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사람의 친구들



   기다리느라 늙고 지친 친구들은
   아무거나
   무엇이나 믿고 싶은 마음을 견뎠어요
   다 같이 방문을 닫아주면서, 둘러앉아 그가 키운 과일을 깎아 먹으면서 다짐했지요

   깨워달란 말은 이제 믿지 않겠다고

   최선을 다해 즐거워져도 가을은 온다고요.
   오며 가며
   닳아버린 운동화 몇 켤레가 아깝지는 않았어요

   다만
   그가 여름에만 들고 다니던 바구니에서
   복숭아들은 열심히 둥글어지고
   원을 허물며
   하나뿐인 헛소리

   하나뿐인 세계가 되어가고

   거기선 미치도록 달콤한 냄새가 나 마지막으로 집어보고 싶었어요

   멀리 떨어진 해변에서 주운 소라를 들어 조심스레 귀에 갖다 대면, 그대로 오래오래 숨을 참으면
   눈앞의 파도와 가장 먼 파도
   세상 모든 파도가 되고 싶었던
   단 하나의 파도 소리가 밀려들어오던 것을 떠올리면서

   마음을 견뎠어요

   곤두섰어요
   털이
   한 손에 꽉 들어차는 세계의 모서리가
   겁에 질린 것도 같았어요
   붉지도 희지도 않은 껍질처럼

   물결에 사로잡힌 눈동자처럼

   복숭아들은 각기 다른 모양으로 딱딱해졌지요

   그는 아직도 깨어나지 않고
   그들은 잠든 사람의 친구인 것이 좋았어요





   roller printing



   절벽에서 아주 조용하게 떨어지는 물, 그보다 조용하게 움직이는 물개들.

   펜을 들고 있는 손 모양의 일러스트

   그들끼리 어떻게 교감하는지, 어떻게 사고하고 실수하고 판단하는지
   알기 위해 기다려야 했었겠지만
   읽는 순간 시작되는 물개들의 길
   화면보다 길게 뻗어 따라잡지 못할 때, 움직임마저 조용해 들을 수도 없을 때
   당신은 돌아간다 시의 첫 줄로
   화면 속에 가득한 절벽 밑으로.
   자세히 관찰하고 파악하려면, 결혼 우정 사기 같은
   비밀을 부여하려면
   무한한 절벽 밑을 지나게 하고, 의미가 담긴 물을 떨어트리고, 수다스러운 성격으로 바꿔주거나
   물개보다 느린 동물, 아니면 식물 하다못해 사물로 고쳐 써주고
   재우고 먹이고 포옹시키고
   잠시 멈춰 세울 수도 있는 거지만
   첫 문장이 좋아서 그대로 둔다.
   밝히고 싶은 세계가 너무 많지만

   절벽 아래 조용히 움직이는 물개가 좋다.
   이제 그것 없이 다음 장면이 온다. 햇빛을 받으면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함께 생기는 것처럼.

김연덕

빛이라는 단어가 빛처럼 생겨서 좋다.

2019/09/24
2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