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가 떠나고 없는 중에도 문주는 하루에 한두 번 이런 질문을 받았다. 결혼 생활은 어때? 친분과 직급에 따라 존댓말을 쓰는 사람도 있고, 반말을 쓰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 같은 말이었다. 그때마다 문주는 좋아요, 짧게 대답하곤 피식 웃었다.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문주의 하루는 대충 이랬다. 되도록 점심시간 전까지 출근을 한 뒤 곧바로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빌딩 1층의 스타벅스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셨다. 기획과 회의, 촬영과 송출, 편집과 회의를 차근차근 해내고 나면 늦은 밤이었다. 대체로 그런 하루를 보내다 보니 신혼 생활에 대해 묻는 사람들은 거의 직장동료였다. 문주가 식판을 들고, 일회용 컵을 들고, 대본을 들고 건성건성 대답할 때마다 더러 원도가 있었다. 반대쪽에 서서 헤실헤실 웃는 문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원도가 곁에 있건 없건 문주는 좋아요라고만 대답했다. 다르게 대답하질 못했다. 누구라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거짓말을 할 거라면 좋을 때도 있고 싫을 때도 있어요라고 말하는 게 가장 정직한 답일 텐데, 생활의 전부를 말하려는 사람도 전부를 들으려는 사람도 없었다. 겪었던 시간을 근거 삼아 좋아요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겪어야 할 시간을 근거 삼아 그렇게 말하는 것뿐이었다. 말하자면 문주는 비교적 낙관적인 사람이었다.

   원도는 문주와 같은 케이블 방송국에서 일했지만 맡은 프로그램이 달랐다. 문주보다 네 살 아래인 원도는 방송국에 들어온 지 겨우 2년째에 불과했다. 퇴근 후 연신내로 가는 버스를 혼자 기다릴 때마다 원도와 문주는 부쩍 자주 마주치기 시작했다. 그즈음 원도는 출퇴근 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이유로 무리하게 연신내의 오피스텔을 얻어 혼자 생활하던 중이었다.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느라 부랴부랴 얻은 집이어서 뒤늦게 후회막심이었다.
   원도는 문주의 결혼식에 초대받진 않았지만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5만 원의 축의금을 보냈었다. 원도는 아무래도 문주가 최근 결혼을 했고 이 동네에 오래 살았으니 이래저래 혼자 살만한 집에 대한 실속 있는 조언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문주와의 만남을 반색했다. 문주가 결혼답례로 나누어준 라벤더 비누를 아껴 쓰던 참이기도 했다.
   “선배, 집은 몇 평이에요? 전세? 월세? 정거장에서 집까지는 얼마나 걸려요?”
   원도의 질문이 쏟아질 때마다 문주는 같은 질문을 되묻는 방식으로 대답을 피했다. 원도는 순순히 자기 형편을 길게 설명했다.
   “선배, 제가요, 여덟 평짜리 오피스텔에 사는데, 보증금 천만 원에 다달이 오십오만 원을 내고 있거든요. 근데 가스비 전기세 수도세 공용관리비 등등 모두 내고 나면 팔십만 원 남짓한 돈을 써요. 역에서 집까지 도보 십 분이라고, 신축 오피스텔이라 풀옵션이라고, 그에 비하면 싸다고 해서 얻었는데, 보다시피 제가 출퇴근할 때 버스를 타잖아요. 그러니 역세권에 살 필요가 있는지 이제 와서 의심스럽고, 게다가 주민등록 이전 신고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도 마음에 걸리고요. 선배도 아시겠지만 한 달에 제가 백팔십만 원 정도 벌거든요. 근데 주거비 교통비를 제하고 나면 기껏 팔십만 원 남는데, 물론 웬만해선 구내식당을 이용하긴 하지만 밥 사먹는데 드는 돈도 만만치가 않거든요. 우리 부모님이 남양주에 살아요. 매달 삼십만 원씩 보내거든요. 그러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이 하나 없어요. 빵원이에요, 빵원. 어떻게든 돈을 모아야겠는데 그러려면 다시 남양주 부모님 집으로 돌아가서 돈 말고 잠을 줄이는 게 나을 것 같긴 한데, 선배, 나 진짜 거기로 돌아가기 싫거든요.”
