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토이 푸들인 줄 알고 입양했던 부모님 집의 강아지가 어느 날 나를 성인 남자만 한 덩치로 반길 때라든가, 그동안 ‘혼나도 문제가 아냐’라고 흥얼거렸던 노래 가사가 실은 ‘그건 나도 문제가 아냐’라는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라든가.
   초등학교 때 피아노 강사는 틀리는 것에 예민했다. 내가 중지 손가락으로 레 건반을 누를 때마다 그녀는 30cm 자로 내 손등을 찰싹 소리 나게 때렸다. 레는 3번 손가락이 아니라 2번 손가락으로 누르는 거라면서. 내 검지가 강사의 커다란 손에 붙잡힌 채 건반을 꾹꾹 눌렀다 떨어졌다. 언뜻 보면 그건 건반을 누른다기보다 밀어내는 것 같았다.
   손가락 번호가 헷갈리지 않기 시작할 무렵, 나는 피아노 학원을 그만뒀다. 강사가 조금 무섭긴 했지만 그게 학원을 그만둔 이유는 아니었다. 중학교 진학을 앞둔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 나도 보습 학원에서 방학 선행 학습을 시작했을 뿐이었다. 그곳엔 태권도나 바둑을 그만둔 아이들이 모여있었다. 여러 명이 등을 둥글게 말고 문제집을 푸는 광경은 실크 스크린 기법처럼 쉽게 복제되는 성질의 것이어서 어디서든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도처에 널린 형태로 어른이 되었다.
   건반 대신 볼펜과 가까워진 손가락은 이제 낮은 도와 높은 도를 동시에 누르기 위해 쫙 펴지 않아도 된다. 반드시 시끄럽게 연주해야만 했던 공간은 해체되고 한숨조차 쉽게 쉴 수 없는 공간이 새로 지어진다. 이 좁은 독서실에서 내 삶은 설계된다. 나는 잘 외워지지 않는 부분에 반복적으로 밑줄을 친다. 그러다 보면 배가 아파지는 것이다. 오늘은 쾌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일어난다. 들뜬 마음과 달리 몸은 의자 끄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다.
   어른이 된 작금의 고민이라면 변비약 부작용이다. 처음에는 두 알만 먹어도 설사를 했는데, 지금은 내성이 생겼는지 네 알을 먹어도 배가 잠잠하다. 여덟 알은 먹어야 ‘화장실이 좀 급하네’ 하는 수준이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것을 최가 알면 그 특유의 질색하는 표정으로 꾸짖을 것이다. 어디 한의원 가서 배에 침이라도 좀 맞든지 해. 그러다 큰 병 된다.
   변비약을 과다 복용하면 장에 구멍이 뚫린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도시 전설 같은 소리. 그러나 막상 뒤돌아서면 생각난다. 나는 변기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지식인을 살핀다. 구멍이 뚫린다는 사람도 있고 안 뚫린다는 사람도 있다. 공통된 의견은 약에 의존하지 말고 생활습관을 바꾸라는 것이다. 식이섬유 많이 먹고 꾸준히 운동하면 변비 완치됩니다. 공부 열심히 하면 시험 합격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종일 공부하고도 3년째 합격하지 못하는 내가 변비를 치료할 수 있을 리 없다. 사실 이쪽이 더 도시 전설 같다.
   주머니에 변비약이 두 알밖에 남지 않았다. 잠시 산책할 수 있는 구실이 생겼다.

   일상에서 정착은 무척 중요하다. 항상 가는 미용실, 신뢰하는 브랜드 같은 것이 생겨야 고민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늘 같은 약국에 간다. 스타벅스 우측 건물의 2층. 앞에는 시에서 세운 대형 트리가 서 있다. 크리스마스가 한참 지났는데 아직도 철거되지 않았다. 철밥통들, 하고 공무원 욕이 나온다. 치우지 않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며, 치우고 싶어도 결정권이 없어서 불만을 품은 공무원도 여럿 있겠지만…… 그래도 분한 것이다. 그 자리에 나 붙여주면 열심히 일할 텐데. 지난해에도, 지지난해에도, 난 저 트리를 보면서 제발 올해는 합격하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었다.
