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꾼 꿈의 주인으로서 울며 살았다.
1991년 9월.
―쿠씨의 묘비명


  샤워기를 틀고 물을 맞을 때가 되어서야 날갯죽지 쪽에 생채기가 났다는 걸 알아차린다.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었지만 성가실 정도로 따끔거려 평소보다 샤워를 빨리 끝내야 한다. 뿌연 거울에 서린 김을 거둬내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눈에 비눗물이 들어 잘 보이지도 않는다. 신경질적으로 눈을 문지른다. 어지럼증만 더해질 뿐 선명해지는 것은 없다.
  욕실 문을 벌컥 열자 안에 있던 수증기가 문밖으로 빠져나가다가 흩어지는 것이 보인다. 드디어 눈앞이 선명해진 것이다. 나는 왼쪽 날갯죽지에 난 상처를 살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수증기들이 비명 지르는 것을 구경한다. 그것들은 바깥으로 나가면서 욕실보다 차가운 공기에 놀라 빠르게 투명해지며 자취를 감추는 듯하다. 온도끼리의 생존이란 그런 것이다. 전라 상태로 우두커니 서서 문고리를 잡고 한참을 서 있다. 이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놀라 자빠질 것을 상상하고 그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울지 까지 생각해본다. 아, 내가 조금만 더 짓궂었더라면.
  아직 덜 마른 몸 위에 티셔츠를 입으면서 등에 난 상처를 봐야 했다는 걸 기억해낸다. 그보다 전에 욕실에 두어 마리 날아다니던 초파리를 죽여야 했다는 걸 기억해낸다. 눅눅한 귓속에 손가락을 쑤셔 넣으며 내가 과연 샴푸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 아득해진다. 왜 샤워를 하고 있어야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몽유가 끝나면 버릇처럼 몸을 씻었다. 아니, 이미 샤워를 하고 있는 도중이 되어서야 잠에서 다 깨어나는 것이라고 보아야 맞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잘 없다는데, 나의 몽유 패턴은 내 맘에 든다.

  선반 위에 올려둔 휴대폰은 코를 박듯 엎어져 있다. 그건 단호해 보이기도 했고 가여워 보이기도 하다. 눼의 소행이다. 잠을 자는 나는 나지만 잠을 자지 않고 돌아다니는 나는 눼라고 부른다. 물론 내가 나를 칭할 때만 그렇다. 이모와 언니는 눼라고 부르는 걸 싫어했다. 눼 자체를 싫어했다. 내가 나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 싫은 건지 그냥 내 병이 싫은 건지 헷갈릴 만큼 싫어했다. 이모는 이따금 답답한 마음에 “눼가 헤집어 놨지 뭐야!”라고 할 때가 있었지만 언니는 실수로라도 그 애를 눼라고 부르려고 하지 않았다.

  몽유가 병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는 정말로 모든 인간이 몽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게으른 사람들이 일어나지 않고 행동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말할 뿐이다. 자신의 상태를 설명할 때 그것만큼 간단하고 명료한 것을 또 하나 찾지 못하였을 뿐이다. 먼 미래에는 몽유도 몸에 좋은 몽유, 앉은뱅이 몽유부터 시작해서 갖가지 몽유로 구분되고 분리될 것이다. 채식주의자들에게도 계란은 먹는 채식주의자, 생선은 먹는 채식주의자 같은 수 가지의 종류가 생긴 것처럼 말이다.

  여하튼 휴대폰을 다시 들어 전원을 연결해놓고 간밤에 찍힌 것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했다. 날마다 동영상을 남기는 것은 아니었다. 몽유는 별다른 일이 있지 않은 이상은 생리 주기에 함께 찾아오곤 했다. 주기를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행운인 것이다. 휴대폰 배터리와 저장 공간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말이다.
  이건 언니의 심부름이다. 눼가 들어 왔을 때 어떤 모습인지를 모르는 유일한 사람은 나였다. 나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녀가 어떤 눈빛이고 어떤 입 모양이며 어떤 패턴을 가지고 움직이는지, 내가 꼭 알아야 한다고 했다. 언니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일방적인 사람이다. 내가 눼를 똑바로 마주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람이다. 언니는 무엇이든 하면 어떻게든 나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언니가 연애를 할 때조차 어떤 상태인지 잘 알고 있는데, 도무지 자연스럽게 괜찮아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여자였다. 언니가 벌써부터 겪은 두 번의 이혼은 모두 그 괴팍한 성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원이 돌아오고 남아 있는 영상을 확인하려 했지만 저장 자체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남아있는 것이 없으니 언제 눼가 나타났는지도 알 수 없다. 언니의 강요가 있긴 했지만 내 나름으로 궁금했던 것조차 해소되지 않는다. 그건 내가 또다시 휴대폰을 무리하게 세워두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가장 최근에 기록된 영상은 남자친구가 보낸 그의 알몸 영상뿐이다. 나는 그가 영화학도라는 것을 믿지 않았지만 최소한 이런 영상을 보낼 때는 나름의 철학이 담겨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나 역시 그 못지않은 특이 취향을 갖고 있었으나 저화질만은 용서하기 힘들다. 오늘은 그를 처음으로 대면하는 날이다. 약속 시간과 약속장소는 한참 남았고 한참 멀리 있다. 나에겐 그의 주인으로서 물어야 할 죄가 많이 있다.