   원도의 긴 푸념을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고 있다 보면 얼추 문주가 내려야 할 정거장이었다. 문주는 이러저러한 자기 이야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고 도망치듯 버스에서 내렸다. 거짓말을 이어가는 것보단 차라리 그게 나았다.

   2
   지난 해 봄 문주는 오 년 동안 사귀던 동갑내기와 결혼했다. 남자는 서대문구에 자리한 대학원의 박사 과정을 밟던 중이었다. 문주와 연애하는 내내 남자는 꾸준히 그 일만 했다. 일이 많아. 일할 게 있어. 사실상 공부에 가까운 짓이었지만 남자는 매번 일이라고 표현했다. 모처럼 쉬는 날인데 놀러 갈까, 문주가 물으면 남자는 내가 하는 일은 주말 없는 비인권적 노동이라고, 당최 마음 편히 쉴 수 없는 게 이 일의 유일하고 압도적인 스트레스라고 단단히 일러주곤 했다.
   남자가 <가상화폐의 공적 가치 창출의 가능성과 최근 동향>이라는 제목을 단 논문의 최종 심사를 앞두고 있을 무렵, 비트코인 열풍이 불었다. 남자가 문주에게 청혼한 때도 그즈음이었다. 근 10년째 케이블 방송국의 비정규직 PD로 근무하던 문주는 흔쾌히 결혼을 수락했다. 남자의 박사 학위 졸업식이 있고 두어 달 후, 문주는 마포구의 어느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비정규직이긴 했지만 대학을 졸업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문주는 줄곧 같은 직장에서 근무했다. 덕분에 꽤 많은 축의금이 문주의 통장으로 입금되었다. 그에 비해 남자의 하객들은 같은 대학원의 선후배들뿐이었다. 문주의 하객들보다 아주 적은 수였던지라 축의금 역시 예식 비용에 훨씬 못 미치는 액수였다. 남자는 졸업식보다 결혼식을 먼저 치렀어야 했다고 후회했지만 오래 아쉬워하지 않았다.
   오백만 원이 웃도는 축의금 앞에서 문주는 사직서를 내려던 마음을 접었다. 6개월만 더, 그러곤 그만해야지. 혼자 결심하곤 아무도 모르게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비트코인이 폭락했다는 뉴스가 연일 떠들썩했다. 문주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뉴스였는데 남자에게는 달랐다. 크고 작은 기업과 기관의 특강 초청을 받아 툭하면 집을 비우던 남자는 온종일 집에 들어앉아 컴퓨터 앞에서 줄담배를 피웠다.
   연애 시절에도 컴퓨터 앞에서 며칠씩 밤을 새우던 그의 모습을 종종 봤던 터라 문주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문주는 되도록 삶에 간섭하지 않되 존재에 소홀하지 않는 부부관계를 죽 바랐다. 그런 문주여서 그의 나태를 아주 정중한 마음으로 방관했다. 대신 매일 빠트리지 않고 현관에 서서 “나 출근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같은 해 10월 하순, 문주는 남자와 헤어졌다. 아직 혼인신고조차 하지 않은 상태라는 걸 문주는 그제야 알았다.

   3
   크리스마스 즈음 문주는 원도와 함께 연신내에서 내려 술을 샀다. 술김에 문주는 처음으로 자기 집에 대해 간략하게 말했다.
   “결혼 전부터 혼자 살던 집이라서 편해. 이 근방에서 유독 저렴한 전셋집이라 그냥저냥 만족해. 지은 지 오래되다보니 혼자 사는데 불편한 점이 많긴 하지. 그래도 단독주택이라 나름 매력은 있어. 혼자 살기 무서운 집인 건 맞아. 살수록 무섭다는 생각이 드네. 나는 무섭다, 우리 집이.”
   원도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뜸 물었다.
   “선배, 혼자 살아요? 왜요?”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문주는 원도에게 신신당부했다. 비밀이야, 비밀. 나 혼자된 거, 너만 알고 있어. 생각보다 너무 빨리 헤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떠안게 된 비밀을 문주는 수시로 원도에게 털어놓았다. 그 남자가 나를 겁쟁이로 만들었어. 사는 게 무서워졌어. 하루가 멀다 하고 울먹이는 문주의 등을 토닥이며 원도는 호기롭게 외쳤다.
