라는 친척을 소개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오닐은 간간히 떠오르는 아이다의 모습과 그녀에게 어떤 각주를 달겠냐고 묻던 드니의 무례함이 떠올라 밤잠을 설치곤 했다. 렘수면 속에서 드니는 아름다운 그랜드 피아노를 만드는 장인이었다. 드니가 허리를 굽혀 피아노의 줄을 수평으로 배열했다. 굵은 철 덩어리에서 뽑은 쇠줄은 아주 단단하고 길었다. 드니는 쇠줄을 연속으로 꼬고 비틀어 더욱 튼튼하고 강한 쇠줄을 만들어냈다. 드니는 카메라를 쳐다보듯 정확히 오닐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한 줄은 깊은 베이스음을 만듭니다. 쇠줄을 비트는 이유는 줄이 풀려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은 절대 밟지도 못할 페달이 여기서 만들어지죠.
   얕은 잠을 자고 난 후에, 오닐은 무언가를 떨쳐내려는 사람처럼 일에 집중했다. 그녀는 일은 정해진 양을 정해진 시간에 하는 것이라는, 혹은 오닐에게 오는 일감은 반드시 오기 마련이라는 주장을 뒤집었다. 오닐은 사와에게 더 많은, 어려운 일을 달라고 요구했다. 사와는 답지 않게 그녀의 안부를 물었지만 오닐은 이상 없다는 대답을 반복했다.
   사와에게 보낸 메일이 반송되는 일은 없었다. 오닐이 구현해낸 야트막한 산 근처에서 싱크홀이 생겼고 간단한 선으로 이루어진 반도체 공장이 폭발했다. 정확한 정보 없이도 캐릭터를 어디에서 떨어뜨려야 하는지 오닐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픽들은 점차 단순해졌지만 그렇기에 명징했다. 예를 들어 사상자가 스무 명 남짓이다, 하면 스무 명 남짓을 그리면 돼. 사와는 헛소리를 한 것이 아니었다. 오닐은 남짓의 개념을 깨우치는 중이었다.
   작업을 해치우고 나면, 오닐은 멍하게 한 곳만을 바라봤다. 절전 된 모니터의 검은 화면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것, 그 안에서는 얼굴의 명암을 구분하기 힘들다는 것은 새삼스레 오닐이 인식하게 된 정보였다. 오닐은 꾸준히 그래프를 만들었다. 3D 캐릭터들이 수십 명 떨어지거나 쓰러지거나, 치여버리는 애니메이션. 자꾸만 폭발하는 건물과 무너지는 지반, 오닐이 만들어낸 간략한 것들 중에 가장 질감이 두꺼운 것은 오직 인터뷰이뿐이었다. 재난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 그들은 살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닐이 만든 그래프가 더 나은 표현물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도넛 모양으로 구멍이 뚫린 원 안에서 그녀는 생존자와 사망자, 범죄율과 검거율, 사고 빈도와 안전 측정도를 채워 넣는 것이 자신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일은 살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직업을 가진 후로 단 한번도 의심해본 적 없던 건 일에 대한 자신의 적성이었다. 낯선 감각은 불쾌함을 끌고 오기 마련이었다.
   오닐은 메일함을 갱신했다. 그녀는 사와에게서 온 마지막 메시지를 소리 없이 발음했다. 잘했어. 그녀는 입을 다문 채로 혀를 굴렸다. 대체 뭘?
   드니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이른 저녁이었다. 모르는 전화번호가 휴대전화 액정에서 깜빡였고 오닐은 두 번 이상 낯선 전화를 피했다. 그러나 전화는 끈질기게 걸려왔다. 오닐이 전화를 받았을 때 드니의 목소리는 알토처럼 낮은 톤을 냈다. 드니는 날씨를 말하듯 오닐의 안부를 물었고 오닐은 드니의 안부를 되묻지 못했다. 그 대신 옅은 원망을 내비쳤다. 왜 그날 그런 식으로 무례했냐는 질문을 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였다. 며칠 전에 읽었던 책부터 몇 년 전에 본 영화, 손을 놓은 지 오래된 철학까지 꺼냈지만 드니는 쉽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기가 질린 오닐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오닐은 자신이 신뢰해왔던 이론을 되새겼다. 톱니와 톱니가 지나치게 맞붙어 돌아가지 않을 톱니바퀴는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을 것이고,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진 노인에게는 방랑하는 유전자가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닐은 피아노를 칠 수 없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고 아이다의 자식은 언젠가 실종될 사람이었던 것일까. 그녀는 파문처럼 번지는 질문을 억제하려 노력했다. 오닐의 이론은 원인과 결과가 뒤집힌 모양을 하고 있었다.