  정확한 행동양식을 목도하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내 병에 대해 말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막장에 샤워를 한다는 것밖에 모르니까. 그것에 대해 사실적으로 말하진 않을 것이다. 거짓말도 할 것이고 그럴싸한 거짓말 같은 진실도 말할 것이다.

  책을 읽는다. 부쩍 활자가 재밌다. 자모음의 조합과 단어 간의 상호작용은 수학적이다. 조립은 나의 숙명인 듯 흥미롭다. 눼의 존재도 그렇게 설명된다. 시계태엽 같은 나와 눼의 관계는 본 주인인 내가 눼에게 지속적인 호기심을 가졌기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어른들의 추천으로 타일 시공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어른들은 내가 무언가를 재밌어하는 것을 재밌어한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타일 시공은 전망이 좋은 직업이라고 했다. 16주 과정의 교육을 마치고 타일 시공사 자격증을 얻었을 때 이모는 홀린 듯 50년 뒤의 미래까지 점쳐두었다. 그녀의 점괘대로라면 나는 지금쯤 주공아파트 상가 건물에 어엿한 인테리어 사무실을 차리고 있어야 했다. 물론 그러지 못했다. 읽고 있는 책은 쿠씨의 책이다. 쿠씨는 문장을 완성하는 법이 없다. 스스로 던진 질문에 스스로 대답하는 멍청한 화법을 구사한 적이 없다. 내가 매료된 쿠씨는 나 같은 좋은 제자를 얻기 전에 이미 고인이 되었다.
  소파에 던져놓은 코트처럼 아무렇게나 구겨진 채로 책을 읽고 있다. 내게 또 다른 전망이 생길지도 모르는 이 순간에 초인종이 울린다.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이모의 윗집에 세 들어 사는 나 역시 손님이나 다름없다. 나는 이모의 조카이긴 하지만 내 하루의 삼분지 일을 차지하는 시간 동안 이 집에 나는 없고 눼가 있지 않은가. 주인이 없는 집에 손님이 손님을 들여보내는 것은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어쩌면. 어쩌면 다음에 떠오르는 이는 없다. 그저 막연한 기대에 부합하는 막연한 이가 찾아온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문을 열자 히피 머리를 한 중년의 여자가 얼빠진 얼굴로 서 있다. 마른 다리에 비해 폭이 큰 바지와 인도풍의 코끼리가 그려진 가방 모두, 그녀가 걸친 것은 모두 축 쳐져 있다. 나는 손님과 마주한다. 손님인 적이 없어 보이는 그 손님과 대칭이 되도록 같은 자세, 같은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손님이 눈을 굴리자 나도 눈을 굴리지만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손님은 “오늘부터 일하기로 한.” 까지만 말하고 다음 말은 하지 않는다. 그다음 말을 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몇 가지 후보군을 떠올린다. 오늘부터 일하기로 한 간병인, 창녀, 가사도우미, 육아도우미, 설거지 마니아, 조경사, 방범 회사 직원…… 탄식이 나온다. 나는 직업에 관해 문외한이며 편견으로 쌓아올린 모래성 같은 사람처럼 느껴진다.
  “가사도우미군요.”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내 대답에 안도하는 그녀의 얼굴이 그걸 증명한다. 그러나 내가 어색함을 느낀다. 이 집에, 아니 내게 왜 가사도우미가 필요하겠나. 나는 다행스럽게도 좋은 형편에 살고 있다. 그 정도라는 것이 설거지를 하기 싫어서, 빨래를 널기 싫어서 그걸 대신해줄 사람을 고용하고 그에게 돈을 줄 정도는 아니다. 그건 잔소리하길 좋아하는 언니가 격주에 한 번 찾아와 해결해 줄 수도 있는 거였다. 나의 유일한 돈벌이는 공인중개사인 이모가 중개를 성사시키면 그 집의 주방과 욕실의 타일을 새로 깔아주는 것이었는데 나이가 많지 않은 여자애의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이 많아 그마저도 시원치 않았다. 십 오평 남짓한 집에 가사도우미라니. 이모가 고용한 사람인가? 아래층에 가야 했는데 잘못 온 사람인가?
  변변한 식탁이 없다. 나는 여자를 거실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의 소파라고 할 수 있는 의자에 앉힌다. 여자의 통 넓은 린넨 소재 바지와 잘 어울리는 천 소파다. 누군가 훔쳐 가 주기를 기다리다가 지쳐버린 것이었다.
  손님을 대접하는 일은 해보지 않아 재미가 생기는 일 중 하나다. 마치 형편이 어려운 동창생을 불러다 차 한 잔을 건네주며 돈은 잘 벌지만 밤일이 시원찮은 남편에 대해 하소연하는 사모가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나는 연기를 잘한다. 영화배우처럼 잘 울거나 잘 우는 건 아니지만 수준급의 거짓말을 한다. 언니 같은 사람의 동생으로 사는 데에 있어서 필요한 기초 능력과도 같다.
  여자는 집 안을 한눈에 담는다. 그러기에 충분한 집이다. 나는 여자가 시선을 돌리다가 창밖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조금만 노력하면 초등학교 건물의 복도 방향을 내려다볼 수 있는 창문이다. 애석하게도 이 집에서 유일하게 내세울 만한 것은 집 밖에 있다.
  여자는 말한다.
  “혼자 사시나요.”
  능숙한 거짓말쟁이에게 대답을 할 수 있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는 경우는 없다. 나는 그렇다고 말한 뒤에 혼자 살아야 하는 이유를 떠올린다. 물론 사실이 아니어야 한다. 누가 고용하였든 간에, 그녀가 무엇이건 간에 나를 타일을 팔고 사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지 않다. 때로 그것이 자랑스럽지 못하다. 게다가 왜 내가 그녀에게 사실만을 말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여자는 손톱에 투명한 매니큐어를 발라 두었다. 나는 내 왼손바닥에 언제 난지도 모르는 상처가 있다는 걸 알지만―높은 확률로 눼가 낸 것이겠지만―그것이 얼마나 호전되었는지 궁금하지만 쳐다보지 않는다. 그건 여자가 내 손을 보도록 유도하는 짓이나 다름없다. 여자가 나의 흠을 알아차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내게 퍽 반가운 손님임을 인정한다. 나는 그녀를 대접하고 싶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가 자신보다 어린 나를 경외하기를 바란다. 내 집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 이유다.