   “내가 있잖아요.”

   해가 바뀌자 일이 좀 한가해졌다. 원도는 이따금씩 문주의 외진 단층집에 들락거리면서 문주의 자책과 두려움에 귀를 기울였다. 문주가 나날이 무서워하는 집의 우둘투둘한 흰 벽과 밑이 썩은 문짝과 문턱 없는 바닥을 가리키며 과연 무서워할 만한 집이라며 술잔을 기울였다. 밤이 깊어지면 거실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누워 문주의 집을 품평했다. 창이 커서 좋아요, 천장이 높아서 추워요, 차 소리가 안 들려서 좋아요, 바닥이 편평하지 않아요, 집이 기운 것 같아요. 그러면 문주가 산책하듯 집안을 어슬렁거리며 남자의 거짓을 고했다.
   “통장은 바닥인 데다 혼인신고도 안 하고 살았어.”
   문주가 듣기에도 그 말은 처음부터 원치 않은 결혼이었다는 뜻으로 들렸다. 남자의 잘못이라기보다 문주 자신의 실수처럼 여겨졌다. 무시로 잘잘못을 따지던 속내가 한결 편해지기 시작했다.
   1월 내내 원도는 취한 채로 하루 이틀씩 머무르다 결국 문주의 집에서 사는 게 합리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월세가 밀려서 전전긍긍하는 원도에게 함께 살자는 말을 꺼내면서 문주는 가난한 원도의 삶을 장려하듯 덧붙였다.
   “같이 살면 되잖아, 아무도 모를 거야.”
   둘이 살기에 8평은 너무 좁으니까, 원도가 그러면 문주가 대답했다.
   “둘이 있으면 안 무서울 거야.”

   4
   여름휴가를 하루 앞두고 문주는 정규직 전환 심사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을 통보받았다. 임의로 소집된 정규직 전환 심의위원회에서 후보 셋을 간추렸는데, 문주와 원도의 사수인 오PD 그리고 최근 신설된 해외마케팅팀의 대니얼 킴이 그 셋이라고 팀장은 전했다. 심의위원회의 구성원이기도 했던 팀장은 문주와 오PD에게 이른 축하를 건네며 설레발을 쳤다. 그의 말에 따르면 셋 중 두 명을 뽑는다는 것은 이런 의미였다. 정규직에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을 엄중히 가려내는 심사가 아니라 정규직 전환 예외 사유에 해당하는 한 사람을 골라내는 것. 그러한 연유에서 대니얼 킴을 후보로 올린 이유는 분명했다. 동년배이자 경력도 엇비슷한 문주와 오PD의 정규직 전환 여부를 사실상 확정 짓고 전환 예외 사유가 명백한 신입을 심사에서 완전하게 배제시키려는 것.
   “대니얼 걔는 아무리 뜯어봐도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니야, 걔는 쭉정이야, 쭉정이.”
   팀장은 문주와 오PD를 세워둔 채 대놓고 대니얼 킴이 심사에서 떨어질 것을 확신했다. 인사관리팀의 최종 면접이 남아있긴 하나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지 않겠느냐며 문주와 오PD를 추켜세웠다. 문주는 미루었던 대학원 입학을 아예 포기해야 할지 몰라서 씁쓸했고, 오PD는 팀장과 몇몇 상관들의 호의가 선심처럼 여겨져서 어리둥절했다.

   한껏 들뜬 팀장이 곧장 전체회식 자리를 마련했다. 길 건너 돼지갈비 전문식당으로 문주와 나란히 걸어가는 동안 오PD는 뒤늦게 정규직 전환 가능성을 실감했다. 이제 한시름 덜었으니 원도를 밑에서 위로 끌어올리는 일만 남았다고, 걔도 이젠 행복해져야 한다고, 꽤 비장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 문주는 저도 모르게 멈춰 서서 오PD를 쳐다보았다. 어쩌면 자신의 짐작보다 원도와 오PD가 각별한 사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문주가 아는 원도와 오PD가 아는 원도는 아주 다른 삶을 살고 있거나. 한편으로는 원도가 어떤 방식으로 문주와의 생활을 숨기고 있는지 어렴풋하게 알 것도 같았다.
