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요리를 한다. 카레를 만든다고 했을 때, 각종 야채와 고기를 볶아 풍미를 돋우며 정성스럽게 만든 카레가 아니라, 들어간 것이 감자밖에 없는 감자 카레를 하는 것이다. 재료도 노력도 최소한으로. 잘게 썬 감자를 기름에 볶다가 다진 마늘을 조금 넣어 마늘 기름을 낸다. 계속 볶다가 물을 넣고 강황 가루를 푼다. 그게 끝이다. 유진은 컵라면을 만드는 것처럼 일 인분의 카레를 만들 줄 안다고 했다. 모든 음식을 그렇게 하게 되었다. 그녀는 유진의 요리 이야기에서 별다른 해결방법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그런 생활 방식. 자신과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생활이 있다는 걸 생각했을 뿐이다. 유진과 그녀는 테이블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무엇을 더 함께할 수 있겠는가. 그녀의 생각보다 책방은 작고 낡았고 왜 손님이 없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사면 뭔가 불길하고 구질구질한 느낌까지 따라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책방을 정리하고 청년지원 푸드 트럭을 운영할 거라는 유진의 말대로 노끈에 묶인 책더미가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오래된 철문이 천천히 열리고 닫히길 반복하는 것처럼 목 안쪽을 긁는 신음소리가 책방 깊숙한 곳에서 반복적으로 들렸다. 그녀는 괜히 온 걸까 생각했다. 시간의 때로 누렇게 변색된 솜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있는 기분이었다. 남의 손톱, 살비듬, 손바닥의 온도 따위가 오랜 시간 축적되어 온 공간에 있는 것 같았다. 테이블에는 두통약 상자와 껍질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가 책방 안쪽에 귀를 기울일 때마다 유진은 약봉지를 눈으로 꾸기듯 응시했다.
   호흡이 불편하시거든. 아주는 아니고 하루에 몇 시간 정도만 그래.
   너 아직도 두통 달고 살아?
   응. 머리 아파. 골속에 뭐가 있는 거 같다.
   왜 그럴까 유전이야?
   유전은 가난으로 충분해. 잠을 너무 많이 자서 그런가 봐.
   잠을 푹 자면 개운해야지 못 자는 것도 아니고 왜 머리가 아파.
   푹 자는 게 아니라 그냥 잠들어 있는 시간이 길 뿐이니까. 근데 웬일이야 아예 안 올 줄 알았는데.
   네가 나를 가장 잘 알 거라고 생각해서.
   사실이었다. 그녀가 유진을 찾아온 이유는 그게 전부였다. 그들은 사실 공식적인 이별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에게 전 애인이라는 호칭으로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아주 가끔 밥을 먹는 사이였고, 각자의 집에서 서로에 대해 금방 잊었다. 둘 사이에는 어떠한 인연의 끈도 남아있지 않았다. 기억하는 것이 곧 인연의 끈이므로. 물론 둘 중 하나가 먼저 부르면 쉽게 만나고 익숙하게 몸을 만지겠지만, 둘 중 하나라도 연락을 하지 않는다면 너무나 당연하게 잊힐 것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날에는 서로를 부르는 방법에 대해서도 까먹을 것이다. 거의 사실이 되어버린 이러한 예상 때문에 그녀는 잠깐 그리고 깊게 슬퍼했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언제나 그래왔듯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것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사실은 그 많은 것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너에 대해서는 네가 가장 잘 아는 거 아니야?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그래서 문제가 뭔데?
   그녀는 유진에게 엊그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 사건의 원인을 굳이 따지자면 ‘말’이었다. 그녀는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외에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판매가 주 담당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마저도 손님이 넘치는 특별한 경우에나 했다.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말을 뱉으면 그 말이 진정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이 맞는지 의문이 들고, 의문이 들면 골똘히 생각에 잠기고, 그런 과정은 그녀를 피곤하게 했다. 그녀는 말을 뱉지 않았다. 자기 자신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말하듯 머리로 생각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무음의 언어가 끈질기게 생성되었다. 야채가 썰리는 방향을 보면서, 식사할 때 자신이 들고 있는 숟가락을 보면서, 걷는 도중 걸음걸이의 보폭, 끓는 기름 속 부풀어 오르는 도넛에도. 모든 행위에 보이지 않는 말이 깃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밖으로 표출되지 못한 생각과 농담이 포화되었다고 그녀는 느꼈다. 그 사건의 날 당시 그녀는 도넛을 튀기고 있었다. 그날따라 이상한 손님들이 많이 왔고 이상한 손님들로 시작한 과거의 경험들이 기억에서 자꾸 뽑혀 나왔다. 그녀는 잘 굴려지고 있는 도넛들에게 머릿속으로 말을 걸었다. 오버타임 근무 싫습니다, 반말 안 돼요. 돈 던지지 마세요. 도넛은 평소의 1.5배 이상 크게 부풀었다. 팽팽한 도넛의 표면에 튼살처럼 균열의 무늬가 새겨졌다. 정해진 분량의 도넛을 다 튀긴 후 잠시 캐셔를 맡는 동안에도 한 번 시작된 생각의 열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일이 벌어졌다. 엄마로 보이는 젊은 여성은 평소와 같이 샐러드를 집었다. 아이는 엄마가 계산하는 옆에서 도넛을 꺼내 한입 물었다. 살짝 일그러지긴 했지만 윤기가 남다른 예쁜 도넛이었다.
