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그 말을 꺼낸 건 너였다.
   어느 토요일 오후. 자주 가던 식당에 마주 앉았을 때 너는 주인이 불판을 얹고 반찬을 내오고 고기를 가져오는 동안에도 말이 없었다. 반찬을 하나씩 집어먹고 젓가락을 쥔 채 고기가 다 구워질 때까지 조바심을 내던 평소 모습과는 달랐다. 고기를 굽는 내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가게를 드나드는 사람들을 힐끔거리기만 했다.
   나 할 말 있는데, 지금 할까? 밥 먹고 할까?
   한참 만에 네가 물었다.
   달궈진 불판에서 뜨거운 열기가 올라왔다. 고기를 뒤집을 때마다 기름이 튀었고 가위를 요리조리 움직여 봐도 커다란 고깃덩이는 좀처럼 잘라지지 않았다.
   먹고 해. 지금 하지 마.
   나는 그렇게 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네 입에서 나올 이야기를 대충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게 뭐든 내가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라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네 쪽으로 고기를 밀어주면 너는 느리게 한 점씩 집어먹었다. 눈이 마주치면 맛있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뿐이었다. 말을 걸면 응, 아니, 괜찮아, 하면서 건성으로 대답했는데 내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테이블 모서리의 얼룩 같은 것을 노려보면서 잠깐씩 미간을 찌푸릴 때도 있었다.
   그런 것들이 내 안의 불안 같은 것을 점점 키우고 있었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 끝났다는 생각. 그게 뭐든, 어떻게 해도 되돌릴 수 없겠다는 생각. 일단 먹고 보자는 심정으로 나는 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모두 다 먹어치웠다. 먹는 동안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너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불길한 예감은 점점 더 커지고 또렷해졌다.
   그리고 가게를 나오자마자 네가 입을 열었다. 오래 고민한 듯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보태며 말을 길게 늘였지만 결국은 헤어지자는 말이었다. 비가 온 뒤여서 길 위엔 젖은 은행잎이 가득했다. 나는 약국에 들러 소화제를 하나 사 먹은 다음 이렇게 대답했다.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면 안 될까?
   며칠이 지나면 네 마음이 바뀔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없던 일이 될 거라고 여겼던 것 같다. 평소였다면 너의 집으로 가서 시간을 보내는 게 당연했지만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천천히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걷고 있었다.
   언제부터 생각한 거야?
   타야 할 버스를 몇 대 보낸 후에 내가 물었다. 다른 사람이 생긴 거냐고, 언제부터 생각한 거냐고, 따져 물을 생각이었는데 점점 기분이 가라앉았다. 버스가 정차하고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모습을 내다보며 너는 그런 게 아니라고, 계속 아니라는 대답만 되풀이했다.
   그냥 힘들어.
   너는 간신히 한마디를 했다. 도대체 뭐가 힘들다는 것일까. 더 구체적인 대답이 나올 거라 생각했지만 너는 그대로 돌아서버렸다. 빠른 속도로 횡단보도를 건너고 길 건너편 골목으로 사라져버렸다. 몇 차례 전화를 걸고 간신히 통화가 되었을 때야 너는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짜증을 불러오고, 한 사람을 이처럼 오래 만나는 일이 때로는 너무 소모적인 일처럼 느껴지고, 숨이 막히고 답답한 기분으로 널 계속 만나는 건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다 개소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들으려고 너를 다그칠 때마다 네 입에선 점점 더 엉뚱한 소리만 흘러나왔다. 네 잘못이 아니다. 다 나 때문이다. 고맙다. 미안하다.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할 법한 뻔한 말들을 늘어놓으며 매일 한 걸음씩 두 걸음씩 물러서기만 하는 너를 더 잡을 순 없겠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동안 우리는 서로의 집에 뒀던 개인 짐들을 정리하고 가져오는 일에 몰두했다. 가능한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애썼고, 네 것인지, 내 것인지 구분하기 힘든 물건들에 대한 소유권을 의논하는 동안에도 서로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스탠드 스피커나 아이패드, 커피머신이나 원목 테이블, 공기청정기 같은 꽤 값이 나가는 물건들의 소유를 정할 때에는 난감하고 곤혹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가 함께 쓴다는 전제하에 각자 돈을 보태 구입한 것들이었고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곤 생각해보지 못한 탓이었다. 정확히 반씩 쪼개 나눠가질 수도 없었고 옮기는 데에 비용과 수고가 드는 걸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네가 가져가. 난 잘 안 쓰잖아.
   아이패드는 네가 양보했다.
   이건 여기 그냥 둘게.
   공기청정기는 내가 양보했다.