   약국에 들어간다. 항상 오는 곳이기 때문에 구태여 증상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약사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변비약을 꺼낸다. 말없이 체크카드를 긁고 밖으로 나온다. 게임 튜토리얼 퀘스트처럼 너무나 간단하게 끝난다. 늘 가던 분식집으로 간다. 메뉴판도 보지 않고 무조건 야채 김밥을 주문한다. 변비 때문에 밀가루는 무의식적으로 피해왔다.
   테이블에 김밥 한 줄과 시키지도 않은 떡볶이 한 접시가 놓였다. 저 떡볶이 안 시켰는데요. 내가 말하자 주방에서 서비스라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설거지를 하는 모양인지 물에 그릇 씻는 소리가 났다. 아, 감사합니다. 나는 짧게 대답하고 떡볶이를 입에 넣었다. 사장인 중년 여자가 평소답지 않게 자꾸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내 반응을 살피는 것 같았다. 갑자기 왜 저러지? 의아해하면서도 계속 먹었다.
   “떡볶이 맛이 어때요?”
   어느새 설거지를 마친 사장이 내 앞에 와 물었다. 난 혼자 먹든 남이랑 먹든, 음식 앞에서는 딴짓하지 않고 젓가락질에만 집중하는 편이다. 더군다나 지난 몇 년은 공부만 하느라 말주변이 없어져서 이런 질문에 재빨리 반응하기도 어려워졌다. 이때 테이블 위의 광경은 훌륭한 대답이 된다. 김밥은 그대로 남아있는데 떡볶이 접시는 깨끗하게 비어있었다. 사장이 안도하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20년 동안 쓰던 레시피를 얼마 전에 바꿨거든요. 지금이라도 고쳐서 다행이에요.”
   그거였군. 사장의 표정이 이해가 갔다. 확실히 맛있었다. 밀가루 음식에 예민한 나도 순식간에 먹어치울 정도였으니까.
   그나저나 20년 만이라니?
   “장사를 20년 동안 하신 거예요?”
   “예. 이 자리에서 떡볶이 20년.”
   문득 20년 동안 팔았다는 그 떡볶이의 맛이 궁금해졌다. 맛이 그렇게 없었을까? 그리고, 20년 동안 장사하면서 맛이 이상하다고 말해주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던 걸까? 사장은 물을 다시 끓이며 가래떡을 풀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들어왔다. 나는 남은 김밥을 떡볶이 국물에 찍어 다 먹었다. 주머니에서 변비약을 꺼냈다. 몇 알을 먹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열 알을 다 뜯어서 영양제 삼키듯 넘겼다. 계산을 마치고 나가기 전 돌아본 분식집은 제법 손님이 많이 들어와 시끄러웠다.

   아버지가 은퇴한 후 나를 뺀 우리 가족은 모두 정읍으로 귀농했다. 나 혼자 따라가지 않은 이유는 여기가 내 터전이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평생 살았고, 내 친구들도 이곳에 있었다. 혼자 남은 나는 신림에 원룸을 구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이후 사람들에게서 본가가 어디냐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조금 알쏭달쏭해졌다. 신림의 6평짜리 원룸도, 정읍의 50평짜리 전원주택도, 본(本)이라는 말에 맞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공무원 시험은 내게 단순히 직업을 갖는다는 개념이 아니라 평생 살았던 고향에 정착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길잡이가 되어주는 것은 학원 시간표였다.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행정법과 행정학, 국어, 한국사 수업을 들었다. 최와도 그때 학원에서 알게 된 사이였다. 중소기업을 1년 만에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는 최는 언제나 나보다 행동이 빨랐다. 공부를 시작한 지 세 달쯤 지났을 무렵, 내게 학원을 그만두고 독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도 최였다. 마침 나도 부모에게서 매달 입금되는 학원비가 부담스러웠던 차라 독학을 하기로 했다.