   뉴스는 외국으로 파견 나간 병사들이 민간인들을 죽인 사건을 조명하고 있었다. 자료화면은 헬기에 달린 카메라가 대신하고 있었다. 화면은 녹색과 노란색을 탁하게 섞은 색이었다. 어째서 저런 색이 나오는 걸까, 카메라가 저렇게 느려서는 안 되는데. 민간인 학살 장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주 작고 까만 볼링핀들이 건물을 메꿨다가 사라졌다. 뉴스는, 이제 모여 있는 볼링핀들을 빨간 사각형으로 가둔 동영상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아나운서는 올바른 억양으로 동영상에 대한 설명을 첨부했다. 열두 명의 민간인들이 살해당했다는 것입니다. 잘했습니다. 오닐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오닐은 머리를 흔들었다. 골이 아파올 정도로 털어냈다. 머리에 위치한 혈관이 잔뜩 부풀어올라 이리저리 혈액을 전달하자 그녀의 얼굴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오닐은 귀에서 물을 뺄 때와 같이 귀를 쳐올렸다. 그러자, 귀에서 뭔가 빠져나간 느낌이 났다. 동시에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포트폴리오 만들어보지 않을래? 사와는 짧게 깎은 손톱으로 오닐의 테이블을 두들겼다. 귀 안을 파고드는 소리에 오닐은 메일함과 메신저를 확인했지만 모두 읽은 것들이었다. 잠시 후, 다시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그제야 그것이 초인종인 것을 깨달았다. 밤손님은 달갑지 않았다.
   사와는 거친 입자로 간 원두 한 팩을 오닐의 손에 건넸다. 그리고 곧 자신의 주머니에서 부서진 쿠키가 든 비닐봉투도 들려주었다. 오닐은 사와가 사 온 원두로 커피를 내렸다. 오랜만에 맡는 냄새였다. 그녀와 사와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오닐은 테이블 한가운데를 바라보았다. 무슨 포트폴리오요? 오닐이 묻자 사와는 머그잔의 커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잔의 주둥이를 한 바퀴 문질렀다. 부드럽고 매끈한 소리가 났다. 팀에 결원이 생겼어. 육아휴직인가 뭔가를 낸 모양이야. 아무래도 잘리겠지. 정직원으로 들어갈 순 없지만 혹시 모르니까. 월급도 괜찮고. 그리고 사와는 그동안 완성했던 모든 작업들의 저작권이 자신에게만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했다. 둘의 장단점을 서로가 보완해줄 수 있을 거라고도 덧붙였다. 오닐은 발끝을 한껏 오므렸다. 사와 혼자서도 잘하잖아요. 그녀의 말에 사와가 작은 접시 안에 담긴 쿠키를 꾹 눌러 부쉈다. 너도 잘해. 사와의 잔이 비자 오닐은 커피가 담긴 포트를 가져와 사와의 머그잔에 부었다. 실내용 슬리퍼의 값싼 합성 가죽이 말끔한 바닥에 끌리자 신문지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 커피를 좋아하지 않나 보네. 사와의 말에 오닐이 대답했다. 너무 마셨어요, 전에. 오닐은 이제 후추통을 바라보고 있었고 사와는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했다. 면접은 형식적인 거라고 했어. 언제 내정자가 되어 보겠어? 파이오비치 삼 번가야. 거기 어렵다, 너. 사와의 실내화 소리가 사라지자 도어락이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기계와 기계가 톱니와 톱니 사이를 축으로 도는 소리였다.
   오닐은 그동안 그녀가 만든 작업들을 잘 정리해왔다. 어딘가의 정직원이 되고자 함은 아니었다. 오닐의 일을 모르는 누군가에게 보여줄 심산도 아니었다. 그저 오닐은 바탕화면의 아이콘이 지저분한 것이 싫었을 뿐이라고 판단했다. 폴더의 이름은 생성 직후의 그것과 같았다. 어떤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오닐은 식탁을 치웠다. 식기들을 설거지통에 모두 몰아넣었다.

