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일간 온양에서 가이드로 지내며 꾸준히 했던 일 중 하나는 달리기였다. 달리기를 하며 알게 된 것들에 대해 잊기 전에 써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기억나는 것들을 간단히 남겨본다.

   가이드가 하는 일을 간단히 설명하면 동면을 하는 사람들이 무사히 동면을 마치도록 돕는 일이다. 이를 위해 동면기간은 물론이고 동면 전후 동면자들의 건강을 확인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일을 한다. 동면이 시작되면 가이드는 동면하는 사람의 상태를 1-2주일에 한 번 등록된 의료기관에 보고하게 되어있다. 이는 동면자의 상태를 위함도 있지만 가이드가 약속대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역할도 한다. 보고는 간단하게 끝나는 것으로 미리 예약 후 진행한다면 십분 정도면 끝이 났다. 보고는 동면 시작 전 이루어지는 동면자의 건강검진 결과와 그의 상황에 따라 사전 검진 등으로 대체되는 경우도 있다. 그 외에 동면이 시작되면 해당 지역에서 활동하는 가이드들끼리는 3인 1조가 되어 매일 간단한 알람을 서로 전송한다. 이는 의무는 아니지만 가이드에게 위급한 일이 생기거나 사고가 생길 경우 다른 가이드들이 신고를 하거나 의료기관에 동면자와 가이드의 상태를 알려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일을 한다.

   태식은 내가 온양에 있을 때 만난 동료 가이드였다. 그의 고향은 대전인데 부모님이 은퇴 후 온양에서 살고 계시다고 하였다. 나는 이전에도 가이드를 몇 번 했지만 그때는 모두 서울이었고 근처에 종합병원이 있는 곳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다른 가이드들의 도움 없이 혼자서 일을 했다. 하지만 내가 드문 경우일 것이고 보통은 비슷한 지역의 가이드들끼리 알람을 주고받으며 일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가이드들의 세계는 다른 모든 직업인들의 세계처럼 각자 달랐다. 이는 의뢰인들도 각자의 직업을 가지고 각자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짧은 동면자들을 중심으로 하루에 세 사람 이상 관리하며 쉴 틈 없이 일하는 가이드들도 있었고 물론 쉴 틈 없이 일한다고 하여도 동면을 하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니 상대적으로 다른 일보다 여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반면 나처럼 비정기적으로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의 동면에만 함께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쩌면 수적으로는 나와 비슷한 근무 형태의 가이드가 가장 많을 지도 모르겠다. 동면자가 까다로우며 금전적 여유가 있는 경우 가이드 자격 외에 간호사 자격, 구급대원 자격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이는 3-40대여야 했고, 지정된 병원의 종합건강검진을 요구받기도 했다. 그들이 가이드들에게 어느 정도의 돈을 지불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받는 금액과는 크게 다를 것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비슷한 조건에서 일하는 것처럼 보여도 각자 접하는 현실은 다르고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각자가 느끼는 현실감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튼 태식은 내가 처음 만난 동료 가이드였다. 3인 1조라고 하여도 보통의 경우는 [문제없음] 알람만 주고받기 때문에 서로 대면하여 만나는 일은 드물었고 대화를 나누는 일도 드물다고 들었다. 알람은 가이드들이 선택할 경우 설정한 위치와 함께 저녁 8시에 오갔다. 나는 그때 늘 근처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했고 태식의 알람은 늘 같은 운동장으로 표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 시간에 운동장에 나와 뛰는 사람은 나와 태식 가끔 동네 주민 한두 명과 개 한두 마리가 다였고 어떨 때는 우리 둘뿐일 때도 종종 있었으니 그가 가이드가 아니더라도 어쩌면 같이 뛰는 사람으로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전직 축구선수인 태식은 부상 이후 선수를 그만두고 서울의 대학원에서 재활을 공부하고 있다고 하였다. 보통은 방학 때도 서울에 있는데 이번 방학은 온양에서 쉬며 가이드 일만 하고 있다고 했다.

   - 발뒤꿈치에 너무 힘을 주면서 뛰면 나중에 힘이 들 수 있어요.
   - 그래서 속도가 안 나는 건가요?
   - 속도의 문제는 아니고 충격을 크게 받는 거고 부상 위험이 생기는 거에요.

