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관 검색어는 장충동, 보쌈, 치킨…… 한 점 입에 넣으면 부드럽게 착 감기는 반들반들하고 쫀득쫀득한, 돼지의 발. 나는 족발이 먹고 싶었다. 족발은 평소에 그리 좋아하던 음식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족발을 한 손에 든 채 질겅질겅 뜯고 맛보고 싶었다.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였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며 핸드폰을 켜고 ‘식탁’ 앱을 검색했다.
   식탁은 다운 순위 상위권에 있는 요즘 최고로 인기 있는 앱이었다. ‘혼밥이 두려운 자, 이곳에 앉아라’라는 문구를 내세워 대세인 나홀로족에 대항하는 역발상이 돋보였다. 밖에서 혼자 밥을 먹는 일이 흔한 일이 되었다 해도 아직도 부끄럽고 어색하고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식탁은 2인용 식탁, 3인용 식탁, 4인용 식탁으로 나뉘어 있는데 말 그대로 몇 인용 식탁이냐에 따라 수에 맞춰 같이 밥을 먹는 시스템이었다. 지역과 메뉴를 정한 뒤 예를 들어 ‘중계동에서 닭발 먹으실 분’이라고 올리면 그 주변에 사는 같이 먹고 싶은 사람이 의자 아이콘을 눌렀고 바로 작성자에게 알림이 간다. 하지만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이성일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남녀가 만나 밥을 먹으며 연인이 되는 경우가 허다해져 소개팅 앱으로 변질된 지 오래였다.
   인터넷에서는 ‘식탁에서 여친 만드는 법’이라는 글이 인기였다. ‘여자들이 파스타 좋아할 것 같냐. 그런 거 먹는 애들은 이미 남친이랑 먹고 있음. 기억해라. 금요일 저녁 열시. 치킨이다. 데이트할 사람 없어서 심심한 처자들을 공략해라.’라는 글이 좋아요 삼천 개를 넘게 받는 걸 보며 코웃음을 쳤다. 치킨을 누가같이 먹나. 혼자 다 먹어야지. 닭다리를 모두 양보한다면 어느 정도 고려해볼 수 있었다. 불편함을 견디며 누군가와 밥을 먹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혼자 밥 먹는 게 세상에서 제일 편한 내가 남자 만날 생각도 없으면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이유는 혼자 족발 대자는 먹을 수 있어도 족발 소자를 먹을 돈이 없어서였다.

   저번 주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서천군수의 늦둥이 딸인 엄마와 군청 소속 공무원인 아빠가 만나 내가 태어났다. 아줌마들은 볶은 머리를 한 자신들과 달리 찰랑찰랑한 긴 머리에 늘 상아색 머리핀을 꽂고 있는 엄마를 배척함과 동시에 마을에서 제일 먼저 피아노를 집에 들인 엄마를 부러워했다. 엄마는 내가 희고 고운 손으로 피아노를 치는 여자아이로 자라길 바랐지만 나는 미술학원에 가는 게 더 재미있었다. 연두색과 조금 더 진한 색의 초록색을 섞어 나뭇잎을 칠했을 때 미술 선생님은 나에게 세상을 볼 줄 아는 눈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피아노 학원에서 몇 번 연주하지도 않고 한꺼번에 연습 공책에 동그라미 열 개를 칠해서 손등을 맞을 때보다 조금 더 쓸모 있는 인간이 된 것 같았다.
   다행히 엄마의 눈에는 그림 그리는 것도 피아노 치는 것과 비슷하게 있어 보였기 때문에 내가 무얼 하든 그리 상관은 하지 않았다. 엄마는 있어 보이는 것, 그 자체에 목숨을 걸었다. 외할아버지가 졸부딱지를 떼기 위해 알지도 못하는 그림을 모았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마을에서 유일하게 소도시의 미대에 진학하자 엄마는 내가 곧 한국 미술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천재 예술가라도 될 줄 알았는지 사람들에게 전시회를 한다고 떠벌려놓았다. 그래서 본가에 갈 때마다 도대체 전시 뭐시깽이는 언제 하는 거냐고 물어보는 동네 사람들의 질문을 얼렁뚱땅 넘겨야만 했다.
