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판에서 담배를 피우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검은 모래가 섞인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나는 구역질을 삼키고 난간에 기댔다. 목구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기갈은 점점 선명해졌다. 사람들의 머리 위로 거뭇거뭇한 모래가 내려앉았다. 잡초처럼 돋아난 돌들의 풍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도시와 도시를 가르는 커다란 강을 지나면 아무도 살지 않는 곶들의 서식지가 있었다. 개 한 마리 누울 정도의 크기를 가진 그곳에 다녀온 사람을 본 적은 없었다. 조막만 한 돌들 사이로 풀인지 석순인지 모를 조각들이 뾰족하게 허공을 찔러댔다. 돌들은 모래 위에 솟아난 보석처럼 빛났다. 언젠가 사진에서 본 그 모습을 나는 쉽게 잊지 못했다. 회색 음영이 진 사진을 찍은 게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사진이 든 오래된 액자가 나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내 뱃속이 강물처럼 간질거렸다.
   강을 바라보는 여행객들 너머 배와 뗏목 말고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선원에게 닻을 내리라고 소리쳤다. 착항을 준비하는 선원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때 선착장 너머 도시 저편에서 폭죽이 솟아올랐다. 폭죽은 커다란 소리를 내며 회색 하늘에 선명한 흔적을 남기더니 이내 잿빛 연기와 함께 떨어졌다. 풍작을 기념하며 열린 축제였다. 도시에 풍작이 왔다는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지만, 흔들리는 수면 위로 떠다니는 폭죽의 잔상은 꽃잎처럼 아름다웠다. 불꽃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방에서 여러 번 접힌 지도를 꺼냈다. 너덜너덜한 지도에는 점인지 둑인지 모를 얼룩과 메모가 가득했다. 나는 지도 귀퉁이에 적힌 희미한 필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빗물에 잠긴 도시 위로 둑이 솟아올랐다…… 이상한 문장이었다. 둑은 왜 도시 위로 솟아올랐을까, 화산이나 연기를 비유적으로 일컫는 걸까. 빗금은 지적도에 적힌 지명처럼 땅과 바다, 강 사이에 산발적으로 표시돼있었다. 마치 땅덩어리를 지우려는 듯이 혹은 넓히려는 듯이. 빗금은 교차된 방향에 따라 특정한 모양을 만들어냈고 만, 수, 공, 돛, 배, 석, 등의 글자를 떠올리게 했다. 그것들은 저마다 조금씩 길이가 달랐고 빗금을 칠 당시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낡은 지도 위에 각인돼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빗금 치는 자의 기억을 받아낸 지도. 빗금 위의 빗금, 누군가는 나에게 빗금 친 자리를 확인하는 여행자라고 불렀지만 그건 정확한 말은 아니었다. 잠시 후 선착장이 가까워지고 항구가 보였다. 사람들이 술렁거리며 짐을 챙겼다. 강가의 노점 주위로 푸른 카펫과 누런 천이 펄럭였다. 배가 멈추고 인부들이 갑판 위로 올라와 짐을 옮겼다. 잠시 후 배가 휘청거렸다. 승객들이 소리를 지르며 소란이 일었다. 근처에서 풍덩거리며 무언가 물에 빠지는 소리가 났다. 함께 배에 올랐지만 지금은 없는 사람들의 짐을 버리는 소리였다.
   그때 다시 폭죽이 솟아올랐다. 경적 소리가 강가를 메웠다가 사라졌다. 비명처럼 높고 깊은 소리였다. 멀리서 개들이 짖었다. 배에서 내릴 때 돌연 토기가 일었다. 목구멍에 붙어있던 가래가 위액과 함께 올라왔다. 바닥에 뱉은 침은 묽고 검었다. 침은 모래에 섞이지 못한 채 덜 자란 바위처럼 한곳에 고이더니 이내 밀려온 강물과 함께 땅속으로 사라졌다. 고개를 들었을 때 처음 보는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먼지가 달라붙은 아이들의 머리카락은 바람이 불어도 나부끼지 않았다. 도시의 아이들은 도시의 검은 돌처럼 단단하고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모래가 쌓인 강가의 선착장 너머 연기가 솟아올랐다. 나는 아이들에게 학교가 어느 쪽이냐고 물었다. 무리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이가 말했다. 학교는 왜요? 선생님이세요? 손가락을 빨던 아이가 도시의 가장자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짓다 만 건물들 사이로 부서진 철탑이 보였다. 학교가 있던 곳에 누군가 빗금을 친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와 찢어진 배표를 꺼냈다. 아이들은 어느새 강가 저편으로 달려가 이윽고 보이지 않았다.
