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소리를 들었다 누가 내려간 것일까 올라온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보이지 않지만 오전 열한 시가 넘으면 이 방에는 볕이 들지 않는다

  이 방에서 삭은 죽었다 삭은 봄을 기다렸다 봄에는 목련이 피니까 아침마다 창문을 열어보는 삭을 나무란 적이 있다 여기에 목련은 없어 삭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삭은 죽었다 죽은 삭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

  겨울이 오기 전에 삭이 말했다 꿈을 꿨어 인부들이, 목련의 웃자란 가지들을 자르고 있었어 가지들 가볍게도 떨어지더라 그림자인 줄 알았지 삭은 웃고 있었다 열한 시가 넘었지만 알 수 있었다

  목련에 대해 삭은 이야기해달라고 조르곤 했다 예쁘다 그렇게 말한 사람이 있었어 예쁘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마침내, 목련이 피고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지 삭은 이 이야기를 좋아했다

  삭은 자꾸 시간을 물어보았다 더 남은 시간이 없었을 때 삭은 말했다 괜찮아 생각해보면 예쁘다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삭은 예쁜 것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계단이 삐걱대기 시작한다 누가 올라가거나 내려가고 있는 모양이다 삭은 아니다 삭은 죽었기 때문이다 나는 소모를 생각했다 그런 것은 어디에나 있다 계단에도 이 방에도 열한 시면 사라지는 볕이나 예쁘다는 말에도

  그것은 마침내, 목련이 피고 있을 거라는 느낌

  닳아가고 있다 부드러워지고 나면 구를 것이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을 때까지 어딘가 닿을 때까지 굴러가서 멈출 것이다 목련이 떨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봄에 가엾게도



   겨울이 끝나면, 나는 의자를 꺼내놓고 냄새를 맡곤 한다 그때마다 형태는 다른 소리를 갖는다 의자의 바깥에선 다소곳 말라가는 남천 화분을 둘러싸고 죽어가는 형식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식물의 습성에 대해 모르는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죄책감을 어루만진다 어제는 비가 내렸고 오늘은 볕 좋은 날이다

유희경

시인. 시집서점 위트 앤 시니컬 운영자.

2019/03/26
1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