   엄마, 말하고 싶어. 달리면서 말하고 싶어.
   아이는 정말로 가게를 달려나갔다. 당황한 아이 엄마가 뒤를 쫓았다. 아이는 온 힘을 다해 어떤 말들을 했고 소리쳤고 달렸다. 카페 주위를 빙빙 돌았다. 달리면서 티셔츠를 벗기까지 했으나 차도로는 나가지 않았다. 아이를 쫓느라 지친 아이 엄마는 테라스에 앉아 아이스커피를 한입에 들이켰다. 여자는 밖으로 나가 아이의 상태를 구경했다. 아이 엄마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안 잡아도 괜찮을까요?
   우선은 즐거운 얼굴이니까요.
   아이 엄마는 아이가 지쳐서 그만둘 때까지 달리는 것을 멈추게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자와 아이 엄마는 아이가 달리면서 떠드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았다. 아이 엄마는 구매한 샐러드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아이가 떠드는 말 중에는 반 선생님, 엄마를 조롱하는 말도 있었다. 아이 엄마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으나 화가 나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쓸데없는 말들.
   햄버거 먹고 싶다! 존나 학원 가기 싫다! 좆나게 맛있는 햄버거 먹고 싶다! 게살버거!
   그걸 들은 아이 엄마가 터진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며 여자에게 말했다.
   평소에 욕 못하게 하는데요. 큭큭 저렇게 잘할 줄이야.
   김상규 시발! 유은성 시발!
   아이 엄마는 또 웃음이 터졌다.
   김상규는 애 아빠 이름이에요.
   삼십 분 정도 뛴 아이는 땀을 잔뜩 흘리며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엄마에게 돌아왔다. 머리부터 티셔츠에 넣으면서. 개운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이 텅 빈 비닐봉지를 구기며 돌아갔다. 여자는 아이가 부러웠다.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들은 유진이 말했다.
   그러니까 부러웠다는 거지?
   응. 근데 막 부럽다 이건 아니고, 뭔가 빼앗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야.
   그 애한테? 아이가 아니라 네가 달렸어야 했다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생각해볼 게 책 정리하면서. 네가 별로 할 일은 없을 거야 말동무 좀 해주고 시간 맞춰서 약 주고. 잘 부탁할게. 말이 좀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생각을 끝맺지 못한 채 책방 뒤쪽에 있는 실내로 발을 옮겼다. 유진에게 자신의 느낌을 잘 전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모호했다. 하지만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모르는 누군가에게 모르는 무언가를 빼앗기는 기분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하면서 유진의 할머니가 있는 방으로 갔다.

   할머니는 말이 많았다. 정말 많았다. 욕도 잘했다. 딱히 대화를 원한다기보다 말하는 게 습관인 사람 같았다. 그녀는 유진의 말을 떠올렸다. ‘할머니는 가끔 나를 아주 싫어해. 평소에는 이 웬수야, 라고 부르는데 뭔가 기분이 나빠지면 진짜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욕해대니까. 좆밥아, 좆같은 새끼야, 좆 대가리야, 이런 식으로. 그러면 내가 좆 그 자체가 된 기분이야.’ 할머니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장미색으로 빛나는 스탠드를 켜놓고 있었다. 화려한 장식의 침대가 방을 거의 꽉 채우다시피 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할머니와 멀찍이 떨어진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바닥에 앉아. 침대는 내 자리야.
   할머니가 가리킨 바닥에는 방석이 깔려 있었다. 그녀는 얼른 방석으로 가 다소곳하게 앉았다. 당황하면서 선반을 짚다가 재떨이를 엎을 뻔했다.
   뭐 트럭을 몰겠다고 늙은이 인생을 팔아먹어? 나쁜 새끼. 다 허튼 패기지. 젊은 놈이 다 그렇지 뭐. 지가 대단한 성공이라도 할 줄 아나 보지. 너도 쟤랑 같은 생각이냐? 말려줄 거 아니면 부추기진 말아라.
   네. 그녀는 자기만 들릴 정도로 작게 대답했다.
   그래, 너는 내 이야기꾼으로 고용됐다고?
   아, 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말은 거짓이었으나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부정할 수 없게 하는 어떤 힘이 있었다. 그녀는 할머니의 말이라면 지금이 꿈속이라고 해도 믿어버릴 것 같았다. 침대 머리맡 곳곳에 선반이 달려 있었고 할머니는 손을 뻗기만 하면 원하는 것에 닿을 수 있었다. 담뱃갑과 라이터가 베게 옆 두 세 권의 도서 위에 있었다. 할머니는 그녀가 바닥에 앉자마자 벌떡 일어나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튼튼한 팔을 뻗어 물을 따랐고 알약도 꿀떡꿀떡 잘 삼켰다.