   엄마는 또 팔 년째 ‘손’, ‘기다려’를 가르치고 있지만 손에 간식이 들려있을 때만 하는 우리집 강아지 두봉이를 도그쇼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는 혈통 있는 푸들로 만들어 놓았다. 두봉이는 머리 두, 봉우리 봉 자를 써서 강아지 중에 최고봉이 되라는 뜻으로 엄마가 작명소에 가서 지어온 이름이었다. 엄마는 두봉이를 꼭 불어처럼 두부옹, 하고 불렀는데 한번은 두봉이가 산책 중에 찻길로 뛰어들었고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는데도 엄마는 ‘두부우우우오오웅’이라고 소리쳤다. 두봉이는 멈추지 않았고 하마터면 다시는 두봉이를 보지 못할뻔했다. 그때 호되게 당하고 나서야 엄마는 두봉이를 제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젠 제 이름대로 말하면 두봉이가 오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엄마의 전화가 왔을 때 나는 몇 달째 월급을 주지 않는 카페 사장의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는 익선동에 있는 ‘오늘은 여기에’라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연지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을 보고 한눈에 반한 곳이었다. 연지는 팔로워가 3만이 넘는 SNS 스타였다. 연지는 그림도 잘 그렸다. 연지는 영화의 한 장면들을 간단한 스케치로 남기곤 했다. 연지의 그림은 단번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연지가 보는 영화를 보고 연지가 쓰는 볼 터치를 바르고 연지와 비슷하게 옷을 입었다. 연지는 흰 벽지와 잘 어울리는 체크무늬 베레모를 머리에 쓰고 생기있는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을 올린 뒤 ‘오늘은 여기에’를 태그해 글을 남겼다.
   ‘내 마음은 여기에’
   나는 연지와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카페 면접을 보러 갔다. 연지는 인스타그램 댓글로 무슨 립스틱을 쓰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입생로랑을 바르고 있다고 친절히 알려주었다. 나는 그 제품의 저렴이 버전인 로드샵 틴트를 사서 발랐다. 사장은 커피 내려본 경험이 있냐고도 물어보지 않고 나를 한번 훑은 뒤 다음 주부터 일하라고 했다. 연지를 따라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이 되면 연지와 비슷해 보이는 내 또래의 젊은 애들이 우르르 들어와 아이폰 카메라 셔터 소리를 낸 뒤 다시 우르르 사라졌다. 나는 인스타그램에서 ‘오늘은 여기에’를 태그해 올린 아이들의 게시물에 하트를 눌렀다. 매주 그 아이들과 같은 머리 스타일을 하고 같은 가방을 메고 같은 곳에 간다는 사실을 느끼며 위안을 받았다. 노량진역에서 종로3가역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삼십 분이 걸렸고 카페까지는 걸어서 십 분을 더 가야 했지만 일하러 가는 길이 힘들지는 않았다. 그곳에 있을 때만이라도 나는 비좁은 원룸에서 메말라가는 일개 공시생이 아닌 힙스터들의 성지에서 힙을 외치는 사람이 된 느낌이 들었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우유와 나의 허접한 스팀 실력이 합쳐진 라떼인지 카푸치노인지 분간이 안 되는 커피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인스타그램에 인증샷을 올리고 나서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임대료를 감당하기엔 턱도 없었다. 임금체불이 고질적으로 일어났다. 겉으로 때깔 좋아 보이는 사장은 나에게 미안하다며 말했다.
   “노량진에서 방 잡고 공부하려면 한 달에 백은 깨진다더라. 지방에서 올라오는 애들은 다 부자래. 넌 그나마 여유 있으니 괜찮지?”
   사장이 내 등을 툭툭 쳤다. 하지만 우물 밖으로 나가려면 엄청난 대가가 필요하다는 걸 이미 알아버렸다. 그리고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과 나 정도면 오히려 괜찮은 편이라는 걸 깨닫고 투정을 부릴 수 없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장 전화인 줄 알고 바로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는데 ‘두봉이 엄마’라는 글씨가 보였다. 나는 심드렁하게 전화를 받았다. 엄마의 목소리엔 신경질이 잔뜩 묻어있었다. 아빠의 직장동료 아들이 7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이었다. 몇 년 동안 교류가 없다 갑자기 그 애 엄마가 오랜만에 얼굴을 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는데 자랑을 하기 위해 그랬다는 거였다. 괜한 자격지심에 엄마에게 가만히 듣고만 있었냐고 따졌다. 그러나 역시 손민숙 여사는 달랐다. 엄마가 화난 이유는 그 애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가 아니었다.