   맵고 쓴 바람이 불어온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장례식장에서 시작된 재가 강변에 흩날리고 있었다. 희뿌옇고 투명한 재가 끝없이 펼쳐진 강변 주위를 회색으로 물들여갔다. 강변 한구석에 놓인 시체들 위로 누런 천이 덮여 있었다. 천이 날아가지 않도록 고정한 돌의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돌을 줍고 일당을 받은 아이들이 노점 주변에 삼삼오오 모여 때를 기다렸다. 노점에서 얼룩덜룩한 무늬의 얇은 천을 무더기로 쌓아 팔고 있었다. 나는 가판에 시체처럼 쌓인 천들을 바라보다 새파란 얼룩이 가득한 두터운 광목을 집었다. 주인은 새로 꺼낸 린넨 한 무더기를 가판 위에 내려놓고는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후 선명하고 밝은색의 천을 한 무더기 가져왔다. 가게 주변으로 검거나 회색 천을 온몸에 뒤집어쓴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망치와 삽을 든 인부 서너 명이 선착장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천들을 만지작거리며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지도 귀퉁이를 떠올렸다. 인부들이 나를 바라보며 침을 뱉었다. 내가 아니라 내 뒤의 강을 바라보는 것일지도 몰랐다. 주인은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시체는 어림잡아 열 구가 넘었다. 천 밖으로 삐져나온 새까만 발목에 잔뜩 모래가 묻어있었다. 천막 안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인부를 찾는 유족들과 일감을 구하는 사람들 사이로 아이들이 돌아다녔다. 아이들은 여행객의 짐을 들어주거나 유족에게 인부들을 소개시켜 주느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사무실 앞의 한 남자가 근처를 서성이던 아이를 붙잡아 무언가 말했다. 아이는 남자에게 관심 없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심부름 할 아이는 채석장의 돌가루처럼 차고 넘쳤다. 아이들 대여섯이 인부와 유족들 사이를 오갔다. 누군가 자신들에게 말을 걸까 봐 아니 걸지 않을까 봐 조급한 표정이었다. 검은 눈동자가 바람에 날리는 낡은 천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는 입을 다물고 있던 아이에게 다가갔다. 체구가 작아 여잔지 남잔지 나이는 몇 살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의 얼굴은 갓 태어난 염소 같았다. 아이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을 때 방향이 다른 두 개의 눈동자가 각각의 자리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검은 강물처럼. 아이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더니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호기심으로 붉게 물든 볼이 씰룩거렸다. 근처에 학교가 있나요?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불었지만 아이의 짧은 머리카락은 먼지와 모래로 굳어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학교 근처까지 데려다줄래요? 아이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시내를 향해 걸어갔다. 나는 아이를 따라 강변을 가로질렀다. 물에 빠진 개가 비명을 질렀다. 아무도 강물에 뛰어들지 않았다. 노인 두 명이 강가에 앉아 허우적거리는 개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개는 지친 표정으로 강에서 나와 몸을 흔들었다.