   보다시피 난 건강해. 비싼 커피랑 담배, 고급 초콜릿도 잔뜩 있어. 눈이 많이 안 좋아져서 책을 오래 못 보게 된 것뿐이야. 난 언제나 이야기에 목말라.
   네.
   뭘 네야, 이야기꾼으로 끌려왔으면 이야기를 풀어야지.
   전 말을 잘 못 하는데요.
   그럼 내가 시동을 걸게. 나는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해. 어떤 그림을 보고 그 그림의 속사정을 추측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듣고, 그 사람이랑 같이 만든 놀이 같은 건데. 서로가 서로한테 습관이 된 거지.
   그 사람이요?
   저기 봐. 할머니는 방문 옆을 가리켰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입에서 담배 연기가 길고 아득하게 흘러나왔다.
   유령 말이야. 이야기를 할 때마다 기어 나오는 거야. 습관인 거지. 이야기, 하면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버리는 거야. 자기를 부르는 줄 알고. 우선 이야기를 시작하면 가만히 서서 듣다가 차례를 건네받으면 내 귀 옆에 바싹 붙어서 입을 열고. 나는 그 숨결 속에서 잠들고. 그러면 우리는 꿈속에서 진짜 이야기를 시작해. 자, 이제 네 차례야.
   할머니는 이야기를 지어내는데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지자 할머니는 담배를 깊게 들이마셨다. 담뱃잎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그 유령이 할머니를 재우는 자장가 같은 존재네요.
   그녀에게도 할머니의 유령과 같은 것이 있었다. 예감하는 밤. 그 밤들은 그녀에게 습관 같은 것이었다. 없앨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면서도 굳이 없앨 필요는 없으니 몸에 장착해버린. 믿음으로 먹는 비타민이나 비타민처럼 챙겨 먹는 수면제 같은 것들 말이다. 예감이라 하면 보통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느끼는 것이지만, 그녀의 예감이란 오로지 과거를 향했다. 이미 일어난 후의 일을 가지고 그때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을까를 예상했다. 말을 더듬지 않고 생각해놓은 대로 연기하듯 자연스럽게 대처했더라면,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했더라면. 그러니까 조금은 힘 있게 말했더라면, 분노를 담은 눈으로 그 상황들을 마주할 수 있었을까. 이미 지나간 일들을 재구성해서 다시 맞이하는 일 따윈 없었을까. 그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예감하는 밤들을 보내왔다. 예감이 끝난 뒤에는 메트로놈을 켜놓고 박자에 스스로를 맡겼다. 또각또각 시계 초침처럼 듣기 좋은 소리. 그 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그녀는 그녀의 할아버지가 메트로놈을 자장가 삼아 켜주던 기억과 함께 어떤 추억의 냄새에 젖어 들었고 터널처럼 길어지는 슬로우 템포. 그녀의 머리 위에 할아버지의 커다랗고 늙은 손바닥이 내려앉으며, 깨끗하고 아늑했던 옛날 집이 생각났다. 그 기억 속 분위기에 잠겨있기 위해 일부러 메트로놈을 켜는 건지는 혹시 모르는 일이다. 그 밤들은 그녀를 안정적이고 차분하고 약간의 착각 속에서 스스로를 올바른 사람이 되게 했다.
   아직 오지 않은 밤, 유령, 담배 연기, 스탠드 불빛으로 붉고 푸르게 물든 할머니의 왼쪽 얼굴. 그녀가 이야기에 대해 궁리하는 동안 할머니는 방 한구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방 밖에서 책이 바닥으로 우르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할머니의 눈치를 보다가 책방으로 갔다. 유진이 바닥에 있는 책들을 크기, 오로지 크기로만 분류해 쌓고 있었다. 방문으로 고개를 내민 여자를 보고 유진이 말했다.
   괜찮아 별거 아니야 나 혼자서 할 수 있어.
   그녀는 도와준다거나 괜찮냐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다시 방석 위로 돌아와 앉아야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왜 또 유진에게 와버렸을까. 진짜 유진이 나를 잘 알까. 아는데 저럴까. 유진은 내게 원하는 게 없나. 그럼 나는 유진에게 뭘 원하고 있나. 나는 유진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할머니는 참을성이 없었다. 은근하게 힌트를 주는 척 이야기를 재촉했다.
   유령은 그림자가 보라색이야. 유령은 그림자가 없지 않을까 속으로 생각하면서 그녀가 물었다.
   왜요?
   사람이 아니니까.
   그녀는 다시 이야기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어둠이 고여 있는 방구석을 보면서. 그녀의 생각에, 유령은 형상이랄 것 없이 어떤 덩어리인 채로 방을 돌아다녔다. 혼자서 차를 마시고 책을 뒤적이고, 커튼을 털고. 음 할머니가 침대에서만 생활하게 되기 전에 그랬을 것처럼. 그녀는 유령이 움직이는 행동이 사실은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 혹은 누군가가 일어나 자신과 함께 차를 마시고, 책을 서로 읽어주고, 각자 양 끝을 당겨 커튼의 먼지를 탈탈 털어내 주기를.