  구선명. 여자는 제 이름을 그렇게 소개한다. 거짓말이다. 그 이름은 즉석에서 지어내기에 알맞은 이름은 아니었기에 아마도 그녀가 아는 지인 중 누군가의 이름 하나를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구선명이라는 이름을 지닌 또 다른 사람에 대해 상상한다. 여자와 가깝지 않은 인물일 것이라 짐작한다. 그에 대한 타당성은 단순한 감각이라고만 설명할 수 있다. 인기가 많은 사람일 것이다. 그녀가 되고 싶고 닮고 싶은 사람, 그리하여 이름이라도 빌어 그 이름을 망쳐놓고 돌려주고 싶은 사람. 여자에게서 그 정도의 질투는 느껴진다. 나의 눼 만큼이나 내게 가엾은 사람. 구선명은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위선자라고 설명된다. 하필 구씨라니. 너무 긴장한 나머지 선수를 빼앗긴 기분이다. 나는 거짓말을 잘 아는 사람인가, 잘하는 사람인가. 잠시 고민한다.
  “급여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나는 여자의 위장에 놀란다. 놀랄 만큼 서툴다. 여자의 말투에는 내가 돈에 대해 말하는 것을 무례하게 취급하는 사람이라는 전제가 깔려있지 않다. 여자가 나를 믿었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여자의 부주의에 조급해진다. 권위적인 사람들의 행동 양식을 떠올린다. 언니다. 연년생인 언니는 나에게만 특히 권위적이다. 하지만 언니를 따라 하거나 흉내 낼 수 없다. 언니를 선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저는 먼저 이 일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사도우미 일 말인가요?”
  이 대목에서 나는 사소한 굴욕감을 느낀다. 내 앞에 앉은 이가 구선명을 흉내 내는 여자라는 것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그녀가 이 집에 온 목적에 대해서는 유념하지 못했다. 실망스럽게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이렇게 작은 집일 줄은 몰랐어요. 제가 진짜 일할 집으로 데려다줄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여자는 마땅한 호칭을 떠올리지 못하겠다는 듯 숨을 참고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나를 가리켰다. 나는 냉큼 말한다.
  “주인님이라고 해 보시겠어요?”
  “주인님이라니요.” 여자는 내가 고른 호칭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묻는다.
  나는 여자를 손님이라고 부를 준비가 되어있는데 여자는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건 나를 확신에 차게 만든다. 비죽거리며 웃자 여자는 여전히 급여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사람처럼 자신의 당혹감을 숨긴다.
  “내가 그쪽의 언니가 되어주겠다면요?” 끝내 여자는 내가 정해준 호칭 하나를 탈락시킨다. 그쪽. 나는 겨우 여자와 동등하고 나란하다. 가까운 거리가 아님에도 여자는 너무 쉽게 내 손을 잡는다. 여자는 도무지 노력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 같다. 게다가 언니라니. 발등이 찍힌 듯 짜증이 치솟았지만 참아본다. 나는 처음으로 이 집의 주인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쿠씨의 책 머리말에 보면 그런 말이 쓰여 있다. 나의 건강에 대한 염려를 잠재우기 위해 필요한 만큼의 소금 정도가 우애의 적당한 정도다. 쿠씨는 단명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우애에 냉소적인지 직접 말해주려고 짧은 생을 살았다. 나는 말한다.
  “내가 언니가 필요한 사람이었다면 그쪽을 들여보내지 않았을 텐데요.”
  “다시 내쫓아도 좋습니다.”
  이건 탁구와 같다. 그 운동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지만 여자와 나의 대치 사이로 오가는 그쪽이라는 호칭은 탁구공처럼 가볍고 둥글다. 서브를 넣으려고 던져 올린 공은 한 번 솟아오르고 나서는 다시 내려오지 않는다. 나는 구애를 받는 쪽의 사람처럼 눈썹을 올리며 한숨 쉰다. 그녀가 언니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재고할 가치도 없다. 몽유처럼, 채식주의처럼 언니라는 것에 수만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더라도 또 하나의 언니는 필요하지 않다. 그건 나보다 눼에게 해롭다.
  나는 여자를 내보내고 싶지 않다. 적어도 아직은 그렇다. 이 집에서 일어나는 일이 누군가의 발기과정처럼 원인에서 결과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아직은 초장이다. 나는 여자와 창밖의 초등학교에 대해, 낡은 소파에 대해, 나의 질병에 대해 얘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단조로운 것들이 기괴하게 얽힌 나의 삶과 눼의 삶에 대해서도.
  밥을 먹는 건 어떨까.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대체로 입으로 이루어진다. 함께 담배를 피우거나 식사를 하거나 키스를 하지 않고서는, 그러니까 입을 움직이지 않고서는 사람은 사람을 보지 못한다. 환영에 불과했던 타인이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은 입을 벌렸을 때야 도래한다. 입에 들고 나는 것 중에 진실하지 않은 것은 오직 말뿐이다.

