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하상이 장지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 안에 고인 등잔의 불빛이 휘청거렸다. 바닥과 벽에 드리운 현석문과 길쇠의 그림자가 순간 기괴한 모양으로 일렁였다. 얘기를 하던 두 사내는 동시에 말과 표정을 멈추고 하상을 쳐다봤는데, 분위기가 자못 심각했다. 석문이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를 하며 서안(書案) 앞을 하상에게 양보했다.
   -바오로님, 다행입니다.
   하상은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성호를 긋고는 짧게 기도했다. 기도가 끝나자 길쇠가 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뒤를 밟히지는 않았습니까요?
   하상은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가롤로, 베드로 모두 참 다행일세. 여기 오는 내내 가롤로의 아내와 누이를 위해 기도했네.
   하상의 위로에 석문은 쏟아지려는 울음을 참아내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은신처를 알아내기 위해 아내와 누나에게 끔찍한 형문이 벌어진다는 사실은 견딜 수 없었다. 체포된 지 일주일 만에 특히 누나 경련 베네딕타의 심문이 세 차례나 이어지고 장형이 150대가 넘어갔다고 했다. 오늘 낮에는 서양인 선교사의 은신처를 알아내기 위해 혹독한 주뢰형을 받다가 혼절했다고도 했다.
   하상을 향한 석문의 음성에는 눈물이 흥건했다.
   -어서 피신하셔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붙잡힐지 아무도 모릅니다. 여기도 안전치 못합니다.
   -가롤로, 그대만은 잡히면 안 되네. 주교님의 말씀을 잊지 마시게.
   -작년 말부터 체포된 교인들이 벌써 옥에 차고도 넘칩니다. 순교자들을 애써 찾아내 수습하고 기록하려 하나 지금은 처형장 접근도 어렵습니다.
   포도청의 색출과 형문의 강도가 절정에 달하자 사제와 교인들은 흩어져 몸을 깊숙이 숨길 수밖에 없었다. 은밀히 한성을 빠져나가기 전에 앵베르 주교는 하상과 석문을 불러 특별한 부탁을 남겼다. 박해의 기록을 소상히 남기고 특히 순교자 명부 작성에 심혈을 기울이라는 교지였다.
   -주교님과 신부님은 어떠신가?
   하상이 석문에게 묻자 길쇠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석문은 길쇠를 바라보며 조용히 일렀다.
   -바오로님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워주면 좋겠네만.
   길쇠는 그 말을 듣고도 선뜻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석문은 길쇠를 서늘히 바라봤다.
   -자네 괜찮나?
   그래도 길쇠가 꿈쩍을 하지 않자 하상은 석문에게 말했다.
   -굳이 이 야심한 밤에 그럴 필요가 있는가? 어차피 나중에 베드로도 다 알게 될 텐데……
   두 사람의 눈길이 모아지자 길쇠는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자리에서 뭉그적거리며 일어났다.
   -마침 소피도 마렵고, 잠깐 나갔다 오는 것도 좋겠습니다요.
   길쇠는 방을 나가서 짚신을 꿰고는 창호문 밖을 대여섯 걸음 벗어났다. 그러다가 뒤꿈치를 들고 되돌아와 잽싸게 벽에 기대어 귀를 방문 쪽으로 향했다.
   석문은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의 거처와 근황을 하상에게 설명했다. 길쇠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서양인 선교사를 숨기는 교인들의 신출귀몰한 재주는 노련한 기찰포교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아무리 기민한 작전을 써도 허탕을 치기 십상이고, 간신히 몇몇 교인을 잡아들여 살을 저미고 뼈를 바수고 주리를 틀어서 비선(秘線)의 실마리를 쥐어도 거미줄처럼 끊기기 일쑤였다.
   길쇠가 장지문을 열고 들어서자 심지가 짧아진 등잔의 불빛이 파르르 떨렸다. 바닥과 벽에 드리운 하상과 석문의 그림자가 점멸했다. 하상은 처음 앉았던 의연한 자세 그대로 입을 열었다.
   -나는 때가 된 듯하네. 가롤로는 부디 살아남아 일기를 완성하시게.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것은 이제 그대 손에 달렸네.