   이건 유령이 아니었을 때의 이야기에요. 유령이 유령으로 되기 전이요. 미래가 두렵지 않았을 때, 그럴 때가 있었는데요.
   도마로 해.
   네?
   유령이 되기 전이라며. 이름을 붙여줘야지. 내가 먼저 이야기 시작했으니까 도마로 이름 통일하자. 계속해봐. 할머니는 그녀의 말에 집중하기 위해 담뱃불을 껐다. 조용히 이불을 끌어당겨 배를 덮고 귀를 기울였다. 창밖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두 여자의 눈동자가 검게 빛났고 이름을 얻은 유령이 이야기 속에서 선명해지려 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곧 사건이 시작되는 것과 같았다.

   평일의 도서관에는 평일의 사람들이, 주말의 도서관에는 주말의 사람들과 조금 낯선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도마는 익숙한 자리에서 익숙한 도서관 풍경을 내려다보며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두시까지의 여유를 즐겼다. 도마는 영화를 보기 위해 일인 상영관에 들어갔다. 헤드폰을 꼈다. 영화는 긴장감 있고 전개가 빨랐지만 영화 속의 사건과 별개로 도마의 하루는 느리게 지나갔다. 도마는 도서관이 좋았다. 대출증 신청과정이 간편했고 복도가 시원했으며 복도를 걸을 때의 발소리, 모르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장면이 마음에 들었다. 종이컵이 모자란 적 없는 정수기 등 온갖 것들을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었다. 모든 것들이 도마가 이 지역 주민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어딘가에 소속된다는 것에 장점이 있기도 하구나. 이건 꽤 괜찮은 점이다. 도마는 생각했다. 그리고 도서관 밖의 세계. 도마가 구성원으로 들어가지 못한 장소들. 학교 강의실이나 학교 식당, 학교 수업 시간, 학교 쉬는 시간, 학교 등하교 시간. 그런 것들은 겉보기의 소속과는 전혀 다른 범주의 소속이었다. 그래도 도마는 가족이 있었다. 가족과 함께 사는 집은 따뜻했고 안정적이었다. 굳이 힘들게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혹여나 심기를 건드릴까 봐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갈등이 생기지 않는 평탄한 일상이 반복되었다. 한 테이블 앞에 앉아 밥을 먹고 시계를 본다. 외출하는 사람은 집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고, 집에 남아있는 사람은 외출하는 사람을 걱정한다. 서로의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주무르고. 밥을 차리고 함께 밥을 먹고 식탁을 치우면서 걱정할 수 있는 누군가가 옆에 있는 생활. 앞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그러니까 굳이 과거를 되돌아볼 필요 없이 흘러가는 삶.
   도마는 같이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행복하게 여겼어요. 도마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사람. 어딘가에 껴 있는 걸 싫어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이 어딘가에 소속되었다는 거에 감사할 줄 알았어요. 그런 도마는 왜 유령이 되었을까요.
   불행하고 불편했겠지. 어디에나 껴 있지만 사실 어디에도 끼지 못했으니까.
   할머니, 기승전결 맞춰야 해요. 이제 막 시작했는데 도마는 행복했다니까요.
   네 차례는 끝났어, 끼어들지 마. 도마는 사람일 때도 유령이었어. 칼을 만나기 전에 말이야.
   칼은 누군데요.
   애인. 외국인이었는데, 외국인이라는 거밖에 말할 수 있는 특징이 없네. 칼을 만나기 전의 도마는 여러 일을 했고 여러 인간들을 만났어. 해왔던 일들과 인간관계는 결말이 비슷했지. 공방에서 연의 뼈대를 만드는 일을 했었는데, 기본적인 바탕을 잡는다는 점에서 그 일은 꽤 마음에 들었어. 무엇이든 시작이 좋아야 그다음이 좋지 않겠냐. 근데 금방 때려치웠어. 균형이 정확하게 맞아야 한다는 점, 처음에 실패하면 다음 과정이 소용없는 걸 아는 건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었거든. 다음으로는 얼음배달을 했어. 얼음은 모양과 크기가 일정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머릿속까지 깨끗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어. 하지만 늘 차가워야 했고, 만약에 녹아버리면 얼마만큼 녹았냐와 상관없이 순식간에 가치가 없어졌어. 도마는 얼음배달에 재능이 없었어, 어느 날 전혀 다른 물질로 변해버린 아이스 팩을 만지며 생각했어. 얼음은 생각보다 냉정한 물질이구나. 그 이후는 말할 필요도 없지. 사람이 사람과 멀어지는 거 말이야. 유령이 되어가고 유령은 유령을 알아보고 도마와 칼은 서로를 알아보고. 두 사람은 서로의 이야기에 취해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 아픈 사람들끼리 만나면 병을 공유하는 법이니까.
