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우산은 비의 것



   비의 시체를 가득 실은 수레가 물위에 쓰러져 있다 걸음을 멈추듯 사랑을 멈춘다

   가을에는
   투명한 기린이 걸어다닌다

   비를 딴다

   내 몸에 꼭 맞는 시체를 가지기 위해 가끔 약을 삼킨다 아직은 아닌 것 같아 더 늙어야 해서
   밥을 먹고
   나와

   신호등 앞에서 기린의 행렬을 보고 있다
   기다린다

   머리에서부터 조금씩 투명해지는 사람들을 보고 있다
   기다린다

   그때

   신호등이 바뀌고 야 벌써 시월이야! 앞질러 뛰어가는 소년의 목소리가
   검은 우산을 벗어나
   자유로 지나 가양대교 건너 노란 창문 너머 침대 위 한 방울 머리로 맺힐 때
   시월

   비

   어느 장례식장 부의함 속으로 떨어지는
   흰 봉투 같다

   두 번은 안 돼 한 번이니까
   괜찮다
   침묵의 수레 가득 실린 울음을 덜컹거리는 바퀴로 굴리고 가는 가을이니까
   괜찮다 사람들은 모두 같은 건너편을 가지고 있으니까
   간다

   그때

   기린의 무리 속에서 투명한 눈망울 하나가 천천히 목을 비틀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깨우고 갔다



   너무 오래 앉아 있었기에 나무를 떠나온 새. 저 잎들은,
   다시 날아오를 수 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데, 누가 나를 깨웠다.

   눈사람.
    그는 구름의 종족이지만,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 언제나 몸부터 태어난다.
   드디어, 머리를 굴리려는데
    누가 나를 깨웠다. 나는 깨어 있었는데,

   봄이 왔다.
    어느 해 바른 식당에서 냉이를 집으려는데 누가 나를 깨웠다. 나는 보고 있었는데, 눈 녹은 비탈 무지갯빛 아지랑이 웃을 때 광대뼈 아래 패인
   네 보조개.

   정오의 태양, 불길을 흉내내며 일렁이는 여름 바다에서

   누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쳐다보면,

   내 어깨를 짚고 내가 서 있었다. 막 깨어난 내가 나를 깨웠던 나를 알아보고는,
   인사를 했다.
   고맙다고 말하고 잘 가, 라고 말했다.

   아주 짧고 슬픈 인사였다.

신용목

매 순간 나는 나와 헤어지고 매 순간 이전의 나는 죽어버린다. 아무리 우리가 오랜 시간을 함께 한다 해도, 서로가 아는 서로를 만날 수는 없다. 그것은 문득 알게 된 깨달음이거나 새삼스러운 진실 따위가 되지 못한다. 그렇더라도, 계절이 바뀌는 신호등 앞에서 혹은 밤의 창가에서, 어떤 슬픔 속으로 예기치 않게 돌진해오는 분명한 사건이라는 점만은, 매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제의 나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늘 버림받은 기분으로 깨어나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가을비가 있었다. 그리고 겨울이 왔다.

2017/12/26
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