   나와 태식은 만나면 달렸고 잠시 쉴 때에는 달리기 이야기를 하였다. 각자의 이야기를 안 했던 것도 아니고 동면자들의 이야기를 안 한 것도 아니지만 나는 동면을 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 자세히 말하는 것이 가이드 자격을 받을 때 교육받은 그대로 꺼려지는 일이었고 그것은 태식도 마찬가지였다. 태식은 자신보다 열 살 가까이 많은 남성의 가이드 일을 하고 있다는 정도를 말했고 나는 동면자는 내 또래라고만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매일 하는 것은 걷기와 달리기였고 매일 뛰다보니 뛰는 것에 관해 할 말이 궁금한 것들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태식과 함께했다.

   - 중요한 것은 공중에 떠 있는 시간이에요.
   - 공중에 떠 있는 시간이요? 공중이요? 공중?
   - 네. 그러니까 두 발을 떼고 있는 시간? 계속 발을 빠르게 움직여 뛰면 힘이 들고 오래 하기 힘들잖아요. 한 번 뛸 때 무릎을 높이 올려 발을 한 뼘 더 멀리 내민다고 생각하시면서 뛰어보세요.

   태식은 전설적인 달리기 선수들을 말하며 그 사람들은 보통 한 번에 몇 초씩 공중에 떠 있는 다고 말했다. 물론 저도 키가 아주 큰 건 아니어서 그렇게 오래 떠 있지는 못해요. 키의 영향은 분명히 있지만 중요한 것은 빨리 움직여서 빨리 뛰는 것이 아니라 높이 뛰어서 한 뼘 더 멀리 나가는 거에요. 태식은 낮은 목소리로 빨리, 움직여서, 빨리, 뛰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천천히 말했는데 그러다가도 함께 뛰면 옆에서 손뼉을 치며 좀 더 높이(짝) 높이(짝) 높이(짝) 높이(짝) 하고 빠르게 외쳤다. 그럴 때 온 힘을 다 쓴다는 느낌으로 무릎을 높이 올리려 애쓰며 뛰었고 그 느낌은 생생하면서 후련했다. 태식은 그가 원래 운동을 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운동을 했을 거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힘든 느낌의 사람이었다. 물론 어떤 사람이 운동선수였을 거라고 짐작을 하기는 원래 쉬운 일은 아닐지 모르겠다. 태식은 스포츠센터에서 마주치는 트레이너들과는 다른 느낌의 사람이었는데 키가 아주 크거나 근육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약간 큰 키에 마른 체형이었지만 비교적 평범한 범위에 든다고 할 만한 키와 체형에 조용한 인상이었고 실제로도 아주 낮은 목소리에 달리기에 관해 설명할 때 빼고는 거의 말이 없었다. 달리기를 할 때도 운동화만 갖춘 채 긴 패딩 점퍼에 운동복이 아닌 면티에 적당히 편해 보이는 정도의 바지를 입고 와서 가볍게 뛰었다. 하지만 그가 선수였다는 것은 함께 뛰어보면 알 수 있었는데 나의 뒤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려 앞을 보면 멀리서 뒤돌아보며 웃고 있었고 반 바퀴 차이 나는 곳에서 뛰고 있는 것을 보고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나면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보통 저녁 8시 알람을 주고받고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고 운동장을 뛰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을 오래 하고 싶은 날에는 운동장이 아니라 은행나무가 심어진 천변 길을 따라 걷다가 뛰다가 다시 천천히 걸으며 앞으로의 일들에 관해 생각을 했다. 혼자 뛸 때는 뒤꿈치를 살짝 떼고 뛰는 것을 기억하며 뛰었고 그러다 어느 정도 뛰기 시작하면 무릎을 좀 더 높게 발을 한 뼘 더 앞으로 앞으로 높게 높게 앞으로 높게 앞으로 높게를 생각하며 뛰었다. 이전에 뛰던 방식보다는 힘이 더 들었지만 몸에 익자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뛰고 나서 호텔로 돌아와 운동할 때 입었던 윗옷들을 벗어놓으면 침대 위에 있던 고양이 차미가 먀 하고 내려와 패딩이나 후드 짚업의 모자 안으로 들어갔다. 차미는 마치 자기 자리에 앉은 것처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모자 안에 들어가 있었다.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고 옆방으로 가 동면 중인 친구 은의 상태를 자기 전 마지막으로 체크하고 스트레칭을 하였다. 가끔 조용히 텔레비전을 보았고 그러다 텔레비전을 켜둔 상태로 『티보가의 사람들』을 이어서 읽었다. 배경음악처럼 켜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가끔 소설 속 자크의 목소리와 앙투안느의 생각들과 겹쳐지기도 하였다. 이전에 선생님이 헌책방에서 사준 아베 고보의 소설은 세로쓰기로 된 오래된 것이었는데 그것 때문인지 매번 처음 한두 장을 펴고 역시 무척 재미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더 나아가지가 않았다. 밥을 먹기 귀찮을 때는 시장에서 사 온 커다란 두부를 냉장고에 넣어두고 반 모씩 먹기도 했다. 커피포트로 끓인 물을 두부가 담긴 그릇에 붓고 두부가 데워지면 물을 비우고 간장을 뿌려 빵이나 떡과 함께 먹었다. 보통 때는 시장에서 죽이나 칼국수를 사 먹었고 햄버거를 사 먹기도 했으며 어떨 때는 호텔 식당으로 가 불고기를 사 먹거나 중국집에서 잡채밥을 사 먹었다. 불고기를 먹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은과 은의 남편을 잠시 생각했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들은 다시 한집에서 살게 될 것 같지 않았다. 밥을 많이 먹은 날은 더 오래 걸었다. 어느 날은 탕수육이 먹고 싶어 탕수육을 사 먹고 남은 것은 포장하여 배낭에 넣고 온양성당에 들러 잠시 성당 주변을 걷다가 민속박물관 상설 전시를 구경하다 천변까지 걸었다. 왜 교회나 절은, 물론 그것이 교회나 절임을 알아볼 수는 있지만 대체로 제각각이고 서울 중심가로 갈수록 화려하고 거대해지는데 성당은 어느 곳의 성당이든 오래되고 단정한 느낌인가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아무런 지식이 없었다. 