   최와 나는 매일 독서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여러 번 이사를 다녔다. 둘이 붙어있으면 집중이 되지 않으니까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다가, 막상 그렇게 혼자 남겨지면 공허해서 다시 붙어 앉는 식이었다. 죄책감 없이 붙을 수 있는 순간은 점심시간이었는데, 정오가 되면 최는 빠지지 않고 밥을 먹자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참 이상해. 5년 입을 겨울옷 한 벌 사는 건 망설이면서 배달 앱 켜는 데에는 거침이 없단 말야.”
   어느새 나와 반말하는 사이가 된 최가 일회용 배달 용기 뚜껑을 열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돈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면서도 식사를 거른 적은 없었다. 우리는 휴게실에서 눈이 아플 만큼 시뻘건 돼지고기 김치찜을 덜어 먹었다.
   두 달 뒤 응시한 필기시험에서 나와 최는 나란히 불합격했다. 너무 상처받지 말자고 다짐한 것이 무색하게 결과를 보자마자 화가 났다. 분명히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렇다고 열심히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날 나는 최와 함께 비닐장갑을 끼고 닭발을 먹으면서 서로 죽고 싶다고 떠들었다.

   그렇게 2년을 함께 공부했다. 머리가 아플 때는 산책을 했다. 종착지는 4층 규모의 다이소로, 원룸에서 걸음으로 30분 거리였다. 그곳에서 쇼핑을 할 때도 있었고 안 할 때도 있었다. 확실한 건 우리가 마지막으로 산책했던 날은 쇼핑을 했다는 것이다.
   그날 최는 매장 가운데서 단열재를 골랐고 나는 보관함 코너에서 가방을 걸 만한 접착식 벽걸이를 골랐다. 초강력 벽걸이 테이프. 붙이기 전에 반드시 부착 면의 이물질을 제거하십시오. 최대 무게 2kg. 안내 문구를 읽고 있는데 양팔에 에어캡을 하나씩 낀 최가 슬쩍 끼어들었다.
   “뭐 걸려고?”
   “가방.”
   “그거 2kg까지 못 견뎌. 내가 예전에 코트 걸었었는데 세 시간 만에 떨어져버리더라.”
   그래? 나는 구매할지 망설였다. 최가 뒤편에 걸려있는 다른 접착식 걸이를 추천했다. 이번엔 내가 싫었다.
   “그건 디자인이 내 취향이 아니야.”
   “디자인이 뭐가 중요해? 별로 이상하지도 않고 그냥 평범한데.”
   “너무 까맣잖아. 내 방 벽은 하얀데.”
   결국 나는 내 고집대로 처음에 골랐던 하얀색 초강력 벽걸이 테이프를 사기로 했다. 계산하기 전 여성용품 판매대에 들렀다. 최가 생리대 중형 하나를 바구니에 넣는 동안 나는 오버나이트만 두 개를 골랐다. 옆에서 최가 의아하게 바라봤다.
   “왜 오버나이트만 사?”
   “공부하면서 생리대 가는 거 귀찮아.”
   “야, 그거 엄청 더러워. 생리대에도 곰팡이 피는 거 몰라?”
   “괜찮아. 어차피 생리도 잘 안 나와.”
   “얼마나 됐는데?”
   “일 년 됐으려나. 어쩔 땐 두 달에 한 번 하고, 어쩔 땐 갑자기 부정 출혈처럼 딱 하루만 피 비쳤다가 끝나버리고, 어쩔 땐 하혈하듯이 쏟아지고……”
   “심각하잖아. 병원 안 가고 뭐 했어?”
   “별거 아니지 않을까?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누구는 원형 탈모가 생기고, 누구는 갑자기 살이 빠지고, 누구는 대상 포진이 생기는 것처럼, 나는 그냥 생리 불순이 오는 거야. 예전에도 생리 때문에 병원 갔었는데 별 이상 없다고 피임약만 처방받고 나왔었어.”