   석문은 애써 침착하려 했으나 끝내 하상을 향해 두 팔을 뻗으며 애원했다. 석문의 음성에는 눈물이 흘러넘쳤다.
   -그런 약한 말씀이 당키나 합니까? 하실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흔들리십니까? 바오로 님께 조선교회의 내일이 달려있습니다.
   하상은 품에서 일기책 한 권을 꺼내어 서안에 올려놓았다.
   -이것이 내가 지금까지 기록한 것일세. 자네 일기에 합치도록 하게.
   석문이 제발 일기책을 거두라는 듯 입을 열려고 하자, 하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가롤로, 만일을 대비해 소지하게나.
   마당에서 석문은 하상을 배웅하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허리를 편 뒤에도 대문을 나서는 하상의 뒷모습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석문은 누구보다 그의 헌신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바오로는 스물두 살부터 동지사 행렬에 밀사(密使)로 파견되어 연경을 아홉 번이나 왕복하고, 명문가의 후손으로서 가장 미천한 말몰이꾼 노릇을 감내하며 한번 떠나면 반년씩 걸리는 풍찬노숙의 여정을 마다하지 않았다. 수없이 거치는 세관과 검문 속에서도 그는 품과 짐바리에 밀서와 성물을 고이 숨겨 전달했다.
   바오로가 처음 밀사로 떠날 때 기도한 것처럼 연경 교구로부터 조선 교구가 독립하고, 사제 청원이 실현되기까지 22년의 시간이 걸렸다. 유방제, 모방, 샤스탕 신부를 의주 변문(邊文)에서부터 인도하는 일에도 그는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앵베르 주교를 한성까지 모셔와 명실상부 조선 교구의 채비를 갖춘 것이 바로 작년이었다. 이 모든 위업은 바오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박해의 날선 칼날이 이제 간신히 정립한 조선 교구를 베어내려 했다.
   석문은 곁에 서 있는 길쇠에게 단단히 일렀다.
   -자네는 내 말을 명심하게. 아니, 순간을 살기보다 영원히 사는 천주의 말씀을 따르게.
   길쇠가 석문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하상을 따라서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한낮의 찌는 듯한 더위가 밀려가고 밤이 되자 서늘한 바람이 밀려왔다. 요란한 매미 떼의 울음 속에서 나뭇잎이 바람결에 수런거렸다. 석문은 혼자 남더라도 기어이 이 모든 일을 끝까지 기록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러려면 이 고단함과 굶주림을 끌어안고 다시 깜깜한 밤길을 뚫어 몇십리를 떠나야 했다.

   2.

   석문의 은신처를 나선 하상은 머리가 복잡했다. 길쇠가 소피를 보겠다고 등을 돌려 방을 나갈 때, 석문이 취한 행동은 경악스러웠다. 석문은 길쇠가 나가기 전과 똑같은 어조로 말을 이었으나, 왼손 검지 끝으로 방문을 가리키고는 관자놀이를 빠르게 짚었다. 길쇠가 ‘간자(間者)’로 의심된다는 암호였다. 하상은 오른손으로 소매를 매만졌다. 즉시 이곳을 떠나라는 뜻이었다. 석문도 하상의 눈을 간곡히 바라보며 소매를 매만졌다.
   그러나 하상은 더는 떠날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와 형이 신유교난에 참수되던 일곱 살 이후로 마흔다섯이 된 지금까지 떠돈 삶이 새삼 고단했다. 연경을 아홉 차례 다녀오고, 국경의 변문을 세 차례 갔다 왔다. 직접 가지 못할 때는 밀사를 보내어 다녀왔다. 그렇게 떠나지 않고는 자신이 기도하는 세상을 이곳에 당겨올 수 없던 시절이었다.