   “아니 글쎄, 족발을 가져오는 게 말이 되냐구. 하여간 그 집은 옛날부터 끌 떨어진다니까. 꼴에 구찌 가방 들고 왔는데 뽀글뽀글 머리부터 어떻게 해보라고 말하고 싶어서 목구멍이 간질거려 죽는 줄 알았어.”
   그랬다. 엄마가 화난 이유는 그 애의 엄마가 촌스러운 파마머리에 너무나도 아까운 진짜 구찌 가방을 메고 한 손에는 족발을 들고 와서였다. 족발은 엄마 기준에 있어 보이는 음식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엄마는 그 아줌마가 족발을 먹으며 자기의 잘난 아들이 어떤 식으로 공부했는지 말할 때마다 입안에서 쩝쩝거리는 소리가 났다며 교양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여편네라고 실컷 욕한 뒤 전화를 끊어버렸다. 엄마는 족발을 먹을 때 사람이 얼마나 추해지는지 구구절절 떠들었지만 묘하게 그 말들은 나의 침샘을 자극했다. 콜라겐이 듬뿍 들어 있는 족발을 먹는데 소리가 안 난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모르고 있는 건 족발은 절대 없어 보이는 음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민 음식이라는 명칭은 시장에서 판다는 이유만으로 서민들이 즐겨 먹는다고 착각하는 선거 유세 할 때만 시장에 오는 국회의원들이 붙인 게 틀림없다. 진짜 서민들은 고기를 먹을 기회가 생기면 잘 도축된 온전한 부위를 먹지 네발 달린 동물의 발을 뜯어먹진 않는다. 어떤 생물의 발을 탐닉할 수 있다는 건 매우 최상위급의 고급 행위였다.
   혼밥의 대명사 격인 노량진에서 식탁이 쓰이는 이유는 오로지 돈 때문이었다. 식탁에서 노량진을 검색하면 다른 지역보다 ‘피자 뿜빠이 하실 분’, ‘식권 같이 써요’ 등과 같은 글들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거리낌 없이 음식을 나눠 먹을 만큼 얇은 지갑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나는 이 밤에 누구 한 명은 족발을 먹고 싶지 않을까 기대하며 글을 올렸다. 올리기 무섭게 ‘늑대는 떡볶이를 좋아해’라는 닉네임을 가진 사람이 ‘족발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라고 댓글을 달았다. 떡볶이를 좋아하는 늑대는 노량진에서 서식하는 짐승인 듯했다. 늑대의 알림에 시큰둥하던 차에 바로 다른 알림이 울렸다.
   ‘10시 반에 노량진역 8번 출구 앞 장충동 왕족발 앞에서 만나요’
   그 흔한 이모티콘도 없이 시간과 장소만 명확하게 제시하고, 유행 따라 수많은 족발집이 생겼지만 로고송만으로도 전 국민을 대통합시키는 전통의 족발 맛집을 집어내는 것으로 보아 이건 진짜였다. 게다가 닉네임조차 ‘서서갈비’였다. 나는 좋다는 댓글을 달고 운동화를 구겨 신고 집을 나섰다.

   “질투는 나의 힘…?”
   키가 크고 마른 여자가 낭창낭창한 몸짓으로 내 쪽으로 걸어오길래 부럽다, 하며 패딩에 가려진 내 뱃살을 한 번 쳐다보았는데 그 사람이 나랑 족발을 같이 먹을 서서갈비였다. 나는 서둘러 족발 사진을 보고 있던 핸드폰의 화면을 껐다. 서서갈비는 아주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그게 굉장히 잘 어울렸다. 내 닉네임을 부르고 여자가 살짝 웃었다. 여자의 왼쪽 볼에 쏙 들어간 보조개가 보였다. 왠지 모르게 비웃는다고 느껴졌다. 새삼스럽게 나의 닉네임이 부끄러워졌다. 질투는 나의 힘이라니. 젠장. 나의 생이 미친 듯이 사랑, 아니 족발을 찾아 헤맨 것도 아니고 족발을 먹고 싶어 하는 질투가 힘이 되는 여자라니. 그냥 ‘녹차 먹은 돼지’로 지을 걸 후회가 몰려왔다.