   할머니의 말은 틀렸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아픈 면을 꽁꽁 숨기며 산다. 아픈 사람들끼리 만나면 서로가 가진 병을 비교하면서 혼자만의 병을 도넛처럼 굴린다. 굴리고 굴려서 그 누구의 병보다 아프도록. 그녀는 유진에 대해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유진도 자신과 같은 생각이길 바랐다. 그녀는 도마와 칼에 대해 생각했다. 서로를 공유하는 관계라. 게네는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였겠다. 좋겠다. 그녀의 머릿속에 자주 하던 상상이 떠올랐다. 그녀와 유진이 손을 잡은 채 테이블을 앞에 두고 앉아있다.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마주봄이다. 유진은 뭔가 불만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유진의 참고 있는 표정을 참는다. 테이블이 길어진다. 각자 양 끝에 앉은 그녀와 유진이 멀어진다. 긴 테이블 그 벌어진 공간에는 둘 중 한 사람의 팔이 있다. 길고 얇고 오래된 줄넘기 줄처럼 늘어진 팔이 있다. 그 팔이 그녀 때문에 억지로 늘어난 유진의 팔인지, 유진의 손에 얽매여 있는 그녀의 팔인지는 알 수 없다. 그녀는 사실 자기 자신을 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긴 테이블, 창백한 살결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도마와 칼의 사이는 사실상 완전히 틀어져 있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진도가 너무 빨랐다. 게다가 발단, 전개, 절정으로 서서히 차오르는 게 아니라 풀이 꺾이듯 어느 순간 맥락이 달라졌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내용을 놓쳤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도마가 망가져 갈수록 할머니는 신나 보였다. 점점 말을 빠르게 했고 도중에 참지 못한 웃음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이야기가 술술 만들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놈의 좆이 문제야. 도마는 그놈의 좆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게 되고, 칼은 고개를 돌리는 방법을 택했어. 주고받아야 하는데, 들어주지 않으니 하는 말도 저절로 줄어갔지. 말은 공 같은 것이라 탄력이 있어야 하는데. 처음에는 나쁜 말을 마구 던지다가 그것도 지겨워진 나머지 말을 안 하게 된 거야. 대신 다른 걸 던졌지. 알람시계나 리모컨 같은 것들. 도마는 칼의 심드렁한 얼굴을 보며 생각했어. 저 새끼 좆을 따서 던질 수 있다면 지옥으로 던질 거다. 자기 좆을 따라 지옥으로 가 버리게. 사실 그 말을 칼에게 실제로 했어. 도마인가 칼인가 둘 중 하나가 같이 살던 집을 나가버리기 전까지, 그 집은 모든 말과 물건들이 공처럼 통통 튀었지. 벽에 맞고 누군가의 머리에 맞고 가슴에 박혔다 튕겨져 나오고. 하여간 엄청나게 던져댔어. 어쨌든 칼은 좋은 애인이 아니었고 도마는 그걸 알면서도 칼을 좋아하니까. 차라리 모르는 척 넘기는 게 도마에게 더 좋을 수도 있었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참는 게 이기는 거야.
   딸 깍 딸 깍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추. 그녀는 자기 안에서 켜진 메트로놈의 템포를 감지했다. 목울대가 간지러웠다. 심장이 뛰는 것처럼 손목이 두근거렸고 손가락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예민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쓸어내리며 느린 박자에 집중했다. 그러면 마음이 차분해질 것이다. 항상 그래왔으니까.

   메트로놈은 그녀의 습관이었다. 그녀의 습관이 되기 전에는 할아버지의 생활이었다. 할아버지는 음악을 듣지 않았다. 대신 메트로놈의 박자감에 몸을 싣고 살았다. 책을 읽거나 마당에 있는 나무를 바라볼 때, 화장실 전구를 갈 때, 망가진 소파를 손볼 때, 식사를 기다리며 식탁 앞에 앉아있을 때에도. 집안에는 항상 메트로놈이 틀어져 있었다. 그녀는 수저와 젓가락을 놓고 준비한 음식을 차리며 종종 할아버지를 관찰하기도 했다. 주름진 눈가와 과묵하게 닫혀있는 입술. 할아버지는 그녀를 부족한 것 없이 키웠다. 익숙한 냄새와 소리와 사랑으로 가득한 그 집에 없었던 유일한 것은 그녀의 책상뿐이었으나, 그녀는 그것을 문제 삼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아직도 메트로놈 소리를 들을 때면 그 집 부엌에서 보이는 할아버지의 늙고 둥근 뒷모습과 느리게 번지는 노을빛을 기억했다. 그녀는 그 집을 사랑했고 할아버지를 사랑했다. 무심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할아버지의 커다랗고 다정한 손을 사랑했다. 할아버지는 무뚝뚝했고 표정에 감정을 비치지 않았다. 살갑지 않았으나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조용히 챙겨주었다. 예를 들어 슬프기 전에 먹는 매실차 같은 거.
   할아버지 배가 아파요.
   생각을 멈춰. 그럼 다 잘 될 거다.