   아이는 이따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언제든 자신이 마음대로 사라질 수 있다는, 단지 호의로만 이루어진 이 시간을 잘 지켜보라는 눈빛이었다. 나를 경계하는 건 아이가 아니라 도시였다. 도시는 적당히 분주하고 어수선했지만 동시에 금방이라도 누군가를 찌를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칼을 품고 있었다. 비밀의 냄새가 났다. 지나가던 인부 한 명과 어깨를 부딪쳤지만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강에 빠졌던 개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인부 둘이 자리에서 일어나 길 저편으로 걸어갔다. 강변에서 시체를 덮은 누런 천 하나가 바람에 날려 천막 위로 날아갔다. 그 바람에 죽은 몸 하나가 창백한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천을 뒤집어쓴 유족이 시체 곁에 엎드렸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흔들림. 누군가 흰 천을 가져와 시체 위에 덮었다. 그 바람에 곁에 엎드려있던 유족의 몸이 흰 광목에 가려졌다. 두 마리의 개가 하품을 하며 붉은 혀를 내밀고는 입맛을 다셨다. 화장된 뼈를 수거하는 인부들이 양동이를 지고 강가를 돌아다녔다. 강변의 돌가루 사이에는 잘게 빻은 뼛가루가 섞여 있었지만 모두 고운 모래처럼 보였다. 텁텁한 모래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뼈의 맛일지도 몰랐다. 눅눅한 비린내가 공기에 섞여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냄새는 도시 어디에나 바싹 달라붙어 있었고 나는 낡고 깊은 지하실을 끝없이 헤매는 기분이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매운맛이 코와 입에 가득 찼다. 아이를 따라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채석장에 앉아있는 인부들을 지나 돌무덤이 늘어선 곳으로 이동했다. 잠시 후 도시의 북문이 나타났다. 오래전 중단한 공사장의 잔해가 보였다. 우리는 환영하지 않는 손님을 마주친 주인에게 다가가듯이 걸음을 늦추고 건물들을 올려다봤다. 제멋대로 삐져나온 철근과 함부로 놓인 콘크리트 조각들이 누군가 일부러 그곳에 갖다 놓은 것처럼 길목을 막고 있었다. 아이가 말했다. 여기로 쭉 가면 학교가 나와요. 아이가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아이의 얼굴과 도시의 잔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짓다 만 건물과 벽돌 사이로 삐져나온 철근은 마치 화살처럼 잔해를 꿰뚫고 있었다. 초식동물의 사체처럼 방치된 건물들은 오래전 폭발로 제 모습을 잃은 지 오래였고 그건 마치 지도 위의 수많은 빗금 같았다. 아이가 부서진 콘크리트 더미 위로 올라가더니 희미하게 보이는 봉우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이가 활짝 웃으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학교였다. 벌어진 앞니 사이로 컴컴한 입안이 보였다. 타르를 칠한 것처럼 까맣고 깊은 입. 콘크리트 더미를 오르내리는 아이의 발에 붉고 푸른 멍이 가득했다. 나는 숨을 고르며 느린 걸음으로 아이를 따라갔다. 아이가 물었다. 혹시 선생님이세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학교엔 왜 가세요? 아이의 목소리는 가까이 가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고 여러 음색이 섞여 독특하게 들렸다. 누굴 좀 만나려고요. 나는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아이는 이상하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거긴 이제 아무도 가지 않는데. 나는 자리에 서서 아이를 바라봤다. 궁금한 것이 끝나지 않은 아이의 얼굴 위로 기이한 눈동자가 어항 속의 구슬처럼 흔들렸다.
   그때 개가 짖었다. 우리는 고개를 돌려 북문의 반대쪽을 바라봤다. 부서진 건물의 행렬이 끝나는 사거리였다. 회색 하늘 아래 회색 지붕과 회색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 때문에 사물 간의 경계가 불분명했다. 무언가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마치 아지랑이 같았다. 아지랑이는 점점 선명해졌다. 꼬리를 세운 검은 귀의 개였다. 아이가 발이 묶인 듯 잔해 위에서 꼼짝 않고 나를 바라봤다. 개는 다갈색 몸에 귀와 입 주변이 검었다. 건장하고 우람한 체격 아래 길고 마른 다리가 불안한 듯 서성였다. 멀리서 본다면 작은 말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커다란 짐승이었다. 아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조심하라고 말했다. 몸을 숙이고 건물에서 내려온 아이가 서둘러 북문을 향해 뛰었다. 아이는 금세 사라졌다. 나는 아이가 사라진 길목과 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길목에 여전히 먼지가 일었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골목 입구에는 잔해와 먼지만 남아 처음 본 거리마냥 낯설었다. 개는 잔해 주변을 어슬렁거리더니 아이와 마찬가지로 골목 너머로 걸어갔다. 빗금 너머 개가 짖었다. 개가 있던 자리에 먼지 섞인 검은 아지랑이가 낮게 피어오르다 사라졌다. 멀리서 여러 마리의 개가 한꺼번에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오로지 개의 울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다시 강가로 돌아갔다. 강변도 북문 거리도 아닌 그사이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자 문득 도시의 주인이 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해졌다. 조금 숨이 찼다.