   “헛소리하지 말고 얼른 병원 가. 가만두면 큰 병 된다.”
   각자 짐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건널목 앞에 서서 신호등 색깔이 바뀌길 기다렸다. 그중엔 내 또래로 보이는 이도 여럿 있었다. 직장인일까, 아닐까. 내게는 지나가는 사람의 직업을 맞혀보는 습관이 있었다. 직접 가서 물어볼 수는 없으니 대부분 추측에서 끝났다. 드물게 정답을 맞힐 때도 있었는데, 바로 점심시간 먹자골목에서 떼로 몰려다니는 사람들을 볼 때였다. 그럴 땐 꼭 물어보지 않아도 직장인이라는 게 확실해서 절망스러웠다.
   신호등이 초록 불로 바뀌고 막 걸음을 뗄 무렵이었다. 최는 공부를 그만둔다고 했다. 웹툰 만드는 회사에 경리로 합격했고, 에어캡도 원룸 접시랑 그릇 포장하려고 산 거고, 방은 목요일에 뺄 예정이라고, 최는 오늘 먹은 점심 메뉴를 말하듯 건조하게 내뱉었다.
   “갑자기?”
   나보다 앞서서 걸어가는 최의 뒤통수로 배달 오토바이의 헤드라이트가 번쩍하고 앉았다가 사라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최가 다녔던 예전 회사는 주말에 연차 붙여 쓰면 눈치 주고, 청년내일채움공제도 안 해주는 곳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명절 상여금도 없고, 야근 수당도 없고, 그러면서 남한테 관심은 얼마나 많은지, 카카오톡 프로필이 바뀔 때마다 최사원 뽀샵이 너무 심하다느니 핀잔을 주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돈이 뭐라고, 부모도 아닌 생판 남한테 넙죽 엎드려서 기는 사람들 보면 사는 게 대체 뭔가 싶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지. 최는 그렇게 말하며 질색하는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런데 다시 그런 곳에 가겠다니. 순간 최가 너무 한심했다.
   “대한민국에서 사람답게 살려면 공무원밖에 없다며.”
   “난 매 순간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할 뿐이야. 회사에 다닐 때는 회사보다 공무원이 더 낫다고 판단했으니까 딱 2년 잡고 공시를 공부한 거고, 지금은 계획했던 2년이 지났으니까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거야.”
   “돌아갔는데 역시나 실망스럽다면?”
   “죽었다고 생각하고 2년 정도만 버티면 의외로 적응될 수도 있어. 물론 아무리 해도 정 아닌 것 같으면 다른 일을 찾아보겠지.”
   “가끔은 네가 부러워. 이쪽으로 가다가 아닌 것 같으면 저쪽으로 틀어버리니까.”
   “너도 공무원 쉽게 생각하고 시작한 거 아니야? 남들 다 하니까 나도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내 주변에도 그런 애들 많아.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나도 공무원이나 할까’ 입버릇처럼 말하는 애들.”
   조금 흥분한 모양인지 최의 말이 빨라졌다. 나도 저절로 언성이 높아졌다.
   “난 달라. 나한테는 서울에 기반을 만들겠다는 꿈이 있어. 너무나 확실하고 분명해서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는 기반 말이야. 이건 당연한 거야. 여기서 평생 살았으니까.”
   “사람은 꿈이 없어도 살 수 있어. 하지만 병원에 가지 않고는 못 살아. 나도 너처럼 그렇게 매달리다간 나중엔 생리가 나오지 않아도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겠지. 그게 싫다고. 내가 만약 5년, 10년이 지나도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다면? 만약 합격해서 공무원이 된다고 쳐도, 기대했던 것처럼 좋지만은 않다면? 그땐 어떡할 건데? 그리고 다른 거 다 떠나서 지금은 공부가 너무 싫어. 그래, 싫고 지겨운 것보다 확실한 이유가 있겠냐. 지긋지긋해. 너처럼 간절하지가 않은 거겠지.”