   식당에 도착하고 보니 팀장을 비롯한 나머지 동료들은 기다란 테이블 두 개에 둘러앉아 고기를 굽는 중이었다. 팀장은 안쪽 테이블 한 가운데 앉아 두 사람을 반겼다. 오PD가 자연스레 팀장의 옆자리에 앉았다. 맞은편 자리는 하필 원도의 옆이었다. 문주는 갈팡질팡하다가 반대편 테이블의 끄트머리에 앉았다. 팀장이 문주를 소리쳐 불렀다.
   원도는 잔뜩 굽은 자세로 빽빽하게 앉은 사람들의 등과 등 사이를 지나오는 문주를 지켜보았다. 핸드폰과 가방을 원래 자리에 고스란히 내버려 두고 오는 모습을 보니 금방 제자리로 돌아갈 작정인 게 확 티가 났다. 팀장은 문주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박수를 쳤다. 기다란 테이블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덩달아 박수를 치는 동안 원도는 깔고 앉았던 방석을 끄집어내 문주가 앉을 자리에 놓았다. 문주는 앉자마자 냅킨부터 찾았다. 팀장이 웃는 얼굴로 테이블 위를 함께 두리번거리며 회사를 욕하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 엿 같지?”
   모여 있던 사람들 모두가 고기를 집던 젓가락을 놓고 팀장을 주시했다. 팀장은 그들의 시선을 일일이 마주치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내년에는 정규직 전환 기회가 많아질 거라고 호언하면서 그래도 우리 같은 곳도 없다고 자부했다. 때마침 원도가 숟가락으로 맥주병의 뚜껑을 따서 건넸다. 맥주병 입구에서 김이 새어나왔다. 한 손에 맥주병을 든 채 팀장이 문주에게 몸을 기울였다. 원도가 자기 잔에 있던 맥주를 남김없이 들이켠 뒤 문주에게 잔을 건넸다. 문주는 엉거주춤 일어서서 팀장이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잔이 채워질 때까지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기다렸다가 고개를 돌렸다. 원도와 눈이 마주쳤다. 원도가 재빠르게 시선을 피했다. 문주도 얼른 반대쪽을 고개를 돌려 단번에 술잔을 비웠다.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와와 환호했다. 팀장이 벌떡 일어서서 두 팔을 내저었다. 여러분, 내년을 기대해라며 분위기를 돋웠다.

   후식 냉면을 주문하던 참에 문주가 물었다.
   “팀장님은 면접에 안 들어오시죠?”
   “그러면 공정하지 않잖아.”
   “전부 제가 모르는 사람들이겠네요.”
   “그냥 다 똑같다고 생각해.”
   “그 사람들도 저를 모르겠죠?”
   “자꾸 묻지 마. 너무 되고 싶은 티가 나잖아.”
   팀장이 농담조로 대꾸했다. 결혼을 하면 야망이 생기기 마련이라고, 오PD의 팔꿈치를 툭 쳤다.
   “아직 신혼이라 좋지?”
   문주가 빈 컵을 길게 뻗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판에서 바짝 탄 고기를 집어 올려 빈 접시에 모으다 말고 원도가 문주를 힐긋 쳐다보았다. 술기운이 오른 탓인지 문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긴 한데, 굳이 따지자면 죄책감이라곤 전혀 없이 수치심뿐인 잘못이었다. 원도가 자꾸 쳐다봐서 더더욱 그런 기분이었다. 문주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까지 민망해할 필요는 없다고 속으로 되뇌었다.
   “좋아요?”
   원도가 냅킨으로 젓가락을 닦으며 물었다. 원도는 문주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고, 문주가 거짓말을 고수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문주를 낱낱이 알고 있는 사람이 원도라서, 어찌 보면 문주의 거짓말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기도 해서, 문주는 원도와 헤어진다는 생각만으로도 몹시 무서웠다. 문주는 차마 원도를 볼 수 없어서 오PD에게 잔을 들어 보이며 건배를 권했다.
   “좋아요?”
   아랑곳하지 않고 원도가 놀리듯 물었다.
   “좋았어요?”