   그녀는 할아버지가 건네는 달콤한 매실차에 혀를 적셨고 잡다한 생각을 잊었다. 매실차는 그녀에게 만족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울지 않는 사람이 되어갔다. 달리기를 하다가 넘어져 다리가 까졌을 때, 친하다고 생각한 친구가 자신의 생일파티를 그녀에게 비밀로 한 걸 알았을 때, 생리가 시작된 새벽 세 시 인터넷을 뒤져 생리 자국 지우는 법을 알아냈을 때, 할아버지와 둘이 산다는 사실 위에 음란한 이야기가 허구로 붙어 고등학교에 번졌을 때, 원하던 학교에서 떨어지고 일을 해야 했을 때, 사랑해 마지않는 할아버지를 사실 떠나고 싶다는 걸 스스로 알아챘을 때. 그녀는 배가 아팠고 매실차를 마셨다. 그러면 기분이 차분해졌다. 신의 목소리 같은 게 마음속에서 들렸다. 넌 괜찮을 거야. 누구나 비슷한 걸 겪었을 거고 그러니까 너한테만 일어나는 불행이 아니야. 괜찮아 뭐든지 어떻게든 될 거야. 신의 목소리는 커다랗고 다정했다. 그녀는 할아버지를 사랑했다. 할아버지는 부인과 딸을 잃었고 손녀를 혼자 키운다. 그래서 그녀는 할아버지가 불쌍했고,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일기는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뿐이었다. 당신의 사연이 불쌍합니다. 나를 거둬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가족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할아버지를 남겨두고 그 집을 나왔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메트로놈 소리. 그녀는 혼자 살며 가끔 예감하는 밤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밤에는 메트로놈을 켜고 어떤 박자감 속에서 머물렀다. 마음이 편해졌고 안정감이 느껴졌다. ‘괜찮아 잠시 지나가는 것뿐이야. 잘 될 거야.’ 그녀는 언제나 그 안에서 살았다.
   방안에는 분명히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유령은 아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계속해도 해결되지 못하는 것들이 유령처럼 할머니의 방에 남아있는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둠이 깊어지고 그녀와 할머니는 오로지 스탠드 불빛에 시야를 의지했다. 장미색 스탠드는 그들의 얼굴을 죽어가는 사과마냥 창백하고 불그죽죽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다. 사실 도마와 칼의 애정전선에는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들 사이에 놓였다가 사라진 것들이나, 놓였다가 영원히 사라지지 못하게 된 것들이 문제였던 거다.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말하지 않으면 몰랐던 거죠. 아는 줄 알았는데, 안다고 생각한 것뿐이었겠죠.
   그녀는 문을 보면서 말했다.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방문의 동그랗고 반짝이는 손잡이를 보았다. 유진은 문 한 짝을 사이에 두고 여전히 책 정리에 몰두해 있었다. 항상 그랬다. 당기거나 밀면 열리는 문 한 짝을 두고 혼자 정리해 버린다. 유진은 지금 책 정리를 하고 있고 여자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찾을 생각이 없으니까 찾지 못한다. 그러니까, 같은 이유로 아프다고 말하지 않으면 아픈 줄도 몰랐던 거다. 대화가 없어지기 시작한 어느 날. 그날, 그때 그녀가 차라리 울음을 참지 않았더라면. 집에 와서 메트로놈을 틀고 생각을 멈추는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러나 그녀는 울음을 참았고 하고 싶은 말들을 참았다. 혼자 참으면 손 붙잡고 대화하던 때로 함께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메트로놈의 박자를 오랫동안 들어왔고 그 행위는 그녀를 약간의 착각 속에서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되게 했다. 그녀는 유진을 예감했던 밤들을 떠올렸다. 자신의 우는 얼굴조차 까먹고 푸드 트럭 위에서 냉동 패티만 굽다가 늙어버릴 사람. 그 밤들 때문에 그녀는 오랜만에 슬퍼졌다. 그리고 다시 머릿속에서 메트로놈의 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고 모르기 때문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찝찝한 기분에 휩싸였다. 갑자기 기억난 꿈처럼 익숙한 장면이 떠오를 뿐이었다. 낯익은 언덕길, 그녀는 그 길을 올랐다.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바짝 올려 묶고 긴 치마를 입은 학생들이 등교를 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손부채질을 하면서 높은 언덕을 올랐다. 지나치게 길고 무거운 치마는 땀이 오른 다리에 거치적거렸다. 몇몇 학생들은 종아리 위로 치마를 걷어 올리고 걸음을 빨리했다. 옆 학교에 다니는 남학생들이 가끔 지름길 삼아 여고 언덕을 지나갔다. 불편한 교복 대신 안에 받쳐 입은 반팔이나 웃옷을 벗은 채로 뛰어갔다. 여학생들은 그렇게 긴 치마를 입고서도 높은 언덕과 계단을 오를 때면 자신의 뒷모습을 신경 쓰며 자꾸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힘에 부쳤다. 숨이 벅차면서 심장이 크게 뛰었다. 심리적인 느낌이 아니라 정말로 가슴이 꽉 조였다. 심장박동은 매트로놈의 그것과 비슷했다. 이상한 불편함. 그건 도마가 예민하거나 혹은 할아버지의 메트로놈 소리를 오랫동안 들어왔기 때문이 아니었다. 리본이 달린 교복 셔츠는 가슴이 꽉 끼고 배 부분은 헐렁하게 남아돌았다. 정문을 지나면 학생들은 삐져나온 잔머리를 다시 정리해 머리를 묶었다. 그녀는 학생들의 흔들리는 머리칼, 땀에 젖어 등에 딱 달라붙은 셔츠 그 가운데 있었다. 그녀의 앞에도 뒤에도 언덕을 오르는 학생들로 넘쳐났다. 다 같이 그렇게 걸었다. 단추를 모두 채운 셔츠와 긴 치마를 입고 가쁜 숨을 다독이면서. 생각에서 깨어나고 나서도 그녀는 가슴이 답답했다. 몸이 위축되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벽 너머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둘은 각자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서로 다른 장소에 서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들은 건지 만 건지 할머니는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나갔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어. 도마와 나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서로를 알아봤어. 우리는 오랫동안 같이 살았어. 그러니까 도마가 유령이 되기 전까지 말이야. 잠에 들기 전에는 노부부처럼 누워서 서로에게 굿나잇 이야기를 들려주었어.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이나 느꼈던 감정 같은 것에 허구를 입혀 이야기로 만드는 일. 이제 내가 도마를 잃고 유령을 얻게 된 날에 대해 말해볼까. 말을 해볼까.