   어쨌든 하나를 주고 하나를 얻는 방식으로 정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미션을 수행하듯 하나씩, 하나씩. 물건들을 나눠 가지면서 어떤 가능성이나 미련 같은 것들로 들썩이는 마음을 포기나 체념 쪽으로 끌어당기는 거였다.
   그리고 짐 정리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네가 할 말이 있다고 나를 불러냈다. 그사이 우리가 늘 가던 카페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바뀌어 있었다. 겨우 몇 주 만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카페가 있었던 흔적 같은 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너는 창가에 앉은 채 아이스크림이 담긴 컵을 우두커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안한데, 우리 이 일 조금 미루면 안 될까?
   이 일. 너와 내가 헤어지는 일을 말하는 거였다.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
   너는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다 녹은 아이스크림을 휘휘 저었다. 그런 뒤엔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꺼냈다. 정기검진을 다녀왔는데 아무래도 이번엔 갑상선에 있는 결절을 제거해야 할 거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는 거였다. 네가 일 년에 한 번씩 정기검진을 받는다는 건 모르지 않았지만 수술에 대해서라면 아는 바가 없었다.
   너 올 거지?
   가겠다고 대답했는데 테이블을 정리하고 일어날 때에 너는 다시 말했다.
   입원하는 동안 네가 와 있어야 될 것 같아. 나 혼자 병원에 있을 순 없잖아.
   너는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고 그렇다고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남동생을 부르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겨우 사나흘이라고 해도 친구들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건 염치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고 친구들 중 누군가 온다고 해도 좀처럼 미덥지가 않다는 거였다.
   황당한 기분이 들었고 이기적이라는 생각도 했지만 겁을 집어먹은 네 얼굴을 마주하는 동안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인지도 판단하기 어려웠다.
   서로의 짐을 정리하는 일은 잠시 중단되었다.
   아니, 너는 헤어지자고 말한 사실조차 잊은 사람 같았다. 수시로 전화를 걸어왔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낮에는 결절을 제거하는 게 얼마나 간단하고 안전한 수술인지를 설명하다가 밤이 되면 인터넷에 떠도는 수술 부작용과 수술 이후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해 걱정하는 식이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며 비극적인 메시지를 연달아 보내다가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라며 내 동의를 구하기도 했다.
   수술은 보름 뒤였다.
   네가 입원 준비를 하고, 입원수속을 밟고, 수술을 끝내고 회복을 하는 내내 나는 네 곁에 있었다. 수술 동의서엔 네가 시킨 대로 너의 동생 이름을 쓰고 내가 서명했다. 세 시간이면 충분하다는 수술 시간이 두 시간 더 길어진 것을 제외하면 모든 과정은 마음을 졸였던 것이 허탈할 정도로 순조로웠다. 의사는 수술이 잘 되었다고 했고 네 갑상선에서 떼어낸 결절 조직을 검사하는 과정이 남아 있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했다.
   네가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는 의사가 한 말들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너는 멍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고 겨우 입 모양으로만 무슨 말인가를 했다. 어떻게든 알아들으려고 네 얼굴 가까이 귀를 갖다 댔는데 그때서야 내가 몹시 불안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를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 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네가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네 이마에 손을 갖다 대자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어떻게든 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혼자서 힘껏 쥐고 있던 감정들이 비로소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다음 날이 되자, 너는 속이 안 좋다, 머리가 아프다, 목이 따끔거린다, 춥다, 덥다, 배고프다, 같은 말들을 소리 내어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이튿날에는 병원 로비를 걸어 다녔다. 나흘째가 되자 퇴원해도 좋다는 의사의 허락이 떨어졌다. 우리는 너의 집으로 함께 돌아왔고, 물건들을 나누고 구분 짓는 일 같은 건 잊어버렸다.
   한동안 나는 내 집에 가져다 놓았던 물건들을 다시 너의 집으로 갖다 놓기 시작했다. 서로의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두고 온 물건들이 생겨났고 다시금 모든 것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처음처럼 모든 과정이 새로 시작된 것이었다. 너도 마찬가지였다. 똑같은 비용과 수고를 들여 물건들을 가져오는 동안엔 힘들고 번거로운 일이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두 해가 더 지나고 네가 그 말을 다시 꺼냈다.
   내가 직장을 옮기는 문제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였다. 직장을 그만두고 곧바로 옮겨가려던 회사에 감사가 들이닥쳤고 일주일, 보름, 한 달, 입사 시기를 미루던 그곳에서 미안하다는 답이 온 게 몇 주 전이었다. 그만둬라, 옮겨라, 같이 일하자, 바람을 넣던 후배는 도리어 내 탓을 했다. 조금만 더 서둘렀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거라고. 그러니까 일이 이렇게 된 건 늑장을 부린 내 탓이라는 거였다.
