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 숲이라는 습에서



   산죽, 같은 손금을 가진 손들이
    정강이를 할퀴어댔습니다
    붉은 흙길을 걷다 개울을 만나 발을 씻으면
    물집으로 부르튼 까만 발들이 생각났고
    손이 지은 죄들이 떠올랐습니다
    물조차 씻겨내지 못하는 아픔은
    시푸른 손들이 만져줘야 나을 때가 있었습니다
    깊은 숲일수록 비밀이 선연하고
    생각나는 건 사라진 사람들의
    마지막 눈동자였거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 저녁밥을 먹을 수 없는
    사라진 시간이었거나
    깨진 밥그릇과 솥단지 사이에도
    시원히 산바람이 일었고
    누군가는 제상을 차리고
    누군가는 풀밭에 드러눕고
    검은 새는 돌아와야 할 사람처럼 머리맡에서
    울어 댔습니다
    그날의 사람들처럼
    바람에 총성에 엎드렸다 일어섰다가는
    울었다가 웃었다가는
    밥과 술을 나눠 먹고
    검은 새들도 먹으라고
    밥 몇 술을 푸른 숲에 던져 주었습니다
    숲이라는 말은 습 같기도 해서
    돌아와서도 더 깊이 들어가게 됩니다
    물기 많은 지문 없는 손들과 악수를 하고는
    습을 말릴 수 없는 그런 숲이 있었습니다





   늙은 개 같은



   섬을 갔다 오면 섬만 생각나는 게 아니라
    주인도 한참을 비운 외진 집
    홀로 지키는 늙은 개가 생각나네

    누가 채우는지는 모르겠으나 비워지지 않는
    쭈그러진 소금기 밴 밥그릇도
    외로운 절경이었네

    고동 소리에 귀를 세우다
    이내 동백나무 그늘 속으로 몸을 눕히는
    해풍에 말라가는 눈 그렁그렁한
    늙은 개 같은 섬을 떠나며

    어떤 이는 뱃머리에서 미지의 물결을 바라보고
    어떤 이는 후미에서 가버린 물살을 회고하네
    나는 어떤 행로에도 속하지도 못하고 눈을 떼지도 못하는데

    그러나 왜 그리움도 파도도
    앞발을 높이 들어 달려드는가

문동만

몇 개월 사이에 두 곳의 섬을 다녀와서 딱 한 편씩의 시만 썼다. 산죽밭을 헤치며 사월 숲에 죄 없이 숨어야 했던 까까머리 단발머리 아이들의 겁먹은 눈동자는 어디로 갔을까. 마침내 숲은 신록이 짙어져 청량했고 되돌아온 까마귀 울음은 신령했다. 갑판 위에서 바라보니 앞발을 높이 들어 달려오는 건 파도나 개나 비슷해 보였다. 그 지난한 기다림과 이별이 사람의 일이자 섬의 숙명이자 개의 일생이라고 생각하니 나 또한 섬이자 개가 아닐 수 없었다.

2018/10/30
1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