   나를 등진 채 한참을 걸어가던 최가 멈췄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간판들이 가득했다. 그제야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지도를 보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 언제 배터리가 다 된 건지 전원 버튼을 눌러도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됐어. 내 걸로 보자. 최가 땅바닥에 에어캡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GPS 방향을 인식시키기 위해 핸드폰을 천천히 흔들었다. 에어캡을 다시 겨드랑이에 끼더니 고갯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면 되겠다.”
   옆에서 에어캡이 옷에 바스락바스락하며 스치는 소리가 났다. 양팔에 에어캡을 끼고 핸드폰까지 든 최에 비해 내 손에 들린 건 봉투 하나가 전부였다. 짐 좀 같이 들어줄까, 하고 물어보려는데 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싸우다 보니까 길을 잘못 들었잖아.”
   “그러게.”
   “싸우지 말자. 오늘이 마지막인데.”
   최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걸었더니 어느새 원룸촌에 도착해 있었다. 매일 한 길로만 다녀서 이런 경로가 있는 줄 몰랐다. 최가 먼저 들어가고, 나도 따라 내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가 짐을 정리하는 모양인지 옆방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났다.
   며칠 뒤 최는 방을 뺐다. 카카오톡 프로필도 여행 사진으로 바꾸었다. 함께 지낸 시간이 무색하게 우리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최가 떠나고 반년이 지났을 무렵, 나는 변비가 생겼다.

   신물이 올라와 잠에서 깼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낮에 먹었던 떡볶이와 김밥이 이불 위로 후두두 쏟아졌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두 시였다. 입안이라도 헹구려는데 이번에는 장기가 다 찢어질 것처럼 배가 아팠다. 달달 떨리는 다리로 변기에 앉아 설사했다. 아까 무리해서 변비약 열 알을 먹은 게 잘못이었다. 변기 물을 내린 뒤 토 묻은 이불을 돌돌 말고 잠이 들었다.
   다시 깼을 때는 새벽 여섯 시였다. 방에 토 냄새가 진동했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다이소에서 구매했던 하얀색 벽걸이는 정말 최의 말대로 2kg을 견디지 못했다. 매달리듯 간신히 벽에 붙어있던 가방은 이삼일 만에 떨어져서 지금까지 쭉 바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나는 지갑과 이불을 챙겨 들고 빨래방으로 향했다.
   해가 뜨는 모양인지 주변이 어슴푸레해졌다. 세탁기 안에서 이불이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공공심야 약국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처음 보는 약사가 인사했다. 두통약이랑 지사제 좀 주세요. 약사가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왔다. 척 봐도 엄청나게 큰일을 겪고 온 꼴이기는 했다. 아까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변비약을 그렇게 자주 복용해요? 생리할 때도? 약사의 물음에 생리는 잘 안 한다고 대답했다. 약사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우선은 말씀하신 약 드리는데, 날 밝으면 산부인과에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자궁에 문제가 있으면 배변 활동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거든요. 생리 불순은 당연하고요.”
   “지금 엄청 중요한 시험을 준비하고 있어서 그건 곤란해요. 그리고 몇 년 전에도 병원 갔었는데 별말 없었어요.”
   “저도 여러 이유로 방치했던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검사받아보니까 난소암이라고 하더라고요.”
   계산이 끝났다. 약국 문에 매달린 방울 소리가 비현실적으로 낭랑했다. 빨래방으로 돌아가는 길이 무척 밝았다. 약국에 머무른 시간은 10분이 채 되지 않을 텐데 그사이에 벌써 해가 다 떠버린 모양이었다. 빛의 한가운데로 가면 갈수록 내 몸은 물에 젖은 휴지처럼 무거워졌다. 곧 있으면 출근하는 사람들이 거리를 점령할 시간이었다.

   산부인과는 늘 변비약을 사러 들렀던 약국의 맞은편에 있었다. 증상을 듣던 의사가 사무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나이가 많지 않으니 암은 아니고 아마 물혹일 거예요. 그렇다고 20대 난소암이 없는 건 아니고, 있기는 있어요. 우선 검사부터 해보죠.”