   어찌 됐건 서서갈비와 나는 어색하게 족발 집에 들어갔다. 당연히 포장해서 각자 나눠서 가져갈 생각이었는데 서서갈비가 먹고 가자고 말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대답을 얼버무리는 사이 서서갈비는 벌써 계산대 앞에 서서 주문을 하고 있었다.
   “막국수도 하나 주세요.”
   서서갈비가 계산대에서 자기 카드를 내밀었다. 족발 값은 이미 내 돈과 합쳐서 계산한 뒤였다. 막국수는 한 그릇에 육천 원인데 그걸 내주겠다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뒤로 물러서서 서서갈비가 계산을 하는 동안 재빨리 건조기에서 컵을 꺼내 물을 담아 테이블에 놓았다. 딱히 옷에 양념이 튀는 걸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빨간색 앞치마도 두 개 가져와 놓았다. 그러나 서서갈비는 내 앞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뚱한 표정으로 물을 마셨다. 물은 셀프였는데 모르고 있나? 지금 육천 원 더 냈다고 갑질하는 건가? ‘육천 원이 뭐라고’와 ‘육천 원이면 그럴 수 있지’가 뒤섞여 거대한 찌질의 군상을 그려나가고 있는 동안 그렇게 먹고 싶었던 족발이 나왔다. 얼른 먹고 싶은 생각에 마음이 급한데 젓가락을 쥐기 민망하게 서서갈비는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저기, 음식 나왔는데 안 드세요?”
   서서갈비는 무심하게 먼저 드시라고 말했다. 이럴 거면 각자 포장해 갈 것이지 뭐하러 먹고 가자고 한 거야? 아니면 남자인 줄 알았는데 여자여서 실망했나? 그러나 이런저런 생각을 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상추 위에 고기와 쌈장을 콕 찍은 마늘을 올렸다. 입안에 넣자 알싸한 향과 묵직한 기름이 어우러져 감칠맛이 느껴졌다. 이번엔 뼈를 들었다. 양쪽 끝을 들고 살점을 물자 입술에 기름이 묻었다. 쩍, 쩍거리며 살점이 입안과 찰지게 부딪히는 소리가 귓속으로 울려 퍼졌다. 서서갈비는 그때까지도 묵묵히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실컷 먹고 있으니 막국수가 나왔다. 나는 군침을 꼴깍 삼켰다. 족발에 막국수를 먹지 않는다는 건 닭발을 먹을 때 주먹밥이나 계란찜이 없다는 것과 같았다. 매콤한 면발에 살코기를 돌돌 싸서 먹을 생각을 하니 들떴다. 서서갈비도 보던 핸드폰을 내려놓고 젓가락을 들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서서갈비는 막국수를 받자마자 자기 쪽으로 옮겨 놓더니 그릇에 얼굴을 박고 후루룩거리며 면발을 흡입했다. 막국수와 같이 먹으려고 앞 접시에 덜어놓은 고기가 무색했다. 나는 마치 막국수는 먹을 생각도 없던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젓가락을 다시 내려놓았다.
   마지막까지 나는 막국수 한 젓가락도 먹지 못했다. 이렇게 치사할 수가. 지만 입이냐. 집에 오는 길에 서서갈비를 파는 식당을 보았다. 서서갈비를 불량회원으로 신고할까 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착각을 한 내 잘못이지 서서갈비는 잘못한 게 없었다. 그토록 먹고 싶던 족발을 먹고 집에 돌아왔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다시는 같이 밥 먹을 사람을 찾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잠이 들었다.