   갈 만한 곳을 알아봤지만 한꺼번에 공고가 몰리는 시기를 놓쳐서인지 연봉이 형편없거나 출퇴근하는 데에 서너 시간씩 걸리는 곳들만 남아 있었다.
   기다려보자. 괜찮은 자리 나겠지.
   너는 나를 안심시키려고 애썼다. 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나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네가 하는 말들은 때때로 지나치게 무성의하고 기계적인 반응처럼 느껴졌다. 남의 일이니까 적당히 물러서서 고작 하나 마나 한 말들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내가 뭐라고 해? 왜 나한테 그래!
   네가 되받아치면 늘 내가 지나쳤다는 후회가 들었지만 감정이 상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꼬투리를 잡고 지나간 일들을 들먹이고 잘잘못을 가리는 거였다. 말은 점점 더 사나워지고 거칠어지고. 그러는 동안 서로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이 상해버렸다.
   이럴 거면 그만 만나자.
   긴 연휴를 앞둔 어느 오후. 너는 그렇게 말했다.
   카페 안에서 말다툼을 벌이고 사람들의 주의를 끌다가 직원의 제지에 막 그곳을 나왔을 때였다. 너는 내 짐들을 택배로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너도 그렇게 하라는 의미였다. 나는 돌아서서 걷는 너를 끈질기게 쫓아갔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공원 입구를 지나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벤치 앞에 이르렀을 때야 너는 걸음을 멈췄다.
   이렇게 된 게 내 탓이니? 네가 직장 못 구하는 게 나 때문이야?
   너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왜 사람을 이렇게 괴롭히는 거냐고 따져 물었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말을 보태면 또다시 싸움이 일어나고 그때는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아무튼 지금은 안 돼.
   네 기분이 조금 가라앉고 나서야 나는 그렇게 말했다.
   뭐가 안 되는데?
   지금은 못 헤어진다고.
   너와 헤어지는 일까지 병행했다가는 머릿속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도 신경 써야 하는 일은 넘쳐나고 너와의 일까지 감당할 자신은 없었다. 그랬다가는 이 일도 저 일도 다 망쳐버릴 것 같았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다 포기해버릴지도 몰랐다.
   돌아서서 가려는 너를 나는 억지로 벤치에 앉혔다. 그리고 한동안은 마스크를 쓰고 두 팔을 크게 휘두르며 걷는 사람들을 내다보기만 했다.
   나 직장 옮기면 그때 헤어져. 그때 해도 되잖아.
   나는 조금 더 말했다. 지금 그 일까지 할 여력은 없고 너도 내 사정을 좀 헤아려줘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였다. 한두 달 미룬다고 해서 큰 일이 나는 것도 아니고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다고 말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말이 길어질수록 점점 애원하는 투가 되었고 구차해지는 기분이었다.
   사람을 편하게 해줘야 만나든 말든 뭐든 할 거 아냐. 만나면 성질만 내고 짜증나게 구는데 누가 널 만나, 누가 너를 만날 수 있냐고!
   그렇게 소리쳤지만 너는 한결 누그러진 듯 보였다. 이리저리 오가는 사람들을 보는 눈빛도 부드러웠다.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그곳에 앉아 있었다. 내일부터 시작될 연휴 계획은 의논해보지도 못했다. 먼저 일어난 건 너였고 나도 곧장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유월이 되기 전에 나는 새로운 회사에 입사했다.
   어쨌든 스스로 조금씩 물러서고 포기하면서. 결과적으로 보면 이전 회사보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곳이었다. 별다를 것도 없는 고만고만한 회사에 새로 들어가려고 몇 달을 허비한 셈이었다.
   언젠가 너와 함께 한라산을 올랐던 기억이 난다.
   제주도 여행을 제안한 건 나였고, 한라산에 가보고 싶다고 말한 건 너였다. 삼박 사일 일정 중 둘째 날에 등산을 하기로 결정했고 단 두 개뿐인 등산로 중에선 보다 완만한 쪽을 택했다. 이른 새벽 택시를 타고 국립공원 입구에 도착했을 때엔 흩뿌리던 빗줄기가 조금 더 굵어져 있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비옷을 입은 채로 등산로가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대개는 새벽 다섯 시 오픈이었지만 여섯 시가 조금 더 지나서야 출입 허가가 떨어졌다. 무섭게 내리던 비가 완전히 그치고 난 다음이었다.
   등산로는 좁아서 두 사람이 나란히 걷는 건 무리였다. 네가 앞서고 내가 뒤따라갔다. 검은 바위와 돌이 촘촘히 박힌 길은 점점 더 가팔라지고 험해졌다. 젖은 돌은 미끄러웠고 중심을 잃지 않으려면 상체를 숙이고 걸어야 했다. 나는 발밑만 보고 걸었다. 고개를 들면 네 뒷모습이 알록달록한 등산복들 사이로 멀어지다가 숨어버리곤 했다.