알 방법도 모르겠다. 온양성당 역시 그러하다는 것만을 다시 깨닫고 단정한 붉은 벽돌 건물 주변을 걷다 건물 가까이 다가갔다. 성당에는 역사가 간단히 설명되어 있었는데 온양 성당의 전신인 방축리 공소가 설립된 것은 1920년 3월로 10칸 정도의 함석집에서 성당은 시작되었다고 나와 있었다. 방축리 공소를 관할하는 공세리 본당의 4대 주임 콜랭 신부님께서 설립에 대비하여 1936년 1007평의 성당 부지를 매입하였다고 한다. 1007평은 10칸의 몇 배 정도일까 잠시 생각하며 이어지는 설명을 읽었다. 1948년 7월 방축리 공소에서 온양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초대 신부로 멜리장 베드로 신부가 부임하였다. 그러니까 일제강점기에 성당은 세워져 운영되었고 한국전쟁 휴전 후에 4대 주임 한도준 신부 때인 1956년 5월 성당 신축 공사를 착공하고 1957년 1월에 완공하여 봉헌식을 거행하였다고 되어 있었다. 나는 이어지는 성당의 역사를 읽다가 성당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다음에는 안으로 들어가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민속박물관 역시 성당처럼 벽돌로 된 건물이었다. 나는 내가 아주 어릴 때 그러니까 9살 때 이곳에 가족여행을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사실은 기억하고 있었으나 그때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는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취사를 할 수 있는 숙소에서 아버지가 코펠에 밥을 짓고 김치찌개를 끓여서 함께 저녁으로 먹었던 것만 기억이 났다. 어린 나와 젊은 부모님은 민속박물관에 가고 무령왕릉에도 갔다. 무령왕릉에 간 것은 무령왕릉 앞에서 찍은 사진이 남아있는 것으로 기억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부모님은 무령왕릉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에게 설명하려 애썼을 것이다. 황토색의 바닥과 붉은 갈색의 벽돌 건물은 어딘가 무령왕릉을 떠올리게 하였는데 박물관 입구의 리플릿을 보니 정말로 벽돌쌓기 방식과 색채는 무령왕릉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나와 있었다. 비가 온다는 예보는 없었는데 박물관 앞에서부터 작고 가벼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박물관 안에 들어서자 빗방울이 유리문에 맺히고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표를 끊고 박물관 입구에 잠시 앉아 빗소리를 들었다. 건물 안은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이었고 나는 언제까지라도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는 지지 않고 평일 오후의 시간은 지속되고 그 지속됨은 반복되고 나는 경조사도 없고 병원에도 가지 않고 직업도 소속도 없고 평일 오후 박물관에 앉아있는 사람으로 언제까지라도 그렇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처럼 겨울에 비가 많이 온다면 다음 날은 눈이 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전시실로 들어갔다.
   허은이 동면 전 읽어보라고 주고 간 노트에는 먼 옛날의 사람들이 곰이나 개구리처럼 동면을 하였을 것이라는 가설에 관해 기록되어 있었다. 허은은 그러한 가설을 다룬 아티클을 읽고 동면이 먼 인류에게 자주 나타나던 행동 패턴이라면 조금은 안심을 하게 된다고 적어두었다. 먼 옛날은 어느 정도의 옛날이었을까. 삼국시대 정도일까 백제는 문화적으로 발달한 나라였고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했으며 겨울에는 동면을 하였을까 고구려는 영토를 넓혀나가며 그 기상을 알렸으며 추운 겨울 동면을 하였을까 생각하면서 한국인의 일생을 보여주는 전시물들을 보았다. 전시물들은 주로 조선 시대의 물건들로 조선 시대 사람들이 동면을 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아이가 탄생하면 배냇저고리를 입히고 나이가 차면 어른에 걸맞은 옷을 갖춰 입어야 하고 결혼 같은 중요한 의례에는 그에 맞게 옷과 차림을 준비했던 곳에서라면 동면에도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차림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흰 삼베와 모시는 소박하면서도 품위 있었다. 아이들은 태어나고 누군가는 귀하게 여김을 받고 누군가는 그보다 못한 대접을 받고 계절과 절기를 중시하고 열다섯이 되면 어른으로 여겨지고 어른의 대접을 받고 혼례를 치루고 아이를 낳고 기르고 그러다 몸이 쇠약해진 누군가는 지극한 돌봄을 받으며 동면에 들어갈 것이다. 혹은 추운 산간지방의 먼 조상들은 척박한 곳에서 사는 굳센 사람들로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추운 겨울을 날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집집마다 늦여름부터 식량을 비축하고 집 구석구석을 정비하다 입동을 시작으로 동면에 들어갈지 모른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갓과 장옷, 여러 종류의 합과 보자기를 보았다. 지금의 밥그릇보다 훨씬 큰 밥그릇과 차분한 색의 술잔과 찻잔들. 전시를 보고 나와 다시 잠시 의자에 앉아 갈색의 벽돌들을 바라보았다. 비는 그쳐있었고 겨울의 나무와 풀은 비를 맞아도 색이 선명해지는 느낌이 없었고 그럼에도 땅에서는 흙냄새와 비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천변을 걸으면서 가보고 싶은 곳 살고 싶은 곳들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려 했지만 정리가 된다기보다는 생각이 이어지기만 하였다.