   개 짖는 소리를 따라 얼마간 걸어가자 강가와 다르게 활기찬 거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검은색 천을 온몸에 두른 사람들이 사거리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곳은 시장과 상가가 있는 번화가였다. 가벼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서로를 지나쳐갔다. 강가에서 본 인부들과 비슷한 골격의 사내들이 골목 끝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행인들은 대체로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위, 아래 각각 다른 색으로 꾸며진 옷감들은 무척 부드러워 보였다. 채석장에서 가지고 온 돌을 사람들이 다듬고 있었다. 어떤 돌은 크고 어떤 돌은 작았다. 돌로 만든 크고 작은 비석들이 작업장 바닥에 가득했다.
   담배를 입에 문 남자가 인부를 찾느냐고 물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학교로 가는 길을 아느냐고 물었다. 남자는 담배를 한 모금 빨고는 느린 말투로 대답했다. 그 일이라면 지금 딱히 해줄 수 있는 건 없어. 우리들은 일을 기다리고 있느라 시간이 없으니까. 저기 저 손님한테 학교가 있는 동네까지 같이 가줄 수 있냐고 물어보시오.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가 채석장 한가운데 있는 간이 건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가 누군가를 데리고 나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옷을 입은 유족이었다. 그건 마치 움직이는 유령 같아 보였다. 눈이 있는 부분만 조그맣게 망사로 되어 있어,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사람에게 말을 걸지 마시오. 어차피 대답하지 않을 테지만. 담뱃재를 손바닥에 털며 남자가 말을 이었다. 장례를 앞둔 유족은 타지인과 말을 섞으면 안 되기 때문이오. 우리 같은 일꾼들이야 어쩔 수 없지만. 그렇지 않으면 시체가 물에 떠내려가 버릴지도 몰라. 그대로 떠내려가 다신 돌아오지 않든가, 더 운이 나쁘면 둑에 처박혀버릴 수도 있지. 개들이 사는 둑에 대해 들어 봤소? 들어 봤다고? 그럼 이 섬을 거의 아는 거나 다름없지. 개들은 지옥에서 왔기 때문에 시체를 먹어야만 성불할 수 있는 거요. 알고 있소? 그들은 사실 다 죽은 놈들이야. 죽어서 뼛속까지 시체인 놈들이지. 그런데 학교에 간다고 했소? 학교는 왜 가는 거요? 그곳엔 아무것도 없는데.
   검은 옷을 입은 유족과 나는 채석장을 나와 시내의 사거리를 가로질렀다. 그는 걸음이 빨랐다. 맞은편 골목에서 오토바이가 달려왔다. 사선 방향으로 난 건물을 향해 유족이 말없이 걸었다. 나는 그의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커브를 도는 오토바이가 건물 너머 빠르게 다가왔다. 나는 유족의 팔을 잡고 건물 벽으로 몸을 돌렸다. 오토바이가 먼지를 내며 순식간에 지나갔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났다. 개 소리는 먼지처럼 도시 어디에나 달라붙어 있었다.
   우리는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 채 먼지가 사라지길 기다렸다. 망사 너머 크고 까만 눈이 빠르게 깜빡거렸다. 어린아이의 눈처럼 검고 반짝이는 눈이었다. 유족의 팔은 가느다란 뼈와 최소한의 부드러운 살로 이루어진 섬세한 조각 같았다. 나는 그 조각을 좀 더 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다시 걸었다. 물컹거리는 살의 감촉이 신기루처럼 손안에서 감돌았다. 돌연 목이 말랐다.