   결국 ‘오늘은 여기에’는 문을 닫았다. 그러니까 원두는 좀 신선한 거로 쓰지. 솔직히 모양만 그럴듯한 싸구려 케이크 팔천 원에 파는 건 심했어요, 사장님. 그래도 인테리어 하나는 기깔났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순간만큼은 나도 연지의 삶을 사는 것 같은 위안을 받았었다. 카페가 있던 자리에는 샐러드를 파는 가게가 생길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왼손으로는 미안하다는 사장의 문자에 답장을 보내며 오른손으로 햇반 컵반 강된장 맛을 떠먹었다. 미역국 맛, 마파두부 맛, 강된장 맛 세 가지로 번갈아가며 이주를 버티니 똥에서도 엠에스지가 나올 것만 같았다. 가족들끼리 식탁 위에 앉아 숟가락을 맞부딪치며 먹는 된장찌개가 그리워졌다. 호박잎에 쌈을 싸서 입을 크게 벌린 뒤 욱여넣고 완전히 위장으로 내려가기 전에 뜨끈뜨끈한 국물을 한 숟가락 떠서 삼키면 따뜻한 온기가 온몸을 데웠다. 구수한 된장 냄새를 떠올리자 즉석식품 특유의 향기가 거북해졌다. 햇반 컵반에서는 냄새가 아니라 향기가 났다. 버섯 슬라이스와 감자 다이스로 버무려진 가짜 쌈장이 혀에 닿자 화학물질을 먹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들고 있던 플라스틱 수저를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아직도 박스 안에는 소셜 커머스 사이트에서 대량 구매한 햇반 컵반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식탁에 접속했다. 서서갈비와 족발을 먹고 난 뒤 다시는 다른 사람이랑 같이 밥을 먹지 않겠다는 다짐은 금방 무너지고 말았다.
   ‘노량진에서 쌈밥 드실 분 없나요 ㅠㅠ’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글을 올렸지만 쌈밥이라는 다소 거창한 메뉴 때문인지 내 게시물은 돈가스에 점점 뒤로 밀려났다. 하긴, 햄버거보다 카페가 없어지고 생긴 가게에서 파는 샐러드 가격이 두 배는 비쌌다. 신선한 채소를 먹기가 이토록 힘든 세상이었다.

   ‘쌈밥 같이 먹어요’ ―서서갈비
   ‘콜. 저만 아는 맛집이 있어요’ ―늑대는 떡볶이를 좋아해

   또 그들이었다. 서서갈비는 웬만하면 모든 게시물에 같이 먹자고 댓글을 달았다. 회원 정보를 확인해보니 최고등급인 금수저였다. 까칠하게 굴더니 다른 사람과 밥을 먹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늑대는 흙수저였다. 그렇게 활개를 치고 다녔지만 성과는 없는 듯했다. 왠지 이해가 됐다. 늑대의 댓글에 음흉한 속내가 다분했지만 이번엔 속아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늑대가 나에게 오라고 한 곳은 원조 노량진 제육볶음 맛집 ‘제육시대’가 있는 뒷골목에 위치한 ‘제육박사’라는 곳이었다. 제육시대는 한 손에는 기출문제집을 끼고 순서를 기다리는 공시생들이 즐비했다. 그곳은 나도 종종 가본 적이 있었는데 제육박사는 처음 보는 곳이었다.
   “여기서 제육볶음을 시키면요, 주인아줌마가 상추를 무제한으로 줘요. 대박이죠?”
   늑대는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처럼 안경을 추켜올리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의 입술은 건조해서 각질이 다 일어나 있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입이 찢어지게 웃는데 곧 피가 맺힐 것만 같아 내가 다 얼얼했다. 언제부터 입었는지 모르겠는 티셔츠의 목 부분은 한껏 늘어나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늑대는 딱 보니 노량진 경력 십 년 이상이 분명했다. 그런 사람들은 남들이 다 가는 식당은 가지 않으며 자신만의 단골 식당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아직도 모나미 볼펜을 하루에 열 개는 해치워야 진짜 공부를 했다고 믿었다.
   아, 네. 하하. 나는 해맑게 웃고 있는 늑대에게 차마 실망을 안겨줄 순 없어서 억지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런데 순간 어지러이 바닥에 펼쳐놓은 양파망 위를 기어가는 바퀴벌레와 눈이 마주쳤다. 젓가락을 쥐고 있는 오른쪽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식탁 위에는 방금 나온 제육 덮밥이 모락모락 김을 풍기며 양파를 품고 있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뛰쳐나오고 싶었다. 늑대가 상추쌈을 싸서 나에게 건넸다. 야무지게 쌈을 쥔 늑대의 손가락 끝에 새카맣게 때가 껴있는 손톱이 있었다.
   “드셔보세요.”
   “아니요. 제가 싸서 먹을게요.”
