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기 전에는 살지 않았다. 태어나지 않았다.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런 생각들을 나열하는 밤. 이런 생각들을 나열하다 보면, 내 생각은 이생을 넘어 전생에 닿을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너 전생 같은 거 믿어?

   내가 물었고, 내가 묻기 전에 우리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전생을 믿든 그렇지 않든, 한 번쯤 전생체험을 해보는 건 재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렇게 생각난 김에 당장 전생체험을 해봐도 좋을 것 같았다. 유튜브로 전생체험을 할 수 있다고 하던데. 나는 말했고, 너는 전생 같은 게 어디 있냐고, 그런 건 믿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런데 유튜브에 정말 그런 게 있냐고, 내게 물었다. 결국 우리는 전생이 있든 없든, 우리가 지금껏 체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체험해보는 건 즐거운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러, 함께 전생체험을 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몸을 펴고 바로 누워 함께 눈을 감고.

   자, 이제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몸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끝없이 펼쳐진 대지를 상상해보세요. 그곳을 한발 한발 걸어갑니다.

   유튜버의 말에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있었을 테지만, 그래도 걷다가, 걷다가, 걸어가다가, 한 번쯤 우연히 만나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함께 걸어도 좋을 것 같다고. 걷다가, 걷다가, 걸어가다가, 이제 우리는 이생에서 전생으로 진입한다. 열부터 하나까지 세어봅니다. 열, 아홉, 여덟 (……) 어쩌면 우리는 전생에서 또 만날 것이다.

*
   우리는 종종 만났다. 종종 만나기 전에 우리는 자주 만났다. 좋았다. 너는 산책을 좋아했고, 하천을 따라 걷다가 물속을 배회하는 물고기를 보게 되는 우연을 좋아했다. 너는 산책을 나온 개들과 길에 사는 고양이들을 좋아했고, 그들도 너를 좋아했다. 나한테서 개 냄새 나나 봐. 고양이가 또 나를 찾아왔네. 너는 그들에게 인기 있었고, 나는 그들과 대화를 나눠본 적 없었지만, 그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너는 자주 소리 없이 웃고, 나는 너의 미소가 좋았다.

*
   젊은 미소. 아빠가 좋아하는 곡이었다. 엄마 말에 따르면, 아빠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나, 노래를 즐겨 부르진 않았다고 했다. 노래방에 가면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 딱 한 곡만 불렀어. 늘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노래방에서는 노래를 안 하더라. 내가 안 보는 줄 알고 집에서 혼자 흥얼거린 적도 많았다고. 어쨌든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었어. 웃을 때는 옷소매로 얼굴을 가리거나 고개를 숙이는, 그런 사람이었어. 엄마는 아빠와 함께 산지 한참이 지나서야 아빠가 깔깔 소리 내어 웃는 걸 봤다고 했다. 텔레비전 보다가 혼자 웃더라고. 나랑 대화할 때는 한 번도 그렇게 크게 웃은 적 없어. 엄마는 그때 아빠가 참 별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어 웃기지도 않았다고 했다. 엄마는 이제 아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그래도 가끔 네 아빠가 수줍게 웃던 게 생각나. 엄마는 아빠가 죽은 후, 아빠 얼굴은 희미하게나마 기억나지만, 목소리는 도무지 기억해낼 수 없다고 했다.

*
젊음아 퍼져라.
내 꿈 다시 피어나면.
너와 나의 영원한 젊은 미소.1)

*
   유튜브를 떠돌다 보면, 떠돌다가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나는 방금 전까지 90년대 양준일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80년대 MBC 대학가요제 영상을 보고 있는 건지. 뉴트로니 뭐니 해서, 유튜브에는 유물들이 쌓여있었다. 노다지. 강변 가요제. 노다지. 젊은이의 가요제. 노다지. 해변 가요제. 노다지. 그 시절 젊은이라면, 모두 가요제에 몰려들었던 것 같았다. 그 시절 영상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모두가 젊고 모두 다 젊어서 행복해 보였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그 시간 속에서 나의 부모는 만났을 것이다.