   그곳은 번화가 뒷골목에 자리 잡은 한적한 주택가였다. 유족은 말없이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가더니 어느 허름한 집의 문을 열었다. 골목에 늘어선 집들은 모두 비슷한 외관에 비슷한 문이 달려 있었고 초행이라면 결코 찾을 수 없을 어떤 문을 연 유족을 따라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누가 봐도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었는데 평범한 가구와 소품으로 꾸며진 내부는 따뜻하기까지 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던 유족은 잠시 후 검은 천을 벗고 나왔다. 깊고 커다란 까만 눈과 머리카락. 비쩍 마른 거리의 아이와 다르게 유족―그 여자―의 얼굴은 적당한 영양으로 채워져 보기 좋은 혈색이 감돌았다.
   학교에 가신다고요? 여자의 청명한 목소리가 집안에 울렸다. 여자는 쉴 새 없이 재잘대며 곳곳에서 짐을 챙겼다. 아까 인부들이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신경 쓰지 마세요. 믿음 하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요. 나는 여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뜻이죠? 여자는 잠시간 말을 고르다가 대답했다. 개들은 없어요. 개들이 있는 둑도 없죠. 그런 건 다 거짓말이에요. 나는 여자의 화려한 얼굴을 쳐다봤다. 여자는 탁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하고는 찬장에서 차를 꺼내 물을 끓였다. 저는 조금이라도 집에 들렀다 나가요. 항상 검은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건 정말 답답하거든요…… 장례식은 한참이나 밀려있고 인부들은 항상 바빠요. 그들은 매일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어요. 하여간 성가신 사람들이에요. 오히려 외지인이 편하다니까요. 어차피 모두가 외지인 아니겠어요? 누군가는 이곳에 와 살았을 거고, 우린 그게 누군지 모르니까요. 차 좀 드릴까요?
   여자의 목소리는 살갑고 친근했다.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다정하게 들렸다. 검은 천을 벗은 여자는 무언가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닌 상태로 집 안을 돌아다니며 눈에 보이는 물건들을 만지고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나는 여자의 장례에 조의를 표하고 싶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이 동네는 모두가 장례 중이니까요.
   나는 여자가 내준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쌉쌀한 민트 향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텁텁했던 입안이 화사한 향으로 가득해졌다. 입을 축이고 나는 여자에게 물었다. 곶은 여전히 그곳에 있나요? 여자는 창가에 놓인 화분 아래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다 화분을 도로 내려놓고는 탁자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가방에서 지도를 꺼내 여자에게 건넸다. 여자의 손에서 낡은 지도가 부스럭거리며 펼쳐졌다. 여자는 지도를 눈앞에 들고 구석구석 살폈다. 한참 뒤, 여자가 말했다. 이건 옛날 지도군요. 나는 빗금 치는 일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뜨거웠던 차가 식으며 비린 향을 풍겼다.
   신기하네요. 아주 어릴 때 본 기억이 나요. 친구네 집에서요. 그 친구는 이제 없죠. 작년에 죽었거든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럴 수도 있는 거죠. 여긴 죽음이 개 발자국처럼 널렸어요. 그럴 수도 있죠. 여자가 지도를 탁자에 내려놓고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내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나는 여자의 행동이 무례하거나 비이성적으로 느껴지진 않았지만 여자의 얼굴에 나타난 의문과 붉은 홍조를 놓치지 않았다. 여자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빗금장이를 만나러 가는 거군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그를 본 사람이 없어요.