   하상의 뒤를 멀찍이 따르는 길쇠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석문은 하상의 피신을 적극적으로 도우라고 지시했다. 하상의 피신 과정에서 최악의 경우 누군가 체포된다면 반드시 하상은 아니어야 한다고도 했다. 석문은 그 뒤를 말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대신 잡혀 들어가 형문을 받는 동안 하상이 멀리 달아나야만 조선 천주교가 부활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자신이 포청에 잡혀가고 하상을 놓치는 건 목숨을 내놓은 일과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죽을 목숨 이대로 하상을 때려눕히고 결박하여 포청에 넘길 것인가? 그러면 교회에서 자신의 신분이야 탄로되겠지만 사학 괴수를 잡은 공로가 클 것이다. 이대로 돌아가 석문을 처리할 것인가? 석문은 성도들의 기록을 가지고 있으니 교계의 망을 한번에 훑을 수도 있을 것이다. 둘 중 하나를 처리할 것인가? 둘 모두를 처리할 것인가?
   사흘 전 이슥한 밤, 우포도청의 박태천 종사관을 주막에서 만났을 때, 종사관은 칼집 끝으로 길쇠의 잠방이를 쓱 걷어 올렸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칼집이 길쇠의 명치를 쑤시고 들어왔다.
   -아이쿠…… 나으리……
   급작스런 일격에 길쇠는 몸이 공벌레처럼 오그라들며 숨이 콱 막혔다. 간신히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자 종사관은 날카롭게 길쇠의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이놈아, 흉내일랑 작작 좀 내거라. 네 꼴이 진짜 사학쟁이가 아니더냐?
   자신도 모르는 새 길쇠의 양 무릎에는 굳은살이 박여있었다. 포졸들은 십자가나 묵주, 기도문, 성화, 성경 따위의 증좌를 찾지 못하면 저들의 무릎부터 들췄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습관 탓에 그곳이 비교도와 달랐다. 이번엔 칼집이 길쇠의 정강이를 무겁게 후려쳤다. 길쇠는 눈을 질끈 감고 신음을 삭이며 손으로 정강이를 움켜쥐었다.
   -나으리, 잘못했습니다요, 나으리!
   그러면 안 되는데도 길쇠는 교인들 틈에 끼어 교리를 배우고 경문을 읽고 기도를 하는 동안 마음이 평안했다. 그러면 안 되는데도 말씀을 듣고 찬송을 하고 성호를 긋는 동안 자꾸 눈물이 났다. 아버지여, 용서하소서, 천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성모여, 하례하나이다, 하고 부를 때면 놀라운 신통력처럼 살이의 곤궁함이 사라졌다.
   -네놈이 맹서와 약조를 누구랑 했는지 벌써 잊은 게냐? 나와 했고 포도대장과 했고 우의정 영감과 했고 대왕대비 마마와 한 것이다. 그걸 잊다니 죽고 싶은 게로구나.
   길쇠는 무릎을 꿇고 몸을 말아서 두 손을 모았다. 심지어 아버지여, 천주여, 마리아여, 간절히 여러 번 부르면 어디선가 위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잘못해도 매질하지 않고 질타하지 않으며 조건을 달지 않는 누군가가 따뜻하게 다독이는 응답이 있었다.
   -똑똑히 들어라. 이번 일은 전처럼 사학죄인 몇을 발고하는 일이 아니다. 이 조선에 양이들을 잠입시키고 외국함대를 불러들이는 모반부도(謀叛不道) 도당의 수괴를 처단하는 일이다. 네놈이 정녕 이 나라가 저들에게 짓밟히길 원하는 것이냐!
   그렇게 기도하면 곧 이루어질 듯한 행복감이 들었다. 전지전능한 그분이 곧 그날을 예비해주실 것 같았다. 설령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천주께 범사를 맡기면 마음이 가볍고 잠이 잘 왔다.
   -길쇠야, 이번 일을 망치면 너부터 죽인다. 네가 망치면 나도 망치고, 포도대장, 우의정 영감, 대왕대비 마마께까지 온전치 못한 일이 미친다. 네놈의 아내야 그렇다 쳐도 잘 키운 큰딸을 관기로 보내기엔 여간 아깝지 않느냐. 두 아들도 노비가 되면 평생 애비를 원망하지 않겠냐.
   고개를 들어 종사관을 올려다보는 길쇠의 눈에 실핏줄이 돋고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종사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엎드린 길쇠 앞에 엽전 뭉치를 떨어뜨렸다.