  여자는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 곱슬머리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잔뜩 꼬아버린 헤어스타일. 그 지푸라기 같은 머릿결을 본다.

  나는 숲에 살던 시절을 떠올린다. 중학생의 나이였다. 숲에는 두 채의 집이 있었다, 집과 집 사이에는 담벼락을 대신해 울창한 자작나무가 구십 그루 서 있었다. 세어 보아서 알고 있다. 구십 그루와 새끼 나무 한 그루. 혼자 어린 그 나무와 친했다. 나는 자주 숲의 기원에 대해 생각했고 왜 요정이 아니고는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지 궁금해했다. 어린 눼가 한밤중에 옆집으로 걸어가 그 집의 삽 한 자루를 끌고 도망치려고 했다. 너무 어두운 나머지 눼는 산짐승으로 오해받았고 옆집의 주인이 쏜 총에 맞아 쓰러졌다. 아니, 총알이 아니라 총소리에 귀를 얻어맞았다고 하는 게 맞았다. 고막에서 터져나온 핏자국이 아직도 딱지 진 채로 귓속에 남아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자주 사람들의 말이 버석거리는 소리와 섞여 들린다. 어쩌다 한 번 벌어진 일이 너무 오랫동안 버석거린다.

  라면을 끓인다. 냉장고에 해놓은 반찬이 많지만 여자에게 평소처럼 밀폐 용기에 담은 그대로 뚜껑만 열어 먹는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예쁘게 옮겨 담을만한 접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위생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나는 구선명의 주인이고 눼의 주인이고 여자의 주인이다. 여자가 가사도우미라면, 적어도 그것만은 사실이라면 내가 여자를 손님으로 대하는 마지막 배려가 바로 이 라면이다. 그게 부끄럽지 않다. 끓는 물속에서 건더기 스프가 금방 불어 오른다. 여자는 식탁이라고 할 수 있는 탁상 앞에 앉아 무릎 사이에 손을 끼워두고 두리번거린다. 그 행동을 보면서 생각한다. 메이드를 쓰는 많은 집의 많은 주은 어떻게 가사도우미가 내 것을 훔쳐 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해소하는 것일까. 다른 주인들과의 정보공유가 필요하다고 느끼며 나는 어느새 그들 무리에 귀속되어 있음을 느낀다.
  “이걸 꼭 먹어야 하나요?”
  여자가 묻는다. 라면은커녕 라면처럼 생긴 것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구는 얼굴이다. 나는 라면에서 올라오는 매운 내를 참아내지 못하고 재채기를 두어 번 했다. 얼간이처럼 고개를 격하게 흔들었다. 여자는 식탁이라고 할 수 있는 탁자 한쪽으로 손을 뻗어 티슈를 뽑아 준다. 의식하고 한 일은 아니었으나 나는 손사래를 쳐 그걸 거절했고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여자는 여전히 젓가락을 들지 않고 입맛조차 다시지 않는다. 여자에게도 나처럼 저녁 약속이 있나. 나는 문득 시간이 궁금해진다. 수개월을 교제한 애인을 처음 만나는 날이지 않은가. 약속에 늦더라도 시간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휴대폰은 저기 선반 위에서 이 모든 장면을 녹화하고 있다. 내 집에 번듯한 시계 하나 걸려있지 않았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이 집의 주인으로서 자격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손님은 나의 음식을 거절하고 나는 시계가 없으니.
  그럼 내가 지금 쉽게 떠올리는 그 탁상시계는 무엇인가.