*
   우리는 만난다. 종로 피카디리에서 만난다. 너의 부모님이 삼십 년 전 처음으로 데이트를 했다는, 그곳에서 우리는 만난다. 만나서 조금 걷는다. 너는 이제 일을 하고 있고, 아직 일이 익숙하지 않지만 그래도 일하지 않을 때보다는 일을 하는 지금이 더 좋다고 말한다. 나도 이제 막 일을 시작했다. 너의 부모님은 이제 곧 퇴직을 해서 더이상 일을 못하게 되었는데, 계속 일을 하고 싶어하신다. 이제 겨우 내가 취업하니까, 이제는 부모님 취업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야. 부모님은 대출받아서 카페를 차리고 싶어하는데, 이걸 어떻게 하지. 장사가 쉬운 게 아니잖아. 그런데 그 일을 안 하면 뭘 하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나는 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고. 이제 부모님이 뭘 할 수 있는지, 해야 하는지, 나는 말해드릴 수가 없어. 부모님은 의욕에 넘치는데, 나는 왜 매사에 이렇게 의욕이 없을까. 나 하나도 감당하기 힘든데. 한 번 실패하면, 한 번 실수하면, 모든 게 무너져 내릴 것 같아.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인생이 망가질까 봐. 너는 여기까지 말하고, 잠깐 쉰다. 내 얼굴을 본다. 나는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내렸던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창업은 절대 하지 말라고 하니까, 우리 아빠가 그러더라. 자기 아직 젊다고. 그럼 또 내가 할 말이 없지. 하여튼 창업은 창조보다 어려운 거야. 너는 오늘따라 말을 길게 하고. 우리는 계속 걷는다. 걷다 보면, 청계천이 나올 것이고 우리는 청계천을 따라 걸을 수도 있을 것이다.

*
   뇌를 꺼내서 냇물에 씻어버리고 싶어. 동네 아주머니가 우리 엄마에게 말하고, 그 말에 엄마가 웃는다. 모든 기억을 다 지우고 싶어. 그 말에 엄마가 또 웃는다. 아주머니는 자기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사는지, 이럴 줄 알았다면 결혼 같은 건 애초에 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아주머니가 슬픈 건지, 화가 난 건지. 나는 모르겠다. 엄마는 웃으며, 자기는 종종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파를 썰다가 식칼로 가슴팍을 찍고 싶을 때가 있다고 말한다. 나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
   너 초등학교 보낼 때,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몰라. 조만한 게 자기 몸뚱이보다 큰 가방을 매고. 낑낑거리면서. 학교 정문 앞에서 네가 엄마 손을 놓으면서 했던 말 기억나니. 여기서부터는 자기 혼자 갈 수 있대. 애기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아주 똑똑해가지고. 어릴 때부터 눈빛이 반짝거렸다고. 눈에 총기가 있다고 하잖아. 나는 말했다. 나 원래 똑똑하잖아. 나도 내가 참 똑똑하다고 느낄 때가 많아. 엄마는 내가 자기를 닮아서 똑똑하다고 했다가, 아빠는 똑똑하지 않다고 말하다가, 혼자 화가 나서 아빠를 욕하다가, 말해봤자 달라질 거 하나 없는 이야기, 그러니까 왜 바보같이 그 인간하고 결혼을 했을까, 왜 그러고 살았을까, 그런 말들을 나열했다. 에이, 그래도 너를 낳았으니까 됐어. 네 아빠를 못 만났다면 너를 못 만났지. 엄마는 바보 같은 소리를 했다. 내가 말을 배울 무렵이었던가. 엄마는 늘 식탁 의자에 앉아서 울고 있었다. 반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또는 더이상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처럼, 그렇게 거기 앉아있었다. 나는 엄마를 위로할만한 말을 하고 싶었고, 그런 말을 하기 위해서는 말을 배워야 했다. 좋은 말. 나는 엄마에게 다가가 작은 손으로 엄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남자를 바꿔. 그날 이후, 엄마는 자기가 천재를 낳았다는 생각으로 평생을 살았다.