   나의 거절에 폭풍우가 지나간 것처럼 어둡고 썰렁한 그림자가 그의 얼굴 위로 스쳤다. 늑대는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나한테 다들 왜 이러는 거야. 하지만 굳이 모르는 사람과 밥을 먹기로 한 나 자신을 원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결국 늑대가 싸준 쌈을 받아먹었다.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안 가득 쌈을 넣은 채 우걱거리자 늑대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늑대의 입술 주름들이 펴지면서 핏방울이 살짝 맺혔다. 늑대가 혀로 입술을 한번 핥았다. 아, 가지가지 하는구나. 나는 울고 싶어졌다.
   아무리 아파도 떨어져 본 적이 없던 입맛이라는 것이 뚝 떨어져 공중분해가 되었다. 맘 같아서는 쌈을 도로 뱉어버리고 싶었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제육볶음을 못 먹게 될 것 같다는 슬픈 예감마저 들었다. 좋든 나쁘든 음식에 대한 기억은 다른 순간을 끼고 있는 기억보다 더 오래 남게 마련이니까.

   ‘잘 들어가셨나요? 오늘 저만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요. 너무 조금 드시던데 다이어트 안 해도 예뻐요.’
   늑대였다.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른 채 겨우 몇 숟갈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와중에 늑대가 번호를 물어보았다. 어떻게 해서든 빨리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전화번호를 찍어주고는 자리를 떴다.
   ‘이번엔 제가 샀으니 다음엔 질투 님이 사시는 거죠?^^’
   염병할. 나는 조용히 옆으로 스크롤을 밀어 차단 버튼을 눌렀다. 고독사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같이 밥을 먹지 않으리라. 나는 한숨을 쉬었다. 차가운 공기에 입김이 공중으로 내뿜어졌다. 그때 하늘에 뜬 달이 보였다. 손을 뻗으면 잡힐 듯 엄청나게 크고 밝은 보름달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나지막이 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 서울에 올라온 뒤 하늘을, 그것도 이렇게 큰 보름달이 뜬 하늘을 본 적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제야 아까 포털사이트 메인에서 ‘정월대보름에 먹는 음식’이란 기사를 봤던 게 생각이 났다.
   보름이면 늘 할머니가 해주던 쫀득쫀득한 찰밥과 고소한 나물을 먹고 보름달을 보고 소원을 빌곤 했다. 그런 것 하나하나까지 지켜나가는 삶을 다시 살 수 있을까. 그때는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 생각해보니 대단한 일들이었다. 이를테면 끼니때마다 따뜻한 국을 먹는 것, 동짓날에는 팥죽을 먹고 복날에는 삼계탕을 먹는 것 따위의 일들. 무슨 대단한 음식도 아닌데 사람들은 지정해 준 날에 먹지 못하면 평생 배를 곯아온 사람처럼 호들갑을 떨곤 했다. 사실은 그 음식이 먹고 싶은 게 아니라 그 음식을 해줄 누군가가, 내가 한 요리를 맛있게 먹어줄 누군가가, 같이 숟가락을 들어줄 누군가가 그리운 거겠지.
   처음 밥을 혼자 먹었던 날이 떠올랐다. 서울로 처음 상경한 날 냉장고가 고장나버려 집에서 가져온 반찬이 다 쉬어버렸다. 음식물쓰레기통에 반찬들을 버리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배는 고프고 하는 수 없이 햄버거를 사 먹었다. 고개를 아무리 젖히고 입을 크게 벌려도 소스가 묻은 양상추가 뚝뚝 떨어져 게걸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스물네 살의 나는 그런 모습을 남 앞에서 보이는 게 창피했다. 물론 지금은 신경도 안 쓰고 먹어 해치울 수 있는 나이가 됐고 아직 이룬 일은 없다. 나는 아직 이룬 일이 없는데 사람들은 뭐든 이뤄내는 것 같았다. 느는 것이라고는 혼자가 익숙해지는 일밖에 없었다.
   잠깐 서서 식탁에 접속했다. 익숙한 닉네임이 보였다. 서서갈비는 아직도 실시간으로 밥을 같이 먹자고 댓글을 달고 있었다. 저녁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아직 같이 먹을 사람을 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있는 걸 보니 좀 짠하기도 했다. 늑대의 후유증으로 아주 잠깐이나마 서서갈비가 그리워졌을 때라 막국수를 혼자 먹어 치운 괘씸함이 어느덧 옅게 흐려져 있었다. 나는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고 털레털레 걸었다. 그런데 저 앞에서 왠지 낯익은 사람이 눈에 띄었다.