   5
   면접 하루 전날 문주는 막걸리와 소주를 사다 놓고 원도를 기다렸다. 집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원도는 회사의 컴퓨터로 처리했다. 그 바람에 늘 퇴근이 늦었다. 문주가 종종 환기를 시키느라 집안의 창문과 방문을 모조리 여는 때 빼곤 원도의 방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주는 도저히 뭐라고 간섭할 수 없어서 잠자코 내버려 두었다. 자칫 이래라저래라 나섰다간 똑같은 대우를 받기 십상이었다. 원도가 제 방을 출입하는 일은 없었지만 여전히 집으로 돌아와 문주의 옆에 누웠으므로 그럭저럭 넘길 만했다.
   원도와 문주는 제육볶음과 식은 잡채를 안주 삼아 각각 막걸리 한 병과 소주 한 병씩만 마시기로 했다.
   “저번에 가방 없어졌다고 울고불고했던 거 기억나?”
   원도가 지난 회식 때의 일을 물었다.
   “사람들 보는 데서, 오PD도 있고 팀장도 있는데, 나한테.”
   문주는 도통 기억나지 않을뿐더러 원도의 말을 대번에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오PD나 팀장과 더 친한 사이 아니냐고 묻는 듯했고, 오PD와 팀장 앞에선 조심하자는 듯도 했다. 솔직히 이제는 들켜도 상관없다는 마음이기도 해서 문주는 말머리를 돌렸다.
   “너는 앞날을 생각하면 뭐가 무서워?”
   “돈 없이 사는 거.”
   “나는 아픈 거.”
   “내가 아파서 죽을까 봐 무서워?”
   “상상해봐. 내가 죽을 때까지 아파하는 걸 네가 봐야 한다면.”
   문주가 하라는 대로 원도는 곰곰 상상했다. 아픈 문주 말고 아픈 자신을 상상했다. 그런 자신의 곁에서 오들오들 떨며 무서워하는 문주를 상상했다.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그런 날이 두 사람 사이에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던지는 문주를 보니 원도 역시 묻고 싶긴 했다. 혹시 나를 전남편과 동일시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의 빈자리를 견딜 수 없어서 싯누런 벽지에서 담배 냄새가 배어나오는 좁은 방으로 나를 끌어들인 건 아닌지, 나날이 사는 게 무섭다던 그 마음속에는 누군가 보고 싶은 마음이 속속들이 깃들어있는 게 아닌지.
   원도에게 상상해보라 하고선 문주도 곰곰 생각했다. 사는 게 불안하지 않을 만큼의 돈에 대해서, 진짜 화폐의 가치 창출의 가능성과 최근 동향에 대한 임무는 전적으로 자기 몫일 수밖에 없다고, 거기까지 생각하자 난데없이 어떻게든 정규직이 되고픈 마음이 간절해졌다.
   “우리 이사해야 돼. 여기선 안 돼.”
   문주는 원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 집의 모든 것을 먼저 감내하고 누렸던 사람이 있다는 것, 이제 와서 원도가 이 집에서 살기를 꺼려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전에 살던 사람한테 연락 없어?”
   남자의 전공 서적이나 그의 이름으로 배송된 고지서를 흔들며 원도가 물을 때마다 문주의 대답은 간결했다.
   “없어.”
   그 말이 원도에겐 피식 웃는 소리처럼 들렸다. 거짓말을 하고 난 뒤에 남는 부끄러움을 떨치려고 웃는 것 같았다. 원도가 보기에 문주는 미래에 낙관적인 사람은 아니고 시시때때로 잘 웃어버리는 사람이었다.
   문주가 잘 웃기만 해서 원도는 노심초사했다. 남자가 여전히 집 주변을 배회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들이닥칠까, 내내 조마조마했다. 두고 간 물건을 되찾지 않을 만큼 전에 살던 사람과 문주가 아주 무관한 사이가 되어버렸다는 걸 원도는 몰랐다. 원도의 그런 마음을 모르는 채 문주는 거듭 당부했다. 우리의 앞날을 상상해보자고, 우리의 앞날을.
   마련해둔 술을 다 마시고 나서 원도가 반문했다.
   “정말로 내 앞날에 관심 있어?”

   6
   면접관의 첫 번째 질문은 몇 살인가요였다. 연달아 전공에 대한 두 번째 질문을 던지고 나서야 면접관은 문주의 이력서를 펼쳤다. 잠시 이력서를 들여다보던 면접관이 두 손을 깍지 끼며 물었다.
   “임신과 출산 계획에 대해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문주는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너무 절박한 마음이어서 그러기가 꺼림칙했다.