*
   내가 바보였다. 입사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다. 막상 일을 시작해보니, 내가 회사에서 하는 일은 내가 생각했던 그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그 일이든 아니든, 입사지원서를 넣었을 것이다. 일을 따질 형편도 아니었다. 일을 배워야 하는 건 맞지만, 이렇게 온통 모르는 것들뿐이라니. 하나부터 열까지 배워야 할 것들뿐이었다. 오늘 하루도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출근했다가, 도대체 지금까지 뭘 배운 거지,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자책하며 퇴근하는 날이 반복되었다. 그 무렵, 나는 엄마와 자주 다투게 되었는데, 엄마가 갑자기 음악을 배우고 싶다고 한 것이 화근이었다. 엄마는 내게 전화를 할 때마다 그 얘기를 꺼냈고, 나는 갑자기 이러는 엄마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냥 지내던 대로 지내지 갑자기 왜 이래. 그냥 지낼 만큼 충분히 지냈어. 나는 더이상 다투고 싶지 않아, 그냥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점심시간을 이용해, 엄마가 다닐만한 대학교를 검색해보았다. 막상 대학교를 찾다 보니, 이왕이면 엄마를 좋은 대학교에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이내 등록금에 질려버렸다. 안 되겠다 싶어서 평생교육원을 알아보다가 등록금에 또 질려버렸다. 국립이든 사립이든. 이러나저러나 무언가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목돈이 필요했는데, 애써 목돈을 만들어가며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는 건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짜 새끼들. 갑자기 제도권 교육에 대한 환멸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래봤자 나만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서울에서 사는 일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고 말하려다가, 요즘 같은 세상에 구태여 대학까지 가서 공부할 필요가 뭐가 있냐고 말했다. 엄마는 그럼 학원이라도 다녀보고 싶다고 했는데, 나는 그 말을 칼같이 잘라버렸다. 사교육은 안 돼.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을 뱉어버리고, 이내 민망해졌다. 그 잘난 대학 가겠다고. 부모 돈,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학원에 다녔던 나였다.

*
   엄마는 하고 싶은 게 많았다. 한때는 영어를 배우겠다고 영어학원을 다녔고, 한때는 보디빌더가 되겠다고 헬스장을 다녔고, 한때는 프로 골프 선수가 되겠다고 골프장을 다녔고, 그 모든 곳에 어린 나를 데리고 갔다. 엄마가 그 모든 것들을 왜 더이상 하지 않게 되었는지, 지속적으로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어느 시점이 되면 엄마는 모든 것을 그만두었다. 나는 엄마가 끈기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엄마 말에 따르면, 자기는 조금만 해도 웬만하면 남보다 잘해서 금방 흥미가 떨어진다고 했다. 그러다가, 아빠가 초를 쳐서 그런 거라고 했다. 그러다가 아빠가 자기를 무시해서 그런 거라고 했다. 개뿔. 잘난 것도 없으면서 나를 무시했어. 결혼하기 전에는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 내 말은 듣지도 않아. 들어주지도 않는다고. 그러다가 갑자기 자기 탓을 했다.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
   엄마는 엄마 되기 전에 엄마가 아니었다. 엄마는 김미경이었다. 그는 스물아홉 살에 딸을 낳았고, 딸을 낳기 전에는 아들을 낳을 줄 알았다. 그는 스물일곱 살에 결혼을 한다. 결혼하기 전에는 결혼하지 않았고, 결혼하게 될 줄 몰랐다. 그는 스무 살에 대학 캠퍼스에서 정명일을 만난다. 정명일은 음악 동아리 회장으로, 친구들과 함께 대학가요제에 나갈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노래를 하거나 기타를 치거나 드럼을 쳤던 건 아니었고, 그는 밴드의 공연을 기획하고 군기를 잡으며 팀을 이끄는 일을 했다. 그러니까 프로듀서 역할을 하고 있던 것인데, 김미경은 평소에 수줍음이 많던 정명일이 밴드를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보고 그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옷을 잘 입고, 친구들 누구에게나 밥을 잘 사던, 언제나 주변에 친구가 많은 사람. 건아들과 활주로의 음악을 좋아하고, 마그마에 대해 이야기하던 사람. 모두가 그를 부잣집 아들로 알고 있었다. 정명일이 군대에 입대한 해, 김미경은 돈을 벌기 위해 대학을 자퇴한다. 그는 대학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대학가 다방에서 커피를 사 마셨다. 그러니까 그는 산울림의 음악이 흐르는 그곳에서 커피를 사 마셨는데, 어쩐지 눈물이 흐를 것 같았고 눈물을 흘리면 궁상맞아 보일 것 같아 커피를 다 마시지도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다방을 떠나며 생각한다. 자기가 대학에서 한 일이라고는 정명일을 만난 것뿐이라고. 마치 정명일을 만나러 대학에 간 것 같다고. 김미경은 정명일을 만나기 전에는 그를 몰랐고, 그를 만나게 될 줄 몰랐다. 모르고 살았다. 김미경은 어릴 적부터 가수가 되고 싶었다. 가수가 되려고 집을 나갔다가, 첫째 오빠에게 잡혀서 죽도록 맞았다. 죽도록 맞으면서 들었던 말. 천박한 짓하고 돌아다니지 마라. 죽도록 맞기 전에 그는 단지 노래를 하고 싶었다. 춤을 추고 싶었다. 자유롭고 싶었다.

