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이는 자란다



   나는 너무 오래 혼자 있어서
   옆집 자물쇠의 비밀번호를 맞춰 버렸다.
   그리고 천장이 되었다.
   새로 산 그림일기,
   그것을 ‘나는’이라고 시작한다.

   하얀 운동화가 뒤집혀 있는
   한낮의 집은 까맣다.
   주인집 황구가 애꾸눈이 되어
   깜깜한 집에서 나오지 않을 때쯤,
   우리 집은 반지하 방 이여서 좋은 곳이었다.
   지하 방 문이 소품처럼 달려 있는 벽을
    더듬거리다 발견한 스위치를 켠다.

   불을 켠 정인이가 천장이 된 나를 본다.

   봄에는 미미가 죽었다.
   엄마는 미미가 1000원짜리
   병아리였기 때문에 죽었다고 했다.
   정인이가 이름을 부른다.
   벽을 만지는 것처럼,
   하얀 엄마가 나를 부른다.
   병아리가 죽은 것처럼,

   여기에서 왼쪽 어깨의 상처가
   목덜미로 옮겨지는 것을 구경했다.
   불을 켜도 켜진 불 뒤에서 하품을 하며
   딱지가 앉은 상처 난 자리를
   살살 긁을 수 있었다.
   실패한 통증은
   언제나 가능성으로 살아 있다.
   동굴처럼 울리던 반지하의 복도를
   얌전히 걷던 우리의 일요일,

   아빠 구두의 밑창이 하얗다.
   밑창에는 뭉개진 시발년이 묻어있고,
   그리고 너는 신경 쓰지 마라.
   엄마를 부엌에 던져 놓으면
   눈앞이 잠깐 비틀거렸다.
   그 눈을 감고 있으면 들리는
   탁탁, 손 터는 소리,

   방학 숙제로 완성한 것은
   푸른 싹이 자란 양파뿐,
   숙제가 적힌 종이를 찢어 씹으며
   엄마와 함께 방학 내내 도망 다녔다.

   갈아주지 못한 뿌연 물 위로
   양파 싹은 높이 자랐다.

   미미가 죽은 것은 개학 전날이었고,
   나는 정인이가 부를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도시락이 없는 가방을 메고,
   ‘나는 떠나요’
   일기의 제목이
   아침이 되어서야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와 천장에 누우면
   심장이 아주 조금 두근거렸다.
   아직 서성이는 정인이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면 매운 냄새가 퍼지고,
   우리는 나름대로 훌쩍거렸다.

   정인이가 이제는 천장에 닿아 있었다.





   풀버전 (full version)



   1분 27초의 예고편이 모두 끝났다.
   볼에는 은, 는, 이, 가가 새겨졌고,
   그것을 꾹― 꾹― 누르며
   새어나오는 비밀을 손등으로 닦는다.
   옆으로 누워있는 동안 접힌 귀는
   화사한 색으로 달아올랐다.

   남은 물을 모두 마셨고,
   뱃속을 유영하는 오후가
   끈질기게 소란스럽다.
   살아 있는 일이
   길게 서 있는 모습 같아서
    키 큰 화분 옆에 서 본다.
   오후는 화분에 잠시
   넘쳤다 사라진다.

   누군가 만질까 두려웠지만
   오늘은 본 편이 시작하는 날,

   구겨진 면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보기 좋은 면이 되었다.
   미간을 찌푸리지 않아도
   움직이는 것이 반듯하다.

   반듯하게 잘리는 목과
   깨끗하게 쏟아지는 피와
   맑게 들리는 비명,
   살인한 후에는 손부채질을 한다.
   물에도 색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손을 닦지 못했다.
   물을 찍어 이름을 그려본다.

   오래된 냉장고가
   김치와 생선을 품고 수를 센다.
   같은 날에 죽기 위해
   구겨진 온도가 올라가고,
   올해는 여름에 죽을 수 있을까,

   빨간 날에는
   벌린 다리를 웅크린다.
   적당해질 이유가 생길 때까지
   사나워지기로 한다.

   어깨를 끌어안은 여자가
   자기 팔을 물어뜯자
   노란 피가 쏟아진다.
   이미 여름에 죽은 것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약한 날을 기다리는 동안,
   물에 말아놓은 밥 옆에는
   고등어구이가 놓여지고,
   상한 것들은 맥박을
   보채지 않아서 상냥했다.

   밥이 담긴 그릇의 물이 넘치고,
   고등어는 조각조각 맛있었다.
   파랑을 본 적 없는 살인자가
   물이 넘쳐도 두려워하지 않아,
   끝날 수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여름’의 마지막에는 받침이 없었다.

김태희

나는 괜찮아/ 너는 신경 쓰지마/ 웃기네/ 웃기는 소리 하네

2019/03/26
1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