  각이 져 있고 나뭇결의 무늬를 한 그 주먹만 한 시계. 안쪽으로 오목하게 패여 있는 그것은 햇볕이 들어올 때면 시침과 분침의 그림자를 늘어트려 시간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시계의 역할 수행을 형편없이 하는 그것마저 내 것이었다.
  내가 한참이나 시계 하나의 행방을 생각하는 동안 여자는 마지못해 라면을 집어 먹는다. 꼭 먹어야 하냐고 물었던 사람치고는 맛있게 먹는다. 한 사람의 주인이 된다는 건 이런 기쁨인가. 눼는 식음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소유하거나 내게서 파생된 한 사람이 나로 인해 만족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감격에 겨운 나는 내일이 있었으면 한다. 더 맛있는 라면, 더 기쁜 라면을 내일과 모레에도 끓여주고 싶다. 나는 손을 뻗어 여자가 입으로 넣으려던 면을 만진다. 뜨거워야 할 것이 정말로 뜨겁다는 사실에 놀란다. 구태여 그것을 손가락에 돌돌 감는다. 여자는 겁에 질린다. 그녀는 좀 더 기분 좋은 얼굴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응? 나는 눈썹을 올려 눈꺼풀을 평평하게 만든다. 내가 느낀 충동적인 감정들을 들키지 않으려고.
  내가 올리면 여자는 내려야 한다. 내가 턱을 들면 여자는 고개를 조아려야 한다. 대단치도 않은 일 때문에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겠지만 어쩌겠나, 나는 주인인데.
  깍지 낀 두 손으로 인중을 받쳐놓고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신기하게도, 이제 그녀는 주눅이 들어있다. 구선명의 존재와 여자가 손님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서도 나는 한결 마음이 편하다. 그녀의 얼굴에 기시감을 느낄 정도다. 꿈에서 한 번쯤 본 것 같은 얼굴.
  “이제 됐나요?”
  라면을 반쯤 비우고 나서 여자는 말한다. 내가 여자에게 겁을 준 게 맞는지 궁금하다. 이제 됐냐고 묻는 투는 내가 종종 언니에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가사’가 없는 집에 가사도우미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가 힘든데.
  누구의 부름으로 왔는지 묻는다.
  이제야 이런 질문을 하는 게 논리 밖의 일인 건 여자와 내가 공통으로 하는 생각일 것이다. 면 가닥을 쥐었던 손이 뒤늦게 부어오른다. 전기가 펄펄 끓는 전선이라도 쥐었던 양 흔적은 점점 선명해진다. 아, 여자는 내 손을 보고 만다. 나는 주먹을 쥐지만 여자는 라면 그릇을 옆으로 치워두고 기도하듯 두 손을 겹친 채로 식탁에 올린다. 정갈하게 정리된 손톱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여자는 말해준다.
  “사실 저는 예술가였어요.”
  여자는 이 집에 들어온 이래 거의 처음으로 눈을 부릅뜨면서 말한다. 갑자기 예술가라니! 여자에게 거짓말은 열과 같아 그녀 자신을 푹 익게 만든다. 내가 그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역시 멍청하고 아둔하다. 대체 그녀에게 사람을 속이는 재미를 일깨워준 사람은 또 얼마나 멍청한 인간인가. 안타까워라. 나는 그렇군요, 하고 몸을 뒤로 당긴다. 여자는 네일아트를 했던 경력이 있다고 말한다. 나는 또다시 그렇군요. 라고 하면서 팔짱을 낀다. 그래. 구선명의 직업은 이렇게 밝혀진다. 눈을 부릅뜨고 네일아트를 하는 여자. 누구의 부름으로 왔는가를 회피했던 대목에서부터 이제 여자는 가사도우미조차 아님이 드러난다. 원점이다. 그녀는 다시 손님에 불과하고 나는 주인이 된다. 나는 말을 아낀다. 내 말은 빌미이며 힌트가 될 것이다. 설령 그것이 거짓말이라도 말이다.