   짐을 챙긴 여자가 방에서 다시 검은 옷을 입고 나왔다. 여자와 나는 집을 나와 시내 쪽으로 걸었다. 나는 말없이 여자를 따라갔다. 우리는 걷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침을 삼키자 입안에 남아있던 민트향이 되살아났다. 뱃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혹시 빗금장이를 만난다면. 여자가 검은 옷 안에서 웅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숙여 여자의 얼굴 가까이 귀를 댔다. 도로의 삭막한 공기에 여자의 땀 냄새가 섞였다. 입안에는 여전히 민트 향이 남아있었다. 검은 천 아래 숨겨진 여자의 손이 끊임없이 움직였다. 작은 동물의 떨림처럼 부산하고 희미했다. 여자의 목소리는 어딘가 간절하고 또 조급하게 들렸지만 그건 새까만 옷과 눈을 가린 망사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의 품에 든 조급함이 무엇이든, 여자가 준 민트차를 다시 마시고 싶어졌다. 잠시 후 우리는 사거리에서 헤어졌다. 여자는 다시 인부를 찾으러 강가로 걸어갔다. 뒤를 돌아봤을 때 검은 옷자락은 비슷한 수많은 부드러운 비단 자락에 섞여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여자가 알려준 대로 골목을 지나 큰길을 따라 걸었다.

   학교는 오래전 문을 닫았기 때문에―아마 도시의 폭격 이후―이제 그곳을 지나는 사람은 무장한 군인이거나 길을 잃은 미치광이밖에 없을 거라고 여자는 말했다. 그러나 미치광이는 보이지 않았고 반다나를 쓴 젊은 남자들이 어깨에 기다란 총을 메고 거리에 돌아다녔다. 남자들은 인부들보다 키가 컸고 주름 하나 없는 뚜렷한 이목구비를 찡그린 채 행군하는 군인들처럼 걸어갔다. 남자들의 얼굴을 가린 거리의 먼지와 투명한 햇빛이 그들의 얼굴을 흙빛으로 버무렸다. 나는 남자들의 얼굴을 손으로 만지고 싶었다. 얼굴에 묻은 먼지와 흙을 걷어내고 그들의 얼굴에 빗금을 치고 싶었다. 오른쪽 셋째 손가락에 잡힌 굳은살이 그동안 친 수많은 빗금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빗금을 칠수록 둑은 보이지 않았고 지도는 점점 빗금의 흔적으로 얼룩져갔다. 남자들의 원래 얼굴. 여자의 부드러운 피부. 나는 누군가의 얼굴에 띈 홍조가 되고 싶었던 걸까. 그런 일에 대하여 나는 오래도록 생각했다. 그것이 얼마나 황홀할지 혹은 끔찍할지 혹은 아무렇지도 않을지, 나는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모래바람과 개, 폭약의 환영과 도시의 잔해를 지나 거의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때 나는 눈앞에 나타난 허름한 건물을 올려다봤다. 활짝 열린 정문 너머 건물의 입구는 굳게 닫혀 있었다. 곧고 도드라진 얼굴이 건네는 무심한 인사처럼 입구는 한없이 차갑고 또 멀어 보였다. 돌연 현기증이 났다. 복통과 두통이 한꺼번에 찾아와 나는 어서 아무 데나 눕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열락과 환각이 서서히 몸을 덥혀오는 가운데 알싸한 민트의 맛이 입안에서 퍼졌다. 나는 난생처음 오한을 겪는 아이처럼 슬픈 기분이 들었다. 먼지가 잔뜩 인 바람이 나를 치고 지나갔을 때, 나는 커다란 복통을 느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제 너의 차례야……
   여자인지 아이인지 모를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고 나는 눈을 뜨자마자 오각형의 이국 양식이 그려진 천장을 보았다. 천장 끝에 매달린 작은 조각은 아주 작은 뼈로 만든 모빌이었다. 배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창가를 등진 사람의 희끗희끗한 머리 뒤로 커다란 유리창이 흔들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눈보라처럼 거대한 모래폭풍이 펼쳐졌다. 흰 머리카락의 사람은 테이블에 놓인 문서 더미 사이에 고개를 묻고 있었다. 방 안에는 오래된 잉크와 종이, 먼지와 습기 먹은 천의 냄새가 가득했다.
   이젠 너의 차례야……
   꿈속에서 들었나 싶은, 그러나 오랫동안 귓가에 머물러 있던 것만 같은 목소리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벽에 붙은 커다란 지도 위에는 수많은 빗금이 쳐져 있었다. 그 소파는 낡아서 오래 누워있으면 허리가 다 망가질 걸. 낮고 선명한 목소리가 말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서진 건물처럼 몸의 관절들이 부자연스럽게 삐걱거렸다. 앞섶을 여몄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낡은 건물의 곰팡내와 먼지가 가득 찬 방 안에서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가방을 건넸다. 오랫동안 몸에 지니고 있던 나의 여행 가방이었다. 낡은 가방 안에는 세면도구와 상의, 그리고 낡은 지도가 접혀 있었다.