   정오 무렵이 되어서야 진달래 밭 대피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도 그곳에서 컵라면 하나씩을 먹었다. 조금만 더 가면 백록담이라며 네가 정상 쪽을 가리켜보였지만 나는 정상이고 뭐고 이쯤에서 그만 내려가고 싶었다. 너무 많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시 온 만큼을 되돌아가야 한다는 게 아득하게 느껴졌다. 발바닥에서 시작된 통증이 발 전체로 번지고 있었다. 등산화와 양말을 벗고 나자 발가락과 발바닥 여기저기 물집이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발이 왜 이래?
   너는 쪼그리고 앉은 채 내 발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등산화를 잘못 산 거 같아.
   밑창이 얇은 탓에 딱딱한 돌 위를 디딜 때마다 그 충격이 고스란히 발로 왔다. 신발 사이즈가 큰 탓에 발이 이리저리 밀리는 것도 문제였다. 두 발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걸을 수 있겠어? 괜찮아?
   나는 괜찮다고 했고, 걸을 수 있다고 했다. 몇 번이고 네가 등산화를 바꿔 신자고 제안했지만 얼른 몸을 일으키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네 발도 이 꼴이 나게 할 수는 없었다. 조금 더 걸어 올라가니 목재 데크로 만들어진 평평한 길이 나타났다. 그때부터는 걷기가 한결 수월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가까워지고 탁 트인 정상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탓인지도 몰랐다.
   백록담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아니, 저 아래 백록담 같은 게 있기나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우리는 난간 앞에 서서 자욱한 안개만 내려다보다가 사진 몇 장을 찍고 그곳을 내려왔다.
   내려가는 일은 올라가는 일보다 끔찍했다.
   걸을 때마다 체중이 발끝으로 몰리면서 발끝이 아려왔다. 물집이 터지는 느낌이 들었고 그 후에는 더 아픈 발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절뚝거리게 됐다. 결국 네가 신고 있던 등산화를 벗어주었다. 내가 네 신발을 신고, 네가 내 신발을 신었다.
   일 킬로는 족히 걸었다고 생각하고 표지판을 확인하면 겨우 삼사백 미터 내려온 게 다였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등산로는 점점 고요해졌고 어둑어둑해졌다. 고개를 돌리면 멀리 수풀 쪽에서 노루 몇 마리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도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던 산속의 풍경이 이토록 공포스럽게 바뀔 수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너는 조금씩 뒤처졌고 절뚝이며 나를 뒤따라왔다. 네가 신은 내 등산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 너무 많이 걸은 탓에 너도, 나도 지쳐 있었다. 그만 신발을 바꿔 신자고 말했지만 너는 괜찮다며 고집을 부렸다. 통증이 발목을 타고 다리로, 허리로 올라왔다. 누군가 두 다리를 힘껏 붙잡은 것처럼 걸음을 내딛는 게 힘겨웠고 바닥을 디딜 때마다 무릎이 바깥쪽으로 꺾일 것처럼 휘청거렸다. 나는 너를 뒤돌아보며 걸었다. 그때마다 너는 손을 흔들었다. 나중엔 아예 휴대폰으로 크게 음악을 틀어놓고 나를 뒤따라왔다.
   너와 함께 있지 않았더라면 무사히 산을 내려올 수 없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네가 등산화를 벗어주지 않았더라면 두 발이 조각나듯 다 부서지고 말았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 일을 잊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날의 일을 나는 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걸까. 왜 하필이면 지금 그날의 일이 이토록 선명하게 떠오르는 걸까.
   저녁 무렵, 나는 카페에서 너를 기다리는 중이다.
   횡단보도와 버스정류장이 바로 내다보이는 창가 자리다. 너의 집에서 도보로 십 분 남짓한 거리이고, 너는 늦지 않을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게 될지,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고, 대비를 할 것이다. 어쩌면 그런 경우의 수를 따지면서 나는 어떤 기억들이 침입하지 않도록 마음속에 단단한 뭔가를 하나씩 쌓아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주 작은 틈도 생기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지도 모른다.
   창 너머,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고 길을 건너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인다. 나는 단번에 너를 찾아낸다. 이렇게 멀리 있는데도, 이곳에 앉은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네 모습이 너무나 분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김혜진

늘 발목을 잡는 건 어떤 장면이고 어떤 순간이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기억. 관계를 지속시키는 건 의지나 감정이 아니라 바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썼다.

2018/11/27
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