   -대역죄인을 잡아넣는 공을 세울 기회가 너 같은 놈에게 다시 올 성싶으냐. 지난 몇 년 사학쟁이 놀이가 싫증 날 법도 한데.
   길쇠는 손을 뻗어 돈을 움켜쥐며 생각했다. 어째서 내 삶은 밀고와 배신으로서만 연명이 가능한가. 이 밀고와 배신으로 얻은 삶을 연장하려면 얼마나 더 비릿한 밀고와 배신을 껴안아야만 하는가.
   귀가 먹을 만큼 요란하던 매미 떼의 울음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시에 멈췄다. 7월의 나뭇잎은 물기를 머금어 무겁고 느리게 너울거렸다. 하상은 아까부터 누군가 뒤를 따라오는 것을 알았다. 하상은 돌아보며 말했다.
   -어서 옆으로 오시게. 이리 와서 함께 걷세나.
   6척 장신의 사내가 가까이 다가와 모습을 드러냈다.
   -소인이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요.
   -밤바람이 참 좋네.
   둘은 말없이 달 밝은 여름밤의 산길을 걸었다. 하상과 길쇠는 여러 번 황해도 사리원과 의주 변문까지 동행했고, 지역 교인 탐방을 갈 때도 함께 했다. 길쇠는 힘이 좋고 몸이 날래서 하상을 위기에서 구한 적도 여러 번이었고 서양인 선교사들을 보호하는 일에도 적격이었다. 관군의 잠복을 따돌리고 첩경을 통하여 빠져나가는 길의 선두에는 늘 길쇠가 있었다.
   하상은 길쇠의 나이를 쉽게 가늠했다. 자신보다 열 살이 적으니 서른다섯 살이었다.
   -아이가 셋이던가? 지난번 보니 큰딸이 아리땁게 컸더군. 아들 둘은 딱 장군감에다가.
   -큰애는 바느질 솜씨가 좋고 두 아들놈은 밥을 많이 먹습니다요.
   -그게 복일세. 애가 아무리 많이 먹어도 어디 자네 먹성 따라가겠는가.
   둘은 한적하게 걸으며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고는 곧 아무 말 없이 걸었다. 발길은 어느새 갈림길에 이르렀다. 하상은 곧바로 가고, 길쇠는 다리를 건너 둘러가야 했다. 물이 불어서 개울물 소리가 시원했다.

   3.

   하상은 길쇠를 마주 보았다. 둘의 나이는 십년 차이가 났지만 하상은 오년 젊어 보이고 길쇠는 오년 늙어 보여서 동갑내기로 보였다. 주름과 표정, 말씨와 체취 등이 달랐으나 키와 덩치가 비슷하여 새 신도들은 곧잘 혼동했다. 하상을 길쇠로 보는 이는 없었지만, 길쇠는 간혹 하상으로 오인됐다. 특히 패랭이 쓴 모습을 뒤에서 보면 분간이 어려웠다.
   길쇠는 하상의 넓은 어깨와 환한 이마와 맑은 눈빛과 단정한 입술을 마주했다. 대대로 사대부 집안의 옥골선풍(玉骨仙風)이었다. 하상은 길쇠의 얼굴을 새삼 유심히 살폈다. 눈은 살아있지만 그 빛이 어지러워서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었다. 전부터 하상은 생각했다. 길쇠의 어미아비 아래서 자랐다면 자신도 길쇠가 되었을 것이고, 길쇠가 자신의 집에서 성장했다면 그도 내가 되었으리라고.
   아, 석문의 말대로 길쇠는 정녕 간자란 말인가? 이상하게 빛나는 길쇠의 저 눈은 정녕 염탐의 눈이란 말인가……
   아니다. 그의 눈빛과 내 눈빛이 다를 것도 없다. 어떤 열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것을 숨기고 싶지만 끝내 숨기지 못하고 들키고 마는.
   -바오로 님, 계속 가시지요. 이슥한 밤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닐세. 자네가 든든하기야 하지만, 내 곁에는 천주님이 계시잖은가? 이만하면 됐네.
   -가롤로 님께서 제가 할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요.
   하상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자네 처와 아이들이 기다리겠네. 어서 가보게.