  예술가란 도처에 널려있는 아무 사람이다. 더군다나 제 스스로 예술가라고 말하거나 암시하는 이들은 더더욱 희귀하지 않다. 몇 해 전 눼에게 엽총을 겨누었던 남자의 소식을 들었었다. 그도 예술가였다. 그릇도 빚고 동물도 죽이는 그런…… 산 생활을 얼마간 더 하다가 먼저 죽은 동생의 식솔들을 부양하기 위해 다시 경기도로 올라왔다고 했다. 언니는 그를 끊임없이 원망했다. 언니는 피해자가 아니니 용서할 자격도 없는데도 그를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나는 아직까지도 가끔씩 버석거리는 소릴 듣는다고 말하지 못한다. 언니 같은 사람에게 더 이상의 미움을 받을 만큼 잘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재판을 받을 때 사고 당시 내가 “아저씨 저예요.”라고 말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일정 수준의 벌을 받아야 했다. 난 그걸로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언니와 이모는 몇 번이고 그 일을 들먹거리며 돈 얘길 했다. 어쩌면 병원에서도 원인을 밝혀낼 수 없던 그 소리의 정체는 지겹도록 반복되는 언니의 과민한 신경을 회피하려는 내 고막의 주문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조용히 시켜, 그만 떠들게 해. 하는.
  물론 눼의 생각은 좀 다를지도 모른다. 내가 나와 눼를 분리한 이상 그 총알이 둔부 바로 옆을 지나 어린 나뭇가지 하나를 부러뜨린 일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그 즉시 몇 마리 새가 놀라 푸드덕거리며 흩어진 일에 대해서도.