   가이드를 많이 하는 직업군 상위에는 언제나 예술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설이나 시를 쓰며 가이드 일을 하는 사람, 레슨과 가이드 일로 생계를 꾸린다는 연주자들도 많다고 하였다. 이전에 가이드 자격을 따고 실습을 하러 갔을 때 나와 함께 실습을 하던 이는 연극배우였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업을 하면서 벌이를 하기에 가이드 일이 적합한 측면도 있지만 정기적으로 동면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정해진 사람들에게 가이드 일을 맡기고 싶어 할 것이고 이는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동시에 때로는 공간적 이동도 감수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했는데 그러한 일을 맡기기에 비교적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덜 받는 예술가들을 원하는 측면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격을 딸 때 수업을 들었던 강사는 원래 미대를 졸업한 후 작업실 임대료를 내기 위해 가이드 일을 시작하였다고 했다. 그러다 해외 출장이 잦은 사업가의 가이드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전문적으로 가이드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사업가는 매년 동면으로 크리스마스 휴가를 대신했고 첫해는 사무실이 있는 서울이었고 강사는 광화문이 내려다보이는 오피스텔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고 하였다. 그해는 눈이 많이 내려 창밖으로 눈 오는 광화문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고 했다. 사업가는 다음 해는 상하이에서 어떤 해는 1월에 베이징에서 2주간 동면을 했고 같은 해 12월 코펜하겐에서 5주간 동면을 하였다. 나는 온양에 있었고 누군가 시간이 흘러 그해 겨울 너는 어디 있었느냐고 물으면 그때 그러니까 그때는 온양에서 살았어 달리기를 했고 도서관과 박물관에 자주 다녔다고 말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온양에 있고 그렇다면 허은의 동면이 끝난 후 나는 원래 서울 집으로 돌아갈 것인지 다른 곳에서 잠시 머물 것인지 머문다면 어디로 갈 것인지를 걸으며 천천히 생각했다.