*

   오닐의 옷에서는 뜨거운 냄새가 났다. 집 어딘가에 분명히 있는 다리미를 찾느라 시간을 허비했지만 오닐은 옷을 다렸다. 잘 다려지지 않은 부분은 하의 속에 넣었으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오닐이 사와에게 전화를 한 밤, 사와는 자리를 만들어준 사람에게 좋은 선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멋진 곳에서 식사를 대접한 후, 보기 좋은 선물을 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오닐은 불현듯 떠오르는 레스토랑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거기 석양도 잘 들 거예요. 사와는 면접 전날, 오닐이 알려준 레스토랑에 갔다 왔다.
   파이오 비치 삼 번가로 가는 버스 노선은 신비로울 정도로 많았다. 정류장에 붙어 있는 노선도 어디에나 이름이 명시되어 있었다. 오닐은 정류장 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제일 처음 정류장에 도착한 버스를 타고 맨 뒷좌석에 앉았다. 버스는 조금 거칠게 움직였다. 버스 창밖으로 팔꿈치를 내놓은 기사가 클랙슨을 내리쳤다. 귀가 멍해질 정도로 길게 누르고 소리가 끊어지면 또 눌렀다. 앞의 자동차가 움직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기사는 마침내, 창밖으로 머리를 빼고 고함을 질렀다. 욕을 하는 것 같았다. 버스의 복도는 기사를 향해 갈수록 좁게 보였다. 오닐이 내려다보는 버스 좌석에는 몇몇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오닐은 오닐이 앉은 좌석을 눌렀다. 생각보다 딱딱하군. 그리고 신음했다. 이 색이 아니었다.
   버스가 출발했다. 오닐은 머릿속으로 색상표를 떠올려 좌표를 찾았다. 오닐은 그동안 잘못된 색으로 버스를 칠하고 있었다. 두 달 전 만든 애니메이션도 그랬다. 술 취한 남자가 버스에서 기사를 폭행한 사건이었다. 그래픽으로 구현한 남자는 온통 검은색이었고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버스는 진짜 같아야 했다. 그래서 오닐은 버스 사진들을 검색해 찾아냈고 버스 복도와 벽면, 손잡이와 의자에 채색을 했다. 사건에 버스가 중첩될 때마다 오닐은 같은 색을 사용해왔다. 이제 와서 색이 틀린 것을 알게 되다니. 버스 안의 전광판은 또렷한 종소리와 함께 다음 정류소가 파이오 비치 삼 번가라는 정보를 띄웠다. 누군가 하차 벨을 눌렀다.
   거리는 거대했다. 그리고 높았다. 오닐은 가장 마지막으로 정류소에 내렸고 많은 사람들이 버스에 올라탔다. 오닐은 고개를 꺾어 건물들을 올려다봤다. 어느 건물은 통유리로 만들어졌고 계단은 비싸 보이는 암석으로 쌓아올렸다. 오닐의 어깨와 부딪힌 행인이 오닐을 돌아봤다. 오닐은 오닐의 어깨를 매만졌다. 트램펄린처럼 오닐의 피부는 금방 탄력을 회복했지만 여전히 얼얼했다. 오닐은 사와가 알려준 건물을 향해 걸었다. 이름을 크게 박아넣고 이해할 수 없는 조형물을 세워 둔 건물을, 오닐이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오닐은 오닐의 정강이와 허벅지 뼈 사이의 연골을 느꼈다. 부드럽다가도 삐걱이는, 근육이 바짝 선 하체에서 빳빳이 힘이 들어간 척추까지. 오닐의 호흡이 가빠졌고 심장은 열심히 자신의 역할을 해냈다. 숨이 머리끝까지 찼기 때문에, 오닐은 잠깐 걸음을 멈췄다. 아스팔트의 질감은 불규칙했고 색은 통일감이 없었다. 오닐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메조소프라노의 목소리가 들렸다. 드니였다. 오닐은 눈에 보이는 아무 계단에나 엉덩이를 대고 고개를 가랑이 사이에 파묻었다. 오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드니 역시 그랬다. 식은땀이 나 겨드랑이가 축축해졌다. 오닐은 몸의 모든 땀이 식을 때 드니에게 물었다.
   왜 그랬습니까?
   비유나 돌려 말하기 같은 것은 없었다. 오닐은 쇠줄보다 단단한 목소리를 냈다. 드니는 천천히 그에 대한 답을 들려줬다. 오닐은 이미 끊어진 전화를 붙들고 버스 정류장까지 걸었다.

전미경

게임 심즈를 하다가 지하의 냉장고와 1층의 냉장고가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심들은 각자 다른 냉장고에서 다른 음식을 꺼내며 서로의 손을 마주잡기도 할까? 같은 그릇의 끄트머리를 집기도 할까? 당분간은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2020/04/28
2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