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당신의 시를 읽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나는 시를 쓸 이유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서대경 씨는 커피잔을 내려다보며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인에게 말한다. 그들은 기차역 안에 위치한 어느 작은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있다. 카페 문에 달린 작은 종이 딸랑거릴 때마다 외부의 웅성거림이 잠시 섞여들다 곧 조용해진다. 서대경 씨는 가끔 그녀의 얼굴이 있는 쪽을 들여다보지만, 비좁은 실내를 뿌옇게 채우고 있는 커피 내리는 기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증기가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다.
  「하지만 당신은 알고 있어요. 당신의 문장이 나의 문장을 쓴다는 것을요.」 그녀가 속삭인다. 「나는 당신이 존재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어쩌다 친구를 통해 당신의 원고를 읽게 되었고, 곧 당신이 나보다 먼저 나를, 그러니까, 내가 쓰고자 하는 나의 시를 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내가 당신에 대해 쓰게 된 건 그때부터입니다.」 서대경 씨는 그녀가 테이블 위에 올려둔 새 원고의 첫 페이지를 다시 읽어본다. 그것은 차갑고 짙푸른 대기를 서서히 옅어지게 하면서 서대경 씨가 살아가는 도시의 겨울 저녁을, 이를테면 눈 녹은 물웅덩이 위로 점멸하는 네온사인 불빛과 광장을 가로지르는 전차의 경적 소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들은 도시 변두리 카페에 앉아 있는 서대경 씨와 그의 친구인 흡혈귀 소설가가 나누는 대화였다. 「난 오히려 당신의 문장이 내 문장을 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서대경 씨가 고개를 들고 씁쓸히 웃으며 말한다.
  「물론 내 시에 당신을 등장시킨 건 사실이에요.」 보이지 않는 그녀의 얼굴이 말한다. 「하지만 그걸 원한 건 바로 당신이었어요. 오늘 당신이 나를 만나기를 원했던 것처럼요.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났지만, 당신은 이미 내가 당신을 찾아낼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요. 이곳 기차역 카페의 문을 열고 당신이 앉아 있는 자리를 향해 내가 걸어오리라는 것을, 당신 앞에 내가 앉게 되리라는 것을요. 그리고 아마도 당신과 내가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겠지요. 당신은 모르고 있지만, 당신은 알고 있어요. 왜냐하면 당신은 지금 꿈을 꾸고 있고, 나는 지금 당신의 꿈속에 있으니까요.」
  카페 문에 달린 작은 종이 딸랑거린다. 서대경 씨는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본다. 「기차가 곧 도착하겠군요. 미안하지만, 난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분명한 건 당신이 내가 쓰고 있는 원고를 모두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다는 겁니다. 당신의 시를 읽은 뒤부터 내가 쓰는 문장마다 당신의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마치 당신의 그 웃음소리가 내 원고에 메울 길 없는 구멍들을 뚫어놓은 것 같단 말이지요. 하지만 솔직히 말하지요, 당신 말대로 내 문장이 당신의 문장을 쓰는 것이든, 당신의 문장이 내 문장을 쓰는 것이든, 혹은 당신이 나를 쓰는 것이든 내가 당신을 쓰는 것이든, 그런 건 이제 내 알 바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래전부터 난 그 구멍들이 마음에 들었으니까요.」
  서대경 씨는 카페 유리창을 통해 인파에 섞여 기차역 출입구를 향해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서대경 씨는 그녀가 남겨두고 떠난 원고를 다시 펼친다. 그녀의 문장들이 그려내는 도시의 얼어붙은 거리들을 본다. 떠도는 눈발을, 광장 시계탑 아래 서 있는 그녀의 흐릿한 형체를, 그리고 달빛 깔린 헌책방 거리를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 서대경 씨의 야윈 뒷모습을 본다. 그가 나직하게 웃는 소리를 듣는다. 서대경 씨는 원고를 덮는다. 기차의 경적 소리가 들려온다. 서대경 씨는 원고를 가방에 넣고, 모자를 쓰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밤골목



   그의 의식은 청천벽력의 타는 연기였다. 인파와 차량들 속을 그는 헤매었다. 입안에 면도칼을 숨겨 가지고 다니는 소매치기 아이들이 전차 기둥에 매달려 어둑한 저녁 불빛을 가르며 멀어져갔다. 그의 의식은 주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의식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 그의 의식은 카페를 나와 눈 녹은 물웅덩이에 반사되어 석유처럼 번들거리며 쇼윈도 사이를 갔다. 호객꾼이 그의 옷깃을 붙잡았고 그의 의식은 열리는 가게 문 너머 형광등 불빛 속으로 흩날리는 눈발을 보았다. 호객꾼을 따라 그의 의식은 지하로 난 계단을 내려갔다. 돌아보니 종적 없는 어둠이었다. 그의 의식 앞으로 짐승 내장처럼 꿈틀거리는 밤골목이 새벽으로 이리저리 갈려 뻗어가고 있었고 그의 의식은 꿈의 웅덩이를 철벅이며 그 길을 갔다. 때로 그의 의식은 무섭게 돌진하는 기차와 나란하였다. 벌레들 우는 무덤가에는 풀이 무성했다. 그의 의식은 차단기 앞에서 귀를 쫑긋대는 염소 떼와 함께 서 있었다. 낚싯대를 드리운 외눈박이 아이들 곁에 쪼그려 앉아 검은 쥐들이 앞다퉈 뛰어드는 부글거리는 물웅덩이를 구경했다. 개울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 온천장 불빛이 은은히 빛나고 그 아래로 벚꽃 그림자가 분분하였다. 담벼락 아래 달빛 깔리는 길을 그의 의식은 갔다. 가로수 푸른 잎사귀 바람에 흔들리고 종을 울리며 인력거가 지나가고 죽은 머리들이 길목마다 웅성거리고 소매치기 아이들이 취객들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의 의식은 어디선가 나타난 그의 원숭이와 함께 인력거에 올라탔다. 달빛 속을 인력거는 달렸다. 지상의 네온사인이 하나둘 번쩍이고, 광장 시계탑이 자정을 치고, 차량들이 진눈깨비 퍼붓는 도로 한복판에 우뚝 선 그를 향해 경적을 울리고 있는 동안, 인력거 포장 밖으로 타오르는 검은 연기 기둥을 길게 끌며 그의 의식은 아득히 속삭이는 온천장 불빛을 향해 가고 있었다.

서대경

종종 시를 쓰고 번역을 한다.

2019/04/30
1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