  여자는 내 손을 좀 더 보고 싶어 한다. 네일아트를 들먹이는데 그건 핑계치고 성의가 없다. 주인은 제 소유의 것이 괘씸하다고 느낄 때 안간힘을 다해 그것을 외면한다. 외면하고 사용하지 않음으로 그것을 고달프게 한다. 그 사실을 유념해야만 한다. 품속에서 손을 빼놓지 않는다.
  “누가 당신에게 속겠어요.”
  나는 여자를 비웃는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지만 여자의 눈동자에 어린 당혹감을 발견한다. 그건 쉽다.
  “전 누구도 속이지 않아요. 한 번에 많은 것을 말하지 않는 게 속이는 건 아니잖아요.”
  “증명하세요.”
  “안 믿어도 상관은 없는데요.”
  “누구의 부름으로 왔죠?”
  “집주인의 부름이죠. 저와 두 시간이 넘도록 전화 면접도 치르지 않았나요.”
  “많은 사람과 전화를 했어요. 정말 많은 사람과.”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된 것은 문득 탁상시계의 행방을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베란다에 두었다. 초등학교에서 들려오는 종소리가 얼마나 정확한지 궁금하여 거기에 두었던 게 분명하다. 어느 흐린 날씨의 낮이었고 자기가 아니면 온 세상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하는 듯 안간힘을 다해 돌아가는 초침을 들여다보느라 학교 종 따위는 신경도 쓰지 못했던 날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구름이 잔뜩 낀 날이었는데 창문 쪽에 있던 오른팔이 육안으로 구분될 만큼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여자는 갑자기 자기가 벗어놓은 가방을 들고 도로 앞에 앉는다. 생활 흔적이 있지만 낡지 않은 가방이다. 인조 손톱 몇 개가 그녀의 손에 담겨 나온다. 나는 등과 목 뒤쪽에서 간지럼을 느껴 아주 짧게 몸을 떨었다. 달그락거리는 플라스틱 손톱들이 섬뜩하게도 탁상에 모양을 갖추어 진열된다.
  “증명하라고 하셔서.”
  나는 십자가를 마주한 흡혈귀처럼 고역스러움을 느낀다. 그것들은 혐오스럽다. 여자는 덧붙여 말한다.
  “주인님께서.”
  그리고 놀랍게도, 이번엔 포만감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 이 어설픈 사기꾼에게 속아주고 싶을 만큼 괜찮은 기분이다. 갈망하지 않는 것은 주인에게 독과 같다. 나는 만족해선 안 된다고 되뇐다, 그깟 부름 하나에. 억지로 거부했기 때문일까, 나는 차라리 그쪽 저쪽 하던 호칭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어느 쪽도 아니었던 내가 상상하기 나름인 쪽으로 귀속될 수 있지 않은가.
  나뭇잎과 나무, 또는 그런 색. 여자가 펼쳐놓은 인조 손톱 중 다섯 개는 그렇게 통일성을 갖추었다. 울창한 숲은 내 머릿속에서 하나의 날씨처럼 생각된다. 흐리거나 맑거나 구름이 끼거나 말거나 하는 것과 또 다른 날씨. 그것들이 하늘을 덮는다는 것은 공통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자가 앞에 놓인 손톱들을 모두 그렸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건 이 세상 얼굴보다 많은 손톱 중에 하필이면 그걸 골라 가방에 담아가지고 다니는 여자가 예술가가 아니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여자는 선택해야 한다. 나에게 무엇일지.
  “구선명은 누구죠.”
  나는 묻는다. 여자는 한 번 벌린 입을 다물지 않은 채로 잠시 동안 숨도 쉬지 않는다.
  “구선명이라는 사람은 누구냐니까.”
  그리고 아주 늦었지만, 나는 내 행색이 얼마나 추레할지 생각한다. 여자에게 강압적인 투를 구사하고 싶다는 갈망이 생길수록 지금의 차림으로서는 기세가 꺾인다. 아무렇게나 감고 말려놓은 머리카락과 생각해보면 곱게 개어본 적도 없는 반바지, 그리고 정말이지 창피스럽다고 생각한 건 왜 내 집에 있고 내 몸에 걸치고 있는지 모를 노란 티셔츠다. 노란색이라니.
  “구선명은…… 그러니까 구선명은.”
  웬걸, 여자는 다시 자신의 손톱들을 거두기까지 하며 시선으로 아무 곳이나 더듬거린다. 너무 노골적인 반응에 이 모든 게 어설프게 짜여진 연극 같다는 기분이 든다. 여자는 대사를 암기하지 못한 배우보다는 자신이 뱉어야 할 대사의 의중을 차마 다 이해하지 못한 저능한 쪽의 배우 같다. 곧 무대에서 쫓겨날 게 분명한. 여자가 당황스러워하는 것에 마냥 도취될 수는 없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노란 티를 입고 있으니까. 그게 얼마나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지 이해받고 싶을 뿐이다.
  별안간 초등학교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져 나온다. 여자는 그 소리에 상관하지 않으면서 여전히 눈을 굴리며 다음 말을 생각하고 있다. 구선명에 대한 설명. 어쩌면 자신이 왜 구선명을 선택해야 했는지에 대한 변명. 한동안 나는 모니터 안에서 둥둥 떠다니는 창문을 들여다보는 기분으로 여자의 말을 기다렸으나 이미 나는 여자와의 탁구 같은 만남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차갑게 식은 냄비의 몸통을 쥐고 뒤를 돌아 싱크대에 남은 국물을 붓는다. 별다른 이동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이 집은 좁은데 무슨 도우미가 필요하다고. 나는 나 자신만큼이나 우스운 여자가 이제 좀 나가줬으면, 하고 바란다. 놀랍게도 나는 이제 여자가 구선명임을 인정하고 싶어진다. 사실 그녀가 무엇이어도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 이렇게 어린 내게, 왜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내게 속아 이 집에 들어와선 구태여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는지는 궁금했지만 이내 그마저도 시들해진다. 내가 점점 희한한 나르시시즘에 젖어가는 것일까. 쿠씨의 책이나 마저 읽고 싶어진다. 일만 이천 번쯤 읽고 또 읽고 싶다. 여자가 무엇이든 구선명이 무얼 했든 간에 어서 빨리 보고 싶고 알고 싶은 것은 쿠씨의 전언과 저기 찬장에 기울어진 휴대폰에 찍힌 내 모습이다. 애인이 발기를 하는 것을 찍어놓은 영상 말고, 구선명과 내가 라면 냄비를 앞에 두고 벌이는 차가운 말장난들.