   깊고 어두운 밤, 나는 오래도록 찾던 그의 방 낡은 안락의자에 앉아 그토록 그리웠던 처음 보는 얼굴을 들여다봤다.
   갓 내린 민트 차와 헤이즐넛 열매가 놓인 원목 탁자가 우리 사이에 놓여 있었다. 창밖에서 부는 바람 소리는 단단한 벽돌과 두꺼운 유리창에 막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는 둥글게 굽은 등을 천천히 세우고 나를 바라봤다. 인부들의 주름과 젊은 군인의 찡그림이 섞인 낯설고 커다란 얼굴이 나를 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둑에 간 적이 있어. 그건 아주 오래전 일이야. 똑똑히 기억하는 건 둑에 살던 개 무리와 그들이 내민 혀에서 떨어지던 육즙 같은 침…… 개들이 뜯어먹은 시체들은 하얗게 불어 있었고 푸르게 변한 피와 내장이 개들의 입가에 묻어 있었지. 개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털색을 가지고 있었는데, 녹색, 황색, 적색, 흑색, 밝은색, 어두운색…… 그들은 서로 아주 많이 닮았지만 똑같이 생기진 않았고, 모두가 형제이고 또 어미와 새끼인 구부정한 종족이었어. 개들은 저마다 생김새가 조금씩 달랐는데 귀 사이에 뿔 같은 혹이 나 있는 놈도 있었고 꼬리 옆에 작은 사마귀가 나 마치 두 개의 꼬리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놈도 있었지.
   개들의 눈을 마주한 순간, 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건지, 내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조금도 기억나지 않더군.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맙소사, 신이시여. 죽음의 한가운데가 있다면 그곳을 말하는 거라는 걸 그때 알 수 있었지. 갑자기 저 멀리 둑의 반대편에서 개 짖는 소리가 났고 침을 흘리며 나를 향해 으르렁거리던 개들이 일제히 뒤돌아 달려갔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 나를 외면하고 저 멀리 달려가는 개들의 뒷모습이……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는 이 방에 들어왔고, 그때로부터는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알았지. 나는 줄곧 이곳에 혼자 있고 싶었다는 걸. 아무도 찾아오지 못하는, 나조차도 나갈 수 없는 캄캄하고 고요한 나의 유일한 방에서. ……나는 누군가를 찾으러 둑에 갔어. 나의 연인이자 나의 밤,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할 죄인의 시체를 찾아서…… 지금이야 인부들이 채석장의 돌부리만큼 많고 도시의 거의 모든 사람이 돈만 있다면 어렵지 않게 잃어버린 죄인의 시체를 찾을 수 있다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지.
   시체 때문에요?
   그래, 시체 때문이었지. 고작 시체 따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앞에 놓인 낡은 탁자 앞에 섰다. 흰색 자기로 된 주전자와 손바닥보다 작은 잔을 들고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잔에 든 물이 그의 불안한 걸음걸이에 맞춰 조금씩 흔들려 이윽고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가 말없이 나를 보았다. 나는 오랫동안 묻고 싶었던 질문을 두서없이 던져놓았다.
   개들이 정말 그들을 먹었을까요?
   아마도.
   그럼 이제 어떡해요?
   무엇을?
   우리는 어쩌죠?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항상 개 짖는 소리가 들려요. 소리는 언제나 날 쫓아와요.
   그건 어쩔 수 없어. 어떻게 환청 하나 없이 살아갈 수 있겠어.
   우리는 그날 꼬박 밤을 새워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나에게 오래전 둑에서 살아 돌아온 이야기를 해준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그가 지도에 빗금을 친 최초의 사람이 된 건 아주 나중에 일어난 일이다. 나는 당신을 따라 지도에 빗금을 쳤다고 말한다. 빗금을 치며 떠난 여행에서 일어났던 온갖 사건들에 대해 다소 자랑스럽게, 흥분된 마음으로 주절거린다. 그것들은 슬프기도 하고 신비하기도 하고 더러 위험한 것들이었다.
