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



   거실에서 로열럼블을 시청하고 있다. 선을 넘어가면 피해자가 되고 살아남은 사람에게는 어떤 피의가 있었다. 마지막은 마지막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잘못했어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유행하는 옷을 몇 번 갈아입었다. 혐의는 벗어두지 못했다.

   십 년 전에는 십 년 후만 생각했는데 구석에 있다 보니 구석이 아니라 구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구덩이는 몸을 자꾸만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구덩이라고 믿어버렸을 때, 꿈틀대는 손가락이 조금 징그럽다는 생각을 했다. 손가락을 잃어버려야 나는 한 뼘 밖으로 나올 수 있을 텐데.

   2차선 도로에서 아이는 점선이었다. 급식 시간에는 벽에 붙어서 밥을 먹고 있었다. 사이렌이 울리고 신호등이 바뀌어도 양호실에는 응급환자가 늘어나지 않았다. 양호한 학생들만 수업을 들었다. 아이는 책상 서랍에 손을 넣어 구석을 만졌다. 손바닥에 끈적이는 것이 있었지만 쉽게 꺼내지지 않았다.

   기본적으로라는 말을 많이 하는 선생님은 아이를 보지 못한다. 아이는 기본이 없으니까. 책상 안에서 책상 밑을 긁었다. 손톱은 침을 흘리지 못한다. 책상은 그대로 있고 손만 녹아내린다. 책상 안에서 과육이 흘러내린다. 껍질을 벗기면 냄새가 탄로날 것 같았다. 안과 속은 다른 말이다. 속은 문드러지는 것을 쉽게 들키지 않았다.





   두 시의 추잉껌



   방바닥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면 고백부터 질겅거리던 사람들. 효자손을 위아래로 흔들면 새가 날았다는 이야기를 한다. 할머니가 내게 참새를 놓아주라 했었다고. 잡아준 건 할머니인데 잘못은 내가 한 것 같았다고. 옥상 난간에서 참새를 밀었다고.

   친구가 죽었다는 문자에서 왜 새소리가 날까. 친구는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 버스에 치였다고 했다. 기사는 20미터나 더 갔다고 했다. 이런 소문들을 술자리에서 듣는다. 나는 하강하던 참새 한 마리가 통닭 같다고도 생각했으며 그런 일에는 맥주가 잘 어울릴 거라고도 생각했다. 새가 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전부 구애(求愛) 같다고 생각했다. 필스너 잔이 부딪히는 소리에서도 새소리가 났다.

   세수를 한다. 세면대는 잘 포장된 나라 같아서 벗겨지거나 사라지는 것을 점유한다. 무너진 얼굴이 세면대 위에 거품처럼 떠 있는 것을 본다. 껌을 꺼내 씹다가 계절을 따라 남쪽으로 날아갔다는 새가 생각났다. 껌은 오후의 운동성을 갖고 있다. 주기마다 질긴 가능성으로 돌아올 것이다. 내 잘못들이 입안에서 고립된다. 나는 자주 혀를 씹었다.

   오후가 오후를 씹고, 새가 새를 씹고. 껌이 껌을 씹는 소리에서도 새소리가 났다. 효자손을 들면 무서운 힘이 생긴다는 걸 할머니의 발목을 묶어보다가 알았다. 어쩔 때는 내 발목도 같이 묶으면서.

   그래서 미안하다 생각했는데. 이것도 잊어버릴까봐 하루에 한 개씩 등 위에 깃털을 심었다. 죽은 친구가 내 등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김가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할머니가 계셨던 장례식장을 지나야만 한다. 나는 매일 애도하지 않는다. 늘 애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염려하면서. 여름에는 에어컨을 켠다. 할머니가 얼려둔 얼음을 지난 몇 년간 나눠 먹었다. 가득찼던 슬픔들을 점점 비워내고 있는 중이다.

2017/12/26
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