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백의 전개



   미술실에서는
   몸속에 코끼리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어떤 각도에서도
   이빨이 드러나는 법이 없으니까

   공을 공으로
   그리는 손만 있으니까

   검은 구름을 귀처럼 달고 공은
   틀니를 벗은 노인처럼 얌전히 빛을 씹어 먹는다

   더이상 미술실에서는
   공 때문에 손이 없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손을 이해하는 거짓말이 있으니까

   백열등 아래에서 본 손은 하얗지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
   친구는 미술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계속 이렇게 희어지다가
   결백해질 수도 있을 거라는 믿음은
   그러니까 희어지는 만큼 태연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것이다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일에 대하여
   아무도 떠들어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묵묵한 자물쇠처럼 어떻게든 나를 위협하지 않으니까

   빛이 들어오는 각도를 생각해라
   선을 그려내는 호흡이 중요하다
   선생의 손이 내 손을 고쳐 쥔다

   와락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집으로 돌아간다

   현관에 걸터앉아 젖은 신발을 말리면서
   친구의 얼굴을 생각하다가
   줄지어 목을 내어놓은 석고상들이
   누구를 닮았는지를 잊어버린다

   깜빡깜빡
   나는 사라졌다 나타났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빛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나는 무서워졌다

   깜빡깜빡
   검은 구름을 씹어 먹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축축해진 양말을 벗고
   까매진 손은 벅벅 문지른다

   비누가 쉽게 손을 빠져나간다

   헐렁한 주먹은 왜
   웅크린 코끼리를 닮았나

   비 오는 밤 미술실 선반 위에서
   공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딱,딱,딱,딱,
   이빨을 부딪친다

   아무도 알지 못한다





   서로의 발등을 밟으면서



   가요. 윗입술이 가려운 얼굴. 시체에서 눈알이 흘러나오는 시간. 머리 위로 부풀어 오르는 쓰린 귀 한쪽처럼. 가요. 지구 밖의 모든 왼발들 계단을 디딜 때 한꺼번에 무너지는 흰. 벽처럼. 이마에 반점으로 모여드는 모든 흰. 볕처럼. 뜨거운 우리. 불 속으로

   가요. 세상의 모든 구걸의 방법 가지고 싶다는 듯이. 가요. 아무런 전설 없는. 연못 같은 얼굴. 끔뻑끔뻑. 두 눈 띄워놓은 사람처럼. 주렁주렁. 띄워만 놓고. 들어와 보지는 않는. 성큼성큼. 뒤돌아가는 큰 발. 작은 발처럼. 뒤돌아와 발자국까지 주워가는 매정한 사람처럼. 더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는. 한 짝의 구두처럼

   가요. 눈길 위의 눈길. 잊지 않으려는 눈사람처럼. 가요. 연못으로. 투신하는 여자. 천박한 남자. 실수가 설득한 서로의 사춘기. 할머니 시체의 창백한 스웨터에 스며드는 물 자국. 도마 위 말라붙은 다감한 흰 살점처럼. 불타러

   가요. 바다를. 지워버린 아프리카. 껄렁한 푸른 나비의 날갯짓처럼. 먹구름의 이빨과 쓰라린 노란 눈알. 굶주린 흰 여우가 뒤따르는 유령처럼

   가요. 발목도 목도 없이. 데굴데굴. 구르면서. 바닥을 핥는 눈먼 배우처럼. 모든 수치의 방법 알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몸을 구기는 첫번째 동작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오늘과 오늘의 짧은 목례처럼. 아침이 끌고 갈 사형수의 새벽처럼. 넘치는 눈을 감았다 떠요. 푸른 무릎으로. 새로 태어난 생물의 두 눈처럼. 기어서

   가요. 오늘 아침 누군가 투신한 전철역으로 들어오는 열차. 여름 내내 매미의 리듬으로 사는 운동화. 상행열차에 오르듯이. 혼자서 가요. 모든 구걸의 방법 알고 있는 사람처럼. 네 발로 가요. 차라리 여덟 발로 갈까요. 싸락눈을 맞으면서. 발자국도 남기면서

   가요. 고백이 된 가죽. 구두처럼. 함박눈을 맞으면서. 가요. 서로의 무표정을 긁으면서. 서로의 발등을 밟으면서. 가요. 출렁이는 햇빛. 누군가 놓쳐버린 목줄처럼. 가요

   그렇게 해보지 않은 사람도 있냐는 듯이.

서효원

이번 겨울에는 이 교대 공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섬으로 떠나버렸습니다. 공장에서는 핑크색 불량 딱지 뒷면에 시를 썼습니다. 많은 딱지들을 뒷주머니에 숨겼습니다. 집에 돌아와 꺼내 보면 아무것도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직도 섬인데 어쩐지 불량이 더 익숙합니다.

2019/01/29
1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