   어느 깊은 밤, 길을 잃었던 공산국가의 골목에서 나는 분홍색 점퍼 하나만을 몸에 걸친 늙은 남자를 만났다. 빛이라곤 달밖에 없는 어둠 속에서 그의 입술만이 세상이 남은 단 하나의 별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빛은 선명한 분홍이었고 남자는 점퍼 앞섶을 열더니 나를 향해 걸어왔다. 나는 뒤를 돌아 정신없이 달렸고 남자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오래된 다리와 건물들 사이를 지나 마침내 입구에서 길을 잃었던 숙소로 돌아갔다.
   개 짖는 소리가 달빛처럼 나를 좇던 밤, 나는 남자의 입술에서 시작된 분홍색이 강을 건너 이곳에서 검은 천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그에게 말한다. 아까 그것과 똑같은 분홍색을 보았거든요. 우리는 향긋한 민트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나에게 자신의 일을 대신 맡아달라고 말한다. 그것은 지도 위에 빗금을 마저 치는 것이다. 그것은 매우 어렵고 정교한 작업이었으나 오랫동안 그의 발자취를 좇던 나에게 매우 적합한 일이었다. 나는 기꺼이 수락한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바랐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의 일을 잇기 위해 오랫동안 여행을 한 거라고, 지도 위의 빗금처럼 중얼거린다.
   어느 날 지도 위에 빗금을 치다 문득 창밖을 바라봤을 때 나는 세계의 풍문을 전해주던 늙은 상인을 떠올린다. 낡고 오래된 옹이 자국이 있는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나는 빗금을 치고 있다. 차와 먼지 냄새가 뒤섞인 천장이 높은 방에서 한쪽이 패인 책상에 팔을 얹고 축축한 지도 위에 고요한 빗금을 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 느껴지는 밤이다. 나는 눈 앞에 펼쳐진 지도를 바라본다. 수많은 강과 만 사이로 둑이 들어서 있다. 둑은 저마다 크기와 모양새가 달랐다. 그러나 내가 찾는 단 하나의 곶은 세상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곶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연필로 빗금을 쳤다. 이미 사라진 둑과 새로 생겨날 곶 사이에서 빗금은 창문을 가리는 커튼처럼 지형을 어그러뜨린다. 빗금은 끊이지 않고 강과 강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에 빼곡하게 채워진다. 나는 단 하나의 빗금을 그리기 위해 그 멀고 먼 길을 걸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너의 차례가 돌아온다.
   바람이 부는 어느 날, 나는 책상 위에 엎드려 길고 긴 잠에 빠진다. 창밖의 모래폭풍이 매섭지만 그것은 곧 분홍색이 섞인 신비로운 눈송이가 되어 부서진 도시와 강변을 물들일 것이다. 강가를 떠돌던 개와 아이가 만나 사랑에 빠질 때 주변에는 민트 향이 가득하고 그것은 검은 부르카 여인이 가져온 최상품의 찻잔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나는 깊고 긴 꿈에서 선명한 기억을 만난다. 그것은 모든 것이 준비된 사람에게만 다가오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뱀 이야기의 결말이었고 나는 지문이 닳은 손을 들어 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차갑고 축축한 이야기의 결말을.

지혜

그때 뗏목을 타고 강물 위에 초를 띄웠다. 사진 속에는 전에 없이 창백하고 환하게 웃는 내가 있다. 웃지 않는 내가 웃고 있다. 다리 아래로 뗏목이 지나갈 때 모르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야시장의 반짝거리는 불빛이 강물 위에 하얗게 떠다녔다. 그곳에 아주 중요한 걸 놓고 온 것 같은데 그게 뭐더라. 그게 뭐더라. 하여간 길고 간절한 소원을 빌었고 나는 줄곧 모르는 도시에 도착한 어떤 부르카와 부르카들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오랫동안.

2018/11/27
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