*
   청춘을 다 잃었어. 청춘을 다 잃었다고. 엄마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나는 청춘이 그렇게 좋은 건가 싶었다. 도대체 청춘이 뭐라고. 뭘 할 수 있다고. 엄마는 자신의 젊은 날을 그려보면, 머릿속에 정명일밖에 없다고 했다. 나는 나의 젊은 날, 그러니까 지난 이십 대를 그려보면, 머릿속에 남는 건 대학과 휴학과 아르바이트뿐이었다. 어쩌다가 대학을 8년 동안 다녔는지 모르겠지만, 졸업과 함께 남은 건 빚뿐이었고, 이제 내게 남은 일은 더 큰 빚을 지거나 빚을 갚는 일뿐이었다. 그래도 앞으로 내가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차피 사는 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돈 같은 건 많이 벌 수도 없을 테니, 이제는 돈 말고 다른 가치를 추구하며 살기 좋다고, 그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젊은이. 요즘 젊은이들은 왜 투쟁을 안 해. 싸우지를 않아. 혁명을 몰라. 요즘 젊은이들은 선언하지 않고, 세상을 뒤집을 생각이 없어. 생각이 없어. 요즘 젊은이들은 낭만이 없고, 도전을 안 해. 젊은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 중에 젊은 사람은 없었다. 엄마는 청춘을 잃었다고 했지만, 나에게 청춘은 언제 잃어도 그만이었다. 그렇지만 젊음이 그렇게 좋은 거라면, 나도 어디 한번 젊음을 느껴보고 싶었다.

아 활짝 웃으며 젊음을 얘기하자
아 가슴을 펴고 젊음을 얘기하자
젊음을 느껴보자
아 아 아 아 아 아 아2)