   초음파실의 간이침대에 누웠다. 배에 차가운 젤이 덕지덕지 발릴 때마다 주먹이 꽉 쥐어졌다. 배에 장비를 갖다 대고 자궁 상태를 살피던 의사가 자못 심각해졌다. 왜 진작 병원에 오지 않았냐고 나무라며 모니터 속 초음파를 가리켰다. 내가 방치한 사이 물혹이 7cm까지 커져 있던 것이다. 모양도 썩 좋지 않아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로비 소파에 앉아 의사가 소견서를 써줄 때까지 기다렸다. 유리 테이블에는 간호조무사가 미리 타 놓은 듯한 커피가 있었다. 몇 모금 먹다가 테이블에 다시 올려놓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예능 프로그램이 나왔다. 장사가 어려운 자영업자들을 위해 유명 요식업자가 직접 해결 방안을 제공하는 내용이었다. 한 사례자가 나와서 손님들이 늘 떡볶이를 남기고 간다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얼굴이 무척 낯익었다. 내가 변비약을 사고 김밥을 먹으러 들렀던 분식집 사장이었다.
   요식업자가 분식집을 방문했다. 사장이 직접 만든 떡볶이를 대접했다. 떡을 씹어보던 요식업자가 실소했다. 사장님, 바닷물로 만들었어요? 너무 짜잖아요. 솔직한 반응에 사장이 당황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농담하지 말라며 떡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맛있기만 한데요. 요식업자가 지적할 때마다 사장은 오기를 부리듯 떡을 하나씩 먹었다.
   손님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면서요. 이렇게 나오시면 저도 기분이 나빠요.
   근데 선생님이 전혀 문제가 없는 부분을 문제가 있다 하시니까……
   문제가 없다고요? 소금도, 고춧가루도, 고추장도, 이렇게 많이 넣는데, 이게 아무것도 아니란 말예요?
   예. 떡볶이가 원래 그런 거 아니에요? 나는 무슨 더 맛있게 하는 특별한 비법 알려주나 했더니, 짜다 맵다, 뭐 이런 뻔한 소리를 하시면 어떡해요. 나도 여기서 장사만 20년 한 사람이에요.
   갈등 끝에 결국 요식업자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속는 셈 치고 딱 하루만 자신의 레시피 대로 떡볶이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양념장을 줄이고 카레 가루를 추가하는 방식이었다. 손님들의 반응이 좋지 않으면 자신은 여기서 물러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사장이 여전히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떡볶이를 만들었다.
   그날, 손님들이 앉은 자리에서 떡볶이를 다 먹는 광경이 펼쳐졌다. 얼떨떨한 표정의 사장이 연신 떡볶이를 만들었다. 이내 인터뷰 장면으로 넘어갔다. 위생모를 쓴 채 새까만 촬영용 커튼 앞에 앉은 사장은 계속 눈물을 닦았다.
   저는 평생을 맵고 짜게 먹고 살았어요. 그게 내 입맛에는 맛있었으니까요. 딱히 떡볶이 맛이 이상하다고 지적해주는 사람도 없었고요. 정말 모른 채로 지냈어요. 내가 모르는 줄도 모르고 20년을 그렇게 산 거예요.
   사장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소리 내 울었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그 울음소리가 손님 없는 산부인과 안을 가득 채웠다. 간호조무사는 데스크에 기대서 무료하게 손톱을 만졌다. 창문 밖에는 불 꺼진 대형 트리가 있었다. 일 년에 딱 한 달 화려하게 빛나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장식물을 달고 열한 달을 내리 버티는 트리. 나는 문득 집에 가는 길에 다이소에 들러 최가 추천했던 까맣고 튼튼한 벽걸이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박서영

영화 〈28일 후〉 같은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셀레나는 좀비로 가득 찬 상황을 보며 무너진다. 이때 짐이 말한다. "절대 포기 마.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

2022/02/22
5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