  여자는 내게 애원한다. 이제 와서 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돈은 나도 필요하다. 빌어먹을 돈 몇 푼이었으면 나와 눼가 이렇게 한 몸을 나눠 쓴다는 것만으로 미움받고 버려지지 않았을 테니. 못난 주인 된 심정으로 나는 돈을 넣어두었던 가방을 찾는다. 여자가 잠깐이나마 여기 들어와 가사도우미 행세를 한 값을 쳐주기 위함이다. 너무 터무니없지만 여태껏 한 번도 부유한 주인이었던 적이 없었으니 한 번이라도 돈으로 존경심을 사고 싶다. 나는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두며 조금 으스대는 얼굴로 여자를 본다. 여자는 한 손을 올려 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인다. 절망인지 감동인지 파악해야 하나. 나는 가방 안에 손을 집어넣고 돈이나 돈이 될 만한 무언가를 찾는다. 조개껍데기 같은 것이 손 그물에 걸려 나온다. 기괴한 그림 한 점처럼 한쪽 손에 담긴 인조 손톱들을 내려다본다.
  내 것이 아니었구나.
  여자는 나를 향해 끔찍한 욕지거리들을 무수하게 쏟아낸다. 내가 애인에게조차도 하지 않았던 그런 욕들. 여자는 나를 버러지라고 말하고 내가 살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이유나 가치가 있어야만 살 수 있을 만한 세상이라고 생각지 않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동의한다, 여자의 살기에. 여자는 내 품에서 가방을 낚아챈다. 화가 많이 나 있다. 응당 그래야만 한다. 놀랍게도 이런 순간에 여자에게서 언니의 모습을 발견한다. 까칠한 손으로 팔을 쓸어내리는 것인지, 팔을 쓸어내리는 손이 거친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여자는 언니와 닮아 있다. 이 새끼, 저 새끼, 이 자식, 저 자식. 침을 튀기면서까지 뱉어내는 여자의 욕들이 그 가방 안의 껍데기들처럼 덜그럭거린다. 버석거린다. 나는 여자의 등 뒤로 누군가의 새끼들이 고함을 지르며 뛰어다니는 초등학교를 쳐다본다. 내가 치욕스럽기를 바라는 여자의 절실한 마음을 외면한다.

  눼가 목욕을 했던가. 오늘 말고 그때 말이다. 나는 그 기억의 숙주인 주제에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그 일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권리 밖의 일을 저지르면 느껴지는 스릴을 위해 단 한 번의 총성을 거듭 떠올리기를 즐겼다. 미안하고 송구한 일이다. 남자의 혐의는 살인 미수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모가 덧씌운 일들은 한 남자가 어린 눼에게 저지를 수 있는 최대치의 죄목들이었다. 증거가 없어야만 제하여지는 잘못들. 적어도 그가 눼를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도 나와 눼가 잘살고 있는 지 궁금해하는 사람이지 않은가. 언니는 그렇게 말했다. 변태 새끼 개새끼, 한때 그 새끼가 나더러 언니야 언니야 했던 걸 떠올리면 치가 떨려. 하고. 나는 여러 번이나 그를 두둔하려고 했고 이모는 그 사실에 더 침통해 했다.

  여자의 욕지거리를 멈추게 하기 위해 개당 7천 원의 값을 치르고 인조 손톱을 붙인다. 타일 사이에 줄눈을 바르고 걸레질을 하는 것보다 고상한 일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슬프게도 여자는 손을 험하게 쓰는 것을 삼가라고 말한다. 예술가의 당부란 늘 이렇게 몰이해한 것일까. 오늘 내겐 손을 험하게 쓸 일만 남아있는데. 잠자코 책이나 읽으며 며칠을 보내는 것이 어떠냐고 묻는다. 왜 그녀가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는 모르겠다. 여자가 내 손등을 때린다. 떨지 말란다. 좋지 않은 습관이란다. 나는 교조적인 여자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여자를 제어하기 위해 했던 고민에 비해 여자는 너무 손쉽게 나를 때린다. 오늘도 애인을 만나러 가는 일에 실패할 것임을 직감한다. 왼쪽 손은 작업이 모두 끝났다. 접착제가 천천히 손톱을 달군다. 나는 그 냄새를 좋아한다. 심장에서 먼 쪽으로부터 서서히 졸음이 몰려온다. 여자는 같은 말을 반복해서 미완성시킨다. 구선명이 누구냐면, 구선명이 누구냐면, 하필 왜 구 씨 나면. 하고 계속 반복한다. 잠을 추스르기에도 턱없이 연약한 손톱들을 내려다본다.

  내가 잠들어갈 때 각성하는 눼가 있다. 이제 그 아이의 차례다.

박몽

이 소설을 다 쓸 때까지 느껴야 하는 혼자만의 치욕스러움이 있었다. 두 여자의 교집합에 있는 진한 몽롱함을 쓰고 싶었고 평행하나 함께인 걸음을 쓰고 싶었다. 아직 ‘두 여자’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했다. 그 미련은 연대하나 배반하고, 몽롱하나 생채기를 남기는 이야기를 만드는 데에 쓰일 것이다.

2018/09/25
1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