*
   엄마에게도 엄마가 아닐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가 있었다. 김미경은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무작정 서울로 떠난다. 명동에서 우연히 운동권 학생을 만났고, 종종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폭격 소리와 비명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 애는 걸핏하면 연락도 없이 사라졌고, 어디 가서 죽었나보다, 끌려가서 죽었나보다, 내가 그러고 있으면 갑자기 또 나타나고 그랬지. 그때 정명일이 서울까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엄마는 말을 더 이어가지 못하고. 어쨌든 그 촌놈이 서울까지 올라와서 나를 끌고 내려갔어. 그 얌전하던 사람이 나한테 화를 냈어.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한마디도 안 했어. 라디오에서 유미리 노래가 나오더라. 내가 그건 잊지도 않아. 유미리 아나. 내 젊음의― 빈 노트에― 무엇을 그려야 할까―3) 이렇게 부르는 건데, 모르나. 엄마 그 노래 잘 부르는데. 가끔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 6월 항쟁 때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나 그렇게 아기인데. 내가 말하자,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너 어릴 때도 많이 불러줬는데, 모르나. 이걸 모르나.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집을 못 나가서 안달이었지. 엄마가 집으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면, 너는 없었어. 엄마는 어떻게 하다가 자기가 결혼까지 하게 된 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
   그런데 생각해보면, 네 아빠 만나지 않았더라도 나는 어차피 이렇게 되었을 거야. 사실 엄마 사기당한 적도 있어. 서울에 있을 때 음반 기획자를 만났는데, 내 목소리가 참 좋다고 같이 작업을 하면 좋겠다는 거야. 그래서 충무로에 있는 스튜디오에 가서 녹음도 하고 그랬다고. 그런데 어느날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거야. 자기가 음반을 왜 내주는지 아냐고 나한테 묻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랬지. 당연히 제가 목소리가 좋고, 노래를 잘하니까요. 근데 아니었어. 자기랑 안 만나주면 음반도 안 내주겠대. 할 말을 잃었지. 그날 그는 스튜디오를 나와 정처 없이 걸었다고 했다. 그는 명동까지 걸었는데, 거리는 온통 넥타이를 맨 회사원들과 머리에 띠를 두른 대학생들로 가득했고. 그들 모두 한목소리로 호헌철폐를 외치고 있었다고. 그 속에서 자기는 대학생도 아니고, 회사원도 아니었다고.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그 거리 위에 혼자 버려진 기분이었다고. 갑자기 자신이 너무도 보잘것없이 느껴졌다고. 심장이 미치도록 뛰었는데 그게 분노인지, 부끄러움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그때 머리 위로 최루탄이 터졌어.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하는 단발머리 학생이 얼핏 보였으나, 이내 연기 속으로 사라졌고. 그는 혼자서 뿌연 연기 속을 헤매다가, 죽기 살기로 그곳을 빠져나왔다고. 죽기 살기로 그곳을 빠져나오는 동안, 생애가 다 지나가버린 것 같았다고. 어느새 폭삭 늙어버린 느낌이었다고. 결국 내가 네 아빠한테 전화했어. 오빠한테 전화하면 또 맞을까 봐.

*
   하나, 둘, 셋 하면 깨어납니다.
   하나, 둘, 셋.

   눈을 떴을 때, 텅 빈 천장이 보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네가 하품을 하고 있었다. 나는 너에게 전생에서 뭘 봤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안 봤어. 전생에 안 갔거든. 그냥 눈만 감고 있었어. 잠들 뻔했어. 너는 전생에 다녀왔어? 나는 내가 눈을 감고 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려다가, 그냥 한마디만 했다. 끔찍했어.

*
   하천을 따라 걷다가, 너는 물속을 배회하는 물고기를 발견했다. 서울에 사는 물고기들은 산소가 부족해도 잘 견디는 아이들이야. 네가 말했고, 네가 말할 때, 물은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우리는 물이 흐르는 반대 방향으로 걸었고, 걸을 때, 노부부가 우리를 지나쳐갔다. 나이 들어서도 둘이 함께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나는 언젠가 동네에서 만났던 아주머니가 생각났고, 아주머니에게 안부를 묻고 싶었다. 뇌를 꺼내서 냇물에 씻어버리고 싶어. 아주머니의 아저씨는 늘 술에 취해 있었다. 집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알면 안 됐다. 물의 상류에서 하류로, 뇌같이 생긴 것이 떠내려오고 있었다. 떠내려오다가, 떠내려갔다. 사람들이 쓰레기를 너무 아무 데나 버려. 네가 말했다. 우리는 물에 떠밀려가는 쓰레기로부터 멀리, 아주 멀리 떠나려고, 더 걸었다. 함께 걷고 있으니, 부부같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우리는 오랜 시간을 함께하면서도 결혼 이야기는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우리 둘 중 누군가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면 우리는 결혼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고민하지 않더라도, 만약 우리가 결혼을 하게 되면 어떻게 살아갈지, 훗날의 모습을 그려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 둘 중 누구도 먼저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길 바라면서. 소망하면서.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곳에 이르길 바라면서, 걷고 있었다.