   서서갈비였다. 서서갈비가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가로등 밑으로 서서히 다가오자 그녀의 얼굴이 점점 뚜렷하게 보였다. 서서갈비도 나를 발견하고 우뚝 섰다.
   “서서갈비……?”
   망신을 주려던 목적은 아니었지만 서서갈비라고 외치자 길을 걷던 사람들이 우리 쪽을 쳐다보았다. 서서갈비는 무척 당황해했다. 되게 거들먹거린다고 생각했는데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자 피식하고 실소가 터졌다. 늑대와 헤어지고 나서 긴장이 풀리자 미친듯이 허기가 몰려왔기 때문인지, 보름달이 유난히 밝아서 그랬던 것인지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서서갈비와 밥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을 같이 먹자는 나의 말에 서서갈비의 왼쪽 볼이 움푹 들어갔다.

   우리가 간 곳은 김밥천국이었다. 없는 것 빼고 모든 메뉴가 다 있는 곳. 서로 좋아하는 음식이 달라도 취향에 맞게 각자 다른 메뉴를 시켜도 되는 곳. 아무리 많이 시켜도 부담이 덜 되는 곳. 천국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곳.
   나는 노량진 김밥천국보다 참치김밥을 맛있게 마는 곳을 본 적이 없었다.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가 마요네즈와 참치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맛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서서갈비도 이곳의 참치김밥 맛을 알고 있었다. 원래는 마요네즈가 더 풍성했는데 홀 이모가 바뀐 뒤로는 아쉽게 변했다고 한다.
   나는 서서갈비가 노량진에서 사진관을 운영한다는 점, 안 가본 노량진 음식점이 없다는 점, 수많은 시험 응시생들의 사진을 찍어준다는 점, 어느 날 자기가 찍어준 사람이 최연소 고시 합격자라고 신문에 나와서 깜짝 놀랐다는 점, 이십 대에 응시원서 사진을 찍었는데 삼십 대에 다시 찍기 위해 찾아온 사람의 얼굴 근육이 너무 변해서 씁쓸했다는 점, 이제는 곧 완벽히 혼자가 될 거란 생각에 늘 마음을 다잡는 서른다섯의 한수연이라는 사람이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돈가스를 시켰다. 그녀는 일식 돈가스가 고급스럽지만 역시 무난하게 아무 때나 잘 들어가는 건 소스를 가득 머금은 천국의 돈가스밖에 없다고 말했다. 나도 매우 동의했다. 김밥천국의 돈까스가 아름다운 건 울퉁불퉁한 모양 때문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우리는 돈가스와 참치김밥을 시키고서 뭔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라면이라고 외치자 그녀가 다시 만두라면 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웃어 보이고는 음식을 주문했다. 나는 또 혼자 먹을 거냐며 농담을 건넸다. 그녀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쑥스러워했다. 매번 다른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고 나면 혼자만 정이 들어 더 힘들어서 일부러 무뚝뚝하게 굴었던 거라고 했다.
   “나는 사실 혼자 밥을 못 먹어.”
   이제 혼자 먹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녀가 말했다. 예전에 한 번 해장국을 혼자 먹으려 시도했다가 체했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사실 공무원 시험 말고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그녀는 공짜로 화가처럼 멋있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대신 매일 밥을 같이 먹는 것이 조건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침이 닿은 수저로 라면 국물을 떠먹었다. 더럽다는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나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흔하디흔한 것. 동시에 최고의 것. 가로되 사랑이더라”라는 시 구절을 떠올렸다. 다음번엔 그녀에게 노량진 할매해장국의 뼈다귀 맛이 얼마나 기가 막힌 지 알려줘야지. 덮밥이 그냥 밥보다 맛있는 것처럼 나쁜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덮어주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를 처음 만나는 날 보았던 서서갈비 집이 보였다. 가게의 입간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서서갈비의 뜻이란? 서로 ‘서’ 무리 ‘서’ ―서로 무리 지어 함께 맛있게 먹는다는 의미를 뜻합니다.

길푸름

삶에서 쓰는 가면은 나를 가두지만
소설을 쓸 때 쓰는 가면은 나를 자유롭게 한다.

2019/11/26
2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