   -아닙니다요. 가롤로 님께서 제게 몇 번이나 단단히 이르시기를……
   하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부질없는 짓일세. 천주께서 계획하신 일을 우리가 그렇게 억지로 고쳐서는 도리어 화만 커지네. 이루어질 일은 이루어지고 벌어질 일은 벌어지겠지.
   그 말을 듣자 길쇠는 안의 어딘가 쩌릿하며 목이 콱 메었다. 하상은 길쇠의 두 손을 잠시 잡았다가 놓았다.
   -그럼 나는 이쪽으로 가겠네. 자네는 저쪽으로 가야지? 그동안 고마웠네.
   하상은 가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길쇠가 못 박힌 듯 서서 저 너머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하상을 지켜보는데 풀숲이 약간 들썩였다. 길쇠는 본능적으로 몸을 낮춰 주위를 살폈다. 혼자 남았다는 사실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몇 주 전부터 자신에게 감시의 눈이 붙어 포도청으로 일거수일투족이 보고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교회 쪽에서도 체포되는 신도수가 늘수록 유다를 색출하자는 긴장이 팽배했다.
   길쇠는 감시자를 의식하여 빨리 뛰었다. 넓은 개천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고 사는 마을에 가까워져서야 걸음을 늦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집의 사립문 너머로 방의 호롱 불빛이 새어 나왔다. 아내와 큰딸이 여전히 바느질을 하는 게 분명했다. 두 아들은 잠이 든 모양이었다.
   어제와 다름없는 이 풍경이 새삼 미쁘게 여겨졌다. 야소가 물 위를 걷는 게 기적이 아니라 길쇠에게는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게 기적이고 가족이 그저 먹고 자는 이 일상을 지키는 게 기적이었다. 서른다섯을 먹도록 힘써 이룩한 것이 겨우 식구들이 들어찬 이 방 두 칸의 초가 풍경이었다.
   사립을 열고 들어가서도 마당에 선 길쇠는 선뜻 마루를 딛고 방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길쇠는 자기도 모르게 흙바닥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리고 성호를 긋고는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았다.

   천주경을 외우는 길쇠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선택을 해도 죽음뿐이고 저런 선택을 해도 죽음을 피할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살길과 죽을 길의 경계가 희미했다.



   4.

   집으로 돌아온 하상은 어머니 류소사 체칠리아와 동생 정혜 엘리사벳에게 인사를 했다. 류 씨와 정혜는 하상이 돌아오자 성호를 긋고 안도하며 이부자리를 폈다. 하상은 물을 받아 몸을 씻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가장 좋은 나들이옷으로 갈아입었다.
   한동안 뜸했던 천주교도 체포는 한 해 전 연말부터 다시 불이 붙었다. 이번 기해(己亥)년 3월 우의정 이지연이 순원왕후의 재가를 받은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이 떨어지자 불에 기름을 끼얹듯 활활 타올랐다. 체포된 교도들은 매질과 고문을 겪고 배교하거나 참수되었다. 배교자들 대부분은 장독(杖毒)으로 병신이 되거나 죽고 말았다.
   하상은 언제 끌려갈지 모를 상황에서 『상재상서(上宰相書)』를 고쳐 쓰고 또 고쳐 썼다. 집을 나설 때뿐만 아니라 집에 머물 때에도 문득 두려워 소스라치게 주위를 둘러보는 일이 잦았다. 하상이 두려운 것은 잡혀가는 것이 아니라 이 글을 완성하지 못하고 잡혀가는 것이었다.
   서안 앞에 앉은 하상은 등잔의 심지를 길게 돋우었다. 완성한 『상재상서』를 펼쳐 처음부터 읽었다. 3,400자 분량의 글은 천주교에 유독 적대적인 재상 이지연 앞에 올리는 호소문이었다. 기본교리, 호교론(護敎論), 신교(信敎)의 자유를 피력한 세 부분을 하상은 꼼꼼히 살폈다. 유교로 천주교를 보호하고 천주교로 유교를 보강함이 가능하며, 이 둘은 하늘을 근본 삼아 백성 구제에 서로 부합하니 박해를 거둬달라는 요지였다.