   - 저 그러면 혹시 아직도 그분의 가이드 일을 하고 계신 건가요?
   - 누구요?
   - 출장을 자주 다니는 그 회사 대표님이요.
   - 아니요. 지금은 하지 않아요.
   - 아.
   - 3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강사는 강의가 끝나고 질문을 하는 내게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짐을 챙겨 뒤돌아 나갔다. 우리는 화장실 앞에서 다시 마주쳤는데 그는 방금 전보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분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 저는 사실 그분을 굉장히 존경해요. 이야기를 많이 한 것은 아니지만 매년 그분의 동면을 돕다보면 그냥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거든요? 물론 저도 그분이나 그분의 회사에 대해 미리 공부해두기도 했지만요. 그러니까 이상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사람은 무언가를 무릅써야 할 때가 있다는 거요. 정직하고 깔끔해야 하고 그런데 어떨 때는 온갖 것을 무릅쓰고 그런데 그걸 견뎌야 한다는 거요. 그럴 때도 사람은 정직하고 깔끔해야 한다는 거요. 누구나 그럴 때가 있고 그래야 하지만 사업을 한다면 특히 더 그래야 한다는 거요.

   강사는 그분의 동면을 돕고 난 후 사업과 투자에 관해 공부를 시작해 현재는 가이드 양성 교육기관을 운영하고 있다고 하였다.

   - 그림도 가끔 그리세요?
   - 저는 조각 전공이었어요. 전혀 안 하죠 지금은.

   호텔에 돌아와서는 패딩 점퍼를 바닥에 깔아두고 차미는 침대에서 가볍게 뛰어내리며 먀. 샤워를 하고 배낭의 탕수육을 꺼내 그릇에 담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밥을 데우고 김치를 꺼내 이른 저녁을 먹었다. 머릿속에서 그러니까 어깨 정도일까 가슴 정도일까 에서부터 갑자기 삼각형 모양으로 썰어진 빨간 수박의 이미지가 솟구쳤고 그 수박은 무르지도 덜 익지도 않았고 붉은색의 완벽에 가까운 수박이었고 탕수육을 씹으면서 수박을 베어 물었을 때 입안에 퍼지는 달고 시원한 물맛이 떠올랐다. 나는 그것을 느낀 걸까. 아주 짧은 찰나의 시간에 탕수육과 김치가 섞인 입안에서 선명한 수박의 맛이 찾아왔다 사라졌다. 겨울에도 수박을 먹을 수는 있지만 나는 여름을 생각했다. 오늘은 달리지 않을 것이고 내일은 눈이 올지도 모르고 여름은 우리를 멀리서부터 걸어서 수박을 들고 넓고 푸른 나뭇잎을 들고 얼음이 든 음료수를 챙겨서 찾아온다. 남은 탕수육을 다 먹고 간단히 설거지를 하고 방 안쪽 창문을 열어주면 차미는 모자에서 곡선을 그리며 뛰어올라 창문 아래 놓아둔 의자에 앉는다. 세로로 된 아베 고보 소설을 읽으려 애쓰다 일어나 은의 상태를 체크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나의 일기에는 삼각형으로 잘린 수박을 그리고 수박이 먹고 싶다고 썼다. 온양성당 온양민속박물관 갔다 라고 덧붙이고 일기를 끝냈다. 내일은 대전으로 가 빵을 좀 사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예상처럼 눈을 뜨고 창문을 열자 얇게 쌓인 눈이 보였다. 환한 빛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눈은 반짝이고 참새들이 울고 있었고 차미는 매번 생생하게 그 순간에 완전히 몰입했다. 일어나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스트레칭을 하고 물을 한 잔 마시고 은의 상태를 체크하고 기록해두었다. 옷을 갈아입고 근처 역으로 가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에서 내려 역 앞 벤치에 잠시 앉아 있다가 대전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열차 안에서 대전에서 할 일들을 생각해보았다. 대전역에서 내리자 나는 열차 안에서 생각한 대로 칼국수를 사 먹고 중앙로역까지 걸었다. 열차의 창으로 작은 눈발이 점점이 흩날리는 것을 보면서 왔는데 대전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걷다 조용해 보이는 카페로 들어가 커피를 마셨고 다음 주쯤 선생님께 연락을 해볼까 잠시 생각했다. 카페를 나와 빵을 조금 많은가 싶을 정도로 샀고 두부 두루치기를 포장해서 대전역으로 향했다. 대전역에서 열차를 타는 사람들은 세 사람 걸러 한 사람 빵 봉투를 들고 있었다. 열차 창에서 또 쌀알처럼 작은 눈들을 보았으나 역에 내리니 눈은 내리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가 산 것들을 정리하고 손을 씻고 은의 상태를 체크한 후 방으로 돌아와 두부 두루치기에 이른 저녁을 먹었다. 차미와 사냥놀이를 하고 안쪽 창문을 열자 차미는 둥근 곡선을 그리며 창문 아래 의자로 뛰어가고 나는 책을 읽으며 커피를 마셨다. 옷을 챙겨 입고 나갈 준비를 마치고 창문을 닫고 방을 나섰다.