   그날, 두 사람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할머니는 손을 떨었고 침대 맡에 있는 술을 자주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 그 떨리는 손으로 도마의 왼쪽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할머니와 도마의 순서가 번갈아 몇 번 지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잠에 들 수 없었다. 이야기는 이미 예전부터 같은 부분에서 머물렀고, 그 멈춘 지점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둘 중 한 명이라도 다음 이야기를 지어낼 생각이 없으니까. 새로운 이야기를 꾸려나가려면 여태껏 쌓아온 이야기들이 허물어지는 걸 봐야 하니까 말이다. 그들은 평소에 자신이 한 이야기와 상대방이 들려준 이야기가 바탕으로 된 꿈을 자주 꾸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 밤 아무런 꿈을 꾸지 못할 것이었다. 혹은 영원한 꿈을 꾸거나.
   흐르고 있는 시간과 지난 시간들이 벽에서 떨어졌다. 방 전체가, 방을 보고 있는 그들의 얼굴이 흔들렸다. 할머니는 믹서에 넣고 다 갈아버리는 것 같다고 느꼈다. 자신과 도마, 그들이 살아오고 함께한 시간, 방, 그들이 나눈 이야기들. 모든 게 다 갈려버려서 한 잔의 음료 따위로 남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계속될수록 집은 거세게 흔들렸고 책과 담배와 술 같은 것들이 제 자리에서 뚝뚝 끊어지듯이 떨어졌다. 할머니와 도마는 손을 꼭 잡았고, 도마는 같은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이야기를 끝내지 않으면 엔딩은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들의 긴긴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것과 상관없이 그들에게 아침은 찾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나는 혼자 남았어.
   지진이었다는 거예요?
   무언가 엄청 많은 것들이 집을 흔들었는지도 모르지. 그게 뭐든 지진 같았다 이거야. 도마는 유령이 된 후에도 이야기를 하러 와. 서로를 재우기 위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도마는 같은 이야기만 해. 이야기 속에서 칼을 그리워하는 동시에 혐오하고 아마도 미쳐가다가 죽지 않을까.
   글쎄요. 근데요 할머니, 방금은 제 턴이었는데요.
   방문이 열렸다. 유통기한이 훨씬 지난 통조림을 개봉한 것 같은 냄새가 났다. 뒤범벅된 여러 개의 향신료가 자기 존재를 마구 뿜어냈다. 유진은 할머니와 그녀를 번갈아 보더니 방문 앞에 그대로 앉았다. 유진의 손에 들린 접시를 보며 할머니가 말했다.
   그건 뭐냐.
   새로 개발한 메뉴요.
   그러니까 무슨 음식이냐고.
   유진이 멍청한 얼굴로 대답했다.
   마늘카레.
   할머니는 말없이 표정을 찌푸렸다. 유진에게 쏠려 있던 할머니와 그녀의 시선이 다시 서로를 향했다. 그녀는 이야기를 되돌렸다. 아주 오래전으로.
   도마는 칼을 만나기 전에 한 아이를 만나게 돼요.
   도마는 자신의 생활에 회의를 느끼며 그네를 타고 있었다. 천천히 발을 구르며 신발 앞코로 모래를 긁었다. 그네 옆에서 한 아이가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김상규 시발! 김상규 시발! 좆나게 맛있는 게살버거. 아이는 욕을 잘했고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도마는 사실 그 아이를 잘 알았다. 앞집에 사는 그 아이는 학원을 많이 다녔고 주말이 되면 가족과 함께 여행을 다녔다. 아이가 잠든 밤이면 아이의 부모님은 매일 같은 이유로 싸웠다. 부모의 싸움을 모른다는 걸 전제로, 아이는 행복한 가정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도마는 아이의 소꿉놀이를 지켜보다가 언젠가 아이가 도마에게 반려동물은 가족이라고 말한 것을 떠올렸다. “저는 반려동물을 사랑해요. 가족을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거든요.” 아이의 집에서 기르던 앵무새가 소꿉놀이 저녁 식탁에 닭볶음탕으로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앵무새는 당연히 죽어있었다. 감긴 눈꺼풀이 푸르뎅뎅했다. 도마는 아이가 앵무새를 죽인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어쩌다가 죽은 거겠지. 하지만 도마는 앵무새가 죽은 이유와 별개로 아이가 앵무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도마가 말했다.