   이제껏 수백 번 읽은 문장을 끝까지 다시 읽은 하상은 글을 고이 가슴 안에 넣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깨어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하상은 숨겨둔 십자가를 서안 위에 세웠다. 묵주를 꺼내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하상은 성호경을 외며 손으로 이마와 가슴을 짚었다. 종도신경을 외우고 천주경을 외우고 성모송을 세 번 읊었다. 그리고 영광송을 외웠다.
   광야가 펼쳐지고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스물두 살부터 밀사로 파견되어 국경의 겨울을 건너던 시절, 동지사행 관리들은 짐승 털을 덧댄 천막에서 불을 피우고 잤지만 마부들은 눈 덮인 들판에서 이불을 두르고 서로 몸을 기대어 잤다. 아침이면 몇은 그대로 얼어 죽어 움직이지 않았다. 꽝꽝 언 땅을 간신히 삽으로 찍어 그들을 묻고 떠날 때면 속으로 울부짖곤 했다.
   -천주여, 이 낮은 자를 통하여 무엇에 쓰시려 하십니까? 저는 기꺼이 삽 한 자루가 되겠습니다.
   외국인 사제들을 청(淸)의 변문에서 한성까지 수문과 산길을 통해서 인도한 일은 첩보전을 방불케 했다. 신부와 주교를 모셔서 독립교구로서의 기틀을 다지고, 조선인 신부 양성을 위해 세 명의 후보를 선발하여 마카오 신학교로 보냈다. 3년 전 파리외방전교회 모방 신부 입국 당시 6천 명이 안 되던 교인 수는 2년 만에 9천여 명으로 팽창했다.
   -천주여, 저희를 보우하사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눈보라 속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신유교난 이후 38년 만에 이룩한 소명의 실천이었다. 이러한 감격의 기도를 올리던 나날도 잠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은 대대적인 박해로 인해 낱낱이 바스러지고 흩어지는 중이었다. 성혼조차 포기하고 어렵게 쌓아 올린 세월에 비해 허물어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아버지, 저는 거의 다 왔다고 믿었는데, 아직 더 가야 하나 봅니다. 그런데 이번엔 더는 갈 수가 없을 듯합니다. 이제 제가 갈 수 있는 곳은 아버지의 품뿐입니다. 일곱 살에 처음 어머니, 누이와 감옥에 갇힌 이후 세인들의 비난, 협박, 멸시, 조소, 학대를 받으며 유랑한 삶이 몹시 고단합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저들이 살점을 날카롭게 저미고 뼈를 내리쳐 바수고 온몸을 뒤틀어 기름을 짜내도 후회하지 않게 하소서.
   묵주가 몇 바퀴를 돌자 날이 벌써 밝아왔다. 담장 밖에서 다급한 말발굽 소리와 일사불란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대문이 강한 힘에 의해 벌컥 열렸다. 낮고 단호한 구령과 병장기의 금속성이 사방에서 들렸다.
   -대역죄인 사학 괴수 정하상은 내려와 령을 따르라!”
   어머니가 마당을 내려서며 관군에게 응대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하상은 천주경을 마지막으로 외웠다.
   -금일여아(今日與我) 아일용냥(我日用糧) 이면아채(而免我債) 여아역면부아채자(如我亦免負我債者) 우불아허함어유감(又不我許陷於誘感) 내구아어흉악(乃求我於凶惡)
   단정히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하상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아버지, 지금은 힘없이 끌려가도 곧 다가올 당신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썩는 한 알의 밀알이 되게 하소서! 내구아어흉악(乃求我於凶惡)! 아믕(亞孟)!
   창칼을 철컥거리며 군관과 포졸의 무리가 장지문을 부수며 들이닥치자 등잔의 불이 훅, 꺼졌다.

해이수

서울에서 북경까지 눈길을 아홉 번 걸어서 왕복하며 그는 무엇을 빌었던가? 저 너머의 세계를 엿본 자는 왜 목숨을 지불해야 하는가? 명백컨대, 이 글은 소설이다. 몇몇 등장인물의 이름은 실존했으나 허구를 입으면서 그 이름의 캐릭터는 실존과 멀어졌다. 의심컨대, 소설은 저 너머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가?

2018/08/28
9호