   운동장에 도착하고 스트레칭을 하고 천천히 한 바퀴쯤 걷고 시간을 확인하고 알람을 보내고 가볍게 반 바퀴쯤 뛰고 있을 때

   - 이런 날 특히 더 조심해서 뛰어야 해요. 미끄러지면 살짝 미끄러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치는 경우가 많거든요.

   태식과 두 바퀴쯤 뛰었을 때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눈은 쉬지 않고 함박눈이라고 부를 수 있는 크기로 느린 속도로 땅 위로 내려왔다. 태식은 옆에서 조심 조심 조심 조심 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고 우리는 내리는 눈을 맞으며 느린 속도로 뛰다가 걸었다. 장갑을 벗어 차가운 손을 태식의 얼굴에 대어보았다. 차가운 손가락으로 차가운 코를 스쳤다. 태식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큰 두 손으로 내 손을 감쌌다. 우리는 짧게 키스를 하고 하염없이 내리는 눈 속을 걸었다.

   그 전날 수박을 맛보았을 때 수박을 목으로 넘겼을 때 그때부터 여름은 나를 향해 걸어왔는데 어째서 봄과 가을 겨울은 그러한 방식으로 나를 찾아오지 않는데 여름은 그런 방식으로 나를 찾아오는지 나는 그것이 늘 신기했고 동시에 완전히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시간이 지나 어느 여름 나는 태식과 다시 만나게 되고 우리는 그해 겨울 각자에게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게 되지만 함박눈 사이를 뛰던 그때는 아직 그런 시간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확실하게 배운 것은 안 다치는 것이 달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이었고 나는 그것을 여기에 적어둔다.

*온양성당 관련 설명은 온양성당의 홈페이지 내 안내를 참조하였습니다.


박솔뫼

원래는 이유리 작가의 「빨간 열매」에서 이어지는 소설을 쓰려고 했다. 그게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목도 정했고 첫 문장도 썼는데 생각처럼 잘 되지는 않았다. 이유리적 변환은 어려운 것이었다.

이 소설과 같은 계절에 발표된 《문학과사회》에 실린 다른 소설 후기에서 아래와 같이 썼다. 이 소설도 쓰는 동안 대체로 이랬다.

"그러고 보니 이 소설의 전편은 『사랑하는 개』에 실린 「여름의 끝으로」라 할 수 있는데 그 소설을 쓸 때도 이 소설을 계속해서 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속에 있었다. 나는 그런 곳에 있을 수 있다. 그것이 너무나 좋다.”

2020/03/31
2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