   “이혼했습니다.”
   면접관은 당황한 듯 문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오PD와 대니얼 킴에게만 질문을 던졌다. 심지어 오PD에게는 집이 먼 것 같으니 회사 근처로 이사하는 게 어떻겠냐고 떠보기까지 했다. 대니얼 킴에게는 지금 한 말을 영어로 다시 할 수 있는지를 여러 번 요구했다. 그 바람에 대니얼 킴은 한국어와 영어로 번갈아 같은 말을 두 번씩 했다. 면접이 거의 끝날 무렵 다른 면접관이 문주에게 물었다.
   “이혼하니 어떻습니까?”
   문주는 으레 그래왔듯 좋습니다라고 대답하곤 웃었다. 오PD가 길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면접이 끝나자마자 오PD가 문주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렸다. 문주가 그를 붙잡고 말했다.
   “나, 정말 행복해요.”
   얼굴이 홧홧해졌으나 참말이어서 부끄럽진 않았다.
   “요즘 그런 말 처음 들어요.”
   오PD가 신기하다는 투로 대꾸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직원들의 인적사항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팀장은 인사관리팀으로부터 질타를 받았다. 인사평가에 반영하겠다는 소리까지 들은 터라 팀장은 더욱 노발대발했다. 보다 못한 오PD가 문주의 편을 들자 팀장이 정색하며 물었다.
   “두 사람 그렇고 그런 사이야?”
   오PD가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섰다. 원도가 슬그머니 오PD 곁으로 다가와 소매를 잡아끌었다. 문주는 원도가 오PD를 데리고 멀어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 사이까지 털어놓지는 말아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돌연 섭섭했다.
   남 좋은 일 하려다 자기 인생 망하게 생겼다고, 하던 대로 또 거짓말하지 왜 이제 와서 하필 거기다 대고 그랬냐고 팀장은 연신 고함을 질렀다. 문주는 최대한 가만히 서 있으려고 노력하면서 지금 해야 할 말이 무엇일지 헤아려보았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헤어져서, 너무 빨리 다른 사랑을 시작해서. 그렇게 말하자니 원도와의 연애가 너무 시시하게 보일 것 같았다. 처음에는 금세 깨질 사랑을 무턱대고 축복받아서, 회사명이 적힌 흰 봉투를 다짜고짜 받아버려서 차일피일 미룬 것이었다. 딴에는 예의를 차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설명하자니 자신이 했던 사랑 전부가 우습게 느껴져서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런 걸 일일이 말해봤자 모두 허튼소리일 따름이었다.
   “왜 거짓말 안 했어?”
   팀장이 서류철을 책상 위에 후려치며 외쳤다. 문주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허리를 세웠다. 잘못했다고 빌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간단한 대답조차 할 수 없어서 문주는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원도라는 비밀을 남겨둔 채 그대로 빠져나왔다. 정규직이 되기를 바란 적 없는데, 주구장창 반복해왔던 거짓말에서 마침내 벗어났는데, 이런 기분이라니.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거울을 보았다. 엘리베이터의 거울이 이토록 밝은 빛을 되쏘는지 문주는 처음 알았다. 그런데도 전혀 부끄럽지 않아서 문주는 목소리를 높여 말해보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문주가 문주에게 처음으로 건네는 사과였다.
   1층에 당도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을 때 문주는 뒤늦게 후련했다. 스타벅스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진동벨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누군가 문주의 등을 툭 치며 아는 체를 해왔다. 뒤돌아보니 부른 배를 두 손으로 감싸 안은 임산부였다. 낯익긴 했지만 누군지 몰라 문주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여자가 대뜸 물었다. 나 없는 새 결혼했다면서요, 너무 좋겠어요. 문주의 손에서 진동벨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문주는 얼결에 그녀의 말을 따라 하듯 대답했다. 예, 좋아요, 너무 좋았어요. 그러곤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황현진

사랑하는 사람이 무얼 숨기고 있고, 무얼 내보이기 싫어하는지를 몰랐다. 문주는 적어도 단 한 사람에게는 솔직했다. 어떤 비밀도 영구하지 않으리라는 믿음 덕분에 매번 솔직해지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단 한 사람에게는. 때때로 거짓말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2019/02/26
1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