*
해야 떠라 해야 떠라
말갛게 해야 솟아라
고운 해야
모든 어둠 먹고
앳된 얼굴 솟아라4)

   만약, 엄마가 대학을 계속 다녔다면 엄마는 대학가요제에 나가게 되었을까. 그 시절 젊음의 축제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 언젠가 사진 속에서 봤던 엄마의 앳된 얼굴. 어쩌면 엄마는 그 얼굴로 무대 위에 올라, 기타를 치고 소리를 내지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
   노래방을 나오며, 엄마는 내게 물었다. 엄마 노래 괜찮았어? 내가 엄지를 보이며 대답했다. 그럼, 마그마 터졌어. 엄마가 조하문이야. 엄마가 마그마지. 엄마가 건아들이고 엄마가 활주로야. 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도무지 말이 안 통한다고 했다. 너 장난치지 마. 아니, 내가 무슨 장난을 쳐. 진심인데. 그런데 옛날 밴드들은 참 이름도 엄청나다. 세상 다 뒤집어놓을 것 같은 이름이잖아. 실제로 그랬어. 모두 운동권이고 모두 시인이었지. 그리고 엄마는 내게 하고 싶었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내가 찾아봤는데 서울 가면 그룹 레슨이 있대. 그건 금액도 그렇게 안 비싸. 엄마도 아르바이트하잖아. 그 정도는 내가 낼 수 있겠더라고. 전화해보니까, 내 또래 사람들도 꽤 있대. 수업해주시는 분도 돈이 없어서 학원은 못 차리고, 일주일에 몇 번씩 연습실 대여해서 수업하는 것 같더라고. 엄마 거기 가서 새로운 친구도 사귀고 그러고 싶은데. 그럼 안 되나. 내가 이기적인 건가. 엄마는 내게 구구절절 설명했다. 엄마가 구구절절 이야기할만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되돌릴 수 있는 모든 걸 되돌리고 싶었다. 엄마, 그런 얘기 다 안 해도 돼. 정말로, 그런 얘기는 다 안 해도 되었다. 엄마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잘됐네. 엄마 수업 끝나고 나 회사 끝나고, 둘이 만나면 되겠네. 맛있는 것도 먹고 그럼 되겠다. 엄마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근데 너 그런 옛날 사람들 어떻게 알았니. 나는 유튜브에서 봤다고 했다. 세상 모든 젊음이 그곳에 영원히 봉인되어 있는 것 같아.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그런.

*
   점심시간에 잠깐 나와, 시외터미널에서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젊은 시절에 서울에 산 적이 있어서 서울 지리를 잘 알고 있다고 했지만, 엄마가 그렇게 말하니까 엄마가 더 걱정이 되었다. 서울이 너무 복잡해서. 서울에서 헤매지 않고 잘 다닐 수 있는지. 혹시 길이라도 잃을까 봐. 연습실이 있는 곳까지 함께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 문 열리고, 닫히고 (……) 다시 열린다. 지하철역을 나오며 내가 말했다.

   엄마, 선생님 말 너무 잘 듣지 말고……

   시간이 별로 없었다. 지금 다시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야만, 늦지 않게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엄마, 나 회사 바로 들어가봐야 해서 이만 가야 될 것 같아. 내가 초조해하니, 엄마가 얼른 가보라고 했다. 얼른 갈 수가 없었다. 엄마, 엄마. 이 길로 가다가, 저기 맥도날드 앞에서 우측으로 가면 된다. 알겠지? 구글 맵 보고 잘 가봐. 엄마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얘가 왜 이래. 엄마는 자기가 알아서 갈 수 있다고 말하며, 내 손을 놓았다.

   가.

   엄마는 나에게 가라고 했지만, 나는 역 앞에 서서 갈 수가 없었고. 정작 가는 건 엄마였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씩씩하게 걸어갔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본다. 한발. 한발. 그는 내게서 멀어지고. 한발. 계속 앞으로 걸어간다. 한발. 걸어간다. 한발. 그는 내게서 점점 멀어져, 작게 보인다. 작아진다. 작아진다. 점점, 어려진다. 작아진다. 작아진다.

서이제

폴 니장의 『아덴 아라비아』를 인용한, 알랭 바디우의 『참된 삶』의 한 부분을 인용하겠다. "나는 스무 살이었다. 나는 누구라도 그때가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라고 말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말한다. 너만 젊음을 말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2020/03/31
28호

1
건아들 〈젊은 미소〉 1980년 TBC 젊은이의 가요제.
2
활주로 〈우리들의 젊음을〉.
3
유미리 〈젊음의 노트〉 1986년 강변가요제.
4
마그마 〈해야〉 1980년 MBC 대학가요제 (박두진의 시 〈해〉를 마그마의 보컬 조하문이 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