   너는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족을 저녁식탁에 올렸구나.
   아니요. 이건 제 가족이 아닌데요.
   반려동물이잖아.
   그러니까 아니라고요. 제 반려동물은 뽀삐 하나고, 이건 누나가 친구한테 받은 선물이에요.
   도마는 아이의 말을 잘 알아들었다. 아이의 집에서 기르던 앵무새는 그 집의 반려동물일지는 모르나 아이의 반려동물이 아니다. 도마는 몇몇 말들을 기억했다. 어딜 가든 언제나 존재하는 유형의 인간, 인생 조언자의 말.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해.’ 그러나 도마가 하고 싶은 말을 했을 때 대부분의 말들은 묵살되거나 그녀가 어떤 사람(예민하다든지 고집스럽다든지 어쨌든 지나치게 어떠한 사람이 되었다.)으로 판단되게 하거나 농담의 소재가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그 조언자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정의에 나는 속해있지 않았구나, 라고 도마는 생각했다. 그리고 세상에는 인생 조언자와 그 ‘사람’에 속해있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자신의 수많은 경험을 떠올리고서야 드디어 알아버렸다. 사실은 예전부터 모호하게 느껴왔던 것들을 이제야, 좆같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두 여자는 스탠드 조명에 비친 서로의 푸른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머리맡을 더듬으며 다른 손으로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담배 한 개비를 쥔 손가락이 단단해 보였다. 원석에 박힌 루비처럼 붉게 빛나던 라이터 불이 꺼지고 곧 입가의 주름이 섬세하게 움직였다.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유진은 방문 앞에 앉아 카레를 떠먹었다. 숟가락이 접시 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그녀는 메트로놈의 딸깍거리는 소리를 떠올렸다. 쇠막대가 양옆으로 흔들리며 나는 그 소리. 그녀는 초조하게 머릿속으로 시간을 쟀다. 그 시간은 그녀가 살아오면서 정답이라고 생각해왔던 약간의 착각들에 대해 고민하기에 충분했다.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좋아하는 엽서를 수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은 딱히 생각해 본 적 없을 만큼 당연한 일이 아니었나. 그녀는 만나본 적도 없는 도마의 삶이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이였을 때, 학생이었을 때, 성인이 된 후 등등 온갖 시절의 도마가 깨진 영화필름 속 장면처럼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그녀도 할머니처럼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에 재능이 생긴 듯했다. 메트로놈과는 다른 느낌의 박자감이 노크하듯 그녀를 두드렸다. 그녀는 또다시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낯익은 언덕길과 긴 치마 밑으로 발갛게 익은 종아리들, 힘이 벅차 말 한마디 없이 숨을 고르며 등교하는 학생들이 보였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몸을 죄는 교복을 입고 언덕을 올랐다. 손바닥을 펼치자 사슬처럼 꼬여 있는 손금마다 땀이 고여 있었다. 그녀는 유난히 생명선이 짧게 느껴졌다. 유진도 생명선이 짧았지. 연애를 시작하던 때, 두 사람은 국수를 많이 먹었다. 유진은 의식적으로 면을 끊지 않고 후루룩 먹었고, 국수를 먹은 날에는 꼭 소화제를 샀다. 식사를 한 후에는 서로의 손을 오래도록 잡았다. 깍지 낀 손을 흔들면서 그녀는 손가락이 다섯 개나 되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오래도록 살아남으라고, 힘이 빠져 손가락 한두 개가 풀어져도 다섯 개 중 하나는 연결고리처럼 끈질기게 이어져 있기를. 그들은 만날 때마다 서로의 생명선을 손톱으로 꾹꾹 눌러주었다. 그런 때가 있었다. 가파른 언덕에 벚나무가 일정한 간격으로 심겨 있었다. 나무들은 반쯤 누운 채로 꽃을 피웠다. 그녀는 치마에 손바닥을 슥 문지르고 뒤를 돌아보았다. 언덕을 오르는 학생들의 행렬이 끝없었다. 구름 밖으로 해가 드러났다. 학생들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고, 더욱 선명해진 그림자가 그녀들을 뒤따랐다. 그녀는 그 장면을 한동안 생각했다. 저마다의 그림자 속에서 도마와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이야기는 거기서 시작되었다. 할머니는 그녀를 기다렸다. 목을 위에서 아래로 쓸어 만지면서 파자마 단추를 위에서 한 개 풀었다. 그녀는 할머니에게 차례를 넘겨주지 않기 위해 새로운 이야기를 생각하느라 바빴다. 완전한 밤의 시간이 되었다. 스탠드 불빛은 이제야 온전히 스탠드만의 색을 냈다. 도마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도마는 미치거나 죽지 않는다.

최미래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모르는 얼굴로 등장할 때, 처음 만난 사이의 가벼운 목례로 지나가지 않기를

2019/01/29
1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